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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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영화 좀 본다고 말하기 위해선 마치 통과 의례처럼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했던 러시아 감독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화로 시를 쓴다고 평가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습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가 있는데, 바로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된 그의 영화 '희생'입니다. 유럽 사람들조차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흥행 실패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영화광들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보는 바람에 흥행을 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 감독에게 빠진 영화 키드 중 하나였죠. 대학 다닐 때 철학 논문을 그의 영화를 주제로 할 정도로 말이죠. 언제나 구원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던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딱 두 편의 SF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 한 바도 있는, 스타니스와프의 원작으로 하여 '솔라리스'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 소개할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인 '노변의 피크닉'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잠입자(STALKER)'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을 주로 칸트의 '초월적 이성'과 관련하여 풀어나갔는데, '솔라리스'는 원작 소설까지 번역되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좋았던 반면, '노변의 피크닉'은 번역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지금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글을 쓸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때 산 비디오를 아직도 이렇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이번에 나온 이 소설 또한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작 소설의 작가들 역시 '잠입자'의 시나리오에 참여했지만 원래 타르코프스키 감독 자체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감독은 아닌지라 소설은 어떤 영화와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오래된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소장하고 있는 '잠입자' 비디오와 이번에 나온 '노변의 피크닉'을 함께 찍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금에서야 소개되었지만 해외에선 이미 77년에 번역 소개되어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러시아 SF 중 하나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구요. 가장 최근까지도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들 수 있겠네요. 거기서 메인 빌런인 벌처가 했던, '어벤저스'의 뉴욕 침공 때 외계인이 남긴 유류물을 수거해 그 기술을 몰래 사고 파는 행위들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노변의 피크닉'에 나오거든요. 이 소설의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란 남자가 그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목숨을 걸고 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가서 외계인이 남긴 물건을 가져오죠. 영화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있습니다. 2013년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 'GUAPO'가 발표한 음반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앨범 제목만 봐도 이 음반이 '노변의 피크닉'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걸 아실 듯 합니다. 앨범 제목인 'HISTORY OF THE VISITATION'은 '노변의 피크닉'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필먼 박사가 쓴 책의 이름이니까요. 네, 이 앨범은 '노변의 피크닉'을 바탕으로 하는 컨셉(음반의 모든 곡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한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앨범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거기엔 'S.T.A.L.K.E.R'나 '메트로 2033'과 같은 게임도 포함되지요.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정작 외계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것은 외계인이 잠시 머물다 간 지역에 그들이 남긴 물건 뿐입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영화 'E.T'나, '클로즈 인카우터'처럼 조우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고 그 '여파(aftermath)'를 더 많이 다룬다는 것 말이죠. 소설은 필먼 박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방문자의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그 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요." (p. 18 ~ 19)


 이런 시도는 SF 소설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감히 바로 이런 점이 이 소설을 무엇보다 특별하고 꼭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여타의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특히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독자에게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단 윤리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에 관계된 문제라고 한정시키도록 하죠. 그런데 그 때까지 외계인이 등장하여 직접 대면하는 것을 다뤘던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외계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그들이 누구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등등)을 해댔지만 정작 그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 그렇게 나타났던 외계인들 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인간이 가진 이성이라는 범주 내에서 이해가능한 존재들이었죠. 영화 'E.T'를 생각해보면 잘 아실 겁니다. 아니면 '별에서 온 그대'도 좋구요.


 그런 존재들에게 우리가 '이건 정말 이상하다. 진짜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점은 별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사고도, 행동도, 모두 우리가 헤아리거나 예상하는 범위 내에 있으니까요. 이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과 사고 방식의 산물이니까요. 원래는 개미가 물고기를 만나는 것 같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며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그건 이미 외계인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저 외계인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타자인 그런 존재마저도 우리는 이처럼  '인간주의적인 시선' 속에 가둬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랑 닮았거나 별 차이가 없는 존재이었기에 굳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절대적 타자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존재들은 지금까지의 내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어서 끝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이나 하고 있는 생각들이 옳은 것인가 하고 의심과 회의를 움트게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절대적 타자는 나의 완결성에 흠집과 균열을 내고 겸허의 자각과 변화의 용납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노변의 피크닉'은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외계인이 나왔던 다른 SF 소설은 줄 수 없던 것, 그 의심과 회의를 통한 겸허와 변화를, 가져다 주니까요.


 영어 판 '노변의 피크닉' 표지입니다. 영화 '잠입자'에 나오는 장면을 표지로 썼네요.


 바로 이것이,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우리가 이 소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의 완전무결함을 애써 믿거나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미국의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 시리아의 IS 그리고 브렉시트를 단행한 영국이 대표적입니다. 다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으로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있지요. 그들이 타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자기처럼 바뀌거나 아니면 제거되거나. 네, 이러한 모습은 2차 대전의 독일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지요.


 아마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소련 체제가 역시 한 몫 했을 겁니다.

