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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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미 도미히코. 참 독특한 작풍을 보여주는 소설가죠. 현실과 환상, 일상과 비일상을 자연스럽게 뒤섞는 그의 재능 때문인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참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온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비롯하여 뒤이어 나온 '유정천 가족' 그리고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와 '펭귄 하이웨이'까지 무려 네 작품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거든요.('펭귄 하이웨이'는 개봉 예정입니다만.) 분명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하는 그의 이야기가 영감의 텃밭을 만들어준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라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그러한 작가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인 것 같습니다.


 한 남자(이름은 나오지 않고 내내 '선배'로만 불립니다.)가 대학 동아리 선배 결혼식 뒷풀이 자리에서 거기에 참석한 '검은 머리 아가씨'(소설은 여주인공인데 남자처럼 역시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를 우연히 보고는 첫 눈에 반해 그녀를 뒤쫓아 교토(작가가 쓴 모든 소설에 배경이 되는 도시입니다.)를 밤새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렇게 '선배'는 '검은 머리 아가씨'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게 그와 비슷하죠. 한 편, '검은 머리 아가씨' 또한 이제껏 알았던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을 만나게 됩니다. 럼주에 빠져 있는 그녀는 좋은 술을 찾아 밤의 거리로 나섰다가 세상의 과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야말로 '환상 속 세계'를.




 밤이라는 것이 몽환의 시간이기에, 거기다 그 몽환을 더욱 부추기는 술이 있기 때문에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가 히구치와 하누키(이 두 인물은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에도 등장합니다.)를 만나고 '가짜 전기 부랑'이라는 환상의 술을 찾아 '이백'(당나라 시인인 그 이백일까요? 술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긴 한데.)이 모는 3층 전차에서 '술 마시기 시합'을 벌이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전 설명 같은 게 하나도 없더라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많이 따지는 독자들은 이러한 작가의 전개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달테지만 작가는 시침을 뚝 때며 '이 세상 어딘가에는 진짜 이런 장소와 존재들이 있을지도 모르잖느냐'라고 말하듯 잘도 현실과 환상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일본은 사면이 바다인 섬 문화의 성격 상 애미니즘적인 전통이 우리나라보다 강하고 '교토'라는 도시 또한 다른 데보다 전통적인 게 많이 살아있는 장소이기에(작가가 이 소설에서 일부러 옛날 투의 문장을 쓰는 것도 이 '교토'라는 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게 아닐지) 작가가 소설에 이백을 비롯하여 '헌책 신'이라든지 하는 기이한 존재를 마구 등장시켜도 독자들이 별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리라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소설엔 5월에서 12월까지, 사계절에 얽힌 네 개의 에피소드가 있으며 구성은 '선배'와 '검은 머리 아가씨'가 차례를 번갈아가며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누군가를 뒤쫓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접어든다는 점에서 '검은 머리 아가씨'를 뒤쫓는 '선배'의 모습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이백'이 모는 커다란 3층 전차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하울'이 2004년에 나왔고 이 소설이 2006년에 나왔으니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아가씨'를 뒤쫓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하진 않았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던, 곤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과도 비슷한 설정이군요.


 이제야 왜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이 애니메이션으로 자주 만들어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인물과 이야기가 그야말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에 딱이거든요. 소설이 그 어떤 고정틀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전개되는데 알고 보면 애니메이션이야말로 그러한 비현실적인 환상성을 한껏 표현 가능한 미디어이니까요. 그만큼 이 소설엔 '식상함'이란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상식과 현실이 가진 중력은 모조리 휘발되고 마치 소설에 나왔던 회오리 바람에 휘말린 잉어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보여준 선배의 활공처럼 상상력이 달아준 날개로 모든 구획과 경계를 뛰어넘어버리니까요.


 모리미 도미히코가 능청맞을 수 있는 것은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를 구속하는 현실과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환상은 주먹을 쥘 때 엄지 손가락을 밖으로 빼느냐, 안으로 넣느냐의 별거 아닌 차이일 뿐이라는 믿음 말이죠. 아마도 그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 처음부터 '친구 펀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성인 군자는 그야말로 한 줌, 남은 건 썩은 못된 놈이든가 멍청이든가, 아니면 썩은 못된 놈이면서 멍청이야. 그러니까 때로는 그러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철권을 휘두르게 되지. 그럴 때는 내가 가르쳐 준 친구 펀치를 써. 굳게 쥔 주먹에는 사랑이 없지만 친구 펀치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이 가득 찬 친구 펀치를 구사하며 우아하게 살아갈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이 열린단다.(p. 9)


 저는 이 '조화'라는 말에 주목하게 되네요. '삶은 현실이라는 하나에만 주목해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 이면에 있는, 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환상도 껴안을 수 있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며 작가가 방점을 찍는 것 같아서. 그런 믿음이랄까, 마음이랄까 그런 것이 향신료처럼 듬뿍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미각까지 높여주지요.


