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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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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80년 5월 바로 그날의 한 가운데에서 출발한다. 총성이 울리고 피비린내가 퍼지는 광주 중심,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고 죽은 시신들이 밀려오는 상무관에 한 소년이 찾아온다. 옆구리에 총을 맞고 죽은 친구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다. 소년은 친구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그 죽은 사람 중에는 소년 뿐 아니라 청년도 있고 여자도 있다. 그 날의 비극을 만든 가해자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이 비극은 조금씩 잊혀진 과거가 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한강은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독자를 그 날의 현장 속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기록사진같은 사실적인 현장의 복원이 이 소설의 목표는 아니다. 역사의 인과에 근거한 사실적 진술은 더더욱 목표가 아니다. 화자는 고작해야 16세의 나이로 죽은 한 소년의 혼령일 뿐이고, 그의 눈이 따라가는 초점 인물 또한 16세의 소년이다. 나라가 국민을 공격하는데, 국민들은 시신을 태극기로 감싸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어린 소년이다. 소설은 그 혼령과 소년의 눈에 비친 긴박했던 그 날 밤의 긴장감과 두려움의 현장 속으로 독자를 불러들이며, 연약한 시민군들의 의식 속에 그 날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지 보여주려 한다.

 

작가는 소년에게 닥친 비극을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 속에서 그 날의 치욕을 힘겹게 끄집어 낼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까지도 저항했던 인물들에게 치욕이란 무척 부당한 말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날 일을 치욕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작가는 이처럼 그날의 비참함 자체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의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고통의 역사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한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아있었으며, 총 한발 쏘지 못했으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 날의 기억은 평생을 옭아매는 치욕이었던 것이다. 생활이 무너지고 감정이 메마르고 숨만은 붙어 있어 순간순간 그 날의 악몽을 재생하며 삶을 별 수 없이 이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은 자는 차라리 행운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증오와 분노를 담아 그 날을 상상하지만, 그 폭압과 살육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끔찍한 트라우마를 상상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이 들려주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치욕과 비극의 역사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오며 과거의 현재적 각성을 이끈다. 지금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을 소년 '동호'는 죽었지만,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오늘날의 소년들에게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필요할 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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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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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의 이념과 개인의 자유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꾸준히 증명해 왔다. 오랜세월 동안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전한 가치를 찾지 못한 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현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완전한 가치를 찾기 위한 인류의 모색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국가의 이념에 상충되지 않는 완전한 삶의 모습에 대한 탐색은 오늘날 문학이 당면한 크나 큰 과제 중 하나다. 영어로 글을 쓰는 중국계 미국작가 하진은 그의 소설 <자유로운 삶>에서 이러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색한다. 작가 자신의 체험이 강하게 반영된 듯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중국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개인의 갈등을 미국이라는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나라를 배경으로 풀어낸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난 우를 통해 조국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내보이는 것에 전념한다. 미국 사회에서 중국 본토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걸림돌로 생각하는 난은 조국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겨운 타국 생활을 꾸려나간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미국이라는 사회에 완전하게 안착하지도 못한다. 이는 한 개인의 뿌리가 훗날 개인의 의지를 무력화 시킬 수 있을만큼 한 사람의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난과 핑핑의 미국 생활을 추보적으로 그려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다른 수많은 중국 이민자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영주권을 위해 늙은 미국인 여자에게 빌붙어 살아가며 영어를 배울 생각이 없는 잡지 편집장, 신사적인 흑인 손님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는 여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료들을 배신하는 유학생 등 수많은 이유로 미국 사회에 정착하게 된 많은 중국인들이 등장한다. 이 중에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고, 다른 문화에서는 아무 것도 얻기를 원하지 않고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소설은 이러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그려내면서 당대 중국이 처한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려 애쓴다.

