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의 기술 1 NFF (New Face of Fiction)
채드 하바크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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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드 하바크의 소설 '수비의 기술'은 일단 독특했다.

 지금까지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유격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오랜만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미국 대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독서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에릭 시걸의 '닥터스' 이후로 온전히 대학 생활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소설은 처음 만나는 것 같다.(그 에릭 시걸 또한 이미 타계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그렇게 독특했고 또 오랜만에 재회하는 세계인지라 솔직히 열광적으로 읽었다. 정말 유격수를 뜻하는 영어 'shortstop'처럼 짧은 보폭으로 진행되는 그렇게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문체라서 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수비의 기술'은 무슨 이야기인가?

 

 야구 이야기인가?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아니다. 사랑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뭔가 하나가 부족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요한 등장인물 헨리, 그를 웨스티시 대학으로 데려와 정말 하고 싶은 야구를 마음껏 하게 해주는 슈워츠, 그 웨스티시 대학의 총장 어펜라이트 그리고 그녀의 딸 펠라 그 모두가 똑같이 뭔가가 부족한 그래서 결국엔 충족되지 못한 것 때문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헨리는 그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유격수 아파리치오(이 사람은 헨리가 거의 성경처럼 여기는 '수비의 기술'을 쓴 전설의 유격수이기도 하다. 헨리는 이 책을 읽으며 최고의 유격수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금은 거의 근접한 상태다. 물론 아파리치오는 실제 인물은 아니며 당연히 '수비의 기술' 또한 가공의 책이다.)와 타이 기록을 이루려는 직전에 어이없는 실책을 범한다. 슈워츠는 헨리를 끌어와 야구로 성공시켜 준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의 미래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어펜라이트는 진짜 소망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논문을 쓸 때는 그리도 자주 찾아오는 '백열 상태'가 정작 소설을 쓸 때는 찾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그 뒤 그는 학문적으로 성공해서 지금처럼 대학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되지 못한 작가에 대해서는 미련을 안고 있다. 그의 딸 펠라는 십대 때 이미 자신의 학교 강사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바로 실패를 하고 그에게서 달아나 웨스티시로 돌아온다.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진짜 이유는 그녀가 어펜라이트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펠라의 사랑은 정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존재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전남편 데이비스와 현재의 남자 친구 슈워츠를 거치지만 '털보에서 털보로 옮겼을 뿐' 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사랑을 얻지는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모두는 각자가 바라마지 않았으나 결국엔 채워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이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헨리의 경우가 그렇다. 헨리는 슈워츠의 미래를 위한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 여겼던 슈워츠가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실책을 범한다. 그 첫 실책은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가장 접근하던 날 자신의 룸메이트이기도 한 오웬의 얼굴에 잘못하여 공을 던져 버린 일이다. 결국 오웬은 그 공을 맞고 병원에 실려 입원하게 되는데 여기서 채드는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사실 이 '접합'의 묘미가 바로 채드 하바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한데 아무튼 채드는 여기서 왜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헨리의 송구로 묶어두는 것일까? 그것도 좌절의 시초가 되는 송구로 말이다. 그것은 아라파치오와 오웬이 이 소설에서 사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두 다다르고 싶으나 오히려 그 남은 거리로 인해 더욱 불안감을 부채질할 뿐인 존재인 '이상(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와 아파리치오의 관계는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관계와 같다. 때문에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동성애는 사실 다르게 보아야 한다.

 

  즉 아파리치오가 되기 위해 헨리가 야구에 기울이는 온갖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펜라이트의 오웬에 대한 사랑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왜 채드가 헨리가 결정적으로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접근하려던 그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이 동경하는 오웬을 보려고 같은 구장에 있도록(그것도 어펜라이트 자신의 치부라 할만한 딸 펠라가 달아나 집으로 오는 그 시간에) 공들여 설계하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채드는 드러낸다. 헨리가 자신의 이상에 근접할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의 이상에 똑같이 근접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헨리의 잘못된 송구는 어펜라이트가 자신의 이상, 오웬과 직접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헨리가 어펜라이트로 하여금 오웬에게로 데려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헨리의 그와 같은 실책은 좌절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 서 있는 웨스티시 자체가 사실은 좌절의 땅이었다. 그 대학이 숭배하는 멜빌이 작가로서 한창 좌절을 겪다가 떠난 절망의 순례 가운데 찾아 온 곳이 바로 웨스티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례 여정을 발견한 것은 바로 어펜라이트였다. 그리고 그 발견으로 어펜라이트는 성공한 학자가 된다. 말하자면 멜빌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웠듯이 이제는 헨리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우는 것이다. 결국 멜빌이 어펜라이트가 다가가고자 했던 대상이었음을 볼 때 그 멜빌과 헨리가 어펜라이트에게 똑같은 경로로 기회를 준다는 것은 곧 어펜라이트가 염원하는 오웬이 헨리가 염원하는 아파리치오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파리치오와 오웬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의 야구도 어펜라이트의 동성애도 사실은  이상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말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동성애적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을 때 어펜라이트가 보여주는 반응일 것이다. 오웬을 만나기 전까지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어펜라이트는 그 자신 열망하긴 하였으나 처음으로 동성과 깊은 신체적 접촉을 나누게 되자 그 낯선 이질감에 당혹스러워한다. 바로 이 당혹감이 오웬과 어펜라이트의 관계가 정말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그렇게 모자람 그리고 거기로 부터 비롯되는 두려움을 그리지만 섣둘리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용기라고 말한다. 1부 밖에는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더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래서 채드 하바크는 첫 머리에다 웨스티시 대학의 응원가를 삽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기운을 북돋아요. 나의 친구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요

