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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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바인. 이 이름을 잊기란 어렵다. 아직도 1999년 4월 20일에 일어난 그 사건을 TV에서 보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의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사실이 내게 매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량 살상이 다른 데도 아닌, 그것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는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학살을 자행한 범인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말 그대로 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 바로 얼마 전에 나는 고등학생이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 '스크림'을 봤었다. 그걸 볼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 사람을 무차별로 죽이고 다니는 것은 그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일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그게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가진 상식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세계가 또 다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어디도 안전할 수 없는 시대로 말이다.


 때는 곧 밀레니엄이었고 종말에 대한 요한계시록과 노스트라마무스의 불길한 예언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내게 콜럼바인의 학살은 밀레니엄 버그(Y2K로도 알려진)만큼이나 그런 예언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전조로 다가와 불안을 더욱 가중했다. 다행히 역사는 그 모든 걸 비껴갔지만 콜럼바인 사건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신호라는 것만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가 일부러 부딪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은 생화학 무기가 있다고 날조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처럼 바야흐로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가 열렸으니까 말이다. 그건 IS의 온갖 소프트 타깃 테러와 더불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최근만 해도 명절 연휴의 기분을 삽시간에 암울하게 만들어 버린 라스베이거스 학살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한 노인의 총기 난사에 무려 58명이 희생당했다. 


 그 기원에 바로 콜럼바인이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꼭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비극이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를. 상세하게. 하지만 알기 어려웠다.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말고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 역시도 콜럼바인의 전과 후를 다 밝혀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의 모습만 담거나 총기 규제와 관련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전모를 알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결국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소화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데이브 컬런의 '콜럼바인'을 말이다. 10년 동안 사건을 취재하고 집필한 책이었다. 사건에 대한 것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한 늘 미진하다고 느꼈기에 당장 손에 잡았다. 읽어보니 사건의 전후뿐 아니라 범인과 희생자 그리고 가족까지 포함하여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책의 마지막에 실린 주(註)는 책에 인용된 관계자들의 말과 그들에 대한 기록이 모두 실제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솔직하게 여태껏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콜럼바인 사건이란 코끼리를 온전히 들여다본 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책이 '콜럼바인 사건' 이후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 점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특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사건의 경우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후를 살펴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필요하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은 비극을 겪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건 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나 그 때 범죄 현장에 있었던 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진실을 알기 보단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믿으려 했으며 그것에 위배되면 아무리 진실된 증언이라 해도 묵살하는 모습이었다. 죽음의 진실과 상관없이 순교자로 미화되어 신앙의 영웅이 되어버린 캐시 버넬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비극은 저마다 가진 자의적 목적에 맞춰 멋대로 규정되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마구 유포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콜럼바인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관심에 걸맞을 정도의 비극이 지닌 의미와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콜럼바인 사건을 일으킨 에릭 딜런의 삶을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오래도록 끈질기게 추적했던 수사관 퓨질리어처럼 긴 시간을 들여 자세히 살펴보고 찬찬히 음미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빠르고 편한 대답만을 원했다. 사이코패스로 밝혀진 에릭은 그렇다 치고 딜런 토마스라는 시인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딜런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이로 그런 아이가 아무런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학우와 선생님을 날려버리려 폭탄을 설치하고 거침없이 총격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분명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마땅히 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비극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한 자성(自省)이 이뤄져야 할 텐데도 그저 '괴물'이란 딱지를 붙여 저만치 던져두고선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건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비극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겠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타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도 곧잘 가지는 마음을 그들도 가졌던 것이다. 


 한 언론인이 정상으로 돌아간 학교 모습을 취재하려고 들렀을 때 아이들은 당혹해했다. 따분한 학교에 왜 관심을 갖는 거지? 그들은 정말 몰랐다. 그가 도시에서 왔다고 하자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다. 거기 클럽은 어때요? 콜팩스 거리에 가봤어요? 정말 스트립 클럽이랑 술꾼이랑 창녀들이 있나요? 아이들은 물론 비극을 기억했다. 그 끔찍한 날을 어떻게 잊겠는가. 초등학교가 전부 폐쇄되고 다들 두려움에 떤 그날을. 당시 형 누나가 고등학교에 갇혀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들은 몇 달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덴버는 어때요? (p. 594~5)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정(非情)을 보여주는 그 마음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런 냉혹한 가면을 쓰는 것은 정말로 냉혹해서라기 보다는 비록 개인적으로 연루되진 않았어도 그래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뭔가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과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더하여 당한 이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얼른 털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대부분은 비겁하기에 비정해진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 '가볍게 하는 말'에서 주인공의 고모는 주인공의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세 오빠가 서로 얼싸 안으며 지금까지 잘 살았다면서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이렇게 일갈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고모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중에 가서 이렇게 밝혀진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넋을 놓고 우는 친구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윤성희, '베개를 베다'(p. 29))


