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간의 파리지앵 놀이
생갱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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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다녀온 사람에게, 파리는 언제나 낭만과 감성이 넘치는 도시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나에게도 파리의 추억은 있다. 그러나 파리에 대한 기억은 외로움과 쓸쓸함, 을씨년스러움으로 뒤범벅된 기억이다. 계획을 수정하여 서둘러 귀국해야 했던 상황이었으며, 겨울이었고, 아팠고, 가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의 풍경은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샹젤리제 거리는 활기넘치기보다 각자의 일로 바쁜 파리지앵들이 종종걸음으로 스쳐가는 곳일 뿐이었다. 파리의 마지막 밤 샤이요궁에서 불켜진 에펠탑을 보면서 문득 주위가 어두워졌음을 느꼈을 때 엄습해오던 외로움이 파리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그 때 느낀 외로움은 분명 밝은 날의 에펠탑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도 파리에서의 즐거움을 꿈꾸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작가가 파리에서의 한 달 동안의 여정을 풀어놓은 <30일간의 파리지앵 놀이>는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파리의 모습이 가득 담겨있다. 세느강, 에스프레소, 바게뜨, 미술관, 카페, 벼룩시장 등 파리하면 떠올릴 수 있는 각종 이미지들이 컬러풀한 일러스트로 표현되어 있다. 풍성한 일러스트와 함께 담백한 글로 직접 느낀 파리의 매력을 속속들이 전하고 있어 절로 여행본능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생갱은 파리를 떠올리는 영화와 음악을 들으면서 작성해온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실천하며, 스스로 ’제대로 충전’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행은 정말로 충전이다. 한 달 동안의 여행으로 일 년을 버틸 힘을 얻는다. 그런 여행이기에 가이드북의 추천리스트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자유롭게 즐기며 재충전을 하면 되는 것이다. 에펠탑, 몽마르트, 노트르담 사원, 라데팡스 등 파리 관광의 필수코스를 안내하는 책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남대문과 한강을 보았다고 서울을 다 본 것이 아니듯이, 에펠탑을 보았다고 파리를 전부 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런 유명 관광 포인트들은 파리의 일부일 뿐 파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파리지앵(-앤느)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현지인 모드 여행’을 추구하는 저자의 여행스타일이 나와 꼭 맞아 더욱 공감이 간다.     

<30일간의 파리지앵 놀이>는 여행 가이드북이 아니지만 파리 여행의 커다란 틀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본격 에세이가 아니지만 체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페이지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경쾌한 일러스트일 것이다. 사진만으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파리에 대한 각종 이미지들이 일러스트를 통해 재해석되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는 책이다. 파리 여행의 동반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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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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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언 매큐언은 대단히 논리적인 작가다. 문학과 논리란 것은 썩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톤 체홉의 말을 떠올려 보라. "작품의 시작에 벽에 못이 박혀 있는 얘기가 나오면 작품 말미에서 주인공이 그 못에 목을 매게 되어 있다"라는. 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추려진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존재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는 불필요하거나 불명확한 장면이 없고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없다. 배경, 인물, 대사 무엇 하나 불필요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언 매큐언이 논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소설가 지망생 소녀의 깜찍한 상상력이 선량한 두 사람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사리분별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12세 소녀가 어른들의 운명 전부를 바꾸어 버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속죄>의 1부를 읽노라면,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과정에 자연히 수긍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지'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이 생겨나게 된 것에 모든 발단이 되는 이야기들이 불과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일임을 알았을 때에는 또 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 속에는 차츰차츰 옥죄어오는 긴장감이 있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흘리지 않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느리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인간 내면의 세밀한 심경 변화마저 예리하게 포착해내느라 이야기가 간혹 멈추기도 하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반복적으로 서술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흡인력은 상당한 데 반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흠이 있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1부의 느린 전개야말로 이 소설의 진정한 묘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인물 하나하나의 세밀한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사소한 우연이 만들어낸 비극을 개연성있게 풀어나간다.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생각의 흐름을 어찌나 정확하게 포착해 냈는지, 인간 심리에 깊이 있게 천착하는 작가정신이 이루어낸 성과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 두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까지의 길지 않은 순간을 세밀하게 그리며 결과보다 원인의 서술에 더욱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모든 현상은 외부의 상황 때문이라기보다 인간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결과만으로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분별할 수 없다. 지리한 심리 묘사의 과정 동안 이 소설은 절대선과 절대악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파멸시킨다면 그것을 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브리오니의 모든 행위는 선과 악의 아이러니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한다. 내가 무심코 행한 사소한 행동이 누군가에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진리에 눈 뜨게 한다.  

