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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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잘못이 없고 나에게도 없지만 세상과 소통할 때 비로소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가장 부조리한 집단은 군대였다. 회사보다 더했다. 80년 초반에 군 생활은 지금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부조리가 심했다. 군 생활 일상이 부조리였다. 간부들은 쌀과 부식, 기름 등을 빼네 팔아먹었다. 명령 대부분은 이걸 내가 왜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었다.

졸병 때 작업 나가기 위해 타고 갈 트럭을 기다리며 서 있었더니 지나가던 선임이 니들 뭐 하냐며 차가 올 때까지 쪼그려뛰기를 시켰다. 사단장이 오는 길에 바큇자국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빗자루질을 했다. 사단장은 헬기 타고 왔다. 군대 부조리는 밤새 이야기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회사도 만만찮다. 승진하려면 실력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사히 제대하려면,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침묵하거나 부조리를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부조리를 인정해야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p. 16, 첫 문장)'

<이방인>은 이 첫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첫 문장에 소설 모두를 담았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후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낸다. 이웃 레몽과 별장에 놀러 갔고 거기서 또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죽인다. 이 사건으로 뫼르소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카뮈는 <이방인>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p. 5 작가 서문)'

타는듯한 태양, 이마가 지근거렸다. 뜨거움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숨결을 실어 왔다. 불의 비가 쏟아지는듯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꽉 움켜잡았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우발적 살인이었다.

뫼르소는 묻는 말에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드러냈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지 않았을 뿐이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이 볼 때 뫼르소는 그들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살인을 했는데도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이란 사회적 시선은 뫼르소의 살인 행위보다 사람을 평가했다. 그 결과 우발적 살인은 계획적 살인으로 바뀐다.

거짓말을 거부하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낯선 사람 '이방인'이 되는 사회다. 그 사회는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는 실재하는 것을 말하고, 그의 느낌을 숨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사회는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p. 6 작가 서문)'


어차피 죽는 데 왜 살까? 죽음은 삶의 의미를 없애버린다. 어떤 가치가 나은 것이고 못한 것인지 죽음 앞에서는 그 기준마저 의미 없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만큼 부조리한 건 없다. 부조리한 죽음마저 애써 모른 체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종교에 기대어 다음 생의 구원을 소망하며 살 텐가.

'잠시 후에, 그녀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슬퍼 보였다. (pp. 56, 57)'

뫼르소의 삶은 모호하고 불확실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을 때 뫼르소는 죽음을 피하지도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인다.

뫼르소가 이끌어 온 삶 내내 부조리했다. '그것이 내게 뭐가 문제인가? 다른 이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이 내게 문제라고 여긴 것, 우리가 선택한 삶, 우리가 고른 운명, 단지 하나의 운명은 내 스스로 고르는 것이기에, (p. 157)'

모두 죽는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수도 있다. 억울하게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돼서 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부조리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올려놓은들 죽음처럼 어차피 바위는 굴러떨어질 텐데. 살아가는 것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살해야 하나? 바위 올리기를 그만둬야 하나? 신이 주신 삶인데? 신이 내린 형벌인데?

뫼르소처럼 부조리한 삶과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를 가둬둔 것들에서 벗어나 보란 듯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죽지만, 굴러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런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 반항해야 한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p. 11, 역자의 말)'


그 뭣 같은 군 생활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거나 탈영했을지도 모른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시시때때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정년퇴직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내가 찾은 의미가 뭔지 모르겠지만 시시할 것 같다고?

<이방인>을 읽은 나의 대답은 '시시한들... 뭐가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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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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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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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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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가 꾼 악몽은 다니던 직장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 꿈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분했다. 성실했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늦게까지 일했으며 나름 실적을 개선하기도 했다. 평생을 회사를 위해 일했는데 그런 내가 이런 대우를 받으며 퇴직해야 했나. 억울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비둘기>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은행 경비원 조나단 노엘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풀어냈다.