 그 때의 소련이란, 독일 나치와 어깨를 견줄 만큼 엄혹한 전체주의 사회였으니까요. 특히나 형제가 열심히 이 소설을 집필하던 무렵의 60년대는 소련이 바깥으로 자신의 힘을 엄청나게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코슬라바키아는 소련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을 잃어버렸고 헝가리 역시 같은 꼴을 당해야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의 체제 지속을 위해서라면 타자의 자유와 행복 따위는 깡그리 없애버릴 수 있는 나라였던 겁니다. 이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자기 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소련을 보면서 그들은 더욱 과연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념이나 신념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점은 소설 속의 한 박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 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p. 227)


 여기서 방점은 분명 주변 세계를 해지지 않는다는 데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었던 소련이 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일 테니까요.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그들의 생각이 낳은 최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을 여는 필먼 박사의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모두 네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으며 세 번째 부분을 빼면, 모두 가장 탁월한 '스토커(stalker)'인 레드릭 슈하트의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사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으로 소설은 그의 9년이란 시간을 다루고 있지요. 그 9년의 시간 속에서 레드릭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지는 등 자신의 삶에 지속 가능한  점차 안정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구역의 여파에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이 이 소설에선 정말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레드릭이 소설 속에 등장할 때는 구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룹의 리더로 그는 정말 독립적이며 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주체성은 점차 훼손됩니다. 그토록 강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구역의 영향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 때문에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금빛 구체를 찾아 다시 구역으로 들어간 최후의 여정에서 드디어 금빛 구체 앞에  다다르자 그는 자신이 짐승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말을 모르고, 나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생각할 줄 모르고, 그 더러운 놈들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p. 330 ~ 1)


 레드릭의 고백 그대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란 과연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한 개인을 사회화 시키는 가장 원초적은 도구로써,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을 희생시키고 사회에 포섭됩니다. 그러므로 그 언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진정한 주체성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 났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체성의 해방인 것이죠. 그것은 레드릭이 짐승이라 고백한 다음 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두드러집니다.


 나는 내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긴 적 없으니까! 그건 내 것, 한 인간의 것이다!(p. 331)


 타자는,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정체불명의 타자는 주체를 불안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이방인을 잔뜩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실은 절대적 타자야말로 사회에 압도되어 자신조차 방기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성을 자각하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므로 타자는 배척의 존재가 아니라 설령 그것이 끝없는 불안과 혼돈을 준다고 해도 끝까지 대면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도 더해서.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짧은 방문과 그들이 남기고 간 정체 불명의 물건들에 대한 너무나 멋진 비유를 제목으로 쓴 '노변의 피크닉(ROADSIDE PICNIC)'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넌 지금 네가 생각하는 너를 진짜 너라고 생각해? 그런 너야말로 오히려 편협하고 협소한 자아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이죠. 그들이 이 소설을 썼던 때와 오늘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스스로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인데다 소설 또한 명불허전을 느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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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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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요리에 관한 소설을 읽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그건 허기가 없을 때 읽어도 그렇습니다. 아, 이게 아닐까요? 오히려 허기가 질 때, 요리 이야기를 읽는 건 더 고통스러울까요? 마치 한없이 출출한 야밤에 '심야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를 볼 때처럼? 뭐, 그래도... 어떤 때는 맛있게 요리된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잖아요? 그와 똑같이 먹음직스럽게 진행되는 요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소설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이란 책입니다.


