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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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말할 때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를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하는데,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독특한 역사관이 꽤 설득력 있었던 이유가 크다. '조롱할 줄 아는능력과 세상이 미쳤다는 생각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 앙드레 모로가 소설 초반에 귀족의 학정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에게 내뱉는 시니컬한 말들이 인상적이다. 그는 귀족정치가 끝나면 모두가 원하는 평등을 얻게되는 대신 금권정치가 시작될 것이며, 권력은 주체가 바뀔 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귀족에 의해 친구가 희생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시민 계급의 선봉이 되어 귀족의 학정을 고발하는 위대한 연설을 하며 혁명의 불을 당기는 데 앞장선다. 구체제를 붕괴시킨 위대한 공화주의자가 된 그는 소설의 말미에 다시 한 번 공화정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속마음을 드러낸다. 줄곧 귀족 혹은 공화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유지해 온 앙드레 모로를 통해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담론을 개인과 그가 처한 극히 개인적인 환경 속에서 바라보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패한 권력들이 장악한 구체제에 반한 시민들의 위대한 피의 승리로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선과 악은 경계는 뚜렷해진다. 혁명을 위대한 승리로 규정짓기 위해서 귀족들은 억압자로 그에 대항하는 혁명가는 영웅으로 묘사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담론 속에는 실상 앙시앵 레짐에 환멸을 느꼈던 귀족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군주에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하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는 세도있는 귀족의 상속인도 있고 시민의 영웅인 바스티유 죄수 출신 의사도 있다. 공포정치에 동조하는 혁명가도 있고, 광기어린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외국인도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음으로써 역사가 놓쳐버린 중요한 사실들을 되짚어준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는 에브레몽드 후작을 한 편에, 또 공화주의자 드파르주와 그의 부인을 그 반대 편에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부당한 과거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일련의 일들을 겪은 후 통쾌한 복수극으로 마무리된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플롯의 개연성을 완성해준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는 이처럼 편하고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에브레몽드 후작과 드파르주 사이에 루시, 마네트 박사 그리고 찰스 다네이와 같은 복잡한 인물들이 자리한다. 사랑과 가족애로 뭉쳐진 이들은 오로지 그 사랑을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 역사의 파도 속에서 원치 않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책을 읽노라면 마네트 박사와 루시, 찰스에게 닥친 고통이 에브레몽드 후작의 부도덕성이 불러온 과거의 비극적 사건 탓인지, 아니면 드파르주 부인의 비이성적인 복수심때문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게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 어느 한 쪽을 가해자로 단정짓기를 거부한다. 소설 속의 개개인 각각의 행동에는 모두 그나름대로의 당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그 각각의 당위가 충돌하는 지점에 프랑스 혁명이라는 배경을 배치해 두고 영리하게 활용한다. 그 자신이 귀족이거나 공화주의자인 인물들 뿐 아니라, 귀족의 자손이면서 평민의 편에 선 찰스 다네이도, 평민의 영웅이면서 귀족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마네트 박사도 그들로서는 마땅했던 행동들이 그 시대의 요구와 화합하지 못한 것이 이들에게 닥친 모든 시련의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도시 이야기>는 도식화된 역사적 담론을 뒤로 하고 인도주의적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개인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와중에도 작가는 인간의 순결한 정신에 줄곧 초점을 맞춘다. 로리의 조건없는 우정, 마네트 박사가 보여주는 용서, 루시와 찰스의 깊은 사랑이 혁명이라는 사회적 상황 이상으로 부각된다. 특히 소설은 카턴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랑과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숭고한 인간적 가치를 크게 강조한다. 