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의 미래를 말하다 - 끝없이 반복되는 글로벌 금융위기, 그 탈출구는 어디인가?
조지 소로스 지음, 하창희 옮김, 손민중 감수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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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로의 미래를 말하다'는 1973년 퀀텀 헤지펀드를 설립하여 오래도록 헤지펀드의 왕으로 군림하여 부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기까지 했었던 조지 소로스가 4년간 미국과 유럽 경제에 대한 미국 유수 경제 일간지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러니까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부터 현재 진행중인 유로 경제 위기에 관한 조지 소로스의 시각과 나름의 해법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금의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해 온 소로스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보게 되었다.

 

   소로스는 칼 포퍼의 영향을 받아 경제 행위를 하나의 되먹임(책에서는 '재귀성(Reflexivity)'이라 부르고 있다.)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말하자면 경제에 있어 모든 행위자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독립적인 변수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적 관계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한 경제적 행위가 다른 이로부터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경제적 행위가 어떤 효과를 불러올 것인지는 예측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과정상에 자꾸만 행위자들간의 되먹임이 일어나 무수히 많은 변수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로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 가격이 알아서 수요와 공급을 맞출 것이라는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생각을 순진하다고 공격하며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장 자체에만 맡겨둘 수 없고 필요한 경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나마 이 많은 불확실한 변수들을 확실한 권위를 갖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정부 당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8년 미국의 재정 위기에 정부 주도의 구제 프로그램을 환영하며 오바마의 대책 또한 지지한다. 아니 그는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는 소로스로서는 다소 의외라고 할만한, '은행 국유화'까지 주장한다. 그런 면에서 단순히 부실자산만 해결하려는 오바마의 현 구제 정책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p.87)

 

   소로스는 헤지펀드 운용 당시에도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로 유명했지만 미국과 유로 경제 위기에 대한 그의 대안 역시 그러했던 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행 국유화를 주장했던 것고 그렇고 유로 위기에 대해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유럽 통합 전체에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재정 기구 설립을 제안하는 것도 그렇다. 유럽 통합은 어디까지나 동일한 경제적 권역을 만들기 위해 형성되었지 정치적 통합 목적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통합된 모든 국가에 대해 막강한 권위로써 재정 정책을 진두지휘하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은 일종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소로스는 유럽 통합이 현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으면 그 기구를 만드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이 같은 정책들이 제대로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화 공급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구제 금융에서도 소로스는 오바마 행정부가 제안하는 액수로는 어림 없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8조 4000억 달라가 투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유로 위기에 대한 대처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유로의 현재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축이 아니라 더 많은 통화의 공급이 필요하다고 하며 가장 채권부국인 독일이 결단을 내려 재정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디 경제가 위기 상황에 이르면 유동성 효과와 피셔 효과 때문에 통화 공급 보다는 긴축이 타당하다는 게 상식이다. 소로스가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자신만의 특유한 '슈퍼 버블' 이론 때문인데 그 이론에 따르면 금융 가격이라는 것이 단순히 수요과 공급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더우기 재귀성 때문에 시장 가격 자체가 그 가격이 형성되는 기본 조건들 자체에게도 영향을 미쳐 시장의 왜곡마저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이제 시장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버린 사람들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경제 이론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의 행위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시장에 대한 인식이므로 그러한 그들에게 낙관적 인식을 심어주어 그들을 시장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서라도 현 유로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긴축이 아니라 오히려 재정 공급 확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소로스의 주장이다. 현재 유로 위기의 가장 화약고가 된 그리스는 일단 구제 금융 실시로 급한 불을 끈 상황이지만 소로스는 아직 그것만으로 불충분하다고 한다. 유럽 통합의 구성상 제대로 위기에 대처하려면 수립한 재정 정책을 막강한 권위로써 밀어붙일 수 있는 통합 재정 기구의 설립이 그 무엇보다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은 미국과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유럽 위기의 그 원인과 해법에 대해서 헤지펀드를 운용하며 자본주의 가장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움직였던 자의 말들이라 그것이 어떻게 초래되었고 그것에 대해 지금 각 국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그것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해결점은 무엇인지 가장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현 경제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볼만한 책이지만 선뜻 추천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번역이다. 이 책은 번역이 그리 좋지 못하다. 특히나 앞부분(PART 3 까지)의  번역은 번역도 번역이지만 문장들 역시 그냥 직역만 하고 제대로 다듬지도 않았는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비문이 너무나 속출한다. 다시 한 번 전면적으로 번역과 문장들을 제대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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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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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는 동안'은 처음 접해보는 작가 윤성희의 '소설집'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이사 준비를 해야했기에 제목 처럼 전혀 웃지 못하고 지냈다. 이사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할 일도 신경써야 할 것도 많다. 더구나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 가장 힘든 직업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사를 위해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타전을 하고 타협을 하고 계약을 타결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다 세상엔 좋은 사람 배 이상으로 나쁜 사람도 많아서 받게되는 마음의 타격 또한 무시하지 못할 법이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생기니 개그콘서트가 낙원으로 여겨질 만큼 이마에 내천자를 문신처럼 새기고 지냈다.

 

   주말 유일하게 챙겨보는 무한도전 역시 파업으로 한달 동안 결방이다 보니 도대체 이렇게 자꾸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지가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로 보내는 것도 한세월이지 주당도 아닌 내가 매일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할 수 없이 틈나는 대로 윤성희의 소설집을 영화에서 경찰 서장들이 자주 그러듯 어딘가 숨겨놓은 위스키를 순간 순간 홀작이듯이 그렇게 읽었다. 제목이 '웃는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책을 통해 좀 웃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나를 위해 흔한 개그 하나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지은이의 말을 가장 먼저 읽어야 했었다. 이 소설집의 제목이 '웃는 동안'인 이유가 지은이가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들에 한번만은 웃는 모습을 넣어주고 싶었다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한번만이라도 '웃는 모습'을... 이라는 지은이의 말에서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니체가 언젠가의 글에서 왜 사람만 웃는 줄 아느냐고 말한적이 있다. 그것은 웃음을 발명해야 할 만큼 사람의 삶이 어렵고 슬프기 때문이라고... 니체의 이 말은 정말 윤성희의 이 소설집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정말 웃음이 필요할 만큼, 외롭고 절망적이고 힘들기 때문이다.

