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 - 나를 사랑하기 힘들었던 식이장애 그 8년의 기록, 롱롱데이즈
라미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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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는 저자가 8년여동안 식이장애로 인해 고통받았던, 그리고 그 긴 터널을 뚫고 나오기까지의 힘든 여정을 기록한 그림 에세이다.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외모를 평가받는다. 남자들은 태어나면 못생겨도 장군감이네, 남자니까 괜찮아라며 외모에 관대하지만 여자들은 태어나면서 쌍거풀 수술해야 되겠다라는 등 외모를 평가받는다. 

여자의 외모와 날씬한 몸매를 사회의 기준으로 그 기준을 따를 걸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저자 라미는 그 기준이 저자에게 식이장애를 불러 일으키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먹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지고 살 찌는게 무능력처럼 비춰지기에 이런 정신적인 고통이 차곡차곡 쌓여 폭식과 구토를 병행하는 식이장애는 외로움의 부작용까지 초래한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마인드로 무장도 해 보고 여행 및 다이어트 등 많은 수단을 강구하지만 일시적인 해결책을 되어도 다시 원 상태로 복구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무엇보다 누구도 이 병에 대해 질병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여러 훈계만 가득한 일방적인 조언은 식이장애의 환자에게 도움은 커녕 환자를 정신적으로 더 고립시켜준다. 

8년, 결코 짧지 않은 긴 세월을 빙빙 돌아 저자는 자신이 해 왔던 모든 방법들이 다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고 이 식이장애라는 질병이 사회에서 여자에게 가해지는 하나의 폭력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여성의 외모가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리고 품평회를 여는 듯 화장과 옷차림이 평가받는 여자의 몸, 

그 가해지는 평가는 여성의 자존감을 하락하게 하고 그 기준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평균 이하로 몰아세운다. 무다리, 얼큰이 등 외모비하적인 별명들, 그 모습 자체로 인정해 주지 않고 더 노력해서 예뻐지라고 채찍질하는 이 사회는 먹는 음식 또한 죄악으로 규정지었다. 


모든 사람은 다르듯이 각 개인의 체형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체형만을 기준으로 다른 체형을 비하해오고 존중해 주지 못했다. 자신의 체형에 따라, 몸 상태에 따라 식이요법이 다르고 건강 관리가 다르지만 일방적인 기준 속에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방법만을 강구하니 실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인정하고 자신에게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부정적인 생각대신 다른 관심으로  자신을 생각을 보호하고 자신부터 상대방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누가 더 예뼈졌는지 말하는 게 아닌 상대방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며 응원해 주자고 말한다. 


나 역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몸이 워낙 뻣뻣해 스트레칭 등 유연성 운동을 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살을 빼는 유산소와 근육 운동을 고집했던 경험이 있다. 결국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던 악순환이 있었다. 나 역시 나의 몸을 무시하고 그 기준을 채우고자 내 몸을 존중해주지 못했다. 

자신의 몸을 존중해 주지 않도록 조장하는 사회. 이 기준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임을 저자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물리적인 푝력만 폭력이 아니였다. 더 예뻐지고 날씬해 질 것을 강요하는 그 자체도 폭력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저자와 같은 식이장애를 겪거나 다른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이 외모지상주의로부터 해방되며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식이장애 또는 그 비슷한 질병을 겪는 환자가 있다면 이건 환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탈코르셋 운동이 조금씩 시작되지만 아직도 거대한 이 외모지상주의 세상 속에서 조그마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나 또한 이런 나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더 이상 외모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이 작은 시작이 바로 온전히 나답게 살아갈 수 있고 건강하게 지켜줄 수 있는 첫걸음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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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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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직종의 사람들에게는 요구되는 첫번째 덕목은 친절함이다.

낯선 사람들에게 항상 미소를 띠며 그들의 요구에 언제든지 응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친절은 커녕 원칙을 지키지 않는 손님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호텔 주인이라면

아무리 호텔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방문객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문은강 작가의 소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의 주인공 고복희 사장이 바로 그 매정한 호텔 원더랜드 사장이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홀로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고복희 사장의 원더랜드는 고복희의 엄격한 호텔 규칙으로 인하여 손님이 거의 없는 적자 상태이다.

