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바이블 : 2020 EDITION - 특별 개정증보판
케빈 즈렐리 지음, 정미나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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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판부터 시작해 벌써 2020년판까지 모았네요. 이만큼 충실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와인 종합서는 드물겁니다. 특히 지역별 와이너리와 와인, 좋은 빈티지를 소개하는 부분이야말로 이 책의 고갱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와인을 고르고 추천할 때 가장 먼저 이 책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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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을유사상고전
묵자 지음, 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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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묵자


겸애와 비공, 수성의 달인과 같은 몇 가지 키워드로만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묵자와 그의 학파, 묵가를 이해할 수 있는 원전 “묵자”가 완역되었다. 책의 첫인상을 말하자면1,3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두께가 마주한 사람을 위압한다. 다행히도 책을 펼쳐보니 원문(한문)과 한역이 나란히 쓰인 형태라 생각보다는 글이 많지 않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적다. 

고전(classic)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다 읽어본 적은 없는 책”이라는 정의는 이 책에도 딱 들어맞는다. 적어도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렇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고, 자세를 바로하게 만드는 준엄한 교훈도 있고, 뜻밖의 역사 지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대인에게는 어색한 문장과 글의 전개방식, 익숙치 않은 고사와 인물에 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는 듯 시선이 턱턱 걸린다.

그럼에도 묵자는 시간을 들여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몇 가지 질문들과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몇 가지 의문들, 그리고 상식과 통념으로 알고 있는 묵가 사상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몇 가지 대목들 때문이다.

1. 묵가는 과연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가?

통념과 달리 묵가는 사해동포주의나 만민평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유교적 이념, 그러니까 각자가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에 있고 그 자리에 합당한 도리를 다해야 비로소 세계에 질서와 조화가 확립된다는 사상에 가깝다. 천하가 혼란한 것은 각자가 각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통치자는 피치자의 삶이 나아지도록 끊임없이 신경써야 하며 피치자는 생산과 재생산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분을 무시하고 통치자가 방탕하고 사치하면 피치자는 도탄에 빠져 자포자기한다. 이러한 논리는 한편으로는 유가의 이상인 덕치에 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의 논리로 이어질 여지도 있다. 이상하다. 묵가는 분명히 공격은 없는 수성의 철학인데?

2. 왜 강자는 약자에게 관대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묵가의 두 번째 중요한 규범이 나온다.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오히려 힘 있는 사람(국가)은 힘이 모자란 사람(국가)와 어울려 평화롭게 지내야 마땅하다. 전쟁을 벌여 인명을 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나라 안에서 살인을 하는 것은 처벌받으면서도 전쟁으로 수만을 살상하는 것은 권장되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원칙이 때에 따라 달라지니 천하가 어지러운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보다 몇천 년 앞선 통찰이다. 심지어 근대 국제법의 논리, 그리고 주권국가는 국력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동등하다는 관념과도 맥이 닿는다. 나라 안과 나라 밖의 법칙은 다르지 않으며, 어디서나 강자는 약자를 살피고 공존해야 한다. 참 좋은 말이다. 

3. 지배자는 무엇 때문에 통치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왜 강대국이 약소국의 사정을 봐주고 권력이 있는 자가 힘 없는 백성을 삥뜯지 않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까?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방법에 대해 묵자는 답을 못하고 (이름처럼) 침묵하는 것 같다. 당대에 제후들이 자기 권력욕, 지배욕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전쟁 준비로 징발을 거듭하고 실제로 싸움을 벌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참혹한 현실을 멈추게 하려고 그런 철학을 내세운 뜻은 아주 잘 알겠다. 그런데 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왜 권력자가 권력자가 되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수천 년 후의 역사학자인 아자 가트(Azar Gat)가 내놓은 답을 보면 국내외적 권력 투쟁은 극단적인 고위험 고수익의 투자, 사실상의 도박과 같으며 그 도박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성과를 누리려고 한다. 사치와 향락까지는 아니더라도 필부필부보다는 훨씬 더 풍족한 재화, 영양상태, 더 많은 재생산의 기회가 생긴다. 이렇게 본다면 (좋은) 통치나 평화유지는 그런 혜택에 따르는 부수적인 의무 혹은 비용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묵자는 그걸 본질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가트의 이론을 다시 한번 빌리면, 전쟁과 폭력의 사용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한 이익창출활동에 비해 수익률이 너무 떨어져 더 이상 매력이 없어지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야 타당한 주장이다. 묵자는 무려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왜 방어와 수성 전술에 몰두했는지 이해가 된다. 1. 강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강한 힘으로 남을 겁박하고 괴롭히면 나쁜 것이다. 3. 그렇다면 적어도 남보다 약하지는 않아야 한다. 정확히 말해 남에게 침탈당할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4. 결론: 누가 쳐들어와도 다 막아낼 힘을 기르면 된다. 5. 모두가 이런 상태에 들어간다면 자연히 세계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세력균형, 공포의 균형, 혹은 핵억지를 통한 균형에 필적하는 수성의 균형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압도적인 방어전력을 갖춘다면 굳이 전쟁을 해야할 가치, 혹은 이득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방어력의 극대화를 통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쟁의 상대적 이득을 획기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현대사회는 (일단은) 묵자의 이상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해냈다고도 할 수 있다. 묵가 사상은 이런 의미에서 꽤나 근대적이다.

4. 프로토 공리주의?

