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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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몬 시백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서양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예루살렘의 그 탄생에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다. 보통 지명을 중심으로한 역사서에는 붙지 않는 'THE BIOGRAPHY'라는 말을 일부러 제목으로 쓴 것에서 부터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는 지은이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이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타자의 역사를 읽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근대화'라는 19세기에 서양에 의해 주도된 보편화를 이미 겪었고 바로 그 보편의 핵심엔 서양 정신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는데 예루살렘의 역사란 바로 그 기독교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이란 공간은 특정한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지금에 있어서는 하나의 보편으로 자리잡은 공간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리잡은 '보편'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지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지와 그에 뒤이은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우리 내면속에 자리잡게 된, 그리하여 이제는 거의 '아비투스'가 되어버려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버린 '서양 근대'를 마치 산란기가 되면 자신의 고향으로 강을 거슬러 돌아가는 연어들과도 같이 그 근원에서부터 되짚어 보는 여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이 마치 오래된 앨범의 옛 사진을 뒤적이듯 과거만을 회고하는 여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2000년 세계무역 박람회가 테러로 무너졌던 9.11 사태에서 드러나듯이 이 예루살렘이라는 공간 자체가 여전히 지금 세계의 가장 커다란 갈등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대부분 일어나고 있는 테러들에게 그 근원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현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전쟁인 이라크 전쟁만 보아도 예루살렘이 촉발시킨 갈등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가는 쉽게 짐작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더욱 잘 이해함과 동시에 '평화'를 가져오는 사전 정지작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갈등의 물줄기를 근원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주욱 훑어볼 수 있음으로 그 갈등이 진정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게하고 그것이 이리도 커다란 비극을 낳으며 자꾸만 반복되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 만들며 그를 통해 갈등의 연쇄를 끊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해답을 찾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은이 몬티피오리가 856 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역사를 쓴 이유이며( 놀라운 것은 참고문헌 목록만 거의 80여 페이지에 달한다. 참고문헌을 한 번 읽어보면 지은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를 들였는지 저절로 느껴진다. 사실 이 정도로 방대하게 저술한다는 것이 웬만한 열정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이라는 건 쉬이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참고문헌을 통해서 이 책에 대해 저자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했는지 더 크게 깨달았다.) 이를 통해 예루살렘을 늘 우리의 뇌리 속에 생생히 되살려야 할 까닭이다. 

 

  

 예루살렘은 한 때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도시는 아브라함의 종교들이 충돌하는 각축장이자 점차 인기를 얻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및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지이며 문명들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히는 최전선이고, 세속적 매혹의 대상이며 인터넷 시대의 현기증 나는 음모론과 신화 만들기의 대상이자 24시간 뉴스 시대에 전 세계 카메라들의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종교와 정치, 그리고 미디어의 관심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p. 9)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이름이나 한 번 듣는 예루살렘.

  그렇게 누군가에겐 전설 속의 옛 지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순례해야할 성지로만 남아있던 예루살렘. 그렇게 단일한 공간으로만 여겨지던 예루살렘. 하지만 몬티피오리는 처음부터 그러한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깨뜨린다. 그는 단적으로 말한다.

 

 예루살렘은 '전선(FRONT LINE)'이라고...!

 

 그것도 몇 백년이상이나 해묵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직도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며 과장되고 부풀려진 인위적인 거짓들과 허위와 왜곡으로 부터 덜 오염된 사실이 총탄처럼 오고가며 교전을 치뤄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전선인 것이다. 몬티피오리는 그 열기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려 한다. 그 불길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유전처럼 아직도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서들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담고자 하는 열기는 어디까지나 그 공간에 존재하는 이들이 빚어내는 갈등들에서 비롯되는데 바로 그 갈등들을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또한 무신론까지 다 대등하게 존중하여 각 자의 목소리들을 온전히 들려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예루살렘의 역사서는 모두 하나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중심으로 예루살렘 역사를 살펴보는 책들은 기독교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유대교 중심으로 보는 책은 또 유대교라는 하나의 목소리만을 그리고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보는 책은 이슬람교의 목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하지만 몬티피오리의 이 책은 다르다.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에 운집한 가지각색의 아우성들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내가 어떤 재판에 배심원으로 불려와 각 피고인들의 변론을 차례로 듣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모든 목소리를 차례로 들었는데 처음엔 예루살렘을 만들고 다졌던 그리고 한 때 추방되었으나 이제는 피의 살육을 통하여 터줏대감이 되어버린 유대교의 목소리를, 그리고 다음엔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다질 때마다 핍박받고 저항했던 이교도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다음엔 동로마 제국과 함께 건너온 그리스도교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다음엔 그들에게도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십자군 전쟁을 불러일으킨 이슬람교의 목소리를 들었고 제국주의의 확장과 더불어 그들의 손발 역할을 했던 '선교'를 통해 들어왔던 개신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했는데 그건 이 재판에서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지은이 몬티피오리가 그 어느 종교적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가치중립적으로 그들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역사적 정황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배심원들에게 사건의 정황을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 판사에게 요구되는 정말 중요한 자질이라고 미국의 연방대법관을 지냈던 Oliver Wendell Holmes는 말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몬티피오리야 말로 제대로 된 판사가 아닌가 싶다.

 

 예루살렘은 예수로 인해 '평화'의 상징 같은 곳이 되었지만 사실은 내내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지금 이스라엘이 세워지게 된 것 역시도 시온주의자들이 벌인 무시무시한 살육 덕분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또한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반복적으로 잉태하게 하는지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을 위해서일까? 그의 체계적이면서 객관적인 서술은 그러한 사태를 냉정하게 관찰하게 하고 많은 인용들과 평이한 서술은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치 판사가 마지막 평결을 내리듯이 그는 하나의 진실을 대면하게 한다. 우리가 왜 타자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그에 대한 진실을...

