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시작부터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질문이 있다. 혹시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좋아하시는지? 물론 아예 영화 자체를 못 보신 분들도 있고, 2003년에 나왔으니 봤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잠시 제쳐두고, 오직 영화를 아시고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 '미스터 보쟁글스'도 정말 좋아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 두 작품이 다 마음에 드신다면 당신은 나의 동지(同志)라고.(물론 이 자격은 얼마든지 사양하셔도 된다.)



 '빅 피쉬'와 '보쟁글스'는, 읽어보면 바로 아시겠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한 단어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상상의 전복'이라고! 해산물 전복(全鰒)이 아니라 뒤집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이다.


 '빅 피쉬'는 허풍선이 남작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허풍을 떠는 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다. 아들은 처음엔 아버지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이라 믿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것이 결국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영화는 그런 아들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려 부모님 집으로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주의깊게 그런 아들의 귀환이 현실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관하는 환상 세계로의 전입임을 표현한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거짓말이 생명력을 얻고,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것이 정녕 환상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 최후의 순간 제대로 목도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그렇게 영화는 상상에게 최종 승리를 건네주며 끝마친다.


 '보쟁글스'는 최종 승리 따윈 없지만, 상상과 현실이 치열하게 대립한다는 점에서 '빅 피쉬'와 맥을 같이 한다. 소설은 '빅 피쉬'와 마찬가지로 아직 아이인 아들이 화자 역할을 맡는다. 아들은 아직 미성년이란 점에서 더욱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게 두드러지는데, 그 두 세계란 다름아닌 그의 가족이 중심을 이루는 환상 세계와 학교가 중심이 되는 현실 세계다. 여기서의 환상이란, 문자 그대로의 환상은 아니다. 정말은 작위적인 환상이다. 즉 주인공의 가족들이 현실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이 창조한 환상에 푹 빠져 그 환상을 진짜 현실로 여긴다는 의미다. 이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도, 미쳤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투철한 신념에 따른 결과일 뿐. 그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거짓 역시 진실과 얼마든지 등가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상상이 그들에겐 곧 진정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반면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다. 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질서는 학교에서 아무런 힘을 못쓴다. 아들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정신 나간 녀석이 된다. 가족 사이에선 왕자님이나, 학교에선 얼간이에 불과하다. 매일 마다 다양하게 바뀌는 어머니의 이름이, 학교에선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되듯이, 가족에선 온갖 거짓과 상상으로 풍성했던 현실도 학교에선 생선 가시처럼 좁고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버린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딱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다. 바로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각대장 존'이다. 



아침 학교 등교길에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존재감이 한없이 컸던 존이 현실 질서를 뜻하는 학교에 편입되자 더없이 작고 초라해져 버리는 모습은 그대로 '미스터 보쟁글스'의 아들과 같다. 그래서 아들은 이 두 세계의 충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제 아들의 부모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상이냐, 현실이냐? 무엇을 택할 것 같은가? 나는 바로 이 선택 때문에 이 소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올해의 인상적인 소설 중 한 편으로 기꺼이 꼽고 싶을 정도다.


 부모는 상상을 택한다. 아들이 학교를 당장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미스터 보쟁글스'는 이렇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기꺼이 상상의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현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선 상상이 압도 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선 현실이 오히려 상상에게 압도된다. 물론 현실이 상상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세금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조차 상상은 굳건히 자리를 보전하며, 성인이 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려 한다. '빅 피쉬'의 아들과 똑같이.


 '미스터 보쟁글스'는 원래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으로, 거기서는 고독과 피로에 찌들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현실에 춤으로 기분 좋은 혈색을 되찾아 주는 존재다. 경쾌한 스텝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주고, 율동으로 묘지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삶에 만발한 화원의 생기와 숲의 활력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상상이 하는 일의 은유다. 우리는 언제부터 거짓을 그냥 거짓으로만 생각했을까? 왜 거짓이 지닌 다른 가능성, 이 꽉 막히고 무조음의 현실 세계에 창문을 만들어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하며, 다양한 변주의 선율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상상 없는 현실은 그저 한없이 초라하고 빈약할 뿐인데.