용감한 우리 하푸너스가

공을 쳐내고 있으니

 

- 웨스티시 대학교 응원가 -

 

 

 

 

 다른 얘기로,

 아파리치오와 오웬이 이렇게 '이데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여기의 등장인물 또한 일련의 과정으로 재배치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이를테면 헨리가 이제 막 필드로 뛰어드는 초심자라고 한다면 슈워츠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펠라는 슈워츠가 원했던 미래를 한 번 얻었으나 그것이 가짜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그 슈워츠 보다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어펜라이트는 예순이라는 나이나 그의 학문적 성과나 총장이라는 직위로 보아 직선의 가장 끝자리에 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직선상의 성장과정과도 같다.

 

 무리하게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아두는 것은 이 소설에 은연중 드리워진 한 가지 맥락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맥락이란 다름아닌 이것은 바로 작가로서의 채드 하바크 자신에 관한 얘기라는 것이다.

 

 

 채드 하바크는 이 소설 '수비의 기술'을 쓰기 위해서 자그만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 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그 10년의 세월은 그대로 그가 이 첫 소설을 세상에 출산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기까지 겪은 산통의 과정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정말 채드 자신이 이러한 산통의 과정 자체를 소설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근거를 나는 일련적으로 배열 가능한 등장인물들에게서 찾는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연속적 흐름이 그대로 채드 하바크가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의 주된 얘기가 되는 헨리의 아파리치오 되기는 사실 채드 하바크의 작가 되기의 얘기인 것이다 라고 나는 의심한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란 수비였다. 그는 짧은 평생 내내 배트에 맞은 공이 튀어 나가는 모양, 각도와 회전을 연구했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지, 왼쪽으로 꺾어야 할지, 날아오는 공이 앞에서 높게 솟아오를 것인지, 땅을 쏜살같이 강타하며 굴러갈지 미리 알아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깔끔하게 공을 잡아냈다. 예외 없이.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송구를 해냈다. 예외 없이. 그럼에도 감독들이 그를 2루에 세우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거나, 아니면 벤치에 버려둘 때가 있었다. 그 지경일 만큼 피골이 상접하고 못 봐주게 처량한 몰골이었다.(p. 19 ~ 20)


 이걸 채드가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문장을 써 내려갈 때의 채드의 심정이 어땠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 같다. 즉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이미 작가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어쩌면 그걸 쓸 때 진짜 했을지도 모를 투정 아닌 투정을 여기다 슬며서 버무려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더하여, 소설가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어펜라이트가 새삼 오웬이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 계기도 여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렸던 것은 그의 에세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젊은 청년의 에세이에 녹아든 우아함과 광범위한 독서에 감탄했다.(p.142)


 채드는 오웬에 대한 어펜라이트의 매혹이 무엇보다 텍스트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에서 내내 보여지는 오웬의 묘사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채드는 오웬을 그 누구보다 박학다식하며 책벌레로 묘사한다. 그는 야구 경기를 할 때 조차 비글호 항해기에 빠져있다. 그의 말투 역시도 구어체 보다는 문어체에 가깝다. 헨리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보라. 그는 마치 논문을 쓰듯이 대화를 한다. 채드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있으니 여기엔 분명 의도가 있다. 난 그 의도가 바로 오웬이 하나의 텍스트적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독자들이 그를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종의 살아있는 텍스트, 의인화된 텍스트로 봐 주길 원해서 말이다. 왜 채드는 구태여 오웬을 일종의 의인화된 텍스트로 만드는 것일까? 그 오웬이 가장 작가적 정점에 이른 어펜라이트의 애정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드러난다. 오웬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베아트리체라는 것을. 베아트리체는 파우스트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마지막 남은 이상적인 퍼즐 조각이었다. 어펜라이트에게 그 퍼즐 조각은 쓰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는 왜 오웬에게 휘트먼을 읽어주려 했던 것일까?

 휘트먼은 살아 생전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시인이다. 즉 그 휘트먼은 소설가가 되지 못했던 어펜라이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웨스티시라는 그 좌절의 땅에서 오웬은 그러니까 어펜라이트가 정말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 그 완성된 이상적인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펜라이트는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른 채 마구잡이로 빠져드는 것이다. 즉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리는 이유는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가져버린 소설가에로의 미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욕망했던 파우스트도 그 바탕엔 결국 미련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어펜라이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오웬을 통해 미처 쓰지 못했던 소설을 다시금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채드는 예리하게도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첫 깊은 신체적 접촉을 하는 순간 19세기 빅토리아 소설처럼 그것을 묘사한다. 소설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시기를 말이다. 거기다.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만남 또한 텍스트 읽어주기로 채워나간다.