 

  어쩌면 뻔한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전혀 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그 수많은 역사적 경험들에서, 비록 상상을 매개로 한 것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마음으로 부터 납득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몬티피오리는 진심으로 납득시킨다. 정말 저 예루살렘을 갈가리 찢어놓는 철조망은 어디에 있느냐고? 그것은 바로 타자를 나만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눈과 머리 속에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은 그 한 문장을 당신 마음에 깊이 새겨두기 위해 '예루살렘의 역사' 전체를 놓고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과 같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랬듯이 배심원으로 호출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당신이 우리 의식에 있어 근원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존재를 제대로 알고 싶고 오늘의 세계를 더욱 잘 이해하길 원한다면 당장 그 호출에 응할것을 정말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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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형사 베르호벤 추리 시리즈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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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세의 나이에 뒤늦게 데뷔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는 정말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이 올 여름의 발견작이다

 

 

 옮긴이의 말을 빼고 장장 528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을 그야말로 열흘 굶은 사람이 밥을 삼키듯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 소설은 정말 두 가지가 매력적이다. 첫째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를 마구 휘몰아쳐가는 팔색조처럼 변화무상한 플롯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지만 이 이야기가 어디로 향해가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불현듯이 전혀 다른 맥락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희생자인가 싶으면 가해자이고 가해지인가 싶으면 또 피해자이다. 때문에 연민을 느끼기가 무섭게 분노를 느끼고 또 분노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타까움에 마구 젖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배설해야 할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속에서 그저 따라잡기에 급급할 뿐이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는 객관화가 가능한 음미의 여유가 있지만 '알렉스'에게는 보여지는 이야기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저 소화시키는 것만 하는데도 벅차다. 우리는 '이 타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여유조차 없다. 그저 만날 뿐이다. 이해불가능한 대상 그대로 대면할 뿐이다. 마치 작품속에서 알렉스와 같이 있자마자 그저 욕정말고는 다른 건 느낄 수 없었던 펠릭스와도 같다. 알렉스란 타자는 날 '이해하겠어? 못 이해하겠어?'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여기서 끝까지 볼거야? 아님, 다른 데로 갈거야?'

 

 

 

 W A R N I N 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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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부터 스포일러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이왕이면 소설을 읽고 아래를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소설이 초반부터 반전이 펼쳐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유출시킬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이 이야기에 동참할 것인가? 아님, 내버려두고 다른 곳을 갈 것인가?

 

 

 '알렉스'의 건너편에서 작가 르메트르는 내게 이렇게 물어온다. 이 말은 내게 이 작품은 그저 재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것은 내게 저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이 예수 이야기를 두고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불트만은 예수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전설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칸트를 빌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하냐고. 예수의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전설이냐가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한다는 데 있다. 윤리적 결단말이다. 즉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본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나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하고 그냥 하던 대로 살 것인가?' 이것이다. 예수가 진정 실존한다면 바로 우리의 결단 위에서이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기억과 인상이 뒤범벅이 된 말이니만큼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의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난 이 책에서 불트만의 목소리를 빌린 르메트르의 말을 들었다.

 

 

 사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공감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바로 이 공감의 여부가 소설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내게 그 두 번째의 매력을 가진다. 즉, 프랑스의 대표적인 형사 '매그레에로 복귀'가 가져다 주는 매력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정말 매그레적이다. 당신이 매그레를 읽어보았다면 이 소설의 결말을 읽을 때 당신 역시 떠올릴 것이다. 도대체 정말 정의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냥 법대로 하는 게 정의로운 것일까? 거기에 대해서 매그레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매그레가 다른 탐정이나 형사들과 구별되는 그 만의 가장 커다란 매력이다. 그는 법보다 사람을 더 중심에 놓는다. 그래서 그 사람에 따라 적용해야 할 법도 적용하지 않고 적용하지 않아야 되는 법도 적용한다. 이 소설의 형사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카미유도 오로지 사람을 위해 적용할 수 없었던 법을 사실은 교묘한 수법을 쓰면서까지 과감히 적용해버린다. 문제는 그 사람이 연쇄 살인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살인마에게 충분히 동정이 갈 만한 사연이 있었고 살인 역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그 전에 펼쳐진 엽기적인 살인 모습은 쉽게 그에게로 마음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카미유는 그러한 행위를 취하는 것이다. 공감한다면 이 결말이 정말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어리둥절한 가운데 페이지를 넘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이 소설이 압도적인 재미와 그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언하지만 이 소설은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카미유 시리즈 첫 권부터 제대로 소개되었도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바로 그 가치란 것이 카미유와 알렉스가 서로 아무리 형사와 연쇄 살인마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실은 동병상련의 관계라는 것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계의 맥락을 헤아리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데 아무래도 그것을 위해서는 첫 권부터 읽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지금의 소설도 어느 정도 풀어놓고 있기는 하다. 카미유와 알렉스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카미유가 결국 알렉스의 삶에 연민을 느끼게 되는 건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카미유는 유명한 여류화가이기도 한 자신의 어머니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지 않으려 든다. 사람들은 그런 카미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145CM의 단구이기도 하다. 그 작은 키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편입되지 못하고 경계 위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그 작은 키가 늘 뇌리에 새겨져 있어 카미유 스스로 경계 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하지만 그런 생활은 자신에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건 무엇보다도 어머니 때문이다.

 

 

 우선 그는 키가 14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의자에 앉기만 하면 두 다리가 지면에서 20센티미터 이상 떠올라 대롱거리게 되는 단구의 사내이다. 이러한 그의 신체 조건은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만 일생을 마친 모친이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댄 데서 비롯된 영양 장애성 발육부진의 결과이다. (P. 532.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렇게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는 일 보다 자신의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카미유는 늘 그림만 그리는 어머니만 보았다. 한 번도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카미유는 자신의 이 고독, 이 홀로 있음이 어린 시절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기울여주지 않았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조차도 자기 일에 빠져 있는데 하물며 그 누가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겠는가!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그녀의 그림을 남김없이 처분함으로써 표현하려 한다.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가정에서 조차 내버려져 있음. 카미유가 알렉스의 삶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 역시 자기처럼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 그래서 카미유는 소문난 민완형사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 소설에서만큼은 무능하게 비쳐진다. 카미유가 싫어하는 예심판사는 대놓고 그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과연 그 자리에 적합한지 의심스럽다라고까지 말한다. 전작과는 다른 그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알렉스와 자기와의 비슷함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카미유와 알렉스 사이의 유사성은 르메트르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알렉스'의 삶을 읽으면서 떠올린 소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다.'

