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
바버라 킹솔버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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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그리고 감동적이어서, 슬프면서도 따뜻해서.

재밌는 소설을 읽을 때는 다음 이야기를 빨리 알고 싶어서 후딱 후딱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두려움을 느낀다. 너무 빨리 다 읽을까봐.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리메이크 한 책이라고 한다. 20세기 말의 미국을 배경으로. 아버지 없이, 약쟁이 엄마 밑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비참하고 가혹한 현실 속에서 부딪히고, 망가지고, 좌절하고 그러면서도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나는 알아서 태어났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은 알아서 태어났다. 그리고 알아서 살아간다. 사람들의 악의와 음모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과 호의 속에서. 삶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읽는 내내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초강대국에 대해서, 그 안의 무식하고 난폭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의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어린 주인공의 엄마가 거칠고 폭력적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다. 새아빠가 된 남자는 어린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가정 폭력은 미국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는 것이다. 현실이 얼마나 더럽길래 맨날 단골 소재가 될까?

술과 약에 찌들고 총질이나 해대면서 강한 남자 행세하는 놈들이, 어린 아이와 약한 부인에게 폭력을 휘둘러 대는 장면들을 보면 욕이 튀어 나온다.
'이 새끼들아,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
왜 감당도 못할 결혼에 그리 목을 맬까? 남자나 여자나?

관료적이면서도 인색한 아동 보호 제도, 사람들을 질병과 고통으로 내모는 건강 보험 제도,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약물 중독, 현실을 잊으려는 듯한 스포츠 영웅주의 등 미국의 많은 모순들. 부자에겐 천국이고, 빈자에겐 지옥같다,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던 엄마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으면서, 어린 주인공이 거칠고 험악하고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안타깝고 마음 아프지만, 그저 비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엔 악인도 많지만 선한 사람들도 많다. 어린 주인공의 삶은 하루 하루가 살아가기 위한 투쟁이지만, 본질적으로 주인공은 낙관적이다. 주인공은 안에 '무슨 일에도 녹지 않을 무슨 금속 같은 게' 있다. 그것은 사랑 아니면 용기일 것 같다. 아니면 둘 다거나.

책 전체에 걸쳐서 애정과 따뜻함이 배어있다. 현대의 다크하고 음울한 작품들과 다르게, 주인공의 잔인하고 가혹한 삶 속에서도 힘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음울한 현실에 절망하기 보다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주인공인 어린 소년에게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무너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소년의 용기가 나를 위로한다.

결국 가혹하고 사악한 현실에서도 의지와 힘을 잃지 않게 만들어 주는 건 삶과 사람에 대한 낙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낙관은 용기에서 나오는 거고. 개같은 현실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고 부딪히고 싸워나가려는 용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흉칙함 대신 따뜻함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 아직 끝이 아니다. 이건 시작일 뿐이고, 과정일 뿐이다.

내가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건 내가 겁장이라서 그런 거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겁장이. 용기 있는 사람이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싸워 가려고 할 때, 겁장이는 패배가 두려워 미리 포기 속으로 도망가 있는 거다. .

19세기 찰스 디킨스 소설을 현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라서 그럴까? 현대 소설이면서 옛날 소설 같았다. 19세기의 여유랄까 아니면 어눌함? 덜 잔인하고, 덜 사악하고, 덜 파괴적이었다. 그 모든 악을 다루면서도, 그 모든 악의 빈틈과 희망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올리버 트위스트'나 '소공녀' 같은 어린이용 소설책을 읽으며 느꼈던 즐거움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내가 약간은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약간은 외로와지는 것 같기도 했고. 순수함은 외로움을 동반하는 걸까?

상도 많이 받았는데 궁금한 건 '여성 소설상'이다. 상 이름을 봐서는 여성성이나 여성 문제에 대한 상일 것 같은데, 난 특별히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젠더적 관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건 내가 남성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 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이 들어 집중력이 떨어진 나를 몰입시켜 주는 소설. 나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 나를 약간은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소설. 소설의 힘. 이야기의 힘.