 맞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비극을 당한 자에게 예의가 없는 일이다. 진정 우리가 그들에게 예의를 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그 비극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극에 처한 자들의 말들로 온전히 우리를 채우고 그걸 단단히 기억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걸맞은 예우란 오직 둘 뿐이다. 바로 용기와 기억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드라마 '파고'에서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연쇄살인마가 조금 전에 살인을 하고 남의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경찰에게 검문을 당한다.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과 차량등록증을 요구하자 연쇄살인마는 보여주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관, 길 중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어요. 옛날 지도에는 그런 길을 여기 용이 있다고 적어 놓았었죠.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찰은 상대가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런 말까지 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그냥 보내준다. 용이 있는 길을 들어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 선택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온 것을 알고는 엄청난 괴로움에 빠지고 결코 그 밤에 비겁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락을 위해 잠시 비겁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망각을 선택하지만 바로 그 비겁이 족쇄가 되어 끝내 자신을 영원히 부끄러움 속에 결빙시킬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빙이 언젠가 비극의 반복을 초래하리라는 것도. 저자는 에릭의 과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제의 작은 방관과 망각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 삶에 콜럼바인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바로 지금 용이 사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피한다고 해서 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번식을 통해 용이 있는 길만 많아질 뿐이다. 뛰어들어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비극 또한 그와 같다. 반복의 사슬을 끊는 것은 동참의 용기와 기억의 칼을 늘 벼려 두는 것뿐이다. 데이브 컬런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믿는다. 그 생각이 콜럼바인의 비극으로 뛰어드는 것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그 비극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가 기록한 콜럼바인의 전모를 오롯이 기억하는 것으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고 말했다지만 거대한 비극의 모습 또한 고만고만하지 않나 생각된다. 총을 맞은 콜럼바인의 교사 데이브 샌더스 실은 살 수 있었으나 경찰이 알고도 세 시간이나 방치하는 바람에 사망한 것에서 세월호 참사가 겹쳐지듯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극에는 소유격이 없다. 모든 비극에 대해 우리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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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박단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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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라고 창비에서 나오는 책이 있다.

 한 나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인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방면에서 최고의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시리즈를 중국 편을 통해 처음 만났다. 중국으로 여행 가게 되어 읽어봤던 것인데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 정치 상황을 망라 하면서 쉽고 자세하게 알려주어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다. 그래서 시리즈에 신뢰가 생겼는데 이번에 프랑스 편이 나오니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프랑스의 대선은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기존 정당이 하나도 대선 결선 투표에 참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 보수 우익만 참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정황으로 비록 그들의 지지율이 그리 압도적이지 못하였다고는 해도 확실히 프랑스의 정치 지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어쩌다 이런 프랑스가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다 새삼 내가 프랑스에 대해 뭘 알고 있는가에 생각이 미쳤고 이번 기회에 프랑스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있던 차에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가 나와 준 것이다.



