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유령함대 세트 - 전2권 - 미중전쟁 가상 시나리오
피터 W. 싱어.오거스트 콜 지음, 원은주 옮김 / 살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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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학자이자 사이버 보안 및 사이버 전쟁 전문가인 피터 W 싱어와 '월 스트리트' 신문의 국가안보 및 방위산업 전문기자 출신인 오거스트 콜이 함께 쓴 '유령 함대'는 우리나라에선 이제야 출간되었지만 실은 2015년에 나왔다. 그 때부터 입소문이 대단했다. 특히 군대 쪽에서 지휘관이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말이 많아 나와서 팔랑귀인 나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러나 싶어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다. 현재 한창 개발중인 군사 기술을 토대로 밀리터리 스릴러를 쓰는 건, 이제는 작고한 톰 클랜시의 전문 분야였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잭 라이언 시리즈는 첫 선을 보인 '붉은 10월'부터 '공포의 총합'까지 많은 소설들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질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가 미친 영향은 게임도 못지 않아서 '레인보우 식스'나 '스프린터 셀' 혹은 '고스트 리콘'등, 게임 좀 해 본 사람이라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게임들이 그의 시나리오와 감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톰 클랜시의 소설도 아닌데 삼천포로 빠진 것처럼 이런 얘길 하는 것은 '유령 함대' 역시 그 계열에 속하기 때문이다. 톰 클랜시 소설에 대한 향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사후, 오래도록 끊어졌던, 흔히 '테크노 스릴러'로 불리기도 하는 그 장르의 맛을 '유령 함대'에서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중국과 미국의 전면전을 다루지만 현재는 아니다. 때는 2026년. 세계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바뀌었다.

 일단 주요 에너지가 더이상 석유가 아니다.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다란에 떨어진 '더티 밤'이라 불리는 방사능 폭탄 때문에 몰락했다. 그 여파로 사우디아라비아 국가 자체가 무너져 더이상 석유를 채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중국의 시진핑 정권이 붕괴되었다. 오일 사태로 인한 경제적 혼란의 가중으로 도시 노동자가 정부에 대해 거센 저항 운동을 일으켰는데 시진핑 정권이 예전 '천안문 사태'처럼 폭력으로 진압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은 예전 천안문 사태 때의 중국이 더이상 아니었다. 그런 폭력적인 진압을 보고 시진핑 정권에 대해 희망을 잃어버린 산업 자본가와 군부 장성들은 반란을 획책, 시진핑 세력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정권을 잡는다. 그들은 예전의 시진핑처럼 한 개인에다 권력을 귀속시키지 않고 '위원회'란 집단에게 권력을 귀속시킨다.




 이런 위원회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외부의 것으로, 정권의 바뀜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인접한 러시아가 언제든 침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어 이 돌발 위기 변수를 제거한다. 또 하나는 내부의 것으로, 에너지 문제가 정권의 변화를 가져온 만큼 그들 역시 시급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갑작스런 석유의 퇴출은 전세계에 혼란을 가져왔고 각국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에너지원은 전쟁마저 불사하게 만드는 새로운 화약고였다. 그러던 차에 중국은 태평양의 마리아나 해구에서 천연 가스가 대량으로 매장된 것을 발견한다. 중국은 이 에너지 자원 확보에 두 번째 동티모르 분쟁으로 인도네시아가 몰락하고 말레이시아가 다시 독재국가로 돌아간 시점에서 태평양의 안보와 자원 확보에 위기를 느끼고 있는 미국이 가장 커다란 방해물이 되리라 내다봤다. 미국을 선제적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중국의 '위원회'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러시아와 거짓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척하여 미국의 눈을 딴 데로 돌린 다음, 원래는 미국과 러시아가 함께 운영하던 우주 정거장을 장악(이것이 소설 프롤로그의 내용이다.)하여 GPS를 무용지물로 만든 후, GPS 없이 핵 추진 선박들을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는 '체렌코프 방사선'을 이용하여 미국 함대를 추적,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동시에 자신들이 미국에 수출하여 이제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중국산 마이크로 칩들을 매개로 미국 전역의 컴퓨터 시스템을 바이러스에 감염시켜 혼란을 초래한다. 이는 사회적 혼란만이 아니라 미국의 대응 공격도 무력화시켰는데, F-35 라이트닝을 비롯하여 많은 미국의 첨단 무기들이 중국산 마이크로 칩을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의 공격은 아주 효과적이었고 그들은 화와이를 침공한다. 2026년, 또 한 번 아시아의 진주만 공격이 개시된 것이다.