이 책을 다 읽었으니 이제 또 다른 재밌는 소설을 찾아야겠다. 소설은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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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섹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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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재미있는 소설이 나에게 주는 행복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회의적이고 염세적이었던 내가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느낀 것은 첫사랑에 빠졌을 때다. 난생 처음 맞이하는 사랑의 혼돈과 열병에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리던 나날 속에서도, 사랑이 안겨주는 순간 순간의 벅찬 감동과 평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벼락 맞듯이 인생의 아름다움에 전율했다.


그 후로도 허무하고 우울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은 사랑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그녀를 마주하고 커피를 마시던 어느 순간, 그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가던 어느 순간, 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어느 순간 나를 찾아온 평안과 평화속에서 나는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소설이 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이 전해주는 따뜻하고 유쾌하고 편안한 충만감에 가슴이 뻐끈해지고 마음이 들썩거리면, 잠시 책을 덮고 그 즐거움과 행복감을 진정시켜야 했다. 나에게는 그 설렘이 소설의 힘이었다. 무슨 쟝르니, 형식이니, 주제니, 의미니, 메시지니, 교훈이니를 다 떠나서. 나를 몰입시키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


이 책 미들섹스를 읽으면서 또 다시 이야기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무슨 특별하고 자극적인 사건이나 장치나 구성이나 비틀기가 없이도, 이야기 자체가 안겨주는 즐거움과 행복감.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재미있는 소설을 좋아했는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설렘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 얘기를 풀어가야 할까? 소설 미들섹스의 재미에 대해서? 이 반짝이고, 진솔하고, 따뜻하고, 세심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현대적이고, 도회적이고, 포용적인 소설에 대해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포용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연한 낙관주의에 대해서. 독자를 물들이는 따뜻함과 여유로움과 관대함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을 담고서 반짝반짝 빛나는 재미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이럴 때면 나를 관념에 가둬 놓는 말과 글의 한계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미들섹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두 번 태어났다. 처음엔 여자아이로, ...그리고 ... 한 응급실에서 남자아이로"

사용자가 올린 이미지


칼리오페라는 여자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칼이라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그(또는 그녀)에게  '5알파환원효소 결핍증'이라는 단초를 제공하게 될 조부모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리스의 조부모가 미국으로 이민 오고,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 중에 칼리오페가 있고.


우리는 보통 성을 남성과 여성 2가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성은 2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성 또는 간성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국 근현대 문학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심지어 무협지에서도 간성이나 양성의 존재는 이미 다루어져 왔다. 어지자지니 남녀추니니 하는 좋지않은 어감의 단어들이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영화로도 있었던 사방지는 그 실제의 인물이다.


이 책의 주인공 칼레오페가 바로 간성(間性) 또는 인터섹스(intersex)다. 그러나 기존의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그 사람들을 이형(異形)의 변질된 존재로 취급하면서, 성적인 흥미거리로 대상화 시키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신체가(또는 정신이) 약간 다르고, 쉽지 않은 고민과 혼란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전에 인터섹스를 소재로 한 'IS,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이라는 일본 만화를 잠깐 본 적이 있다. 그 만화의 간성에 대한 진지하고 포용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답답해서 잠깐 보다 말았다.


그러나 이 책 미들섹스는 자연스럽고, 따뜻하고, 위트 넘친다. 사춘기를 맞이하는(하물며 염색체는 남자인) 10대 소녀의 불안하고 오묘하고 복잡한 감성을 섬세하면서도 따뜻하게 잘 그리고 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소녀의 성장과 감성으로 나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준다. 큰 차이를 뛰어넘는 동감과 공감으로 나를 껴안는다.