 사실 전 이 작가를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애니메이션을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2010년에 '노이타미나'로 편성되어 방영한 애니메이션인데 높은 작품성을 인정바다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대상까지 수상한 바 있습니다.(그 애니메이션의 감독이 이번에 개봉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감독했습니다.워낙 작품이 좋다보니 당연히 원작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만나게 된 것이죠. 이번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어보니 이 소설이 그의 작품 세계의 원점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집니다. 밤이 가진 몽환의 동경, 환상의 포용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는 현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들이 굳건히 배인 그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다르게 거의 회색빛에 가까운 제 대학 생활이 절로 후회되면서 왠지 앞으로의 시간만은 절대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게 되네요.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또 내일도 그대로일 것 같아서 심드렁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면 어떨까요? 환상의 향과 맛으로 가득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한 잔을 살짝 음미해 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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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 상
오타 아이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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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트너' 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0년부터 방영을 시작하여 현재 16번째 시즌으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명실상부한 일본 형사 드라마의 대표작으로 등극한 작품이죠.




 이번에 나온 '범죄자'는 드라마 '파트너'의 각본가(8번째 시즌부터 참여)인 오타 아이가 2012년에 발표한 데뷔작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 오른 바 있었던 '잊혀진 소년'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들이 같아요. '잊혀진 소년'에서 인상 깊었던 활약을 보여주었던 소마 형사와 청년 슈지 그리고 전직 방송국 PD였던 야리미즈가 두 작품 모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저처럼 '잊혀진 소년'을 읽고 '범죄자'를 읽는다면 그들의 과거를 읽게 되는 셈입니다. '잊혀진 소년'에서 찰떡 같은 팀 플레이를 보여주던 그들이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나를 바로 '범죄자'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직 '잊혀진 소년'을 읽지 않으셨다면 '범죄자'부터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잊혀진 소년'을 읽으신 분들도 마찬가지로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도원결의'를 하게 되는 계기인 사건이 무척이나 흥미롭거든요.


 '범죄자'는 시작이 아주 강렬합니다.



 슈지가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아렌이란 여성에게서 메일 하나를 받습니다. 내일 오후 2시까지 진다이지 역 남쪽 출구에 있는 역 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은 다짜고짜 메일 주소를 달라고 해서 준 것이 인연의 전부였기에 열 일곱살 때부터 건설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슈지는 근무까지 빼먹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갑니다. 평일 오후의 한산했던 역 앞 광장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상인 풍모의 남자와 노부인 그리고 주부로 보이는 여자와 자신보다 뒤늦게 도착한 여대생까지 합해 다섯 뿐. 그런데 여대생이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다스베이더와 함께 무차별 칼부림 학살이 시작됩니다. 눈 앞에서 다섯 사람이 순식간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을 본 슈지는 그 자신도 살인마에게 희생당할 뻔 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한 편, 현장으로 출동한 소마 형사는 원래 무차별 칼부림 범죄는 동기도 없고 용의자 특정도 어렵기 때문에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것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범인의 신병이 확보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놀랍니다. 범인은 근처 공용 화장실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다량의 헤로인을 투약하여 이미 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변엔 학살에 썼던 흉기며 복장이 있어 그가 범인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고 결국 약에 취해 그토록 엄청난 학살을 벌인 것으로 충격적인 사건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신히 살아남아 병원에서 치료 받고 있는 슈지에게 낯선 남자가 나타나 이런 말을 함으로써 사건은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맞습니다. 슈지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는 자기 얼굴을 알아보았고 달려와서는 다른 네 사람은 무사한지 물었고 죽었다고 대답하자 절망에 빠진 남자가 쥐어짜낸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 달아나.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p. 57)

 "앞으로 열흘.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해. 살아남아. 네가 마지막 한 명이야."(p. 58)