<속죄>는 한 사람의 지난한 속죄의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가슴아픈 러브스토리이다. 사랑을 확인한 순간 이별의 고통을 맛 봐야 했던 가슴 아픈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는 결말 부분에서 드러나는 작은 반전으로 인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단 하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브리오니의 속죄가 그토록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두 연인을 끈질기게 묶어 주었던 세실리아의 '기다릴게, 돌아와'라는 한 마디는 그 어떤 위대한 맹세보다도 더 큰 울림을 주며 소설 속 분위기 전체를 지배한다.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이언 매큐언은 <속죄>를 통해 또 한번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다. 영어권 작가로서 이언 매큐언이 그만큼 주목 받고 있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 명성만큼 그의 작품은 모두 일정 수준의 만족감을 준다. 그 중에서도 백미로 <속죄>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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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시간 동안의 남미 - 열정에 중독된 427일 동안의 남미 방랑기 시즌 one
박민우 지음 / 플럼북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를 하나만 대라면 대리만족의 추구일 것이다. 내가 직접 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돈, 시간, 체력, 집안의 눈치까지 생각하면 쉽사리 배낭을 꾸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니 책에서 '여기 무지 좋아'하는 자랑이 아니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괜스리 부럽고 설레는 것도 사실이어서 그 여행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자연히 여행 에세이에 손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주관적인 단상만을 한없이 늘어 놓아 독자의 동참을 원천봉쇄하는 자아도취성의 글들이 범람하는 탓에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는 찾기 어렵다.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란 어설픈 아포리즘이나 사진 따위로 지면을 온통 메우며 자신의 경험을 잔뜩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여정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여행지의 생생함과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그런 책을 말한다. 어느모로 봐도 개인의 체험에 대한 기념적 기록으로 남긴 듯한 인상을 주는 책들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것이지 잘 꾸며 놓은 남의 미니홈피를 구경하고 싶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박민우의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그런 내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여행 에세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오지 탐험을 늘 꿈꿔왔던 나에게도 남미는 그다지 흥미를 안겨 주지 못하던 지역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가장 요원한 지역이므로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1만시간 동안의 남미> 제 1권이 내 손에 들어온 뒤에도 나머지 두 권을 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덧 작가의 서툰 여행의 적극적인 동반자가 되어 다음 여정을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오래 전에 접했던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시리즈 이후 가장 흥미진진한 여행 에세이다. 

우선 예쁜 펜시 다이어리를 손에 쥔것 같은 가벼움 대신에 한 손 가득 느껴지는 묵직함이 책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한다. 적당할 정도의 사진과 충분한 활자로 이루어져 있어 내용을 보기도 전에 충실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내용은 더 만족스럽다.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남미라는 여행지에서 겪는 좌충우돌과 길 위에서의 단상, 여행지에 대한 넓은 식견 등을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스운가 하면 뭉클해지는 감동이 있고, 가벼운가 하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장점은 이 책이 매우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겪은 체험 자체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주체 못할 유머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래서 세 권이라는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재미있다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을 철저하게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다.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잘 드러난다. 여행지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과, 그것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할 것에 대한 초조감이 페이지마다 느껴진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지만 묘하게 나 자신의 기억을 오버랩시키는 진솔한 감정 묘사도 일품이다. 이 책은 나 자신에게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마저 쏙 들어가버린 경이로움, 밤차를 타고 떠나며 다시 되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센치해지던 기억, 여행 중 우연히 만난 동행자와 헤어질 때 코끝이 저릿하던 경험까지 생생하게 되살아 나게 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더 이상 젊음을 담보삼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꼭 남미로 떠나고 싶어진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흥분되는 일이니까.