 그렇게 채드는 어펜라이트의 사랑을 작가가 완벽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빗대어 얘기하고 있으며 바로 그 욕망은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비의 기술'을 썼던 그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수비의 기술'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모노로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헨리가 웨스티시 대학에서 처음 보게 된 멜빌 동상의 묘사가 흥미롭기 그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멜빌은 작가인 채드 자신이 가장 도달하고 싶은 이상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동상이 서 있는 웨스티시가 사실은 멜빌이 작가로서 좌절하고 있을 때 방문한 곳이며 그래서 멜빌의 글로 넘치는 웨스티시 자체는 좌절의 글쓰기 현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이제 초심자 작가로서 온 헨리는 멜빌 동상에게서 이상한 친근함을 느끼는데 그런데 그 동상의 실상은 이랬다.


 동상은 교정을 등지고 서 있는 바람에 몸 뒤에 채찍질 자국처럼 나 있는 균열과 균열 안에 가득 찬 이끼를 행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때문에 헨리는 처음부터 뒤죽박죽인 제 머릿속 고민까지 겹쳐서 이 동상이 몹시 고독한 인물로 느껴졌다.(p. 47)


 이 멜빌의 동상 자체가 채드 하바크가 글을 쓰면서 느낀 작가의 모습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늘 도달하려고 헨리처럼 어마어마하게 노력하지만 균열은 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지고 또 그 균열이 주는 한계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들어 결국은 고독하게 빈 페이지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작가의 운명을 그는 바로 여기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채울 수 없는 모자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드 자신이 작가가 되기위해 나아갈 때 마다 느꼈던 균열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말하자면 '수비의 기술'은 이렇게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맨 위에서 말했던 외면의 얘기가 절묘하게 접합된 소설이다.

앞서도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접합'이라고 말했다. '접합'이란 바깥의 세상과 내면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채드 하바크는 그것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보려 야구장으로 갔을 때 거기 헨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살펴보고 있던 스카우터와의 얘기가 그렇다. 스카우터는 헨리를 스카우트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건 또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유혹 그렇게 스카우트 하는 것과 접합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접합'은 교착된 평행세계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두려움을 지우는 소설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가는 가운데 용기를 주는 소설이라 했다. 바로 그 용기가 접합을 통해 결부되어진 이면의 세계를 바라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접합에 대한 수수께끼는 2부를 다 훑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 그럼, 2권에서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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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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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이제 기록이 아니라 발굴이 되었다.

 더 이상 왕조 같은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쟁이나 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 중심이 아니라 그들에게 관심의 스포트라이트를 갖다대느라 상대적으로 가리워졌던 그래서 더 왜곡되기도 했었던 역사적으로 무시되어졌던 존재들에게 다시금 빛을 찾아주고 목소리를 가져다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낮의 환한 광장으로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역사의 소명이 된 것이다. 지배계급이 존재했었던 곳엔 어디에서나 그렇게 역사의 관심에서 소외된 자들이 존재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서양의 역사 못지않게 공식적 기록에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고 지금 역시도 온전히 관심과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들이 상당한 것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궁녀가 아닐까 한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신명호의 '궁녀'는 오래도록 빛을 받지 못하여 무지의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던 궁녀들의 삶을 제대로 복원해보려 한 저작이다. 그가 새삼 잊혀진 궁녀들의 삶에 주목했었던 것은 여성들의 급속한 사회적 지위 향상과 더불어 조선시대 내내 억압받았던 여성상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 재조명의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대비, 왕비, 후궁, 궁녀등 궁중 여성들이 될 것이라 한다. 왜냐햐면 조선은 그 무엇보다 왕조국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중 여성들의 경우 지금도 그것을 재현한 사극들에서 잘 드러나듯 자칫 그 권력의 추구와 흥미본위의 선정성에만 집착해 그 삶의 진정한 모습이 왜곡될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신명호는 그래서 역사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의해 왜곡될 위험을 우려해 학문적 탐구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나온 '궁녀'는 바로 그러한 신명호의 문제의식에서 태어난 산물인 것이다.

