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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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내 인생 최초의 선생님. 최초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가장 마지막으로 집에 가는 아이였다. 집에 가도 맞아주는 이가 없었고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것을 싫어했기에 되도록 학교에 남아 있으려 한 까닭이다. 텅 빈 스탠드의 계단을 위 아래로 뛰어 오르내리다 저물어가는 태양에 나무들의 그림자가 운동장 위로 제법 길어지면 책가방을 다시 둘러매고 집에 오고는 했다. 태양을 눈 뜨고 오래 바라보는 버릇도 그 때 생겼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깨친 것은 한글이 아니라 무료함과 외로움이었다. 나는 언제나 눈이 반쯤 내려가 있고 윗입술이 아래입술을 살짝 덮은 뚱한 표정으로 있었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창 밖에 보이는 나뭇가지에 새가 날아와 앉기를 기다렸다. 혼자였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누구도 날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던 날 내내 누군가 보고 있었음을.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날 부르셨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교실에서 얼쩡거리던 나를 발견하고 부르신 것이었다. 선생님과 그렇게 가까이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는 지라 난 조금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 손바닥 위에 미소와 더불어 올려주신 박하사탕 하나. 작고 하얀 조약돌 같기만 했던 그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입 안 가득 알싸하게 퍼지는 감각에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물으셨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그림이라 대답했다. 그림이 좋았다. 쉽게 그리고 혼자서도 아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으니까. 그래,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좀 더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로봇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늘 만화처럼 똑같이 로봇을 그리지 못하는 게 싫었다. 마당에 묶인 강아지도, 부엌에서 졸기만 하는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잘 그리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남아서 선생님이랑 같이 그림 배워보지 않을래 하셨다. 선생님은 뭐든 다 잘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선생님에게 배우면 잘 그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방과 후의 나란 너무 심심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선생님에게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매일을. 여름방학 동안에도.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대부분은 선생님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주면 그걸 내 마음껏 그림으로 표현하고 다 그리면 대화하는 식이었다. 사실 별 거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저 혹시나 사고라도 당할까봐 그림을 핑계로 보호해주신 것일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지만. 


 나중에 내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내 눈은 어느새 온전히 떠 있었고 윗입술도 더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창 밖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보고 있는 내가 되었다. 아주 뒤늦게 뜻밖의 사건 때문에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내가 배운 건 그림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 날 지켜봐주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무엇보다 꾸준한 지속이며 삶은 누군가 함께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배웠다는 것을.


 그런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많은 시간이 지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계기로써.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들었다. 선생님이 누군가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게 보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과 직업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황망한 마음에 얼른 내려 동창들에게 전화했다. 확인은 이틀이 지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더이상 이 지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졸업 후, 한 번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수화기를 놓기도 전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내가 경험한 최초의 죽음이 선생님이라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살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부모님은 몸의 첫 숨을 주었지만 영혼의 첫 숨을 준 것은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주고가셨다. 삶도, 죽음도.


 그 후로 스승이란 말을 들으면 참 아련하다. 진한 그리움도 애잔한 슬픔도 함께 배여든다. 누군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는 것만 같다. 곧 누군가 저녁밥 먹으라고 따스하게 불러줄 것 같기도 하고 내내 그대로 어둠에 사위워가는 놀이터를 볼 것만 같기도 하다. 복잡한 심정이다. 하지만 묻어나는 따스함이 더 크다. 언젠가 꼭 누군가 와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놓아버리려는 삶의 그네줄을 두 손 모두 힘있게 부여잡도록 한다. 지켜봐주었던 기억이, 사랑받았던 기억이 버티게 하는 것이다. 어둠속에 홀로라도.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 정약용과 평생을 두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던 제자 황상의 이야기다. 다산의 강진 유배로부터 시작되어 황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 사제지간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담긴 세월이 길기에 깃든 이야기가 제법 된다. 그만큼 긴 시간을 벗한다. 거기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 받은 서간문까지 인용되어 있어 그들의 인연을 더욱 가까이서 음미하게 되었다. 적나라한 모습이랄까. 실감나게 가득 느낄 수 있는 인연이었다. 잘 삐치고 남의 눈이 무서워 유배지에서 맺었던 가족의 인연을 저버리기도 했던 다산이었지만 그래도 제자를 아끼는 마음만은 가득했던 스승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그만 물들었던 것 같다. 물기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제목처럼 좋은 스승과의 만남은 삶을 바꾼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점점 사제지간이 길연이 아니라 무연 혹은 악연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오래 생각하게 된다. 짙은 그리움을 부르는 좋은 사제의 인연이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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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7-2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선생님 좋은 분이군요 아이를 잘 보는 분이었군요 그렇게 가시다니, 어쩌다가... 누구나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헤르메스 님은 기억할 선생님이 있어서 좋겠습니다 지금도 스승과 제자로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 있을 거예요 안 좋은 게 더 알려져서 그렇지...