유머러스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장, 웃음과 감동, 지성이 묻어나는 필력을 구사하는 작가이기에 차기작이 될 소설에도 큰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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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대회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 열정에 중독된 427일 동안의 남미 방랑기 시즌 one
박민우 지음 / 플럼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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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를 하나만 대라면 대리만족의 추구일 것이다. 내가 직접 갈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돈, 시간, 체력, 집안의 눈치까지 생각하면 쉽사리 배낭을 꾸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니 책에서 '여기 무지 좋아'하는 자랑이 아니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괜스리 부럽고 설레는 것도 사실이어서 그 여행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에 자연히 여행 에세이에 손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주관적인 단상만을 한없이 늘어 놓아 독자의 동참을 원천봉쇄하는 자아도취성의 글들이 범람하는 탓에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는 찾기 어렵다. 제대로 된 여행 에세이란 어설픈 아포리즘이나 사진 따위로 지면을 온통 메우며 자신의 경험을 잔뜩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여정을 진솔하게 기록하여 여행지의 생생함과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그런 책을 말한다. 어느모로 봐도 개인의 체험에 대한 기념적 기록으로 남긴 듯한 인상을 주는 책들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나는 책을 읽고 싶은 것이지 잘 꾸며 놓은 남의 미니홈피를 구경하고 싶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박민우의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그런 내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여행 에세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오지 탐험을 늘 꿈꿔왔던 나에게도 남미는 그다지 흥미를 안겨 주지 못하던 지역이다.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가장 요원한 지역이므로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1만시간 동안의 남미> 제 1권이 내 손에 들어온 뒤에도 나머지 두 권을 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덧 작가의 서툰 여행의 적극적인 동반자가 되어 다음 여정을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는 오래 전에 접했던 한비야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시리즈 이후 가장 흥미진진한 여행 에세이다.


우선 예쁜 펜시 다이어리를 손에 쥔것 같은 가벼움 대신에 한 손 가득 느껴지는 묵직함이 책에 대한 인상을 좋게 한다. 적당할 정도의 사진과 충분한 활자로 이루어져 있어 내용을 보기도 전에 충실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내용은 더 만족스럽다.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남미라는 여행지에서 겪는 좌충우돌과 길 위에서의 단상, 여행지에 대한 넓은 식견 등을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스운가 하면 뭉클해지는 감동이 있고, 가벼운가 하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장점은 이 책이 매우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겪은 체험 자체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주체 못할 유머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래서 세 권이라는 분량이 단숨에 읽힌다. 재미있다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을 철저하게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다. 자신의 체험을 독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잘 드러난다. 여행지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과, 그것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할 것에 대한 초조감이 페이지마다 느껴진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지만 묘하게 나 자신의 기억을 오버랩시키는 진솔한 감정 묘사도 일품이다. 이 책은 나 자신에게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사마저 쏙 들어가버린 경이로움, 밤차를 타고 떠나며 다시 되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센치해지던 기억, 여행 중 우연히 만난 동행자와 헤어질 때 코끝이 저릿하던 경험까지 생생하게 되살아 나게 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더 이상 젊음을 담보삼을 수 없게 되기 전에 꼭 남미로 떠나고 싶어진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흥분되는 일이니까.