윤성희는 이들 모두에게 이름을 하나도 지어주지 않았는데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없이 별명으로만 불리거나 이니셜로만 지칭된다.) 그것은 이름이 상징하는 한 개인의 고유한 존재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별명이나 이니셜 같은 단순한 사물이 되기를 원할 정도로 외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은 존재가 지워진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유령은 벽을 넘나들고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실체가 없기에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 유대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만으로 가능할 뿐이고 때문에 유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지를 떠받치는 아틀라스 처럼 저 홀로, 어디로든 이어지지 못한 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그 기억들이 하나같이 파편화된 관계들의 흔적이고 때로는 예전엔 좋았지만 지금은 바래어버린 유물들일지라도 자기마저 포기하면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자기와 결부된, 그렇게 자신의 기억에 매어달린 존재들 또한 지워지는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제아무리 외롭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처해있더라도 왠지 강해 보인다. 그들이 그런 일상에 짓눌러 있지 않다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들은 어쨌든 보살피고 먼 곳에 있는 할머니를 위해 일상을 기록하고 누군가가 듣게될 이야기를 짓는다. 매일 똑같이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바윗덩어리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야할 시지프스의 일상이지만 윤성희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래서 어쩌라고? 백번을 내려와 봐, 백 한 번 올려줄테니...'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관통한다. 그래서 강하다. 아마도 그래서 윤성희의 문체가 앞과 뒤가 뚝뚝 끊기는 단절의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 하나하나가 마치 내지르는 주먹 혹은 안다리를 걸려는 다리로만 보인다.

 

  하지만 낙천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윤성희의 이 소설들은 그냥 과정일 뿐이다. 삶이 그냥 지속이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어떤 결과가 오든지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뭔가의 결과를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먼저 행동부터 하는 것이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말하는 듯 하다. 어쨌든 행동 그 자체로서 구원이 된다. 이 소설집을 읽은 인상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것이 될 것인데 그래서 이사를 마치고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뒷정리를 한 탓에 몸도 무너질듯 피곤하고 정신 역시 몸을 따라 혼미와 혼절을 왕복하고 있지만 리뷰를 썼다. 이 리뷰의 결과가 정신착란의 결과물이 되든 난삽의 사르갓소가 되든... 결과는 생각지 않고...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집중을 위해 마신 생맥주마저 한약을 달이듯 의식을 취기로 부채질 하고 있으니...

 

  아쉬운 것은 좀 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사 준비로 바쁘지 않고 좀 차분히 이 소설집을 벗할 수 있었다면 초반에 나에게 느꼈던 것들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인데... 하지만 기한은 이미 하루 넘겼고, 결국 어쨌든 끝은 보아야 하고... 그래서 이렇게 '웃는 동안'의 나의 리뷰는 미국 드라마 '24시' 처럼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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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제가 읽은 헤르메스님의 리뷰 중 가장 인간적인 리뷰였어요. 윤성희의 작품에는 위트가 없을지언정 헤르메스님의 글에서 유쾌함이 묻어나오면 그야말로 더 좋은것이죠.
저는 이 작품을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남아서 샀었습니다. 돈은 남고 사고 싶은 책은없고, 해서 마침 한국작품이 나와있기에 같이 주문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책이 오고 '어쩌면'의 첫 문단을 읽고는 덮었습니다.(요새는 책을 다 이렇게 대합니다... 하) 그런데 이 작가 참 특이한것이 문단도 나누질 않고 대화도 한 글로 치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또 부자연스럽지 않은것이 이 작가만의 매력인가봅니다ㅎㅎ

ICE-9 2012-03-01 23:26   좋아요 0 | URL
와! 얼마만에 보는 소이진님의 댓글인지^ ^ 혼미한 정신이 번쩍하고 듭니다. 저 역시 정말 아쉬웠어요. 뭔가 매력이 분명히 있는데 틈나는대로 읽어서 그걸 제대로 우려내기가 힘들더라구요. 결국 기한까지 넘겼으니 난을 바라보듯 관상만하고 있을 수도 없고, 윤성희님의 핵심은 '일단 저질러라!'이니 교주님의 손가락대로 행한 것이죠. 아무튼 체력 방전 정신 방전으로 거의 햇빛에 노출된 흡혈귀 같은 상태이지만 그래도 소이진님 너무 반가웠어요^ ^
 
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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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를 간다. 곧!

 

