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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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도 소개한) 2004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인 이란 사람 메르한 카라미 나세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나세리는 난민 서류를 분실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번 터미널에서 18년을 지냈다.

영화 <터미널>에서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국적이다. 그저 멋진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뉴욕으로 향한다.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크로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보스키의 비자가 취소된다. 이때부터 미국에 입국할 수도 조국으로 귀국할 수도 없어 JFK 공항에 머무르는 악몽이 시작된다.

여권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 놓기도 한다.


<여행 면허>는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가능하게끔 만들기 위해 이들이 의존한 서류에 관한 내용이다. (P. 26)'

기원전에도 여권은 있었다. 여권은 우리 인류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또 여권은 어떻게 여행 꼭 필요한 것이 됐을까? 여권은 예술과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 정체성, 국가 권력, 국제적 불평등 문제까지 모두 여권에 반영돼있다. 이러한 여권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여행자는 반드시 여권이 진본임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서류와 자신이 일치함까지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p. 41)'

1976년 초가을 프랑스 영토에 도착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최근 발급된 이집트 여권을 소지했다. 오래전 사망해 미라가 됐는데 왜 여권이 필요했을까. 신원이 확인돼야 유해 이송이 가능하다는 국제법, 생사와 관계없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프랑스 법률, 사망자조차 출국하려면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집트 법률 등 그 이유가 다양하다.

츠바이크는 회고록에서 여권의 발달이 가져온 상실감을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행처럼 번져 각국 정부는 외지인을 점점 더 수상하게 여길 때였다. 정면과 좌우 옆얼굴 사진, 열 손가락 지문, 각종 증명서 등 범죄자를 떠올릴 정도의 굴욕이 여행자에게 부과된다고 츠바이크는 증언했다.

헤밍웨이는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급하고 엉성하게 휘갈겨 쓴 탓에 유명한 'writer 작가'가 아니라 'waiter 웨이터'로 오인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중에 여권 발급처 앞으로 정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세계 난민 실상을 알리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에서 아이웨이웨이는 수용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리아인 마흐무드와 여권을 바꾼다.

'이 교환은 여권 통제 의례를 신랄하게 패러디한 장면으로, 여권 소지자가 체류할 국민국가에 위협이 되는지 판정하기 위해 서류를 검사하고 소지자를 심문하는 대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여권, 자신의 신원, 자신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로 급진적인 환대를 표현한다. (pp. 266, 267)'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스마트 패스 서비스가 지난해 7월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했다. 간소화와 편리함을 앞세워 여권은 점점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 뻔하다. 디지털화는 신원 확인이나 국경 출입 과정 등에서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밀한 내 정보의 저장 및 공유를 더 많이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화된 개인 정보를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하는 움직임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NSK 국가의 여권, 국경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세계업무기구의 세계 여권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반反여권' 움직임은 더 이상 여권에 '좋은'이나 '나쁜'이란 딱지가 붙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신체는 지나가게 하는 반면 다른 신체는 붙들리는 일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서류로서 말이다. (p. 368)'

어쩌면 보완과 효율성을 핑계로 진행되는 여권의 디지털화는 제2의, 제3의 나보스키를 만들어 공항에 가둬두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반反여권' 움직임이 있어 다행스럽다. 여권 디지털화에 제동을 걸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도 전에 개인 정보를 토대로 누구는 환영하고 누구는 거르는, 그런 통제에 여권이 사용된다면 더 이상 이동성을 보장하는 여권으로서 기능은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어느 누가 뉴욕 JFK 공항의 나보스키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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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뇌과학 - 치매, 암, 우울증, 비만을 예방하고 지친 뇌를 회복하는 9가지 수면 솔루션 쓸모 많은 뇌과학 11
크리스 윈터 지음, 이한음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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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조금 좁은 공간에 아내와 누워있는데 어떤 놈이 아내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왔다. '저리 가!'라고 몇 번을 소리쳤지만 들은 체 만 체 계속 기어 왔다. 안되겠다 싶어 있는 힘껏 그놈을 발로 걷어찼다. 옆에 자던 아내가 '아야~ 으이그 증말~'이라고 소리치며 날 밀쳐내고는 돌아누었다.