 '미스터 보쟁글스'는 어느새 우리가 잊었거나 외면해 버렸던 상상의 힘을 다시금 복권시키려 한다. 그리고 설득한다. 기꺼이 그 힘에 도취되어도 좋다고.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보쟁글스'를 한 번 더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상상의 전복(全福)'이라고. 이 전복은 해산물도, 뒤집는다도 아니다. 완전한 행복을 뜻하는 전복(全福)이다.



 p.s 원래는 '상상의 전복(顚覆)'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나 쥘베르 뒤랑이 말한 상상의 힘에 대하여 죽 썼지만 본말전도일 정도로 쓸데없이 사설만 길어져 생략하고 말았다. 굳이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혹시 상상이 어떤 힘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두 분 학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보시라는 뜻에서다. 말하자면, 동지의 배려(同志)랄까. (그 자격을 사양하셨다면 포교의 일환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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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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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픽업'은 더글러스 케네디의 첫 단편집이다. 모두 12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길이는 제각각이다. 나는 아직 케네디의 장편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문에 읽으면서 장편을 먼저 읽어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짧은 호흡의 소설로는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세계를 그리고 있는지 잘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모르면서 읽는 것은 내게 편하지 않았다. 내게 편한 독서란, 글에 투영된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다가온 심상이 전적으로 내 착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쉬이 눈감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일단 문체가 가볍고, 대사들은 살아 있으며 이야기가 중간에서 그만둘 수 없을만큼 흥미를 계속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339페이지에 담겨진 12개의 단편들을 읽는 데 들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이 없고 장시간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반나절에 다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뭐, 이런 정보 따윈 당신에겐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보다 중요한 것은 ''픽업'이 무슨 이야기냐?' 일 것이다. 12개의 단편들을 모조리 관통하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실패'라 하겠다. 스스로 완벽하게 세워놓았다고 자부했던 계획이 실패하는 이야기, 사랑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우리와 별로 멀지 않은 이야기다. 살면서 우리도 겪는 일이니까 말이다. 다만 이렇게 실패하는 이들이 모두 사회에서 아주 잘 나가는, 그렇게 지위도 제법 높고 돈도 많이 벌며 능력도 제법 출중한 이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날 뿐이다. 케네디는 유독 그런 인물들을 단편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내가 원래 좀 이상해서 그런가 이것이 좀 더 내 흥미를 끌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 생활을 다뤘을까?' 하고 말이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은 나와 멀다. 내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이 겪는 경험은 언제든 내 것일 수 있지만, 그들의 처지는 내 것일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아주 보편적인 실수요, 실패라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지위의 격차, 빈부의 격차 그리고 능력의 격차에 상관없이 우리는 똑같이 실수하고 실패한다. 자기에게 찾아온 진짜 사랑을 깨닫지 못하며,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골몰하느라 정작 타인의 모습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내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매달리느라, 무시된 타인의 허기가 결국은 내게 어떤 복수를 감행할지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청맹과니다. 나만 보고, 나 밖에 못 본다. 그래서 엎어지고, 상처입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이.


 그렇다면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 자체의 문제다. 내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서, 능력이 뛰어나게 된다고 해서, 부유하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 처지나 상황이 아니라 내가 달라져야 해결 될 문제다. 하긴,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 중에 안 그런 것이 어디있겠냐 만은.


 단편집 '픽업'은 바로 그런 깨달음을 위해 '픽업(pick up)'된 12개의 이야기들이다. 본질적인 면에서 나와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결국엔 바로 이것을 깨달아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왜 불행이 만연할까? 우리의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일까? 인생이 절망과 실패로 점철되어갈 때 우리는 왜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아온 사람이 과연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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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9-22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글라스 케네디 ...좋아요ㅎㅎ

오드득 2016-09-23 00:0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이 좋아하시는 작가였군요. 저도 장편을 만나보려 합니다^^
 
춤추는 조커 명탐정 오토노 준의 사건 수첩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클락성 살인사건'으로 24회 메피스토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 기타야마 다케쿠니.

 '춤추는 조커'는 '클락성 살인사건', '인어공주'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그의 작품이다. 일단 부제에 주목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춤추는 조커'의 부제는 우리나라엔 안 쓰고, 일본에만 썼는지 표지에는 없고 저작권을 표시하는 부분에 영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THE ADVENTURE OF THE WEAKEST DETECTIVE'


 하하! 세상에서 가장 약한 탐정이라니! 과연 어떤 탐정일까 궁금해 뒷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출판사는 이렇게 눈길을 끄는 부제를 왜 채택하지 않은 것일까? 아마도 독자들이 이런 부제를 보면, '뭐야, 세상에서 가장 약한 탐정의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굳이 읽어 볼 필요는 없겠군.' 하고 무시해 버릴까 봐 걱정된 것일까? 그런 것이 일반적 감성이라면, 이런 점에 오히려 강한 흥미를 느끼는 나는 좀 별난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부제가 꽤 중요하다고 본다. 소설의 주인공 명탐정 오토노 준의 대체불가능한 개성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제가 '셜록 홈즈의 모험'이라는 홈즈의 실제 소설 제목을 패러디하고 있으므로 셜록과 비교해 본다면 오토노 준, 그는 명석한 추리를 제외하고는 셜록과 정반대인 사람이다. 대놓고 왓슨을 '원숭이 머리'라 타박하며 아무리 의뢰인이 눈물로 호소해도 자신의 지적 흥미를 자극할만큼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니면 무시하는, 그야말로 오만과 독선의 결정체라 할 만한 셜록과 달리 오토노 준은 오히려 자신의 지적 능력이 수수께끼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두려워 하고 성격도 무지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이, 이 사건은... 제가 반드시...

