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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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다.

 나는 정녕 그렇게 여긴다. '저스티스맨'이란 제목과 모두 10명의 희생자가 나오는 연쇄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 소설을 얼른 스릴러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이다. 물론 피칠갑 된 살인이나 토막 사체 같은 것이 나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설 속 살인 장면 묘사는 그닥 무서울 게 없다. 연쇄살인범은 언제나 이마에 두 개의 탄흔만 깔끔하게 남긴다. 물론 빠져나온 탄환이 머리 뒤로 피의 무늬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만들어놓긴 하나 그건 범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다. 이야기 자체에 무서운 것은 전혀 없다. 거기다 독자에게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두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소설을 공포 소설로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바깥 현실에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소설의 언어와 재현을 통해 비로소 구체화 되고 명확해지는 것에서 오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아, 내가 느끼고 있던 무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오는 소름 같은 것 말이다. 소름은 불현듯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 몸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의 소름을 가져다 준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공포, 정체 불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체 확인에서 비롯되는 공포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글의 초장부터 공포 운운하느냐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당신을 위해 얼른 말하자면 그건 바로 악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한 학자의 말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윤리철학자 수잔 니먼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근대 사상의 악'이란 책에서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신에 대해 변론하게 만들었던 재난이기도 한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이 근대철학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근대 철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구별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 재해엔 의도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악 보다 자연 재해를 근대철학자들은 더 두려워했다.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 사전 예방이 가능한(그리하여 포이에르바흐는 예방에 기초하여 독일 형법을 최초로 정립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자연재해는 원인과 이유가 불명확하고 예측도 어려워서 예방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재해를 막는 것에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이제는 인간의 악 역시도 자연 재해만큼인 모호함과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의 계시였다. 여기에 대해 니먼은 이렇게 정리했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인류는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 놓인 심연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졌다. 처음엔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또 이민자이든지 간에 낙인이 찍히고 그에 따라 온갖 차별과 위해를 받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집단과 연계되어 이뤄졌을 뿐, 한 개인에 대한 심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이제는 제자리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마저 언제 어디서든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은 범죄처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지 않았다. 사소한 도덕적인 잘못이나 우연히 저지르게 된 실수마저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은 모든 사람이 예기치 않게 심판의 무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핸드폰으로 다른 이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것을 각종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아무런 규칙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이처럼 사생활의 보호막이 허약해진 우리들은 껍질 없는 갑각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조그만 악의로도 우리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이 행해지면 인격 살인마저 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잘 느끼고 있다. 인간의 악이라는 게 자연 재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실은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며 운이 좋아서 자연 재해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이 단지 불운과 아직 만나지 아니하여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 나를 익사시키는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아직은 내게 닥쳐오지 않아서 실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당사자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누군가 멋대로 찍어 올린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적인 명칭이 붙은 것을 보노라면 막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말이다. 다만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스티스 맨'이 바로 그것에 언어를 찾아주고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무차별이고 몰인정하며 예측 불허로 넘치는 인간의 악을, 거기서는 누구도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막연하게 두려워만 하고 있던 것을 이토록 확실한 형태로 섬세하게 세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열 개의 살인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아홉 개의 살인들은 실은 최초 희생자에게서 파생된 살인들이다. 그 최초 희생자란 사회가 정한 옷에 맞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맞추느라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만 만인에게 '오물충이 되어버린 '보험 설계사'와 우연한 일탈이 그만 치명적인 동영상으로 남게 되어버린 여고생 그리고 엄마와 단 둘이 잘 살아 보겠다는 사소한 욕망이 파멸의 굴레가 되어버린 펜션 여주인, 이렇게 셋이다. 이 세 명의 최초 희생자에서 파생되어 각각 세 건의 살인이 이뤄진다. 그렇게 아홉 개의 살인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최초의 희생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즉 '파생된 살인'의 피해자야 말로 연쇄 살인범이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최초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 또 때로는 별 것 아닌 흥미가, 또 때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이 일으킨 결과일 뿐이었다. 공포는 바로 여기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누구든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파생된 살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러한 악의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와 무차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세 사람에게 각각 얽힌 세 개의 살인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의 보험설계사는 자신과 불화 중인 '잿빛 무지개'와 같은 사회에서 비록 위태로울 망정 그래도 간신히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오물충'이 되기 바로 전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희생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경로를 걷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적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벗어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주체화의 경로는 죽음의 심판이 예정된 길이었다. 어째서?