잠결에 미안하다고 널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까 하다가 아내가 돌아누었기도 하고 깰 자신이 없어 계속 잤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아내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수면의 뇌과학>의 저자인 30년 경력의 수면의학자 크리스 윈터에 따르면 내가 겪은 일은 이상한 수면 장애 가운데 하나로 '렘행동장애 REM behavior disoder'이다.

'램행동장애는 뇌가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호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나타난다. 그 결과 밤에 꿈을 꾸는 동안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p. 264)'


수면 문제에 시달리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 해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밝힌다. 제대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혹할만하다. 경험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불면증은 고통도 심하지만 '이러다 내가 죽는 건 아닐까'하는 공포심이 더 대단하다.

'불면증은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며,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이 오지 않는 상태", "잠을 못 이루는 사실을 아주 많이 걱정하는 상태"를 뜻한다. (p. 159)'

우선 수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속설과 믿음을 짚어가며 잠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흔히 '한 잠도 못 잤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잠을 잤는데 단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인간은 잠을 잔다'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부터 수면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수면 문제는 잠을 충분히 못 자는 문제와 너무 졸리다고 느끼는 문제,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해결을 위해 수면환경, 불면증의 증상과 원인, 심한 불면증의 위험성, 수면제에 대하여, 수면 시간표 짜는 법까지 차례차례 다룬다.


항상 옆에서 자는 아내에 따르면 회사 퇴직 후, 억울한 게 많아서인지 욕을 하는 등 잠꼬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나도 느꼈다. 몇 년 지나고 나니 회사 꿈을 그다지 많이 꾸지 않게 됐고 잠꼬대도 줄었다.

나처럼 억울해서, 밤 근무 때문에, 걱정거리가 많아서, 경기에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것이 계속 떠올라서 등등 수면 장애를 겪는 사람이 3명 가운데 1명이다. 모두가 불면증을 앓고 있는 시대다.

앞에 소개한 나의 '렘행동장애'는 실제로 파킨슨병의 전조일 때가 많다고 한다. 이렇듯 수면장애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가.
'희망적인 것은 수면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몸의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p. 31)'

'수면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스포츠 스타, 군인들의 수면 코치를 맡아온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과학적으로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제 마음먹기에 달렸다. '렘행동장애'도 내 의지에 달렸다. 다만 시간은 걸릴 수 있다. 살찐 몸을 근육질 몸으로 만들 때도, 외국어를 익힐 때도 시간은 걸리지 않는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면 문제를 해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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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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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시, 소설, 그림, 조각, 음악, 그 무엇이건 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이 고안해낸 그 어떤 장벽도 초월한다는 믿음으로 이 책을 썼다. (p. 6, 지은이의 말)'

퇴직 무렵, 그동안 읽지 못한채 책꽂이에 꽂아놓은 책이나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블로그 대문에도 써놓았듯이 내게 앞으로 남은 생을 책으로 채워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책을 읽는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친구가 되주었다. 두려움이라는 장벽이 퇴직 후 내 삶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이 있어 그 장벽을 넘어 살아가는 중이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해협 채널제도 건지섬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작가 줄리엣 에슈턴 앞으로 배달된다. 그 편지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멤버 도시 애덤스가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 앞표지 안쪽에 적힌 줄리엣의 주소를 보고 보낸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하려 합니다. (...) 그의 유쾌하고 기지 넘치는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이 인생에서 엄청난 슬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p. 18, 19)'