 남자가 슈지의 얼굴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는 것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슈지는 자신이 당한 사건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뭔가 다른 흑막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서 그의 말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친구 집에서 한동안 기거 하기로 합니다. 소마 역시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범인이 정말로 약에 취해 무차별 살인을 하기로 작정했다면 겨우 다섯 밖에 없는 한적한 역 광장이 아니라 사람으로 북적한 거리를 고르는 게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부 고발로 조직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소마의 의혹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결국 소마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쫓게 됩니다. 그러다 슈지가 며칠이 지나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면서 집에 들렀다가 암살자에게 죽을 뻔하게 된 걸 구해주면서 소마는 역시 자신이 의심했던 대로 사건엔 다른 진실이 있으며 그것이 온전히 밝혀질 때까지 슈지를 자신의 친구인 야리미즈의 집에서 보호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마와 슈지 그리고 야리미즈가 한데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과연 슈지가 자신도 모르게 연루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아무런 접점도 없고 죄를 짓지도 않은 다섯 명의 목숨을 무자비하게 빼앗은 것일까요? 241 페이지 분량의 티저북이지만 그 내막을 짐작케 할 단서는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한 방송국의 오래도록 장수한 다큐 프로그램을 폐지시켜 버린 '멜트페이스 증후군'이 그 중 하나죠. 얼굴이 녹아내린다니,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이 증후군은 '원인 불명의 고열이 나다가 안구를 포함한 안면 조직이 차례차례 괴사하는 무서운 병으로, 괴사 조직을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얼굴에 심각한 손상이 남는다.(p. 169)'고 합니다. 이토록 끔찍한 증후군은 특히 갓난 아이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는데 그것이 특정한 시기의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갓난 아이들이 감염으로 마구 희생되었다고 하니까 얼른 얼마 전 우리나라의 이대 목동 병원에서 일어난 신생아 집단 사망 사건이 떠오르는군요. 주사제를 무려 25년 동안 나눠쓰는 등 환자 위생을 위한 비용을 아끼려는 병원의 탐욕과 그만큼 환자 위생에 관심이 없었던 의료진의 무책임이 불러온 참사였죠.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이것에서 어떤 분들은 저처럼 소설 '범죄자'가 1960년대 초에 독일에서 일어난 유명한 약물 사건 떠올리지도 모르겠어요. 캐나다의 영화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영감을 받아 '스캐너스' 란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콘테르간' 말이죠. 



 산모의 입덧을 완화시켜준다고 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꽤나 팔린 이 약은 탈리도마이드 성분 때문에 이 약을 복용한 산모들이 사지가 아예 없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기형아를 낳게 만들었죠. 그 수가 전 세계적으로 1만 2천명 이상이라 현대 의학이 가져온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이 사건이 일어났던만큼 오타 아이가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쨌든 소설 초반부터 등장하는 국회의원이자 정치 실세인 이소베 미쓰타다가 사사키 구니오란 인물로 인해 위기를 느끼고 있고 그의 수행비서이자 최측근인 핫토리 역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열흘밖에 안 남았다고 하는데다 그것이 이소베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제약 회사 때문인 걸 보면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파트너' 각본가가 쓴 소설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트너'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잇속만 밝히는 사회 권력층을 비판하는 면모가 강하게 나타났던 작품이었으니까요. 일본 미스터리는 흔히 미스터리 풀이에만 집중하는 '본격파'와 사회 비판을 위해 미스터리를 빌려오는 '사회파'로 나뉘는데, '범죄자'는 티저북만 읽고 이렇게 결론내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서 '아마도'란 단서를 굳이 달고 말한다면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합니다. '잊혀진 소년'은 온전히 '사회파' 쪽이었기에 이런 심증이 더욱 굳어지는군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읽고계신 분들은 티저북에 꽤 많은 정보가 나온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실 것 같네요. 그러나 실은 '범죄자'가 두 권으로, 그것도 1권은 656페이지이고 2권은 536페이지인 방대한 분량이라 티저북의 내용은 고작 20%에 불과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80%에서 이 이야기가 또 어떻게 뒤집어질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그건 그렇고 20%만으로도 이렇게 흥미를 돋구는데, 80%는 또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쟁여져 있을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네요. 


