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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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학터치 2.0'을 펴낸 손민호 기자는 자신의 책에서 소설가 천명관을 두고 외계인임이 확실하다고 못박고 있다. 그의 수상한 이력과 기행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지만, '고래'라는 낯선 텍스트를 들고 나와 소설이라고 우기며, 소설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점에서 외계인이라는 주장은 나름 그럴 듯 하다. 그 만큼 '고래'는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후부터 한국 문단의 지형 변화를 운운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제작이다.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고래'는 하나의 큰 도전이다. '문학터치 2.0'에서 저자는 '고래'에는 '설화, 기담, 민담, 전설, 신파극, 무협지, 영화, 만화, 판타지, 로맨스, 그러니까 이야기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제반의 것이 깡그리 몽땅 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 만큼 많은 색깔을 가지고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뛰어난 수작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나 소설은 그 모든 갈래를 깡그리 담아내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적당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통해 일정한 구조 안에 적절하게 배치해 놓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까 천명관의 '고래'는 분명 풍성한 이야기이기는 하되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무엇인가가 있다.

무릇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지만 재미있다고 다는 아니다. 소설 속에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고래'는 분명히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이야기 이상의 것이 빠져 있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킨다. 특히 인물의 흥망성쇠가 이루어지는 가상의 공간 '평대'는 '마콘도'와 판박이다. 마콘도와 마찬가지로 평대는 철도의 건설로 인해 급속도로 문명화되는 공간, 문명화와 함께 고독이 시작되는 공간, 마침내 잊혀지고 마는 신화적인 공간이다.  이 밖에도 '고래'는 시간을 마구 뛰어 넘는 속도감 있는 전개, 현실의 공간에서 살짝 비켜난 듯한 환상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능청스럽게 늘어 놓는 뻔뻔스러움 등 많은 부분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과 유사하다. 또 '고래'는 '백년 동안의 고독'만큼이나 흡인력 있고 재미있다. 그러나 '고래'에는 마르케스의 소설이 함의하고 있는 인류와 역사에 대한 치밀한 고민의 흔적이 없다. 술술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가 닿는 곳이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분명히 재미는 있으나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황당한 꿈 한 편을 꾸고 일어난 듯한 멍한 기분이다. 소설을 읽은 감동과 오락 영화를 본 후의 감동은 아무래도 같을 수 없는 법이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고래'는 확실히 재미있다. '고래'가 불쾌하다면 소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음산한 분위기와 비상식적인 인물들이 나에게는 아직 이질적인 까닭이다. 고래는 불친절하다. 어딘가 거북하고 불쾌하다. 이물질이 몸을 침투한 것과 같은 종류의 저항감이 든다. 이는 그로테스크한 소설 속 현실에 기인한다. 왜 국밥집 노파는 그리 흉측한 외모를 가져야만 하고, 금복은 왜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고민을 해야만 하며, 춘희의 순수한 세계는 왜 악랄한 수감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짓밟혀야만 하는가. 소설 속에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연한 일들이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이처럼 소설 속에서 느끼는 기묘한 이질감은 독서를 불편하게 만든다.

'고래'는 눅눅하고 그로테스크한 기운 때문에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감은 아니지만 이런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시도는 분명히 반갑다. 특히 한국 전통서사문학의 영향을 받은 듯한 뛰어난 입담과 유머는 감탄할만하다. 소설을 읽노라면 설화와 같은 구비문학의 구연을 듣는 것 마냥 흥겹다. 천명관은 전기수(이야기를 들려주고 돈을 받는 사람)와 같이 이야기의 맺고 끊는 부분을 적절히 조절하며 독자를 애태운다. 어떤 부분에 이르러서는 사설이 무한히 확장되며 리듬감마저 부여한다.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고래'는 기존에 찾아보기 힘든 소설이지만 이런 소설도 나와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천명관이 다른 소재를 들고 나와 또 능청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하면 기꺼이 지갑을 열 만큼.

천명관은 소설 속 인물중 하나인 약장수의 청산유수같은 입담을 두고 '구라의 법칙'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 '구라의 법칙'을 가장 잘 구사하는 것은 아마도 약장수가 아닌 작가 자신이라 할 만하다. '고래'를 소설로 인정해야 한다면 그것이 철저한 허구에 기대고 있다는 점 하나 때문이다. 이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허구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곧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사실 '고래' 속에는 근대 문학 이전에만 허용되었던 우연성에 기댄 비논리적인 사건 전개가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경우에는 '허구'라고 하기보다 '구라'라고 하는 것이 어쩐지 더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천명관은 '고래'를 통해 소설은 어차피 '구라'가 아니겠느냐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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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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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당신 인생 최고의 책이 바뀔 것이다.   