 이 의문의 답은 조금 미루고 두 번째의 여고생을 일단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날로 쌓여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더위를 피해 냇물로 뛰어들듯 일탈을 감행했다. 냇물 속 수영이 실은 다시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듯, 그녀의 일탈도 본래는 자신의 삶을 더 잘 지속하기 위해 잠깐 뛰어든 '아른아른한 물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일탈이자 그 일탈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것과 똑같은 별 것 없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펜션 여주인도 다르지 않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에 스스로 취했던 '연보랏빛 안개'와 같은 소박한 욕망이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악행의 수위는 그녀와 많은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행한 이유 그대로 당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 것도 너무 엇나간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어떤 유형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유형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런 유형들은 알고 보면 과거 우리가 한 때 취했거나 현재 우리가 취한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보험설계사처럼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와 맞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 살아가며 또한 여행사에서 날아오는 팜플렛을 보며 여기 한 번 갖다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일탈을 꿈꾸고 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이기에 소설 속 희생자들이 결코 나와 별개로 여겨지지 않고 그런 자들에게 가차 없이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 소설이 한층 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다.

 왜 이런 우리의 경향과 사소한 동경 그리고 욕망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처음의 경우엔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 하려다 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게 아닌가? 작가의 전작 '스파링'은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저스티스맨'의 심판은 모순이 아닌가? 마치 그런 반론을 작가가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작가는 하나의 살인을 더 부가한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열 번째의 살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누가 희생되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 이유만 말하겠다. 그것은 오직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살인의 진실과 그 이유는 소설 거의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데, 거기서 다시 아홉 개의 살인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모든 상황마다 바로 이런 욕망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추동시킨 기저에는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 욕망을 바로 '권력 욕망'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욕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저스티스맨 카페'에 몰려든 수많은 누리꾼들처럼 날로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과가 바로 '불꽃'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같은 인간의 악이 메가 쓰나미처럼 일어난, 한 마디로 지옥도이다.


 잭슨 폴록의 '불꽃'


 사실 이 '불꽃' 장은 뜬금 없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분명 누군가의 상상일 터이나 그 주체가 특정되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이 '불꽃' 장 때문에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의 골격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작가가 그런 약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장을 구태여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의 묘사가 아홉 개의 살인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욕망의 최종적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의도란 분명 그러한 비극적 결과를 막기 위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대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로 열 번째 살인의 이유가 된 권력 욕망, 즉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적어도 자제하거나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첫 유형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심판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희생자 기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동안의 성공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순간(그렇게 자신의 삶에 온전히 주체가 된 순간)에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작 '스파링'과 완전히 모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자가 처형되는 것은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결심했으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향점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가고자 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으므로 단죄의 총알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주체로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저스티스 맨'은 '스파링'과 비교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파링'에서 삶의 주체가 되는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면, '저스티스 맨'에선 단순히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달리 더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력 욕망의 배제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 살인자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의한 바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p. 242)


 이처럼 모든 잣대가 사라진 시대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남을 이용해 나를 높이라는 권력 욕망이다. 어쩌면 그 명령이 너무가 강고하기에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잣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 또한 결국엔 유태인 말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자신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인간의 악 또한 권력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욕망의 근절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더욱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모든 악행이 끝내 똑같은 형태로 부머랭이 되어 돌아온 것에 있어서도 작가가 거기에 뒤집어 놓은 형태로 결부시킨 또 다른 해법 하나를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악행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의 선행 역시 그러하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대할 때, 나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이런 가운데 우리의 불안과 공포 역시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득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


 '저스티스 맨'은 피해자로 자임하고 있지만, 그래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바깥만 탓하고 있지만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우리 책임은 없는지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듯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궁극엔 왜 이 모든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첫 발자국을 바로 나부터 내딛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한.