  그 누가 안그렇겠느냐만 이사는 내게 있어 정말 가장 하기 싫은 것 중의 하나이다. 다시 살 집을 구하고 주인이 어떤지 신경쓰면서 계약을 하고 중도금과 잔금을 맞추고 이삿짐 센터 계약을 하고 짐들을 정리하고 도배를 하고... 정말 이 모든게 내게는 전쟁을 치르는 것만 같다. 스무살 때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는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이사란 걸 해본적이 없는 나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집이란 내게 그랬다. 나 이전부터 있어왔고 내가 있는 동안 늘 그렇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집과 나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집 역시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집은 곧 '나'였고 내가 언제든 안심하고 마음껏 머무를 수 있는 나만의 소우주였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그 영화에 중심에 사실은 아비의 '방'이 있었던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비의 애정을 원하는 수리(장만옥 분)와 또 다른 한 여자는 계속 그의 방으로 오고 싶어한다. 그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아비를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에게 있어 언제나 하나의 방이란 그 거주자 자체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아비의 방은 아비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비의 이야기'라는 뜻의 제목인 '아비정전' 이 영화에서 아비의 방은 그  세계의 중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은 그 존재를 받아들임과 같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비정전'은 하나의 공간이 거기에 거주하는 자아와 얼마나 결부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곧 97년이면 반환될, 언젠가는 떠나야 할 유통기한이 정해진 땅, '홍콩'에 사는 이들이라면 더 절박하게 와 닿을 생각이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구보데타 다케히코의 2007년작 '모두, 안녕히' 역시 공간과 자아의 결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토루는 초등학교 졸업식날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바로 가까이서 목격하는 바람에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는 존재이다. 나가려고만 하면 끝내 졸도할 정도로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갇혀있고 다른 의미로는 자신만의 한정된 우주를 가지고 있다. 묘하게도 이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를 많이 닮았다. 아비는 사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고 싶지만 홍콩을 상징하는 자신의 방에 내내 머무르는데 그 이유는 정작 생모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토루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도 그 졸업식 날의 비극적 사고가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왔던 것(사토루는 만일 어머니가 이혼을 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성을 그대로 따랐다면 앞자리에 앉아 그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독백은 그것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우연하게 벌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독백이다.) 만큼 자신이 전혀 모르는 단지 바깥에서 그 어떤 일이 느닷없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그 예측불가능성에 따른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아비와 사토루 모두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인해(아비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하지만 아비와 사토루는 그 세계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같지 않다. 아비는 그 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늘 '발없는 새'가 되기를 꿈꾼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가 있는 필리핀은 구원의 땅이다. 현재의 홍콩, 그가 있는 방은 기필코 벗어나야 할 유배지이며 그 영혼의 무덤일 뿐이다. 때문에 거기서 나누는 모든 사랑 조차 오로지 순간을 버텨내기 위한 일회용 사랑일 수 밖에 없으며 이별은 숙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니체의 니힐리즘을 강론하면서 니힐리즘, 즉 허무주의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말을 했는데 하나는 부정적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한다. 부정적 허무주의는 세상이 허무함으로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아비의 모습이다. 긍정적 허무주의는 어차피 세상의 본질인 허무를 긍정하고 오히려 그 허무로 빈 여백들이 많이 그려졌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거기에서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이것이 니체가 정말로 원했던 허무주의이며 이 소설의 사토루가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가 말했던 '긍정의 허무주의' 대로 그는 그렇게 한계지워진 자신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다양한 만남과 이별 그로인한 성숙등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창출한다.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 안의 좁은 세계가 뭐가 대수롭겠느냐고 혀를 끌끌 차지만 사토루는 그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등등을 찾아내며 남들이 좁다고 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새롭고 다양한 존재와 삶들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거꾸로 그 많은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는 애석하게 여긴다. 때문에 신체가 일으키는 발작 때문에 나가지 못하긴 하지만 애당초 사토루 스스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지금 그가 있는 이 공간이 더없이 완벽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그 공간의 매력을 알기도 전에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렇게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면 사토루는 어떻게 아비와 정반대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을까? 다른 말로 사토루는 어떻게 긍정의 허무주의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사토루가 타인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심과 배려는 사토루가 밤마다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사토루는 그렇게 순찰을 하면서 단지 내의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찰하며 종내는 그들의 삶에 스스로가 어떤 도움을 줄 지 생각한다. 결국 그러한 관심과 배려로 인해 사토루는 훗날 마리아를 학대하는 아버지에게서 구출해내고 늘 방화의 위험으로 몰락해 가던 자신의 아파트 단지 마저 구하게 된다. 하지만 아비는 달랐다. 그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 그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자신이 이해받기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지금의 홍콩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 역시 부정적 관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두, 안녕히'와 '아비정전'을 비교하노라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울러 타인에 대한 반응까지 결정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어쩌면 니체도 하이데거도 긍정적 허무주의를 가질 것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긍정적 허무주의를 갖더라도 그렇게 내 세계를 긍정하더라도 그렇게 하나의 세계에 온전히 집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토루 처럼 내 세계가 확실하다고 해서 그 세계만 고수하고 사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삶이란 것 자체가 그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비를 보라 그는 어쨌든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나 역시 서울로 와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닌다. 결국 사토루 역시도 그 세계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나 아비나 사토루나 다 결별을 하게 된다. 왜?

 

 

   그건 모든 현재엔 다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아비정전'에서 그 이유를 기차로 표현했다. 끝없는 밤을 달리는 것만 같은 기차도 언젠가는 내려야 할 종착역에 다다른다. 결국 아비 역시 그 기차 안에서 숨을 거둔다. 왕가위에게 있어 그 기차는 바로 시간이었다. 흐를 수 밖에 없는 삶의 비유로서의 시간 말이다. 결국 도래할 시간들은  찾아오고 머무르고 싶은 현재는 끝이 난다. 때문에 항구적으로 그 순간에 머물고 있고자 하나 우리는 문득 버스가 멈췄을 때 관성의 작용을 받는 것 처럼  튕겨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자기가 있는 그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세계는 언젠가 허물어진다. 마치 밀물때 당신의 발 아래에 있는 모래들이 쓸려나가듯이... 아무리 영원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세계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초침이 당신의 목덜미를 꿰어 원하지 않아도 어디론가로 자꾸만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던 작별의 순간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고 때문에 정작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대비할 수 밖에 없다. 해서 구보데타 다케히코는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토루의 삶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해버렸던 초등학교 졸업식날 같이 졸업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단지를 떠나는, 바로 그 아이들의 이름들을 챕터의 제목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케히코는 언젠가는 도래하고야 말 작별의 순간에 앞서 사토루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긍정의 허무주의가 궁극엔 그토록 긍정했던 그 자신의 세계마저도 변화 가운데 열어놓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결국 사토루가 그 세계를 긍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가야할 그 시기가 왔을 때 훌쩍 떠나는 것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다. 즉 다케히코는 소설 전체를 통해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긍정적 허무주의가 말하듯 결국 긍정과 변화는 하나라고 말이다.