   해, 해결..... 하..... 할지도 모르겠어요...."(p. 26)


 사건을 해결해도 자신이 가진 능력 상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셜록과 다르게 그저 운이 좋아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준은 유명세가 싫어서 해결의 공적마저 공식적으론 경찰에게 다 돌려 버린다.(이와 비슷한 남자를 최근에 보았는데, M.C 비턴의 해매시 멕베스다. 그도 언제나 자신이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지만, 그것이 상부에 알려져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서를 떠나게 될까 봐 재수 없는 중앙 경찰 상사에게 공적을 돌려 버린다. 유명세가 광범위한 욕망이 된 현재인지라, 그것을 거부하고 소박한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는 이들이 반갑다.) 그래서 존재감도 셜록과 극과 극이다. 방에 들어서기만 해도 좌중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렇게 존재감 하나만은 '엄지 척!' 하게 되는 셜록과 달리 준은 사람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참으로 한없이 엷다. 소설에서 화자이자 왓슨의 역할을 맡고 있는 '나'와 단 둘이 서 있으면 대부분 오토노가 아니라 '나'를 탐정으로 여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추리를 설명할 때조차 그는 '나'의 등 뒤에서 말하는 남자인 것이다. '아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탐정을 해?' 하는 의문이 자연히 들 것이다. 당연히 탐정 일을 하게 된 것도 자의가 아니었다. 준의 탐정으로서의 출중한 능력을 알아 본 '나'가 준이 한사코 싫다고 하는 데도 억지로 탐정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 정도라면, 과히 'THE ADVENTURE OF THE WEAKEST DETECTIVE'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준이 '나'에 떠밀려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모두 다섯 편 담겨 있다. 맞다. '춤추는 조커'는 단편집이다. '클락성 살인 사건'을 읽어 본 독자라면 키타야마 다케쿠니의 트릭이 물리와 과학적 사실에 철저히 천착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트릭도 마찬가지다. 범죄는 하나같이 초현실적이고 불가능의 범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어느 것 하나 현실의 물리적 법칙에 어긋나거나, 뛰어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지혜로 오토노 준과 정정당당하게 결자웅(決雌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탐정이란 존재의 독특함과 공명정대한 승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춤추는 조커'는 한 번 즐겨볼만한 작품이다. 이야기 자체도 무겁지 않고, 살인은 있지만 잔인한 묘사는 별로 없으므로 더욱 부담없이 말이다.


 누군가는 오토노 준이 셜록과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거, 셜록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를 창조하려 한 거구만!'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클락성 살인 사건'을 읽어보면 작가가 꾸준히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클라성 살인사건'의 경우엔 주인공 미키와 함께 다니는 소녀, '나미'가 있다. 그녀는 미키 보다 훨씬 뛰어난 추리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존재감이 거의 '0'에 가깝다. 캐릭터가 오토노 준처럼 의기소침 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는 실제로 실체가 없다.(이것이 혹시 그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독자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나미가 어쩌면 유령이 아닐까 할 정도로 뭔가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라 본다. 그래서 나미가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소설 중반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지금 이야기의 전개상 필요해서 언급해 버린 것임을 양해해 주시길.) 그래서 미키와 나미의 관계는 마치 육체와 의식(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게슈탈트'와 같은)의 관계로도 보인다. 


두 번째 소개된 '인어공주'도 그러하다.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래 '인어 공주' 자체가 존재감이 없는 존재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 소설에도 이런 캐릭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케쿠니는 자신의 작품마다 항상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를 누벼왔다. 오토노 준은 그 흐름에 있는, 또 한 번의 변주인 것이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다케쿠니, 그는 왜 반복해서 이런 존재감이 없는 존재들을 삽입하는가? 이들의 존재는 너무나 투명해서, 마치 이들의 원조인 나미가 그랬듯이, 오로지 '생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SF 소설에 나오는 머리만 남아 있는 도웰 박사처럼. 그런데 다케쿠니는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매우 물리적으로 견고하게 구축한다. '클락성의 살인사건'의 주요 무대인 '클락성'은 창 하나 없는 건물이다. '춤추는 조커' 역시 공간의 밀실, 시간의 밀실로 이뤄져 있다. 거기다 트릭마저 그 세계의 물리적 질서를 철저히 따른다. 한 마디로 한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꽉 막힌 세계요 굳건한 세계다. 그 안에서 오토노 준과 선조들은 그저 의식만 남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정말 너무나 명확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단순화 시킨다면, 의식과 세계의 이분법적 구조.


