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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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많은 이들을 어이가 없게 만든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 역사는 다시금 격렬한 투쟁의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재차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역사 자체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는 학창 시절 국사를 정규 과목으로 배웠지만 첫 시간부터 선사 시대로 시작되는 '지식으로서의 역사'만 배웠을 뿐,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같은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우리가 역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전에 역사는 이미 누군가가 규정한 모습으로 놓여져 있었고 그걸 정해진 식단과 순서로 기계처럼 암기했을 뿐이었다. E.H 카에 따르면 역사는 사유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역사만 섭취한 것이었다. 그것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을 고취할 의도로 왜곡된 역사를 말이다. 상한 음식은 반드시 배탈을 부른다. 똑같이 나도 뒤늦게 진실된 역사를 알고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영혼의 복통을 겪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이 배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국정화를 추진한다고? 다시 한 번 아이들에게 부패한 지식들을 마구 먹여 미래에 광범위한 복통과 설사를 유발토록 만들겠다고? 안될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역사를 올바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 자체에 대한 사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조석으로 변하기 쉬운 권력 관계를 생각해볼 때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뀌자 독재자 이승만이 국부로 미화되고 동상까지 세워지는 것을 보라. 이렇게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권력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기술될 수 있다. 그럴 때 올바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사유로서의 역사'일 것이다. 모두가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해 나가는 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잘 알고 있다면 제아무리 막강한 권력으로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왜곡하려 들어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에 동의한다면, 꼭 추천하고픈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여기서는 많은 것들이 흔들린다. 특히나 역사를 오로지 암기로 대했던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우리에겐 고정관념이 있었다. 역사를 순수한 과거 사실의 집적으로만 생각했고 그것을 연구하는 역사가 또한 좌고우면 하지 않는 공정한 판관으로만 여겼었다. 역사 기술을 뒷받침 하고 있는 사료와 문서에 대해서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는 그 모두가 오해라고 말한다. 역사에 기록된 그 어떤 과거 사실이든 그것은 특정 견해의 산물이며 그것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p. 24)고 말이다. 영국 역사가 배러클러프는 그것을 두고‘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비단 역사 사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물며 역사가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역사가를 대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그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일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다. 온전히 가치 중립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이나 이익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대변(p. 53)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가들을 종종 마치 독수리처럼 여길 때가 많다. 그렇게 높은 하늘에서 역사라는 지상을 내려다 보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객관적인 안목으로 관찰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행렬의 일원이 되어 지상 위를 터덜터덜 걸어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행렬의 영향에 부대끼면서 말이다. 이처럼 역사의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모두가 주관의 개입 앞에 여지 없이 무방비 하다면 역사를 이루는 과거의 사실 또한 온전히 과거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이란 어디까지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현재의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가 투영된 과거가 존재할 뿐이다. 더구나 역사란 카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들에 의해 발굴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과거이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은 만일 역사사가 그것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역사가에게는 죽은 것, 즉 의미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이며 역사란 사유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유를 자신의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다.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재구성 자체는 경험적인 과정이 아니며 또한 사실들의 단순한 나열일 수도 없다. 실제로는 그 재구성의 과정이 사실들의 선택과 해석을 지배한다 : 정말이지 이 재구성의 과정이 사실들을 역사적 사실들로 만드는 것이다.(p. 35)


 즉, 역사는 완결의 장소가 아니라 형성의 경로인 것이다.


 역사에서 절대적인 것이란 과거 속에 있는 출발점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현재의 사유는 반드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형성과정 중에 있는 어떤 것-우리가 전진하는 미래 속의 어떤 것, 우리가 전진할 때에만 형성되기 시작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전진함에 따라서 우리가 점차 과거에 대한 해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다.(p. 167)


 그것은 강물처럼 유동적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를 열었을 때, 비로소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있듯이, 현재에서 어떻게 포착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천변만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는 사료나 문서를 너무 숭배하지 말라고 한다. 역사서를 볼 때에도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가 썼으며 그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라고 강조한다.


 역사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우리가 역사책을 집어들 때 최초의 관심사는 역사가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p. 36)


 요컨대 기록된 역사는 정답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제 우리가 정답을 골라내야 하는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면 역사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입장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와 저자의 권위에 압도되어 내내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카의 말대로라면, 역사라는 것도, 저자라는 것도 단지 하나의 개별적 해석에 불과하니 이제 우리는 보다 더 능동적인 입장에 설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무엇을 내놓든 우리는 우리대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능동적인 사유를 통해 발화하고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우리의 대화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역사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인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그 해석이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간에-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이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하고도 얼마간 무의식적일 수 있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p. 46)


 여기에 나온 상호 작용이라는 말은 사실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카가 굳이 '대화'라는 표현을 쓴 이유 중의 하나도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회 그리고 역사와 우리가 서로 격리된 존재가 아니라 부단히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고립된 채 행한 개인의 행도에 관한 사실, 또는 실제적인 동기든 상상적인 동기든 개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동기에 관한 사실은 역사의 사실이 아니다. 역사의 사실이란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 그리고 개인의 행동에서 본인들이 의도했던 것과 자주 모순되거나 가끔 상반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사회적 힘들에 관한 사실인 것이다.(p. 75)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 있다.(p. 96)


 카는 어느 것 하나에 편중된 특권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인 시각도 거부하는 그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우리들은 아무래도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기독교가 바탕이 된 서양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역사를 진보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흔한 예로 중세보다 지금이 더 진보했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카는 역사의 진보를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 또한 전혀 동일하지 않다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주 진보를 입에 올리고 실제 진보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카에 따르면 모두 착각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진보라는 이름으로 주입한 관념을 별 비판없이 수용하여 답습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고 있는 진보에 대한 기준이란 것이 오로지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증거하는 것들에게만 치우쳐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란, 서양 문명에 대한 우리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위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고 동시적인 진보인 것은 아니며 또 그럴 수 없다. 의미심장한 것은 요즘은 저 몰락의 예언자들 거의 모두가, 다시 말해서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진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저 회의주의자들 거의 모두가 몇 세대동안 문명을 전진시키는 일에서 지도적이고도 두드러진 역할을 의기양양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지역이나 사회계급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p. 161)