 무엇보다 제목이 제 시선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이라니!  보기만 해도 맛있는 요리들이 무진장 나올 것 같은 제목이 아닌가요? 거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중서부의 요리들이 가득 나온다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미국 요리만큼 대단찮은 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도전 정신이 아직 강하고 그런 제게 미국 중서부 요리는 미지의 대지와 같은 지라 탐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중서부 요리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괜찮겠다 생각했는데, 웬 걸! 아주 재밌는 소설이었어요. 작가는 역시나 중서부인 미네소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J. 라이언 스트라돌'이란 남자인데 놀랍게도 이 소설이 데뷔작이네요. 제가 '놀랍게도'를 쓴 것은, 데뷔작이라는 게 얼른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밌고 참신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에바 토르발'이라는 여성이에요. 이 여자에 대한 소개는 이것 하나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대장금'. 그 대장금처럼 음식을 한 입만 먹어봐도 그 어떤 미세한 재료까지 다 알아 맞추는(이런 장면을 읽을 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인데' 하는 대장금의 BGM이 절로 깔렸다는.)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인데다 그것을 바탕으로 단 한 번의 만찬을 위해 지불해야 되는 돈이 무려 5천 달러인데도 사람들이 그것도 줄을 서서 몇 년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고 몰려드는 훌륭한 요리사가 되니까요. 성장 과정도 비슷해요. '대장금'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모두 잃었고(엄마는 에바가 아기일 때 어떤 남자와 바람이 나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났고, 그 뒤 얼마 안 있어 아빠는 갑자기 사망합니다.) 어린 시절엔 동급생에게 말못할 괴롭힘을 당했으며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홀로 남은 양아빠를 병수발해야 했으니까요. 다시 말해, 그 대장금처럼 편안하게 요리사가 될 환경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에바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사가 될 수 있었나가 이 소설을 감상하는 하나의 핵심 포인트 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 소설은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에바 토르발의 입장에서 전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처럼 나오는 것은 오직 딱 하나, 두 번째 장인, '초콜렛 아바네로'밖에 없어요. 그건 에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자신을 무던히 괴롭히는 동급생을 자신이 벽장에서 몰래 키우고 있던 고추를 이용하여 거하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죠. 여기서만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다른 장에서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각 장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통해 그들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에바를 봐야만 하죠. 이 구성이 제겐 참신했습니다. 요리사가 주인공인 소설의 경우 대부분은 '대장금'처럼 그를 무대의 정중앙에 세워두고 어떻게 그가 시련을 딛고 성공하게 되었나만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지 않고 주변 인물의 내면을 끌고 들어와 그들은 왜 에바가 이룬 것을 놓쳐버렸나를 더많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거꾸로 에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줬던 것이죠. 결국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은 정말로 많은 중서부 요리들이 나오긴 하지만 요리 보다 삶, 그것도 실패자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던 겁니다. 하기사 삶과 요리가 다르지 않긴 하죠. 삶은 요리를 만드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으니까요. 소설에도 그런 말이 나와요. 마지막 부분의 연회 장면에서 요나스가 손님들에게 에바의 요리에 대해 '여러분은 지금 에바의 인생을 맛보셨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이처럼 요리를 매개로 성공 보다는 실패가 더 많이 존재하는 우리네 삶을 풀어간 이야기가 바로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의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한 번 찬찬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뭐, 이런 걸 따지지 않아도 이야기 자체만으로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에 요리를 주제로 한 진짜 근사한 소설을 만나고 싶으셨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소설을 손에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혹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이란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제가 참 좋아하는 소설인데, 파리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가 파리 코뮌 때 프랑스 정부에 맞섰다는 이유로 노르웨이로 숨어 들어와 과거를 숨기고 한 집의 하녀가 되어 살아가다 자신의 복권이 당첨되자 그 당첨금을 모조리 단 한 번의 만찬을 위해 써버린다는 내용으로 이 만찬 장면이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에서 에바가 달마다 여는 만찬과 흡사하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 얼른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바베트의 만찬'에서 디넨센은 그 요리사, 바베트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보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 자체를 즐기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에바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 자체를 즐기는 것엔 주어진 환경도 포함됩니다.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 한계 내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바로 디넨센의 바베트와 에바가 걸어가는 길이죠. 이렇게 보자면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이 왜 실패했는지, 특히 에바를 버린 진짜 엄마 신시아와 비교하여(소설의 마지막은 이 신시아가 주인공입니다.), 감을 잡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그게 정말 자신에게 소중한 기회였다는 것을 언제나 아주 뒤늦게 깨닫게 되죠. 그런데 정작 그 순간, 놓친 기회만 아쉬워하지, 왜 그렇게 되었나에 대해선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놓쳐버린 보상을 중심으로만 생각하지,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낳았던 삶의 태도에 대해선 제대로 시간을 들여 복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소설은 그런 복기의 시간을 가져다 줍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실패자의 얼굴에 과거의 언젠가 우리 얼굴이 언뜻 겹치기 때문이죠. 저는 소설의 주제와 관련하여 왜 이 소설이 하필이면 요리를 소재로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요리야말로 재료로 주어진 것이 최선의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란 걸 말이죠. 주어진 것보다 요리사의 능동적인 작업이 가치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아마도 인생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해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것으로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레시피를 지금부터 만들어보라고!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당신이 만들게 될 레시피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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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많은 소설을 읽는다하는 일이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주위에 소설을 벗하는 이도 드물다 보니  ‘어디  데도 없는  뭐하러 그리 열심히 읽어?’ 소리를 듣는다하기야 처음 듣는 지청구도 아니다어릴   아버지에게 “소설 그만 읽고 공부  해라!” 말을 허다하게 들었으니까요즘 아버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죽어라고 소설을 읽더니 애가 아주 이상해져 버렸어.”

 

 아버지의 말마따나  현재 이상한 사람으로 통한다주위 사람들에겐 구닥다리 취미를 가진 데다 그들이 모르는 사람알지 못하는 책을 입에 주워 담는 일이 잦다 보니 대화에도  끼워주지 않게 되었다소설 때문에 고독해졌다침묵의 벗이 되었다벌써 오래된 일이다그런데도 아직 읽고 있다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오기를 부리는  아니다그냥 소설이 좋은 것이다장르가 무엇이든국적도 상관없이

 

  그렇게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누구도  먹는 이유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 것과 같다지금까진 그랬다그런데 최근에 문득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어느새 밝아버린 창문으로 하얀 설원이 되어버린 세상을 보고서였다그때 마침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읽고 있던 것도 한몫 했다읽느라 일어날  다리가 저려 얼른 제대로 서지 못할 만큼 오래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다일어나게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아우토반 되었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누이 그리고 아내를 버릴  있다고 말했던 ‘명예의 한순간 과연 잡았는지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였다그는 원하던 것을 갖지 못했다평생을 꿈궈온 영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성을 시작으로 느닷없이 운명에게 옆구리로 발길질을 당하고  것이다그는 눈과 코를 매캐하게 휘감는 포연과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한 대지 위에 벌렁 나자빠진다이제 죽음만이 남았다고 확신한 순간지금까지   번도 보지 못한 파란 하늘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드높은 하늘은 안드레이의 운명은커녕 유럽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마저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초연한 표정으로 정적과 평안만이 가득했다그것을 보면서 안드레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명예의  순간 실은 참으로 보잘  없다는  깨닫는그는 생각한다.

