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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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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해도 박완서 작가님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문학계의 큰 거목인 박완서 작가님은 돌아가신 2011년 이후 9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작가님의 작품들은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오고 있다.
작품이 아닌 자신의 모든 작품에 수록한 서문과 발문만 발췌하여 낸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제목을 접했을 때 과연 이 짧은 발문만으로 박완서 작가님을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의구심 속에 시작된 나의 독서는 시작되었다.
박완서 작가님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사십 세의 늦은 나이에 집필을 시작했다. 결혼과 출산 후 아이들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게 될 만큼 성장한 뒤에 작가님은 그 남는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뒤늦은 출발, 그리고 남들이 하는 문학 수업 또는 스승도 없이 덜컥 쓰기 시작한 자신의 위치가 하나의 짐이 되는 작가의 고백은 화려한 여성이 아닌 뒤늦은 출발에 선 한 여성의 홀로서기와 고뇌를 엿보게 해 주며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때때로, 내게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나의 불신과 내가 해 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나의 질문 속에 작가님 또한 열등감 속에 더 열심히 뛰어야 했노라는 글은 내게 한 없는 위로를 주었다.
그 뒤늦게 작가의 길을 달려가는 자신의 제2의 인생의 첫 작품 <나목>이 작가님에게 개인적인 애정을 품게 된 건 어쩌면 엄마와 아내의 이름에서보다 박완서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설프게 틈입자처럼 문단에 뛰어들었다는 열등감과 소외감이 항상 나에겐 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최소한의 조건, 사물의 허위에 속지 않고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직관의 눈과,
이 시대의 문학이 이 시대의 작가에게 지워준 짐이 아무리 벅차도
결코 그걸 피하거나 덜려고 잔꾀를 부리지 않을 성실성만은 갖추었다라는 자부심 역시 나는 갖고 있다.
박완서 작가님은 1.4후퇴 후 텅 빈 서울에서 몰래 숨어 있으며 그 긴장과 공포를 언젠가는 꼭 기억해서 글을 쓰리라고 다짐한다. 자신이 이 역사의 산 증인이며 그 기억을 자신의 작품 <목마른 계절>에 자신의 경험을 써내려간다.
6.25와 1.4후퇴 등 자신의 경험등을 모두 차곡차곡 글에 담아 하나의 작품을 쓰며 회상하는 작가님의 모습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경험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그러함으로 모든 경험이 소중하며 우리는 우리만의 경험과 기억을 붙잡아야 한다.
무의미한 현실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의미 있는 것이 되고,
나쁜 기억도 무력한 현재를 고양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40세의 나이에 등단한 작가님이 1985년 집필한 소설<서 있는 여자>에서 보여준 발문이다.
지극히 가부장 시대를 살아온 작가님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평등 없는 관계를 고민하고 질문한 사실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어 매우 놀라웠다.
1931년생으로 출간 당시 54세의 연세에 결혼과 평등에 대해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건 그 시대상에 비추어 결코 쉽지 않다. 특히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여자가 평등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고되게 획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쓴 글에 보며 성평등이 예전보다 향상되었다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2020년을 한참 거슬러 1985년에 결혼과 평등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의 글은 훨씬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그 글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밀고 나간 작가의 뚝심은 존경스러웠다.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결혼이
과연 행복할 수 있나 없나라는 내 딴엔 좀 새로운 문제였다.
평등을 자신이 앞으로 애써 지혜롭고 고되게 획득해나갈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자기만은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독자는 거기서부터 비롯된 똑똑한 여자의 중대한 착오를 주의 깊게 봐주었으면 싶다.
글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는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소설이 단명하는 시대를 걱정하는 저자의 글은 갈수록 어려운 출판계를 나타내며 씁쓸해진다. 2000년도에도 책 특히 소설이 차지하는 위치가 급격히 줄어드는 걸 걱정하는 저자의 고민을 보며 순수한 읽기의 즐거움을 상실해가는 현 사회의 모습에 아련해진다.
좁아지는 출판시장에서 자신의 글이 출판계에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활자공해가 되지나 않았으면 하는 작가님의 바램을 읽노라면 거목 답지 않은 겸손함과 자신이 그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 엿보인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이 과연 작가를 표현해 낼 수 있을까로 시작되었던 독서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순전한 나의 우려였음을 깨닫는 시작이였다.
내가 읽지 못한 작품들이 많지만 이 서문과 발문만으로도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더 사랑스러워졌고 작가의 인생관과 글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세월과 함께 더욱 폐가 되지 않으려는 저자의 겸손을 엿볼 수 있었다.
단어 하나 하나의 선택에 몇 시간을 고민하고 경쟁 사회의 힘이 아닌 자연과 노동 사이에서 생겨나는 힘을 가르쳐주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으로 지은 동화책, 우리의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도 쉽게 읽힐지언정 가벼운 글을 쓰지 않으려는 작가의 글을 보며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시기까지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거울인 동시에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거울이 있어서 나를 가다듬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고,
글을 쓸 수 있는 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자신의 글이 결국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말한 작가의 고백처럼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 작가의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그리고 자신의 더 깊은 작품의 세계로 읽는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글을 읽고 초대에 응하지 않을 독자가 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