 

 

 

 

 알렉스와 보바리(그리고 카미유)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녀들이 속한 가정 자체가 그녀들을 가두는 새장이요 억죄는 굴레라는 것이다. 보바리와 알렉스는 모두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가정이라는 감옥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 자유로움을 그녀들은 책 읽기를 통해 표현한다. 보바리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토록 많은 책을 읽었듯이 알렉스 역시 정말 많은 책을 읽는다. 하지만 결국 보바리는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로움을 구하기 위해 저질렀던 불륜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그녀를 파멸시켜 버린다. 알렉스 역시 마찬가지다. 보바리의 불륜과 알렉스의 살인은 모두 그 원죄가 되는 대상을 지워버리려는 행위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르메트르는 교묘하게도 알렉스의 살인이 먼저 대상을 유혹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러한 공통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게 보바리의 불륜과 마찬가지였던 알렉스의 살인 역시 결국 그녀 자신을 파괴시키는 결정적인 방아쇠가 된다.

 

 보바리는 말하자면 알렉스와 카미유의 원본과도 같은 존재다. 개인적으로 바로 여기에 르메트르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주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바리를 읽어보면 알게되겠지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히스테리의 여자다. 그는 조금도 현실에 안주할 줄을 모른다. 늘 책을 통해 발견해낸 세상을 자기가 몸소 직접 느껴보고자 한다. 더 넓고 더 높은 곳을 언제나 꿈꾸기에 그녀는 현실에서 늘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런데 이 히스테리는 알렉스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녀는 살인을 하면서도 늘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에 젖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전형적인 사이코 패스는 아니다. 그녀는 늘 외로워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괴로워한다. 술을 마시면 그녀는 발작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린다. 이건 카미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관계를 맺는데 그리 좋지 못하다. 그래서 탐문중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이 필요할 때는 동료 형사가 도맡는다. 그는 악담과 빈정거림 그리고 위협의 명수이다. 그건 일종의 히스테리적 반응이다. 자신의 모친에 대해서 부리는 성질 또한 히스테리의 일종이지 않은가. 보바리와 알렉스 그리고 카미유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히스테리이다.

 

 르메트르는 고의적으로 이 히스테리를 주요한 정서로 부각시킨다.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살인은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히스테리의 징후와 또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르메트르는 히스테리를 가져오는 것인가?

 

 그건 르메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이 히스테리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했었다. 히스테리는 무의식(이 무의식은(특히 라캉에게 있어) 그야말로 '타자' 자체를 의미한다.)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무의식은 도착증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착은 언제나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을 구축하는 태도인 반면에 히스테리는 그것을 전복시키며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히스테리는 굳건한 체제를 아래에서 부터 뒤흔드는 지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규범화된 사회에 지속적인 생채기를 일으키며 정상성이라는 것에 계속 "정말?"이라며 의혹을 제기한다. 히스테리란 현실이라는 것이 교묘한 위장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하며 그렇게 틈집을 내고 헤집어서 속에 감추인 이면을 노출시킨다. 결정적으로 히스테리는 지속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를 가능케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르메트르는 소설 '알렉스'에게 '마담 보바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히스테리를 전면적으로 가져온 것이다. 카미유와 알렉스에게 고통만을 안겼던 지배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의 표본과 같은 '가정'을 뒤흔들기 위해. 바로 그 '가정'이 카미유의 엄마가 그랬고, 알렉스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 처럼 도착증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밝혀 결국 타자를 돌아보지 않음이 이 모든 비극을 가져온 이유임을 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듯 카미유는 정상적인 사회의 견지에서 보자면 예외적인 방법으로 최종 해결을 가져온다. 그러고보면 알렉스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도 절대적 타자를 소설 속으로 가져오려는 르메트르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알렉스는 엔터테인먼트로도 더없이 훌륭하지만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마담 보바리'가 근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을 가져왔듯이 '알렉스'는 지금 현대라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탈주의 선들을 가져온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더없는 패권적 지위를 누리며 지금까지 군림해온 자본주의가 침몰하는 타이타닉 처럼 좌초되고 있는 요즘 자본주의가 가장 당연시 여겼던 것들에게 차례로 히스테리적 경련을 선사하여 굳건한 포장을 허물고 그 이면의 속내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알렉스'는 보다 징후적이다. 2011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유로 위기가 극심해지고 여기저기서 이민자들의 폭동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일어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알렉스'의 살인은 어쩌면 그 과정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짜 동기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헤르만 코흐의 '디너'도 그렇고 피에르 르메트르의 '알렉스'도 그렇고 '흔들기'가 시작되고 있다. 네델란드와 프랑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출간된 소설들이 나란히 흔들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 소설들이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그토록 많은 대중들의 호응이 그들의 무의식적 바람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들은 어쩌면 이후로 터져나오게 될 거대한 흐름의 첫 표출인 것은 아닐까? 어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첫 태동과도 같은 작품은 아닐까? 내게는 이게 보다 더 흥미롭게 보인다. 결국 롤링 스톤즈의 노래 가사처럼 시간이 가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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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과 표지에 나오는 가재 다리 때문에 얼른 보기엔 요리가 주가 되는 소설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정찬의 음미 보다는 내면의 여정에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소설 자체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렇게 독자는 그 화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을 회상하며 그의 판단을 매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그 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간 존 쿠색과도 같다. 아니, 작가 헤르만 코흐는 정확히 당신이 바로 그 존 쿠색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 소설에서 독자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풍경을 마음껏 음미하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디너'란 제목이 붙은 진짜 이유이다. 즉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모여 식사하는 '디너'가 아니라 소설이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마치 풀 코스의 정찬처럼 맛볼 수 있기에 '디너'인 것이다.