'샤랭통에서 살았을 때, 1942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걸었다.... (p. 6)'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며칠 후 아버지도 사라져 버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생면부지의 친척 아저씨 집에서 농사를 거들며 살았다. 파란만장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누이동생마저 없었다.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은 아내는 과일 장수와 눈이 맞아 떠났다. 좋지 않은 일은 겪은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다. 평화롭게 살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파리의 작은방을 얻었다. 보금자리로 여기며 은행 경비원을 살아온 조나단, 연말에 8천 프랑만 내면 그 방을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상황이었다. (p. 14)'

출근하려고 방문을 연 조나단은 복도에 나타난 비둘기 한 마리를 발견하고 눈이 마주치자 공포를 느낀다. 조나단은 그날 끔찍한 하루를 겪게 된다. 30년 동안 흐트러짐 없던 그만의 경비원을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공원에서 만난 거지의 태평스러운 인생을 보니 화가 났고 질투가 일었다. 공원 벤치 나사에 걸려 바지마저 찢어졌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작은 공간에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았다. 세상을 나에게 왜 이러는가. 50대 남자의 작은 바람조차 들어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p. 90)'

복도에 비둘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 허름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조나단은 내일 자살할 결심을 하고 잠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아침에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천둥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단 말이야!' (p. 105)'


그래도 그 직장에서 한평생을 보내며 아이들 학비를 보탰다. 35년 동안 직장 생활한 덕에 쥐꼬리만하지만 연금도 받는다.

무엇보다 조나단이 공원에서 만난 거지처럼 남들이 자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보지도 않는다. 집에 화장실이 두 개나 있다. 줄 서거나 눈치 보면서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니 최소한의 자유는 누리고 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게 천만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아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지나온 삶을 억울해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없지 싶다.

고작 비둘기에 놀라자빠져 악몽을 꾸는 셈이다. 그 비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의 수고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소리쳐 도움을 청하면 내게 다가올 가족, 친구도 있다. 하찮은 비둘기 따위에 왜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이 쌓아 올린 견고한 삶이 무너질까. 소유하려는 집착이 원인이다.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선 조나단 노엘은 빗물 웅덩이 한가운데서 어느 여름날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이 웅덩이 저 웅덩이를 찾아 철벅거렸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 있는 로카르 부인의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뒤 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p. 108)'

조나단이 어릴 때처럼 웅덩이 물을 철벅거리며 자유를 누리듯,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가지 회사 생각이 다른 것들로 채워져 내가 다니던 회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조나단이 자살할까 봐 마음 졸이며 읽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조나단이 복도에 다다랐을 때 비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도,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회사가 나오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퇴직 후 억울함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소중한 삶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서.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너를 방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 하게 만들고, 가두어 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실패한 거야... ' (p. 19)'

비둘기는 또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갓 새에 지나지 않은 비둘기일 뿐이다. 곧 날아가 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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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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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실험을 했다. 설교 발표까지 남은 시간에 따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행동에 큰 차이가 났다. 시간이 촉박한 참가자는 10% 정도만 도왔지만, 시간 여유가 있는 참가자는 63%나 도왔다.

'나라면 우산을 받쳐 들고 그와 함께 차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전에 나는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급행열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일쑤인 나는, 핸드폰 속 좁은 화면을 응시하느라 주변을 거의 둘러보지 않는 나는 아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한 사람만이 약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세계에 나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pp. 87, 88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퇴직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 청소하시는 분과 처음 인사를 나눈 것도 그즈음이다. 이젠 제법 친해져 말도 주고받는다. 차 타고 획획 지나쳤던 한강 산책로, 이제서야 걸으면서 숨어있던 계절을 발견했다. 우리 동네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은 것들도 눈에 띈다.

안보윤 작가 말마따나 퇴직 전까지 나는 시간을 뭉텅뭉텅 잘라가며 보냈다. 벌써 4/4분기네. 서른 살이 되었고 마흔 살, 쉰 살이 됐다. 다 큰 아이들이 학창 시절을 아내만 간직할 뿐 내 기억에 남은 건 달랑 몇 장면뿐이다.


<외로우면 종말>은 가만히 하루를 들여다보는 안보윤의 첫 산문이다. 가만히 보니 시간 속에서 작가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보인다.

비겁했던 나, 친구를 봄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던 나, 사람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썼던 나. 나를 다독여 주고 싶은 하루도 있었다.

틀에 맞춰진 친절함은 없지만 타인을 성실히 보살피는 이웃, 큰 사고를 당해 억울한 텐데 사고를 일으킨 노인을 걱정하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친구,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 할 일이 없어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진리가 뭐야, 엄마? 아이가 발가락을 꼼지 대며 다시 물었다. 변하지 않는 거야. 약속하는 거? 약속은 깨질 수도 있잖아. 진리는 안 변하는 거야. 절대 안 변한다고, 매일매일 똑같다고 믿을 수 있는 거. 아이가 살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p. 187 당연하다는 착각)'

엄마와 아이에 사이에 달그락달그락 소란이 있었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까지 부단히 노력했을 나날들. 춥거나 덥게 지내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 매일 날씨를 알려주는 가족. 그 모습에서 아주 작은 쉼표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 회복이란 무언가를 부러 뜨리고 이어 붙이듯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손을 뻗어 기울어진 바를 다잡아 나가는 과정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p. 170 한밤의 산책자들)'

산책할 때 만나는 칠십 대 초반의 엄마와 삼십 대 아들이 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과 매일 걷는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빼먹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잰걸음으로 아들을 뒤따라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내와 나는 기도를 한다. 아들이 꾸준히 나아지기를.