 

 

  재미있고 정말 빠르게 읽히며 감정의 디테일들이 잘 살아나 있어 절로 사토루를 응원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렇게 자기와 세계의 긍정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 대학 입시 강사를 하다가 '삼십대 중반이면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하는 생각에 소설가로 돌아서버린 그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어쩐지 아비와 같다고 생각되면 한 번 벗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읽어보면 사토루가 만든 긍정과 변화의 케익의 달콤함에 어느새 도취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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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좋은 글이네요.
긍정적 허무주의란 단어에서 실존주의를 보게 되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삶이기도 하구요.

오늘부터 상담받기를 시작했는데, 저의 내재된 '화(분노)'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답니다. 감정이란 종종, 자아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하니까요. 저는 분노지만, 누군가는 우울, 다른 누군가는 불안과 두려움 등으로 표현되는거죠. 그리고 그 안의 자아가 얼마나 많은 것에 결부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간과 자아의 결부'라는 문구가 크게 다가옵니다.

이사 잘 하셔요, 좋은 집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ICE-9 2012-03-01 21: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29일 이사를 했고 오늘까지 정리하느라고 헉헉대고 있네요.
아직 여기저기 쌓인 짐들이 많아 여유가 없어요. 빨리 차분히 댓글 달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합니다.^ ^
 
3등급 슈퍼 영웅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3등급 슈퍼영웅'의 작가 Charle s Yu...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Yu는 요즘 뜨고 있는 주진우 기자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친근하고 더우기 인상 역시 좋아보인다.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웃음을 띠고 있는 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사람이라면 뭔가 인간적인 만남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자기가 말하는 것 두 배 이상으로 잘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수트를 입으면 꽤 빈틈없는 변호사로도 보일 것 같다. 적어도 일상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모아 모아 소설을 쓰는 작가로는 안 보일 것 같다. 그것도 이전엔 전혀 본적 없었던 아주 독특한 스타일로 소설을 쓰는 아주 개성적인 작가로는 생각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얼굴 뿐만 아니라 그 삶까지도 글의 스타일과는 너무 달라서 마치 그의 소설이 이종교배 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정말  Yu는 마치 일상인이라는 '지킬'의 이면에 소설가라는 '하이드'를 감춰두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자기 내부에 또 다른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더구나 그것이 일상의 자아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그렇게 일상의 규칙으로 부터 벗어난 그래서 그만큼 더 온전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공항 위에 세워진 '관제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맞딱드리는 모든 경험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라고 한다면 관제탑으로서의 자아는 그것이 언제 내리고, 그렇게 뇌리에 새겨지고 뜨는 그렇게 망각속에 흘려보내는 그 모든 있어야 할 자리와 비워야 할 자리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일종의 여과기 기능을 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소설가로서의 자아는 일상에서 겪었던 혹은 느꼈던 경험과 상념들을 다시 반추하고 그것을 일상을 지배하는 속세의 법칙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결단에 따라 여과하여 자신의 삶에 있어 그것들이 어떤 의미들을 가지는지 되새긴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확히 그것이 두 자아를 가지고 사는 이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며 그 과정의 매커니즘을 우리는 바로 이 '3등급 슈퍼영웅'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 실린 세 번째 단편, '그 자신이 된 남자' 같은 곳에서 더 확실히...

 

  이제 차이가 있다면, 데이비드가 무엇인가를 느낄 때'그'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마치 환등기 슬라이드처럼 또는 렌즈가 컬러 필터를 통해서 보는 것 처럼 데이비드의 현재 감정 상태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p.78)

 

 

 

 '3등급 슈퍼영웅'은 글쓰기를 통해 무심코 자기 내부에 전혀 다른 자아를 받아들인 한 영혼의 '데카르트 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성찰해 나가는 그러한 탐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중의 자아를 가져버린 '나'란 무엇이고('401 (K)'과 , '그 자신이 된 남자') '나'란 놈의 경험은 또 무엇이고('자기 연구에 대한 문제들'과 '플로렌스') '나'란 놈은 또 어떻게 구성되어지고('사실주의') 내가 '나'로 역할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적 자아로 움직이는지('<나>로 보낸 마지막 날들)... 등등 자신에 대해 관찰가능하고 고찰가능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한 모조리 드러내는 한 마디로 Charle s Yu 자신의 임상보고서와도 같다.

 

  그러니까 당신은 '3등급 슈퍼영웅'을 통해 사실은 Charle s Yu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의 전작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에서 Yu의 내우주를 여행했듯이(이제야 밝히지만 그렇다. Charle s Yu는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의 그 작가이며 이 단편집은 그 전작들을 모아 낸 책이다.) 그대로 말이다. 이미 먼저 읽은 자로서 여기서 읽는 순서에 대해 잠깐 충고하자면 당신은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단편 '3등급 슈퍼영웅'을 사실은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이 좋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재미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단편은 Charle s Yu가 스스로 감행한 모든 자아로의 탐색을 마쳤을 때 깨달은 일종의 최종보고서와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3등급'에서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는 이 주인공에게 아무런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인데 그것은 그대로 Charle s Yu가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의 상태 그대로를 반영하는 비유이다. 단편은 처음에는 3등급 슈퍼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그를 그린다. 그것은 Charle s Yu가 자신의 이중 자아가 가져다 주는 혼란을 어느 하나로 결정하여 정리하고픈 욕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일상과 글쓰기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그를 암시하듯 주인공은 내내 3등급이 되는 시험에서 실패한다. 결국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걸 깨닫는다. 그래서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렸을 때 거기 원래 담으려 했던 의미 그대로, 세상이 인정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괴물이 되려 한다. 물론 단편 자체에서는 '악당'으로 나오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Charle s Yu가 거기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편을 통해 했던 모든 고뇌를 마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첫 머리에 나오는 '3등급 슈퍼영웅'은 가장 마지막에 Charle s Yu의 결론을 확인하듯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쁜 일상 틈틈히 글을 쓰는 Yu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지금 리뷰라는 걸 쓰고 있지만 정말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다. '쓰는 나'가 또 다른 자아가 되어서 쓰기 전의 나를 텍스트화 하는 것이다. 읽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다. 그렇게 쓰는 나는 텍스트화된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게 일종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나'란 더 여과되고 한편으론 더 보완된다. 그런 과정을 다른 말로 '성숙'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그것이 아무리 자폐적 글쓰기라 하더라도 내부로만 침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만 외부에게로 날 개방시켜 바깥의 것을 안으로 들여와 그것에 보태여지고 그것에 덜어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 외부와의 만남, 그렇게 '타자화된 자아'의 생산.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그러한 열림을 통한 성숙이 본디 글쓰기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매혹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Charle s Yu는 그런 글쓰기의 매혹을 더 매혹적인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이 진정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것을! 그래서 '3등급 슈퍼영웅' 처럼 얼마든지 기꺼이 이 정해지지 않은 경계 위에 서 있겠다고 하는 것을!