부당한 학정과 지나친 증오에 비해 숭고한 사랑과 희생이 한 개인의 삶에 평생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큰지 작가는 카턴의 입을 빌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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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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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다양한 실험의 결과물이다. 현대소설은 그 중에서도 개인의 비극적 운명에 관심이 많다. 이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갈구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비극은 카타르시스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비극이 개인의 성격에 의해 초래되는 것일 때 독자는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에 비해 환경에 의해 초래된 비극은 절망과 무기력함을 가져다 준다. 그 환경은 대체로 외면하고 싶은 현실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도록 대체로 리얼리즘의 옷을 입고 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진 개인을 쉽게 패배시키는 환경으로 문학작품 속에서 수없이 변주되어 왔던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중국 문화대혁명같은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인간을 쉽게 무력화시킨다. 부커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인도 출신의 작가 로힌튼 미스트리의 대표작 <적절한 균형>도 불가항력의 환경에 의해 무너져버리는 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도인들의 모습은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나 여행잡지의 사진 속에서 흔히 보는 각종 동물들과 오물이 뒤섞인 비좁고 더러운 거리의 이미지를 완성시켜주는 배경정도로 여겨지기 쉽다. 로힌튼 미스트리는 그 더러운 거리 위를 바삐 걸어다니는 수많은 인간들 각각에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넣어 그 풍경화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 한 사람까지도 온전한 삶을 일구어가는 뚜렷한 존재로 묘사된다. <적절한 균형> 속 인물들은 불가촉 천민에 해당하는 차마르 카스트(무두장이), 힌디 문화 속에 섞여 자신들의 문화를 힘겹게 이어가는 이슬람교도들,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수민족 파르시 등으로 각각은 인도 사회의 다양한 인물군상을 대변한다. 소설은 이들 각자가 가진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속에서 인도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디라 간디의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하는 이 소설은 무력한 개인에게 미치는 불합리한 국가 권력의 폭력성을 하층민들의 시선에서 조명한다. 카스트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재봉기술을 배워 삶의 도약을 꿈꾸는 이시바와 옴은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온다. 운명의 한계에 순응하는 수많은 불가촉 천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모습은 존경스럽고 희망적이다. 파르시 공동체의 한 부유한 가문의 딸로 태어난 디나는 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을 차례대로 겪으면서 여성의 사회적 제약을 몸소 느끼게 된다. 보호해줄 남자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가부장적 관습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최후의 보호자인 오빠의 손을 벗어나 독립을 꾀한다. 한편 국경 주변의 한적한 곳에서 유년을 보낸 파르시 공동체의 소년 마넥은 그 앞에 놓여진 환경과 당연한 듯 정해진 미래에 무력하게 순응한다. 억지로 오게 된 기숙학교에도 염증을 느끼나 끝내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지 못해 학교에 머문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몸소 겪었던 인도 정치의 불합리성에 대한 인식은 그의 가슴에 불씨로 남아 언제든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운명을 옭아매는 관습에 저마다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갖고 살아온 이들이 한 공간으로 모이게 되면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삼촌과 조카의 관계지만 부자지간만큼이나 돈독한 이시바와 옴, 같은 종교의 높은 카스트들에게도 외면받는 하층민인 이들에게 편견없이 손 내미는 이슬람교도 아시라프와 조로아스터교도 마넥, 이들을 가족으로 포용하는 디나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도적 해결책을 꾸준히 모색한다. 도시미화 명복으로 비좁은 트럭 안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노숙자들을 묘사하면서도 그들을 하나의 희생자라는 전체로 바라보기보다 개체로서 각각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작가의 시선이 꾸준히 힘없는 사람들에게 머무는 동안, 그들을 억압하는 외부의 힘은 점차 강해진다. 이시바와 옴은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꾸준히 보여왔지만, 이들의 몸부림은 이내 좌절되어 가난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게된다.