희선

ICE-9 2014-07-23 13:59   좋아요 0 | URL
제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죠. 그렇게 좋으신 분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가실 수 있다니... 절망과 부정의 먹구름에 참 오래도록 휩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좋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가치있는 삶이란 타인들에게 얼마나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느냐인 것 같아요. 분명, 그럴겁니다. 좋은 인연이 훨씬 많을 거에요. 더 많은 인연들이 봄날의 개나리꽃처럼 화사하게 만발하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희선님 말씀 감사드려요^ ^
 
미치도록 가렵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4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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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가진 부피는 관심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무심한 눈으로 보자면 그의 삶이란 그저 얇은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저마다의 폭과 깊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누군가의 삶이 평면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입체로 보이느냐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얼마나 그를 이해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모에게 있어 아이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로지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그것만 관심있는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의 삶은 공부 하나 밖에는 없는 얇은 평면일 것이나 사람이 성품이 아니라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이런 교육 환경 속에서 과연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의 삶이 저마다 가진 상처와 통증 그리고 고민들로 켜켜이 쌓여진 입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수업 환경은 나빠져만 가고 학교 폭력은 심해져만 간다. 어제와 오늘의 일도 아니다. 오랜 시간 곪을 대로 곪은 문제다. 모두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쉬이 해결 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전세계적으로도 범접할 수 없을만큼 지대한데도 그렇다. 왜 이럴까? 우리 주위에도, 언론 지상에도 잇달아 나타나는 오늘날 교육의 희생자와도 같은 아이들을 보면 어쩔 수없이 이런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어쩌면 이 역시도 정말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인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컴의 면도날처럼 '학생은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라며 공부말고 다른 건 아이의 삶에서 모조리 뭉텅 잘라내어 무시의 늪 아래로 던져버렸기에 말이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이들의 신음은 우리가 다른 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아이도 나와 똑같은 엄연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직장에서 업무 성과가 부족하다며 닥달을 당할 때마다 시어머니로부터 집안일을 두고 이런저런 야단을 맞을 때마다 혹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을까? '아니,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결과만 가지고 이렇게 나무라다니! 내가 무슨 일만 하는 기계야?" 아이들도 그렇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원망했던 직장 상사의 눈이나 시어머니의 눈과 똑같이 기계로만. 그럴 때, 나에게는 원망이 생겼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처한 오늘의 현실은 참 고달프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 지수가 OECD 국가 중 최고로 낮단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주당 학습 시간이 49시간으로 세계 1위인데. OECD 평균보다 무려 15시간이나 많다.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 시간이다. 놀 시간도 없고 한창 삶을 즐겨야 하는 나이인데 즐길 여유도 없다. 몸 속에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데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앉아 있어야만 한다. 기계도 이 정도로 굴리면 잡음이 나고 고장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통증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보지 않는다. 그들의 통증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좀 보아달라는 것인데 우리들은 쓸데없는 투정이나 이유없는 반항으로 치부하고 듣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렵다고, 가려워서 미치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나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좀 긁어달라고 내민 아이들의 등에 오히려 세게 등짝을 내리치기도 한다.


 그간 그러했던 어른인 우리들의 모습을 아프게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김선영 작가의 세번째 소설, '미치도록 가렵다'이다.


 '미치도록 가렵다'는 한 학교의 '독서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독서회'라고는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모인 게 아니다. 학교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기에 오게 된 아이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자주 온다고. 달리 갈 데가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수인이 맡게된 독서회의 아이들도 별 반 다르지 않다. 상처가 있고 자신의 통증을 누군가 봐주었으면 하는 아이들이다. 소설의 '독서회'는 허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학교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사서인 수인은 그 독서회를 자신이 맡고 있는 도서관에서 지도한다. 아이들과의 첫 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 관심도 없어 수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방해하거나 비아냥으로 선생님인 수인을 얕보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도 수인이 도서관에서 받은 첫인상과 닮았는 지. 이제 막 부임해온 수인이 처음 도서관을 보았을 때 받은 느낌은 이랬다.