책의 띠지에 이렇게 적혀 있지 않았더라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하 '오스카 와오')'을 읽은 내 감동은 단연코 더 컸을 것이다. 무려 인생 최고의 책이 바뀐다는 기대감은 책을 읽는 내내 그 '최고'를 선사해 줄 한 방을 끊임없이 기다리게 했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내 일생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는 '분노의 포도(존 스타인벡)'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어린 순간을 재현하기는 커녕 흉내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오히려 실망해야 했다. 좋은 소설에 대한 과장스러운 찬사는 작품 그 자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데 때로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오스카 와오'를 읽으면서 산만하고 불편한 느낌만을 받았을 사람도 있고,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깊은 감동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인생 최고의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선입견과 지나친 기대감이 상당히 방해를 하기도 했지만 '오스카 와오'는 꽤 좋은 소설이다. 엉뚱하고 어딘가 뒤틀린 인물들이 황당한 사건들을 벌이고 다니지만, 그 낯선 삶 속에서 문득문득 나와 내 주위의 일상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책의 제목만 보고 판단한다면 주인공의 무척 특별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짐작할지 모른다. 물론 특별하다는 데는 뛰어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짐작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오스카의 삶은 특별하다기보다 오히려 흔하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특별하다는 것은 흔하다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인다. 모든 삶은 어느정도는 특별하고 어느정도는 흔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오스카의 삶은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오스카는 SF 오타쿠에 매우 내성적이면서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만을 갈구하는 꼴통이다. 그의 외모는 그 꼴통스런 성격과 잘 어울리게 아름답지 않은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모든 형용사를 다 갖다 붙인 듯 형편없는 외모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형용사 중 한두 개쯤 붙지 않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거나 애정을 갈구하며 멋진 이성과의 데이트 한 번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오스카와 같은 '꼴통'은 널리고 널렸다. 혹 아니라고 발뺌하는 사람이라면 유니오르는 어떨까. 바람둥이에 처세에 능하면서 진실한 면도 가지고 있는 인물. 아니면 갑자기 삶에 대해 진저리를 내며 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롤라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과 닮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쉽게 공감과 동정을 유발한다.

당연히 오스카의 삶이 평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스카의 삶은 비록 짧지만 위대했다고 할 수 있다. 숨은 서술자 역할을 하던 유니오르가 작품 속의 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 시점에서 오스카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오스카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운명을 자각하고 절망에 빠지긴 하지만,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운명적인 외로움 속에서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해낸다. 저돌적이고 무모한 시도 끝에 천하의 꼴통은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루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오스카 와오의 놀라운 삶이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저주를 보란듯이 무시해 버리고 일생을 통해 바라마지 않던,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쉬운 '그 일'을 어렵사리 이루어 낸 오스카의 집념이야말로 참된 용기이며 진정한 삶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오스카의 그 위대한 삶은 마침내 유니오르를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나라의 모든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독재자로부터 딸을 지키다가 몰락해버린 아벨라르, 갱스터를 사랑하게 된 대가로 사탕수수밭에서 죽도록 맞은 벨리, 엄마의 운명을 답습하여 경찰의 아내가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가로 역시 사탕수수밭에서 죽도록 맞은 오스카. 이들의 대를 이은 억세게 재수없는 운명은 실상 도미니카 공화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어두운 역사와 관계를 맺는다. 뚜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소설을 읽다보면 인류의 역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놀랍도록 유사한 면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스카 와오'도 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압제와 억압의 시대의 한 장면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트루히요라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도미니카의 오래지 않은 과거와 억압의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현재를 두루 오가며 진행된다. 아벨라르, 벨리, 오스카로 이어지는 고된 삶의 연원을 따지고 들면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이른다. 