 

결국 <적절한 균형>을 통해 작가는 개인의 비극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임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몰락은 물론이고 부흥조차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이다. 카스트가 낮은 계급을 억압하는 사람들,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챙기기 위해 빈민들을 억압하는 사람들, 안락한 생활을 통해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사람들 등 폭압과 불합리가 뿌리깊게 자리한 인도 사회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꼬집으며 현실을 차갑게 그려보인다.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문체는 애써 감정에 호소하지 않지만 인물의 희로애락에 따른 감정 이입을 한층 쉽게 한다. 블랙유머나 알레고리, 상징과 같은 기교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리얼리즘 기법으로 서술된 덕이다. 간결한 문체로 사건 중심의 서술이 이루어지고 서술자는 줄곧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작가의 페르소나인 마넥의 심경을 통해 절망감을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작가는 마넥을 통해 절망적인 현실을 부각시키는 한편, 끝까지 인정을 잃지 않는 디나를 통해 인도주의적 결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지식인들의 무력감보다 오히려 소시민의 인정에서 부조리를 타계할 해결책을 찾는다. 또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된 인도사회의 미래를 이들간의 화합에서 찾고자 한다. 다양한 계층과 문화 나아가 종교를 초월한 화합이라는 유토피아를 조심스레 꿈꾸는 듯 보인다. 비극에 대한 설로 시작했지만 이 소설을 무작정 비극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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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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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은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대항해 펼친 독립 활동의 세부적인 사실을 알려주지만,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은 역사 속의 구체적 개인이 흘렸던 피와 눈물, 울분과 갈등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단 몇 줄의 단정적인 서술로 정리하기에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 보일 수 있는 문학은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뛰어나고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문학은 현실을 르포르타주보다 더 실감나게 보여주고, 역사를 역사책보다 더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와 동떨어진 시간과 장소의 여러 배경을 이해하는 데 문학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다. 제3세계의 역사, 사상, 가치관 같은 것은 신문기사 따위의 논픽션으로 이해되기에는 지나치게 생소한 이야기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은 한 사회의 총체를 담아내는 데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한밤의 아이들>을 한 개인의 삶 속에 신생독립국으로서의 인도 사회의 전체를 담아낸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람 시나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을 훝고 있다. 그 파란만장한 개인의 삶 속에서 독자는 종교, 문화, 정치, 경제 등 신생독립국으로서의 인도 사회의 총체를 읽어낼 수 있다. 작가는 아담 아지즈와 뱃사공 타이의 갈등을 통해 근대와 전통의 갈등을 보여주고, 무슬림인 아흐메드 시나이와 반무슬림 집단 라바나 패거리들을 통해 종교와 정치적 견해 차이가 빚어낸 갈등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인도의 비상사태 선포 등 사회적 현안들을 살림의 삶 속에 스스럼 없이 투영하고 있어 신생 독립국 인도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한밤의 아이들>은 주인공 살림의 개인적 연대기에 배경으로서 인도의 모습을 비춰줄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운명을 역사의 메타포로 활용하는 재기를 보여준다. 인도가 독립하는 날 자정에 맞추어 태어난 선택받은 한밤의 아이들은 결국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도록 정해져 버렸다. 그러나 소설의 도입부에 이미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살림에게 닥친 온몸의 균열은 순탄치 못한 조국의 역사를 극적으로 내비친다. 이러한 우회하는 접근법은 역사의 구체적인 복원을 가능케 할 뿐더러, 가치화 판단의 가능성까지 열어 두고 있어 한 사회를 이해하기에 더 없이 효과적이다.

 