이를 계기로 줄리엣은 건지섬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호기심을 갖게된다. 북클럽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 그들이 어떻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견뎌냈는지 알게되고 그 이야기를 <타임스> 컬럼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모저리 부인의 초대로 돼지고기 파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다 통행금지에 걸려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엘리자베스 메케너의 임기응변으로 탄생한 북클럽이다. 두 명의 회원들 제외하고 책을 가까이 했던 사람은 북클럽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한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p. 51)'

서간문 형식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편지에는 건지섬 사람들이 독일군 점령하에 받은 상처가 담겨있다. 불안, 갈등, 질투, 굶주림 등 참혹한 현실, 그 가운데 사랑이 꽃피기도 하지만 이별의 아픔도 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시작된 북클럽은 고아가 된 그녀의 아이 킷을 돌봐주는 등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보살핌과 우정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유머와 따뜻함이 있어 더한 감동을 준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과 다양한 채널로 책모임을 갖고 있다. 우선 그들과 평어를 사용하면서 나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차려입고 외출도 한다 (가끔 아내와 함께). 그들 덕분에 웃기도 한다. 나이든 사람과 말상대를 해주니 수다도 떤다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잘 안된다).

이 책이 탄생한 배경에도 '문학회'가 있다. 메리 앤이 1980년 건지섬을 다녀온 다음 20년이 지난 후 글쓰기 모임 회원들의 글을 쓰라는 재촉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씨앗이 됐다. 책과 책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들이 절망적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진정한 유대의 힘을 보여줬듯이.

'건지섬 주민들이 독서를 은신처 삼아 독일군 점령기를 견뎌냈듯이 (p. 433, 애니 배로스가 메리 앤 섀퍼를 기억하며)' 나도 책을 사랑하는 책 친구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친구들, 책을 같이 읽는 책 친구들의 유대의 힘에 기대어 '60 이후의 공간을' 책읽는 기쁨으로 견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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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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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 주 중부 분빌 마을 근처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p. 9)'
나는 1960년 초반에 한강을 사이에 둔 북한 접경 지역의 경주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p. 8)'

나는 1980년 초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민주화운동 시위가 한창이어서 대학에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한가득인 때였다. 졸업 후 기업에 취업해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내가 원하던 직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한 채 정년퇴직했다. 그래서 회사 동료들 가운데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스토너는 학자가 될 환경은 아니었지만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의 인정을 받아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p. 31, 32)'

가장 연한 파란색 눈을 가진 이디스는 스토너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딸아이를 돌보는 일은 무척 기뻤다. 모든 사랑을 딸에게 주었다. 딸과 행복도 잠시였다. 이디스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학교에서는 장애를 가진 로맥스 교수가 스토너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p. 272)'
로맥스는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마저 깨뜨려 버렸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의 결혼생활에도 불행이 찾아왔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아이를 보지도 못하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가 가없어요.”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아버지가 가없어요. 편안한 삶이 아니었잖아요."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입을 열었다. "그랬지. 하지만 나도 편안한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와 제가… 우리 둘 다 아버지를 실망시켰죠?" (p. 381)'

스토너는 남들이 보기에 실패작처럼 보일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우정을 원했지만 친구 한 명은 전쟁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다른 삶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서툴러서 열정이 죽어버렸다.

캐서린을 사랑했다. 아쉽게도 마지막에 스토너는 그 사랑을 포기하고 캐서린이 혼돈 속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학교 강단에 서고 싶었고 그 사명에서 온전한 순수성과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p. 388)'
스토너는 자신의 책을 펼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질 때까지 책장을 넘기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스토너의 인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가 살아온 삶도 한 장 한 장 넘겼다. 우리들 대부분은 여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되어 뜻하지 않았던 분야의 일을 한다. 사랑에 실패해 쓴맛을 보기도 하고 뒤늦게 남몰래 해야만 하는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만하면 잘한 결혼이라는 생각도 한다. 아이와 사이가 좋은 시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도 간혹 있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직장에서는 내 앞 길을 막는 꼴통 같은 상사를 만나 괴로움을 겪기도 하지만 뒤돌아보며 애써 별일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만한 몇 명의 친구가 남아있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특별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의 삶과 스토너의 삶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은 날 어떻게 볼까? 나름 내가 하는 일에 성실하게 임했고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아부었다.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살면서 만난 여러 불행과 슬픔을 제법 잘 견뎠다. 스토너처럼.