즉 이 소설은 어두운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깔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된 삶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오스카 와오'가 소설로서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푸쿠(저주)라는 환상으로 버무림으로써 소설적인 재미를 확장시킨 것에 있다. 어두운 역사의 일면을 심각하게 묘사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에둘러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오'는 기본 서사의 줄기만 따라 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 안에 배열된 메타포와 상징, 세태 풍자의 목소리들을 모두 읽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배경지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특정한 지역의 문화코드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제 3세계의 근대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필요로하는가 하면 낯선 언어와 번역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에 따른 정확한 뉘앙스를 포착해 내기를 요구한다. 낯선 언어들을 혼용하여 쏟아내는 작가의 의도는 문화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는 100퍼센트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에 부딪힌다. 다행히도 많은 주석들이 실려 있어 책을 이해하는데 최소한의 실마리를 던져 주기는 하지만, 정확한 이해를 위해 가독성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책과 각주를 여러번 읽으며 작가의 숨은 의도마저 캐치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와오'는 여러 면에서 애써 고상한 척 하는 소설들과는 거리가 멀다. 투박한 말투,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속어들, 낯선 서술방식 등. 그래서 소설을 읽은 뒷맛이 썩 상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석상의 잘 세공되어 할로겐 불빛 아래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흙덩이 속에서 발견해 낸 원석이 때로는 더 큰 기쁨을 줄 때가 있지 않는가. '오스카 와오'는 그런 원석처럼 투박하고 신선한 매력을 뽐내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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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 2판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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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은 중국 작가 위화의 첫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허삼관 매혈기', '인생'과 함께 유년-장년-노년으로 이어지는 '인생 3부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랑비 속의 외침'은 구성, 인물, 시점 등 여러 측면에서 위의 두 작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전지적 시점을 활용해 한 인물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추보식 구성을 포기하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삽화적으로 나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성은 유년기 기억의 참모습을 복원하는데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은 홍차와 마들렌의 달콤함처럼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환멸의 빛을 띠기도 한다. 이런 기억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나쁜 기억도 시간의 옷을 입으면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쑨광린이 '남문'이라는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들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소설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기억의 단편들을 순서와 관계없이 늘어놓고 있다. 이는 실제 기억의 모습과도 같다. 기억은 구체적인 형태가 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뒤죽박죽 나열된 기억들은 쑨광린의 고향인 '남문'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수렴된다. 여기에는 남문을 벗어나 쑨당에서 지낸 5년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5년의 끝은 남문으로의 귀향으로 종결되므로 결국 모든 기억이 남문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남문에서의 기억은 쑤위와의 우정을 제외하고는 환멸스러운 기억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비교적 행복했던 쑨당에서의 기억은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쑨당에서의 기억의 끝은 남문으로의 회귀이다. 하필 환멸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보인다. 기억의 출발점인 고향은 아무리 혐오해도 결국 귀소본능에 따라 되돌아오고야 마는 삶의 원천인 것이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어른이 된 '나'가 서술자가 되어 유년 시절을 추억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생의 어두운 면까지 독자에게 전해준다. 그 기억들은 쑨광린의 고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심리에 대한 해명이다. 5년의 공백으로 가족 구성원에서 겉도는 쑨광린, 도시의 삶을 동경했으나 남문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쑨광핑, 어이없는 사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쑨광밍, 목숨이 쓸데 없이 길어 가족들에게 눈치를 보며 기식하는 할아버지 쑨유위안 등. 가족구성원들의 지난한 삶의 모습은 고향의 연못가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더불어 고향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형성한다.     

