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방관 심바 씨 이야기
최규영 지음 / 김영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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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한 명의 직장인이고 누군가의 가족이며, 용감해지고 싶지만 때때로 그것이 어려운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안에 살며 '사람' 소방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p. 6)'

저자 최규영은 글 쓰는 소방관이다. 필명은 '시골 소방관 심바 씨'. 한국인 최초로 1년 안에 세계 4대 사막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완주했다. 소방관도 서른여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가진 직업이다. 교환학생으로 아프리카 우간다에 갔었고, 깐풍기 가게를 망원동에 오픈해 운영했었고, 호주 악어농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로 일했었다. 청년 시절에 해낸 꽤나 많은 이력에서 심상치 않은 소방관임이 드러난다.


<시골 소방관 심바 씨 이야기>는 최규영 소방관도 밝혔듯이 소방관을 영웅으로 미화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죽음을 마주하고 나면 슬픔과 상실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슬픔에 무뎌지려 무던히 노력하기도 한다. 사나운 불길에 용기를 내보지만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

'우린 보통 사람들이 등을 지고 피하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하듯 들어가지만 소방관도 사람이기에 고민도 되고 두렵기도 하다. (p. 37)'

안락사에 처해질 유기견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홀로 무관심 속에서 삶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휠체어 노인을 구조하려고 나선다. 폭우가 지나간 후 나돌아다니는 소와 돼지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한다.

심바 씨가 그려내는 소방관의 세계는 울고 웃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냄새 가득한 우리들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소방관이 강철이라 여긴다. 그리고 소명의식에 가득 차 직업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소방관의 죽음이 각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당연시하며 슬쩍 지나치려는 심보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 건 아마도 이런 허무맹랑한 선입견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소방관으로 지내면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소방관인 내가 가장 흔하게 듣는 질문인데 막상 답변을 하려고 보니까 숨이 턱 막혔다. 사람들 생각에, 소방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꼭 보람을 느껴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유의 질문을 들으면 어쩔 땐 보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p. 201)'

보람이 강요되어야만 하는 직업은 없다. 보람을 대가로 소방관들의 희생을 상쇄하려는 건 비뚤어진 마음이다. 소방관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한 방편으로 택한 직업일 뿐이다. 그들도 두렵고 슬프고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들처럼... 우리들의 여느 이웃처럼.

다만, 심바 씨는 아버지의 심장이 멎는 날, 숨을 불어넣기를 다하지 못한 기억과 원망 때문에 소방관이 되었다. 그리고 곧 태어날 함박이가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알려주려고 이 책을 썼다.

'밝은 마음으로 꾸준히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가수 양희은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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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홈 The Home - 멋진 집은 모두 주인을 닮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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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모든 가족은 각자의 집에 산다. 말하자면 사람이 모두 특별한 존재이듯 모든 집은 특별한 집들이다. (...) 집이란 지금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장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담아 줄 어떤 포근한 도피처나 안식처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집을 잘 안다. 그러나 또한 집을 잘 모른다. (p. 5)'

TV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사부로 정재승 교수가 출연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배경을 보며 세트를 잘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말이 정재승의 교수의 서재란다. 이 책에서 첫 번째로 '뇌공학자 정재승의 책으로 지은 집'을 소개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집, '파이아키아'에 2만여 권을 소장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서재 이후 두 번째로 부러워 한 서재였다.

'집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서재다. 책이 주인공인 공간인 만큼 가구를 최소화하고 (...)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사실 책은 영감과 통찰을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 목표나 목적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죠. (...) 바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필요한 일에 몰입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p. 15)'

이사할 때 가장 먼저 신경 쓴 것이 흩어져 있는 책 2만여 권을 어떻게 모으느냐였다고 한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는 생각할 기회를 주는 공간이고, 영감과 통찰의 실마리가 가득한 곳이다. 그리고 책 읽은 이들이 꿈꾸는...
'가끔 책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엉뚱한 책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앉아 한두 시간씩 보낼 때도 있는데... (p. 15)'. 정재승 교수 집의 테마와 철학은 '서재에서 생각 산책하기'이다.