 

  그런데 글쓰기란 쓰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자에게도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한다. 본디 쓰는 것이나 읽는 것이나 텍스트화된 자아를 만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똑같은 경험은 쉽게 비유하자면 모두가 자신이 만든 우주에 남의 우주를 초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똑같은 초대와 접대의 과정이 작가에겐 '씀'으로 독자에겐 '읽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이렇게 나를 객관화시키고 결국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하며 그 '읽음' 역시 쓰는 자와 본디 동일한 경험을 갖게한다면 우리가 '3등급 슈퍼영웅'을 읽는 것은 Yu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마저 여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정말 소설가로서의 Yu의 내면과 그것을 읽는 우리의 내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사실은 그의 임상으로 들어갔으나 정작 나오게 된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임상보고서 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Charle s Yu는 그 때문에 이토록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의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스타일은 미술에 있어서 추상화를 닮았다. 그러니까 추상화가 그 어떤 정형화된 것이 없기에 오히려 바라보는 자의 내면이 그대로 비춰질 수 밖에 없듯이 Charle s Yu의 이 소설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글쓰기의 원초적 경험을 상기시키고 결국 하나의 글을 읽는 다는 것 역시 소설가와 독자의 그렇게 씀과 읽음의 2인용 협력 게임이라는 것일 다시금 일깨운다. 어떤 것도 일방적 주장이 없으며 끊임없이 소설가와 독자가 무한의 되먹임을 가져다 주는 게임임을... 앞서 Charle s Yu가 글쓰기에 매혹당하고 일상의 자투리시간이나마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 그 외부에서의 되먹임 과정을 통한 성숙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똑같은 성숙의 과정을 밟는 것이 될 것이다. Charle s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어쨌든 읽는다는 것이 결국에 가선 나의 경험 폭을 넓히고 타자로 나를 보완하여 성숙시키는 과정이라는 그 단순한 진실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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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4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관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도 관계의 일종이라 보며, 알라딘에서 제가 페이퍼를 올리는 자체가
저의 관계 행위의 패턴 중 일부분이라 보고 있습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저는 요즘, 글이 사람과 다른 경우에 대해서 고민 중입니다.
글쓰기도 포장이 가능하구나, 그리고 타인을 감동시킬 언어를 가졌으나 그것 자체가
위선인 사람도 있구나 머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댓글이 뒤죽박죽입니다.
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때에, 이런 리뷰시라니.... 생각이 많았답니다. ^^

그나저나... 진짜 저를 혹하게 만드시는군요, 리뷰로써.

ICE-9 2012-02-28 01:3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읽으니 조한혜정님의 글쓰기와 삶읽기가 생각납니다. 거기서 조한혜정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초등학교 시절 도덕 시험 같은 경험이 누차 누적되었기 때문이다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도덕시험 볼때 육교로 건너는 사람에게는 O표를 무단횡단 하는 사람에게는 X표를 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덕적 지식은 충분한 토론과 검토없이 그저 암기로만 행해졌고 따라서 그 때부터 우리들 마음속에 그러한 앎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심어졌기 때문이다 라구요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특히나 폴리페서들) 역시 그러한 경험으로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해두기 때문에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태연히 그른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다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스스로를 텍스트화 하는 것과 본성의 상이성은 아마도 그 자의식 밑바닥에 글과 삶이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한국 교육이 가져온 잘못된 보편성이랄까요. 교육이 그랬다면 이걸 삶에서 깨어나가야 하는데 그 계기도 시도도 쉽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리뷰나 블로그나 꾸준한 글쓰기는 참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관찰하도록 하는 이런 글쓰기의 민주화가 저는 그러한 분리 의식을 극복하는 과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상당히 생각이 필요한 문제인데 댓글로 쓰려고 하니 저 역시 많이 뒤죽박죽이네요. 하하^ ^; 하지만 마녀고양이님 감사합니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새삼 저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어요. 저는 어쩌면 이런 대화를 위해서 리뷰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마녀고양이 2012-02-28 20:56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해보니 못 한 방향이네요.
감사합니다. 이 부분도 포함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어요.

사람이란게 참 신기해서,
묻어놓아도 뇌 속에서는 나름 내재화를 하고 있고, 나중에 다시 꺼내면
좀 더 정리되고 정제된 형태로 통합되어진다는게... 참 놀랍답니다.
이 부분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
 

  영화 리뷰인데, 검색을 해보니 영화 범주 자체가 사라졌군요. 아마도 영화 리뷰는 못 올리는 듯 하여 페이퍼로 올립니다. 감안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의 교실 하면, 르네 고시니의 '꼬마 니콜라'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던 아주 소란스럽고 통제불가능한 교실이 먼저 떠오릅니다. 거기, 장학사가 시찰 나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시찰 나온 장학사마저 니꼴라가 있는 교실 아이들에 엄청 시달린 나머지 결국은 담임선생님의 손을 꼭잡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무척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이란 직업이 이렇게
                         성스러운 것인지 정말 몰랐어요. 오늘에야 그걸 알았습니다.
                         용기를 갖고 계속 열심히 가르쳐보세요. 힘내세요!"