인도 사회의 총체적 반영이라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치지 않는 분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이야기의 성찬이라는 점에서 <한밤의 아이들>은 소설이 갖추어야 할 또 다른 미덕을 져버리지 않는다. 근대화에 젖은 아담 아지즈와 전통으로 휘감긴 나심의 부조화스러운 결혼생활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쉴새 없이 흘러나온다. 주인공 살림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야기는 이미 정신 없이 흐른다. 아흐메드 시나이와 아미나 시나이가 봄베이의 메솔드 단지에 정착하기까지 장황하게 읊어댄 가족의 역사는 주인공 살림의 내력을 정의하기 위한 기나긴 서두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 살림의 탄생은 엉뚱하게도 매솔드의 거짓 가르마란 작은 에피소드와 닿아 있다. 이처럼 이야기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듯하다가도 돌연 방향을 틀고 그러는 중에도 쉴새 없이 이어진다. 이 쉴새 없는 수다는 강렬한 반전과 숱한 암시들로 절묘하게 짜맞추어져 있어 소홀히 보아 넘길 부분이 조금도 없다. 작가는 한 인물의 두서없는 넋두리와 같은 이야기를 숨 쉴틈 없이 늘어놓으며 적절한 때를 보아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천일야화에 비견될 만큼 쉴새 없이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 담아낸 인도는 환상성이라는 문학적 장치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고 구체적이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생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의 방식을 뜻하지는 않는다. 현실반영과 문학적 상상의 양측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현실의 삶을 얼마나 적실하게 형상화했느냐의 문제이다. <한밤의 아이들>은 그 주제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과 그 형상화 방식에 이르기까지 소설에서 기대하는 여러가지 재미를 골고루 갖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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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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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울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단지 이야기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글이라는 재료를 잘 닦고 문지르고 가다듬어, 마치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관상용 소품처럼 활자만 바라봐도 흐뭇해지게 하는 작품 말이다. 정확하게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전, 활자가 시신경과 만나는 찰나의 울림이 큰 소설을 말하는데 내게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그렇다. 이런 소설들은 시간의 연속 선상에 놓인 장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서적 감응을 이끌어낸다. 미장센이 제거된 스토리텔링에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다양한 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글쓰기의 전범인 셈이다. 가령 영화 제작자가 소설을 검토하다가 "이런 건 표현할 수 없어"라며 내던져버릴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역으로 소설이 소설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로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활자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현대 소설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자의 농담(濃淡), 여백의 활용, 활자들의 배열 방식, 이미지의 삽입과 같은 노골적인 시각적 효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원더보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텍스트로 존재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우주의 물리적 법칙들을 망각해 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소년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처음부터 요구한다. 역설과 모순형용으로 가득 찬 소제목들은 우주의 정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소년의 시끄러운 내면의 모습이며, 그것은 활자 자체에 가해진 다양한 기법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진다. 시간을 멈추고,염력을 발휘하게 되고, 타인의 생각을 듣게 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가 받아들여 왔던 세계의 질서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활자처럼 깨어진다. 홀로 남은 정훈은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겪는다.

 

그래서 <원더보이>는 일견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소년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원더러스'한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시종일관 불합리한 '전체'에 놓여진 한 '개인'의 내면을 좇는다. 그리하여 소설은 분노와 투쟁보다 외로움과 슬픔에 더 근접해 있다. 대개 외로움과 슬픔의 근원은 상실로부터다. 특히 부모를 잃는 경험은 일생에 걸쳐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크나큰 상실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성장 소설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오스카가 그랬고, 죽은 아빠의 스웨터를 42일 내내 입고 다니던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의 알마가 그랬고, 또 신화가 사라진 처용포에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꽃피는 고래(김형경)>의 니은이 그랬다.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그것들은 소중하지만 평소에는 잊고 살기 쉬운 그 무엇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내면의 보호막이 걷혔을 때 최초로 대면하게 되는 무방비 상태의 자아일 것이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보호막이 없어진 자리에 각자는 자신만의 껍질을 새로 입히게 된다. 상실로 인해 생긴 구멍은 딱 그 빈 자리만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무한히 커진다. 상실의 아픔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화전 같은 것이다. 잡목과 들풀이 태워진 자리에 새로운 밭을 일구듯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한 치유 그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훈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병원에서 깨어나는 부분이다. '원더보이' 정훈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져 간 빈 자리에 놀랍게도 초능력이 깃든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들리기 시작하고 그 감정들이 읽히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또한 타인에게 여과없이 전해진다. 감정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경계 없는 왕성한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순간을 '시간이 멈추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화전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운 작물이 수확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즉 성장의 도움닫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빠에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속죄의식의 발로인 것처럼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전할 수 있고, 듣지 않아도 느끼게 되는 정훈에게 물리적 시간의 정지는 10광년 이상 떨어진 별빛이 지구에 닿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벌어준다.