 진보가 이러하듯이, 역사를 결정짓고 단정 지으려는 그 어떠한 시선도 순수할 수가 없다. 대부분 그것은 그렇게 보도록 만든 자가 속한 사회의 우월과 이해 관계의 반영이다. 하물며 그 저변엔 우리를 복종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서려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이렇게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시선이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버린 생각과 시야가 올가미처럼 씌워져 내 현재와 미래를 조이고 있었다면 적극적인 참여와 능동적인 사유는 그 결박을 끊을 칼이 되고, 진정한 자유를 흡입할 수 있는 통풍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역사 안에서 우리는 소작농이 아니라 유목민이 되며, 역사라는 장소는 단지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무수한 참조를 통해 보다 더 나은 현재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숨쉬는 대지로 탈바꿈 한다. 그 땅에서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사유의 거처를 짓고 대화로 정착할 수 있으며, 현재 사정이 달라져 더이상 의미를 발굴할 수 없다면 홀연히 떠날 수도 있다. 그렇게 카는 우리에게 아주 광할한 자유의 대지를 선사하는 것이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 우리를 구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도 환경의 억압과 우리가 숨쉬는 대기의 압력에서도 우리를 구제해야 한다.(p. 64)


 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지를 보며 난 둔중한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를 독단의 세계로 생각했다. 결정되어 있고 확실한 정답이 존재해, 우리는 그 권위 앞에서 마냥 엎드려야만 하는 독재의 영토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가 보여주는 역사는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을 많이 닮아 있었다. 모두가 대등한 신분으로 참여하고 활발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민의를 형성해 나가는 그런 광장! 특히나 아고라를 떠올렸던 것은, 카가 참여하는 존재들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동등을 강조하면서도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올바른(여기의 '올바른'이란 역사의 객관성에 대해 공정한 수준에서 상호 인정할 수 있게 만드는 무언가를 뜻한다.) 기준 역시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고라에게도 발언과 토론에 있어서 서로 지켜야 할 규칙은 있었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그것은 그가 단순히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사실을 선택한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p. 169)


 이런 논의들은 내게 정말 새로운 것이었고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마치 나는 역사를 이제야 처음으로 만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말이다. 그래서 그만큼 학창시절에 만난 역사가 후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역사란 단지 누군가로 인해 꽉 잠겨진, 질식의 밀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역사가 대기에 자유가 가득한 광장인 줄 알았으면 나는 훨씬 더 많이 역사와 대화했을 것이며 어쩌면 삶의 태도마저 현격하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쓸모 없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아직 그런 밀실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이가 있다면 적극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참여와 사유 밖에 없다. 주어진 모든 것에 자신을 수동적으로 길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대화할 수 있는 영역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리 권력이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러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어떤 역사를 정답처럼 제시해도 결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스스로 그 정당성을 따져 물을 수 있는 존재가.


 학문에서든 역사에서든 사회에서든, 인간사에서의 진보는 기존질서의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일에 스스로를 제한시키지 않고 현존질서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공공연한 또는 은페된 전제들에 대해서 이성의 이름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인간들의 그 대담한 자발성을 통해서 주로 이루어진 것이다.(p. 210)


 물론 처음엔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낙관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 카는 그 믿음을 얼마든지 가져도 괜찮다고 한다. 우리의 모습은 현재의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전진하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그것이 바로 진보라고, 카는 말한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지 역사 외부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전진해야만 밝혀질 수 있고,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목표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무한한 진보-바꿔 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어떠한 한계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진보-의 가능성에 찬성할 것이다.  역사에서 절대적인 것이란 과거 속에 있는 출발점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현재의 사유는 반드시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형성과정 중에 있는 어떤 것-우리가 전진하는 미래 속의 어떤 것, 우리가 전진할 때에만 형성되기 시작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전진함에 따라서 우리가 점차 과거에 대한 해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는 어떤 것-이다.(p. 167)


 상호작용은 역사와 현실 사이에도 엄연히 존재하니, 결국 사유를 통한 역사의 상대화는 지금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중력마저 약화시켜 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단순히 죽은 활자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역사가 내게 고립과 추락의 불안을 선사하는 벽을 넘어가게 만들 사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카는 그것을 마지막 '지평선의 확대'에서 보여 준다. 모두가 서구 문명의 종말을 말하며 지극히 비관적인 색채로 현실을 그리던 그 때, 그는 어찌하여 종말은 커녕 현재에서 희망을 보고 미래를 낙관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역사를 보는 시야를 달리하여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애초에 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거기에 있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61년으로 카에 따르면 시대가 온갖 비관적인 전망으로 넘쳐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의 대화로 모든 비관들이 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엘리트들이 오직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를 보편화해서 말한 것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허황되고 섣부른 비관에 다른 이들이 물들지 않도록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카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고 있던 자유를 나눠주려 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시대를 절망으로 채색하고 불안과 초조에서 헤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시선을 가지도록 의도한 누군가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카가 행하는 사유를 통한 자유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슬을 푸는 진짜 열쇠는 우리의 머릿속에 있다. 그것을 찾고 싶다면 얼른 대화로 가득한 이 아고라로 뛰어드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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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04-27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참 재미없었어요 외워야 할 것만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걸 나라에서 감시를 하겠다니... 예전에 나온 역사책이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시 뒤로 가겠다는 것 같기도 하네요 위에 사람 좋게만 쓰는 역사책이 무슨 뜻이 있을까 싶습니다 올바른 역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잘못된 역사를 배우면 더 안 좋겠죠 요새는 이것저것 예전에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것도 다 맞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게 더 나을까요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다르게 말하면 그게 진짤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해요 그런 건 여러 사람이 말하는 걸 봐야 무엇이 맞을지 아주 조금 알겠네요 역사는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고 끝난 일이지만, 다시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 더 역사를 그대로 적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왕이 거기에 무언가 말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걸 못 보게 한 건 좀 아쉽지만... 참고할만한 것만 골라서 보여줬다니까요 어쩐지 아는 척한 것 같네요


희선

오드득 2016-04-28 23:00   좋아요 0 | URL
우리가 역사를 대할 때 가장 바라는 것은 객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에게서 공평무사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마주하길 바라겠죠. 그런데 카는 그러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역사는 의식적으로는 물론 무의식적으로도 편견과 왜곡이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역사를 대할 때 우리들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선 안되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따지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실을 걸러내는 작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있는 현재에서 그 역사적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석하고 만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조선에 이런 일이 일어났어 정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일어났다는 그 일이 지금 우리에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런 것을 더 많이 따져보는 것. 저는 카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그러므로 국정화처럼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이여 이런 것이야 말로 역사를 대하는 정당한 태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스스로 엄정한 사유를 통해 보다 나은 의미를 찾아 가는 것.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제가 뭘 알겠습니다만, 지금 생각으로는 그러네요^^
 
대지의 아이들 1부 : 동굴곰족 1 대지의 아이들 1
진 M. 아우얼 지음, 정서진 옮김 / 검은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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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은 내게 '응답하라'와 같은 소설이다.