<더 홈>은 라이프스타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의 칼럼 '라이프&스타일'에 소개된 집 중에서 스물두 채를 선별해 엮은 책이다. 각기 다른 매력과 사는 이들의 철학이 담긴 집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이라는 공간을 바라보며 취재한 에디터들의 깊은 시선, 그들이 펼쳐내는 글솜씨는 집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멋진 표현들, 너무 좋다.

'레노베이션은 주어진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해야 하므로 포기해야 할 게 많지만, 재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메뉴가 탄생하기도 (p. 160, 163)'

'개인적으로 눈길이 간 곳은 지붕의 선. 마당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히면 사각 하늘이 올려 다 보이는데 한쪽 면의 선이 맞은편 선보다 비스듬히 높아 은근한 율동감이 느껴진다. (p. 193)'

'창문의 미학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된다. (...) 별처럼 생긴 단풍잎이 가로로 긴 창 가득 하늘하늘 일렁이는 풍경은 절로 '잎멍'을 부른다. (...) 봄과 여름은 녹색, 가을은 빨간색, 겨울은 흰색으로 풍경의 색과 서정이 확확 달라졌다. (p. 193)'

'집을 에워싼 들꽃 정원으로 이끌었다. 정원 입구에는 밤에 내린 별이 미처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듯 작은 꽃들이 반짝였다. (p. 213)'


아내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눈에 띄면 어김없이 멈추는 프로그램이 EBS <건축탐구 집>이다.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가끔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아내는 성에 차게 인테리어를 하지 못했다. 나의 반대 때문인데 직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 집은 그저 잠자는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내에겐 그렇지 않았다. 거의 하루 종일 머물다시피 하는 곳인 집은 나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생활하면서 아내는 집에 대한 많은 구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불편함을 편함으로, 거추장스러움을 단순함으로, 고를 때마다 심사숙고했을 가구와 소품들을 보며 후회하지 않을 결심을,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것까지. 연속된 선택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잘한 선택과 그렇지 못한 선택을 나누었을 것이고, 이 모두를 좋은 쪽으로 돌려 보려는 계획을 마련했을 것이다. 세워진 집을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총동원해서 밥을 짓듯 집이라는 공간을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퇴직 후 집이라는 공간에 아내만큼이나 머물게 됐다. 이제야 비로소 집을 지으려 했던 아내의 마음이 보인다. 이사 올 때 인테리어에 인색하게 굴었던 나 자신이 후회스럽다.

집을 나만의 방식으로 꾸미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인생이 그러하듯 집을 짓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집을 한번 둘러보기만 해도 집에서 집 주인의 모습을 보게 되고 냄새를 맡게 된다. 집 주인을 닮은 집은 집 주인의 녹록지 않았던 인생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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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A Year of Quotes 시리즈 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로라 대소 월스 엮음, 부희령 옮김 / 니케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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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간의 흐름과 현존에 대한 소로의 실험을 담은 책이다. (p. 6)'

지난해 8월부터 운동 삼아 걷기 시작했다. 아직 1년이 채 안 됐지만 여름, 가을, 겨울, 봄 사계절 모두를 경험했다. 걷기는 나에게 계절이 변하는 모습을 선물했다.

여름에 강가에서 초록빛을 띠고 싱싱했던 풀은 가을이 되면서 시들어갔고 숲의 나뭇잎은 붉게 노랗게 물들었다. 겨울이 되자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고, 여름에 무성했던 풀이 차지했던 곳, 그곳엔 땅이 드러난다.

봄이 되니 새순이 돋고,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색깔을 자랑하더니 지금 내가 걷는 길 주변엔 철쭉이 한창이다. 이제 곧 강가엔 또 풀이 무성할 것이고, 산에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길은 나무의 잎사귀에 가려져 모습을 감추게 되리라.

강물에 비친 노을은 하루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 위의 떠있는 오리, 냇물 속 먹이를 찾아 나온 왜가리와 백로를 보려고 걸음을 멈췄고, 바람을 느끼면서 바람이 부는 방향도 매일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의 색깔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발견했고, 시냇물의 물소리도 여러 가지임을 걷기 시작하면서 알아챘다.