호텔 재정 상황을 걱정한 직원 린의 제안으로 한국인을 겨냥한 한달 살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 첫 번째 손님으로 한국에서 온 박지우가 호텔에 체류하며 프놈펜에서의 한 달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원더랜드와 프놈펜 한인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려진다.

무뚝뚝한 고복희, 한국어에 능한 현지 직원 린, 한인교회 목사 이영식,

간사한 김인식 사장의 직원 안대용, 그리고 기타 많은 한인 사람들..

이들에게 자신의 원칙만을 고수하는 고복희는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그리고 앙코르와트를 보지 못해 좌절한 투숙객 박지우 또한 고복희를 매정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 매정하게 느껴지는 고복희의 원칙은 고복희의 과거 이야기를 거슬러 오가며 고복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다른 시선에 개의치 않고 옳지 않은 일임에도 행동하며 정면 돌파해 나간다. 그리고 자신이 세워 놓은 원칙 하에 모든 사람들을 대해 나간다.

어떤 일에 자신의 감정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원칙을 가지고 대함으로 타인의 평가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제공해 준다.

어떤 순간에서도 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고복희에게서 타인을 향한 배려를 배운다.

투숙객 박지우와 현지 직원 린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그저 그대로 바라만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때론 외롭더라도 자신만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고복희의 존재는 그가 고집스럽게 고수한 그 원칙이 바로 고복희란 존재를 지켜주고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고복희의 사별한 남편 장영수가 없었다면 고복희는 지금의 자신일 수 있을까?

조개를 먹으며 프로포즈를 받았지만 고복희의 특이한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며 응원해주던 장영수의 존재는 고복희가 고복희일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혼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이다.

고복희에겐 장영수가, 린에겐 고복희가, 박지우에겐 이 원더랜드의 여행에서으 만남이 새로운 희망이 되어 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봐 줄 수 있을 때 서로의 존재가 빛이 될 수 있다.

내가 본 고복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대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박지우는 박지우대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고 린 또한 새로운 인생을 찾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시선에서 조금 부족한 안대용마저도 고복희의 눈에는 동등한 존재일 뿐이었다.

고복희에겐 자신의 원칙대로 해 나갔고 그의 행동은 한인교회 목사마저 부끄럽게 했다.

읽고 난 후 고복희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소설이다. 디스코텍에서 꼿꼿이 앉아 있는 고복희와 호텔 프런트에서 홀로 서 있는 고복희의 모습이 대비되며 웃음을 자아내게 해 준다.

고복희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굳건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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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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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어떨까?

그것도 지지리 궁상인 인생에 갑자기 60억을 들고 나타난다면?

김범 작가의 소설《할매가 돌아왔다》는 염병으로 죽은 줄 알있던 할머니가 돌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텔레비젼에서 보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봉은 그저 텔레비전에서만 가능할 뿐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상봉은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일제 시대 때 일본 현병과 바람나 아버지를 밀고하고 자식들을 두고 일본으로 가 버린 할머니를 반길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부모라고 하더라도 보고 싶은 마음보다 원망이 더 큰 건 당연한 감정이다.

가족을 배신한 대역죄인인 할머니의 한 마디에 온 가족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일본에서 택시 회사를 했다. 이번에 정리했더니 한국 돈으로 한 60억 되는구나.

너희들에게 물려주면 세금을 제하고도 거의 40억은 된다고 하더라."

60억. 평생 허리띠 졸라매도 1억을 벌기 힘든데 하물며 60억이라니! 이 60억에 할머니에게 원망을 퍼붓고 자식이기를 거부한 가족들은 할머니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다.

그리고 저자는 이 할머니가 정말 60억이 있는지 뒤를 캐는 가족들의 행보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들과 할머니의 잊혀진 67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펼쳐나간다.

가족들이 할머니와 떨어져 있던 시간은 상관없이 할머니의 돈에만 관심을 갖고 만년 백수인 동석은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갖으며 할머니가 왜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밑에 이 일제 시대 가장 이용되기 쉬웠던 피해자가 바로 여자였음을 그려진다. 그 과거에서 시작된 폭력과 상처가 또 다른 이름으로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67년이나 지났지만 시대는 여전히 그 피해자인 여성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으며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들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또 다른 폭력임을 가해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굴레를 뚫고 자신의 생을 되찾기까지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자는 할머니의 생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폭력은 못 배우고 힘없는 할머니뿐만이 아니다. 대학전임강사이자 이혼 후 건물을 받아 건물주가 된 여동생 동주의 삶에도, 동석의 첫사랑이지만 배신하고 절친 상우와 결혼한 첫사랑 현애의 삶에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오직 가해자만 몰랐을 뿐.