 천장까지 닿은 서고가 눈앞을 막았다. 역시나 머리 위부터 짓누르는 위압감이 드는 배치였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이미 도서관을 점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서면 주눅이 들어 누구든 저절로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p. 24)


 숨막힐 듯한 버거움. 그것이 도서관이 수인에게 준 느낌이었다. 아이들도 그랬다. 그 속에서 수인은 이름대로 정말 갇혀 있는 수인(人) 같았다. 아니, 정말 수인(人) 이었다. 수인이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 늘 어둑하기만 한 도서관 위치를 이전시켜 줄 것을 학교에 건의했을 때 학교 역시도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숨막히는 버거움으로 무장한 곳이었다는 걸 똑똑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사서 주제에'라는 말로 진지하게 내놓은 그녀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다. 괜한 파장을 일으키지 말라고 으름장도 놓는다. 동료 교사들은 행여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봐 그녀를 따돌린다. 그렇게 격리되었고 그녀는 도서관에 갇혔다. '독서회' 아이들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소설은 '독서회'에 온 아이들의 사연과 그들을 맡아 가르치는 수인의 사연을 병치하고 있는데 얼른 보아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들 사연의 병렬은 사실 동병상련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수인의 처지가 아이들의 처지와 같게 되면서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던 아이들을 자신만큼이나 상처받고 고뇌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소설의 주 무대로 도서관을 택했는 지도 깨닫게 된다. 다름아닌, 아이들이란 존재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은 책이다. 저마다의 생각, 고민 그리고 아픔으로 빼곡히 들어찬 책. 도범이 계속 써 온 일기와도 같다. 소설에서 도범의 일기가 나오는 것은 이렇게 아이들이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리라. 아이들은 어른들이 펼쳐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정하게도 펼쳐 읽으려 들지 않는다. 그저 표제만 쓱 보고는 '넌 이런 아이야' 단정지어 버린다. 도범이 그렇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범죄자를 연상시키는 '강도범'이란 이름 때문에 그만 문제아까지 되고만 도범. 도범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말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어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피하거나 사건이 터지면 다짜고짜 범인으로 취급할 뿐이다. 지금 자기의 내면이 어떤지 들여다 보지도 않고 이름이라는 또 과거의 행적이라는 표제만 보고 낙인을 찍는 어른들에게서 도범은 수인과 똑같은 숨학히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러한 어른들의 편견 안에서 도범도 수인(人)이다. 어두운 서가에 그저 꽂혀있기만 한 책만큼 갇힌 존재도 또 없으니.


 아이들을 책에다 비유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들에게로 향하는 질타가 된다. 일본에서 건너온 '중2병'이란 말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유행이다. 일본이나 우리나 그만큼 어른들이 지금의 청소년들을 참 이해하기 어렵다고 공감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말을 들으면 이런 의문부터 든다. 과연 우리들이 이해하려고 제대로 노력이나 했을까? 그저 이런 말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 책임은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고서 말이다. 그래서 싫다. 또한 아이들은 전혀 몰이해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 몰이해의 존재로 있는 것은 오직 들춰보지 않았을 때 뿐이다. 책을 펼쳐서 읽으려들면 책은 언제라도 자신의 내면을 술술 내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아이들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음의 벽을 굳건히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아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통증을 누군가 먼저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의 진실을. 통증은 견디기 힘들고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증은 가려움이다. 가려운 것은 참기 어렵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울 때는 누군가 대신 긁어줘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 애들이 지금 올매나 가렵겄냐. 너한테 투정 부리는 겨. 가렵다고 크느라고 가려워 죽겄다고 투정부리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고, 안 알아주고 가려워서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몸부림치는 놈들한티, 대체 왜 그러냐고 면박이나 주고, 꼼짝없이 가둬놓기만 하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냐. (..)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해도 네가 어디가 가렵구나, 그래서 가렵구나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녀? 너라도 알아봐줘야 하는 거 아녀?"(p. 216 ~217)


 도범이 수인에게 마음의 빗장을 푼 것은 수인이 이십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었던 어렸을 때 겪은 손가락 염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있게 되자 한 번 이별을 겪은 수인은 자신이 잘못해서 또 엄마와 이별하게 될까봐 손가락이 아픈 것을 숨겼다. 참고 또 참았지만 갈수록 통증은 격해졌고 손가락마저 시퍼렇게 섞어 들어갔다. 결국 그것을 본 엄마가 급히 병원에 데려가 의사가 손가락을 째고 고름을 빼주어 통증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의사는 엄마를 마구 야단쳤다.