섹스나 젠더를 떠나서 그 아리아리하고, 어질어질하고, 휘청휘청하고, 비틀비틀하고, 두근두근하고, 블랑블랑하고, 화끈화끈하는 모든 사춘기 공통의 서투름 속으로 나를 끌어안는다 . 이 소설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남성 작가가 사춘기를 맞이하는 소녀의 불안과 변덕과 기대와 희망과 혼란을 어찌 그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남자인 내가 너무 몰라서 남자 작가의 제 멋대로의 상상에 속아 넘어 간 것일까?


책은 1, 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에서는 좀 지루하기도 하다. 책의 진짜 재미는 주인공 칼리오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2권에서부터 그 빛을 발한다. 인상적인 구절들을 핸폰 카메라로 찍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예리하게 번뜩이며 나를 자극하는 구절 구절들이 너무 많았다.


책의 후반부에 칼리오페가 칼이 되어 가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는, 생뚱맞게도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라는 범죄 소설의 샌프란시스코가 떠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아침마다 두터운 안개가 깔린다....안개가 도시를 덮은 건지 도시가 안개 위를 표류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 안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대가 되자 안개는 비트족의 머리 위에 카푸치노 거품처럼 남실거렸다. 1960년대 안개는 물파이프에서 오르는 마리화나 연기처럼 히피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칼 스태퍼니데스가 도착한 1970넌대에는 안개가 공원의 새 친구들과 나를 숨겨주었다' (미들섹스)


[샌프란시스코는 모든 사람의 도시라고들 말한다. 이곳 주민들만의 도시가 아니라 이곳에 여행을 왔다가 이곳과 사랑에 빠진 모든 방문객들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만 위의 도시, 태평양 해안의 여왕, 빛의 도시, 서해안의 보석. 이곳은 또한 현기증의 도시, 욕망의 도시, 저속한 마력의 도시이기도 하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다음 세상의 매력을 모두 지니고 있는 즐거운 도시임이 틀림없다"]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책의 내용에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두 책의 분위기가 유사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살짝 몽환적이고, 약간 혼미하고, 조금은 거품같은 이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어쩌면 이 비현실적인 몽롱함이 날카로운 현실을 감싸주고 품어주는 따뜻함 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책은 그저 나만의 취향을 저격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한 모든 장점들에 위트까지 갖춘 이 소설의 재미가 그저 나만의 재미일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으로 보이는 제목이나 소재와는 다르게, 특별한 사건이나 연출 없이 담담하고 잔잔한 이야기가 보여주는 그 힘은 그저 나에게만 작용하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지혜롭고 위트있게 번뜩이는 문장들은 그저 내 취향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의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궁금해졌다.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작가의 힘을 그의 다른 책에서도 느낄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 따뜻하고, 포용적이고, 위트 있고, 감성적인 작가가 다른 책에서도 여전히 반짝거릴 지 궁금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소설의 힘을 느꼈다. 소설이 갖고 있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다시 느꼈다. 그 동안 소설과 너무 멀어져 있었다. 이제 다시 가까워지고 싶다. 그 이야기의 힘을 또 다시 느끼고 싶다. 그리고 또 다시 설레고 싶다. 뻐근하고 뿌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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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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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문만 읽고 본문을 읽는 건 나중으로 미뤄둔 책들이 몇 권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 역사학 교수인 '슐로모 산드'가 지은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이라는 책이다. 원서가 출간된 건 2008년이라고 하는데, 국내 번역본은 2022년에 나왔다.

국내 책이 출간된 직후에 제목에 흥미를 느껴서 서문을 읽어봤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서문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면, '유대인은 혈통에 기반한 민족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종교에 기반한 민족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꼭 유대인의 혈통 얘기가 아니더라도, 막연히 의심하던 내용들을 책의 서문에서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근데, 책이 670쪽이나 되었고, 쉽고 편하게 읽기에는 내용이 세밀하고 깊었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서문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 한민족 또한 만들어진 '단일 민족'은 아닐까 잠시 의심하기도 했지만, 내가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에 나중에 읽을 책으로 미뤄두고, 세월만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책들을 구경하다가 '유대인, 발명된 신화'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만들어진 유대인'과 비슷한 관점의 책이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1980년 후반 이후 이스라엘과 서구에서 재조명되고 있는 이스라엘 고대사 및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연구 성과에 바탕을 뒀고, 그 중에는 '만들어진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다.