 

 책은 총 6장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째 장은 오래도록 역사의 관심을 받지 못해 공식적인 사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궁녀들의 삶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논하고 둘째 장은 궁궐에서 그저 그림자들로만 존재하는 궁녀이기에 혹 우리의 선입견은 그녀들의 삶이 그대로 단일한 무채색의 삶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이 장은 궁녀들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그러니까 파란만장한 다채로운 빛으로 가득한 것이었음을 특기할만한 궁녀들 개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장이다. 신명호가 하필이면 두번째 장에서 이러한 개개 궁녀들의 삶을 통해 다채로운 궁녀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일으킨다는 점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아무리 궁녀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오로지 왕조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으로만 움직였던 존재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의 욕망을 성실히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조선 왕조가 건국 당시 부터 개인들의 욕망을 억누르고 보편적인 이념만을 추구하려 했던 나라임은 조선의 기틀이 되는 근본 사상을 다졌던 정도전이 경복궁의 침전을 '강녕전'이라 이름붙인 연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강녕전의 의미는 바로

 

  왕이 밤에 조용히 황극을 닦으며 식욕, 색욕, 권력욕 등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을 잠재워야 한다는 의미였다.(p. 9)

  (여기서 '황극'이란 인간의 원초적 욕망들이 생겨나기 전의 중용 상태를 말하는데 즉 황극을 닦음이란 어디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중립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렇게 조선은 처음부터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을 이념으로 출발한 나라였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보편이라는 광막한 장막으로 덮으려 한 나라였다. 하지만 신명호는 그 왕조의 중심에 있어서 누구보다 그 보편적 이념에 봉사했어야 할 궁중 여성들조차 무엇보다 개인의 원초적 욕망을 추구했던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궁중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적 이념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투쟁을 의미하는 상징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동안 궁녀의 실제 삶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전혀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의 환유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그 궁녀들의 삶이 그토록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개인의 욕망 보다는 어디까지나 보편적 이념을 중시했던 조선 때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리워졌던 궁녀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그렇게 보편적인 이념의 그늘아래 웅크리고 있어야 했을 개인의 욕망들을 복원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래서 신명호는 자신의 저서 '궁녀'를 욕망을 비롯하며 개인적인 삶의 실현을 밑그림 삼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은 그 개인으로서의 '궁녀'의 삶에 있어서 바탕을 이루는 조건들을 그려낸다. 즉 3장에서는 궁녀의 선발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4장에서는 궁녀들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움직이는지 그리고 5장에서는 그들의 업무와 라이프 스타일을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궁녀들의 삶의 조건들을 다 그려내고 난 뒤 드디어 마지막 6장에서 가장 개인의 원초적 본능이라 할만한 궁녀들의 성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순서는 그냥 무심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지금 궁녀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이념의 정수라 할만한 정도전의 강녕전에서 그 중심에서 오히려 개인의 원초적 욕망 충족에 충실하는 궁녀들의 삶까지 이르는 여정은 그야말로 보편적 이념이 결국은 개인의 원초적 욕망에 의해 패배하는 여정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궁녀들의 삶을 통하여 궁녀들 삶 자체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이념이 아무리 강고하게 억누른다고 해도 개인의 원초적 욕망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로써 역사가 다시금 보편이란 이름아래 지워진 개인들의 삶을 발굴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개인은 그 자체 삶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그 개인을 자꾸만 부족한 존재로 만들어서 길들이려 드는 보편적 이념은 그야말로 억압적 가설이거나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궁녀'의 역사란 그저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생생한 역사로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궁녀들의 삶이란 사회라면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 이념과 개인의 원초적 욕망 사이의 대립을 제대로 되새겨 볼 수 있는 현장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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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1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번 책은 제목과 표지부터 강렬하네요.
리뷰도 짧고 강렬하고. 마침 책 사려는데, 음 읽어볼까.
<채홍>을 읽었더니 이제 궁녀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요 ㅋㅋ

ICE-9 2012-06-10 22:58   좋아요 0 | URL
후후, 사실 마지막 장에 '채홍' 얘기가 나와요. 읽으면서 소이진님이 읽으면 좋아하겠다 생각도 했더랬죠^ ^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너무 들르지도 못하고 그랬죠? 곧 찾아갈게요^ ^

프레이야 2012-06-1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관심가길래 마음에 찜해뒀는데 님의 리뷰 읽고는 바로 담아갑니다.^^

ICE-9 2012-06-13 02:47   좋아요 0 | URL
앗.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저는 꽤 만족스럽게 읽었는데 프레이야님도 만족하실 수 있으시면 좋겠네요^ ^
 
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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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영국의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70세에 그린 이 그림은 기차 여행중 기차의 빠른 속도로 인해 유리창에 그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속도감으로 인해 달라지는 세계의 인상을 이렇게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듯 근대에 들어와 놀랄만큼 빨라진 속도는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체험이었고 단시간에 보다 멀리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그들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켰으므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 걸릴 거리를 한 시간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시간 단위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이제 하루, 반나절 이런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빨라진 속도에 맞춰 시간 혹은 분 더 나아가서는 초 단위까지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간 테이블은 근대에 들어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발명품이었고 그것을 정형화시킨 이는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1910년대 당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생산 공정에 표준화를 가져온 이로 유명하다. 그것이 가장 최초의 정형화된 일련의 공정이었으므로 '테일러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테일러는 생산 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공정을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그 순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단순 반복 작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숙련성'을 노동자에게서 박탈하였고 그래서 보다 쉽게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테일러는 그 단순 반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바로 그러한 시간의 분할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간적 생활양식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원인과 결과란 종종 되먹임의 과정이다. 원인이 촉발시킨 결과가 다시 그 원인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분과 초 단위까지 관리되기에 이르자 생활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도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도시로 왔을 때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의 시대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을 놀란 표정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왜 영화들은 자주 이것을 묘사하는가? 바로 이 속도의 체험, 가속화된 시간의 체험이 과거의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간적 단절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시간 리듬이란 근대와는 달라서 보다 더 긴 시간 단위 그러니까 하루나 한달 어쩌면 계절을 주기로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가속화'란 어디까지나 근대에 의해 창출된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을 우리는 독일의 다큐멘터리 작가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란 책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요즘 부쩍 늘어난 시간 관리 상담가라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잡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문제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P.89)