 어렸을 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양의 아동문학을 번역한 시리즈로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에게 나름 유명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중, '100만년'이란 제목으로 6권의 연속된 소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백과사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선사 시대의 모습이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지라 무지 신기해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던걸까 참 많이 궁금했었다. 어쨌든 너무나 좋았던 소설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이렇게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감개무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다시 읽어 본 '대지의 아이들'은 어릴 때 느꼈던 감상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시켰다. 내가 읽은 것은 그 중 첫 권인 '동굴곰족'의 1권이다. ACE 88로 치자면 '100만년 동굴'과 '100만년 사냥'의 어디쯤 될 것 같다. 3권이 합쳐서 동굴곰족의 이야기였으니까. 번역이 훨씬 더 좋아져서 그런가, 선사 시대의 묘사가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대지의 아이들'은 작가가 선사 시대 소설을 쓰기로 하고 40세에 회사를 그만둔 뒤, 집필에 전념. 30년 동안 모두 6부가 나온 작품이다. 굉장히 방대한 양의 소설로, 1부가 '동굴곰족'이다. ACE88로는 2부인 '말들의 계곡'까지 읽었는데 부디 6부가 다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대지의 아이들'이 담는 시기는 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이 세대 교체를 할 무렵이다. 정확히 2,5000년 전이라고 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여성 에일라가 바로 크로마뇽인이다. 최근에 나온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크로마뇽인(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 부른다. 사실은 같은 뜻. '크로마뇽'이란 이름은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발견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를 알렸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와 유라시아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 대략 7만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유라시아엔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정착해 살고 있었으므로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이 진 M 아우얼이 이 대작을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그 상상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모으고 수차례 현지 답사까지 한 노력 끝에 결국 에일라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이 마주침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유발 하라리는 과학자들도 아직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략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데 하나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무리없이 섞였을 것이라는 '교배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에게 반감을 가져 상대편 인종을 마구 죽였을 것이라는 '상충 이론'이다. 아우얼은 '교배 이론'을  따른다. 동굴곰족 1부의 시작은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다섯 살 에일라는 며칠 낮밤을 헤매다 그만 동굴 사자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러다 같은 지진으로 예전의 거처를 잃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방황 중이던 네안데르탈인 씨족에게 발견된다. 씨족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골격을 가진 에일라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데 아마도 이미 크로마뇽인이라는 존재에 익숙했던 것 같다. 쓰러진 에일라를 본 씨족의 치료사 여성 '이자'는 그녀를 거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격한 남성 가부장제 사회인 그 씨족에선 여성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족장 브룬은 거부하지만 다행히 주술사 크렙의 도움으로 에일라는 이자에게 거둬져 목숨을 건지게 되고 결국 같이 살게 된다. 이렇게 공존이 가능했다는 '교배 이론'을 소설이 따르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자는 에일라를 거둔 뒤, 그녀와 함께 씨족이 거주할만한 동굴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동굴은 씨족이 가장 숭배하는 동굴곰족의 터전으로 밝혀져 그 때문에 이자와 크렙은 에일라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동굴에서의 삶이 시작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짜 매력, 다시 말해 선사 시대의 아주 상세하면서도 충실한 복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동굴을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냥을 통해 동굴의 정령이 과연 그들이 그 곳에 살 것을 인정하는지 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든지, 남성과 여성이 사냥과 채집으로 바깥에서의 활동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는 점이라든지, 네안데르탈인 사회가 이미 종교적이었으며 놀랍도록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가득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 때의 삶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선사 시대의 삶이 궁금했다면 단연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다.



  네안데르탈인 씨족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로 채집을 맡았다. 물론 아이들도 참여했다. 노동에 있어선 아이들이라고 해서 열외가 없었다. 여성들은 각종 식물들에 대한 지식을 대를 이어 전달했고 당시는 식물이 의약품 역할을 했기에 치료사의 역할도 여성들이 맡았다. 기독교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기 전의 중세 마녀의 이미지는 알고보면 선사 시대 여성이 그 근원이다. 아우얼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 여성에게 방대한 식물 지식은 유전자 정보로 각인되어 별다른 학습 없이도 후대 여성들이 알 수 있는 반면 크로마뇽인은 새롭게 얻은 능력인 기억과 학습으로 그것을 익힌다고 묘사한다.



 성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냥은 전적으로 남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사냥을 성공해야 무리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여성은 사냥 도구를 만지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고 심하면 축출될 수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늑대의 사냥 방식을 모방해 무리 지어 사냥했으며 도구도 많이 발달시켰다. 적은 힘을 이용해 멀리 날릴 수 있는 줄팔매도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에일라의 무기가 된다. 줄팔매는 돌을 날리지만 줄팔매와 똑같은 원리로 창을 멀리 날리는 도구도 있었다.



 동굴에서의 밤은 온갖 전설과 신화가 태어나고 활동하는 밤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들은 자연을 다양한 정령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로 해석했고 그들의 가호가 없이는 생존도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갔다. 그것을 전승하는 역할은 주로 주술사가 맡았는데 아이들은 밤마다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입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씨족을 묶는 사회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종교는 그렇게 태어났다.