 이것이 바로,  '다케쿠니 월드'를 이루는 근본 뼈대이자,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의식만 남은,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너무나 꽉 막혀 있는 지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마치 그 세계에 갇혀 질식해 버린 희생자들의 호소로 보인다. 너무나 규칙적이며 견고한 세계인 지라,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범죄가 아니고서는 그 세계가 가진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범죄는 '제발 이 감옥과 같은 세상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무언의 기도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클락성의 살인사건'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고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무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인데, 그것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한밤중의 열쇠'다. 마찬가지로 '춤추는 조커'의 어떤 단편들은 탈출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빠져나갈 열쇠. 이것이 바로 다케쿠니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들은 바로 그 희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염원에, 범죄로 표현된 희생자들의 간구에, 의식만 남은 탐정들이 응답한다. 그들은 상식과 과학이 절대적인 질서로 장악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선 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천사라고도 할 수 있다. 천사 역시 상식과 과학 앞에선 공상의 존재, 거기에 물든 시선으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또한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의식을 전하는 입으로만 강림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다케쿠니의 탐정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천사들은 성경에서 보통 누군가의 끝없는 간구에 응답하여 내려온다. 그 정도로 헌신적인 간구는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은 종종 현실 세계에서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한 것을 탐하는, 그래서 어리석고 허황하다고 치부하는 것들이다. 이런 면에서, 천사의 강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의 확인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구원에 대한 믿음이 세상이 말하는 것만큼 불가능하거나, 어리석을 정도로 허황하지 않다는 것의 선명한 목격 말이다.


 그러므로 다케쿠니가 정말 천사를 의식하고 자신의 탐정들을 구현했다고 한다면, 여기엔 세상에 대한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는 셈이다. 문장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열쇠는 어딘가 반드시 있다. 나는 그것을 내 작품으로 찾아가겠다. 그것을 찾게 되는 날, 나의 탐정도 온전한 존재가 되리라.' 너무 멋을 부려 살짝 부끄럽기도 한데, 그래도 바로 이것이 다케쿠니가 탐정을 빚어내며 투영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 혹한과 비참의 세계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와 다르지 않기에. 2008년에 나온 '춤추는 조커'는 내게 그가 데뷔 이래로 여전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좀 더 선명하게 확인시켰다. 희망에 판돈을 걸고 있는 그가 다음엔 또 어떤 간구의 궤적을 그리게 될 지 궁금하다. 일단은 아직 못 본 '인어공주'와 금방 뒤따라 나온 오토노 준의 두 번째 책부터 얼른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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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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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범죄를 처벌하는 형법은 편파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인권만 너무 보호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사실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요즘엔 가해자 보다 피해자 보호에 더 중점을 두는 '피해자학'이라는 것이 각광받고 있으니까요. 사실 피해자가 특히나 살인의 경우는 가해자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피해자학'은 그동안 형사정책이 추구해오던 범죄 예방과 범죄인 갱생 문제 보다는 피해자의 보호, 상처 치유, 삶의 복귀 문제 같은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천사의 나이프'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면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는 이를테면 미스터리에서 이런 '피해자학'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범죄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고, 그들이 범죄가 가져온 상실로 인해 얼마나 길고도 커다란 고통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증오밖에 가지지 않은 그들이 또 어떻게 다시 세상과 화해하게 되는가를 소설에서 더 많이 그리고 있으니까요. '천사의 나이프'도 그랬고, 이번에 나온 '악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보죠.

 

 주인공의 이름은 사에키 슈이치. 현재 탐정입니다. 탐정이라고 해봤자, 명탐정도 아니고, 집단 강간을 행하던 범죄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와중에 그만 권총을 용의자 입안에 넣는 과잉 행동을 하는 바람에 폭력 경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경찰에서 쫓겨나 할 일도 없고 살 길도 없어, 역시 법정에서 변호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경찰을 그만둔 고구레의 권유로 일하게 된 탐정사무소의 조사원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그 탐정사무소도 조사원이 슈이치 하나밖에 없는 아주 영세한 규모입니다. 소장은 물론 고구레이구요. 그 밖에 온갖 사무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육중한 몸매의 아줌마 소메야가 있습니다.