묵가가 근대적인 부분은 이(利)를 중시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애(愛)와 이를 구분하고 있는 구절이 흥미롭다. 사랑하는 것과 이득을 챙겨주는 것은 다르고 상대에게 도움이 정말 되려면 사랑하기보다는 이득을 주라는 것이다. 통치자 역시 백성에게 무엇이 이득이 되는지를 고민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펴야지 과거의 관습, 관행, 전통, 규범 같은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유학에 대한 비판도 이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상업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추측건대 다른 사상에 비해서는 상업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물론 전산업사회의 사상이니 기본은 농업, 개간과 인구증가를 통한 생산력 증가에 방점을 찍고 있으니 아주 적극적으로 상업을 권장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다만 그러한 이익의 계산이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생계 중심적인 식의주문제에 한정되는 탓에 음악을 위시한 예술활동을 사치로 규정하고 억제해야 한다고 하는 부분은 묵가 사상의 극단적 실용주의가 보여주는 한계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지금 시대를 굽어볼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문화산업이 1, 2차 산업을 압도하는 현실은 엄청나게 개탄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전통적 관념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주객전도일 테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유용하게 쓰이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직업보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뭘 만들어내지도 않고 글자와 숫자, 기호와 그림만 다루는 일견 허망한 작업이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이런 상황 말이다.

아무튼 2000년도 넘는 과거에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국가,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궁구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비록 졸박하게나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곱씹어볼수록 신기하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는 동시에, 사실은 묵자와 같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질문 자체는 미결로 남아있을지언정, 곁가지에 있던 다른 수많은 고민과 걱정들이 해결되어 역사가 만들어지고 인류의 삶이 나아진 부분이 생긴 것이 아닐까 그런 결론을 내리고 약간 안도했다. 적어도 그때에 비해 인류의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것을 보면 묵자도 조금은 뿌듯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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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의 결혼 수업 - 어쨌거나 잘살고 싶다면
신디 지음 / 더퀘스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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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잘살고 싶다면
신디의 결혼 수업
신디 지음, 더퀘스트, 2019

1.5/3.0

결혼할 처지는 전혀 안 되지만 결혼에는 무척 관심이 많아서 글로 배운 것만으로는 결혼을 열 번쯤은 해본 듯한 나에게 또 결혼 관련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여태까지 읽은 책들은 대부분 번역서였지만 이번에는 한국 저자의 책이라  처음부터 뭔가 좀 더 각별했다. 부디 좋은 책이길 바라면서 책읽기를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직장생활, 친구관계처럼  다른 인간관계는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책도 읽으면서 부부관계는 저절로 잘 굴러갈 거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지 말라는 첫 마디부터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문장도 전혀 복잡하거나 난삽하지 않고 친근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해서 좋다. 이런 글을 보면 저자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전달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책의 구성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전 세대와 달리 우리는 결혼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결혼에 관한 우리의 환상을 하나씩 깨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한 다음 불화와 갈등의 원인과 양상, 관리방법을 구체적인 사례와 이론을 결합해 설명한다.

여기서 저자는 갈등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부부)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는 갈등은 소수이며 대부분은 평생 관리하고 조율하면서 안고 가야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가장 기억에 남는, 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고갱이를 몇 개 추려본다.

첫째, 갈등은 상대가 미워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일어남을 명심하라.

둘째, 상대든 나든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이 아니라 그 배후에 숨은 가장 원초적인 정서, 즉 일차정서가 무엇인지
파악하라. 그러려면 반사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단 숨을 고르고 자신의 마음도, 상대의 마음도 헤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셋째, 감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대해 ‘내가’ 반응하는 방식이다. 즉, 감정은 내 것이다. 남탓 하지 마라.

넷째, 부부는 어쨌든 서로에게  안전기지(secure base)가 되어야 한다. 싸우고, 다투고 갈등이 있더라도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는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이방인’임을 명심하라. 여기에서 재미있는 비유가 나오는데 스페인 사람과 중국 사람이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해서 “우리는 서로 성격이 안 맞나봐요.”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 애정을 표현하고 표현받는 언어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내 언어가, 상대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고 서로 그에 맞게 표현해주는 것이 건강한 관계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애착이론을 기반으로 연애과 결혼에 대한 조언을 하는 책은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이 쏟아져 나와서 식상할 수 있지만
이 책은 애착이론을 포함해 다양한 이론을 적절히 조합하고 있어서 뻔한 얘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건강한 소통, 건강한 대화, 갈등관리를 연습할 때 처음부터 그렇게 차분하게, 한 발 물러서서,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기 힘들고 쑥스럽고 어색하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조언에 더 신뢰가 간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처음은 언제나 힘들다. 연습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그게 결혼의 본질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결혼은 처음이고  더군다나 특정한 상대와의 관계맺음 또한 처음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혼이 결혼생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이혼도 공부하고 하라”고 조언하는 부분은 “결혼도 공부하고 하라”는 서두의 말과 수미쌍관을 이루면서 다시 한번 사랑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결국 준비 없는 성공은 없고 무조건 실패 없는 성공을 바라는 것은 요행이다. 그리고 내가 바뀌지 않으면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해도 내가 품고 있는 문제들은 절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준비라는 것은 물질적, 외적인 ‘차림새’가 아니라 오히려 걸맞은 ‘마음가짐’과 ‘앎’을 갖추는 것이다. 다른 관계나 일에서처럼 결혼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다만 건강한 관계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내가 나를 잘 알고 그런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내가 너무 싫으니 역시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다른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 한 권을 한 자리에서 다 읽을 만큼 흡인력 있게 잘 쓴 책이다.
물론 내가 이 주제에 각별히 관심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결혼이 이미 삶의 일부이거나 곧 일부가 될 모든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결혼을 앞둔 지인들뿐만 아니라 연애문제로 고민하는 모든 친구들에게 한 부씩 나눠주고 싶어졌다.