 소설의 마지막은 비행으로 대지의 중력을 곧 벗어날 공항(그것은 곧 규격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해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의문과 사유에 빠져 있는 살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타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전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만들어 나간 존재가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듭 되돌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 이 모습을 마침표로 찍었을까 궁금했다. 분명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 게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말마따나 '결계처럼 제한된 규범의 세계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보는 일(p. 9)'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작가의 제안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저스티스 맨'은 토템과 부적이 되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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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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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원래 추사 김정희를 잘 몰랐다.

 그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세한도'를 그린 사람 정도만 알았다. 책은 '세한도'가 정말 걸작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엔 솔직히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는데 이런 그림이 걸작이라고?'만 생각했다. 외워야 하니까 이름을 외웠을 뿐, 흥미도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추사의 위대함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었던 건, 유홍준의 '완당 평전' 을 읽고나서였다. 아마도 최초로 추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아닐까 기억한다. 유홍준에게 추사란 삶에서 한 번은 꼭 정복해야할 산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추사를 연구하기 위해 나이 40에 성균관대 박사 과정에 입학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5년 간 박사 논문을 위해 열심히 추사를 연구했지만 유일하게 추사의 학문 세계를 밝힐 근거가 되는 '완당선생전집'의 부실 때문에 논문은 쓰지 못하고 그 연구의 결실은 '완당 평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으로 나처럼 추사를 비로소 진정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비판과 질정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보다 완전한 추사에 대한 책을 위해 유홍준은 '완당 평전'을 시나브로 절판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2017년. 칠순을 앞둔 작가는 다시금 추사란 산을 올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흡하기 때문에 절판시켜 버린 '완당 평전'을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을 맞아 공개된 무수한 새자료를 비롯 그동안 발굴하고 연구한 자료까지 포함시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완당 평전'을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당 평전'의 성격은 학술인 동시에 문학인데 지금 당장 보완하기 힘든 것은 학술의 문제이지 문학의 문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그려낸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과 작가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당 평전'을 전기 문학으로 개고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예술가의 전기는 나의 학문적 과제였다.(...) 그 생각을 하면서 머리가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학술적 정확성을 위해서는 자료를 제시할 때마다 출처를 밝히고 고증해야 하지만 문학으로 임한다 생각하니 그런 주석과 고증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군더더기였다.(...) 그로인해 역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논문 형태보다 전기로 기술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p. 576)


 그렇게 하여 이번엔 전기의 형태로 다시금 추사의 생애가 우리 앞으로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추사 김정희'라는 책이다.



 유홍준에 의하면 추사의 일생은 보통 이렇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1) 1786 ~ 1809년(1 ~ 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 ~ 19년(24 ~ 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 ~ 40년(34 ~ 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의 중년기

 4) 1840 ~ 49년(55 ~ 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 ~ 56년(64 ~ 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책은 이 모든 시기를 시간 순서대로 담고 있고 그렇게 서장과 종장을 합하여 모두 12장에 걸쳐 추사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고 살면서 안팎으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특히 상호 영향 관계가 두드러지는 학문과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삶이 그랬다. 그는 먼 청나라까지 정말 많은 교류를 폭넓게 했다. 그의 시야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 걸쳐 결코 한정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금석학과 글씨에 대한 부분은 이러한 추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만 옳다하지 않는 것, 이만큼이면 되었다 자부하지 않는 것,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타인의 것을 제 것처럼 살피며 공부하는 것. 어쩌면 바로 그러한 타자에의 열림이야말로 추사를 위대하게 만든 원천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하면서 함께 쌓인 것들이 추사의 삶 전체에 걸쳐 녹여져 있기 때문에 유홍준이 책의 마지막에 술회한 것처럼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란 정녕 산숭심해(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되는 것은 아닐지.


 사진은 청나라 유학자들이 '세한도'를 보고 찬()한 글로, '세한도' 뒤에 저렇게 길게 붙어 있다고 한다.

 국제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단면이다.