  나는 전에  드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p. 540)



 

 이런 고백이 무심결에 마음의 현을 진동시켜 나도 하늘이 보고싶어졌던  같다그래서 일어났던 것인데 세상이 완전히 변했음을 발견한 것이다팔짱을  채로 풍경을 한동안 응시하다 돌연 깨달았다내가 소설에 매혹을 넘어 중독까지  것은 그것이 안드레이에게 그랬듯이 드높은 하늘을 보여주기 때문이란 .

 

 소설은 그런 손길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하며 골방 같은 일상에 안주하며 세상이 정답이라고 말한  외엔  닫고  막으며 살려는 나를 문을 박차고 들어와 밖으로 이끄는 굳건한 손인 것이다어린 시절 내겐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다방학만 되면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나를 이끌고 온종일 산과 들판을 쏘다니던 녀석이었다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다나는 그곳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인가 감평하는 역할이었다둘이 합의하여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인정되면 ‘비밀기지  이라는 넘버링을 붙였다그리고 둘이 함께 만든 지도에 그곳을 첨가했다모두  당시 열광했던 애니메이션인 ‘보물섬 영향이었다소설은  친구 같다표지를 넘기면 문득 그때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담장을 타고 넘어오던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같고 오늘은  어떤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게 될까 두근거린다어쩌면 나는 여전히 아이일 때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소설 또한 애초부터 그런 존재이지 않았나많은 이들이 문학의 시원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꼽는다고 알고 있다 이야기 속의 오디세우스 역시 낯선 세계로 호출되어 정처 없이 유랑하며 예전에는 보지도만날 수도 없었던 기이한 장소와 존재들을 만난다그리고 끝내 자신의 고향 ‘이타카마저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모험을 통해 오디세우스에게도 안드레이처럼 ‘드높은 하늘 도래한 것이다오디세우스의 후예라고 해도 좋을 소설은  그랬다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단적인 예다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뛰쳐나가는 것이 소설의 사명이라는 것을.



 그러나 단순한 가출은 아니다풍차를 괴물로 간주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리석다 말할 테지만세르반테스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군가가 규정한 협소한 시야에 한없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동시에 강조한다소설의 임무는 그런 구속에서 독자를 자유롭게 만들어 모호함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속에서 이제 모든 의미와 질서를 스스로 찾고 구축해 나가도록 돕는  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올해 읽은 켄트 하루프의 ‘축복 이언 매큐언의 ‘넛셸’도 다시금 확인시켰다.

 

 많은 이들이 ‘축복 두고 평범한 삶을 찬미하는 소설이라 말한다하지만 내겐 정반대로 읽힌다우리가 ‘평범하다 말하는 일상이란 이사할  장판을 걷으면 발견하게 되는 무수한 곰팡이처럼 치졸과 비겁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무수한 자기 검열과 타인에 대한 냉대,  탓하기로 마구 얼룩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남들 눈에 무난하게 보이는 평범한 삶이야말로 오욕이라고 말이다소설에서 그것은 ‘겁쟁이 말로 표현된다굳건한 기독교 신앙으로 우리와 그들이 명확히 구분되는미국 남부 아이오와주의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엔 겁쟁이들이 즐비하다무엇보다 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대드 루이스가 대표적인데그는 남의 눈이 무서워 동성애자인 아들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린다더하여 오 년 동안 자기 밑에서 일한 ‘클레이턴이란 부하 직원이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역시 신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원과 아내의 절박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해고한다 결과아들은 집을 나가고 임종의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으며 클레이턴은 자살한다이것은 그에게 평생 한으로 남는다사실 그는 지금 죽는  아니었다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자비 보다는 냉정을 선택했을 때부터 ‘대드 이름에 이미 ‘죽음(Dead)’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 죽어 있었다이러한 대드의 삶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인 라일 목사를 통해 선명하게 대비된다라일 목사는  마디로 겁이 없는 사람이다동성애가 죄가 아니며 아랍이 적이 아니라고 소신껏 말한다신도들이 격노하여 자신을 비난하고 교회를 떠나도 굽히지 않는다아내와 자식마저 그를 버리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다이름 또한 (Life) 연상시켜 한층  뚜렷하게 대조되는  삶을 보여주며 켄트 하루프는 ‘누구의 삶이 축복인가?’ 질문에 분명히 답한다그것은 바로 라일 목사라고.