 

시간의 정지와는 별개로 초능력자의 신분으로 80년대를 견뎌내야 했던 정훈의 처지는 꽤나 힘겹다. 정훈의 초능력은 국가에 대한 봉사수단으로 사용되기를 강요받지만 실상은 유리 겔러의 염력과 같은 눈요기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다. 사실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기분을 이해하는 것 따위가 무슨 초능력이란 말인가? 그것이 초능력일 수 있는 까닭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조차 억압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능력을 초능력으로 치부하는 이 절묘한 비틀기는, 당대의 사회상을 우회해서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권대령이 맹신하는 국가 체계 안에서는 개인의 죽음조차도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개인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체 속의 개별성이 억압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훈의 자아 찾기는 어쩌면 광활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훈이 홀로 남겨져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근원적인 고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존재하기에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맺기가 중요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정훈에게 깃든 초능력은 상대의 감정에 감응하고 이해하고 나누려는 노력이다. 그것이 광활한 우주에 나홀로 존재하는 이유이자 흔적이 된다.


 개인의 성장은 하나의 무리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광활한 우주에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을 뜻한다는 논리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개별성에 대한 이해와 여기에서 비롯되는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발견이 있다. <원더보이>는 메타포가 넘쳐나는 소설이다. 그래서 모순과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진실된 삶의 이미 찾기를 시도하는 소년의 협소한 이야기이기보다 오히려 우주의 비밀에 닿기 위한 한 소년의 여정으로 읽히기를 요구한다.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내가 운다면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정훈은 한 뼘 성장한다. 이것이 정훈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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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더보이>를 읽고있는데, 제게는 아직 너무 힘든 소설입니다.
김연수의 문장이 너무나 아름답고, 텍스트, 아니 문단의 틀을 벗어난 글들에 참 많이 감동하고 있지만 의미 파악이 너무 힘들어요. 이것이 과연 소년의 내면을 파악하는, 좇는 글인지, 그저 재미만 주려 쓴 글인지에 대한 개념부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깐짜나부리 2012-04-12 13:17   좋아요 0 | URL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특히나 김연수의 소설처럼 다양한 은유가 포함된 작품은 독자의 역할이 보다 크겠죠?

백운호 2012-05-3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 소설 다 읽고 마땅히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해 리뷰 쓰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명쾌하게 풀어내셨네요. 사유의 내공에 감탄하고 갑니다.
 
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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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를 많이 읽으면 사필귀정에 대한 신념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세계가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것이다. 통제불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는 맹목적인 신념은 종종 사람들을 그릇된 판단으로 이끈다. 우리의 운명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답을 내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나의 오랜 신념과 세계의 진실이 충돌하는 시점으로 되돌아 간다. 참되고 성실한 인물이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리고 마침내는 패배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간 구축해 온 인과응보의 세계관이 무너져 내리는 최초의 경험이었으며,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대신 복잡한 운명에 대처하는 방향성을 찾아냈다는 것이 그 대가였을 것이다.

 

세계의 역동성과 운명의 예측불가능성을 최초로 각인시켰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노인과 바다>의 플롯은 단조롭다. 84일 동안이나 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치열한 사투 끝에 몸 길이가 5.5 미터 가량 되는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되나, 상어의 습격으로 살점을 모두 뜯기고 뼈만 남은 물고기를 매단 채 해변으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스토리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특별한 기교 없이 순행적으로 구성되었으며 현란한 수사 조차 없다. 많은 인물들이 어우러져 복합적인 갈등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소설은 처음과 끝 부분을 제외하고는 하늘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이 만나는 접점 어디쯤에 일개 점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작은 배와 노인의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놀랍게도 망망대해 위에 사람 하나, 배 하나, 청새치 하나를 두고 그 안에 인생을 통째로 담아내고 있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노인은 홀로 배에 오른다. 해안선은 눈부신 섬광으로, 한 줄기 초록색 선으로 시시각각 변해가고 그 초록색 선마저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면 노인은 홀로 고독한 항해를 시작한다. 배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라디오도, 허기를 달래줄 먹을 것도, 노인을 도울 수 있는 소년도 없다. 노인은 고독에 맞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미끼용 생선으로 허기를 달랜다. 노인은 왼손에 쥐가 나고 줄이 쓸려 상처를 입고 억지로 선잠을 자 두어야 하는 항해의 고비마다 줄곧 소년의 부재를 아쉬워 하지만 오랜 연륜에서 오는 지혜는 홀로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준다. 노인은 이 한 번의 항해에서 영광의 순간도 쇠락의 순간도 온전히 홀로 맞이한다. 소년의 부재, 즉 노인의 절대 고독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은 자신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인생의 자명한 원칙을 상기시킨다. 