 

 식사란 독서와 같다.

 포크와 나이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요리란 이를테면 책과 같은 텍스트이다. 식당에서 주인공과 같이 식사를 하는 주인공의 형이자 네델란드의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 세르게는 그 자리에서 자주 요리나 와인에 대한 얘기를 즐겨 하는데 바로 이 장면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요리라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의 전반부는 많은 텍스트들로 채워진다. 바로 뒤이어 세르게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얘기하고 주인공은 이미 본 그 영화에 대해 형이 가진 속물적 취향과 자신의 고상한 취향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박할 거리를 찾는다. 즉 형이 가진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음미하고 그에 따라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행위는 그가 프랑스의 별장에서 세르게 부부와 같이 보내면서 그들 부부가 가진 프랑스의 무분별한 추종을 그가 직접 본 것들을 텍스트화 시켜 그것들을 토대 삼아 해석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코흐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주어지기 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요리도 텍스트가 되고 한 개인의 내면 또한 텍스트가 된다.

 

 

  이 소설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헤르만 코흐는 '디너'라는 소설이 가진 이야기를 음미시키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가 정말 주의깊게 조리하고 제대로 맛보게 하려는 것은 주인공 '파울'의 내면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도 같이 주인공의 내면을 어느 것 하나 빼거나 덜어내지 않고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세세하게 보여준다. 말 그대로 제대로 음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음미란 따지고 보면 '객관화'의 과정이다. '맛'이 감각이라면 그 맛을 분석하고 나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음미의 과정이다.

 

 즉 코흐가 이 소설에서 우리들에게 진짜로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파울의 내면을 객관화하고 '맛이 어떻다.'라고 말하듯 스스로 평가내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현명한 요리사가 먹는 이가 어떤 맛을 느꼈든 상관하지 않듯이 그 역시 우리들이 거기서 어떤 정답을 구했든 괘념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사유를 촉발시킬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쟁반 위에 놓여진 요리가 그러하듯이. 코흐는 그렇게 스스로 설정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 파울의 내면만은 정말 마치 정말 먹는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자, 그럼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왜, 코흐는 굳이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것인가?

 아니,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하나...

 

 아무튼, 이 '디너'란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코흐의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소설이 쓰여진 당시의 네델란드의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도표를 가져와 본다.

 

 

  이 그래프는 2003년 현재 네델란드 청소년들의 폭력 범죄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소설 '디너'에서 주인공 형제가 만나게 된 진짜 이유도 이와 같은 자기 자녀들의 폭력 범죄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의 자녀들은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으러 갔다가 실내에 가로누운 노숙자에게 한 마디 욕을 듣게되자 구타를 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들이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그 곳에 있던 CCTV에 찍혀 전국적으로 방송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촬영 각도상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알기란 불가능 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후대책을 의논하고자 소원하던 형제가 다시 만나 '디너'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프에서 보듯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이유없는 범죄는 그저 픽션만은 아니었다. 90년대 초 부터 꾸준히 증가한 청소년 폭력 범죄에 있어 흔히 벌어지고 있던 범죄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이 소설의 범죄는 현실 사회의 반영인데 '디너'란 소설은 2009년에 발간되었다. 왜 굳이 코흐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 주목할만한 네델란드 발 보도가 하나 눈에 띈다. 2009년 한 범죄연구율 학자가 여기에 대해 의미심장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분석해보니 그 중 3분의 2가 바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청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외국인 혐오증에 기름을 부운 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연구결과는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만 해왔던 것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델란드 국민들은 이민자 자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아왔고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결국 코흐로 하여금 이 '디너'란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읽어보면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이 소설은 기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분명 위쪽을 걸어갔는데도 결국 다다르는 곳은 아래쪽인 것이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이 전복적으로 뒤바뀌는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충실히 담아내는 것은 주인공의 내면이므로 여기서 전복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주인공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바뀐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시 말해 초반에 그리도 합리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나중에 가면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비합리주의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코흐의 능수능란함이 작열하는 땡볕처럼 눈부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에 놓여있는 이면의 진실을 목도하게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란 그저 주인공 개인만의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의 내면을 근본부터 구축하고 있는 서양 정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바로 '디너' 맨 앞 부분에 인용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코흐는 하필이면 자기는 팁 같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팁을 주지 않겠다는 대사를 인용한다. 왜 하필이면 이 대사일까? '팁'이라는 것은 서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일종의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그런 규범말이다. 사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려는 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팁'이라는 것은 서양 문명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그러니까 '팁'이라는 것이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으례히 행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코흐는 일부러 인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아마도' 이지만 분명 코흐는 이 말을 인용할 때 어떤 학자의 이론을 떠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때문에 일부러 '디너', 즉 '정찬'이라는 '팁'처럼 '예법'이란 이름으로 규격화된 규범의 지배를 받는 형식을 구태여 가져왔을 것이다. 코흐는 초반에 지배인과 웨이터들의 규격화된 서비스 모습들을 세밀히 묘사하는데 이 또한 '디너'를 이루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디너'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문명의 소산임을 알리는 것이다.