 슈이치가 그렇게 과잉 진압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6세에 경험한 아주 커다란 상처 때문입니다. 16세 생일 날, 슈이치의 소중한 누나 유카리가 강간 살해 당했습니다. 범인들은 모두 세 명으로 다 십 대였습니다. 주범인 에노키에는 징역 10년을, 공범 데라다와 다도코로는 징역 3년에서 5년 사이의 부정기형을 받았습니다. 지금 슈이치는 서른 살. 이미 14년 전의 일이니 범인들은 모두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이 사실이 슈이치를 미치게 합니다.


  그놈들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놈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이 솟구친다. 절대로 용서 못 한다. 설령 형무소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고 나왔을지라도, 우리들 앞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다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사회적으로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p.  32)

 범죄 피해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은 가해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알았을 때다. 가해자가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를 눈곱만치도 반성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다.(p. 75)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비단 슈이치만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범죄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슈이치가 누나를 살해한 범인들이 사회로 복귀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듯이, 피해자 가족들도 똑같이 궁금해하며 가해자의 현재를 조사해 달라며 의뢰해 옵니다. '악당'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폭행하고 죽도록 방치한 사카가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과연 그는 부모인 자신들의 용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조사해 달라고 호소야 부부가 슈이치에게 의뢰해 온 것입니다. 소장 고구레는 이것이 가난한 사무실을 먹여살릴만한 좋은 먹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아예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가해자의 근황을 조사해 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광고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호소야 부부와 같은 제2의, 제3의 의뢰인들이 사무실을 찾아오고, 슈이치는 계속 가해자의 오늘을 조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의뢰자와 같은 처지인 슈이치는 조사를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자꾸만 누나 유카리를, 그리고 누나의 죽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받은 길고도 질긴 고통을 상기하게 됩니다. 결국 슈이치도 가해자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소설은 의뢰를 받은 가해자의 조사와 자신이 직접 누나를 살해한 이들을  조사하는 이야기가 병행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구성은 슈이치가 조사하는 사건이 남의 이야기이자 슈이치 자신의 이야기이도 하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합니다. 


 난 날마다 썩어 가는 쓰바사를 바라보면서 보냈어. 시체 냄새로 가득한 집 안에서 딱딱한 생쌀을 십으며, 생쌀이 다 떨어진 뒤에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잡지를 뜯어 먹으면서 악착같이 버텼어. 그래서 질긴 목숨을 이을 수 있었지만... 동생의 울음소리와 말라비틀터져 가는 동생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애인이랑 함께 있을 때도,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힌다고. (p. 73)


 두 번째 이야기 '복수'에 나오는 의뢰인 쓰요시의 절규 입니다. 그에게는 세살 때, 엄마가 남자와 사귀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생과 자신만 집에 남겨두고 문을 잠근 채로 나갔다가 2개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극심한 기아를 겪은 끝에 동생은 결국 죽고 혼자만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과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픽션화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일본 열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었죠. 사건의 피해자 쓰요시는 16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때의 고통과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지라, 자기 자식도 그렇게 만들까봐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그렇게 만든 엄마를 용서할 수 없게 되고,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그 여자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동생을 죽이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여자가 행복하게 지내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요.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잊고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 여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여자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어디 길거리에서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이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죠. 하지만...(p. 74)


 그런데 이런 마음은 슈이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유카리 누나를 그렇게 무참하게 죽인 자들이 사회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쓰요시와 똑같이 복수를 꿈꿉니다. 이렇게 슈이치가 각 에피소드마다 하게 되는 조사는 슈이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유품'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가해자 가족의 마음처럼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널 보고 싶어 했어. 마지막으로 번듯한 인간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다고. 하지만 만약에 네가 아직도 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확신했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널 죽이려고 했겠지. 바보 같기는.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앙상해진 그 손으로는 널 죽일 수가 없는데. 하지만 15년이나 떨어져 살았어도 가족이니까. 피를 나눈 자식이니까. 임종의 순간까지 제 자식이 저질렀던 죄에 책임을 느꼈던 거라고."(p.110)