'계절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라. 그 공기를 호흡하고, 그 음료를 마시고, 그 열매를 맛보고, 그 영향력에 자신을 맡겨라. 모든 자연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연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저항하지 말라. '자연'은 건강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이고, 계절들은 건강의 각각 다른 상태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봄에, 여름에, 가을에, 혹은 겨울에 몸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계절 속에서 잘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p. 269, 1853년 8월 23일의 일기 중에서)'


어릴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는 바로 나가 놀았다. 동네 뒷동산에서 놀기도 하고, 운동장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맨발로 공을 차기도 했다. 해거름녘 이면 밥 먹으라는 소리가 학교 담너머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 놀기를 멈출 때임을 알았고, 저녁 먹을 때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직장을 그만두고 걸으니 시계와 달력으로 조정되는 삶에서 계절이 때를 알려주는 삶의 길로 들어섰다.

계절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소로가 선물하는 하루 10분, 이 책에는 계절을 느끼는 법, 내 속에 계절을 찾아내는 법이 담겼다. 그리고 계절 속에서 아름다운 일 년을 풍요롭게 사는 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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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그리고 리더십 - 개인과 조직을 이끄는 균형의 힘
김윤태 지음 / 성안당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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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각에서는 조선 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균형'이라는 힘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p. 5)'

리더십 전문가 김윤태의 <조선 왕, 그리고 리더십>은 500년 역사의 조선 왕 스물일곱 명 중 태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선조, 광해군, 영조, 정조 이상 아홉 명의 왕을 선택해, 시대적으로 다른 환경과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성과를 얻어냈는지, 한 시대를 이끈 왕들의 리더십을 관찰한 책이다.


출중한 능력의 무장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대업을 이루어 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선택 상황에서 미래를 바라보며 냉정했어야 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리더십이 부족했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부족했던 강인한 책임감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능력을 갖췄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조를 안정시키려 후계를 준비했고, 후계자에게 위협이 될만한 걸림돌을 제거하는 악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 중 가장 사랑받는 세종은 소통과 위임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토론을 통해 정책을 결정했고 실행 단계에서는 주저 없이 신하들을 믿고 맡겼다. 또한 천민일지라도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해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 대표적 인물이 조선의 천재 과학자로 알려진 관노 출신의 장영실이다.

권력에 눈이 멀어 피로 왕권을 찬탈한 세조, 명분과 정당성이 없어 인정받지 못하다 보니 집권 내내 정권에 대한 도전을 끊임없이 받았다. 어떤 리더라도 옳지 않은 수단과 방법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서열 3위였던 성종은 정치권력의 타협에 의해 임금이 됐지만 그 약점을 견제와 균형으로 극복했고, 신하들의 그 어떤 지나친 직언도 수용한 관대한 리더였다. 하지만 조화와 안정을 추구하다 보니 개혁적인 선택은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보름 만에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을 떠난 선조는 무능한 군주로 각인되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세력이 없었던 선조는 붕당을 활용하여 왕권을 유지하는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갖춘 정치꾼이었으며 이황, 이이, 이순신 등 인재를 알아보는 출중한 능력을 가진 왕이었다. 무능과 유능함의 경계에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자기 확신이 부족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인재를 인정하고 세워주는 포용력이 없는 리더로 한계를 드러냈다.

광해군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를 취하는 변화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유연한 사고를 가진 현명한 리더였다. 하지만 서자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고 정치 집단과의 소통에 실패해 내치를 이루지 못하고 쫓겨났다. 뛰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왕이었다.

'탕평, 균역, 준천'이라는 눈부신 정책을 펼친 영조는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하는 애민 군주였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일했다. 사도세자를 죽게 한 실패한 아버지였지만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는 영조로부터 시작됐다.