 물론 무차별 학살 사건의 진실과 희생자들이 가진 접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기에 더하여 과거에 자신의 실적을 위해 친한 친구를 비극에 빠뜨렸던 경찰관을 만나 경찰에 대해 불신을 가득 가지고 있는 슈지가 소마에게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여는 지도 궁금하고 '잊혀진 소년'에 나왔던 것처럼 야리미즈와 슈지가 어쩌다 합심하여 흥신소를 열게 되는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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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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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혹은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습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면 되도록 자신을 티내지 않고 두리뭉실 섞이는 게 가장 좋은 처세로 통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우리는 '평균', '평준화'를 하나의 이상처럼 생각해 온 듯 합니다. 부작용이 없진 않았습니다. 모난 돌을 내리치는 정처럼 평균에 속하지 않거나 모자라는 이들에게 그것은 '닮아야 한다', '속해야 한다'의 강요로 작용했습니다. '평균'이란 어디까지나 데이터 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밖에 없었지만 때로는 그것만이 진리인 것처럼 타인을 멋대로 분류하며 압박한 것이죠. 그런 평균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잘 알려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현재 하버드 교육대에서 개개인학 연구소를 맡아 이끌고 있는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란 책입니다.






 토드 로즈는 '노르마'라는 한 여인 조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노르마는 부인과 의사인 로버트 L 디킨슨 박사가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와 합작해 만든 조각상으로 만 오천 명의 젊은 여성 신체 치수 자료를 수집하여 가장 평균의 신체 치수로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리스어인 이름의 뜻처럼 젊은 여성 신체 치수의 보편적 규범(norma)과 같은 존재였죠. 이 조각상을 전시한 클리블랜드 건강 박물관은 이 조각상의 모습을 미국의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되어야 할 이상형으로 제시하고자 '노르마'와 가장 근접하는 신체 치수를 지닌 여성 찾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를 주관하는 자들은 그런 여성들이 많아 승부가 밀리미터 차원에서 아슬아슬하게 갈릴 것이라 내다 봤지만 천만의 말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참가자 3,864명 중에 평균치에 든 여성은 겨우 40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도 전체 9개의 항목, 모두에서는 '노르마'가 가지고 있는 평균에 들어간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평균의 이상형이라는 '노르마'가 순전한 허상이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죠.


 '평균의 종말'은 이 '노르마'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평균'과 '표준'이 어느새 만고의 진리가 되어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가진 개인들을 억압, 관리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아이들이 대학에 지원할 때도 이런 것들이 튀어나와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오직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일렬로 줄을 세웠습니다.


 토드 로즈는 이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교육이나 성격 그리고 아이들 발달 상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최근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쉽게 평균의 함정에 빠지는가도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일일이 살피고 고려하자면 너무 귀찮으니까, 눈에 쉽게 드러나는 것으로만 파악해 얼른 끝내버리려는 '일차원적 사고'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지금 많은 학문 연구에서 드러나는 것은 개인이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면모도 재능도 모두. 그러므로 하나의 잣대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개인이 가진 들쭉날쭉한 측면들을 모두 고려하는 '들쭉날쭉 원칙'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차원적 사고는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본질주의적 사고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런 본질주의적 사고는 종종 성격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얘기되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의 성격을 외향성, 내향성으로 분류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본질주의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절대 규정될 수 없는데, 이런 것들이 통용되게 만드는 것이죠. 여기엔 사람이 타고난 성격, 그렇게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재 성격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성격에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언제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평균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본질주의적 사고에서 생기는 것만큼 그런 본질주의적 사고가 현대 연구의 결과로 더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면 거기에 기반한 평균의 권위 또한 허물어지는 게 맞겠죠. 토드 로즈는 그런 사실을 자신의 경험까지 넣어가며 쉽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후반은 특히 교육 부분에 집중되는데, 아이가 남과 달라서 고민이신 부모님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정시 확대를 두고 다시 한 번 정시와 수시의 비중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짧은 머리로 어떻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선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이왕 이렇게 논쟁이 붙은 참에 누구를 붙이고 누구를 떨어뜨릴 것인가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저마다 가진 성격과 재능이 온전히 존중되며 그것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평가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도 많은 생각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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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graphic 2018-06-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때 부터 평균, 또는 보통이라는 단어를거의좋아하지않았어요. 독특하다는 것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와도 같은 한국사회에는 맞지를 않죠.
 
포제션 - 그녀의 립스틱
사라 플래너리 머피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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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작가 사라 플래너리 머피의 데뷔작, '포제션'은 제목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빙의(憑依)입니다.