 "어떻게 아이가 이렇게 되도록 둘 수 있었냐고, 애가 제대로 잠이나 잤겠느냐고.(p. 169)


 아이들은 혼자서 치유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손가락이 아플 때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병원에 데려갈 어른들의 손이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것은 그저 어른들이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수인의 엄마는 야단치는 의사 앞에서 죄인처럼 군다. 그동안 자신이 힘든 것만 생각하느라 딸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 탓이다. 우리 역시도 반항하고 거칠게 나오는 아이들의 태도에 '중2병'이란 라벨을 붙일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그동안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들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이들을 공부만을 위한 기계라는 평면이 아니라 힘겨워하고 상처받기도 쉬운 입체의 존재로 보도록 만든다. 부피도, 내용도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말이다. 그 책 표지는 들기에 그리 무겁지 않다. 내용이 모르는 외국어로 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수고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그 통증의 언어들을 읽어만 준다면, 헤아리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어느새 아이들도 다가와 스스로 환부를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인이 자신이 겪은 일로 인해 먼저 다가가 아이들 마음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바로 화답하듯 수인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워만 보이는 오늘의 교육 현실. 의외로 해답은 찾기 쉬운 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한 권의 책처럼 저마다 폭과 깊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그 내면을 읽으려 노력한다면 조금은 아이들의 통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음과 비명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들의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위한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이 소설의 '도서관'을 방문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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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배달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7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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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한번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경우가 있으실 겁니다. 저는 정말 많이 그랬습니다. 인생이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말이있죠. 처음에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먹으면 나중엔 맛 없는 것만 남아있다고. 제 경우엔 그게 좀 빨랐던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인생의 맛있는 것은 이미 다 먹어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제게 남아 있는 건 맛없는 것들 뿐. 그렇게 맛없는 것들을 매일 먹어야 한다면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솔직히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을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주인공 슬하가 완전 제 모습의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슬하는 매일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내야 하는 현재의 삶이 너무도 고달파서 늘 지금과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책들을 정말 닥치는 대로 찾아 읽습니다. 거기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미오 나의 미오'와 같은 판타지도 있고 미치오 가쿠가 쓴 '다차원 우주론인 평행우주'와 같은 책도 있습니다. 슬하는 그런 책들을 통해 늘 기면증을 일으키는 힘겨운 현실을 버텨 나갈 희망을 얻습니다. 하지만 슬하에게 그 희망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상상이 아니라 꼭 현실로 이루어지길 바랐을만큼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절박함이 슬하로 하여금 그 어려운 물리학 책까지 들여다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현실이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된 마냥 질식할 정도로 갑갑하게 느껴질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정말 많이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슬하가 그 구멍에 가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책을 저 역시 닥치는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슬하가 읽었던 '미오 나의 미오'와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는 저 역시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슬하와 저는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슬하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 역시도 어떤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저에게 이 소설 '특별한 배달'은 특별한 책이었습니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저에겐 그리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원망하고 서열화된 사회를 원망하며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부르며 목적도, 소망도 없이 사는 태봉의 모습 또한 언젠가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현실이 주는 결핍이 너무도 크면 차라리 먼저 그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포도를 아무리해도 따지 못하자 저건 그냥 신포도일 뿐이야 하고 외면해 버리는 여우처럼 말이죠. 더 이상 결핍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태봉이 잉여인간으로 자처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겠죠. 사실은 더욱 제대로 살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봉은 남편이 투명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먼저 사라져 버리겠다며 떠나간 엄마를 모순일 뿐이라며 이해하려고도 용서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사실 삶에는 얼마든지 그런 모순이 있게 마련입니다. 노래 가사에 흔히 나오는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말이죠. 엄마의 행동이 모순이라면 태봉 자신의 행동 역시도 모순 입니다. 모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지금 우리가 가진 이해의 범주 바깥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넓어지면 그 모순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태봉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슬하는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죠. 태봉에게 엄마의 사라짐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태봉은 그 엄마의 사라짐으로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은 우리의 원망을 낳습니다. 여우의 포도에 대한 태도는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상처를 미연에 막기 위해 덮어놓고 부정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슬하도 그랬습니다. 슬하도 태봉과 똑같이 사랑하는 한 존재의 사라짐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계기를 낳았습니다. 그 존재는 바로 동생 상하였습니다. 상하와 슬하는 입양된 아이였습니다. 슬하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엄마가 미리 알렸기 때문에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관계인 이상 이대로 내내 지속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생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상하의 파양이었습니다. 상하가 엄마의 통제를 자꾸만 벗어나자 더 이상 엄마의 자식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슬하는 바로 거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하는 엄마가 왜 승하를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자식으로 여기며 키우겠다고 입양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내버리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마를 원망합니다.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자꾸만 불안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니까요. 그리고 자기 역시도 그 상하처럼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엄마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마저 원망하게 됩니다. 엄마로 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면 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또 설령 했다고 한들 그걸 내내 지속하기란 정말 어려우니까요. 그렇게 태봉과 슬하는 사실 하나입니다. 태봉의 잉여인간 자처나 슬하의 다른 가능성 꿈꾸기는 그들이 가진 원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슬하와 똑같이 과거로 되돌아가고픈 욕망을 무던히도 가졌던 저 역시 세상을 향한 원망의 굴절된 표현이었던 것이구요. 우리는 그렇게 늘 바깥을 원망합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어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태봉이 엄마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듯이, 슬하가 엄마와 세상이 바뀌길 바라듯이 원망에 대한 치유 역시 바깥으로 부터 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특별한 배달'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주는 책입니다.