 실제 선사 시대 거주 동굴에서 발견된 아마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세 마리 들소 상. 동굴을 발견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동굴을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동굴이 씨족이 신성하게 섬기는 존재였을 경우 동굴은 은총의 대상이 되어 바로 거주지로 확정되었다. 그들에겐 각종 토템이 있었고 씨족의 번영을 위하여 항상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는 주로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었는데 이 들소 상 또한 그런 곳에서 발견되었다. 제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주술사 또한 족장만큼이나 존중 받았다. 에일라는 목우르 주술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다.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 이 책의 내용으로 소설의 내용을 검증해 보았는데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고증은 어느 정도 확실한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에 대해 하나 더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꽤나 풍성한 해석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2권을 읽고 거기서 리뷰하려 한다.


 '대지의 아이들'은 미국의 FOX에서 드라마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첫 영상화는 아니다. 이미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미국에선 3부인 '매머드 사냥꾼'까지 나온 시점이다. 영화는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1부인 '동굴곰족'만 다룬다. 참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 이 작품에 꽤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연인 에일라는 당시 '스플래시'의 인어 역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던 다릴 한나가 맡았고 각본은 무려 미국 인디영화계의 거장 존 세일즈다. '메이트원'의 감독 말이다. 이 당시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메이트원(1987)'을 통해 그것이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니었음을 당당히 입증했다. 촬영은 또 폴 베호벤의 영화들을 통해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얀 드봉이다. 그리고 음악은 헉! 알란 실베스트리. 거기다 감독은 이럴수가! 마이클 채프먼.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를 찍은 그 사람. 감독으로 전업한 후 두 번째 작품이다. 크레딧을 보면 어찌나 화려한 지, 다리오 아르젠토의 데뷔작, '수정 깃털의 새'의 크레딧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들의 협업에도 불과하고 영화는 폭망.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계속 영화로 만들려했던 워너브라더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리즈를 좌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배트맨 대 슈퍼맨'의 40년 선배인 것이다. 물론 워너브라더스는 저스티스 리그 유니버스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은 영화의 OST, OST 커버는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포스터의 여성은 에일라로 분한 다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연기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의 실패야 어쨌든 소설만큼은 뛰어나다. 아직 이 소설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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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4-1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이런 책도 있었군요.
네안다르탈인의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낳지 못해서 멸망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으면서
설마, 하고 갸웃했던 기억이 나네요. 반응이 좋지 못하면 끝까지 나오지 않을건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군요.

야심차게 뱀파이어의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고, 뱀파이어 아르망에서 끝낸 기억이 털어지지 않아요. ㅠ

오드득 2016-04-20 13:21   좋아요 0 | URL
오옷! 반가운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만나니, 식곤증을 단번에 날아가버리는데요^^
아, 저는 이 책 나름 유명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군요. 저는 다시 나온다길래 꽤 호들갑을 떨었거든요^^ 네안데르탈인이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더이상 생산하지 못했다니, 그 변화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선사 시대 이 쪽에 관심이 많아서 몹시 궁금해지네요. 계약은 다 되어 있는 것 같던데 그래서 다 나오지 않을까 섣불리 추측해 봅니다. 책 날개엔 매머드 사냥꾼만 근간으로 나와 있어 좀 불안하긴 해요^^;

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시리즈 딱 절반까지만 나왔었죠. 도서정가제 하기 전에 11권짜리 세트를 떨이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봤는데도 중간에 끝날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안 사게 되더라구요 ㅠ ㅠ 출판시장이 열악해서 시리즈 구매는 확실히 모험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메그레도 75권에서 20권으로 끝나고 ㅠ ㅠ 찾아보면 그런 게 한 두 개가 아니겠죠ㅠ ㅠ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이름이 진정한 정체성을 뜻한다면 그녀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나비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감추려 한다.

 사카즈키 조코란 이름을 감추려 하고 긴 앞머리에 둥근 안경이라는 순정만화 속 안경녀의 모습으로 미모를 감춘다. 왠지 필사적이란 느낌도 드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과거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역 배우였던 자신을 숨기고 싶은 탓이다. 배우로 한창 잘 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했고  아직까지도 진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역으로서의 역할은 끝났고, 여배우에 미련은 없었으며, 가업을 이을 생각도 없는 지금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 자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내지 못한 채였다.(p. 19)


[ 표지에 홀로 있는 안경  쓴 소녀가 바로 주인공 조코다.]


 그랬던 그녀가 재수까지 해서 굳이 도야마 대학에 들어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얼른 결혼해서 주조장 일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유서 깊은 추리 동호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리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로 본격 미스터리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를 그녀는 로직(logic)에 취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직에 대한 갈망은 진짜 자신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미스터리에서 로직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미리 자리잡고 있다가 탐정의 추리로 비로소 발견된다. 그렇게 조코도 진짜 자신을 언제 어디서 찾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그녀의 생각 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추리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계획조차 어긋났다. 취리를 추리로 잘못보는 바람에 그만 술만 주구장창 마셔대는 취리 동호회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취리는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뜻이다. 명료한 로직을 원했던 그녀는 이제 혼미와 무념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추리와 취리.

 여기서 작가 모리 아키마로가 이 소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드러난다.


 일단 소설의 처음. 조코는 이렇게 고백한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불명확함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있는 자유를 끌어안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영혼.(p. 9)