 

 코흐는 그렇게 문명, 또 문명을 가져온다. 그럴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학자는 노베르트 엘리아스이다. 엘리아스는 서양 문명이 인위적인 발명품임을 증명하여 유명해진 역사학자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문명화과정'이다. 제목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자리잡은 지배적 서양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책인데 그는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차별'을 위해서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 레스토랑에서 지켜야 할 그 많은 식사 규범들, 그렇게 '디너'를 형성하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은 모두 왕이 귀족을, 귀족이 평민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전략적 결실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식사 예법이 너무도 복잡한 것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어이없어 한다. 그저 입에 넣으면 되는 것을 뭐 그리 복잡하게 절차를 따지냐고! 그런데 그래야 했었다. 규칙이 복잡해져야 했었다. 그래야 먹고 사는데 바쁘고 지친 평민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흔히 '에티켓'이라 말하는 그 복잡한 예절 규칙들은 모두 구별짓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감히 귀족이 왕고 맞먹으려고!',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과 맞먹으려고!' 이런 생각 끝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엘리아스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문명이란 타자를 배제하는데서 탄생했다고.  그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명은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그 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에 인위적 진리를 부여하여 단지 지키고 못 지키느냐만 가지고 단죄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게 하였다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특권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이 그것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보이는 외양만이 전부이고 그 안데 깃든 보이지 않는 내면은 가치없어 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날로 극심해지고 가진 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더욱 깊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므로 또한 보이는 것의 진실은 오로지 보는 자만이 판단하는 것이므로 배제된 자, 차별받는 자들의 저항과 호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코흐는 놀랍게도 주인공 내면에 이 서양 문명이 가진 특성들을 그대로 버무려 넣는다. 마치 서양 문명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앞에서 말한 세르게를 더없이 경멸하게 되었던 프랑스 체류 경험도 사실 알고 보면 오로지 그의 시각에 기초한 판단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 시각이야말로 사실을 전혀 보증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인 편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코흐는 이런 식으로 서양 문명이 가진 근본적 문제를 주인공의 내면을 통하여 드러낸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코흐가 초대한 이 '디너'에 참여하여 음미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서양 문명' 자체라고 할 수있다.

 

 물론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뿌리 깊이 주관화 시켜버린 '서양 문명'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것은 2009년 범죄율 조사 보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증을 온전히 합리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덮어놓고 범죄의 3분의 2가 이민자 가정 출신 청소년이 저질렀다고 말하는 그 이면에 바로 오로지 차별과 배제 위에 형성되었던 그 서양 문명이 가진 '나 밖에 없다' '나만 괜찮으면 만사 OK!'라는 오만과 이기심은 없는지 스스로 돌이켜 헤아려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소설에서 바로 입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서 이민자를 대표하는 존재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배제되어 버린다.

 

  소설 자체로도 '디너'는 정말 재미있고 사실 주인공의 개인적 의견도 흥미로운 것이 많다. 이야기를 자유자대로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는 코흐의 눈부신 필력 덕분에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디너'는 보여지는 것들 너머 더 많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그 사유의 촉발을 위해 나타난 작품이다. 보다 정확히는 근자에 범람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그것을 서양 문명이라는 가장 근본으로 부터 따져보려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걸 전혀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음미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더욱 놀랍게 한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 식당'에서 느낀 것이지만 정말 좋은 요리사란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도 마음을 울릴만한 깊은 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디너'를 읽고난 지금 헤르만 코흐야 말로 그런 요리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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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마치 이 리뷰는 전문 평론가 내지는 전문 작가가 쓴 글과 비슷한 수준이 아닙니까!
역시, 아무리 늦어도 마감 일은 칼같이 지키시는 군요.
성실함에 심심한 박수 쳐드립니다~ 짝짝 ㅋㅋㅋ
 
다시금 새로이 한 발을 내딛는 미나토 가나에!

 

 

 

 

 

 

 이번에 나온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왕복서간'에서 받게 될 느낌은 아마도 낯설음일 것이다.

 

 그렇게 분명 이 작품엔 어떤 이질감, 뭔가 이전에 나온 가나에의 작품과 다른 것이 느껴진다. 물론 그 이질감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이 소설이 모두 편지글의 형태로 되어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나에의 소설은 1인칭 시점이었다. 한 마디로 독백의 소설이었다. 물론 편지도 독백이긴 하다. 하지만 편지엔 확실한 수신자가 있다. 편지의 모든 말은 그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상태에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다소 시간적 지연은 있지만 응답을 기다리는 대화를 위한 발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가나에의 독백들은 사실 그런 응답을 기다리는 소설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백을 말하는 자가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소설의 과정은 사실 독백을 하는 주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맞추어보는 검증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왕복서간'은 그게 아닌 것이다. '왕복서간'에서 편지를 보내는, 그래서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정한 해답은 모두 듣는 상대에게 있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이제 그 타자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게 '왕복서간'과 그 이전의 작품들이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차이점이다. 즉 '고백'과 '속죄'가 오로지 말하는 '입'만 존재하는 소설들이라면 '왕복서간'은 들으려는 두 '귀'가 주가되는 소설이다.  나는 여기서 '왕복서간' 바로 전에 나온 '야행관람차'를 빠뜨리고 있는데 그것은 '야행관람차'가 정확히 그 중간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야행관람차'는 '왕복서간'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기 위해 지나야만 했었던 일종의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가나에의 모든 작품들을 마치 실에 진주를 꿰듯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놓을 수 있다는 의미고 그렇게 보았을 때 '왕복서간'은 그 최종 종착점이라 할 만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붙게 되는 라벨(lable)은 무엇인가? 그것은 '고백'과 '왕복서간'이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부각시키면 절로 드러날 것인데 일단 '고백'의 성격을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그건 '트라우마'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가나에는 초기작에서 부터 내내 과거의 해묵은 상처를 바탕에 놓고 작품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모든 독백들은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다름아닌데 그러므로 그 상처는 내내 현실을 불안하게 만들면서 간직한 자에게 치유를 강요하는 그렇게 트라우마인 것이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에 대해 프로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외상성 신경증에서 일어나는 꿈은 환자를 사건의 현장, 즉 또 다른 경악 속에서 그를 잠에서 깨우는 그 현장 속으로 반복적으로 데리고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p. 277)

 

 말하자면 트라우마는 늘 상처의 현재를 반복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독백의 주체들은 조금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프로이드는 인용한 문장 아래에 이런 말도 덧붙인다. '그들은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있다.'라고...