한겨레 신문 국제부 선임 기자 '정의길'이 지었는데, 그는 한글판이 아니라 원서를 읽은 것 같다. 한국어 제목도 다르게 표시되어 있고, 결정적으로 그가 글들을 쓴 것은 '만들어진 유대인'의 한국어 판이 나오기 전인 2020년에서 2021년, 주간지 '한겨레 21'에서다. 그는 '만들어진 유대인'을 포함한 여러 학문적 서적들을 바탕으로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압제에 관한, 이해하기 쉽고 잘 정리된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교과서와 미디어와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는 '유대인'이 아닌 다른 모습의 유대인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책을 만날 때 나는 즐겁다. 스포츠 뿐만이 아니라 책에 있어서도, 설득력과 스토리를 갖춘 도전자는 관객을 흥분시킨다. 그 치열한 시합을 사람들에게 떠들고 싶게 만든다.


즐겁게 읽기 시작한 책을 분노에 빠져 끝냈다. 유대인들을 탄압한 서구인들에 화가 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는 이스라엘에 치가 떨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을 볼 때 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스라엘이 그 극악한 범죄를 배웠구나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유대인 차별의 역사가 내 생각보다 더 깊고, 더 강하고, 더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가 아니라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괴물을 키운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금에 와서 가장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문명 국가 행세를 할 때면, 그 뻔뻔함과 위선에 욕이 나오기도 한다. 그들의 부와 민주주의는 유대인 말고도 아프리카와 중남미와 아시아의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 부를 빼앗아서 이룬 문명 아니던가? 그리고 그 자본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때로 평화는 정의보다 급하다.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참상 앞에서 누가 옳고 그르니를 따지는 게 뭐가 급하겠는가? 그보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멈추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나 누가 그걸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책임져야 할 열강들은 자기들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감옥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불과 8시간 전 뉴스에서 이스라엘이 'UN 학교'를 공습해서 다수의 어린이를 포함해서 최소 39명을 죽였다고 나온다. 말려야 할 미국의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학살의 끝은 어디일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죽이면 끝날까? 이란과 시아파 세력들마저 다 죽여야 끝날까? 차별과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낸 것처럼,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괴물을 키워내고 있다. '베르세르크'와 다르게 인과율의 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파멸해야 끝날 것인가?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자원은 줄어들고, 인구는 늘어나고, 욕망은 깊어지고, 경쟁은 거세지고,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혐오는 깊어가고, 자연은 파괴된다. 인류의 지식은 계속 쌓여가지만, 인간의 지혜와 이성은 오히려 오그라드는 것 같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인류 문명이 멸망으로 달리는 것 같다.


예로부터 노인들은 '세상이 말세야'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의 암울한 걱정도 내가 늙어가면서 하는 부질없는 넋두리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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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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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은 지정학에 대한 책이다. 그동안 우리가 여기 저기서 주워 들었던 국제적인 역학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근데 이 책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간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학 관계를 조성하는 지리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한반도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경유지라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근데, 한반도에 '지리적 천연 장벽'이 없기에 강대국들의 '경유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우리 나라를 험준한 산맥이 가로 막거나 아니면 거대한 사막이 가로 지르고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거라는 걸 나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국가 간의 역학 관계를 지리의 축복과 구속과 한계라는, 지리 자체의 관점으로 한 발 더 들어간다. 로키 산맥과 애팔래치아 산맥 사이의 광대한 평원이라는 미국의 축복, 평야와 가항하천이라는 유럽의 힘, 배를 띄울 수 없는 강이라는 아프리카의 제약, 우크라이나라는 방어 구역에 목을 건 러시아, 인도와 중국의 분쟁을 막아주는 히말라야 산맥 등.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지리라는 관점에서 설명해준다.