 '완당 평전'과 비교하자면(정확한 비교를 위해 책을 찾았으나 내 집의 서림(書林)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예전에 읽은 막연한 기억에 기대어 말해야 한다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지만), 확실히 이 책이 추사의 삶을 더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전기라서 삶의 세세한 면모를 더욱 잘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주고받은 서신이나 추사가 타인에게 하거나 타인이 추사에게 한 찬()이나 논()도 많이 인용되고 있기에 추사의 내면은 물론 객관적인 모습까지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책은 추사의 삶이 가진 모든 변곡점마다 그것이 어떤 상호 영향 관계로 이뤄졌는지 잘 나타내고 있기에 삶의 모든 굽이마다 추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만큼은 확실히 알게 만든다. 때로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게 또 어떻게든 추사의 산을 넘어보려는 작가의 집념 혹은 추사에 대한 존경으로 되도록 왜곡이나 훼손 없이 추사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려는 노력 같아서 지루함을 느끼려는 머리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든다. 과문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지만, 어쨌든 내게만은 이 책은 '추사 김정희에 관한 집대성'으로 보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에 실린 풍부한 도판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엔 정말 많은 도판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추사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금석학과 글씨인 것만큼 그 실체를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진 자료가 실린 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빠짐 없이 수록되어 있기에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삶 전체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여정을 시각적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강상 시절의 추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사진은 강상 시절에 쓴 추사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이다.



 추사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의 8할은 교류였다. 사람과 정파, 국적을 가리지 않은 많고도 다양한 사귐이 '추사'라는 '산숭심해'를 만든 것이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 옛날의 추사처럼 교류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려는 지금, 이러한 추사의 삶은 특히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추사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은연 중에 오늘의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까지 알려주는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사가 말년에 강조했던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가 한껏 드러난, 

과천 시절의 대표작이자 기념비적 명작인 '산해숭심, 유천희해'.

 '산해숭심'은 원래 옹방강이 실사구시 정신을 풀이한 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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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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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라는 남자'를 쓴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 소설 '베어타운'은 세월호 참사 후, 1년 동안의 우리나라를 많이 생각나게 한다.

 이 소설은 우리와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오베라는 남자'를 읽었을 땐, 어쩌다 운이 좋아 원더 히트를 치게 된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그런 생각을 버리게 만든다. 그저 운이 좋아 성공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내공이 심후한 진짜 작가였다. '베어타운'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이야기와 문장 모두가 감탄스럽다. 집단이 온갖 이유와 논리를 내세워 한 개인의 불행을 철저히 무시하고 배척하는 이야기가 이토록 설득력 있고 깊이가 있다니.


 소설이 하나의 전선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집단 대 개인의 전선이다. '베어타운'은 한 때 화려한 과거를 가졌으나 이제는 몰락한, 말하자면 겨울잠을 자는 곰 같은 형국의 마을이다. 불행과 절망, 무기력은 만연한데, 부활의 희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을.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하키 팀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오직 그것만이 마을을 재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키 팀에 마을의 사활을 걸다 보니 방해 혹은 장애가 되는 인물은 족족 버려진다. 대표적으로 하키 팀 코치 수네가 그렇고, 감독 페테르의 딸 마야가 그러하다.


 대도시의 시끄러운 새끼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조그만 하키팀에서 정말로 재능 있는 선수를 키울 때의 기분을 말이다. 그건 마치 얼어붙은 마당에서 꽃을 피운 벚나무를 보는 느낌이다.(p. 51~52)


 수네, 그는 그렇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페테를 발굴하여 세계적인 선수로 키웠으며 어디로 갈지몰라 방황하던 다비드에게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감독을 맡게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 넘치는 케빈을 잘 조련시켜 마을의 미래마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훌륭한 선수로 만들었다. 이처럼 그는 팀이 아니라 철저하게 개인에게 몰두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에게 열정과 관심을 기울여 제 몫의 삶을 충실히 채워가도록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집단의 이익에 쫓겨 오래도록 있었던 코치 자리에서 쫓겨난다. 집단이 개인에게 우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베어타운'은 변했다.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하나의 가능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하키가 그것이 없으면 삶조차 불가능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하키는 이제 단순히 팀 경기가 아니다. 마을 사람 전체의 삶을 주관한다. 그들 모두가 선수고, 한 팀이다. 다비드가 강조하듯, 승리를 위해 똘똘 뭉친다. 개인은 없다마야의 강간은 그렇게 변해버린 '베어타운'을 극명하게 드러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시합은 전부다 다름없다. 그 뿐이다.(p. 22)


 소설은 처음부터 마야가 하키에 시큰둥 하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기타 연주를 더 사랑한다. 기타, 홀로 칠 수밖에 없는 그 악기는 팀이 아니라 개인의 상징이다. 그런 마야가 청소년 하키 팀의 케빈에게 강간 당한다. 청소년 하키팀 감독 다비드는 언제나 팀의 승리를 위해 개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다비드의 말에 충실했던 케빈이 마야를 강간했다. 개인에 대한 집단의 일격이다.