 

 이언 매큐언의 ‘넛셸’ 또한 클로드가 트루디를 부르는 호칭 그대로 우리를 ‘생쥐 만드는 세속적 가치에 점령당한 일상을 통박(痛駁)하고 있다. ‘돈키호테 정반대로 현대인의 초상을 정립한 ‘햄릿시간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태아인 햄릿을 화자로 하여 다시 쓰고 있는  작품에서 그런 일상은 클로드의 말버릇이기도  ‘상투어 나타난다클로드는 결국 햄릿의 아버지 존을 살해하는데  존이 하필이면 시인이다구체적인 사물을 거래하는 부동산 업자인 클로드와 모호한 언어로 추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존의 관계는,하이데거를 따라 시가 일상을 점령한 존재자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존재 본연의 모습이 도래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감안하면 일상과 비일상의 대립이란  더욱 확연해진다그야말로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처럼 쪽에는 ()다른  쪽에는 () 있는 것이다 사이에  사람이 있다바로 햄릿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트루디 여성이다그는 존의 아내다하지만 남편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자 클로드와 어울린다나는  소설에서 트루디란 인물이 가장 흥미로웠다그녀는 일상을 벗어나는 것과 일상에 매달리는  사이에서 용기 있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갈등속에 흔들리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햄릿은  모든 것의 관찰자다그는 트루디의 몸을 통해 세상을 읽는 독자와 같다바깥 세계를 감각을 통해 만나게 하는 어머니의 자궁이 그에겐 책인 것이다.   모든 읽기를 끝내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슬픔그다음은 정의그다음은 의미나머지는 혼돈이다.’(p. 263)



 

 이처럼 ‘전쟁과 평화’, ‘축복’ 그리고 ‘넛셸’ 모두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 현실 세상이 감추고 있었던 세계로 데려가 그런 진리조차 잠정적으로 통용되는 가설에 불과하며 일상의 현실 또한 여전히 모호한  남아있는 여백이 아주 많다는 것과 아직도 경험과 사색의 항해가 많이 필요한 대양(大洋)이란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은 불가능한 시공을 담는다현실 세계에   번도 재현되지 않는 시공이란 의미에서다당연하다그것은 활자로만 존재하니까일상에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인물의 대기 속에서   번도 울렸던 적이 없는 말들로 소설은 채워져 있다일상에서 불가능한 것은 어리석은 몽상이요부재는 쓸모없는 것이지만소설에선 거꾸로 불가능을 통해 가능을 구현하고 부재를 매개로 존재가 정립된다돈키호테에게 풍차가 괴물이란  진실이었던 것처럼 현실의 모든 의미와 질서는 소설에서 전복되는 것이다벽은 무너지고 토대는 붕괴되며 지도는 재가 된다남는 것은 오직 하나모호하지만 무한하게 펼쳐진 가능성이며 스스로 그것을 발굴해 의미를 세공할 독자 뿐이다.

 

 지금의 시대는 갈수록 눈에 보이는 것만을 원하고 있다돈과 외모는 물론이고 인종과 성별 또한 그러하다종교와 민족도 마찬가지다클로드처럼 나와 남을 확실히 구별해  것만을 찾는다내적인 성장은 내버려두고 외적인 것만 중시하다 보니 엷어진 자존감에 자기 보다 훨씬   존재에 기생하여 ‘호가호위’ 하고픈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다그런 시대의 끝에 뭐가 있는가는 ‘축복 보여주는 바와 같다내가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불안에 떠는 겁쟁이가 되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커다란 아픔을  뿐이다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모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상과 가상현실과 몽상과학과 신비실용과 무용 결국은 나와 너를 나누는 지금의 세상이 무한정 그어놓은 경계선을 관통하는 용기가 말이다나는 소설이 그것을 준다고 믿는다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존재가  나만 봐도   있지 않은가그렇기에 남들은 소설의 종말을 운운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소설의 생명은  왕성하리라 내다본다분명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 질린 이들이 차오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설의 우물로 모여들 것이다소설의 기나긴 역사가 증명하듯이소설이란 현실이 감춰놓은 세계를 드러내어 기울어진 시대를 바로잡는 균형추이니까 말이다그러므로 나역시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소설이 초대하는 항해에 기꺼이 뛰어들 것이다모험은 계속된다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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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입니다.
헤르메스님은 정말 소설을 사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전 매년 올해는 소설을 좀 많이 읽자 해 놓고
정작 읽는 책은 에세이 아니면 인문학이더군요.
이 글 읽으니 정말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좋은 소설들과 함께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7-12-28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12-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좋아해요 하지만 좀 가려서 봅니다 헤르메스 님은 어떤 소설이든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저는 어딘가 가는 거 싫어해요(어렸을 때는 친구하고 밖에서 놀기도 했는데...) 소설에서 떠나는 모험은 좋아합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닌가 그냥 재미있어서 좋아합니다 저는 요새 다시 소설만 많이 봤다 했어요 이것저것 알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다른 거 잘 몰라도 소설은 재미있군요


희선

oren 2017-12-29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가 쳐다봤던 그 파란 하늘의 의미를 이토록 생생하게 되살려 놓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오뒷세이아와 돈키호테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게 읽었고요. 헤르메스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최근에 읽었던 『돈키호테 성찰』 속의 문장들이 줄줄이 되살아나는 느낌도 듭니다. 그만큼 헤르메스 님의 글이 예사롭지 않아서겠지요. 소설이 얼마만큼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만드는지를 이만큼 절박하게 표현하기도 힘들 듯합니다...