 결국 화와이는 중국에게 점령된다. 우주 정거장의 체렌코프 방사선과 사이버 공격 때문에 더이상 과거의 전략과 전술로 중국을 상대할 수 없게 된 미국은, 핵 추진을 하지 않는 예전의 구축함(바로 이렇게 이미 현역에서 오래전에 퇴역한 구축함을 '유령 함대'라 부른다.)으로 중국을 타격하려 한다. 그러나 함포 사격은 또 중국에게 탐지될 것이었으므로 절대 탐지할 수 없도록 전자기력을 사용해 포탄을 날리는 레일건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사정거리가 거의 4000km나 되고 음속의 6배로 포탄을 날릴 수 있기에 적들이 탐지하기도, 대처하기도 어려운 레일건을 장착한 '줌월트'는 화와이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항해를 시작한다.


 여기까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상황과 이야기를 대체적으로 소개해 보았다. 물론 이 소설엔 내가 앞에서 한 얘기만 나오지 않는다. 소설은 수 많은 인물들에게 저마다 목소리를 부여하면서 전개되는데, 여기엔 점령 당한 화와이에서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또 중국 쪽의 시선도 나온다. 많은 목소리가 시점을 달리하며 병행되고 있기에 이야기 되는 상황의 전체를 가늠하기가 좀 어렵기 때문에 내가 이해한 것을 발판으로 그 전체적인 맥락을 말해 본 것이다.


 둘 다 현대 군사 기술과 안보 체제에 전문가라 그런지 소설에 나오는 기술이나 병기들이 현실감이 넘친다. 무엇보다 레일건에 대한 것은 진짜 그대로다. 그러나 2015년에 나왔다는 한계 때문에 레일건에 대한 그들의 예언은 어쩔 수 없이 빗나가게 되었다. 그들이 소설을 발표한 2015년만 해도 레일건은 줌월트 급의 구축함에 장착하여 실전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2018년 현재는 레일건이 전기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것을 비롯한 비용 상의 문제로 실전 배치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중국은 실제로 배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레일건을 개발 중인 걸로 알고 있다. 이렇게 현실감이 넘치기에 소설 속 내용이 좀 오싹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하다는 미군 함대가 저렇게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예전엔 핵탄두와 같은 병기였지만 이제는 사이버 공격으로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는 거란 걸 실감하게 되었다. 소설이 잘 보여주듯, 아무리 단단해 보이는 체제라도 아주 작은 요소로도 파국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신을 너무 과신하여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는 것보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로 평화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인 것이다.


 이런 실감은 만일 내가 2015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더욱 소름으로 다가왔으리라. 올해 초만 해도 북한의 핵실험이 얼마나 동아시아에 어마어마한 긴장을 가져왔던가? 그러나 내일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이고 종전의 가능성이 넘쳐나고 있다. 갈등으로 얼어 붙었던 겨울이 가고 화합의 따스한 봄날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소설 또한 편안한 기분으로 읽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결코 SF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내겐 SF로 보일 정도로. 후후. 그래서 이런 말까지 덧붙여 두고 싶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래도 중국과 미국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을 다루는 지라 드라마에 구멍이 다소 있으며 인물의 처리도 매끄럽지 않은 약점도 있다고. 때문에 인물들에게 비중을 두기 보다 전략이나 전술 또는 정치적인 면에 더 많이 비중을 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든다는.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보는 톰 클랜시 스타일의 소설이라 예전의 추억도 생각나고 해서 재밌게 읽었다. 나처럼 그런 소설에 향수가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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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수상한 서재 1
김수안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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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어로 '양쪽'을 뜻하는 '암보스'는 바디 스위치(body switch) 장르의 소설입니다. '암보스'란 말을 들으니 문득 헤밍웨이가 그렇게나 좋아했다는 하바나에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 생각나네요. 아무튼 '바디 스위치'란 사람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것을 다루는 장르로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아빠는 딸'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장르는 대부분 '아빠는 딸'처럼(혹은 미국에서 엄마와 딸의 영혼이 바뀌었던 '프리키 프라이데이'처럼) 서로 극심한 갈등을 겪는 두 사람이 몸이 뒤바뀐 것을 계기로 상대방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주로 얘기해 왔기에, 이 소설처럼 스릴러 소재로 삼은 적은 거의 없어서 일단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선해 보이는 시도가 독자들에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궁금했구요.