 당장 들여다 보았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노동 역사를 전공으로 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있는 박단이 책을 썼다.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장 하나가 프랑스의 사회, 정치, 지리, 정치경제, 문화, 한불관계를 각각 다룬다. 쉽게 한 나라의 모든 부분을 고루 살펴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중국 편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 편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했다. 첫 부분에 나오는 언제나 하나의 공화국을 지향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선 다문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부터 그랬다. 프랑스 하면 톨레랑스라서 다문화 정책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니 놀라웠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중요한 것은 톨레랑스 보다 연대를 뜻하는 '솔리다디테'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또 하나의 프랑스 자체라고 여기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평등에 대한 생각도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커서 사회 보장 제도가 일찍 자리잡았고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인물 하나를 만났는데, 바로 '아베 피에르'다. 2차 대전 때문에 프랑스에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집이 없어 겨울에 얼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당시 빈민 운동을 하고 있던 아베 피에르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보다 얼어죽을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면서 주인의 허락 없이 빈집에 들어가는 운동을 벌여 프랑스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시리아에는 사람이 없는 빈집이 있으면 누구나 들어가 제 집처럼 살 수 있는데 프랑스에도 그런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솔리다디테가 강했던 프랑스가 여성에겐 어찌된 일인지 야박하게 굴었다. 페미니즘이 프랑스에서 처음 생겨난 말이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1870년 경에 생겨난 이 말은 원래 여성적 특징을 보이는 남성 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나라답게 여성이 들고 일어난 것도 가장 빨랐다. 프랑스 혁명 때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봉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1789년 10월, 파리 시장에 있는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베르사이유 궁까지 걸어가 왕을 접견하기도 했었다. 이런 일들이 당시 프랑스 남성에게 여성을 새로이 보게 만들었으나 여성에 대한 처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을 주도했던 급진 세력들은 오히려 여성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주도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오직 남성만을 위한 것이며 여성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 올랭프 드구주는 프랑스 혁명 때 남성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활약한 유명한 혁명가였으나 결국 로베스피에르와 마라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여성 혁명가의 입을 막은 혁명 세력은 아예 여성에겐 인간이 타고난 권리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내는 자기가 번 돈 조차 남편의 허락 없이 쓸 수 없는 등 여성을 철저하게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렸다.


 책엔 올 컬러의 사진 자료와 'Q&A'가 있어 더욱 이해를 돕고 부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여기는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으로 그림 속 여인 마리안이 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혁명의 상징으로 만든 가상의 인물이란 걸 밝히고 있다. 여성을 그만큼 천시했으면서도 왜 상징은 여성으로 삼은 것일까? 혁명 주도 세력은 당시 공화국 개념이 생소한 민중에게 그들이 세우고자 하는 공화국이 좋은 것이라고 알릴 필요가 있었고 민중의 문맹률이 높았던 상황에서 이미지로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공화국 이미지를 민중에게 친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 국가는 여성으로 지칭하는 게 언어 관습이었으므로 혁명의 상징을 여성으로 한 것이라 한다.


 계몽 사상의 가장 밝은 빛이던 프랑스 혁명에도 이런 어둔 그늘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온전히 밝지만은 않은, 빛과 어둠 사이를 일렁이는 나라였다.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는 바로 그런 면모를 깊게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바로 그 불안한 일렁거림이 오늘의 극우 마리 르펜과 마크롱만의 대선 결선 투표를 자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편이 그랬듯, 프랑스 편도 프랑스에 대해 전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진다. 나는 이 책을 가급적 청소년들이 봤으면 좋겠다. 청소년이 읽어도 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게끔 쉬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교과서나 신문 보도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폭 넓고 상세한 내용 때문에 한 나라를 훨씬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늘날의 세계를 너나 없이 연결되는 글로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다른 나라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만큼 관심을 갖는 이는 별로 없고 강 건너 불 구경 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한 나라의 일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다른 나라로 파급 되는 것을 우리는 참 많이 목격한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의 일도 나의 일처럼 관심 가질 필요가 있다. 언제 우리 일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일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만큼 좋은 것도 또 없다. 거기에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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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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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과학 하면 얼른 뭐가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대부분은 확증 파괴대량 살상이 주된 목적인 병기 제작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메리 로치의 책, '전쟁에서 살아남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전쟁 과학의 면모를 보여줍니다적을 무찌르고 승리해서 살아남는  아닌정말로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전쟁 과학의 모습을 말이죠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접해보지도 못했던 분야를 열어주는 책이라 읽으면서 사실 놀랐습니다. '아니이런 것까지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단 말이야그것도 오직 병사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하고 말이죠그야말로  책은 좁은  시야를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의  연구와 실험이 전쟁에서 하나의 목숨이라도  살릴 것이라 믿으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연구에 매진하는 과학자들을 보면서 세계가  생각보다는  희망찬 곳이라는  믿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처럼 이 책은 우리가 전혀 몰랐던 전쟁 과학의 분야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여러 과학적인 지식마저 습득하도록 하며 어느덧 세계와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달리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워싱턴 포스트지가 미국에서 가장 유쾌한 과학 저술가로 평가한 메리 로치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인 것입니다.



 과연 저자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지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책은 피부와 온도 그리고 감각과 설사  여러 분야의 과학적 지식을 망라하고 있지만 결코 어렵다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작가의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곳곳마다 들어차 유쾌하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중간에 덮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 책에 담긴 내용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던 것들로 가득이라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거든요. 진정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런 기막히는 연구가 행해지는 것을 몰랐을 것이며 우리가 무심히 여겼던 것들이 의외로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 것을 수시로 던져주니 아무래도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더군요. 