 '포제션'이 가진 뜻 중엔 어떤 다른 이의 혼에 의해 육체가 소유되는 것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 빙의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역시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인데요. 거기서 영매 역할을 맡았던 우피 골드버그가 자신의 육신을 이미 죽어 영혼이 된 패트릭 스웨이지에게 내어주죠. 그렇게 해서 연인 데미 무어와 직접 만나게 합니다. 우피 골드버그는 이 연기를 너무나 잘해내어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흑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 조연상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포제션'의 주된 설정은 바로 그 영매가 기업화 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주인공 여성 에디가 일하는 기업인 '엘리시움 소사이어티'는 죽은 영혼을 불러와 '바디'라고 불리는 직원 몸에 빙의시켜 그를 보고 싶어하는 산자들과 만나게 합니다. 어째서 이런 것이 가능한가라고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바디'들이 진짜 영매처럼 무슨 주문을 외우거나 수정 구슬을 쓰다듬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하는 영혼을 불러와 빙의를 가능케 만드는 '로터스'란 약이 있습니다. '바디'가 고객을 만나 만나고자 하는 영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은 뒤에 영혼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물건을 가지고 '로터스'를 먹으면 영혼을 소환해 빙의되는 것이죠. 물론 빙의가 되면 '바디'는 의식을 잃습니다. 빙의된 영혼에게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내어주는 그릇이 되는 것이죠. 주인공 에디는 이 '바디' 일을 무려 5년 째 해오고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이 하다보면 정체성의 혼란까지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디'의 경우 대개 1 ~ 2년을 넘지 못합니다. 에디의 5년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인 것이죠. 어째서 에디만이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건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디는 자신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예 자기를 텅 비우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나'라는 게 없었기에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 오래 지속해도 될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한 남자 고객을 만나고 그런 에디의 삶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 남자는 '패트릭 브래독'으로 최근 아내 실비아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친구 부부와 함께 리조트로 놀러 갔다가 아내 혼자 호수 한 가운데서 익사 당한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째서 패트릭만이 에디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빙의한 실비아의 영혼이 강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에디는 겉잡을 수 없이 패트릭에게 빠져 듭니다. 그녀의 입술에 남은, 실비아가 자주 바르던 붉은 립스틱처럼 어떻게 해도 그를 향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의 규정마저 어기고 직장이 아닌 사적 공간에서 비밀리에 로터스를 습득, 패트릭을 위해 실비아가 되고자 합니다. 산 자신을 포기하고 죽은 아내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조차 쉽지 않은데요, 실비아 죽음에 얽힌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은 사고가 아니라 살해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정황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죠. 과연 에디가 찾아내는 진실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 진실을 알고도 에디는 패트릭의 죽은 아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계속 지닐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스릴러가 가미된 로맨스 소설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제션'은 주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니까요. 그렇게 자신의 삶에 한 번도 주체가 되어보지 않았던 에디가 패트릭에 대한 사랑과 실비아의 존재로 점점 주체가 되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빙의와 사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타자에 대한 열림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시움 소사이어티'에서 일하는 '바디'에는 엄격하게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 고객과의 감정적인 접촉을 피하고 절대적인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 즉 타자에게 자신을 꼭꼭 잠궈두는 게 규율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지요. 회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키고 싶으면 빙의 하는 대상과 확실하게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하지만 에디가 그랬듯이, 그 규율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자아는 빈 그릇이 되어가니까요.


 바로 이런 설정을 통해 소설은 더욱 명확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드러냅니다. 진정한 주체가 되고 싶다면 타자와 변화에 더 많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이죠. 진실로 나답게 되는 것은 타자와 변화로 부터의 격리가 아니라 오히려 빙의처럼 겹침에 있다는 것을 에디 심리의 섬세하면서도 생생한 묘사를 통해 분명히 합니다. 이 소설은 출간된 그 해에 영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존 크리시 대거상 롱리스트에 선정되었다고 하는데요, 거기엔 아마도 이러한 심리 묘사가 단단히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하여간 결론은 읽어볼만한 소설이라는 겁니다. 일단 설정이 참신하고 주체가 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음미할만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빙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은 잘 나오지 않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흔치 않는 작품이니 색다른 것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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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해 이 책은 내게 전혀 예기치 않게 받아버린 선물과도 같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오늘날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의 보르헤스와 맞먹을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작품은 딱 둘 뿐이다. 하나는 '모렐의 발명', 다른 하나는 '러시아 인형'. 전자는 장편이고 후자는 단편집이다. 카사레스는 생전에 9 개의 장편을 썼는데, 소개 된 것은 초기작인 '모렐의 발명' 딱 하나인 것이다. '러시아 인형'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집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그의 첫 모습과 마지막 모습밖에 없다. 중간 과정이 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카사레스의 네 번째 장편인 '영웅들의 꿈'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중간 과정,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열렬히 보고 싶었던 내겐 선물이라 할밖에.