 이런 식으로 슈이치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을 갖고 있는 사건들을 점점 더 접하고, 관계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마장의 말처럼 증오와 복수 밖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시야를 차츰 넓혀 나갑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은 사실 슈이치가 변화해 가는, 그렇게 성장해 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슈이치는 결코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증오의 속박에서 헤어나와 누군가를 다시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 야쿠마루 가쿠가 원하는 것이 비단 슈이치의 성장만은 아닙니다. 실은 독자도 이 이야기에 깊숙이 참여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수많은 범죄를 접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분명 초래되었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선 정작 언론들도 깊이 있게 잘 다루지 않고 그래서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갈수록 범죄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건, 재난 등에 대해서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웬만큼 많이 죽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희생자는 단순히 수치 상의 존재로 전락하고, 그의 삶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 같은 것들은 고려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남의 일이라 여기고 그만큼 서둘러 망각하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란 '영원한 현재'입니다. 과거는 얼른 잊고 미래만 보고 나아가자는 것이 이 시대의 지상명령인 것이죠. 과거를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은 촌스럽거나 옹졸한 짓이 되었고, 아무리 커다란 과거의 상처라 해도 돈이면 그저 다 완치된다는 식의 천박한 생각마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지금 사회의 일반적 경향이기에, 작가는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슈이치를 매개로 하여 독자를 피해자의 삶에 깊이 끌어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절망에 대한 공감과 그것이 결코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은 타인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나 자신도 구하는 길이기에 말이죠.


 스탠리 밀그램이란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복종 실험'으로 유명합니다. 그 실험을 토대로,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권위에 대한 복종'이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은, 설령 도둑질, 살인, 폭행 등을 너무나 혐오하여 그런 짓을 절대 나쁜 짓으로 보는 내적 확신마저 갖게 된 사람이라 해도 권위자의 명령을 받으면 비교적 쉽게 얼마든지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에 의하면 악당은 악당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모습이 아주 평범한 남녀를 악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폭력이 일반화되면 쉽게 폭력을 자행하는 악당이 되고, 사기와 도둑질을 범해도 제재나 비난이 따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면 언제든 태연히 그런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범죄지만 그들에겐 비일비재하고 사소한 흠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토록 태연하게 장관이 되겠다며 청문회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이 소설의 제목은 '악당' 입니다. 소설은 이 악당의 뜻을 사카가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용서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걸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p. 243)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된다고 하는 사카가미의 말은 밀그램의 결론과 유사합니다. 내가 변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사카가미도 다시 악당이 안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맹목'의 사와무라처럼 한 번 악당이었지만 다시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인상을 진작에 받을 수 있었다면 슈이치의 삶도 훨씬 더 빨리 편해졌을 지 모릅니다. 소설엔 이런 순간이 가득합니다. 슈이치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들이. 슈이치가 변한 것도 그런 순간들 때문이었죠.


 사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특히나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게 될 그 모습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실은 나 하나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타난 모습이 모자이크 그림처럼 모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머랭과 같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가 사회 전체의 인상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내가 선택할 윤리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덜어줄 책임을 느끼고 실천하는 일은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와 내가 아픔과 절망을 느낄 때 누군가 공감해주며 그 짐을 덜어주려 하는 것을 겪게 할 것입니다. 아주 순진한 낙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밀그램의 결론을 굳게 믿어보고 싶군요. 그것이 야쿠마루 가쿠가 '악당'을 통해 언젠가 도래하도록 만들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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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


 니헤이 츠토무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블레임'이 해적판으로 국내에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으니 나름 꽤 오랜 팬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막상 '시도니아의 기사'를 봤을 때는 좀 이질감도 느꼈었다. 특유의 거친 펜선이 아닌, 이토록 깔끔한 펜선이라니(하기사 이 변화는 이미 '바이오메가'에서부터 나타났지만.). 거기다 대사는 왜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 거야. 어라, 이번엔 내 머리가 에피소드를 따라갈 수도 있잖아. '블레임' '아라바' 그리고 '바이오메가'에 비하자면, '시도니아의 기사'가 좀 대중화된 것 같아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오든 말든 그냥 자기가 내키는 대로 질주하던 니헤이 츠토무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대중의 눈치를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는 71년 생이다.)


 그래도 아직 예전의 근성이 다 죽지는 않았는지 이야기가 그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 핵심적인 장면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뭔가 제대로 로맨스로 발전하거나 활약할 것 같은 인물이 허무하게 죽기도 하여, 역시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구나 인정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리보고 조리봐도 다 비슷한 인물들의 얼굴이란!!!(여기서 느낌표 세 개를 찍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니헤이 츠토무의 브랜드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니까. 인물들 구별이 힘들다는 것이 '블레임'도 그랬고, '바이오메가'도 그랬듯이 무엇보다 니헤이 츠토무의 악몽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아니었던가. 주인공은 상대를 죽이지만, 그것이 정말 적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알 수 없다. 그 모호성과 불가해성이야 말로 니헤이 츠토무가 독자에게 주려하는 핵심이다. '넌 지금 뭔가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게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몰라.')