(헤르메스 님의 글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돈키호테 성찰』 속 문장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모험담은 억압적이고 견고한 현실을 유리처럼 깨 버린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각각의 모험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경계의 폭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늦어도 30년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 실재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발에 매여 있는 줄의 길이가 몇 미터인지 재 보는 것과 같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쳇바퀴인 거야?˝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에 대한 위험한 시간이 도사린다.

이 대목에서 가바르니의 재미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것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세계를 보여 주는 만화경 옆에 서 있는 교활한 늙은이를 그린 것이다. 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겐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해. 실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가바르니는 미학적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파리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모험담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실제로 약한 인종들이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약을 우리가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도망치도록 해 주는 악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145∼146쪽)

* * *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

한여름 라만차 지방에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는 종종 신기루 현상을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물은 진짜 물이 아니지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뭔가 진짜 같은 것도 있다. 그 척박한 근원, 즉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이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이다. 즉 태양이 만들어 내는 물은 진짜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어법적이고 비스듬한 시선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생생한 물의 모습을 통해, 그런 척 위장하고 있는 대지의 건조함을 본다. 모험 소설, 모험담, 서사시 등은 상상적이고 의미심장한 사물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 번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 신기루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기사도 이야기에 반대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도 기사도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문학 장르로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런 현태의 영양 흡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현재적인 실재가 어떻게 시적 실체로 변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신화적 영역의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어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재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며 정적이고 말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력을 가지면서 관념적 수정체 같은 세계를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변모한다. 이 수정체의 환상이 일단 깨지면 그것은 무지개 빛깔의 가루가 되었다가 점점 색깔이 바래면서 마침내 거무스름한 흙더미가 된다. 우리는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는 시적이지 않고 예술 작품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단지 관념적인 것을 다시 흠수하는 몸짓이나 운동일 뿐이다.(155∼157쪽)

2017-12-2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 몽키스 구단 에이스팀 사건집
최혁곤.이용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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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넓고 미스터리의 소재 또한 그만큼 다양합니다. 당연히 야구도 자주 미스터리의 소재로 쓰였었죠. 야구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한국에선 야구를 소재로 이렇다할 미스터리가 없었는데 드디어 그런 소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본격 야구 미스터리 소설'을 표방하고 나온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가 그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 이 소설을 소재 보다 작가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제가 한국 최고의 스릴러 소설 중 하나로 치는, 흔히  'B 시리즈'라고 알려진 'B컷'과 'B파일'의 작가 최혁곤이었거든요. 지금까지 그가 쓴 소설은 거의 다 읽어본 것 같은데,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작가가 이번엔 야구를 소재로 미스터리를 썼다고 하니, 호기심 때문에라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최혁곤 작가만의 소설은 아닙니다. 공동 저자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야구 기사를 쓰는 이용균 기자가 함께 썼습니다. 이렇게 미스터리에 강한 사람과 야구에 강한 사람이 함께 써서 그런지,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야구 이야기는 야구 이야기대로 모두 어디 흠 하나 얼른 잡아내기 어려운 작품이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 만족시킬만한 소설입니다.