 

난과 그의 아내 핑핑은 자유를 억압하는 조국의 품을 떠나 미국으로 오는데, 그들이 그곳에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로운 삶'이다. 작가가 풀어내는 자유의 문제는 때로는 정치적이고 때로는 경제적이다.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개인의 모든 행위가 조국과 국가에 통제 받는 억압적인 중국 사회를 떠나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의지로 가능한 자유주의 국가 미국에서 그들은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다. 그러나 이들은 경제적인 궁핍과 인종 차별에 시달리며 자유로운 삶을 반납해야하는 힘겨운 삶을 여기에서도 이어간다. 누구도 그들을 외적으로 압박하지 않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유전자에 새겨진 사고는 보이지 않는 억압 기제가 되어 난의 미국에서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든다.  이 젊은 부부의 미국 생활을 소설은 단조로운 플롯으로 쫓아가며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정치적, 경제적 자유가 한 개인이 추구하는 진정한 가치일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꽤나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문학적이다. 국가와 개인의 문제를 당대 중국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가령 국가가 개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난의 견해와, 국가를 위해 개인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논조를 발표하는 만핑 류선생의 갈등 같은 것은 이 소설의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록 서정성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정신적 자유로서의 문학의 역할을 거듭 언급함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 반영이라는 소설의 참여적 측면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순수 문학으로서의 문학의 기능을 직접적으로 옹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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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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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핀천은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거장이다. 독창적인 메타포를 통해 소외 계층의 억압을 고발하는 그의 대표작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그 주제와 방법론에 있어서 소설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히 그는 그의 과학적 이력과 인문학적 박식함을 소설 속에 아낌없이 풀어 놓는다. 지성과 그만의 뚜렷한 스타일, 현대적 문제의식이 빛나는 이 작가의 소설은 그 자체로 현대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토머스 핀천의 단편 5편을 모은 책이다. 대학 시절과 신인 시절의 단편들이어서 '거장'이라 칭해지기 이전의 작품들이라 오히려 습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다. 그래서 이 책은 현대 문학의 거장의 오늘날과 그 거장을 탄생시킨 시발점이 된 초기 작품들 간의 거리 두기와 거리 좁히기를 반복하며 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한다.  

 

책은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한다. 서문에서 작가는 습작에 가까운 자신의 초기 작품을 다시 읽는 것에 대한 감회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 작품의 창작동기와 집필 과정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고, 냉정한 비평과 부끄러운 심회도 감추지 않는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 만큼이나 이 서문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거장'이 회고하는 데뷔 시절의 집필 과정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이나 비평은 소설쓰기의 방법론을 실제적으로 제공해 준다. 이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줄 뿐 아니라 거장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의 빈 공간을 채워줌으로써 소설 읽기에 있어 보다 치밀한 시선을 갖게 한다.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시신인양 작업을 하는 군인의 이야기를 그린 <이슬비>, 결혼 생활에 대한 남자의 소회를 그려낸 <로우 랜드>, 엔트로피 이론을 삶에 적용한 <엔트로피>,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전을 그린 <언더 더 로즈> 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융화를 그린 <은밀한 통합> 까지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한결같이 독창적인 소설속 환경과 독특한 메타포를 구가한다. 흡사 메트릭스의 세계와도 유사한 독자적인 환경은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작가의 꾸준한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소설 작법의 미숙함에 대한 작가의 반성과는 별개로 이 작품들은 인간 삶에 대한 우회적 접근을 통한 의미 추구라는 소설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성취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초를 알린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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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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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라는 것은 시대와 공간이 주는 의미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려지는 우정의 모습은 대체로 정신적 교감을 우선시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도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정신적 교감의 구체적인 형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서술자이자 작가의 페르소나임이 분명한 베른하르트의 이 기나긴 독백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이 시작된 시점부터 파울의 죽음으로 우정이 끝나는 순간까지를 아우른다. 물론 소설의 시작은 우정의 시발점이 아닌 병원에서다. 베른하르트와 비트겐슈타인은 정신병과 폐병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전혀 다른 병으로 다른 병동에 입원해 있지만 베른하르트는 그들의 병이 똑같이 자제력을 잃어서 생겨난 근본적으로 같은 성질의 병임을 강조한다. 이런 파울과의 동질성은 실로 억측에 가까운 것이지만, 아픈 육체를 이끌고 그에게 다가가려는 힘겨운 발걸음은 둘 사이의 지극한 우정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친구가 함께 놀고,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단순하게 정의되는 세상에서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우정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우정의 본질을 상기시키는 듯 하다. 같은 공연을 보고 같은 감동을 느꼈다는 것에서 시작된 이들의 우정은 예술과 철학, 정치를 아우르며 끊임없이 교감하는 과정에서 굳건해진다. 파울의 정신병을 예외적으로 보고 있지 않음으로써 베른하르트는 그의 광기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기나긴 우정에 대한 장광설은 뜻밖의 냉소로 치닫는다. 파울과의 기나긴 우정에 대해 회상하고 변명하고 분석했던 베른하르트의 태도는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반전되는 느낌이다. 파울과의 동질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파울의 죽음에 이르러서 베른하르트는 온전한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들었다는 단 몇줄의 요약으로 파울의 죽음은 담담하게 그려진다.