 

 문제는 시야입니다. 생각해보면 원망 역시 모순과 마찬가지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 역시도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머물러 있을 뿐인 것이죠. 태봉이 엄마가 떠난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슬하가 자신이 어떻게 엄마에게 입양되었는지 또 상하가 어쩌다 파양되었는지 그 내력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있었다면 슬하의 삶 역시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것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떨어뜨리고 맙니다. 이것을 통해 소설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는 바깥에 대한 원망은 바로 그 시야의 좁음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마도 후반에 태봉 아버지의 일기나 슬하 입양에 대한 엄마의 고백, 그리고 상하 파양에 대한 한 수녀의 증언으로 밝혀지는 모든 진실들은 다름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때 태봉과 슬하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더하여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봉과 슬하만큼이나 저 역시 세상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제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볼 수 있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인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루살이 앞에서 메뚜기가 내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야기를 그저 공상이라고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메뚜기에게 곰은 사계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름 한 철 밖에는 살지 못하는 메뚜기는 무려 계절이 네 개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자신이 알 수 있는 절대라고 생각한 탓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루살이, 메뚜기와 별 반 다를 바 없습니다. 내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교만합니다. 사실 바로 이게 아닐까요? 우리가 가지는 원망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만하기에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소설에 슬하가 '웜홀'이라 부르는 구멍과 같이 다소 판타지적 소재가 들어간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웜홀' 같은 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정도로 삶이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말이죠. 태봉에게도, 슬하에게도 그랬듯이 삶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넓게 볼 수 있게되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너머'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왜 우리들은 그 '너머'를 그저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할까요. 그 '너머'에 지금의 세상마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는데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좁은 내 시야를 내 전부로만 생각하고 살아갈까요? 그러므로 태봉과 슬하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바깥으로 부터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무리해서 말하면 그 것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내내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우리의 시야가 닿지않는 그 '너머'에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그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찾지 못한 것이었죠.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자기 집에서 그 새를 찾은 치루치루와 미치루 처럼 말이죠. 무엇보다 태봉 아버지가 태봉에게 선물한 금괴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보여집니다. 그 금괴의 의미에 대해 아버지는 쪽지로 이렇게 설명하죠.

 

    아버지는 순도 100퍼센트의 금을 만들고 싶었다.

    100퍼센트는 연금술로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만,

    1퍼센트의 불순물, 그것은 허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미니바에는 1퍼센트 이상의 불순물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버려진 것들 속에도 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맞습니다. 버려진 것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금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쉽게 그 가능성을 버려버리고 난 안된다며 잉여를 자처하거나 과거 회귀만 꿈꾸기에 급급하죠. 그러므로 진정한 길은 이러한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더 넓게 만드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물론 바깥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물론 소설에 다 나와 있습니다.먼저 오수의 자작시에 나오는 개망초 꽃처럼 더 이상 타인의 잣대로 자신을 재단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대로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보다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기 위해 나와 다른 생각들에게도 얼마든지 귀 기울여 듣는 것이죠.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은 바로 이러한 변화로 '나 자신'을 퀵으로 배달하는 작품입니다. 정말 제 자신이 태봉의 오토바이에 태워져 문득 전과는 다른 나로 도착한 느낌을 받았기에 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하가 자유로워졌듯이 저도 이제 자꾸만 과거로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역시 얼마나 제 주위에 '웜홀'이 나타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을 꿈꾸기 보다 더 많이 더 넓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소설의 끝은 '방방' 입니다. 높이 뛰어오를수록 더 많이 볼 수 있는 방방은 정말 결말에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슬하가 그 방방에서 뛰어오를때 어딘가에서 동생 상하의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 누나 떨어져도 무조건 받아주는 쿠션이 있잖아. 그냥 믿고 더 높이 뛰어올라. 겁먹지 말고.