사진으로는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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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 미국 민주당의 실패에서 배우기
토마스 프랭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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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면
2. 미국 정치의 현실을 알고 싶다면
3. '진보' 정치세력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면

세 줄 요약

중하층 미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정치적 대변자가 없다. 
오죽했으면 트럼프에게서 대안을 찾았을까.
능력주의에 대한 종교적 광신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지.


1. 내가 망해봐서 아는데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세계의 수많은 정치 전문가들은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당연시했다. 감히 트럼프처럼 정치를 희화화하고 격하시키는 후보를 유권자들이 선택할 리 만무하다고 ‘믿었다.’ 그 ‘배운 사람들’의 의견이 정말 헛된 ‘믿음’에 불과했음은 금세 드러났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트럼프 신드롬’은 포퓰리즘, 미국의 쇠락, 자살적인 선택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로 덧칠되었다.

그러나 대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토마스 프랭크는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이라는 책을 통해 그처럼 대중을 내려다보고 계도하려는 소위 전문가들의 오만한 태도, 그리고 갈수록 그러한 엘리트주의에 영합하는 민주당의 노선 변경이야말로 사태의 근본원인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트럼프 현상이 미국 정치에 내재된 ‘잭슨주의적 속성’이며 나아가 엘리트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에 대한 대다수 중하층 유권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나의 분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주간경향 2016.11.12.)

많은 평론가들이‘중산층의 몰락’ 혹은 중간소득의 붕괴라고 쉽게 일반화하는 현상은 프랭크가 지적하다시피 그렇게 단순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직장이 문을 닫고, 자식의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고, 돈이 없어 아프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빚 때문에 말 그대로 집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들이 이웃들에게, 옆집에,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산층의 붕괴가 뉴스 기사 제목 정도로만 생각된다면 당신에게 그 여파가 미치지 않을 만큼 아직 운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사히 신문의 미국 특파원인 가나리 류이치가 2016년 대선 기간 쇠락한 미국 제조업의 대표 지역인 미국 중서부,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 주민들을 취재한 기록인 “르포 트럼프 왕국”을 보면 심지어 수십 년간 민주당원이었고 4년 전만 해도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마저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배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어리석고 감정적이고 ‘못 배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논리와 상황이 있었고 트럼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그들의 논리와 상황을 이해하려하기는커녕 ‘좋은 말 대잔치’로 일관했다.

아니, ‘좋은 말 대잔치’뿐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랭크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 유권자들은 클린턴 이후 민주당 정권이 어떻게 전통적 노동계급, 중산층 계급을 배반하고 그들의 삶의 기반을 잠식하는 정책을 펼쳤는지를, 비록 정확하게 집어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되었다. 그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을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망가뜨리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랭크가 민주당에게 “제발 들어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민주당 지도부가 그런 실패조차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감의 발로다. 자신들이 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패배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민주당의 정체성이 표변한 것이다. “문화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거리낌이 없는 민주당의 지도자들이지만 기본적인 경제 민주주의 문제에만 직면하면 한순간에 행동하길 멈”추는 첫 번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민주주의의 금권정치화에 있다. 갈수록 선거는 ‘쩐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고 선거법조차 이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의 친구’였던 민주당도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친기업적이고 부자들에게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랭크가 보기에 이는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돈의 정치’만큼이나 민주당의 성격을 변질시킨 것이 바로 ‘학력의 정치’ 혹은 ‘능력주의 정치’라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즉, 고학력 전문직에게 대부분의 정치 의제와 정강을 잠식당한 것이 민주당의 현 상황이라는 것이다. 공화당이 ‘1퍼센트의 정치’라면 민주당은 ‘10퍼센트의 정치’가 되어버렸다고 그는 한탄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능력 있는 사람,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이 그에 걸맞은 일을 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능력주의는 그야말로 최선의 이념 아닌가?

2. 운칠기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즉 현대(modernity)의 속성을 탐구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더니티의 본질이 유동성(liquid-ness)에 있다고 보았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 한다는 것이 근대를 규정하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좋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지고 진보할 수 있다! 반면 어제와 같다는 것은, 한결같다는 것은, 변치 않는다는 것은 나태와 무지와 등치된다. 정체는 죄악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아무튼 진보와 발전은 좋은 것 아닌가? 

물론 추상적인 의미에서 개선, 진보, 발전은 긍정적 의미를 함축한다. 어제보다 더 지혜로워지고, 지식이 늘고,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나은 환경을 누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항상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진보, 개선, 발전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물, 생활양식 그리고 제도와 연관되느냐가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고 정신을 더 정확히 규정한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은 더 높은 학력, 더 고급의 학위로 대치되고,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삶은 결국 더 큰 집, 더 안락한 자동차, 더 쾌적하고 안전한 동네, 그러니까 더 많은 경제력으로 치환된다.