 

그들에겐 미래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말'하는 입 밖에 없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미래라는 시간이야 말로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타자란 나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타자가 진정한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든 근본적으로 '나'라는 동일자로 동화되어서는 안되기에 동일자의 완전한 바깥, 그 절대적 바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죽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고 바로 그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불가해한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유한성을 뛰어넘는 무한의 시간이 도래하는 존재이기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동화불가능성이 타자의 무한성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확히 바로 그 의미에서 타자는 바로 미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미래가 가진 예측 불가능성이 그대로 타자의 동화불가능성과 연결되고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 시간 또한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자와 시간의 연결성은 들뢰즈 역시도 같다. 들뢰즈는 그것을 오스 야스지로나 후 샤오시엔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뜬금없이 삽입되는 명상적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즉 영화의 맥락과 아무 상관없이 제시되는 그 장면들은 더구나 아무런 움직임 역시 없기에 마치 격리된 정물화와 같다. 모든 의미와 운동성이 상실된 그 장면에서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화면에 지속되고 있는 '시간' 뿐이다. 들뢰즈는 그 순수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가장 잘 체험할 수 있는 매개물을 '영화'로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두터운 두 권의 시네마론까지 쓴 것이다. 한 편 그 순수 지속의 시간 앞에서 관객들은 헤메이게 된다. 왜 느닷없이 이 장면이 주어졌는지 그 해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이른바 '간극'의 창출이며 거기서의 '망설임'이 순수 시간이 관객에게 주는 주된 효과다. 망설임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 내부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눈 앞에 제시된 화면, 자신의 이해가능성 너머의 영역에 위치한 '타자'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 무엇인가 해답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속에서의 애타는 귀기울임. 내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는 전적인 '나의 맡김'. 그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즉 이렇게 들뢰즈는 '순수 시간(pure time)'이야말로 타자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은 타자와 더불어 할 때 움직이는 것이란 걸...

 

 

 

 

 

 

 

 

 

 

 

 

 

 

 

 

  이런 의미에서 트라우마에 고착된 독백의 존재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그대로 그들의 눈에 타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소설에 나오는 모든 독백의 주체들은 타인들이 자신의 말에 어떤 영향을 받을지(보통 그 영향은 상처, 고통등이 될 것이다. 쏟아내는 고백들이 다 원한에서 비롯된 어두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타자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도구의 의미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독백의 주체들은 거침없이 타자를 문자그대로 파괴한다. 자신이 가진 해답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타인이 가지는 해답은 고려하지도 않고 신화속에 나오는 프로크라스테스의 침대 처럼 자신의 해답에 철저하게 타인을 맞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백'은 그런 소설이었다.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귀는 없이 입만 존재하는 고백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트라우마를 안겼던 존재 자체를 스스로 스위치를 눌러 폭발시켜 버리는 와타나베는 그야말로 '고백'이 가진 진짜 의미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는 그것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치유해봤자 행복해지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소설은 그냥 고백으로 끝난다. 문득 독자에게 무한의 허공을 열어보이며...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 여교사는 복수로 인해 치유되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더 괴로운지 알려주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여교사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를 가진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영화 '메멘토'가 그 좋은 예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단기 기억 상실증에 시달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는 바로 전에 보았던 사람도 일어난 일도 곧잘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그의 몸은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새긴 문신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그는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추적한다. 단기 기억 상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살인범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를 제거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사실은 진짜 범인이 놀랍게도 바로 그 자신이었으며 그는 자기가 아내를 죽였다는 진실을 잊기 위해(말하자면 그에게는 그가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을 범죄자라 이름 붙이고 희생함으로써 그렇게 상상적이면서 일시적인 치유를 반복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트라우마에 고착된 이들의 치유가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식으론 영원히 치유할 수 없으며 그저 제2. 제3의 희생양을 만들어서 때때로 맞는 모르핀 처럼 잠시 잊게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고백'의 여교사도 분명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와타나베를 보내버린 그녀의 두 눈은 이미 다른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가나에에게 머무를 수 없는 장소였다. 그 고착이 가져올 영겁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했다.

 

 바로 그래서 그녀는 '야행관람차'를 타게 된 것이다. 유원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행관람차는 가나에에게 있어 세상의 비유였고 타자에게로 눈을 돌리기 위한 매개물이었다. 소설은 정말 '야행관람차'처럼 전개된다. 야행관람차 각 칸에 올라탄 사람들이 바깥을 구경하듯 소설이 여러 등장인물들을 옮겨다니며 그들 각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던 중 아주 이상적인 모습의 가정으로써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가족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관람차에 갇힌 존재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창으로 밖에는 볼 수 없기에 때로는 상처를 입히거나 입고 불안에 떨게 하거나 떨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들 분명한 진실을 알 수 없기에 고통에 빠진다. 답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대답을 위해 미나토 가나에는 야행관람차를 가져 온 것이다. 빙글빙들 도는 야행관람차를. 그래서 위에도 있을 수 있고 왼쪽 오른쪽에서 있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도 있을 수 있는 야행관람차를. 그렇게 고정된 위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때문에 고착이란 게 불가능한 야행관람차를 가져온 것이다. 즉 그 야행관람차는 타인이 바라보았던 시선을 나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소통의 매개물인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주체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가나에는 바로 그러한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이동으로 인해 결국 살인으로 엄습한 고통들마저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가나에는 '고백'의 '나 홀로 독백의 주체'가 껴 안을 수 밖에 없는 영겁의 저주를 야행관람차식 시점의 옮김(지젝이 말한 '시차'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을 통하여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가나에는 타자를 슬며시 가져온다. 이것이 중간 단계인 이유는 그 타자의 대답을 요청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현재적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트라우마가 아니고 트라우마로 진행되던 과정에 있었다.(그래서 형식 마저 느슨한 형태의 1인칭 시점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치유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고착되지 않은 트라우마였기 때문에. '고백'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그렇게 고착된 트라우마였다. 과연 그것도 이러한 타자들에게 맡김으로 치유될 수 있을까?     