 너무 칭찬만 하는  아니냐구요하지만 과장이 아닌  어쩌죠감히 법정에서 선서도   있을만큼 제겐 좋은 책이었습니다올해의 가장 좋은 책으로 뽑을 수도 있을  같습니다.

 

  페이지부터  책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립니다여러분 대포 존재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닭을  대포입니다. 물론 죽은 닭이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불쌍한  가지고 무슨 만행이야?' 하면서 삿대질을 하기 전에, 왜   대포가 필요한지  이유를 얼른 말씀드리도록 할게요혹시 영화 '인디아나 존스' 3 보셨나요 코네리와 해리슨 포드가 부자지간으로 나오는 영화 말이죠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인디아나 존스 부자가 해변에서 전투기에게 공격을 받습니다주인공에겐 달리 대항할 수단이 없는 상황   코네리가 우산을 활짝 펼치고는 갈매기 무리에게 달려가 하늘로 날아오르도록 합니다마침 전투기가 다가오는 시점이었습니다갑자기 전투기는 비상한 갈매기 무리에 둘러싸이고 많은 갈매기들이 전투기에 부딪힙니다수많은 갈매기와의 충돌로 결국 전투기는 추락하고 맙니다이건 절대 영화적 과장이 아닙니다실제로 새들에게 부딪혀 비행기가 추락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는 더 그렇구요. 그래서 비행기를 새떼들과 부딪혀도 추락하지 않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강도의 실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대포인 것입니다몸무게 1.8킬로그램의 닭을 시속  65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쏘아 과연 비행기가 견딜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이죠하하그런 닭대포라니. '정말 희한한   있구나!'  만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딘가엔 지금도 죽은 닭이 펑펑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닭 대포의 실제 모습.


 이런 것들이 여기엔 잔뜩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 영화에서 전투 중에 위생병이 너무나 당황하여 부상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왕왕 있습니다. 관객들은 그걸 보면서 인지상정을 여길 뿐, 놀랍게도 그런 것을 막는 훈련이 실행되고 있는 것은 모르겠죠. 영화 감독까지 데려와 무대와 각종 특수 효과 장치로 실제에 버금가는 치열한 전투 상황을 연출하여 위생병이 그런 상황에 심적으로 내성을 가지도록 만드는 훈련이 말이죠. 그리고 또 전쟁 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의 설사라는 것도 알 수 없을테죠. 역사적으로 전쟁 중에 적군의 총알에 맞아 죽는 병사 보다 이질이나 설사로 죽는 병사가 더 많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1848년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인 1명이 전투로 사망할 때마다 7명이 병으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설사 때문에 죽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설사나 이질로 죽은 병사는 95,00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한 군인보다 설사병으로 입원한 군인이 4배가 더 많았다.(p. 178)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연간 220만명이 설사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질질 싸는 것도 허투루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설사 근절에 여념이 없는 한 학자는 오늘도 군대의 점심 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 병사들의 테이블을 돌며 "왜 설사를 참고 견디나?"고 묻고 다닌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지사제를 사용하면 4~12 시간 정도면 설사가 멈춰 정상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고 평균 3~5일 동안 설사를 참기 때문이죠. 그럴수록 안 좋은 것도 모르고 말이죠.


 냄새 폭탄은 또 어떻습니까? 2차 대전 때 미국은 일본 장교들에게 사용할 냄새 폭탄을 만드는데 꽤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일본인은 소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보고 있어도 아무데나 눌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데 유독 대변에서는 그런 걸 많이 느낀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런 대변 냄새가 나는 소형 분무기 같은 것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주로 일본 장교에게 뿌려 냄새 때문에 부하들이 장교를 기피하게 만들고 장교 역시 부하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 작정으로 말이죠. 네, 이런 것도 미국은 아주 진지하게 연구했습니다. 그것도 엄중한 기밀 프로젝트로 말이죠. 이름도 있었습니다. <누구, 나?> 폭탄이라는. 