 마야의 부모인 페테르와 미라는 자식을 한 번 잃은 적이 있다. 그 일로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려 노심초사 한다. 그런 부부에게 또 한 번 커다란 비극이 닥친 것이다. 페테르와 미라 역시 개인의 영역에 서 있다. 페테르는 수네의 퇴출을 거세게 반대하고, 미라는 변호사로 개인의 권익을 위해 싸운다.(미라 역시 하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하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뿐이다.(p. 23)) 무엇보다 그들이 가진 아픔이 집단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소설 초반은 페테르와 미아 부부 생활을 보여준다. 그런 가족의 모습은 여지없이 사랑스럽다. 가장 진정한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 그리고 가없는 책임이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초반에 이런 가족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마야의 강간 뒤 나타나는 케빈 가족의 모습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이제와 얘기지만, 소설은 다양한 인물을 담고 있고 저마다 목소리를 가지도록 허용한다. 그 어떤 인물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한다. 판단은 독자에게 돌린다. 그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배크만은 진짜 작가인 것이다.


 이 모든 파노라마에서 우리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쉽게 버려지는 불행한 개인을 본다. 그건 언뜻 벤담의 공리주의 같지만, 케빈 가족과 마을 유력자로 구성된 하키팀 이사회의 모습은 그들이 주장하는 공익이라는 게 사실은 사익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키팀 응원단 '불곰'처럼 팀의 승리에 방해되는 이들에겐 폭력을 불사할 정도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마을 사람들조차 실은 저마다 사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란 게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마을 전체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마야는 세월호 참사로 보이고, 그 마야를 위해 마을과 맞서 싸우는 페테르와 미라는 유가족으로 보이는 것이다. 참사 후 1년 동안 우리나라 역시 '베어타운'의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이유로 삼성이 준 돈으로 일베가 유가족 단식 현장 바로 옆에서 치킨과 피자 폭식 투쟁을 하는 등, 세월호 유가족들을 얼마나 무시하고 핍박했던가. 이것은 비단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다. 공동체라면 어디나 빠질 수 있는 어둠이다. 그렇기에 그런 위험에 대해 사유의 시간을 가져오는 '베어타운'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하기사 작가가 있는 스웨덴도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옹호하는 우익들이 널리 지지받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공동체는 어려울수록 약한 존재를 배제해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미국, 일본, 유럽 할 것 없이 횡행하고 있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베어타운'은 이처럼 약한 누군가를 배제해서 이뤄지는 연대란 그것이 제아무리 거창하고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다만 지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것도 억지로 독자를 원하는 자리로 끌고 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말이다. 이는 비단 공동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시 얼마든지 자신의 이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타인을 지옥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이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려 새벽에 홀로 찾아온 프란츠 파농을 오직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문전박대했다.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천착한 철학이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을 없애버리려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러한 모습은 자유의 추구의 이면엔 이기심이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때문에 이 소설의 개인은 그런 개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이 페테르와 미라가 자식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이유다. 또한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소설이 마지막에서 강조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기의 개인은 책임을 기반으로 한다. 책임이란 내 것을 내려놓고 타자를 떠맡는 모습이다. 페테르가 이제 막 아버지가 된 다비드 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들의 가족과 마야와 아난의 관계가 마을 사람들이 이루는 집단 보다 훨씬 더 강했던 것 역시 책임이 반석이 된 연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베어타운'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진짜 연대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답하고 있다. 가장 강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게 아니라 가장 약한 자를 위해 뭉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연대라고. 우리는 나만의 이익과 자유를 무리의 힘에 기생하여 타인에게 강요하고픈 유혹을 쉽게 받는다. 이렇게 하는 게 쉽고 덜 귀찮기 때문이다. 사랑은 힘들고 귀찮다. 내가 내려놓아야 할 이익과 자유가 많고 짊어져야 할 책임은 큰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빠지지 말고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의 아픔 또한 내 아픔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를 통한 연대야 말로 진짜 연대라는 것을 '베어타운'은 강조한다. 눈 위의 난 곰 발자국이 아니라 새 발자국처럼 조용하게...