 추리는 터널의 바깥을 의미한다.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밝은 빛. 그건 자신이 찾아야 할 진짜 자아였고 그렇게 청춘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로직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취리는 전혀 다른 진리를 설파한다. 삶에 그런 로직은 없다는 것이다.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말은 정체성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뛰어든 경험 속에서 조성되는 것을 뜻한다. 모리 아키마로가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보낸 것은 그러니까 이런 말을 독자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조코처럼 스스로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너무 걱정은 마.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걸음들이 다 진짜 너니까. 넌 이미 너로서 완전해. 너무 불안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다섯 개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정돈된 이 소설은 조코가 바로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깨달음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그 대상이 되고 그녀를 거기로 데려가는 멘토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미키지마다. 그녀보다 두 학년 선배로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3년째 1학년이며 강의실보다 취리 동호회 아지트에서 숙취에 찌든 모습으로 더 많이 발견된다. 어디에 확실히 안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조코와 처지가 별 반 다를 바 없으나 미키지마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자신이 취해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깨어 있을 때는 착실하게 자신의 꿈을 쫓는다. 미키지마는 한 마디로 이 소설에 투영된 모리 아키마로의 주제를 형상화한 모델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코와 연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 맛좋은 사케를 들이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잔한데 사이사이 숨어 있는 경구와 같은 문장이 안주로 두툼한 참치회를 먹는 것처럼 담백하여 끝까지 흥취를 돋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보다는 마주 다가오는 삶에 무작정 부딪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취리에 전염되는 것이다. 그것도 짧게. 하기사 삶도 취하기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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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득 2016-04-17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빼는 것은 아무리 주제를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마키지마가 너무 맨스플레인을 하기 때문이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조코가 미키지마 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또는 소설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커플로 나올 때 흔히 보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는 과장되게 이상화 되어 있고 여성은 거기에 비례하여 수동적이다. 같은 경우 미국 드라마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셜록이나 엑스파일처럼 꼭 어딘가 부족한 점을 강조해 여성 캐릭터와 균형을 맞춘다. 일본과 미국의 이 차이는 어디에서 근본적으로 비롯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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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나 굶주림이란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전망도 없이 아주 혹독한 빈곤을 경험했다. '굶주림'은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읽노라면 너무나 굶주렸기에 뼈다귀에 달라 붙은 살점이라도 먹으려고 주인에게 뼈다귀를 간절히 구걸하는 장면도 나오는 등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묘사가 하도 생생했기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1890년에 나왔다. 무려 120년도 더 된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과거의 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우리나라에서.


 2011년,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가 죽었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가 있었다. 아랫집 문에 꽂혀 있던 삼단으로 곱게 접은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아랫집 주인은 그 쪽지를 보고 쌀과 김치를 들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그녀를 발견했다. 크누트 함순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병이 악화되어 숨진 것이었다. 크누트 함순의 고통이 자신이 가진 품성이나 능력과 무관했듯이, 그녀의 비극 또한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영화사의 계약을 깡그리 무시한 상습적인 임금 체불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런 불합리한 처사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중되는 구조적 모순이 불러온 죽음이었던 것이다.


 구조. 난 이것을 주목하게 된다. 사는 곳이 다르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닮은 꼴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역시 개인이 아니라 구조 탓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단 개인만이 아니었다. 1999년만 놓고 보아도 심각한 기아 상태와 만성적인 영양실조를 다 합쳐 무려 8억 2,800만명이나 되는 세계적 규모의 기아에 있어서도 구조가 져야 하는 책임은 막중했다. 그것을 나는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 책은 얇고, 초등학생인 자신의 아이에게 설명하고 있는 형식이라서 이해하기에도 더없이 쉽다. 그러나 품고 있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 기아의 세계적 규모와 원인, 그 실태와 구호가 이루어지는 실제 방식 그리고 기아 사태에 대한 선진국들의 행태와 거기서 비롯되는 국제 기구의 한계와 문제까지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라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이 참 많고 놀라게 되는 것도 허다했다. 일례로 아시아의 기아 인구가 5억 5천만명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1억 7천만명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고 난민 캠프에서 한정된 식량과 의약품 때문에 이뤄질 수밖에 없는 피난민 아이들의 선별 작업은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아의 규모든, 비극의 반복이든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구가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p.37) 데도 상황이 이러한 것은 역시 구조적인 부조리가 깊이 침윤되어 있는 탓이다.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p. 36~37)


 장 지글러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나눈다.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지만 구조적 기아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p. 49)라고 그는 설명한다. 경제적 기아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비록 한계가 있긴 해도 원조와 구호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경계도 모호하고 징후도 뚜렷하지 않아 해결이 지난하다.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그것이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선진국을 포함해 세계 경제와도 긴밀히 연결된 문제라는 의미에서고,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부실한 식생활과 부족한 영양 상태로 인해 여러가지 질환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로 아무래도 구조적으로 열악한 그들의 환경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기아를 정녕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여기서 태동한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육류 소비를 위해 후진국들에게 설령 제아무리 기아에 허덕여도 사료용 작물만을 재배할 것을 강요하거나 더러는 '부르키나파소'의 빈곤을 타파하려했던 상카라를 암살했듯이 자신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쉽도록 항상적인 기아 상태에 일부러 빠뜨리기도 한다. 거기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은 자주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후진국들을 곡물 가격 조작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세계 경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한 나라만 바꿔서는 해결이 어렵다. 그래서 점진적 상황 개선을 위해 유엔식량농업기구(FA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역할 역시도 재정에 있어서 선진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만큼 수혜자들 보다는 시혜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선진국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좀 더 이끌어내기 위해 기아에 허덕이는 현실을 투명하게 보고하지 않고 잘 포장해선 조금만 더 힘을 보태주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로 장밋빛 전망만을 내어놓거나 원조한 것들이 수혜지의 권력층에 의해 횡령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국제기구가 자주 후진국 권력층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것은 그런 권력층으로 후진국을 쉽게 통제하려는 선진국의 바람 때문이다. 이렇게 한 나라의 기아는 결코 원인과 책임이 그 나라에만 있지 않다. 사실은 그들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보다 더 힘있는 자들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요, 전 세계가 이해관계를 초월한 협력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기아는 내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환기시켰다. 우리가 거기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문제는 실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살바도르에 있는 '캄파 산토라는 묘지'(p. 39)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 묘지는 죽은 자들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의 자리는 그들의 자의가 아니라 그들의 주검을 옮긴 자들의 타의로 결정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얼마든지 구조적인 모순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장 지글러의 책이 내게 주는 가장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빈곤이나 기아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저급한 생각으로 그런 문제는 모두 그들 자신이 초래했다고 여겼다. '얼마나 못났으면 저런 상황이 되도록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었을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지글러 자신이 특히 선진국의 권력층과 부자들을 기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라고 보았던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자연도태설을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지글러 말마따나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p. 38)는 확신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어.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말이다.(p. 43)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자기보다 약자인 자들의 고통과 죽음마저도 태연히 용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글러가 이 책에서 잘 보여준 바와도 같이 나와 그들의 문제는 결코 별개가 아니다. 크누트 함순도, 최고은 작가도, 그들의 힘겨움이 결코 그들 탓이 아니었던 것만큼 나도 얼마든지 그들의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온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오진 않는다. 사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생각이 팽배해 추락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더욱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 한층 더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이기적이 되려 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상황을 두고 '불안이라는 유령으로부터 해방되려 자유를 포기하는 징후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꿈과 신념으로 나답게 되기 보다는 힘있고 돈많은 사람을 닮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와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지가 중요해진다. 지글러는 여기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다만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연대라는 매듭까지 나아가려면 다른 이의 것을 좀 빌려와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일본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오구마 에이지의 책, '사회를 바꾸려면'이 유용해 보인다. 현대인의 불안한 상황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오구마 에이지는 그 시작점을 이렇게 정초한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을 디딤돌 삼아 행동에 나선다. 거기에서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는 것이다.(오구마 에이지, '사회를 바꾸려면' p. 375)