 

 

 

 

 오피츠의 '슬로우'도 이와 같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아니 이 책 자체가 오피츠가 살면서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의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떠올려 보았을 그런 의문이다. 즉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걸까?' '시간을 벌려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휴식은 커녕 왜 더 바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까? 대체 여기에 해결책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다.

 

 기술적 발달로 절약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손편지 하나 쓰는 것보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두 배는 빠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편지 10통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30분이면 이메일을 10개 쓸 수 있죠. 그런 30분의 여유가 생깁니다. (...)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메일을 10개가 아니라 50개 60개씩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 우리는 이메일 기술의 발달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만큼 읽고 처리해야 할 뉴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신기술의 발달로 얻는시간 보다 뉴스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기 때문입니다.(P. 73~74) 

 

 

 그렇게 단순히 오피츠 개인의 의문이란 것을 넘어서 어쩌면 사회 보편적 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문들을 말 그대로 오피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슬로우'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중심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문처럼 보다 확장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우리는 왜 불안하게 쫓기며 살까?'가 개인 차원의 시간 관리 문제를 다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혀낸다면 2장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상'은 거기서 보다 확장되어서 사회적 차원을 다루는데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사회가 이미 구조적으로 가속화 사회이기 때문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논리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나 경제만은 아닙니다. 경쟁 논리도 한 몫 거들죠. (...) 바로 이 경쟁 논리가 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이 경쟁 논리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가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 세상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빨라진 속도는 이제 활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자기 발전에 대한 희망도 심어주지 못합니다. 압박은 점점 심해지는데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지요. (..) 우리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빨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P.112 ~ 113) 

 

그리고 3장 '행복과 속도, 그 대안을 찾아서'는 이미 구조로 자리잡은 가속화 사회에서 과연 그 속도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그 대안을 탐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피츠 개인의 체험으로 접속되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보다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의문에다가 그 과정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의 해답 찾기 과정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그리고 마치 내 문제 처럼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오피츠의 고민과 더불어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거기다 대답의 추구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각 사람들의 체험을 통하여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이 책은 특정한 대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주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그들의 육성으로 생생한 체험들을 들으면서 독자 자신이 자기에게 맞는 대안들을 찾아 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꼭 건네는 충고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얼마든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바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내겐 한계가 없다는 과신이 속도의 강박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신체와 정신의 피로만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겸허히 내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제동 장치를 두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회 역시도 이러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데, 오늘의 거대한 위기를 초래한 신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이 '자기 한계의 긍정에서 나오는 절제'라는 제동 장치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가속화는 장기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은 다시 제동 장치의 기능이 원활할 때 보장되지요. 최근 수 십년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는 이 제동장치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안전도 사라졌죠. 신자유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자본의 흐름뿐 아니라 교육제도와 노동시장에서도 제동장치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동 효과가 있거나 유연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 그리고 자본이나 상품, 투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132)

 

 '슬로우'는 한번쯤 삶이 가진 바쁜 속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느림'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는 속도의 강박은 삶의 충실에 대한 강박과 맞닿아 있었다. 즉 우리가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시간을 메우는 것은 그것이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속도의 집착이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주로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은 자주 회사의 복도를 부단히 이동하는 가운데 정신없이 말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충실은 삶이 가진 시간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허투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슬로우'는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며 오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어느 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무엇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입니다.(p. 137)

 

 말하자면 '슬로우'는 바람직한 삶을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제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해답은 늘 제대로 된 질문이 있는 가운데 있어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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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6월이다.

 올 봄 이사할 때만 해도 그리도 멀리 느껴지던 계절이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와버린 듯 하다.

 하긴 무더위는 이미 시작되어 버렸지만...

 이런 나날에 무엇보다 나를 살맛나게 하는 건 역시 장르소설이다.

 해서 이번 신간 추천 페이퍼는 오로지 장르에 대한 편애 만으로

 채워볼까 한다.

 

 

 

  온다 리쿠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하기도 했던 '부러진 용골'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지난 겨울 이 작품의 수상 경력을 보았을 때 부터 기다리던 작품이었다.

 

 제6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2012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12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1위.