열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는 인간적 슬픔을 가진 정조는 문학, 과학, 의학, 무예 등 다방면에 뛰어난 리더였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가진 정조는 200년 전에 평등을 꿈꾸며 노비를 없애려 한 개혁가였다. 그렇지만 민중에 의한 바텀업이 아니라 왕이 추진한 탑다운 방식의 변화는 한 사람의 의지로는 이룰 수 없는 한계를 드러냈고 기득권의 반발도 넘어서지 못해 실패했다.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해 백성에게 다가간 군주 정조가 죽자 조선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광해군의 의중은 명분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실리였다. 우방인 명나라는 달래고 후금은 자극하지 않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으로 강대 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으려 한 약소국 군주의 노력이었다. (p. 256)'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은 광해군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광해군이 펼친 실리외교를 지금 현실에선 찾기 어렵다.

'광해군이 신하들의 경고를 흘려들은 것은 한 여인 때문이었다. 광해군을 동궁 시절부터 모신 상궁 김개시(金介屎)였다. '똥 시(屎)' 자를 써 김개똥이라 부르던 천민 출신의 상궁이다. (...) 일개 상궁이 궁 안의 모든 일들에 관여했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조선판 비선 실세였다. (p. 260, 261)'

비선 실세가 국가를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이미 한 번 경험했다. 리더가 무능할 때, 다시 말해 리더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때 비선 실세가 등장하곤 한다. 비선 실세라는 소수에 의해 국가 경영이 결정될 때 위험한 이유는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능통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국가 경영에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


조선은 지배 계층으로 자리한 사대부들의 나라였다. 그들에겐 백성을 존경하거나 돌보는 리더십은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더 이상 신분과 권위에 대한 존중을 큰 가치로 여기는 시대가 아니다.

아직도 왕인 양, 사대부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리더라면 곤란하다. 책임보다 권한에 집착하고 대중들의 지지와 신뢰를 잃는 리더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가 아니다. 헌신적인 리더,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력을 갖춘 리더... 그리고

'백성들과의 소통을 통해 정책을 수립하려 했던 세종과 영·정조의 애민을 본받아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가 리더가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국민들의 바람은 한결같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정치인이나 지도 층에게 박수를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p. 357 에필로그)'

왕들의 리더십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대적 환경과 상황에 맞는 리더십이 올바로 선 나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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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 코코 샤넬 전기의 결정판
앙리 지델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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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인 알베르 샤넬은 아내가 죽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세 딸아이를 작은 마을 오바진의 고아원에 내버렸다.
'그리고 그 딸들은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딸들의 이름은 열세 살의 쥘리아, 열두 살의 가브리엘과 여덟 살의 앙투아네트이다. 가브리엘, 20년 후에 전 세계인은 바로 이 소녀를 코코 샤넬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p. 8)'

전기 작가 앙리 지델은 철저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곁에서 가브리엘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코코 샤넬의 파란만장한 삶을 꾸밈없이 재창조해냈다.

친구인 프랑스 시인 장 콕토가 본 코코 샤넬은...
'... 매력적이면서 호감을 주고 인간적인가 하면 혐오감을 주기도 하며 때론 너무 지나쳐 보이기도 하는 여성, 분노, 짓궂은 말, 창작력, 변덕스러움, 극단적 성격, 친절함, 유머, 관대함 등이 샤넬이라는 독특한 인물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p. 260)'


가브리엘은 디아길레프 니진스키, 보리스 코치노, 세르게이 리파르,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콕토, 라디게, 막스 자코브, 사티, 오릭, 미요, 풀랑크, 라빌 등 동시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사귀었고 남모르게 후원했다. 끝까지 독신으로 살았지만 샤넬 곁에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가브리엘에게 항상 용기를 주며 후원했던 에티엔 발장. 캉봉거리에 '샤넬 패션'이라는 간판을 걸도록 은행에 신용대출을 주선한 영국인 정치가이자 사업가인 아서 카펠, 가브리엘은 평생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어. 나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는 존재를 만났던 거지. (…) 그는 타인의 신세만 지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깨우쳐주었어." (p. 116)'

어린 시절의 불행이 비슷해 마음이 끌린 러시아의 드미트리 대공. 새카만 머리털에 거무죽죽한 안색, 남부 지방의 아주 강한 억양을 가진 땅딸막한 남자, 내면의 열정으로 빛나는 짙은 눈빛이 다가서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가브리엘은 르베르디가 다른 시인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 했고, 죽을 때까지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지적인 말 한마디, 재치가 넘치는 표현, 정확한 판단력을 갖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 바람둥이에 양심의 가책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하지만 예술가였기에 사랑한 광고 디자이너 폴 이리브까지... 가브리엘이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들이었다.