                                                                                   ( 꼬마니콜라 p.56 )

  프랑스에서 교실이 선생님과 아이들의 전쟁터가 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우리나라 처럼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겐 생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이지요. 그렇게 우리 역시 엄한 규율 속에 교육을 받아와서 그런지 우리들은 같은 프랑스 교실을 다루고 있는 로랑 캉테의 이 영화 '클래스'에서도 어쩐지 선생님 마랭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선생님의 눈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더없이 소란스럽고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공격까지 감행하는 학생들이 당장 매를 들어서라도 질서와 예의를 가르쳐야 할 것 같은 말썽꾼들로만 보입니다.


 
 영화는 마치 그런 관객의 기분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마랭의 아주 힘든 수업시간을 보여주고 그 뒤엔 아예 동료교사 하나가 마치 마랭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학생들에 대해 너무 분노한 나머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폭발하는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동료교사의 모습이 정말 이해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꼬마니콜라'에서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던 그 장학사처럼...
 

  마랭이 속한 선생님들의 세계에선 학생들에게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고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공감합니다. 뭔가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로 부터 이러한 항변을 듣게 됩니다.

  "왜 자기들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프레임으로만 가두려 하느냐"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아이들이 각자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마랭이 학생들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과 똑같이 아이들도 마랭으로 부터, 마랭이 속한 선생님의 세계로 부터 이해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랭은 자기의 입장만 중요합니다.  그들은 마랭으로 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 방향은 절대로 거꾸로 될 수 없다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해해달라 요구할 수 없다고...
  그건 이미 마랭에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그렇게 동료교사가 폭발했듯이 결국 터져버리고 맙니다. '슐란'처럼 말이죠. 

  감독의 의도였는지, 이렇게 선생님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각각에서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에서 터져나온 '폭발'이 한 번씩 일어납니다. 영화는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처럼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날 것'의 현실을 아무런 형식없이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처럼 묘하게도 댓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 쪽 세계의 구성원들이 한 번씩 분노로 인한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하여, 영화의 앞부분에는 선생님들이 자신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의 끝부분에는 아이들 각자가 자신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이랄까요? 아무튼 이러한 구성은 언뜻보면 교육의 방향이 절대로 비가역적일 수 없다는 마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영화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초반의 선생님이 가르치려 했던 것과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려했던 것과 아이들이 얻게 된 것엔 아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얻게 된 것도 선생님의 도움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던 개성들이 그저 발현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례로 마랭을 가장 속썩였던 그래서 마랭으로 부터  창녀라는 모욕을 들었던 한 소녀는 교과 과정에는 전혀 없었던 '플라톤의 국가'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져 묻는 마랭에게 그녀는 "왜 그러세요? 창녀라고 했던 제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서 놀랬나요?"라며 카운터블로우를 날립니다. 이렇게 영화는 마랭이 주장하던 '교육 방향의 비가역성'을 비틉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건 차라리 단절에 가깝다.' 이렇게 말이죠.


 

  결국 이러한 의도된 영화의 구성은 우리에게 그 단절,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가 하나가 아니라 앙 쪽으로 갈라져있는 세계이며 교실은 바로 그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는 하나의 전장 처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캉테가 이렇게 단절과 대치로 교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관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선생님과 학생간 관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흔히 끼고 보는 '수직적 권력 관계'라는 선입관 때문이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마랭의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러한 선입관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니까요. 바로 캉테는 그러한 우리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떼어내기 위해서 질서 보다는 혼란을, 평온 보다는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캉테는 그것을 교실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묘사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에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특히나 카메라가 어떤 높이에서 인물들을 담는가를 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일단 영화에서 카메라가 '선생님들만의 세계' 혹은 '아이들만의 세계'(수업 시간 외에는 사실상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만)를 찍을 때는 그대로 눈높이에서 담습니다. 카메라가 찍는 높이는 바로 그 찍히는 대상을 향한 시선의 높이에서 관객이 받는 느낌 때문에 종종 어떤 권력의 역학관계를 암시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로랑 캉테는 카메라가 위로도 아래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아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렇게 그저 서 있는 혹은 앉아 있는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선생님들만의 세계 나 아이들만의 세계를 담아내려 노력합니다. 마치 '그들만의 세계'는 지극히 평등하며 안정적이고 단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듯이 말이죠.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교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마랭과 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더욱 더 그렇습니다. 클로즈업된 마랭과 똑같이 수평적 위치에서 잡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세계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렇게 그들의 주고받음은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저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발언했던 민주적 광장의 상징으로 일컫는 '아고라'를 연상시킵니다. 거기엔 어떤 지배도 훈육도 없고 오로지 '동등한 참여'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종종 카메라가 반복적으로 잡아내는 장면 때문에 이 교실은 '아고라'와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장면은 바로 학생들의 머리 위로 홀로 서 있는 마랭의 모습입니다.
 