 

베른하르트의 철저한 외면의 이면에 있는 감정의 정체는 설명하기 쉽지 않아보인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시니컬하고 두려움이라고 하기에는 감정의 열의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는 결국 파울과의 우정이 지속되는 동안 나눠 가졌던 광기가 파울의 죽음과 함께 일시에 꺼지면서, 베른하르트를 무미건조한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파울의 존재가 베른하르트의 삶을 얼마나 크게 지배해 왔는가를 결국에는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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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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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보여주듯이 우리 선조들은 후대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남기는 것을 크나큰 미덕으로 생각해왔다. 타인에게 기억되는 것으로 죽음의 설움마저 견딜 수 있었다면 남에게 존재를 각인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자신의 이름 석자 정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일이 고행이랄 것도 특권이랄 것도 없는 시대다. 물론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본질적 차이는 있지만 자기 피알을 위한 기회는 무한정 널려있는 판이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기억되는 것 만큼이나 잊혀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김중혁의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바로 그 '잊혀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망각에 대한 치밀한 사유도,  병리적인 분석도 아닌 보다 구체적인 '잊혀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의뢰인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딜리터(deleter)'다. 최면이나 마법 따위가 아니라 거의 첩보 작전에 가까운 방식으로 실제 의뢰인이 지목한 구체적인 물건을 제거한다. 구동치라고 불리는 이 딜리터를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의뢰인들은 찾아온다. 그들은 잊혀지기를 바란다.

 

자기 피알 시대에 스스로 잊혀지기를 원하는 이들의 행보는 이례적이라할 수 있다. 그러나 의뢰인들이 없애고자 하는 그들의 흔적에는 지극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내밀한 속살이 감춰져있다. 그것은 의뢰인들이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싶어하며 죽어서도 공유되고 싶지 않아 하는 어떤 것이다. 오롯이 자기만이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그것은 곧 각자가 가진 비밀이다. 비밀이 몹시 중요한 사람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지키려 들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비밀을 포기한다. 비밀의 경중을 매기는 일은 결국 자신의 삶을 질문하는 일이므로 비밀 자체가 그 자신인 것이다. '사람이 남긴 흔적이야말로 진짜 그 사람'이라는 이영민의 말대로 의뢰인이 지우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비밀이자 본질이다. 그렇기에 딜리팅은 자신의 본질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이며, 죽음 후의 삶마저 자기 통제하에 놓으려는 인간의 욕심이다. 자신의 흔적을 조작하느라 추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려야 하는 딸의 처지 같은 것은 염두에 없다. 딜리팅은 현대의 에고이즘이 만든 기형적인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딜리팅을 의뢰한다. 부도덕성을 감추기 위해서, 이루지 못한 열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혹은 사업적 이윤을 위해서 구동치를 찾아온다. 이 모든 이유들을 감추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한 개인의 모습이 타인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한 개인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전부인 것이 자명한 현실이다. 그래서 현대의 에고이즘은 어긋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이 어긋난 관계들을 파편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비밀을 공유하지 않은 채 더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숨어들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에 그럴싸한 이유를 부여한다.

 

김중혁은 분명 포스트 모더니즘적 작가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일상의 노골적인 파괴보다 평범한 삶 속 작은 틈을 파고드는 낯선 모습을 포착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듣도보도 못한 기발한 직업을 가진 인물이 평범한 일상에 태연하게 속해있는 모습은 이미 <1F/B1> 등 여러 단편에서도 보여준 바 있다. 번뜩이는 발상에서 출발한 소설은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내러티브를 보여준다. 한 편의 액션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같은 급속한 장면 전환과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사건들, 얽힌 인물들의 관계가 절묘하게 짜맞춰지는 명쾌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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