남들에게는 작품의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부분이 내겐 오히려 니헤이 츠토무의 낙관으로만 보이니, 나는 정말 츠토무의 '빠돌이'인가 보다. 어쨌든 '시도니아의 기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회는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뷰랍시고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2. 츠토무의 세계란 알고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사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을 리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건 이제 막 구구단을 깨친 아이가 미적분을 푸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리뷰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의 굉장한 그림과 동선이 확실한 액션 묘사에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처럼 '꺅! 꺅!'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시도니아의 기사'는 좀 더 대중친화적이 되어 그나마 리뷰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기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경향은 여기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서사를 파악하기가 힘든데, '시도니아의 기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그런 것은 니헤이 츠토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이해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머리를 쓰려하지 말고 츠토무가 재현한 세계에 가슴을 열고 풍덩 뛰어드는 게 그의 작품을 즐기는 제대로 된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니헤이 츠토무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독자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저 압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건물들로 꽉 채워진 세계는 그야말로 한없이 작아진 엘리스가 마주한 구멍속 세계와 아무래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어떤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구성과 질서를 파악해야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엘리스의 세계에선 이렇게 해선 안된다. 파악하고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탈출은 커녕 오히려 그 세계에 더욱 갇히게 된다. 그저 그 세계가 무엇을 보여주든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로 나부껴야 문득 홀연히 출구가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여 달라진 시각으로 보게 되어 그렇다. 예전의 눈이었다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문이, 달라진 눈으로 보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의 세계다. 세계를 내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 보다는 그 세계에 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출구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이해가 아닌 경험이 주가 되는 것이다. 이해는 외계에 실재하는 것을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먼저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경험은 그냥 나에게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것으로써, 태생적으로 번역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타자에 맞춰 날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3. 시도니아와 가우나 그리고 츠무기, 타니카제와 오치아이 - 나인가, 타자인가?


 물론 엘리스와 똑같이 경험을 중시하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에도 이런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도니아의 기사'도 변함 없다. 아니, '시도니아의 기사'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작에선 그저 모호하게 나타났던 타자가 '시도니아 기사'에서는 뚜렷한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우나'란 우주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다. 지구는 이미 가우나에게 멸망 당한 상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도니아를 타고 다시금 인류를 번식시킬 별을 찾아 우주를 유랑하고 있다. 그래서 시도니아를 파종선이라 부른다. 인류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배라는 뜻이다. 물론 가우나는 여전히 시도니아를 공격한다. 가우나가 어디서 어떻게 지구로 오게 되었는지 인류는 모른다(가우나의 진짜 목적은 후반에 밝혀진다.). 당연히 왜 공격하는 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공격해 오니까 맞서고, 인류가 다시금 부활하는데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기에 무찌르려는 것 뿐이다. 이런 시도니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에서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시도니아는 광활한 우주에 이렇게 홀로 떠다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정말로 츠토무는 시도니아를 홀로 분투하는 개인이 우주선화(宇宙船) 된 것으로 설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유사성은 시도니아 역시 엘리스의 분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가우나에 대한 시도니아의 초반 대응이 눈에 띈다. 시도니아는 가우나에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우나를 앞질러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다. 가우나는 늘 인류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공격해오기 때문에 출현한 그 순간을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하다. 이는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의 주인공이 했던 것과 같다.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가 있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먼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그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려는 지에 대해 전력으로 눈과 귀를 기울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맞춰 보자면, 시도니아의 디자인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시도니아는 이렇게 생겼는데,



 선체 위쪽을 둘러싸고 있는 소혹성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쪼그라든 인간의 뇌로도 보인다. 이것이 타자 앞에서의 나라는 주체의 왜소성, 즉 자기 중심적 파악과 이해의 한계를 나타내는 디자인이라면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인 것일까? 하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가우나 최상위 군집인 대형 슈가후젠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렇게 터무니 없는 해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슈가후젠은 이렇게 생겼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나? 응? 해파리라고? 으음, 그렇게도 보이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의 뇌로도 보이지 않는가? 아래에 달려 있는 촉수들은 뇌의 척수들이고 말이다. 얼마든지 억측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내겐 대형 슈가후젠이 사람의 두뇌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도니아의 쪼그라든 뇌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거기다 크기의 차이도 어마무시하고 말이다.