물론 모두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유동적 근대의 또 다른 면은 신분이나 인종, 성별과 같은 어떠한 제약도 없이 그러한 ‘발전’과 ‘진보’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으로는 말이다. 능력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토대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라면 결과가 어떻든 승복하지 않겠는가? 네 결과가 안 좋다면 결국 그것은 네 능력 부족 혹은 노력의 부족이다. 이 얼마나 공정한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의 능력(merit)은 능력주의(meritocracy)가 전제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순수하거나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학과 스티븐 맥나미와 로버트 밀러 교수가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는 개인에게 귀인할 수 있는 능력의 영향은 과대평가하고 비능력적 요인은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우리 모두는 출발점, 그러니까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들의 양과 질에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애초에 동일한 능력을 갖고 평가될 수 없다. 

게다가 그 상속은 단순히 물질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인맥, 학력, 그리고 부르디외의 용어로 유명한 문화자본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면 오바마와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양질의 교육’은 평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사회적 계층을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저커버그와 빌 게이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연 이 시대에 하류계급에서부터 잔다리를 밟고 올라와 자수성가한 사업가와 고학력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사업가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면 ‘보이지 않는 상속’의 힘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3. 민주당의 전향

그렇다면 미국 민주당은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프랭크가 2장에서 미국 국내 정치의 이른바 탈뉴딜화(de-NewDealization) 과정, 한 마디로 공적 영역의 축소가 대세가 된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기도 하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노선 변경은 국제정치적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전략적 선택이었다. 즉,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반전사상의 만연이 초래한 애국심과 공적 가치의 절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의 실패로 인한 정부 능력에 대한 불신 증가, 그리고 일본 등 신흥 산업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는 경제적 위기감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탈물질주의, 개인주의, 민영화, 경제 우선주의라는 기묘한 조합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이념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정치, 그리고 공적 영역의 축소다. (개인과 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사적 주체들은) 각자가 각자의 자유를 최대한 누릴 때, 즉 (보조든 규제든)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때, 각자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산권의 붕괴는 이러한 시대 조류의 화룡점정이었다. 정부와 관료라는 공적 기구가 계획을 통해 사회적으로 최적의 분배를 달성한다는 공산국가의 이상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는 공공 영역에 대한 시장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던 대안적 이념이 패배하면서 시장-자유주의는 이제 유일한 게임의 법칙(The only game in town)이 되었다. 동시에 각국의 전통적인 좌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9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이른바 ‘제3의 길’에 대한 논쟁 역시 ‘역사의 종언’ 이후 진보 혹은 좌파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미국 민주당의 행보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장기제가 모든 공적, 사적 영역에 지배적이고 무오류적인 규칙으로 수용되면서 모든 것은 효율성 제고, 경쟁의 승리, 성장과 팽창이라는 기준에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에서의 평등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전통적 좌파가 이러한 상황에서 제안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전이 결국 능력주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기준이 객관적이고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면 충분히 평등하지 않겠는가? 경쟁을 통한 성장이 결국은 모든 배를 띄워주지(float everyone’s boat) 않겠는가? 

4. 능력주의의 무능력

그러나 문제는 객관적 기준은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으며 동일한 기회는 그렇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출발선의 아주 작은 차이도 엄청난 결과의 격차를 초래할 수 있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연구 “교육-일자리 격차(Education-Jobs Gap)”에 따르면 재능이 고르게 분배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부유한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학 학위를 취득할 가능성은 나머지 인구에 비해 두 배 이상 크다. 결국 노동 인구에 편입되기 전부터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차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개인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되기도 전에 매장되는 것이다. 

심지어 언제 태어나고 언제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했느냐도 이후의 경력과 삶에 지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사회학자 아네트 베르나르의 연구를 위시한 여러 유사한 연구들은 사회생활 시작 단계에서의 임금 격차와 고용안정성에서 나타난 작은 불평등이 장기적인 임금증가율에 영향을 미치면서 심각한 불평등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밝혔다. 능력보다 타이밍이라는 말이다. 젊은 세대가 “지금 같으면 취직도 못할 멍청이들”이라고 상사들을 ‘까는’ 것은 그저 치기어린 불평이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와 모순을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과 절차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규제 완화와 자유화를 모토로 삼은 기제가 공정한 평가를 명분으로 수많은 규제를 만들어내고 미궁과 같은 법규와 규칙에 따라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평가절차를 수행하는 거대한 관료제를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을 언급한다. 병원에서 끊임없는 평가의 대상이 된 의료진들은 팀원 의식이나 협력, 무엇보다 환자의 안위에조차 무심해진다. 오로지 행동을 평가의 기준에만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가를 (받기) 위한 행정과 관리 업무가 원래 업무 시간까지 잡아먹는다.

게다가 ‘객관화된 수치’에 따른 평가는 그 평가대상의 원래 존재 목적마저 왜곡시킨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환자 수가 많아져서 평가가 나빠진다? 중환자나 긴급환자는 이제 받지 않으면 된다. 이윤이 줄어든다? 더 싼 재료를 쓰면 된다. 품질이 나빠진다고?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만 챙기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학계에서조차 보편적으로 일어난다. ‘객관화된’ 업적 평가를 받기 위해, 매년 정해진 논문 발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누구도 읽지 않는 논문이 양산된다. 그저 품질만 나쁘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좋은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위조와 사기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전염병학자 존 아이오애니디스(John Ioannidis)는 “왜 출판된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위조인가”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썼고, 2011년 강연에서는 6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한 것은 없다고 한탄했다. 그로부터 6년도 더 지났지만 와셋(WASET) 스캔들과 이른바 ‘제2의 소칼 사태’ 등을 보면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다. 