 뭐든 깊이 들어가면 진지함과 개그의 차이 같은 건 없어져버리나 봅니다. 이런 내용들이 연타로 나오니 어떻게 중간에 덮어버릴 수 있겠어요? 거기다 메리 로치는 실제 그 현장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 현장 체험기가 또 재밌습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의 냄새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냄새를 잘 판별하여 병사가 스트레스를 받기 전 개입할 것을 목적으로 스트레스 냄새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인데, 여기에 메리 로치도 일조를 했습니다.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기부한 것이죠. 이러한 생생한 체험기까지 도처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더욱 '큭큭' 하면서 읽었습니다. 


 바야흐로 명절이 코 앞입니다. 선물처럼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 중이신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해 드립니다. 가진 정보가 남달라서 지식의 범위를 확장시켜 줄 뿐 아니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며 재미도 충만하기 때문에 연휴의 편한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야말로 한 번 거닐어 볼만한 지식의 신세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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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5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앙리 루소 화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작품을 두고 두 큐레이터의 치밀한 머리 싸움을 보여주었던 '낙원의 캠퍼스'의 작가, 하라다 마하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암막의 게르니카'란 작품입니다. '암막'이란 검은 장막을 뜻합니다. '게르니카'는 표지에도 나와있듯이,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이죠. 



 피카소의 고향인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습니다. 군부 프랑코가 193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화파 정부의 개혁 정책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내전이었죠. 파블로 피카소를 비롯하여 에스파니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연히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무력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지원을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곳은 프랑스였지만, 프랑스 역시 섣불리 개입했다가 역으로 독일의 침공을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전과 되도록 거리를 두려 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죠. 그러던 1937년 4월 26일. 공화파 지지자들의 거점이었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무차별 폭격하여 무려 1,600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2016년에 발표된 영화 '게르니카'를 보면 잘 나와 있으니, 이것을 보시면 게르니카의 비극을 더욱 잘 아시게 될 듯 합니다.


 그 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 때 발표할 작품에 매진하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는 언론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에서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으니 당연했겠지요. 자신의 예술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게 될까봐, 아직 공공연히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않은 피카소였습니다만, '게르니카 사태'를 계기로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게르니카' 입니다. 세로 약 350cm, 가로 약 780cm의 크기에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게르니카는 스페인관 맨 앞자리에 전시되어 만국박람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게르니카의 비극을 생생하게 알리는 동시에 인류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웅변했습니다. 여기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지요. 하루는 독일군 장교가 게르니카 그림을 보러 와서는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요?" 그러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신들이요." 이 소설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후 내내 폭력과 전쟁을 고발하고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만국 박람회 전시가 끝난 뒤, 그림의 거처를 두고 파블로 피카소가 한 선택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게르니카'가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이나 독일 나치의 손아귀로 들어가 그림이 지닌 반전의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아예 그림을 그로부터 절대 안전할 수 있는 미국에다 맡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스페인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돌아올 때 돌려달라'고. 바로 이 선택과 당부 때문에 '게르니카'가 가지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은 보다 더 확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다시 한 번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3년, 콜린 파월이 UN에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 회견을 연 때였습니다. 콜린 파월은 그 기자 회견을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에서 했는데, 거기엔 '게르니카'가 가진 평화의 목소리를 기리기 위해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원본과 똑같은 규격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월이 방송이나 보도 사진으로 그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암막의 게르니카'라는 소설 제목은 바로 이 사건에서 나온 것이죠. 아무래도 전쟁을 선포하는 자리에 강한 반전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 같이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좀 꺼림칙했던 모양입니다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큰 논란을 일으키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의 뇌리 속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지닌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되새기게 했습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전경입니다. 원래는 이렇게 보이는 게르니카를 장막으로 가려버린 것이죠. 현재는 없습니다.

 2009년, UN이 건물 보수를 할 때 영국에 이송한 후로 내내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하라다 마하의 '암막의 게르니카'는 이 두 사건,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것'과 '파월이 기자 회견 당시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를 가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피카소가 직접 등장하는 과거의 사건과 9. 11 이후의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하는 구성인 것이죠. 과거와 현재 이야기 모두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모두 여성입니다. 과거에선 실제 피카소의 연인이자 게르니카 작업 모두를 촬영했던 '도라 마르'라는 여성이 중심이고, 현재에선 어릴 때 게르니카를 실제로 보고 그림에 매혹된 뒤로 평생 피카소를 연구했고 9.11 때 사랑하는 남편을 테러로 잃은 후, 더욱 '게르니카'가 가진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뉴욕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요코'라는 여성이 중심입니다.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있는 그림은 소설에서 언급되는 도라 마르의 초상화 입니다.