 초반에 나오는 하나의 허들만 독자가 잘 넘길 수 있으면 이 소설은 끝까지 꽤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허들이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기자 이한나와 은둔한 소설가 강유진의 영혼이 서로 뒤바뀌는 것이죠. 소설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장면도 보여주지 않아요. 아예 뒤바뀐 것에서 시작해 버리죠. 마치 독자들에게 그렇게 뒤바뀐 상황을 그냥 납득하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죠. 소설 끝까지 어떻게 가능했지는 나오지 않아요. 마지막 부분은 그것의 단서 같아 보이지만, 그조차 모호한 지라 딱 '이거다!'라고 말하긴 쉽지 않아요. 그러니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냥 소설이 보여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일단은 자신의 손을 소설에 허락하고 소설이 이끄는 쪽으로 무작정 따라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 한 걸음만 수락하면 소설이 준비한 게임이 아주 흥미롭게 당신 눈 앞에 펼쳐질 겁니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내용이죠. 그 다음, 우리가 보는 건 강유진의 몸으로 병원에서 의식이 깨어나는 이한나의 모습입니다. 초반 전개는 '바디 스위치'에서 흔히 보는 대로예요. 결국 자신의 몸이 강유진과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한나는 자신의 몸이 되어 있는 강유진과 독대를 하게 되죠. 강유진은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다가, 이한나는 건물 방화 현장을 취재하다가 화염에 포위되자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짐이 너무 힘겨워 살려는 의지를 스스로 내려 놓다가 영혼이 교체되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런데 왜 하필 바뀐 대상자가 그들이었을까요? 거기에 대해 이한나는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내가 갈구한 것.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여유, 누구의 삶과도 무관한 글을 마음 편히 쓰는 것, 쫓기지 않는 삶.

 그게 전부 강유진에게 있었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 가족, 사회적 관계, 반듯한 외모, 건강.

 이건 고스란히 내게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답은 전율을 몰고 왔다. 완벽하게 대조된 삶이었다.(p. 102)


 모두 자신의 삶에서 달아나고 싶었기에, 그들은 현재 주어진 육체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딱 1년 만, 이한나는 강유진으로, 강유진은 이한나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그걸 바란 건 강유진이었습니다. 사실 이한나는 강유진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예전 자살한 청소년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그가 강유진의 소설 '글루미 선데이'에 영향 받아 자살했다고 기사를 쓴 바람에 강유진이 사회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1년 후에 강유진의 말대로 몸이 원래대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 때를 위해 서로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잘 지켜주자는 계약까지 한 채, 둘은 새로 거주하게 된 육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한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강유진이, 그러니까 이한나의 몸이 연쇄 살인마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당하여 양손이 잘린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살인이 실은 모방 범죄라는 걸 알아냅니다. 그런데 연쇄 살인 방식은 오직 경찰만 알고있을 뿐, 언론으론 전혀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과연 범인은 어떻게 그 정보들을 얻은 것일까요? 그래서 경찰은 죽은 이한나가 통칭 '812'라고 부르는 연쇄 살인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자 범인은 분명 이한나에게서 그 정보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한나의 주변 인물들을 수사합니다. 그러다 최근 가장 많이 연락하고 돈까지 오고간 정황이 드러난 강유진(실은 이한나)가 주요 용의자로 수사망에 포착됩니다.