 

 '왕복서간'은 바로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모두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모두는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즉 '고백'과 같은 완성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편지들은 모두 그 트라우마를 언급하며 그것의 실체를 알기 위해 묻고 대답한다. 추궁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고백'과 유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은 아예 정반대다. '고백'의 추궁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을 남으로 하여금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여기에서의 추궁은 근본적으로 '치유'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스포일러상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왕복서간'에서 이렇게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야행관람차'에서 적극적으로 타인을 포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타자를 끌어들임이 상처를 일으킨 현재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정지의 사슬을 끊고 시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가 돌아가듯이 말이다.(가나에는 어쩌면 시계의 비유로도 이것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드디어 미래가 도래했다. 아마도 그래서 가나에는 '왕복서간'에서 편지라는 형식을 취했는지도 모른다. 편지란 다름아닌 미래로 향한 발화이기 때문이다. 즉 편지를 쓴 사람이 기다리는 대답은 언제나 미래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그렇게 타자가 도래한다. 타자를 미래로 보았던 레비나스의 말 그대로 말이다.

 

 '왕복서간'이 시퍼런 날 선 언어들로 가득했던 '고백'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밀어들로 가득하다고 느꼈다면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었다. 가나에가 트라우마의 치유를 더 이상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들으려는 귀'를 통해 함으로써 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그럼으로써 붙들려있었던 시간마저 미래로 진행시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나에의 작품들이 보여준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자기만의 상처에 골몰하기를 멈추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궁극의 치유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이었다.

 

 '왕복서간'은 이러한 가나에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가 다다른 종착역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다음에 이어질 여정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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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7-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백>을 읽고나서 하도 충격과 뒤끝이 심해서
<야행관람차>를 구매하고도 차마 펼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메멘토>를 한번은 열심히 봤으나 두번 다시 볼 생각이 들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거죠. 그런데,

<야행관람차>와 <왕복서간>을 통해서 포용이라는 개념으로 들어섰다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근시일내에, 야행관람차를 먼저 읽어야겠어요. ^^

ICE-9 2012-07-21 00:02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야행관람차'를 읽지 못하다가 '왕복서간'과 '고백'의 차이가 너무 두드려져서 도대체 이 변화가 어떻게 된 것인가 알고 싶어서 집어들게 되어는데요. 그래서 왕복서간으로 가는 어떤 흐름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하네요.^ ^ 그런데 너무 뒤늦은 답글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은 정말 시간이 안 나네요 ㅠ ㅠ

이진 2012-07-19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어디로 사라지신거예요 ㅠㅠㅠ
무려 열흘이라니, 이러다가 2주 채우시는 거 아닙니까?ㅎㅎ
내일이 신간평가단 리뷰 마감일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헤르메스님은 평가단장인데...(막 이래서라도 보고싶은 마음.ㅋㅋㅋ)

ICE-9 2012-07-21 00:03   좋아요 0 | URL
흑흑... 소이진님 ㅠ ㅠ
정말 너무 바빴어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오늘 리뷰 기한이라 어떻게든 다 읽고 쓰긴 했는데
때문에 몸은 이미 초주검 상태입니다. ㅠ ㅠ
소이진님은 이제 곧 방학이겠네요...
우왕~ 너무 배아파서 한달간 잠수타고 싶어요^ ^;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벌써 6월의 신간 추천이 도래했군요.

  신간평가단을 해서 그런가 요즘 저의 시간 감각은 추천과 리뷰 마감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7월에 벗하고 싶은 신간들을 골라봅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번의 강력 추천은 바로 이 작품입니다.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브로흐의 가장 대표작이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적이 없었던 작품이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중 하나로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네요.

 

 유럽 모더니즘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 작품은 '아이네이스'의 저자이자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유령으로도 나왔었던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24시간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스 여행 도중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베르길리우스는 돌연 자신에게 삶이 정말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감하고 이제 막 완성한 자신의 대표작인 '아이네이스'를 불태우려 합니다. 그러자 그 작품의 위대함을 알고 있는 동료 시인들이 그것을 제지하려 하고 황제 또한 로마의 정체성 자체가 담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서는 안된다고 설득합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베르길리우스의 마지막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이러한 논쟁들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논쟁의 주제 또한 다양해서 예술, 종교, 국가, 전체주의 등 거의 인간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사실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태워버리려 했듯이 브로흐 자신도 창작의 고통이 너무 커서 이 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작품 속의 베르길리우스는 그대로 브로흐의 페르소나인 것이며 무대는 비록 과거의 로마이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논쟁들은 사실 현대 문명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죠.

 

  독일 작가 브로흐는 나치에게 자유주의 작가로 찍혀 1938년, 그의 나이 52세 때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구체적 물증이 없었기에 풀려났는데 그 때문에 그는 바로 토마스 만과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의지할 데 하나 없는 미국에서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 써내려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많은 논쟁들이 나오듯이 문체 또한 고정적이지 않고 마치 물이 흐르듯이 유동적인데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브로흐 역시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원래 브로흐의 작품들이 아주 독창적이지만 이것은 그 정수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경이로움인데 말로만 전해듣던 그 전설을 이 기회에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베르길리우스의 죽음은 미국에 있는 동안 쓰여졌기 때문에 미국판이 독일어판 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옆에 있는 사진이 1944년에 미국에서 나온 초판본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온 판본이 되겠군요. 그래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1,700달러에 거래되고 있더군요.

 이런 ㅠ ㅠ...

 

 

 

 

 

 

 

 

  렌조 미키히코를 좋아하시나요?

  네, 회귀천 정사, 저녁싸리 정사의 그 렌조입니다.

  개인적으론 참 특이한 작가였습니다.