  카메라는 자주 그것을 보여주는데 그저 머리와 뒷 모습만 보이는 아이들 위로 홀로 우뚝 서서 활발하게 손을 움직이거나 몸을 움직이며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어쩐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중과 대치중인 고독한 군인과 같아 보입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반론을 전개할 때 그가 보여주는 활발한 손놀림과 몸놀림은 마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듯 보입니다. 그렇게 영화는 그 장면의 반복으로 교실을 하나의 '전장'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언젠가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파리 꼬뮌'의 기억이 끼어들면서 '아고라'의 개인적인 대치 관계가 '파리 꼬뮌'의 집단적인 대치 관계로 이행됩니다. 주의깊게 보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장면들이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캉테는 교실이라는 하나의 공간에다 개인과 개인간, 집단과 집단간 동등한 소통을 집약시켜 보여주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러한 교실의 모습은 역시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선생님들 세계'와 비교해보면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선생님들의 세계는 교실과 전혀 다릅니다. 거기선 대화도 차분하고 조용하며 설사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하지 비아냥거리거나 막말이 오고가지는 않습니다. 분로로 폭발하는 교사가 있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위로해 줄 뿐입니다. 하지만 마랭의 교실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기습적 공격이 있고 연속적인 발포와 응사가 있습니다. 더러 수류탄 투척과도 같은 난데없는 인신공격까지 감행되기도 합니다. 이 두 세계의 모습이란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캉테는 왜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 두 세계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통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나는 완전한 소통과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소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두 세계가 서로 성격이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세계는 단일한 세계라는 것이고 교실은 두 세계가 서로 대치중인 세계라는 것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선생님들만의 세계는 그려지는데 어인일인지 아이들만의 세계는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의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이들이라는 주체를 배제시키겠다는 의미일까요? 만일 영화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다면 굳이 교실의 풍경을 화면에 그렇게 담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엔 다른 의도가 분명 개입된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여기엔 '바라보기'의 주체가 있습니다. 운동장을 담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드러나듯이 거기엔 교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주체, 단일한 세계에서 대치중인 건너편의 집단을 바라보는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보여도 선생님으로 부터 고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가 잘 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두 세계가 보여주는 소통의 서로 다른 모습 또한 그 중 어떤 세계의 소통이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세계에 서로 다른 주체들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어쩌면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치부될 수 있을 그 관계를 보다 넓혀서 집단과 집단과의 관계로 보도로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잊고 있는 교육에 있어서 구조적인 측면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엔 사실 구조적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선들이 있습니다. 그 경계선들은 시민권자와 이민자들을 나누고 잘 사는 계급과 못 사는 계급을 나누고 그 나라말을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눕니다. 그렇게 교실인 한 개인의 문제만으로는 치부해버릴 수 없는 수 많은 모순들이 집약되어진 그러한 공간입니다. 때문에 마랭 혼자만의 힘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점들이기 때문이죠. 때문에 얘기를 이어왔던 대로 영화는 관객들이 그것을 구조적인 시각으로 보도록 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세심한 연출들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출들이 진정 의도하는 바가 눈에 뜨인 순간 우리는 이제 영화를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랭을 바라보는 시선일 것입니다. 영화 처음 우리 눈에 마랭은 정말 희생자처럼 보입니다. 그가 선생님 권위 운운하며 아이들에게 훈계할 때 조차 안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결국 어쩔 수 없이 폭발한 슐란을 교장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선 한없이 나약해진 그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기도 합니다. '열심히 하려는데, 이렇게 민주적으로 대하는데 아이들은 왜 날 이해하지 않고 따라와 주지도 않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원망하면서 때로 의자를 걷어차거나 홀로 식당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연민마저 느껴지면서 격려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마랭은 희생양으로 보입니다. 그저 소통하려 들지 않고 다혈질이기만 한 아이들 앞에서 피해자인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시선은 옳았던 것일까요? 영화가 보여준 구조적인 측면들이 눈에 띈 순간 우리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착각이었음을 말입니다. 왜 착각이었는지를 이제부터 말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번역하자면 '벽들 사이에서' 입니다.
제목만 봐도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바로 벽들을 가로지르는 '소통' 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목 대로 영화는 그렇게 구조적으로 단절된, 그렇게 벽으로 가로막힌 두 개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백인들 중심의 선생님들 세계와 다인종으로 혼합된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여러가지 면에서 분명 서열화가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렇게 우월한 세계와 열악한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였습니다. 교실에서 마랭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우열로 나뉘지 않는 공간임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이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학생들과 아예 존재감 자체가 지워진 학생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나가고 지워진 학생들을 통해 거꾸로 벽이 없다고 말하는 교실에 분명한 벽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다 분명히 함으로써 거꾸로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떨어져나가거나 지워진 이유들을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그 벽들'의 정체가 보다 분명해 집니다.

  첫째는 언어입니다.

  이제 '꼬마 니콜라'의 교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랭의 교실은 거의 반수 가까이가 이민자의 자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프랑스어 하나로 완전히 통하던 시대는 이제 가버린 것이죠. 교실엔 아직 프랑스어에 익숙치 못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모국어와 혼용해서 쓰는 아이들까지 존재합니다. 마랭은 그런 그들에게 프랑스 문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화는 중국이민자 "예예"와 결국은 퇴학을 당하는 "슐만"을 통해서 이 언어의 장벽을 드러냅니다. 중국인 "예예"는 말이 서툽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이들과 제대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인지 그는 거의 내내 홀로 있습니다. "슐만"은 결국 그릇된 학습태도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그가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슐만의 어머니 역시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역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결정적으로 교장단 앞에서 프랑스어를 못해서 아들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바람에 슐만은 퇴학을 당하게 됩니다. 슐만은 퇴학을 당해 아프리카로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예 역시 그의 어머니가 불법체류자로 체포되는 바람에 강제송환 당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슐만과 예예는 결국 똑같은 이유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언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그 사회에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나간다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교실에 있는 저 많은 다문화의 아이들은 사실 언어로 인해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의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난처한 질문과 야유로 마랭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언제 어느 때 사회로 부터 몰림을 당해 떨어져나갈지 알 수 없는 존재들 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려는듯 영화에 나왔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영화 초반 그러니까 새학기가 시작될 때 분명 교실에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예예의 짝궁으로 같은 중국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우리는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를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대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듯 그녀의 존재는 영화에서 내내 지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 말을 하나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언어를 못하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로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무서울 수 밖에 없는 묘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교실에 있는 그 어느 아이도 이것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언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특히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학생들이 다 자신이 배운것이 뭔지 말하고 나서 교실을 나간 뒤 앉아있는 마랭에게 한 소녀가 다가옵니다. 그 소녀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 마랭이 가장 먼저 말하게 했던 그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직업학교엔 정말 가기 싫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학생의 말을 듣는 마랭의 모습을 이제 카메라가 보여줍니다. 묻는 여학생의 눈이 분명 보고 있을 그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랭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건 영화에서 유일하게 보여지는 내려다보는 각도, 즉 권력의 시선이었습니다. 그토록 주의깊게 시선이 가지는 권력 효과를 지워왔던 캉테가 유독 여기에서만은 권력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물음에 마랭이 아무런 대답을 못할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캉테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미래가 교육으로 얼마나 나을 수 있는가를 말해왔지만 사실 당신이 해왔던 것은 그들의 미래를 거짓으로 꾸며 그들로 하여금 이 현재에 더욱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가르쳤던 그 부르조아들만이 쓰는 프랑스 문법 처럼 그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팔아 현재의 비참함을 지속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었나?"하고 말입니다.
 