 졸지에 돌아갈 몸도 잃은데다, 그래서 이젠 너무나 싫어하게 된 강유진의 삶을 계속 살아야하는 것도 모자라 살인 용의자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걸 안 이한나는 강유진의 돈을 사용해 스스로 강유진 죽음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과연 이한나는 자신에게 씌어진 모든 누명을 벗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도대체 강유진은 어쩌다 그렇게 죽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또 프롤로그에 나왔던 살인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소설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주면서 전혀 뜻밖의 진실 앞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표지는 이렇게 양면으로 펼쳐야 온전히 보이도록 되어 있는데, '바디 스위치'라는 걸 잘 드러내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소설에 대한 제 인상을 말하자면, 바디 스위치란 소재를 재치있게 사용한 지적 게임에 가까워 보입니다. 소설은 이한나와 탐정 역할을 맡는 형사의 시선이 번갈아가면서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시간 순서가 다소 얽혀 있어 앞에 등장한 사건이 나중에 가서 커다란 문제라는 게 비로소 밝혀지는 등,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후반에 이르면 경찰이 사건 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작가가 꽤 논리적으로 공들여 설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그 정도라면 작가의 설명 없이 독자 스스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칠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적 게임이란 말을 해봤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 그냥 이야기 하나만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도 그다지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아요. '바디 스위치'는 정체성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에 솔직히 욕심껏 철학이나 사회적인 의미들을 곁가지로 얼마든지 넣을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오직 '육체 교환을 통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창출'이라는 이 하나에만 매진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몰입감이 더 컸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제게는 경찰에 대한 부분과 조연급 인물들에 대한 부분이 너무 상세하게 나와 분량이 필요 이상(이 소설은 무려 500페이지 입니다.)으로 늘어난 느낌이었습니다. 장황 하다고 해야할지, 하여간 그것이 조금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군요. 뭐, 어디까지나 '조금'입니다. 재밌는 소설이라는 건 변함 없어요.


 오직 재미만 추구한다고 해서 아무런 주제의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소설에 대한 오해가 될 것 같아 꼭 얘기해야겠네요. 이 소설에도 주제가 있다고 말이죠. 이한나와 강유진이 육체 교환을 받아들이게 만든 이유가 바로 소설의 주제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가 전혀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당사자가 깨닫는 것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라는 거죠. 타인의 삶이란 그저 아주 멀리서 바라 본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랄까요.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바라다 보면, 높은 빌딩도 낮은 움막도 그저 2차원의 사각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거리가 동경과 부러움을 만드는 것이지, 그 누구의 삶이든 실제 안으로 들어가보면 내 삶만큼이나 모나고 아픈 것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아니, 당신도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완벽하게 행복한 삶은 오직 TV나 영화관 화면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사막을 정처없이 헤매이게 만드는 오아이스의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신기루에 대한 현혹이 내게도 있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재미를 떠나 자신에게 경고를 준다는 의미로도 '암보스'를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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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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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라는, 참으로 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소설은 대만 작가 우밍이가 썼습니다. 우리나라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대만에선 꽤 유명한 작가로 2018년엔 '자전거 도둑'으로 맨부머상 인터내셔널 후보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중화상창'이라는, 30년간 타이뻬이의 랜드마크로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가를 중심으로 10개의 단편을 옴니버스로 엮은 소설입니다. 단편들 모두 중화상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주인공인데, 그들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육교와 거기서 마술을 벌이던 마술사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 것이죠. 회상의 색채가 많이 가미되었기에, 읽다보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느낌이 많이 납니다. 아니, 정말로 '대만판 응답하라 1988'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드라마만큼 밝지도, 사람들 사이의 정겨움은 없지만 이제 사라져 버린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이 이 소설엔 어린 시절 골목에 가득 퍼지던 김치 찌개나 된장 찌개 내음만큼이나 흠뻑 배여들어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고, 마술사가 나오는만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듭니다만 그래도 자신합니다. 한 번 잡게 되면 몰입해 읽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이야기란 것을.