 하라다 마하는 도라 마르와 요코를 주축으로 과거와 현재의 게르니카 이야기를 번갈아 전개시키면서 '게르니카'에 얽힌 기구한 사연과 어둔 시대일수록 더욱 잃지말아야 할 예술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스릴러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런 요소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림 '게르니카'에 관심이 많고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은 정말 좋은 벗이 되어줄 듯 합니다. 아마도 하나의 그림이 가지는 의미와 역할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만큼은 분명 느끼시지 않을까 합니다.


 거기다 하라다 마하가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더욱 읽어야 할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2016년에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본을 생각하신다면, 하라다 마하가 왜 게르니카를 소재로 소설을 썼는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짐작되실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일본은, 물론 지금의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베 정권에 의해 한창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쟁 포기가 핵심인, 흔히 말하는 평화헌번 9조를 개정하려고 엄청 노력했었죠. 군비 증강을 통한 일본 재무장이 여기저기서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하라다 마하는 바로 그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아베 정부의 선동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력화시키기 위해 '암막의 게르니카'를 쓴 것입니다. 하라다 마하에겐 지금의 일본이 바로 전쟁 선호를 위해 게르니카를 가려버린 암막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소설의 내용 어느 하나 무심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역시 김정은와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니까요. 이런 미치광이 놀음에 현혹되어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막의 게르니카'를 통해 '게르니카' 그림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깊이 돌아봐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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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이유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가장 밝은 것은 가장 어둔 그늘을 만들기 마련이다. 한 여름에 불현듯 찾아오는 태풍처럼.

 그렇게 영국에서 팔리는 범죄 소설 중 1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치명적 이유'는 시작부터 명백하게 대비되는 두 개의 시간을 보여준다. 누군가 죽음으로 가는 시간과 동시에 에든버러의 연중 최고 행사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모두가 하나되어 웃고 떠드는 동안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형당하고 있었다. 머리, 팔꿈치, 무릎, 발목에 한 발씩, 그렇게 여섯 발의 총알을 맞아. 존 리버스는 시체를 보자마자 알아차린다. IRA가 주로 배신자를 처형하는 방식인 '식스팩'이라는 것을.

 누군가 그것을 모방해 자신의 조직을 배반한 이를 처단한 것이다.


 그 처형 방식을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존 리버스는 테러 조직 수사를 전담하는 팀으로 차출된다. 자신을 별로 환영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수사해야 한다. 한 편, 그는 리어리 신부에게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받는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거칠고 위험한 동네인 '가르-비'에 그 곳 청소년을 선도하기 위해 센터 하나를 만들었는데, 최근 그 센터 운영 방식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가르-비'는 카톨릭인 구교와 개신교인 신교의 갈등이 극심한 지역으로 적어도 청소년만은 종교적 갈등에서 자유롭도록 만들기 위해 센터를 지었는데 요즘 카톨릭 아이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 이대로 카톨릭 아이들이 센터로 올 가능성이 계속 없다면 운영자에게 폐쇄토록 하라고 리버스에게 당부한다. 그러나 이 일 역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거친 동네에 사는 아이들답게 아이들이 리더인 데이비 수터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처형 당한 남자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놀랍게도 전작에서 리버스가 감옥으로 보낸, 리버스에겐 배트맨의 조커라고 해도 무방할 악당 캐퍼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캐퍼티는 즉시 부하들을 보내, 아들을 죽인 범인의 정보를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리버스는 사건 해결에 나선다. 그러면서 목도한다. 스코틀랜드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것도 아주 치열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그 갈등은 리버스를 군대에 가도록 만든 1969년에 처음 일어났던 모습 그대로였다.


 어둠 속에서 불붙은 유리병들이 날아다녔다. 넝마조각으로 만든 심지에서는 휘발유가 튀었다. 화염병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증오는 웅덩이가 되어 번져나갔다. 사적 감정이 담긴 공격은 아니었다. 대의명분을 위한 행위였을 뿐.

 다 자신들의 명분이 키운 소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름의 보호 방식, 검은 택시들, 총기 밀반입, 이상과는 많이 동떨어진 사건들. 그 모든 것이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p. 117)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라졌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그저 축제의 환한 빛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어쩌면 축제야말로 기만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축제의 빛에 현혹되어 실존하는 갈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렇게 해서 뭐가 남았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도 그대로였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도 그대로였다. 균열은 그런 기만의 축제로 메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식스팩 처형을 당한 남자의 시신이었다. 이제 존 리버스는 그것이 지금까지 항존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작가가 소설 속 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혐오와 증오로 상대방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치명적 이유'를.