 

노인은 바다라는 운명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했음에도 항해를 멈추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쳐도 청새치를 낚은 줄을 놓지 않는다. 고기를 잡은 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지막 살점이 모두 뜯겨나갈 때까지 상어에 맞서 싸운다. 배가 해안선에서 멀어질수록 노인은 찬란한 영광에 가까이 다가가고, 다시 해안으로 다가갈수록 그 영광의 기운은 쇠퇴한다. 마침내 노인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빈 손으로 해안에 당도한다. 노인의 항해에는 삶의 희로애락과 인생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록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가혹한 투쟁으로 인해 고통과 회한만 남을지라도 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희망을 품을 일도 없다면 그것을 이루고 지키기 위한 노력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 손으로 출항하고 돌아올 때도 빈 손이었지만 노인의 항해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는 고스란히 남아 노인의 치열한 사투를 증명해주고 있다. 오두막에 누워 뉴욕 양키즈 경기 소식이 실린 신문을 뒤적거리기만 했다면 달콤한 잠과 사자꿈은 노인의 몫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전생애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고 나면 다음에는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 결국 인생은 위대한 도전과 투쟁의 연속인 것이다. 인생에 무의미한 순간은 없다. 실패의 순간조차 인생의 어느 부분에 자취를 남기기 마련이다.

 

노인의 항해가 인생에 대한 우의라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면, 노인 산티아고는 그 인생에 대처하는 개별적인 개체로 그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고된 항해가 끝난 뒤 노인은 그의 영광을 증명해 줄 유일한 전리품인 청새치의 뼈와 대가리를 뒤로하고 지친 몸을 누일 침대를 향해 곧장 나아간다. 그는 지나간 과거의 흔적보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앞만 바라보고 나아간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뒤에도 사자꿈을 꿀 수 있는 낙천성은 산티아고의 위대함이다.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낚지 못해도 절망하는 대신 '85는 행운의 숫자'라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역겨운 만새기를 먹어야 할 때도 고기보다 나은 처지라고 위안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사람들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중얼거린다. 노인은 시련과 역경을 담담히 맞이하고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힘든 난관 뒤에는 반드시 행운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낙천성은 조화와 순응의 태도에서 나온다. 평생을 바다와 함께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보살피고 어루만져야하는 동지이다. 노인은 바다가 가져다 주는 불운과 행운, 역경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태도는 심지어 치열한 사투의 대상인 청새치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노인은 물고기를 죽이는 순간에도 물고기가 휼륭하고 고상한 존재임을 찬탄한다. 비록 낚시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맞서야 하지만 그 조차도 바다가 가져다 주는 운명의 일부인 것이다. 상어들에게 살점을 물어뜯긴 청새치를 외면하는 모습에서 노인은 청새치와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상어를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상어가 가져다 주는 시련조차 운명의 일부인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인은 운명을 수용하면서 시련을 외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선다.

 

<노인과 바다>는 삶에 대한 장엄한 우화이면서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숭고한 지침이다. 이 단순한 모노드라마가 담고 있는 인생은 노인과 바다, 청새치와 상어가 우의하는 바에 따라 매우 다층적으로 읽히지만 운명에 대항하는 노인의 태도가 보여주는 위대한 낙관주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역동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은 능동성과 낙천성에서 나온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노인과 바다>는 비교적 간명한 해답을 내어 놓지만 그 치열한 사투 이면에 숨은 인간 정신의 정수는 오랫동안 깊이 있는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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