똥이 무서우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있다. 더럽기 때문에 피한다는 말은 또 하나의 비겁함이 될 수 있고 회피가 될 수 있다.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부딪히며 이 시대의 편견과 거짓을 향해 나아갈 때 진정 길이 열릴 수 있음을 밝혀주는 할머니는 이 시대의 만연한 폭력들에 대하여 더 이상 피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준다.


이 무거운 소재를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지 않고 재치있게 이끌어가는 저자의 필력이 참 놀랍다. 저자는 시종일관 유머와 감동을 잘 버물린 양념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첫 출간된 지 7년이 넘어 재출간할 수 있게 된 힘은 바로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삶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숨은 폭력과 피해자들이 많음을 말하는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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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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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문학상 수상작인 <최후의 만찬>이 조선 정조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다가왔다.

전혀 연관되어지지 않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과 조선 시대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까라는 의문 속에 이 소설은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 속에 역사 속 인물들을 불러들여 혼란의 정조 시대로 독자들을 소환해낸다.

<최후의 만찬>은 정조 시기 서학, 즉 천주교를 믿는 교인들을 핍박하던 혼란의 시기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독실한 천주교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십자가를 섬기었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개인의 믿음이 한 국가를 흔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죄목이 없음에도 죄목을 만들어서 핍박하던 이 혼란의 시기, 이 종교를 자신의 권력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노론의 정치 공세와 이들 사이에서 무기력한 정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모습 속에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이 겹쳐진다. 촛불 위에 세워졌으며 촛불대통령이라고 명명하고 이상은 높지만 야당과 극우 보수세력에서 무기력한 현 대통령의 모습, 온갖 정치 이슈들을 자신의 권력 수단으로 이용하는 야당의 무자비한 정치 공세, 그들의 모습 속에 힘없이 죽어나가며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

저자가 그려 놓은 이 소설 속 조선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데칼코마니처럼 느껴져 씁쓸함을 자아낸다.

처형된 윤지충의 집에서 발견한 <최후의 만찬>그림이 정조에게 전달되며 정조는 이 13명의 인물들에 관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저자는 본격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인물들을 불러들인다.

민속화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 그리고 역사 속에서 홀연히 사라진 장영실, 조선 최대의 실학자인 정약용과 여령 도향, 박해무와 그 패거리들까지 소설 속에서는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최후의 만찬>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맞추어진다.

이 소설은 조선 시대, 규율과 한계가 명확하며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고 강요하는 이 시대의 한계상에 대항한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중점으로 그려진다.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믿음 아래 죽어가면서까지 믿음을 택하며 영생을 택한 천주교인들,

천주를 믿지만 현실에 타협해야 한다며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놓기 두려워했던 정약용,

조선 시대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뛰어난 지능으로 과학적 업적을 세우지만 추방 되어 홀연히 사라진 장영실..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반역을 꿈꾸는 오라비 도몽과 박해무의 패거리들..

이들 모두는 현실 속에서 싸우며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타협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과 믿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 소설 속에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다.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며 체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변화의 희망을 놓지 않으며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 등을 저자는 심오하게 보여준다. 혼불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왜 이 작품을 대한민국의 과거,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평을 내렸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한국어문학과 교수인 저자의 전공답게 저자는 풍성한 사료를 예로 들며 이 소설을 장식한다. 그래서 다소 읽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역사 속에 맞추어지는 그 고리, 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지는 최후의 만찬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낸다. 다만 인물을 축소하고 그 인물들의 이야기 폭을 더 넓혀갔다면 더 풍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이 사회에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조선 시대의 한계와 그 고통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주하여 현재에 반복됨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질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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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이 제가 아닌 다른 누구로도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자꾸 힘들게 합니다. 제가 정말 잘 할 수있는 제 일을 찾아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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