 2012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2위

 29011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등등

 작년은 거의 '부러진 용골'의 해였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화려한 수상 경력도 경력이지만 마법이 횡행하는 판타지적 세계를 배경으로 '추리'라는 본격을 가져온 설정이 참으로 독특해 보인다. 전작 '인사이트 밀'이나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서 거의 장르를 가지고 마음대로 노는 듯 해 보였던 호노부인지라 그가 이 작품에서는 또 어떻게 판타지와 본격 추리를 주무를지 자못 기대가 크다. 물론 판타지와 정통 추리의 혼용은 호노부가 처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술사가 너무 많다'로 유명한 랜달 개릿이 이미 제대로 보여준 바 있으니까. 하지만 개릿은 서양 작가고 호노부는 동양 작가인지라 같은 세계를 형상화한다지만 동양인만의 독특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무더위에 가장 벗하고 싶은 작품이다.

 

 

 

 

  네델란드 작가하면 얼른 떠 오르는 것은 '천국의 발견'으로 유명한 하리 멀리쉬이다. 장르 소설로 보자면 역시 작년엔가 서극이 유덕화를 주인공으로 영화로 만들기도 했던 당나라 때 실제로 유명했던 판관 디 공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내 놓은 로베르토 반 훌릭이다.

 '디너'의 작가 헤르만 코흐는 이번에 새로이 소개되는 네델란드 작가이다.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아직 단 한 편도 소개된 적은 없으므로 '코흐'는 이 작품을 통하여 처음 만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 그 부모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한다는 내용인데 에라스무스나 스피노자에서 보듯이 네델란드 특유의 회의주의가 도덕적 딜레마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해선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요리가 나오는 작품을 좋아하기에 선택한 소설이기도 하다. 맛있는 요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면 무더위마저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입가심용으로 맥주는 필수겠군...) 

 

 

 

 

 펠레빈의 '벌레처럼'을 읽은 사람이라면 펠레빈의 이 책을 그대로 지나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오래전에 읽은지라 희미한 기억이긴 하지만 카프카의 변신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곤충과 인간의 경계를 말끔히 지워버리면서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를 그렸던 그 소설은 분위기와 독특한 문체만으로도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오몬 라'는 그런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첫 발자욱이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 작품은 일단 픽션이 아니다. 논픽션이다. 그러니까 상상의 허구적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사실의 세계를 그린다. 그렇게 1960년대 미해결로 남은 12개의 괴이한 사건들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일본의 검은 안개'인 것이다. 1960년대는 68혁명이나 흑인해방운동이나 히피즘 등 전 세계적으로 이데올로기들이 첨예하게 들끓던 그런 시기였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전공투로 대표되는 좌파와 보수 우익의 전선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마츠모토 세이초는 바로 그 시기를 12개의 해결되지 못한 그렇게 검은 안개로만 남은 사건들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기자 출신의 사회파의 거장 답게 그는 이 모든 사건들 집요하게 추적하고 그리고 해결을 위한 나름의 가설을 세운다. 이 모든 것은 또한 혼돈으로 점철되는 60년대의 일본 자본주의를 해부하여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세이초의 작품을 정말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런 이유로 더욱 읽고 싶은 작품이다. 그가 그려내는 혼돈으로 얼룩진 시대의 공기, 그 필치 아래 압축된 밀도 속에 깃들어있을 서로 충돌하는 정념들의 아우성이 정말로 궁금하다.

 

 

 

 

  권여선 작가의 15년만의 작품이다. 레가토는 음악 용어로 둘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라하는 뜻이다. 아마도 소설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듯 하다. 그렇게 이 소설은 30년전의 과거 그러니까 80년대를 호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운영 작가의 '생강'과 비슷한데 고문기술자의 내면을 경유하여 과거와 오늘을 레가토로 보여주었던 '생강'과 달리 이 작품은 정확히 그 반대에 위치하고 있는 운동권 써클을 통해서 레가토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괴물로 살았던 자와 인간으로 살려고 했던 자들의 양쪽 시선 모두를 아우르며 80년대를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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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0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정말정말 이상한것 있죠. 이번 신간 추천 페이퍼에 들어있는 책들은 왠지 눈에 다 익어요. 권여선의 <레가토>는 벌써 몇년전에 본 책같고, 세이초의 <일본의 검은 안개>는 두세달 전에 본 책 같아요. 다른 분들 소설 추천 페이퍼 읽으면서 의아해했었는데 헤르메스님도 이렇게 꾸미셨군요. 나도 추천 페이퍼 쓰고싶다. 그땐 참 귀찮았었는데, 지나서야 후회가 되네요. 잘 쓸걸.