'그 순간, 빨간색 실크 태피터로 만든 커다란 커튼을 발견한 샤넬을 천을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커튼을 떼어달라고 했다.
"이걸로 만들면 아주 잘 어울릴 거야." 어리둥절해 있는 모녀 앞에서 그녀가 말했다.
몇 시간 후, 가브리엘은 무도회 드레스를 즉석에서 만들었는데,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마리 엘렌의 친구들이 모두 누가 만든 거냐고 물을 정도였다. (p. 442, 443)'

고아원에 버려졌던 시절과 뮤직홀의 마스코트 가수였던 이전의 삶이 싫어서 가브리엘은 자신의 삶을 재창조했고, '일하는 여성을 위한 옷'이란 패션 철학으로 여성의 삶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꼭대기가 원통형이고 작은 챙이 눈 위까지 내려와 삐딱하게 눈썹 부위까지 푹 눌러쓰는 종 모양의 모자를 만들었고, 엉덩이 부분을 낙낙하게 만들려고 옆선에 주름을 넣어 다소 눈에 띄게 만든 '샤넬라인' 원피스도 만들었다. 여성의 생활환경을 충분히 고려한 샤넬의 구상은 몸에 꼭 맞는 옷이 아니라 여성의 결점을 가려주는 헐렁한 옷이었다.

가브리엘은 진짜 보석과 인조 보석을 섞어 달고 다녔다. 가브리엘에게 장신구는 단순한 옷과 조화를 이루어 분위기를 살려주는 도구일 뿐이었다.

기다란 리본에 가위를 매달아 목에 건 샤넬은 자신이 '지나친 치장'이라며 혐오스러워했던 쓸데없는 장식을 가위로 제거해버렸으며, 레이스, 코르셋, 속옷, 심을 넣어서 몸매를 강조하는 옷을 입고 땀을 흘리는 여성에게 새로운 여성의 실루엣을 만들어 육체의 자유를 주었다.


가브리엘은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휴식은 없었다. 사업가로서 철칙은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패션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가브리엘이 이뤄낸 혁신은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상과 일에 대한 열정이 그녀만의 디자인 감각과 만난 결과였다.

허무에 빠져있기보다는 실패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 가브리엘은 '메종 샤넬'을 닫은지 15년이 지난 일흔한 살에 다시 열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녀의 나이가 여든일곱 살이 된...

'1971년 1월 11일 일요일, 리츠 호텔의 방에서 죽음이 그녀를 엄습했다. 일요일, 하필이면 오로지 일이 살아가는 이유였던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었다. (...)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죽는 게 이런 거구나." 깨달음의 순간에 힘겹게 하는 말, 위 대한 시대의 로마인들이 했던 그 말....... (p. 478, 479)'


신혼여행을 떠나며 공항 면세점에서 아내에게 결혼 후 처음으로 건넨 선물이 샤넬 향수였다.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했다. 아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직 모르는 나에게 이 단순한 육면체 모양의 유리병에 담김 금빛 액체는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C'라는 철자 두 개가 교차되어 있고 사각형의 새하얀 병에 검은색으로 CHANEL 이란 글자를 또렷이 새긴 단순함이 매력적인 샤넬 N°5를 아내는 좋아했다.

'가브리엘은 오바진 수녀원에 있을 때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미사 시간에 채색 유리창에서 두 개의 C를 보고는 공상에 잠기곤 했는데, 거기다 물랭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코코 Coco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우연까지 겹치지 않았던가. 따라서 두 개의 C를 운명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녀로서는 향수의 앞날과 C를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p. 225,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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