 두뇌를 갖지 못한 주체와 두뇌를 가진 타자.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가우나의 대응 방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가우나의 공격 방식은 특이하다. 한 번 패배를 당하면 다음엔 자신을 패배시킨 대상을 모방하여 공격해 온다. 가우나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패배로 인해 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얼른 자신을 압도한 타자를 받아들인다. 모방은 자신의 타자를 흡수를 통해 이뤄지는데, 그러면서도 호시지로 시즈카에게서 볼 수 있듯이 타자를 말살하지 않고 보존해 둔다. 이러한 가우나의 흡수와 모방 관계는 어떻게 보면 공존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가우나와 인간의 융합 개체인 츠무기의 존재가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더구나 츠무기는 타나카제와 사랑에 빠진다.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런 츠무기는, 만일 가우나가 타자를 오로지 포식하기만 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츠토무가 이렇게 뇌의 모습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도 보다 온전한 형태를 지닌 뇌의 쪽이 보다 강한 주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가우나는 강한 존재다. 가우나와 대적하는 인간형 병기 모리토는 가우나 촉수에 한 번만 맞아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우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츠무기와 같은 융합 개체다. 물론 타니카제도 강하다. 그러고 보면, 츠무기와 타니카제 모두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타니카제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츠무기마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다. 그가 정말 강한 것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타자 중심의 주체야말로 진정 강한 주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오치아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오치아이도 타자를 지향한다. 그는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지금 인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를 연구한다. 하지만 오치아이의 타자 지향은 그냥 듣기 좋은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타자 지향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치아이는 츠무기, 타니카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타자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혈선충으로 타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활을 위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기도 한다. 그에겐 오직 자신밖에 없고 나중에 거대해져 버린 신체는 그가 가진 자기 중심주의의 크기가 실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오치아이이기에, 대형 슈가후젠과의 최종 결전 바로 전에 다시금 맞붙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니아가 슈가후젠을 물리친다는 것은 이제 진정 타자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전쟁이 아닌, 인류의 부활을 앞두고 앞으로의 인류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대안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시도니아가 거쳤던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배운 것이 그 대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대안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오치아이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다. 극단에 위치한 사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향한 최종 단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관통할 필요가 있었다.


 4.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 학습


 나는 앞서 시도니아가 마지막에서 찾는 대안이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을 했다. 왜 이 말을 반복하느냐 하면 츠토무가 압도적인 타자를 통해 이해 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학습' 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츠토무에겐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에서 함장은 가우나가 공격할 때, 왜 자신들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지 학습시켜 주자는 말을 하고, 츠무기는 여러 장면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이 나온다. 오치아이가 100년 전, 융합 개체를 만들어 일으켰던 최초의 파국적 사태는 융합 개체가 아무런 학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츠무기에 이은 두 번째 융합 개체 카나타도 마찬가지다.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자, 막무가내로 행동하려 한다. 100년 전, 융합 개체나 카나타는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유아적인 자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는 또한 오치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나타는 가우나와 융합하려는 오츠아이를 두고 친구가 태어난다는 말을 한다.


 배우기 위해선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배우려는 대상을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에게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학습은 타자 중심적인 행위다. 츠토무는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이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스 적인 세계를 연출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시도니아의 기사'가 츠토무의 작품 이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이전 작품까지 은밀히 전개되어온 학습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비로소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도니아의 기사'가 학원물 비슷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왜 많은 작중 여성들이(중성인 이자나를 비롯하여) 타니카제에게 들러붙는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모두 학습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타니카제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며, 세계를 배운다. 그런 식으로 타자와 나를 그리고 공존을 배운다. 타니카제를 둘러싸고 아예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중성인 이자나,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 츠무기, 로봇 테루루등)까지 얽히는 설정도 이와 관계 있다. 타자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것의 반영인 것이다.


 5. 츠토무의 지향점인 융합


 그러고 보면, 첫 작품 '블레임'부터 츠토무는 내내 융합을 지향해 왔다. 마치 일본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처럼 신체와 기계를 융합시켰다. 그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경계를 지워왔다. 사실 어디까지나 배운다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에겐 기존의 고정된 경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그 경계는 늘 새롭게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융합의 지향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츠무기는 지금까지 일관해온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인격화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츠무기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츠토무의 학습과 융합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내가 '시도니아의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다. 그저 착각과 오해의 산물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론 지어 본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츠토무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의 정점을 찍었다고.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어떤 태도를 추구했는지 보다 인지가 쉬운 형태로 만들어 제대로 경험케 만든 것이다.


  이제 츠토무는 다음엔 어디로 발을 내밀게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블레임'이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참에, 절판된 '블레임'도 애장판으로 재간되기를 희망해 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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