 소설은 예전에 내 세계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이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 그것이 마음에 남긴 여파 같은 것을 뒤쫓고 있습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중화상창'이 소설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나타내고 있죠. 등장인물들에게 과거란,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너머의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는 그 곳으로 갈 수 없는데 해까지 저물고 있어 이제 볼 수도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 곳은 한 때 자기 삶의 중심을 차지했던 곳. 흐르는 시간처럼 쉽게 망각 속에 던져줄 수 없습니다. 그건 곧 거기에 속했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므로 그들을 거기에 가 닿고자 합니다. 마치 중화상창의 상가 양쪽을 이어주던 육교처럼.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게 해 준 그 육교처럼 말이죠. 소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육교엔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로의 회귀를 마술처럼 가능케 하는 것. 그래서 마술사가 모든 단편마다 등장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기억이란 때로 마술 같죠. 늘 잊고 살았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언제 잊고 있었냐는 듯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 때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니까요. 마술이 일상을 장악하는 현실의 중력을 없애버리듯이, 기억은 망각에 붙들린 과거를 자유롭게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묻습니다. 오늘의 내가 고통스러운 건, 과거의 나에게서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하고.


 그런 질문 또는 파문을 조용히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것도 조용히. 마치 천에 스며드는 염료와 같은 속도로.


 '새'의 단편엔 1979년이란 시간이 명시되는데, 그래서 이 소설을 대만의 역사와 연계시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은 대만이 중국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가 끊어진 때이거든요.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꺾이고 새장에 갇히는 시기인 것이죠. 소설 역시 새를 사랑해 계속 키웠으나 그 어떤 새도 오래 기를 수 없었던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단편마다 다른 마술을 보여주는 마술사는 그 단편에선 죽은 새를 살리는 마술을 보여주는데, 마술이 성공하기 위해선 누가 새에게 절대 손을 내밀어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죠. 단편의 주인공도 마술사를 믿어 죽은 새를 되살리는 마술을 하는데, 오빠가 결정적인 순간 손을 내밀어 실패하고 맙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손이 강조되는가? 그건 수교를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죠.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서로 손을 내밀어 하는 악수니까요.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내민 손이 그대로 새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에서 수교 단절말고 달리 뭘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대만 역사를 알고 있으면 여기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의 알레고리로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돌사자와 같은 소재도, 자살이나 방화 혹은 죽음으로 이르는 연애 같은 이야기도 과거 대만 역사가 남긴 것을 슬쩍 암시하거나 드러내고 있거든요. 일일이 다 밝히면 글도 너무 길어지고 직접 소설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재미가 반감되기에 '새'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조금 유감이네요. 그러니까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비록 우리가 대만인도 아니고 중화상창에 대한 아무런 추억이 없더라도 이 소설을 재밌에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랬습니다. 꽤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밍이란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둘만큼.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네요. 소설의 주인공이 중화상창의 마술사에게서 잘 떠나지 못했듯, 저 역시 한동안 우밍이가 만나게 해 준 세계의 여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왠지 이 노래가 많이 생각나더군요. 가사에 흐르는 정조가 소설과 비슷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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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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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도록 술술 읽힌다. 이게 참 대단해 보이는 것이 담고 있는 게 예수와 초대 교회가 중심이 된 '신약'이라고 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따분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소재인데다 분량도 무려 700 페이지에 가까운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 둘은 아무런 장애가 안된다. 그저 비탈길을 빠르게 굴러가는 둥근 돌마냥 이 뒤엔 또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라는 동력에 힘입어 끝까지 내처 읽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겐 '콧수염'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2014년 발표한 '왕국'이란 소설이다.


 '왕국'이란 제목에서부터 이 소설이 기독교에 대한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주로 바울과 루카를 다룬다. 그것도 픽션의 형식이 아니라 르포 형식에 가깝게. 자전적인 경험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어 어떻게 보며 에세이로도, 또 어떻게 보면 인문서로도 보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마디로 카멜레온. 그만큼 다양한 색채로 자유분방하게 진행되기에 몰입력이 강한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본편이 되는 4부와 하나의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뤄져 있다. 프롤로그에선 이 소설이 무엇을 주제로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바로 '믿음'이란 걸. 1부인 '위기'에선 자신이 어떻게 '믿음'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대상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불현듯 자신에게 찾아온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하는 슬럼프와 그것을 계기로 열심을 다하게 된 신앙 생활과 엮어 말해준다. 2부는 제목처럼 '바오로(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다. 루카의 '사도행전'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심정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는지 말하고 있다. 이왕 '루카'가 나온김에 나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거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