영웅적 서사에 익숙해 그런 삶을 성공으로 본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으니 나는 실패한 삶일 수도 있다. 스토너처럼.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p. 390)'
하지만 스토너가 죽음에 이르러 생각해낸 이 질문을 나도 떠올려보면, 무엇이 진정 옳은 삶이고 아름다운 삶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을 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견뎌냈고, 물리쳐 승리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물러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스토너의 삶이 내 삶에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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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소리가 들려 - 청소년이 알아야 할 우리 역사, 제주 4·3
김도식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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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생인 두 아이가 고등학생 시절 모처럼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첫 방문이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해안을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바람이 참 많은 곳이었다. 참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제주 4.3을 몰랐었다. 그 아름다운 곳에 혹여나 아이들이 해를 당할까 봐 제주 4.3을 쉬쉬하는 부모들이 살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김도식 동화 작가의 <바람의 소리가 들려>는 청소년들이 알아야 할 역사 가운데 제주 4.3을 다룬 이야기다. 이때 제주도민은 29만 명, 그들 중 10분 1인 약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 토박이 수혁과 옥희, 그리고 육지에서 이사 온 준규는 꼬마 삼총사다. 이 셋은 산속에서 모험 놀이를 하던 중 바람 소리가 들리는 동굴을 발견한다. 해방된 후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건국을 둘러싼 진영 논쟁에 휩싸인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끝나갈 무렵 총격으로 희생자가 발생한다.

'"경찰이 아이를 치었다!"
놀란 기마 경관이 제주경찰서로 도망갔고, 도망가는 경관 뒤를 흥분한 군중들이 쫓아가기 시작했다. 경찰서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경찰들 사이에서 누군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잠시 뒤, 다른 경찰이 또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p. 64)'

이후 제주도에서는 무장대를 찾아 나서는 토벌대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시작된다. 군인이 된 수혁은 토벌대와 함께 산속으로 피해 숨은 준규를 쫓는다. 마침내 수혁은 어릴 때 모험 놀이하다가 발견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그 동굴에서 준규를 발견한다.

제주 4.3은 이들 셋의 젊음을 짓밟았다. 사랑도 엇갈리게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세월이 흘러 이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채 그대로였지만, 상처를 감싸줄 우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간 많은 문학 작품이 4·3사건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하고 인간의 내면과 실존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 나는 빛바랜 흑백 사진 뒤에 숨겨진 청춘들의 이야기, 시대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그들의 눈부신 젊음을 알리고 싶었다. (p. 219, 작가의 말)'


우리 가족이 처음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는 제주 4.3을 몰랐다. 아빠가 몰랐으니 당연하다. 지난해 봄, 딸아이에게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권했다. 이제라도 늦었지만 제주 4.3을 제대로 알고 그 아픔을, 제주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아픔을 마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소녀가 바람에 나부끼는 옷깃을 감싸며 넌지시 물었다.
"얘,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제주도 올 때마다 한 번씩 엄숙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어야 한다. 예전에 아주 슬픈 일이 있었대. 너도 그거 알아?"
소녀의 말에 소년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만 주억거렸다. (p. 217)'

수혁과 준규, 옥희가 묻힌 제주도에서 그들의 손주들이 언덕에 올라가 꿈결같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아름답게 핀 붉은 동백꽃을 보며 옷깃을 여미듯, 우리 아이들도 제주도에 갈 때면 아니 가지 않더라도 4월이 되면 한 번쯤 애도하는 마음으로 옷깃을 여며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뼈아픈 비극의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주 4.3과 영원히 작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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