요새 보면 기존의 역사를 넘어서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도들이 많아 보인다. 새로운 내용도 없이 억지스러운 과장이나 아전인수격 갖다 붙이기의 상업적 속셈도 많아 보이지만, 어떤 책들은 새로운 지식과 관점을 깊이있게 다루기도 한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서 앞부분만 조금 읽었다가 대출 기한이 다 되어서 반납했던 '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라는 책도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기후'라는 나에게는 무지한 관점에서 역사를 풀어가는데 신선하고 흥미로왔다. 근데, 책이 읽기가 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제대로 읽고 싶은 책이다.


역사를 얘기할 때, '지리'라는 관점은 '기후'라는 관점에 비하면 훨씬 편하고 익숙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지리의 힘'은 덜 신기하고 덜 신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편하고 재미있다.


내가 볼 때 이 책의 장점은 '명확성'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각 지역의 핵심 특징을 짚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에 특징까지 짚어 준 다음에 얘기를 들어가니 이해하기가 매우 싶다. 게다가 오랜 경력의 기자 출신 답게 쉽고 명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랜 기사 작성 경력으로 단련된 기자 출신 작가들의 가장 큰 장점은 이해하기 쉽고 잘 정리된, 가독성 뛰어난 글을 쓴다는 점이다. 그 가독성이 때로는 미세함과 오묘함을 포기하고 거칠고 무리한 내용을 만들기도 하지만.


책은 국내에서 2016년 초판이 발간되었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2015년 경에 쓰여진 것 같다. 책 내용 중에 '니카라과 대운하' 얘기가 나오는데, 나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파나마 운하를 대체하기 위해 니카라과를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홍콩의 자본이 투입된다는 얘기였는데, 행간의 느낌으로는 배후에 중국 국가의 자본이 있는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니라카과 대운하는 건설 시작도 못한 사업이었다. 경제성이나 환경 파괴와 니카라과 현지 주민들에 대한 우려도 컸고, 해당 홍콩 자본은 그 사업과 무관하게 도산을 한 것으로 나왔다. 애초에 거품 가득한 사업이었던 것 같고, 중국의 국가적인 자본이 들어갈 사업이었다면, 자본가 한 명의 도산으로 쉽게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묘한 위화감이 들기도 했지만, 명확하게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책의 저자가 서구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기에 그런 것 같다.  한반도에 대한 내용이 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다면, 다른 지역에 관한 이야기들도 세부적으로는 묘하게 어긋난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거칠게 단순화시킨 느낌들이 들긴 하지만 쉽고 편하고 재미있다. 중국, 미국, 유럽, 러시아, 한국,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인도, 북극 등의 다양한 지역의 지정학적 특징과 지리적 조건을 이야기한다. (근데 책을 읽으면서 지리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가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중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누구처럼 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바보야, 문제는 종교야'  그렇지만 그냥 닥치겠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미처 요리되지 못한 익지 않은 식재료라면, 이 책은 그 재료를 뛰어난 조리법과 맛난 양념을 사용해서 차린 맛난 밥상인 셈이다. 게다가 이 밥상은 '지리'라는 명확한 주제를 갖고 차린 밥상이다, 마치 잘 꾸며진 계절 밥상이랄까? 다른 거 신경쓰지 말고 '지리'만 음미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된다. (참, 지리의 힘 2권도 나온 것 같다. 그 책을 당장 급하게 읽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용과 성형 의술이 떠올랐다. 인간은 '지리라는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배와 비행기를 이용해서 세계의 거리를 줄이고 있고, 파나마 운하를 개설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기도 하고, 수로가 될 수 없는 아프리카의 강들을 수력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만들거나, 인도와 중국의 정규군이 대규모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진격을 하게 만드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의술도 마찬가지다. 주름을 없애고 젊은 피부를 만들고,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뜨게 해주고, 날씬한 허리를 만들어 주는 현대 의술은 놀랍다. 신인 연예인이 유명해지면서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모습은 현대 미용 의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해준다.