결국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주기 위해서는 최고의 능력자들을 선발해 최선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애초에 능력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지조차 불분명했고, 평가의 기준을 객관화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영역으로 축소함으로써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상황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능력이라는 요인이 (개인과 조직의) 성과와 성공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그 외의 우연적, 환경적 요인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과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했다. 그럼에도 ‘공정한 능력주의’라는 지배적 서사는 여전히 진리의 자리를 독점하고 있다. 올 초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을 두고 벌어진 이른바 ‘공정의 역습’(시사in, 2018.3. 5.), 그리고 그에 앞서 나타난 ‘일베식 공정성’ (시사in, 2014.9.29.)은 능력주의가 지금보다 더 엄격하고 ‘공정하게’ 적용되기만 하면 사회가, 그리고 내 삶이 나아지리라는 강력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5. 능력주의: 제2의 우생학

권력과 금전적 보상이 큰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사회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더 높은 자리가 더 능력 있는 ‘인종’으로만 채워지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할 사람이 있을까? 이 지점에서 능력주의와 사회진화론은 명백히 다르다며 펄쩍 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보면 둘의 유사점은 금세 드러난다. 둘 모두 궁극적 목표는 적자생존이다. 강하고 유능한 자는 보상받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또 다른 유사성은 바로 유전적(생물학적) 요인에 대한 강조다. 사회진화론이 타고난 ‘인종’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고 보았다면 능력주의는 순수하게 타고난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회는 이들이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논리의 치명적 약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어차피 성공할 사람(인종)이라면 왜 굳이 사회가 나서서 이들을 뒷받침해주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사회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적자(the fittest)’는 가장 강하거나 능력이 있다는 뜻도 아니거니와 오로지 사후적으로만 확정될 수 있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높은 확률로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물려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진화론도 능력주의도 무엇을 적자로 볼지, 어떻게 적자를 판별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습게도 적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적 승자’를 돕는다고 우기면서 ‘적자’들이 도태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2008~2009년 금융위기를 예측하지도, 제대로 대처하지도 수습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이해조차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운 ‘최고의 인재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오히려 두둑한 보수를 받고 민간 부문의 높은 자리로 ‘영전’하는 상황에 관한 토머스 프랭크의 분노에 찬 서술이야말로 이러한 ‘작위적 적자생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적합성(fitness)’의 기준이 너무나 획일화되고 단순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결국 지금의 능력주의는 ‘경제적 능력주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경제적 가치-라고 쓰고 ‘돈’이라고 읽는다.-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활동은 무능함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정권이 강조하는 ‘교육 능력주의’도 결국 ‘경제 능력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 업적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이에 대해 파울 페르하에허는 “오늘날 ‘지성적’이라는 말은 욕이나 진배없다. “그렇게 똑똑한데 왜 돈을 못 버니?”라는 물음은 현실을 비판하는 논문의 농담 섞인 제목으로 그치지 않는”다며 냉소한다. 

6. “아아, 사적인 세계에 소비자만 가득해.”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시민으로서 마땅히 공유해야 할 덕성, 보다 쉽게 말해 다른 시민들과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되어야 할 교육이 개인의 시장 경쟁력,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는 기술과 능력(이 있다는 인증)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린 상황은 마이클 영이 1958년 집필한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출현(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예견한 것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공적 주체로서 동등한 동료 시민은 사라지고 경제력, 더 정확히는 소비력으로 환원된 ‘능력’에 따라 서열화된 여러 소비자 계급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어렵사리 달성한 ‘모든 이들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 즉 1인 1표의 가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유대(bond)를 실종시킨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주권자로서 시민들이 정부와 공공기관에 요구하던 정치적 활동은 이제 기업에 대한 소비자의 불매운동과 소송으로 대체되었다. 존스홉킨스 대학 정치학 교수 매튜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이러한 현상을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의 전환”으로 칭한다. 이제 국가가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들마저 이제는 행정 ‘서비스’가 되어버렸고 그마저도 상당부분 민영화되어버리면서 시민이 정부에 직접적으로 항의하고 정치적 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다양한 공공서비스 제공에 사용되는 바우처(voucher)이다. 바우처를 통해 시민은 일순간 소비자로 역할이 바뀌면서 집단행동의 기회를 상실한다. 예를 들어,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주거 바우처로 대체하면 임차인 위원회가 공공 주택 당국(정부)에 집단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대신 당국으로 향했던 공동의 요구는 집주인에 대한 임차인의 개인적 불만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즉, 정부가 시민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응대하고 해결해주는 역할에서 물러나 돈이나 그에 준하는 것을 이전(transfer)하고 나머지는 개별 소비자가 시장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행정과 시장만 있을 뿐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통적으로 ‘사회 문제’로 간주되는 빈곤과 재분배의 문제조차 이제는 시장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프랭크 토머스가 10장과 11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연민사업’이 정확히 이에 부합한다. (이미 혁신적이고 유능한 부자들이 제공하는) 교육과 금융 서비스를 통해 빈곤계층이 스스로 창업한다면 빈곤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토머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액대출, 정보화 사업 등은 빈곤해결에 기껏해야 미미한 효과만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긴스버그가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라고 부르는 이러한 움직임은 원조, 개발, 자선, 나눔이라는 명목 하에 경제적 위계를 고착화시키고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때로는 정치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을 탈정치화(de-politicize)한다.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앤젤 투자, 임팩트 투자 등의 이름으로 기업의 이윤 창출은 공적 서비스와 혼동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윤 추구를 조금이라도 포기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히려 그들이 서서히 잠식해들어가는 공공 서비스의 품질이 나빠질 뿐이다.