 오구마 에이지는 우리를 비관하도록 만드는 그것을 오히려 우리 모두가 실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라운드 제로'로 여긴다. 다 같은 출발점에서 2인3각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되려면 먼저 비관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비관의 진짜 이유는 우리가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있다. 남들이 원하는 것과 바라는 지위를 얻는데 실패했다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결국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길들어진 눈으로 보고 있기에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도 불안과 공포의 불길한 그림자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불안이라는 유령에 지배당하여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서 더욱 자유롭게 되어 자기 본연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안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나와 너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구마 에이지는 지속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치켜드는 불안을 억누르고 내일의 일은 어찌되었든 언제 내가 될지도 모를 어려운 이들을 계속해서 도우라고 말이다. 그렇게 실천으로 꾸준히 보강되다 보면 의혹은 지워지고 신념이 자연스런 태도가 되어 타인 역시도 그것을 보고 응답해 줄 것이라고.


 문득 이번 선거에서 활약한 '시민의 날개'가 생각난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사전투표함을 지키려고 며칠 밤을 뜬 눈으로 감시했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나와 다를 것 없는 일반인이었고 누가 알아주거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밤새 자지 않고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투표함을 지켰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 강자만의 세상이 아닌, 자신도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약자가 강자만큼이나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16년만의 여소야대 보다 이런 이들의 움직임 속에서 더 큰 희망을 느꼈다. 아니, 이런 그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숙원이었던 여소야대가 이뤄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 속에서 오구마 에이지의 말이 한낱 몽상은 아니며 우리 서로가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생각으로 약자를 돕는 연대에 기꺼이 참여한다면 정말로 언젠가는 지글러가 바라마지 않는, 더이상 기아에 고통받는 이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믿음마저 가지게 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지금도 세계 각지의 난민 캠프에서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헌신하고 있는 구호단체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글러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p. 93)


 지글러가 이 책을 쓴 마음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닌 그들의 생명이었기에 방기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참사가 된 세월호 2주기인 오늘.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마음 중심에다 단단히 결박해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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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 - 따루와 연희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핀란드 길라잡이
따루 살미넨, 이연희 지음 / 비아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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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 대체 뭐가 있어?” 윗사람이 물었다.

“시벨리우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마리메꼬, 노키아, 무민.” 쓰쿠루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중에서 (p. 279) -




  핀란드에 가고 싶었다. 물론 나 역시 시벨리우스와 아키 카우리스 마키 감독 그리고 무민을 좋아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런 바람을 가지게 만든 것은 한 편의 소설이었다.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기서 삶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쓰쿠루는 그 근본적인 균열을 메우기 위하여 핀란드로 간다. 핀란드. 그 곳은 무엇보다 늘 잘못되어 있다고 여겼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곳이었고 느리면 느린대로 부족하면 또 부족한 대로 언제나 나다운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내겐 핀란드가 그런 곳으로 보였다. 하루키가 그려놓은 핀란드는 미셸 옹프레의 말을 현실로 구현시켜 놓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진정한 나를 만나고 그런 나를 보듬어 안아주는 것. 기피와 혐오의 시선이 아니라 직시와 이해의 시선으로 나를 찬찬히 돌이켜볼 수 있는 곳, 핀란드. 그 곳에 가면 일상에 너무 함몰되어 있느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가장 그늘진 통증들까지도 시간을 들여 가까이 임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고 싶었다. 고독의 시간이 약속된 그 곳으로. 마주한 풍경이 전해주는 위안과 치유 속에서 내 자화상을 새로이 빚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핀란드 현지인 따루 살미넨과 이연희가 같이 쓴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는 그런 마음으로 벗하게 된 책이었다. 


 사실 핀란드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 책말고는 달리 선택권이 없다. 그건 당장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지와 교육 그리고 디자인에 관한 핀란드 책은 많아도 여행에 대한 핀란드 책은 얼마 없다. 설령 있더라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세 나라와 묶어서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고 이 책처럼 한 권 전체를 온전히 핀란드 여행에 바치지는 않는다. 물론 분량의 많고 적음이 좋은 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여행서에 있어서만큼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할애된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확실히 더 상세하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핀란드 여행만 생각한다면 이 책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공동 저자 중 하나인 따루는 핀란드 사람이다. 한 지역의 볼거리와 먹거리에 있어서 현지인만큼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따루는 한국에서 오래 생활하여 거의 한국 사람이 되다시피 한 사람이라(하나의 예로 따루는 막걸리와 깔깔이 예찬론자라고 한다.) 한국인 정서와 취향에도 능통하다. 다시 말해 따루는 자신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핀란드의 이모저모를 한국인의 정서와 취향으로 검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취향과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인의 추천은 실제 가봤을 경우 때로 너무 낯설어 곤혹스럽기만 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따루의 추천은 바로 그런 위험을 피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런 역할은 또 한 명의 저자인 이연희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한국인에게만 맞추다 보면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매력인 이국적인 면모를 놓치게 되기 쉽다.