 "우리가 여기 온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죠?" 그가 물었다.

리어리 신부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 세상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어떤 변화라도 이끌어내기에는 우릭 너무 미약해요."

"지금 주머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우리 모두는 이곳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어요."

"폭탄 테러범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를 막을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경찰로 살아가는 것 말이죠?"

"솔직히 저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p. 34 ~ 35)


 개인적인 느낌으론, 지금까지 나온 존 리버스 시리즈 중에 가장 사건의 규모가 크고 스릴이 넘치는 것 같다. 처음부터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후반에 가면 이야기가 아예 질주한다.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한없이 우울하고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꽤나 정적이었다. 그러나 '치명적 이유'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완전히 역동적이다. 존 리버스만 해도 그렇다. 우울에 젖을 겨를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부서를 옮기고 도시를 오고가며 다른 여자도 만난다. 죽는 사람도 너무 많다. 살해 방식도 몹시 잔인하다. 여기저기서 갈등이 터져 나온다. 리버스는 지금 사귀는 여자 친구와 갈등을 일으키고, 경찰 내 외부도 갈등이 일어나며, 캐퍼티까지 가세해 치열의 강도를 높인다. 차갑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적다는 뜻이다. 뜨겁다는 것은 분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움직임이 많기에 당연히 이 소설은 뜨겁다. 나로썬, 이토록 뜨거운 존 리버스는 처음이었다. 마치 영화 'LA 컨피덴셜'을 보는 기분이었다. 새로웠고 그래서 좋았다. 어쩌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뜨거운 갈등인 종교 갈등을 다루고 있기에 소설마저 그 갈등의 온도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존 리버스는 과연 치명적 이유를 찾는가? 찾는다. 그러나 스포일러가 되기에 세세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존 리버스의 말로 대신할까 한다.


 "난 당신 같은 사람들이 무서워요." 리버스가 냉담한 톤으로 말했다. 진심이었다. 콜록거리는 다드 수터는 열 명의 캐퍼티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입. 누구도 그의 정신을 건드릴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운영진이 모두 퇴근해버린 가게나 다름없었다.(p. 368)


 이 소설에서 존 리버스는 이런 자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죽어버린 것을 뜯어먹는 하이에나처럼,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여전히 전쟁이 있다고 믿으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서도 어버이 연합 노인들이나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혹은 안철수와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생각에 타인을 위해 자신이 변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무작정 이기려고만 드는 사람들. 내가 입히는 상처와 아픔은 보지 못하고 애오라지 자기가 입은 것만 보는 청맹과니들.

 그것이 바로 죽음을 양산하는 '치명적 이유'라는 것을 화염의 온도 속에서 존 리버스는 깨닫는다. 그건 그대로 리버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특히 연인 페이션스와의 관계에서.


 이언 랜킨은 재밌게도 리버스와 페이션스의 관계를 통해 여전히 뜨거운 종교 갈등의 본질적인 이유와 그것을 해결하는 대안을 넌지시 암시한다. 소설 초반에서 리버스는 자신의 취향을 자꾸만 바꾸려고 하는 페이션스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리버스 자신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소중하며 그걸 곧장 드러내는 변호사 캐롤라인 때문에 아주 난처해진다.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자신을 조금씩 더 덜어내고, 타인에게 더 맞춰주는 노력이자 과정이라는 것을. 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게, 본질적인 면에 있어 이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때문에 소설의 마지막이 페이션스와 함께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뭐, 그건 바로 전작 '검은 수첩'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페이션스가 등장한 뒤로, 사실 존 리버스의 이야기의 알맹이란 잠시 그녀를 떠났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여러 이유로 결별하고 또 재회하니까. 다만 그 사랑을 끝장내는 치명적 이유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늘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춰준다면 거기에 이르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이 소설이 무슨 연애학 개론 같네. 하기사 그렇게 읽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읽든 '치명적 이유'는 속이 든든한 느낌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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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21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글에서도 뜨거움과 흥분이 뚝뚝 느껴져서 뭐지, 뭐야 하면서 따라 읽었네요^^

오드득 2017-09-26 20:42   좋아요 0 | URL
하하, 제 열기에 감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뜨거움과 거리가 먼 일상인지라 글로나마 한 번 가져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