미국 정치의 맥락에서 요약하자면 공화당은 사적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공적 영역의 확대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제한하고 반대로 축소시키려고 한 반면, 민주당은 공공 영역을 보다 ‘능률적으로’ 지켜내겠다는 명목으로 사적 주체들의 잠식을 허용하고 어느 순간은 둘 사이의 경계를 분간조차 할 수 없도록 뒤섞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의 핵심에 능력주의와 선부(善富)에 대한 이상적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학벌주의, 전문가에 대한 맹신, 인맥, 그리고 스스로 선하다는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았다고 프랭크는 일갈한다.

7. 더럽고 치사해도

하지만 시민에 대한 소비자의 승리, 정치에 대한 시장의 승리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정책을 ‘쇼핑’하고 정치인의 ‘오디션’을 본다는 한국 사회의 논의 역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들 중 경제적 담론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바탕에는 시장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깔끔’한 반면, 정치는 더럽고 비효율적이고 당파적이며 감정적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가 그런 것이다. 시장이 이미 가치 있다고 규정된 것들-즉, 돈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을 견주고, 교환하는 곳이라면 정치는 대체 아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설득하고, 반박하고, 판정하는 가치 판단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치 판단은 결코 합리와 이성만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모리치오 비롤리가 지적하고 있듯, 성공적인 정치적 설득은 로고스(logos)만이 아니라 파토스(pathos)와 에토스(ethos)를 반드시 수반한다. 결국 사적 영역(시장)이 깔끔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공적 영역(정치)에서 격렬하고 때로는 추잡하기까지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몇 세대 전만 해도 정치란 문자 그대로 피와 살이 튀는 활동이었고,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음을 생각하면 그나마 지금의 정치가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트럼프 신드롬을 포함해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스트의 득세 현상은 결국 ‘깔끔해진’ 정치가 포섭하지 못한 공중(public)의 정치적 의사표출, 공중의 귀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적 영역이 해야 할 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역기능적 상황에서 각 정체(政體, polity)가 겪고 있는 열병과 같은 것이다. 열을 낮추는 대증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 존재했던 공과 사의 엄격한 분리가 로마 시대에 소키에타스(societas)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 혼재되고 변질되었다며 현대사회는 이를 명확히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적 영역이 맡아야 할 재분배, 복지, 기간시설 개보수의 역할을 영향력 있고 부유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해버림으로써 모든 시민이 공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사적 시혜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society)는 사실상 시장이나 기업과 구별되지 않은 채로 개인은 소비자로서, 노동자로서 뿔뿔이 이산된 지금의 상황은 개인이란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던 고대 로마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귀결은 비슷하다. 우리 삶의 어떤 영역도, 심지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조차 공과 사는 함께 존재한다. 국가가 우리 삶을 속속들이 통제해야 한다는 파시스트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사적’ 행위가 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적인 것(res publica)의 편재성(어디에나 있음, ubiquity)을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리를 사적인 것들이 장악하고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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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민주주의 -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야스차 뭉크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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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추천?
1) 지금 각국의 정치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2) 민주주의가 과연 '좋은' 정치체제인지 한 번이라도 의심해보았다면
3) 민주국가에 사는 시민이라면

1. 알고보니 조건에 맞춘 결혼

일상 대화에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마치 냉장고라고 하면 당연히 냉동실과 냉장실이 함께 있는 제품을 생각하듯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단히 융합된(amalgamated) 정치사상이 되었고 다수결 선거제도에 기반을 둔 대의제와 삼권분립을 통해 제도로 구현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믿었다. 야스차 뭉크의 탁월함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러한 결합이 강력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는 점에 있다. 즉, 20세기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적 추세가 된 것은 후쿠야마의 표현처럼 ‘역사의 종언’으로서 보편적인 귀결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조건들이 (운 좋게) 맞아떨어지면서 가능했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우선 경제적으로 고도의 성장이 지속되면서 인구 전반의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향상되(리라는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 국내의 빈부 격차 또한 심화되지 않는 조건을 가리킨다. 대량생산 체제 하의 공장과 기업, 그리고 이들이 고용하는 대규모의 인력을 통해 완전고용에 근접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믿음은 대중이 위정자, 통치제도, 법률에 대한 신뢰를 품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각국 정부는 독자적인 재정과 통화정책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라의 안과 밖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분명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인종적, 문화적, 언어적, 역사적으로 비교적 균일한 하나의 ‘주류 집단’이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이 시대의 보편적인 정치단위가 되면서 앞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야기했던 분리주의나 식민지와 같은 국내정치적 원심력 또한 줄었다. (물론 인종 갈등과 인권 문제를 겪은 미국, 알제리 독립으로 국가 분열 위기까지 갔던 프랑스 등이 있으나 이들은 이전 시대의 유산 혹은 해소되지 못한 잔재였을 뿐, 이민 규모는 세계적으로 이 시기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 요인을 공고하게 만들면서 화룡점정을 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정보통신기술이었다. TV, 신문, 라디오로 대표되는 대중매체는 계급, 지역 등을 막론하고 한 국가 안의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 여론, 의견을 수렴시키는 역할을 했다. 뭉크의 표현처럼 이들은 뉴스와 정보를 중요도, 의미, 파급력에 따라 1차적으로 걸러내는 문지기(gatekeeper)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민 간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적어도 다양성(이질성)이 보편성(동질성)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본질적 긴장: 누구의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기술문화적 조건은 사실 매우 이질적인 두 정치적 충동(drive)을 억지로 끌어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권력의 일원화와 집중, 전횡을 거부하기 위한 사상이다. 즉, 전제적인 주권자 개인이 폭정을 저지를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권력기구를 쪼개고 서로 견제하고 이를 법과 제도로 명문화하는 것, 즉 입헌주의로 대표되는 법치와 분권이 자유주의자들의 최대관심사다. 