  캉테의 이 무언의 질문에서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벽을 선명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재생산'이란 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민자의 자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가난한 이민자 자녀들에게 직업학교는 선택사항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곳이고 그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열려진 유일한 미래라고 말입니다. 결국 부르디외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현재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은 결국 안전하게 사회가 지속될 수 있도록 계급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부르디외의 이 결론과 캉테가 묻고자 하는 근본적 질문은 이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이 얘기들이 시작되었던 애초의 질문, 그러니까 왜 마랭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착각이었나에 대해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꼬마 니콜라'의 그 어린이들은 이제는 자라나서 프랑스의 주류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가 묘사하는 선생님들의 세계가 바로 그 니콜라의 세계처럼 단일한 백인들의 세계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캉테가 영화 내내 묘사해왔던 대로 단일해서 안정되고 안전한 세계였습니다. 마랭은 바로 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어쨌든 '예예'나 '슐람' 그리고 그 여학생 보다는 배제되기 어려운 위치에  서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게 피해자로만 보이던 마랭은 사실 갑각류 처럼 세계로 부터 아주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가해자들로만 보였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언제 어느때 지워지고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듯이 우리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캉테가 이렇게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것은 보다 깊은 윤리적 목적이 있습니다. 앞서 영화가 두 세계를 그렇게 보여준다는 것은 '바라보기'의 주체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캉테가 교실이 은폐한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는 것도 바로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캉테는 그 '바라보는' 윗 세계의 주체들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사정은 이러합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포용해주어야 할까요?"
 

   대답은 굳이 여기서 적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 캉테는 눈높이 선생님 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배려마저 잊지 않습니다. 바로 이 배려가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카메라가 점점 내려오면서 휴식시간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운동장을 담아내는 장면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카메라는 차츰 내려오다 결국엔 아예 아이들과 뒤섞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하강은 재미있게도 영화에서 마랭이 처음엔 서 있다가 갈등을 거치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신체적 동작과도 일치합니다. 이러한 카메라의 하강과 마랭의 신체적 동작의 일치마저 보아버린다면 앞서 캉테의 질문 '우리는 누가 포용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바로 마랭이 포용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영화 초반 아이들 머리 위로 홀로 우뚝 서 있던 마랭이 그렇게 아이들과 마치 전쟁을 치르듯 선생과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 소통을 하면서 부터는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앉게되는 것과도 같이 마랭이 먼저 내려가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넌지시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마랭이 속한 저 위의 세계가 포용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은 '안전한 자들'이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랭와 아이들은 언제 싸웠는가 싶게 서로 하나로 어울려 즐겁게 축구를 합니다. 늘 아래로 내려다보던 그가 그렇게 아래에 있는 자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입니다. 캉테가 영화를 통해 내내 말을 걸고 싶었던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 뒤이어 영화는 흐트러져있는 의자와 책상들로 가득한 텅 비어버린 교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바로 직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속에 텅 비어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맥락없이 툭 튀어나왔던 풍경들이 연상됩니다. 아마도 캉테가 보여주는 이 마지막 풍경도 그 감독들이 마치 화두처럼 툭 던져주었던 그 풍경들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듣는 관객을 상정하며 영화를 이끌어왔던 캉테로선 정말 어울리는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니까 관객 자신의 사유를 위하여 빈 여백 하나를 남겨두는 것 말이죠.
 

  저는 그 '여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유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악이란 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사유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캉테의 '클래스'는 비단 교육 문제에만 그치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했던 말과 똑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겁니다. 마랭에게 있어 포용이란 그렇게 학생들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다름아니니까요. 예전 신문을 통해 마트의 냉동창고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가스에 질식해 차디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숨진 20대 대학생의 얘기를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생계를 위해 일찍 군대에 갔고 전역해서도 내내 가난한 집안 살림과 높은 등록금 때문에 쉴 새 없이 일만하다 결국엔 그렇게 사고로 숨져야 했던 한 젊은 영혼을 보면서 정말 아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젊은 영혼 처럼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로 보기는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문득 캉테의 이 영화가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캉테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이렇게나마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의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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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2-21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헤르메스님 글 올라왔네 하고서는 피곤하다, 자야지~ 하고서는 또 이렇게 들어와서 댓글남깁니다 ㅋㅋ
영화 서비스가 종료된게 참 아쉬워요. <부러진 화살>도 쓰고싶었고, 또 다른 영화들도 한 번쯤은 남겨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저는 영화를 써본적이 없이 종료되었기에 더 아쉽죠. 그런데 이달의 당선작에 영화리뷰가 올라와있더라니까요 ㅋㅋ 아! 그럼 이제 다음달부터는 영화당선작이 사라지니ㅣ 이달의 당선작 뽑는 양을 좀 더 늘릴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피곤한 밤이에요. 굳밤~:)

ICE-9 2012-02-24 02:09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소이진님의 '부러진 화살' 리뷰를 못보게 되다니 안타까운데요. 뭔가 알라딘도 사정이 있겠지만 영화 리뷰란이 없어진 건 정말 아쉽기 그지 없네요. 그동안 영화에 대해 좀 많이 써 둘걸 하는 후회도 들고... 아무튼 이렇게 페이퍼라도 소이진님의 영화 리뷰 좀 보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