근데, 그런 현대 의술도 여전히 못하는 것이 있다. 팔다리를 늘려주거나, 모여라 꿈동산같은 커다란 '대갈통'을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조막만한 '머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못한다. 옛날에 다리 뼈를 부러뜨려서 다리를 늘리는 기술이 뉴스에도 나오고 했는데, 부작용도 크고 비용이나 기간이나 고통도 커서 활성화 된 것 같지는 않다. 그 수술을 받은 사람이 다리 길이가 짝짝이가 되었다고 소송을 걸었던 뉴스도 기억난다. 내 짧은 생각에는 외과적 수술로는 불가하고, 유전자의 재조합으로 육체를 재생성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싶다.


여하튼 나는 궁금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험준한 산맥을 건설하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생겨날까? 인도나 중국의 정규군 대군이 히말라야를 넘어서 상대방으로 진격하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커다란 대갈통을 조막만한 머리로 바꿔주는 기술 중 어느 것이 먼저 탄생할까?


내기라도 걸면 재미있을 것 같다. 근데 내기를 걸 거라면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내 생각에 우리 인류의 현대 기술은 자연을 거스르고 있다. 레고 쌓기처럼 결국에는 무너질 기술을 무리하게 쌓아가고 있다. 기후 위기가 보여주듯이 인간 문명은 몰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문명은 결국 붕괴할 것이다.


대규모 군대가 히말라야를 넘어서게 만들어 주는 기술과 팔다리를 늘려주는 기술과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문명의 침몰, 그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 내기를 걸고 싶다.


근데 그 내기의 끝을 내가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기가 결판 나는 것이 백 년이 될 지, 천 년이 될지 몰라도 내가 살아남아 그 결과를 직접 볼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동박삭이나 므두셀라가 아니란 것은 확인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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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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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좋아했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떨고 있는 와인잔이 생각났다.
물을 반쯤 머금은 채
고주파의 소리에 폭발할 듯 떨리는 와인잔의 진동이 느껴졌다.
진동하는 유리잔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수성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 어떨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종이장처럼 얇고, 면도날처럼 예리한 감수성이 내내 불편했다.

우리는 뽀송뽀송한 아기를 겨울 벌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한다면
꽁꽁 싸매고, 싸매고, 싸맨 다음에 품에 푹 안고서야
간신히 나갈 것이다.
아기 없이 나 홀로 나가는 경우라도
내복과 두터운 바지와 털옷과 방한 파카로 중무장하고
거기에 손난로까지 하나 챙긴 다음에야
간신히 나설 것이다.

이들은 왠지 온통 벌거벗은 나신의 모습으로
벌판으로 나설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벙어리 장갑 할 켤레나 털 모자 하나 쯤은 챙겼을 지도.

햇살이 노곤한 봄의 벌판이나
하늘이 높은 가을의 벌판은 못 견디고
춥고 황량한 겨울의 벌판을 찾아 나설 것 같다.
그리하여
얼어붙은 대지에 눈보라 날리고 태양은 숨어 들어간
어둡고 춥고 쓸쓸한 겨울의 벌판을 만나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들의 작품은 태어날 것만 같다.

오래전 읽다가 던져버린 책 중에
길리언 플린의 '몸을 긋는 소녀'라는 책과
마커스 세이커의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라는 책이 있다.

몸을 긋는 소녀는 너무 우울해서 덮었고,
칼날은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는 너무 유치해서 덮었다.

그 내용들은 기억나지 않건만
오늘 종일 책 제목이 나에게 달라붙는다.
한강은
마음을 긋는 소녀 같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작가 같다.

이들은 나름 일가를 이룬 치열한 예술가들이지만
나는 이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힘들게 읽으면서
'이렇게 힘들게 써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렇게 쓰는 작가도 있어야지'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이런 책을 읽는 독자들도 있어야지.

그러나 나는 그 독자에서 제외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작품이 있어서
이런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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