20세기 초 래스키(Harold J. Laski)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정치적 다원주의=자유주의=입헌주의의 전통은 권력 집중을 막는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해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득권, 즉 기존의 권력관계를 법과 제도로 고착시킨다는 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즉, 주권의 폭력성과 자의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훌륭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러한 비판의 대상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다. 한 국가 내에서 소수의 계층 혹은 집단이 전문성, 문화자본, 인적 네트워크, 법적 지식을 갖추고 분권화된 권력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체제가 1인 독재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지 의문이다. 뭉크가 언급하고 있는 대표성의 약화로 인한 비민주적 자유주의(undemocratic liberalism)가 이러한 상황에 다름 아니다.

반면,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분권이나 법치와는 무관하다. 다만 어떠한 통치자(집단)이든 대중(인민, 조직 구성원)의 뜻을 최대한 널리 수렴하고 반영하여 정책으로 시행하느냐, 그리고 무엇보다 그 뜻에 맞는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 통치자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정치체제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대중의 ‘뜻’을 어떻게 종합할 것이며, 그 뜻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는 또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기준의 모호성 혹은 부재야말로 민주정의 본질이다. 즉, 민주정이 어떠한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제도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판단기준은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엄밀히 말해 민주정(democracy)은 주의(-ism)가 아니라 정체(政體, cracy)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민주정은 독재정(autocracy), 귀족정(aristocracy)과 같이 권력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중요할 뿐 그것이 제도로 구현되는 방식과는 무관하다.  자유주의적 제도와 결합하면 자유민주주의가 되고 1인에게 대중의 뜻을 위임한다면 전제적 민주주의, 즉 대중독재가 될 수도 있다. 애초에 과정(제도)보다 결과(성과)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뭉크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가 곧 포퓰리즘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economy, stupid!),” “먹고사니즘,”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와 같은 구호가 각국의 정치판에 등장할 때부터 이미 포퓰리즘이 부활할 토양은 마련되고 있었다. 민주정의 충동을 제어하던 자유주의적 정치제도가 이제는 속박과 억압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3.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결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조건부 결혼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기반은 냉전의 종식과 세계화의 물결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자본의 세계적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기업의 생산, 판매, 유통이 국경을 초월하는 상황이 보편화되면서 국민국가는 경제적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려워졌고 ‘국민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결과적으로 재분배 정책 또한 약화되었다. 우리가 GNP(국가총생산) 대신 GDP(국내총생산)을 더 많이 듣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제는 자본(화폐, 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에 비해 노동(인간)의 이동은 여전히 제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화의 이득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재분배 정책 효과의 약화와 함께 국내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 프랑코 밀라노비치가 제시한 그 유명한 
‘코끼리 그래프’는 세계화의 과실이 선진국의 최상위층과 개도국의 중산층에게 집중적으로 돌아가는 반면, 선진국의 중산층 이하는 오히려 실질소득이 악화되는 양극화가 뚜렷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참조)

자유주의-민주주의 결합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한계에 봉착했다. 앞서 언급했던 경제정책을 위시해 환경, 에너지와 같은 초국가적, 범세계적 문제들이 등장하면서 어떤 정부도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이러한 새로운 이슈들은 모든 국가들의 동참과 협력에 대한 확약(commitment)과 조정(coordination)이 필요하지만 이탈하는 국가가 최대의 이득을 보면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유발하면서 결과적으로 각국 위정자들을 딜레마에 몰아넣었다. 즉, 자국에 (단기적으로) 최선이 되는 정책이 아님에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을 유권자들에게 설득해야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반대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런 상황의 반복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성과와 대표성에 대해 유권자들이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럽연합(EU)과 각국 중앙은행의 사례는 이러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의 위기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이러한 초국가적, 세계적 이슈들은 단기적 해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단기적으로 개인과 개별 국가에 (이전에 부담하지 않았던) 상당한 제약과 비용을 부과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가 단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러한 조정과정에서 (선진국의) 저소득층, 빈곤층, 덜 교육받은 계층이 상대적으로 가장 큰 비용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과(performance) 측면에서도 각국 정부는 과연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느냐는 지탄을 받기 십상인 구도다.

이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전문가에 대한 불신과 반지성주의 풍조와도 연관된다. 뭉크도 언급하고 있듯 선거비용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104-115쪽) 사실상 금권정치화가 진행되고 학력, 재산, 인맥의 관점에서 특정 집단, 심지어 소수의 특정 가문이 정치계를 과점하는 정치계급화는 이들을 ‘대중(the public)’과 유리시키면서 ‘정치전문가 집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한편으로는 정치를 혐오하면서도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정치인(아웃사이더)에 열광하는 세계적 흐름은 이러한 정서와 완벽히 부합한다. 