ICE-9 2012-06-08 11:23   좋아요 0 | URL
와! 소이진님 왠지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아요.^ ^
소이진님 눈에 다 낯익어 보인다는 건 이 책들이 모두 5월달 신간들이라서 그럴까요.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오래도록 본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표지 때문에? 음, 저도 궁금해 지는데요.^ ^ 이번 달은 집계를 해보니 저번과는 달리 책들이 꽤 고루 표를 받았더군요. 그래서 정말 어떤 책이 될 지 모르겠더라구요. 소이진님의 페이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저도 참 아쉽네요. 다음엔 꼭 보게되기를 바랄게요^ ^
 
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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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책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내가 평소 궁금해왔던 그 문제에 대해 풀어놓을 때가 있다. 바로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해 보았을 바로 그 의문으로 다시금 인도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 주는 괴리를 보았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윤리적이고 자비로로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도대체 종교라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 주커먼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단적으로 그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과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을 통해 이것을 풀어나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에 대해서 보았던 그러한 괴리가 이제는 국가로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인데 이에 대한  필 주커먼의 말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본다.

 

 미국은 확실히 서구 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다.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확실히 서구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다. 그렇다면 신앙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미국에 총이 범람하고 형벌이 가혹하고 매주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약물 중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수많은 어린이와 임산부가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고 정신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선진국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비종교적이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의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p.64)

 

 

 

 '신 없는 사회'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국가가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의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느끼는 의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문엔 또 한가지가 더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현실 그대로 딱히 종교가 제대로 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 종교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가 필 주커먼이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종교 과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로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동시대적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그 주요한 방법으로 필 주커먼은 면접법을 가져 온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연구 방법중 하나이기도 한 면접법은 일종의 인터뷰 같은 것으로 연구 대상자와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있는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것은 또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적절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종교사회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진면목을 보여준 바 있었던 막스 베버 역시도 종교사회학에 있어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 방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한 바 있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주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집합적 개념이란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는 단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따로 따로 분리된 개인들의 행위에서부터만 연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연구방법을 채용해야만 한다.

 

- 막스 베버가 그의 친구 리이프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렇게 필 주커먼은 많은 수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종교가 없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왜 그들이 지금처럼 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멀어진 상태에서의 삶은 또 어떠한지 바로 그 심층적인 모습을 인터뷰 대상자들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개인의 특수 사실에서 일반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일종의 귀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필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세속주의 국가'가 된 이유를 찾아낸다. 이유가 모두 일곱개다.

 

 각각을 살펴보면, 그 하나는 게으른 독점이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교가 국교가 되어 있어 그 스스로 확장할 필요를 못 느껴 구태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는 특히 사회에 대해 안전의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번성하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덴마크와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들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캘럼 브라운에 의하면 남성과 아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만든 것은 순전히 여성들 덕분이라고 한다. 즉 전업 주부인 여성들이 주일마다 남편들과 아이들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종교 행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도왔는데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업 여성들이라 그럴 여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적 방어욕구의 결여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적, 종교적 독점이 위협을 받으면 바로 그 종교적 독점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저항의 중심 기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필요를 불러일으켜 왔는데 덴마크와 스웨덴은 단일민족국가라서 굳이 종교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발달이다. 덴마크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작이 무려 1814년이다. 그만큼 교육 수준이 높다. 통계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성이 약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들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한 사회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동안 공립교육에서 특정 종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접할 기회를 많이 상실하는 바람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원래 종교가 유포되었던 역사적 경험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모두 부족장과 왕들이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유로 종교를 유포시켰다. 즉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강제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애초 부터 존재한 이런 경험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질 수 없어 지금의 종교성 약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의 일곱가지 이유는 그러나 단순히 덴마크와 스웨덴의 종교성 약화를 나타내는 이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이유들은 더 나아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이 왜 그렇게 강한 종교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이 그렇게 가장 종교적인 국가가 된 데에는 우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종교가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즉 덴마크와 스웨덴이 위로 부터 '상명하달' 식으로 유포되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와서 건국하게 된 것이므로 민중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확립했다. 바로 그 위로 부터냐 아니면 아래에서 부터냐 때문에 종교성마저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 미국이 처한 사회적 원인들 역시도 한 몫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자 그렇게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원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 성원, 단일 국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종교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가 무엇보다 정체성 확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성원들이 뒤섞여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환경이 정체성 확보의 욕구를 낳았고 그 욕구를 종교를 통해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구조적 요인도 있다. 일단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게으른 독점'이 성립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온갖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후반의 모르텐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또한 한국 교회가 번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 사회가 아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가 바로 종교의 욕구로 나타난다는 건 앞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덴마크와 스웨덴에 상이한 종교성의 차이를 가져와 버린 그 이유들을 살피다 보면 종교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의미마저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필 주커먼은 그래서 이러한 공통된 원인들을 중심으로 비교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나 사회 환경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혀 종교가 자발적 생성이 아니요 외부적 요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래서 종교가 바로 문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즉 필 주커먼은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종교가 가지는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가 반드시 신자들을 위한 깊은 신학적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이 반드시 독실하고 경건하게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최후에 문화적 정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종교가 전통적인 종교다.