 표지에 소설의 주요 인물이 다 나와 있네요. 중간에서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여인은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프로야구 팀, 몽키스 구단의 젊은 단장 홍희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는 남자는 이 소설에서 주로 탐정 역할을 하는 몽키스의 프런트 팀장 신별입니다. 맞은 편에서 카메라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저지 차림의 여인은 신별과 같은 프런트 팀으로 왓슨처럼 탐정의 조수 역할을 하는 기연이구요. 사실 신별과 기연, 이 둘이 거의 활약을 다 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의 사건만 나오는 장편은 아니고 모두 6막에 걸쳐 여섯 사건이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그리고 미스터리 스타일도 종막을 제외하면 살인이나 거대한 음모 같은 게 등장하지 않는 일상 미스터리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 일상이란 게, 프로야구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이야기 자체가 아주 새롭습니다. 그 세계에 발을 깊숙이 담그고 있어야만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막, '악마의 리스트에는 마구가 숨겨져 있다'는 소설의 이러한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에피소드는 구단 사이의 선수 트레이드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어떤 선수를 주고, 어떤 선수를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구단 사이에 벌어지는 머리 싸움이 거의 첩보전을 방불케 합니다. 저야 물론 언론을 통해 트레이드 결과만 볼 뿐이라서 소설이 묘사하는 현실의 트레이드라는 게 이토록 치열한 수 싸움을 통해 이뤄진다니 많이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언론을 통해 잘 드러나지 않는 프로야구 계 막후의 현장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줄 수 있는 최상의 재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해 보도록 하죠. 주인공 신별은 원래 경향스포츠 야구 전담 기자로 있다가 최근 몽키스 구단의 프런트로 스카우트 당했습니다. 그가 직업을 바꾼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20년 전 사라진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신충은 20년 전, 핀토스 구단의 투수로 '노 히트 노 런'까지 기록한 대단한 투수였는데 자신이 선발인 한국시리즈 5차전 경기를 앞두고 홀연히 사라져 이후 영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별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 실종의 미스터리를 혼자라도 풀기 위하여 보다 야구와 가까운 직업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몰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가 팀장으로 있는 '에이스 팀'은 구단 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골칫거리를 홍희 단장의 지시에 따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쯤되면 눈치채셨겠죠? 제목인, '수상한 에이스는 유니폼이 없다'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네, 바로 '에이스팀'인 신별과 기연입니다. 그들은 회의실에서 발견된 도청 장치 사건을 시작으로 얼른 납득할 수 없는 트레이드 리스트를 제시해 온 상대 구단의 책략을 간파해야 하고 한 조선족 살인 현장에 우연하게 포착된 유격수 유망주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쳐야 하며 과거 후배 선수 폭행으로 방출된 투수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실은 팀에서 왕따를 당했다면서 계속적으로 시위를 하자 그 진실도 밝혀야 합니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터질 지 모르는 온갖 돌발적인 사건들을 인과 관계를 잘 규명하여 잡음 없이 깨끗이 해결하는 게 '에이스 팀'의 임무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해결사라고나 할까요. 비록 마운드에 서지는 않지만 그 배후에서 팀이 경기에만 전념에 승리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니 유니폼은 없다고 해도 선수나 다를 바 없는 것이죠. 제목은 분명 그런 뜻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신별은 놀라운 추리력으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냅니다. 경찰 출신에다 태권도 유단자인 기연 또한 신별이 잘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해내어 완벽하게 조력하구요. 이들의 콜라보와 케미 앞에서 모든 에피소드의 미스터리는 명쾌하게 해결됩니다. 마지막의 아버지 실종 사건 역시도.


 재미와 정보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모든 에피소드 뒤에는 신별이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야구 칼럼이 삽입되어 있는데, 모두 야구의 매력과 야구를 하는 의미에 관한 것으로 에피소드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저 독자의 흥미와 재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야구를 통해 자신의 삶 또한 음미할 수 있도록 손짓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본격 야구 미스터리 소설이 이토록 성공적인 모습으로 나왔기에 아무래도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앞서도 말했듯,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벗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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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2-29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오쿠다 히데오가 울고 가나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 오쿠다 히데오도 야구 소설을 썼더군요 그걸 기억해서 다행이네요 그 책을 정말 읽은 건지 다른 사람이 쓴 걸 본 건지... 제가 책을 읽고도 쓰지 않을 때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책 읽고 쓰고는 오쿠다 히데오 소설 별로 못 봤어요 존 레논이 나오는 소설을 본 다음일지도... 그 책을 잘 못 봐서 그랬습니다

미스터리와 야구 둘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게 보겠습니다 아니 야구만 좋아해도 재미있게 볼 것 같아요


희선
 
속죄의 소나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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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갑자기 잇달아 그의 책이 발간되는 바람에 더욱 그 이름을 뇌리에 새겨두게 된 일본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속죄의 소나타'를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살인마 잭의 고백'을 통해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작가입니다. 세 가지 점에서 감탄한 바 있습니다. 독특한 설정을 이야기로 잘 풀어낸다는 것과 플롯을 참 잘 짠다는 것 그리고 이야기를 굉장히 흡인력 있게 끌고 나가는 것. 간단히 말하면, 참신함과 대중성을 고루 갖추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중 많은 작품이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더군요.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알린 '안녕, 드뷔시'가 그렇고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로 나온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그러하며 이번에 나온 '속죄의 소나타'도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최근 그의 소설이 다시금 이렇게 주루룩 나오게 된 것은 분명 2016에 '안녕 드뷔시'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속죄의 소나타'는 그 보다 전인 2015년에 드라마로 방영되었죠. 읽은 게 '속죄의 소나타' 외에 '살인마 잭의 고백'밖엔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요. 다만 '참신성'과 '대중성'만큼은 그의 분명한 '트레이드 마크'란 것을 확인했습니다.


 네, '속죄의 소나타'도 '살인마 잭의 고백'처럼 독특한 설정을 가집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코시바 레이지라고 변호사인데, 수임료만 많이 주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이도 변호해 동종 업계에서 아주 악명이 높습니다. 드라마 '리갈 하이'에 나오는, 사카이 마코토가 분한 왕재수 변호사 코미카도 켄스케를 떠올려 보시면 미코시바 레이지 이미지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악덕 변호사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소설이 참신한 설정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앞서 말한 '리갈 하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것은 정말 다른 데서 보도 듣도 못한 설정입니다. 미코시바 레이지가 실은 살인자였거든요. 그것도 중학생 때 말이죠. 그냥 죽이고 싶어서 5세의 여자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러고서도 그게 잘못이라는 걸 전혀 몰랐죠. 네, 그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이런 궁금증이 드시겠죠? 아니,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단 말이야? 거기에 대해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기도 한 라이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법고시는 말이지, 인격은 상관없어. 어때, 재미있지 않냐? 곤경에 처한 사람 돕는 일일 텐데 인간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야. 나처럼 세상 사람들한테 악마라느니 인간이 아니라느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시험 성적만 좋으면 변호사 배지를 받을 수 있는 거다. 일본은 참 좋은 나라라니까."(p. 215)