또한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지성을 ‘위임’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사실은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해 거짓 정보를 전파하고 있다는 (과장된) 두려움과 믿음은 더욱 ‘평평한(level)’ 정보통신기술의 확산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The Death of Expertise> 참조.)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오히려 전문가에게 판단을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시대는 가고 매번 모든 정보를 의심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국민국가 체제의 약화, 경제적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 정보통신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보의 무차별적 유통,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결합되면서 벌어진 대표성의 위기와 전문성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집약되어 나타난 현상이 바로 반이민 운동이다. 이민의 규모나 추세를 보면 (아마도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에서도 기존의 인종/문화적 주류 집단이 그 지위를 위협받을 가능성은 낮음에도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이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면서 작은 위협도 크게 다가온다. 

이는 경제학적, 뇌과학적으로도 설명가능한 현상이다. 인간은 이득보다 손실에 민감하며 인간의 뇌는 현재 상태의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즐거움, 두려움)에 따라 만족하거나 불만을 품는다.(<이타주의자의 은밀한 뇌구조> 참조.) 또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성취지위를 잃거나 애초에 획득에 실패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귀속지위(인종, 언어, 국적, 성별)에 집착하고(298쪽) ‘좋았던 옛날’과 ‘불안한 미래’를 대비시키게 한다.

4. 민주주의 4.0, 멋진 신세계, 혹은 1984?

그렇다면 주류 집단의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공포와 분노를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하고 이들을 교화하고 계몽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까? 아니면 뭉크나 잉글하트가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듯이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 빈부 격차를 완화하고 계급의 고착을 억제하면 자유민주주의에 충분한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문제해결 이론(problem-solving theory)만으로 미봉할 만한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잉글하트와 뭉크도 인정하듯이, 자동화의 확대와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의 출현은 경제적 세계화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파급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득은 (정치적으로 적절히 조정되지 않으면) 더욱 불균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크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보급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유경제가 붕괴된 기존 공동체를 대체할 새 공동체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도 시기상조다. 뭉크가 우버(Uber)의 사례를 통해 지적하고 있듯이(300쪽) 공유경제는 오로지 경제적 동기에 따라 한시적으로 연결된 수많은 공동체들을 만들었다가 해체할 뿐이며 오히려 장기적이고 지속성 있는 유대를 형성하는 기존 생활공동체(그것이 가구(household)이든 직장(company)이든)를 잠식하고 대체한다.

그렇다고 소수자 집단 보호와 개별성 존중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이른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답이 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뭉크 역시 이러한 ‘신좌파’ 중에서도 극단적인 측에서 강조하는  ‘문화적 전유의 전면적 거부’가 결국은 극우적 순혈주의와 동전의 양면임을 이론적으로 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며(261-263쪽), 현실 세계에서도 정체성 정치에 함몰된 정치 세력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지난 대선 미국 민주당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어주었다(<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참조). 개별성에 대한 존중은 결국 공동체성을 약화시킨 대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적인 공동체성을 제시하지 못하면 이 방향의 운동 역시 역사상 수많은 급진 운동처럼 단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뭉크가 제안하고 있는 ‘포용적 애국주의’가 한 가지 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기 위해서는 강렬한 공유 기억(shared memory)이 필요하다. 집단(에 속한 다른 구성원)과 나의 경계를 흐릴 수 있는 경험과 기억, 즉 ‘우리’의 관념을 강화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일시(identification) 혹은 경계의 모호함이 없어지면 근본적으로 가정도, 국가도, 공동체도 성립할 수 없다. 뭉크도 지적하듯이 이 부분에서는 교육 또한 큰 역할과 책임이 있다. 단지 사물에 대한 판단력만 있는 기술자를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313쪽) 인간에 대한 판단력 또한 갖춘 철학자를 길러내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치열한 비판은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모든 인간과 세계의 숭고함에 대한 존중과 경외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매트릭스 속에 들어가지 않는 한 생각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라는 관념을 가진 물리적 실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또한 그에 걸맞은 호구지책이 따라야 한다. 다만 그것이 뭉크나 잉글하트가 제시하는 조세제도의 개편이나 조세회피처에 대한 추적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세계경제는 있지만 세계정부는 없고, 자본 이동은 자유롭지만 노동 이동은 제약받는 근본적인 불균형 상황이 교정되어야 한다.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정치체가 등장해야만 해결될 문제다.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언급했듯 20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세 차례의 부침(wave)을 겪었다. 민주주의 첫 물결(대중 민주주의)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무너뜨렸지만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두와 함께 잦아들었고 그와 함께 제국주의도 함께 몰락했다. 두 번째 물결(반공산 민주주의)은 자유주의-민주주의-시장경제가 결합된 형태로 세계의 수많은 신생 국가들에 이식되었지만 일련의 군사 쿠데타와 공산화로 무너지거나 사실상의 독재로 변질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도래한 가장 최근의 세 번째 물결(반독재 민주주의)이 자유주의와의 결별과 함께 스러져가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소식은 불꽃이 꺼져가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민주주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 목도하고 있는 변화가 <시작된 미래>에서 피터 프레이즈가 예견하고 있듯이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라면, 우리가 기대하고 구상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4.0’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치체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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