펑위칭이나 루루의 이야기는 '요람기(오영수)'처럼 기억의 아련한 측면을 건드리기도 한다. 쑤위와의 우정으로 위안받았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연애에 얽힌 이야기는 환멸보다는 애틋함을 자아낸다. 특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그린 부분은 위화 특유의 해학적 문체와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인간과 삶 사이의 질긴 인연에 대해, 피할 수 없는 혈연의 고리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단연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을 자극하는 이러한 에피소드는 위화의 이후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위화 소설의 특징을 이루기도 한다. 

'가랑비 속의 외침'은 위화의 첫 장편소설임에도 가장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다. '허삼관 매혈기'나 '인생'을 먼저 접했던 사람들은 내면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서사적 골격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이후 작품으로 이어지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해준다. 풍자와 해학, 휴머니즘, 중국 근현대사와 세태에 관한 우회적 성찰 등. 때문에 위화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할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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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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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에 자신을 맞추어 가며 어떻게든 인간 속에 섞여 드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 인간만큼이나 복잡한 존재는 없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보통사람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어떤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어 가며 사는 그런 인간군상들이다. 

'인간실격'은 요조라는 인물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세 편의 수기를 통해 그려지는 요조의 삶은 특별하다. 인간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요조는 자신의 방식대로 인간 속에 편입된다. 그는 처음에는 보통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맞추어 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만, 몇 번의 좌절로 인해 자신을 방치하기에 이르고 결국은 파멸로 치닫는다. 요조가 치러야 했던 삶의 대가는 요조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본원적인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요조의 타락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 환경에 의한 것이다. 상처받기 쉬운 자신의 여린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은 그 자신을 파멸에까지 몰고 간다. 그래서 요조의 타락은 악(惡)이라기보다는 위악에 가깝다. 파멸에 이르는 것은 요조이지만, 그를 파멸로 몰고 간 것은 호리키와 넙치를 비롯한 위선으로 똘똘 뭉친 주변 사람들이다. 순수한 영혼은 위악으로 포장을 해도 쉽게 다치기 마련이다.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들 틈에 섞이고 싶었던 요조의 바람은 그의 나약함과 불친절한 환경으로 인해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전혀 다른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이 실상 낯선 일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어느정도는 남에게 비춰지기 위한 '다른 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위선이든 위악이든 '다른 나'를 꾸민다는 것은 순수한 나의 의지보다는 인간이라는 보편률을 가장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 탓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많은 요소들이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살 기도는 요조가 인간으로서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인간실격'은 인간의 추악함을 속속들이 파헤칠 뿐 아니라, 인간의 파멸을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마음 편히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설의 행간에서 읽히는 인간의 나약함에는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만다. 서문에 등장하는 세 장의 사진은 인간실격자의 외견을 서술자의 눈을 통해 비춰보이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의 모습은 섬뜩하고 추하고 기묘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이 보통사람의 눈에 비춰지는 요조의 겉모습일 것이다. 서문에서 한 인물의 일생을 세 장의 사진을 통해 관조했다면, 세 편의 수기에서는 그 인물의 입을 통해 그 삶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 요조의 삶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요조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요조의 삶은 특별하기보다 일반적인 모습이 된다. 공감과 거리두기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동안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실격'은 수기의 형식으로 요조의 일생을 서술하고 서문과 후기를 앞뒤로 배치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수기'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실격'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작가의 생애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이루어진다. 수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를 비롯하여 허무와 좌절로 점철되어 있는 그의 일생은 요조의 삶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소설은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들추어내며 패배감에 젖어 있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역설적으로 위안을 가져다 주었다. 전후의 허무주의에 깊이 휩싸인 젊은이들에게 요조 혹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 해명은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져다 주며 지친 영혼을 보듬어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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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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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처절함과 비통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대개가 가난하고 비참하며 외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인생의 밝은 면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이 그런 경우이다. '자기 앞의 생'은 모모라는 한 회교도 소년이 바라보는 생의 일면을 그린 소설이다.   

모모가 살고 있는 벨빌은 유태인, 회교도인, 흑인 등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모모는 매춘부들에게서 태어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 아래 살고 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의 7층에서 아이들을 맡긴 매춘부들이 띄엄띄엄 보내주는 돈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다. 로자 아줌마와 어린 모모는 사회 속에서 소외된 처지이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모모는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자신의 처지나 형편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다. 어려워져가는 경제적 형편, 악화되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병, 냉소적인 인간의 이면까지도 그는 모두 파악한다. 그러나 모모는 그 어떤 상황도 바꿀 힘이 없는 무기력한 어린아이일 뿐이다.  인생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가진 모모는 생을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돌아가는 필름을 보며 행복한 환상에 젖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진정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게되는 것은 로자 아줌마에 의해서다. 부모가 없는 모모에게 로자 아줌마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모모는 병으로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의 모습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조금씩 커간다. 

모모가 발견한 생의 의미는 바로 사랑이다. 죽음을 앞둔 로자 아줌마를 두고 모모가 내린 결정은 그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식물인체로' 자기 곁에 오래 머물기보다 존엄성을 가지고 편안히 죽기를 원한다. 정말은 그 누구보다도 로자 아줌마가 살기를 바랬을 모모가 생명의 연장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사 앞에서 안락사를 요구하는 장면이 가슴 찡한 것은 모순된 감정 속에서 갈등하고 있을 모모의 심정이 제대로 전해져서일 것이다. 자기자신보다 남을 더욱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은 결국 모모에게 깊은 상실을 안겨준다. 로자 아줌마가 고통 없이 빨리 죽기를 바라면서 그 자신은 로자 아줌마를 떠나 보낼 수 없었던 어린 모모를 통해 우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이 충격적이면서 슬픈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이다.  

'자기 앞의 생'은 작품을 둘러싼 후일담이 작품자체만큼 흥미진진하다. 단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잘 알려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동일인이다. 로맹 가리는 이미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한 번 수상했지만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그 상을 받게 된다. 바로 '자기 앞의 생'을 통해서다. 로맹 가리는 살아 생전에 누구도 에밀 아자르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두 얼굴의 작가 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졸지에 우스꽝스러운 입장이 된 것은 잘난 척하는 평론가들이었다. 로맹 가리를 까내리면서 에밀 아자르를 입이 마르게 칭송하는 평론가들을 보고 로맹 가리는 무척이나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비로소 선입견 없이 자신의 문학 자체만을 평가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화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작가의 이름이 작품 판매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하나의 브랜드가 될 정도로 잘 팔리는 작가가 되면 간혹 아주 실망스러운 작품을 내 놓더라도 작가 이름에 묻혀 쉽사리 베스트셀러가 된다. 작가의 이름에 갇혀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은 작가 입장에서도 독자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 작가가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한다면? 안타깝게도 웬 무명작가의 작품을 기꺼이 출간하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을 것이다. 순전히 작품 자체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자기 앞의 생'의 경우처럼 작품 자체만으로 평가 받는 출판 풍토가 조성된다면 우리 문학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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