 솔직히 전 이 문장 하나만으로 이 작품이 단번에 좋아져버렸습니다. 라이야 말이 맞습니다. 사법고시에 인격은 필요없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도 참 좋은 나라입니다. 인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법고시 때문에 우병우도 나왔고, 양승태, 홍만표, 이인규를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수많은 사법 적폐들이 출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소시오패스 살인마 출신이 변호사 되지 말란 법도 없죠, 뭐. 소설은 그런 미코시바 레이지가 어떤 남자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감정 개입 없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혐의가 오지 않도록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역시 사법고시의 은총을 받아 변호사가 된 괴물이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속죄의 소나타'란 제목을 붙였던 걸까요?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제목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정말 '속죄'의 이야기이고, 그런 속죄로 나아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소나타' 입니다.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직접 읽으면서 느껴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되기에 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미코시바 레이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처리한 시체가 어떤 자연적인 조건의 개입으로 레이지의 예상보다 일찍 발견되어 버립니다. 시신의 신원이 남의 약점을 잡아 그걸로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잡지 기자 가가야로 밝혀지자 노련한 형사 와타세와 파트너 고테가와는 살인이 그것과 관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가 최근 찾았던 '도조 제재소'를 방문합니다. 당시 도조 제재소는 사회적으로 꽤 유명한 곳이었는데, 왜냐하면 원래 이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던 소이치로라는 남자가 사고를 당하여 뇌사에 빠졌는데 아내가 안락사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아직 안락사를 범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안락사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그런데 나중에 소이치로의 죽음으로 굉장한 액수의 사망 보험금이 나오는 것으로 밝혀지자 검찰은 아내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했을 것이라 보고 살인죄로 기소합니다.


 당시 재재소는 경영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아내는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국선 변호사가 바로 하필이면 '미코시바 레이지' 였습니다. 와타세 형사 일생이 도조 제재소를 찾아 가보니 지금은 소이치로 부부의 유일한 아들, 미키야가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겨우 왼손 뿐인 장애인입니다. 그 자리에 나온 미코시바 레이지를 보고 바로 예전의 '중학생 살인마'라는 걸 안 와타세는 가가야가 레이지를 협박하러 왔다가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레이지는 와타세 형사가 굉장히 노련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위기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과연 레이지는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레이지는 왜 돈이 전혀 안 되는 소이치로 안락사 사건을 맡게 된 것일까요? 레이지는 아내가 소이치로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소이치로 죽음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잡지 기자 가가야는 무엇 때문에 살해된 것일까요? 와타세의 추리는 맞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 그 어디에도 속죄와 관련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제목은 어쩌자고 속죄의 소나타가 된 것일까요?


 아마도 읽다보면 저처럼 이런 많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이 모든 의문은 3부를 지나 놀라운 반전과 함께 모두 해결됩니다. 특히나 3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기에 여기서 부자연스러움을 느끼실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것만 슬쩍 눈 감아준다면 이 소설은 꽤 재밌게 다가오지 않을까 합니다. 뭣보다 4부에서 밝혀지는 반전이 꽤나 흥미진진하거든요.


 작가가 직접 밝히지 않았기에 조심스럽지만, 미코시바 레이지는 아마도 실존했었던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고베아동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아즈마 신이치로' 입니다. 모두 3명의 초등학생을 살인한 범인이 14세의 중학생으로 밝혀져 일본 열도를 그야말로 충격으로 뒤흔들게 만들었죠. 레이지는 뚜렷한 살인 동기가 없는데 형사가 자꾸 이유를 닦달하자 할 수 없이 즐겨 본 호러 영화 때문이라고 대답하는데, 이 역시 아즈마 신이치로가 했던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성년자였기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는데, 레이지도 똑같은 과정을 밟습니다. 때문에 분명 아즈마 신이치로가 미코시바 레이지의 모델이 되었을 것 같구요, 그 아즈마 신이치로가 변호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 소설이 나왔으리라 전 생각되네요. 물론 아즈마 신이치로의 범행은 레이지의 것보다 훨씬 더 엽기적이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더 재밌게 읽은 듯 합니다. 참신한 설정과 법정 미스터리 그리고 반전이 주는 산뜻한 맛을 좋아하신다면, '속죄의 소나타'를 한 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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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12-29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확실한지 모르겠지만 야쿠마루 가쿠 소설 《천사의 나이프》에도 어렸을 때 사람을 죽인 사람이 변호사로 나왔어요 오래전에 읽어서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한번 본 것 같아요 소년법을 이야기하는 거였어요 거기에서 변호사가 된 사람도 어렸을 때여서 그 일은 드러나지 않았죠 변호사만 인격을 보지 않는 건 아니죠 인격을 갖춰야 하는 일 모두 보지 않죠 그 일을 하다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어떤 반전이 있을까 싶네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