가만히 안보윤의 시간을 보며 나의 시간도 가만히 들여다본다. 예전 같으면 바쁘게 지나쳤을 것들, 사람들.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오다가 땀에 젖은 채 청소하시는 분을 만났다. 아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드시라면 건넸다. 이 세상에 있는 줄 꿈에도 몰랐을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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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 계획
야가미 지음, 천감재 옮김 / 반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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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료스케는 나카야마 출판에서 천재 미스터리 소설 편집자로 통한다. 잘나가던 다치바나는 담당한 작가가 플롯을 도용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단행본 논픽션부로 쫓겨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치바나는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살해 협박 내용이 담긴 원고를 받는다.

'프롤로그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나는 당신을 죽일 겁니다.
절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p. 39)'

사실 다치바나는 열한 살에 술에 찌들어 손찌검을 일삼는 아버지를 죽였다. 아들을 보호하려다 대신 온몸에 멍투성이가 된 어머니도 죽였다. 편들어 줄줄 알았던 어머니가 오히려 아버지를 두둔하며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증거가 사라져 아무 일없이 지나갔다.

'나는 어떻게 죽일까? 하는 구체적인 수법 외에 어째서 범죄자로 성장하는 걸까? 하는 측면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p. 175)'

그 이후에도 미스터리 소설 편집자답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살인,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왜 죽는지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살인을 계획하며 꿈꾸며 살인을 두 차례 더 했다.

마침내 다치바나는 자신을 완벽하게 죽이려는 자를 찾아 나선다. 오히려 그자를 죽이려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살인을 계획한다.


웹툰 원작의 드라마 <살인자O난감>에서 이탕(최우식)은 우발적으로 첫 살인을 저지른다. 공교롭게도 살인을 가리키는 증거가 우연히 모두 사라진다. 이런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고, 자신이 죽인 사람들 모두 죽어마땅한 자들임을 알게 된다. 우발적 살인은 이탕의 능력이 되고 정의가 된다. 살인을 정당화한다.

'대다수는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 하고 의심한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아름다운 살인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어떤 우연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파괴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겹치는 우연에 극한으로 집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들키지 않는다는 아름다움이 생긴다. (p. 195)'

마침내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찾아낸 다치바나는 그가 세운 완벽하고 아름다운 살인 계획을 실행한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정말 우연하게도 그의 살인을 목격한 의외의 사람이 나타난다. 다치바나의 살인 계획은 완벽하지 않았다. <살인자O난감>의 이탕에게도 우연은 계속되지 않는다. 이탕의 살인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극의 살인'이란 뭘까요? (...)
... 간단합니다. 답은 심플하죠.
범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살인, 이게 내가 내린 답이에요. (pp. 291, 292)'

다치바나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살인자가 아니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눈에 아들은 스스로 여러 가지 놀이를 발견해 놀았다. 외발로 서서 깡충깡충 뛰는 놀이를 즐겼다. 꽃을 좋아하는 아들은 길가에 핀 꽃을 꺾어 꽃병을 꾸미기도 했다.

다치바나의 아들은 한 발로 서서 발끝에 체중을 싣고 뛰는 놀이를 가장 좋아했다. 나무 뒤를 뒤져 빈 껍데기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것들을 30분 동안 작은 산이 될 때까지 모아놓고 외발뛰기를 한다. 으적, 으적, 콰직. 으적, 으적, 콰직. 감자칩을 밟아 뭉개는듯한 느낌이 좋다. 아버지가 몹시 흐뭇해했던 것을 기억한다.


살아있지만 사회에서 배제시킴으로서 사회적 생명을 빼앗는 살인, 가해자도 피해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뒤바뀌기도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 구별이 안되는 살인이기도 하다. 살인. 혐오, 학대, 무관심, 가스라이팅, 차별 등이 살인도구로 쓰인다.

유괴해서 죽이고, 강간하고 죽이고, 강도질하고 죽이는 등 이기적인 욕구로 벌인 살인은 아무리 우연이 겹치더라도 완벽할 수도 아름다운 수도 없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살인은 없다.

그렇지만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르는 아름다운 궁극의 살인은 있다.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궁극의 살인이라도, 정의를 앞세운 살인이라도 살인은 살인이다. 벌받아 마땅한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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