 신약에는 유명한 네 개의 복음이 있다. 모두 예수의 행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그 중 '누가복음'은 가장 이채로운 빛을 지닌다. 누가(소설에선 루카)는 생각해 보면 참 특이한 복음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복음 작가들과 달리 예수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예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거기다 직업이 의사로 지식인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누가 복음은 가장 유려하고 세련된 그리스 문체로 씌어졌다. 그는 다른 작가들처럼 예수의 그 어떤 이적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말씀도 귀로 들은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예수를 풍문과 기록으로만 접했다.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이. 그 때만 해도 예수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변방에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오늘날로 치면 뭐랄까 '구루' 같은 존재였다. 


루카는 그런 존재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표현대로 백인 엘리트가 어쩌다 동방에서 왔다는 불교를 접한 것과 같았다. 요즘 백인들이 불교에 대해 가지는 흥미 그대로 그 역시 예수라는 존재에게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현장으로 가 살펴 볼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누가복음'이었다. 이 소설이 천착하고자 하는 '믿음'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루카에겐 믿음의 근거라는 게 없었다. 그건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스스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가 믿기로 결정했기에 형성된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결실이 지금은 네 복음서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세상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건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희망 혹은 절망인가?


 700 페이지를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 단 하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실체를 지향하는 마음의 움직임인가? 아니면 외부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순전히 혼자만의 결단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확신과 의심 사이를 늘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게 숙명으로 주어진, 오히려 인간이 가진 내적 한계를 드러낼 뿐인 걸까? '왕국'은 믿음이 가진 이러한 다차원적인 면모를 엠마뉘엘 카레르 자신이 직접 화자가 되어 하나하나 풀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자신과 가장 닮은 '루카'를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사용하면서...


 이렇게 보자면 1부에 가득 재현되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담은 결코 본편과 유리된 게 아니다. 그 경험 모두가 실은 믿음이 가진 이러저러한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오직 '필립 K 딕'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채용한 자식의 보모 이야기가 그렇다. 그녀는 보모가 되자마자 면접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작가를 당황케 만든다. 작가는 그녀에 대한 것을 그녀의 전 고용인인 미국 외교부 직원에 대해 알아보기까지 하면서 고용했는데, 보모는 완벽하다는 그들의 말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보는 것(이적)과 들은 것(복음)과 너무 다른 실체로 집약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카레르가 신앙에 대해 가지는 불안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 보모에게 집약된 의혹은 그대로 소설 후반 루카의 복음(4부)으로 이어진다.


 나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도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날 궁금하게 만들고, 날 매혹시키고, 날 불안하게 하고,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어느 것이 가장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내가 더 이상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나 자신보다 더 잘 안다고,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쓴다.(p. 389)