 

  회귀천 정사나 저녁싸리 정사를 읽으면

  마치 옛날 유행했다던 순애보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로에 대한 순수하고도 자상한 마음에

  오이 피클 처럼 푹 절여있다보면

 렌조란 작가는 참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왠 걸 그 순간 그는 솜씨좋은 외과의 처럼 매스를

 들고 그 이면을 파헤쳐 보여 주죠.

 

 

  "헤~ 과연 네가 보고 있던 것이 진실일까?"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을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렌조 미키히코 입니다.

  별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도 그의 매스가 한 번 가해지면 기이한 일탈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고 한없이 아름다운 순애보 역시도 증오와 복수라는 감정 위에 세워진 치밀한 계산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술사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모자에서 토끼가 불쑥 튀어나오게 하는 마술사 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환영이고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실체임을 놀라움 가운데 가져오는 작가인 것이죠.

 

  '조화의 꿀'은 유괴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괴'란 실체를 탈취하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그 실체를 전유하는 테마 위에서 렌조는 또 어떻게 실체를 환영으로 만들고 그 이면에 배여있는 진실을 펼쳐보일까요? '조화(造花)'에서 꿀이 나오도록 만드는 그의 마술이 진정 보고싶군요.

 

 

 

 

 

 

  이미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자유'가 발간되었습니다만 사실 조너선 프랜즌의 대표작은 바로 이 '인생수정'이 아닐까 합니다.   조너선 프랜즌은 '로컬리티(locality)'의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보편 보다는 특수를 지향하는 작가죠. 이를테면 그는 일반이라는 틀에서 한 개인이나 가정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개인과 가정을 통해서 보편을 담는 작가입니다. 그렇게 그는 찰스 테일러의 서사적 주체(즉 주체란 다름아닌 특수한 집단, 지역의 소속감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의 입장과 유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처해 있는 특수한 장소, 상황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의식이란 그렇게 보편 보다는 언제나 특수한 맥락을 따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로컬리티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중요한 것으로 다룹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도 사실 이런 입장에서 정의로움을 고려하지요. 이렇게 지금에 와서 로컬리티가 중요해진 이유는 한 마디로 리오타르가 말하듯 거대 서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보편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에 그 보편이 장악하지 못했던 특수한 상황, 지역, 정체성들에 집중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금 '보편'을 사유하는 것이죠. 프랜즌은 바로 그러한 작가입니다. 그가 그려내는 가족의 이야기란 하나의 특수적 상황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는 오히려 시대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죠. '인생수정'은 그런 로컬리티적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 그래서 저역시 꼭 벗해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우울과 몽상'의 번역에 실망해서 사실 포의 작품에 대한 새로운 번역을 기다려온 저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반갑기 그지 없군요. 포의 대표 단편 16개가 실려있는 이 작품은 새로운 번역이기 때문도 하지만 무엇보다 편집한 사람이 마이클 코넬리라는 점. 그리고 각 단편마다  유명 스릴러 작가들이 짤막한 감상평이 덤으로 실려있다는 점 때문에 골랐습니다. 서점에서 보니 실물의 외관도 상당히 근사하더군요. 이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

 

 

 

 

 

 

 

 

 가나에의 작품은 모두 저의 관심대상입니다.

 '왕복서간'에서 보여준 그녀의 변화가 흥미로웠는데

 'N을 위하여'는 과연 어디로 나아갔는지 궁금하군요.

 

 

 

 

 

 

 

 

 

 

 

 

 편혜영 작가를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한국 문학쪽 경험은 별로 없어서

 많은 분들이 언급하시길래

 조금은 공부를 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려

 골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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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___________^
이번 소설은 재밌어보이는 게 참 많던데 말이어요.
편혜영의 소설이 가장 눈에 들어오고, 미나토가나에의 소설도 재밌어 보이고.
엊그제 타 인터넷 서점에서 재미삼아 신청한 신간평가에 당첨되었어요.
호스피스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집인데 받고보니 놀랍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어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좀 더 성실해질걸ㅋㅋ 셤 끝나고 일단 리뷰 하나 써야겠어요.
셤 기간에 주말이 끼어서 그런지 시험 안 같아요.
낮에 한두시간 낮잠을 잤더니 잠도 안와서 티비보고 있네요. 문제집 훑어보는것도 못할 망정...

ICE-9 2012-07-08 23:45   좋아요 0 | URL
오! 축하해요^ ^
원래 바로 시험을 앞두고 있으면 딴짓 많이 하게 되잖아요^ ^ 저 같은 경우도 시험 공부 하다가도 괜히 방청소 하게 되고 책 정리하게 되고 마구 그러던걸요. 사람 심리라는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벼락치기가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이진님은 모두가 부러워마지 않는 방학이 이제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아도 될 듯 싶어요. 방학이 없는 저로서는 정말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에요 ㅠ ㅠ 좋은 한국 소설들 볼 때마다 소이진님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많이 하는데(전 이쪽은 정말 젬병이라서^ ^;) 언젠가는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눌 때가 오겠지요. 그럼 남은 시험도 잘 치르시길^ ^

이진 2012-07-09 14:41   좋아요 0 | URL
에에, 방학이 방학이 아닌 걸요. 올해부터 학교도 주 5일제 들어갔잖아요. 방학이 확 줄어버렸어요. 보충학습 일수는 더 늘어났구요. 방학이 한 달도 안되는 4주인데, 보충학습이 3주랍디다. 아아... 저는 보충 듣다가 서울로 도피해버릴겁니다. 그걸 위안 삼아서 지내야지요. 저도 한국 소설에 강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한국 문학에 심취한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새내기예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작가와, 그 대표작 몇개만 나열할 수 있을 뿐이지 좋아하는 작가도 적구요. 그래도... 신간평가단은 하고싶다. ㅋㅋㅋ 시험 잘 칠게요. 개인적으로 국어와 사회가 주종목인데 사회를 망쳐서 지금 기분이 영 안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