유머러스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장, 웃음과 감동, 지성이 묻어나는 필력을 구사하는 작가이기에 차기작이 될 소설에도 큰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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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희망 2010-03-1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혹시 책 3권 다 판매하실 생각 없으신가요ㅠㅠㅠㅠ
완전 원합니다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010-3060-3604

깐짜나부리 2010-03-22 00:04   좋아요 0 | URL
재밌게 잘 읽었다는 리뷰에 책을 팔라는 댓글을 달다니요! 절대 팔 생각이 없구요, 아직 절판된 책이 아니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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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매체시대에 활자만 가지고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진정 뛰어난 소설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영상매체, 음악, 미술 등에 비하여 문학은 독자들의 보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때문에 진정으로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란 재미있는 영화나 아름다운 음악보다도 더 발견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그런 소설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글로 쓰여졌기에 더욱 특별한 그런 이야기이다. 책장 한 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가벼운 떨림이 느껴진다고 할까. 단조로운 서술 속에 환멸과 유머, 허무의 페이소스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거듭 혼란에 빠지지만, 그 혼란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게된다. 이 삼 부작의 독특한 서사구조는 그리하여 독자를 완벽히 장악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간의 고독> 세 편의 소설을 묶어서 일컫는 제목이다. 이는 역자에 의해 만들어진 제목이며, 삼 부작을 묶는 원제는 없다. 세 작품의 원제는 각각 '커다란 노트(Le Grand Cahier)', '증거(La preuve)', '세 번째 거짓말(Le Troisieme Mensonge)'이다. 1부와 2부는 원제목을 조금씩 바꾸면서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해주고 있어 큰 무리가 없지만, 3부는 철저하게 역자의 주관이 개입된 제목이다. 내용으로 보나 작가의 의도로 보나 3부작은 원제를 수정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제목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는 제목에서조차 소설을 읽는 열쇠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삼부작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따로 또 같이'이다. 각각의 작품은 따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독립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삼부작임을 의식하고 연달아 읽으면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따로 읽어도 좋고 같이 읽어도 좋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따로 읽었을 때와 연달아 읽었을 때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작품으로 보기보다 삼부작으로 생각하고 읽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이 삼부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되지만, 인물과 공간적 배경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다. 단순히 앞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뒤집기도 한다. 종국에 가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삼부작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아래부터 스포일러 주의
 

 이야기는 루카스와 클라우스라는 쌍둥이 형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1부에서는 '하나의 자아를 가진 두 개의 몸'이다가, 2부부터는 '두 개의 자아와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된다. 쌍둥이의 이별은 자아의 분리를 겪은 한 개인의 내면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럽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쌍둥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2부에서의 가정이다. 쌍둥이라는 설정은 완벽하게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놀라운 것은 쌍둥이가 아니라고쳐도 자아의 분열로 인한 상실감과 고통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인공이 쌍둥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은 언제나 변함 없다.

인물의 존재 못지 않게 서사 구조 자체도 혼란의 연속이다. 1부의 서사는 2부에 와서 어느정도 부정되고, 2부의 서사는 또 3부에 와서 완벽하게 부정된다. 노트 안에 적힌 이야기인 1부의 이야기는 과연 진실인가 허구인가, 2부가 또 다른 거짓말이라면 3부는 과연 진실인가. 이에 대한 실마리는 3부에서 서점의 여주인에게 털어놓는 클라우스(혹은 루카스)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 라는. 소설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짓말이 겹겹이 싸여있다. 우리는 소설이 허구임을 알지만 그것을 읽는 동안은 진실이라고 믿고 읽게된다. 때문에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다시 한 번 부정되었을 때 느끼는 혼란과 충격은 적지않다. 그래서 이 삼부작이 주는 여운은 여느 소설과 달리 특별한 것이다.

중층적인 거짓말로 이루어진 서사구조뿐 아니라 소설 속 몇몇 개별적인 장면들도 충격을 더해준다. 태연하게 어머니의 유골을 니스칠하여 다락방에 걸어 놓는다던가, 자신들을 성추행한 여자를 죽이기 위해 장작에 폭탄을 넣어 둔다던가, 아버지를 미끼삼아 국경을 넘는다던가 하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행위들이 속출한다. 이들이 더욱 잔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파행적인 행동들을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건조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윤리적 기준마저 흔들려 버리는 전쟁 시기의 혼란한 상황을 인물의 행위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결국 혼란기의 사회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절제된 문체로 밀도있게 형상화함으로써 환경으로 인해 붕괴된 도덕성마저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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