 최근 나는 카레르의 이 말을 떠올리게 만든 두 개의 뉴스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들었다. 하나는 세간에 '무안단물'로 유명한 이단인 '만민중앙교회'의 담임 목사가 여러 여신도를 성추행 하고 돈으로 입막음 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병사가 팔레스타인인 비무장 민간인을 저격하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과연 믿음이란 게 무엇인가 되묻게 만들었다. 하나는 믿음(목사가 아니라 신도들을 말한다.)이 범죄를 방관하며 조장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괴물로 만들고 있었다. 맹신 또는 광신 그리고 확신만큼 위험한 것도 또 없다는 것을 이 두 뉴스는 잘 보여준다. 믿음은 결코 이성의 제어에서 놓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믿음이란 확신을 지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식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다. 확신은 온전히 인식하고 판단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의심 없는 상황이 살아가는 데는 편안함을 주겠지만 역사나 주위에서 흔히 보듯 결국은 스스로 어리석게 만드는 길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카레르는 소설에서 예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든 상식을 전복시켰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가 들었다는 비유가 그러하다. 서로 다른 노동 시간을 한 일꾼들에게 동일한 달란트를 주는 것이나 '돌아온 탕자'(도덕적으로 살아온 99명 보다 비도덕적으로 살아온 1명의 영혼은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의 이야기는 예수의 왕국이 세상의 꼴지가 거기선 1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껏 우리가 알아왔던 합리와 가치와 전혀 다르게 운영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전복이 믿음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왕국'의 후반부는 그것에 대해 짚고 있는 것 같다. 무턱대고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 속에서 이성으로 열심히 헤아리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믿음. 그러면서도 그렇게 나온 믿음을 오로지 하나의 가능성으로 여기고 또 다른 길이 열리면 또 언제든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리로 훌쩍 나아갈 수 있는 믿음. '왕국' 전체에 오롯이 새겨진 카레르 자신의 지적 탐구는 그러한 믿음의 모습을 물씬 보여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은 레닌과 똑같이 말로만 존재했던 것을 세계에 실재로 구현한 자였다. 왜 지젝이 레닌을, 알렝 바디우가 바울에 천착하는지 알 듯 하다. 그들의 행로는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념의 구현이 그들의 말만큼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울과 레닌이 꿈꾸었던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바울과 레닌의 시대에서 그들 역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세계를 만들었다. 이는 루카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믿음은 때로 기적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는 늘 물음의 상태로 남는다. 바울이 자신의 세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그를 믿었던 신자들이 로마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카레르도 소설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아낌없이 나누었고 존중과 배려가 삶의 기본 태도로 배여 있었다.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를 생각한다면 이건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을 믿음이 만든 것이다. 삶이 뒷받침된 믿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믿음은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일 때가 많다. 돈 혹은 권력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믿음.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내 찌푸린 눈쌀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때로 범죄와 학살을 태연히 저지르는 괴물까지 양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이 인류에게 점점 장애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은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를 매섭게 묻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논란에 집중하기 보다는 배후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작품이 가진 온전한 의미가 드러나며 당신의 대답 또한 찾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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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에 대한 사퇴 찬성이 50%를 넘었다는 리얼미터 여론조사 보도를 보고

'아니, 장충기 휘하에 있는 기레기들에게 휘둘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아?' 하고 적잖이 놀라서

자세히 살폈더니,


 설문이 이렇다.


  이렇게 먼저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질문하고 있다.

  이러면 당연히 사퇴를 선택할 수밖에.

  이런데도 사퇴 반대가 33%가 나왔다는 게 더 놀랍다.

 

  이런 걸 무슨 여론조사라고 하나?

  만일 이렇게 질문했다면 어땠을까?


 현재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피감 기관의 예산으로 외국 출장가는 것은 최근 드러난 김성태 국회의원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당시 국회의원들이 보편적으로 하고 있는 관례였으며 또한 국회엔 정책비서만 있고 여비서라는 것은 없기에 이것은 악의적 프레임에 불과하며 외국 출장 또한 언론에 보도된 대로 단 둘이 아니라 다섯명이 동행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김기식 금감원장의 거취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편향된 설문으로 통계를 왜곡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리얼미터가 보여주고 있네.

  리얼미터 대표 스스로 한 인터뷰에서 그런 여론조사는 잘못된 것이라 말까지 했으면서도.

  명백히 여론 몰이를 통해 청와대와 김기식 금감원장을 압박하려는 의도성 짙은 여론조사라 할 만하다.


  여론조사업체도 기레기만큼이나 삼성에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빼박 증거겠지.

  이렇게 여론조사업체까지 가세하여 언론, 야당이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에게 총공세를 펼치는 것을 보면,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이재용 삼성 승계에 있어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걸 감안할 때,

  대한민국 적폐세력의 진짜 끝판왕은 삼성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래서 이렇게 진행중인 '김기식 금감원장님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세요' 청와대 청원에 참여하고 왔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193553 (청원 링크)


 삼성이 미워서가 아니다. 그동안 김기식이 걸어 온 길을 보니,

 맡은 바 소임을 아주 잘 할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경화 와 김상조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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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2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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