 역시 여행은 낯선 것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익숙한 일상의 눈이 아니라 그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과 생각으로 나를 관조하고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말을 듣는데 이런 것이 바로 여행을 통해 얻는 자유의 진짜 정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낯선 것을 마냥 추구할 수만은 없다. 적절한 수준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과 혐오만 동반하여 벗어나야할 일상의 틀을 오히려 더 두텁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여행의 자유는 매혹적인 낯선 것으로부터 온다. 매혹을 통한 동경과 경탄이 어느새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낯선 것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혹은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란 말도 있듯이 바라보는 자의 정서와 취향이 투영된 결과다. 정서와 취향을 잘 알면 알수록 더 커다란 매혹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핀란드는 핀란드대로, 우리의 정서와 취향은 또 그것대로 골고루 다 잘 아는 따루 살미넨이 핀란드 여행 추천에 있어 적임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설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핀란드의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놀거리 추천을 현지인인 따루 살미넨이 일임하고 다음에 그것을 한국인 저자가 실제 체험해 본다는 설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이 책의 형식을 간단히 말해 보려 한다.

 먼저, 아래의 사진은 이 책의 목차다.



 차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핀란드의 가볼만한 곳들을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설명하고 있다. 각 지역의 위치는 표지에 그려진 핀란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는 각 지역에 들어갈 때 가장 첫 머리에 해당 지역만 표기되어 따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각 지역으로 들어가보면 아래에서 보듯, 양면을 다 채워서 눈을 즐겁게 만드는 각 지역의 사진으로 시작하고 있다.


 특별히 뚜르꾸를 가져온 곳은 내가 핀란드에 가면 꼭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쓰쿠루가 에리를 찾아갔던 '하메린나'인데 그 곳이 바로 뚜르꾸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이다.하메린나는 우리들에겐 '핀란디아'라는 교향시로 유명한 얀 시벨리우스(그러고 보니 작년이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이었다.)의 고향이기도 한데 그는 그 곳에 있는 바나야베시 호수를 떠올리며 핀란디아를 작곡했다고 한다. 쓰쿠루도 에리와 함께 호수를 찾아가 자신의 오랜 망집을 비로소 던져버리게 되는데 그 호수가 아마도 바나야베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뚜르꾸는 헬싱키가 핀란드 수도가 되기 전의 수도로 중세 이후 내내 핀란드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여기엔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뚜르꾸성이 있는데 1280년에 세워진 그 성은 핀란드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을 때엔 총독이 거처하던 곳이기도 해서 핀란드의 아프고 굴곡진 역사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야르벤뻬'는 시벨리우스가 가정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시벨리우스 박물관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우라'란 이름의 강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6,500원을 내면 이 강을 운행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뚜르꾸에는 '난딸리'란 곳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 이제 핀란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중의 하나가 된 무민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무민월드가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무민월드는 1년 내내 늘 개방되지 않으며 여름에만 잠깐 문을 연다고 한다.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기는 아주 많은데 핀란드에 인구가 너무 작아서 상시 개방이 어려운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뒷페이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연희 작가의 글에서 얻게 된 것들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이렇게 이연희 작가의 글이 나오고 나서 '따루의 핀란드 ON AIR'란 제목으로 따로 코너를 마련하여 따루 살미넨이 직접 핀란드를 여행할 때 꼭 보고, 먹고, 놀고, 쇼핑하면 좋을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핀란드의 국립공원은 모두 입장료가 무료라고 한다. 사진은 핀란드의 가장 유명한 국립공원이기도 한, 레뽀베시 국립공원의 호수 풍경이다. 레뽀베시는 호수 지역에 있다고 하는데 핀란드엔 무려 약 18만 8,000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핀란드를 '숲과 호수의 국가'라고 하는데 레뽀베시 국립공원은 그러한 핀란드의 면도를 한껏 느끼게 해 줄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작나무의 길은 사진만으로도 멋져 보여 나도 꼭 걸어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이연희 작가의 글이 끝나면 '따루의 핀란드 ON AIR'가 시작된다.
 차례는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그리고 쇼핑할만한 곳 순이다.


 볼거리엔 장소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개장시간과 입장료, 주소와 전화까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놀거리, 먹거리 그리고 추천 쇼핑지도 같다.




 그리고 여러가지 거리들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이렇게 따루의 핀란드 요점 정리가 마지막에 나온다.


 여행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여행하려는 지역의 물가인데 특히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물가가 높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여행할 때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대해 따루는 핀란드 물가가 싼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비싸기만 한 것은 아니니 싸고 비싼 것을 잘 알고 있으면 알뜰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핀란드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한다. 이렇게 '핀란드의 요점 정리'는 여행을 하면서 아무래도 신경쓰게 되는 날씨나 물가 혹은 음식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때로는 술문화나 자연 그리고 사우나에 이르기까지 알아두면 더 살뜰하게 핀란드를 여행할 수 있는 지식들을 일러주기도 한다.

 이상으로, 이 책의 구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이채로은 것은 역시나 마치 서로 캐치볼을 하는 것처럼 이연희 작가가 먼저 공을 던지면 그것을 따루가 받아 다시 던지는 것 같은 형식의 글 배치다. 나는 이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왜냐하면 핀란드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매력은 매력대로 한껏 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은 한국인 저자의 실제 체험을 통해서 잘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덕분에 핀란드는 내 마음속에 정말로 '매혹될만한 것은 많고, 실망과 두려움은 적다!'는 문장으로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그러니 가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핀란드의 새로운 매력을 많이 깨닫게 된 탓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핀란드를 교육과 복지로 한껏 앞서나간 나라로만 생각했지 핀란드의 문화 그리고 역사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었다. 그런데 핀란드는 중세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은, 그렇게 우리나라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핀란드에 존재하는 오래된 건물마다 수 차례 타버렸다가 다시 재건된 과거가 있었고 그것은 그대로 핀란드의 역사적으로 누적된 상흔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니 비슷한 역사를 가졌으나 전혀 반대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놀랍지 않을 수 없고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비결의 대략적인 모습을 나는 이연희 작가의 글에서 어설프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겸허가 아닐까 싶다.