 지난 4월 27일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더 큰 공동체를 바라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다시금 연대의 모습에 대하여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그 사유를 '베어타운'을 길잡이 삼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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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뉴욕의 유명 푸드 블로거이기도 한 제시카 톰의 첫 소설, '단지 뉴욕의 맛'의 원제는 무시무시하다. '음식 매춘부'인 것이다.

 어떤 때는 제목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러하다. 권력과 부가 가져다 주는 맛에 취해 그만 자신의 본 모습도, 원래 신념도 깡그리 잊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푸드 블로거 출신답게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음식 세계과 한가득 펼쳐진다. 곳곳마다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허기질 때 읽으면 곤란한 책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티아.

 그녀는 대학생 때 그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썼던,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마지막 요리 시간에 대한 글이 예상 밖의 호응을 얻고 뉴욕타임즈에도 소개되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평론가인 헬렌의 칭찬까지 받게 되자 원래의 꿈을 바꿔 헬렌처럼 요리 평론가를 꿈꾸게 된다. 그는 뉴욕대학원 환영회장에 헬렌이 온다는 얘길 듣고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공들여 준비한 요리를 가지고 참석한다. 그러나 티아가 정작 만난 것은 헬렌이 아니라, 헬렌에 이어 뉴욕타임즈에 요리 칼럼을 쓰는 마이클 잘츠였으니. 첫 인상도 별로였고, 첫 만남도 좋지 않았던 티아는 마이클 잘츠가 자신을 알아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자신이 헬렌을 만나게 해 줄테니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는 말에 헬렌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만 알려주게 된다. 그 때는 티아가 대학원을 나와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로, 헬렌의 인턴이 되는 것이 티아가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콤한 사탕이 충치를 부르듯, 귀에 달달한 유혹 역시 독을 품고 있게 마련이다.

 그녀는 헬렌의 인턴이 되기는 커녕 자신이 지원하지도 않았고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던 유명 레스토랑의 휴대폰 보관실을 담당하는 인턴 자리로 가게 된다. 요리 평론가가 되고 싶은 그녀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경력이라 담당 교수를 찾아가 항의하지만, 뜻밖에도 자기가 거기에 지원한 걸로 나온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통 모를 일이었지만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도 평론을 쓸 때 아주 유용한 경험이 되어줄 것이라는 담당 교수의 말에 설득되어 티아는 결국 거기서 일을 한다. 그러다 그 레스토랑에서 다시 한 번 더 마이클 잘츠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더 음험한 유혹의 손길을 뻗쳐 온다.

 자신이 지금 미각을 잃어 레스토랑을 평가하는 칼럼을 쓸 수 없으니 티아더러 대신 써달라고 하는.