 - 한스 라운 이베르센 - (p.252)

 

 

 종교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종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내내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체성 확인의 통로로 문화로서의 종교가 기능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굳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만 내내 확보해 줄 수 있으면 오로지 종교 활동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필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종교'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 261)

 

 

  그런데 이는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렇게 종교에 있어 가장 알맹이는 빠지고 오로지 껍데기인 행위만이 남아 그것이 전부가 된 현상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신앙이 아니라 형식이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종교 행사만 있어도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정체성을 내내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섞이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종교 행위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통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꼭 종교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그 두가지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것 하나가 무색해지는 바람에 결국 남게 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필 주커면은 이성의 발달과 합리화의 진전이 결국은 초월자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그렇게 남게되어 버린 기능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합리화가 가장 진전되었고 또한 미국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그 힘을 잃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보여주는, 모르텐의 말처럼 '광신'에 가까운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남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합리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문화적 종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종교 자체가 문화적 종교이고 그래서 미국과 우리 나라 역시 이 경향에 깊숙히 함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물론 전자 쪽이다. 왜냐하면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유대인과 덴마크인, 스웨덴인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p.276)

 

 내가 문화적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필 주커먼의 이와 같은 말은 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종교란 그같은 정체성 확보를 위한 문화적 수단 밖에는 없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은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곳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 자체의 의미가 희석화되어 버린 곳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종교의 사르갓소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필 주커먼이 말하는 문화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신앙(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종교'는 오로지 행위만이 내재된 신앙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경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식행위의 집착이 바로 문화적 종교를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종교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어떤 장로는 조의금 때문에 교회 장례식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억지로 자기가 있는 교회로 옮겨오게 한 분도 계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선진국 선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프랑스로 선교 활동을 가야할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어왔고 사회적 성숙도도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에 왜 굳이 선교를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천명했다. 하지만 곧 찬성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박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를 가야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즉 프랑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의 수 또한 날로 감소 추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프랑스의 신앙이 죽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렇기에 우리의 선교로 식어버린 이들의 믿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한국 교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교회 출석, 주일 성수, 헌금, 기도와 같은 요식 행위에 집착한다. 아마도 기복 신앙의 '치성'의 개념과 관련되어 더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게 보이는 행위를 통해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든 독일이든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선교를 감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텐은 미국은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회라고도 꼬집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베버는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베버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이 비롯된다고 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마땅히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 특히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도 단지 그들이 응당 치뤄야 될 대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이 인정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교의 역할이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확인을 신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꾸만 대형화되고 화려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정작 실생활에서 종교적 명령을 실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요식 행위는 오로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필 주커만이 말한 '문화적 종교'의 진짜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요식 행위의 집착은 분명 문화적 종교의 현상 중 하나이며 그 가장 부작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마르틴 부버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철학자이자 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를 만나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유한한 '너' 속의 무한한 '너'의 만남과 수용 없이는 '너'를 만나며 받아들일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관계는 계속적으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형되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아래 놓이게 된다.

 

  문화적 종교란 종교가 바로 부버가 말했던 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버가 말하길 '나와 그것'와 관계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존재론적 관심을 잃고 단순히 인식적 관심 그리고 행위적 관심 밖에는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것'은 다만 대상일 뿐이며 그것도 하느님으로 인해 확장되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냥 획일적인 '나'로 항구적으로 있게 하는 도구적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나와 그것'의 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종교는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일지 모르며 덴마크나 스웨덴 처럼 긍정적인 결과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계층간 격차가 자꾸 심해지는 나라들에서 문화적 종교는 훨씬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문제다. 문화적 종교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나라들에서 정체성 확보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 나의 우월함(미국 보다는 단일성의 정도가 강한 우리나라에 국한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드러내는데 더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필 주커먼의 책은 우리(특히 신앙인)에게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 가지게 된다. 즉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종교를 믿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신앙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 내밀한 자기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민들은 언젠가의 내가 했던 고민이거나 누군가로 부터 상담 받던 고민들이기도 하다. 즉 누구나 한번쯤을 떠올려 보았던 그런 고민이나 생각들인 것이다. 그 친숙함 때문에 그들의 고백을 듣는 한 편 그 말에다 바로 나의 모습을 비쳐보게 된다. 즉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혹은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려 하는가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신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윤리적이 될 수 있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여겨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며 삶의 궁극적 의미따위 신경쓰지도 걱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고백들을 보면서 더우기 신을 믿는다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이정도로 허무와 무상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외부에 전혀 기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어떤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을 요청하는 궁극적 이유도 사실은 신 앞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즉 그 인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높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종교마저도 내 우월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에 특히나 더욱 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정작 삶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에서 그 '신'은 그저 '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내 우월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수단화된 타자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너'가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타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사회'란 제목에 포함된 뜻은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끊는 것 부터가 먼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언어와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득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이런 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어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래도 굳이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이웃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예수마저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신을 믿는 신앙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신'이란 단일한 가면 아래에는 내가 포용하고 사랑해야 할 무한의 타자들이 있는 것이다. '신 없는 사회'란 아마도 '신'이라는 그 단일한 가면을 벗어버린 사회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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