 핀란드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울창한 숲과 많은 호수로 대변되는 거대한 자연이다. 경작지가 전 국토의 6% 밖에 안된다고 하던가? 그만큼 생존하기에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겸허히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지냈다. 내게 이익이 안된다고 해서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겸허하게 자연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것들만 받아들였다. 숲에서 버섯이나 베리를 채집하는 장면이 내겐 참 인상적이었는데 핀란드에서 누구라도 숲에 들어가서 버섯이나 베리를 자유롭게 채집할 수 있으며 설령 시장에 내다 판다고 해도 일절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허용해도 핀란드 사람들은 가족들이 먹을만큼만 채집한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은 외국인 밖에 없다고(p. 178) 분명 이 채집은 핀란드인들의 오랜 생존 방식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핀란드인들의 모습에서 보듯,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을 절대 채집하지 않았다. 오직 생존에 필요한 양만 자연에게서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내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가져오지 않겠다는 마음은 그것들이 내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자연이 특별히 허락한 은총이라는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그리고 은총이라는 생각은 자연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질 때 자리잡는다.

 바로 이 겸허가 오늘의 핀란드를 만든 궁극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태도가 결국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자리잡아 오늘날의 핀란드 교육이 어디까지나 뒤처지는 아이들을 더 중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p. 194) 나보다 못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 더 성숙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 속 채집의 태도가 사람에 대한 태도가 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축제'인 바뿌가 되고,

 그동안 핀란드 사람들은 조용하고 말수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뿌를 직접 경험해보니 그러한 생각은 오해였다. 역시 선입견이란 무섭다. 내가 보기에 핀란드 사람들은 그 어떤 국가의 사람들보다 정이 많다. 단지 표현에 서투를뿐이다. 따라서 예의를 갖추어 서서히 말을 걸고 진심을 다해 나의 감정을 표현하다 보면 그들도 다정하고 수다스러운 면모를 보여줄 지 모른다.(p. 20)

 생활 속 물건에 대한 태도까지 확장되어 비록 나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남은 사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시 전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들고 나와 서로 교환하거나 팔고 사는 행사인 '시보우스빠이바'를 낳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참 많이 달랐던 대학도서관의 모습 역시도 그 근본엔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겸허가 있었을 것이다.

 도서관 안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외에도 어린이와 노인 등 외부인이 많았다. 학생과 교직원 외에는 입장이 불가능한 대부분의 한국 대학 도서관을 생각하면 참 반갑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한술 더 떠 다들 여기가 마치 제집 안방인 듯 편안한 자세였다. 푹신한 의자에 눕다시피 파묻혀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네를 타고 노는 아이들,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감상하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도서관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열린 공간인 덕에 핀란드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이 된 걸까? 경직된 분위기에서 똑같은 자세로 책만 들여다보는 한국의 대학 도서관과 대비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p 83 ~ 84)

 무엇보다 산타 마을이 있는 라플란드에서의 코티지 체험은 더욱 핀란드 사람들에게 겸허가 근본적인 태도로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핀란드 북쪽에 있는 라플란드. 겨울의 라플란드는 말 그대로 눈으로 뒤덮힌 곳이다. 따루와 이연희 작가는 여기서 코티지 체험을 한다. 하지만 거기서는 문명의 이기를 일체 누리지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장작으로 불을 떼고 촛불로 전깃불을 대신한다. 아무리 바깥 상황이 혹독해도 오로지 자연적인 것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모습은 내게 핀란드 사람들에게 겸허의 태도가 얼마나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지 똑똑히 보게 했다. 그들은 설사 내가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내 편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타자인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포용하려 애썼다. 물론 그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뿌도, 시보우스빠이바도, 도서관의 풍경도, 라플란드의 코티지 체험도 모두 그런 겸허에서 태동한 포용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핀란드는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인정받지 못해 내내 죽음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쓰쿠루가 핀란드에서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을 품을 수 있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마디로 핀란드는 내게 왜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지 일깨우고 있었다. 겸허는 무엇보다 긍정에서 발현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먼저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더 멀리 한발짝을 내딛기 위해 지금 내가 놓아야 할 징검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생각만으로는 어렵다. 구체적인 현실의 충전이 없으면 생각은 쉽사리 에너지가 소진되어 실천으로 나오지 못하고 만다. 현실에서 그 겸허를 그리고 포용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역시 핀란드로 가야 한다. 이 책으로 확인한 바, 핀란드가 바로 그런 것들로 더없이 가득한 땅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니. 이렇게 가려는 열망이 한층 더 깊어진 나는 이제 쓰쿠루가 했던 고백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진정, 지금 내 마음은 핀란드를 일직선으로 향해 있다. 얼른 날아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핀란드로 더욱 가고 싶게 만드는 곳들을 사족처럼 붙여 본다. 


 아래에 보이는 CD는 시벨리우스 말고 내가 아는 유일한 핀란드 뮤지션인 'TABULA RASA'다. 록밴드이나 다른 록밴드들과 차별되는 그들만이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그건 청아한 느낌의 기타 선율을 바탕으로 꽤나 명상적인 분위기의 연주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이 앨범의 'RAKASTAA'를 듣고 있으면 때로 하얀 자작 나무 숲길을 홀로 조용히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핀란드에 가게 되면 꼭 가지고 가서 숲에서 들어보고 싶다. '땀뻬레'는 바로 이 밴드가 결성된 곳이다. 땀뻬레가 핀란드 최고의 공업 도시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레닌을 비롯한 근대 이후 혁명가들을 다룬 책으로 제목의 핀란드 역은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결심하며 내렸던 역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역이름은 출발지로 정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핀란드 역은 핀란드에서 출발한 열차 노선의 종착지였다. 그 열차가 출발하는 곳이 바로 땀뻬레다. 실제로 여기서 레닌은 오래도록 러시아 혁명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여 레닌 박물관도 땀뻬레에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 중앙 박물관이 문을 닫은 현재, 레닌의 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겸사겸사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 뽀리에 있다는 끼르유린루오또 공원.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지도 모를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여름이면 뽀리 재즈 페시티벌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뽀리 재즈 페스티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한 재즈 뮤지션은 다 모이는만큼 재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꼭 한 번 가고픈 페스티벌이다. 물론 입장료는 없다.


 사진은 2013년 뽀리 재즈 페스티벌의 모습. 이 엄청난 인파를 보라. 언젠가는 나도 이들 틈에 낄 수 있게 되기를 정말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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