 그렇지 않아도 아무도 몰래 레스토랑의 요리를 평가하러 온 마이클을 유일하게 알아봐, 정성껏 서빙한 것으로 레스토랑의 신임을 한껏 얻고, 또한 뉴욕의 레스토랑에 가장 영향력이 큰 마이클과 대등하게 요리에 대해 말한 경험 때문에, 누군가에게 영향력 즉 권력을 미친다는 것의 쾌감을 알아버린 티아는 마침내 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고 마이클 잘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일했던 레스토랑마저 글로 몰락시키는 등, 점점 권력의 단맛에 취해 어둠의 길로 가게 된다.(이런 걸 전문 용어로 '흑화'라고 하던가?) 그렇게 요리가 정말 좋아 글을 써는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제목 그대로 '음식 매춘부'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커커스 리뷰'도 말했듯이, 영화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가 연상되는 것 같다. 그 영화 역시 패션 업계 최고 권력이 가지고 있는 힘과 화려함에 눈이 멀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차츰 잃어가는 이야기이니까. 하지만 굳이 커커스 리뷰의 말을 듣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절로 영화가 떠오를 것이다. 그 영화가 뉴욕 패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려주었듯 이 소설도 그 세계에 있지 않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뉴욕 레스토랑 세계에 대해 한껏 알려주고 있으니까. 다시 말해 주방이라는 뒷 세계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레스토랑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메뉴와 고객 관리를 하며 몰래 잠입하는 요리 평론가 사진을 미리 걸어놓고 대처하는 모습 등등. 적어도 뉴욕에선 유명 요리사가 요리 하는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는 특정 고객에게만 할애된다는 것만은 이 소설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당연하게도 티아는 씁쓸한 경험을 한다. 권력을 얻는 대신 늘 자기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사람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티아는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540페이지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전개가 빠르고 잘 모르던 뉴욕 레스토랑의 요리와 현장이 펼쳐지는 지라 읽는 건 순식간이다. 아마도 이 소설을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주인공이 아닐까 한다. 주인공이 소설에서 가지는 마음, 하는 선택과 행동이 그리 널리 공감을 얻긴 힘든 까닭이다. 하지만 그걸 삶의 소중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그런 티아의 모습 쯤은 살짝 눈감아 줄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브루클린 출신답게 뉴욕적인 분위기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요리와 레스토랑에 대한 얘기가 넘쳐난다. 이런 분위기, 이런 소재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이만한 먹음직스런 정찬도 또 없을 듯 하다. 군침이 도시는 분들은, 주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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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 완전한 비핵화, 핵없는 한반도 실현
- 문재인 대통령, 올 가을 평양 방문…회담 정례화
-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개성지역 설치, 쌍방 당국자 상주
- 모든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 지대를 ‘평화지대’로 
- 8·15 이산가족 상봉
-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 연결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정상 회담의 결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서명한 뒤 공동 발표 하였습니다. 아래는 선언문 전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와 번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지향을 담아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뜻깊은 시기에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였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

양 정상은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 빨리 종식시키고 민족적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과감하게 일어나가며 남북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역사의 땅 판문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1. 남과 북은 남북 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 나갈 것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온 겨레의 한결같은 소망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절박한 요구이다.

ⓛ 남과 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 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고위급 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빠른 시일 안에 개최하여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문제들을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하였다.

③ 남과 북은 당국 간 협의를 긴밀히 하고 민간교류와 협력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④ 남과 북은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기로 하였다. 

안으로는 6.15를 비롯하여 남과북에 다같이 의의가 있는 날들을 계기로 당국과 국회, 정당,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 등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민족공동행사를 적극 추진하여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밖으로는 2018년 아시아경기대회를 비롯한 국제경기들에 공동으로 진출하여 민족의 슬기와 재능, 단합된 모습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로 하였다.

⑤ 남과 북은 민족 분단으로 발생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남북 적십자회담을 개최하여 이산가족·친척상봉을 비롯한 제반 문제들을 협의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당면하여 오는 8.15를 계기로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⑥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나가며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 나갈 것이다.

①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으로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당면하여 5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과 전단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하고 그 수단을 철폐하며 앞으로 비무장지대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세워나가기로 하였다.

③ 남과 북은 상호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이 활성화 되는 데 따른 여러 가지 군사적 보장대책을 취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쌍방 사이에 제기되는 군사적 문제를 지체 없이 협의 해결하기 위하여 국방부장관회담을 비롯한 군사당국자회담을 자주개최하며 5월 중에 먼저 장성급 군사회담을 열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다.

한반도에서 비정상적인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이다.

①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데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

② 남과 북은 군사적 긴장이 해소되고 서로의 군사적 신뢰가 실질적으로 구축되는 데 따라 단계적으로 군축을 실현해 나가기로 하였다.

③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④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남과 북은 북측이 취하고 있는 주동적인 조치들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대단히 의의 있고 중대한 조치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앞으로 각기 자기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하였다.

양 정상은 정기적인 회담과 직통전화를 통하여 민족의 중대사를 수시로 진지하게 논의하고 신뢰를 굳건히 하며, 남북관계의 지속적인 발전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향한 좋은 흐름을 더욱 확대해 나가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기로 하였다.

당면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가을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18년 4월 27일 
판 문 점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

 

 

 정말 감격스런 날이네요.

 오래도록 오늘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 새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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