 '영웅들의 꿈'은 '모렐의 발명'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 속 아르헨티나의 공간을 가져왔고 이야기 역시 리얼리즘적인 색채가 강하다. 물론 이것은 '모렐의 발명'이 가상 현실을 다루고 있고, '영웅들의 꿈'이 실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웅들의 꿈'이 '모렐의 발명'과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이 반복되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미스터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진리는 외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의 문제라는 것과 사랑이 이 모든 당황스럽고 혼란과 불안 속에 내던져진 우리네 삶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게 그러하다.



 주인공은 가우나란 남자다. 어느 날 그는 경마에서 큰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을 친구들과 함께 모조리 써버리기로 작정한다. 그러다 우연히 가면을 쓴 여자와 만났다. 그는 단 번에 매혹되었는데, 술에 몹시 취한 상태에서 어쩌다 헤어져 버린다. 그는 여인을 잊지 못하고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연극을 하고 있는 '클라라'를 만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잠시 가면을 쓴 여인을 잊지만, 그녀가 자기 말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한 사실을 알게 되자 멀어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가우나는 배신을 당해 헤어지는 건 자존심이 상해 클라라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것으로 보게끔 그녀를 피하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대면 보다는 회피를 선택한 그는 비겁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소설이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비겁자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영웅의 세계다. 그렇다. 제목의 '영웅들의 꿈'은 자신에게 아무리 상처가 되고 두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주어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자들을 나타낸다. 소설에서 영웅이란 마주 보는 자, 당당하게 겨루는 자다.


 이런 영웅에 가장 걸맞는 존재는 클라라다.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가우나가 꿈처럼 겪었던 가면을 쓴 여인을 만났던 사건의 진실과 그것이 내내 반복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클라나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우나처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마법사인 아버지가 남겼던 예언을 믿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다. 이렇게 소설 '영웅들의 꿈'은 믿음과 영웅에 대한 소설이다. 그것을 비겁자에서 영웅으로 나아가는 가우나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옆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귀가 덮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썼으며, 손으로 도자기 그릇을 들고서 돈을 받았다. 그 아이를 보자 가우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불쌍한 그리스도! 손에 침 뱉는 그릇을 들고 있다니! 이것은 배꼽 잡고 웃어도 될 일이야!'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달빛>을 들으면서 그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인류 전체와 우애를 돈독히 하겠다는 긍정적인 충동을 가슴으로 느꼈고, 선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느꼈으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우울한 욕망도 느꼈었다. 목이 매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p. 293 ~ 294)


 믿음이 나오는 것은 비겁자가 되느냐, 영웅이 되느냐가 바로 세상에 대한 나의 해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 해석이란 세상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테마는 클라라 아버지인 마법사의 예언을 통해 제시된다. 비겁과 영웅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영웅들의 꿈'엔 또 하나의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믿음이 없는 자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있는 자의 세계다. 소설 초반에 가우나가 속했던 '발레르가 박사'의 세계가 전자의 것이고 클라라 아버지 세계는 후자의 것이다. 때문에 소설 후반에서 클라라를 두고 발레르가와 가우나가 결투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우나가 클라라처럼 영웅이 되기 위해선 발레르가의 세계를 찢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믿음이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므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를 보는 시선이 곧 세상을 보는 시선인 것이다. 그 시선을 통하여 발레르가 박사와 마법사의 세계는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전자는 속물의 세계요, 후자는 영웅의 세계라는 것을. 모든 걸 하나로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발레르가의 세계는 이런 의미가 된다. 믿음이 없어 오로지 세상의 기준에 눈을 맞추어 자신의 부족과 불행만을 보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위하여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 피하려 한다면 비겁자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법사의 세계는 여기에 정확히 반대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웅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바로 카사레스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궁극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영웅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 형성한다고.


 '모렐의 발명'이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존재를 찾기만 하면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대개 가상 현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우나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면을 쓴 여인이 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구원은 사실 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감로수라 여기며 마셨던 것에서 깨달은 '일체유심조'와 통하는 이야기라 말하겠지만, 그래도 어쩌랴! 진리는 물과 같아서 담는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은 달라질지언정,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이런 구도의 소설로 읽으면 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보르헤스에 버금가는 중남미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지 잘 이해될 듯 하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좋은 문장이 많아서 그렇게 여길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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