 

 저에게도 이 책이 그럴 것 같네요. 안심하고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더 높이 뛰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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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나치가 유태인을 선별한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자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서다. 유태인들이 한 줄로 길게 서서 차례차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나치 군인들에게 밝히고 있다. 그 줄 어디쯤에 역사학자가 있었다. 평생 역사만 연구해온 노인 학자다. 그는 당당히 역사를 연구했다고 말할 참이다. 그 때, 그를 아는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절대 역사학자라 말하지 말고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말하라 한다.  노인 학자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평생 고귀한 역사를 공부해 온 나에게 고작 냄비 때우는 일이나 했다고 하라니. 도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한다. 젊은이는 살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고개를 가로젓는 노인. 젊은이는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결국 노인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은 말을 할 줄 모르며 평생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그러자 나치 군인들은 잘됐네. 마침 식당에 때울 냄비가 가득한데 하면서 노인을 차출한다. 노인 학자는 이제 산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세상에 역사가... 역사를 연구하는 게 이리도 가치가 없다니... 중얼거리며.


 극단적은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정작 중요한 순간 별 도움이 안 된다. 철학이라고 다를 것인가? 마찬가지이리라. 역사든, 철학이든 얼른 드는 인상은 실생활과 지극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괜히 상아탑 학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철학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짊어진 멍에였다. 그걸 우리는 탈레스에 관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탈레스가 누구인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아니던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근심하여 물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철학자. 그렇게 이 이야기는 철학의 태초에 있었던 것이다. 탈레스는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즐겨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가다가 그만 발 밑의 우물을 보지 못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걸 본 트라키아의 한 하녀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잘 보면서 어찌 발 앞의 우물은 보지 못하누."


 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은 이 하녀의 비웃음을 철학의 임무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도중 한 재소자의 질문 때문에 태어났다. 그 재소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쉰들러리스트의 역사학자, 트리키아 하녀의 비웃음, 재소자의 질문. 이 모두에서 잘 드러나듯이, 분명 철학과 현실엔 괴리가 있다. 철학은 현실 너머를 쫓으려고 하고 현실은 말뿐인 철학을 자신과 상관없다 여긴다. 철학은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배고픈데 철학 나부랭이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허기를 줄여주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철학은 그런 현실을 우매하다고 하고, 현실은 그런 철학을 신선놀음이라 비아냥 거린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고병권은 이것이 철학과 가난한 사람(나는 이것을 현실이라 부른 것이다.)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p. 7)


 그러므로 이 같은 불행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바로 그것을 위한 여정이다.



 여기에는 전부 6장에 걸쳐 많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아래로 통일되게 흐르는 근본적 태도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시각의 전환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오히려  출발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쉽게 발상의 전환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그건 첫머리에서 그가 철학의 사명을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이며 철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미 드러난다.모두가 'NO'라고 외칠 때, 'YES'를 찾아내려 하는 것. 그것을 저자는 철학이라 여긴다. 아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철학은 무엇보다 이미 있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철학자와 하녀'는 그렇게 다르게 보기,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특히 17세기에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하여 들뢰즈가 생각한 것을 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17세기에 스피노자,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등이 한결같이 신에 대해서 말한 것에 흥미를 느꼈다. 물론 그 때까지는 여전히 기독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했다. 시대가 신을 사유하도록 제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유에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통해 회화는 인간적인 것들, 피조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유한한 것들에서는 사유할 수 없었던 신을 통해 극한까지 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극한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불경한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합니다."(P. 129)


 그러니까,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계기라고.

 또한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힘도 자라네"라고(P. 170)


 바로 이러한 시각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철학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그 태도를 지향할 때, 결국 철학과 현실 사이에 놓여진 간격도 줄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이런 책이다. 그것을 하나의 근본 태도로 하여 여름의 수목처럼 가지를 쭉쭉 뻗어나간다. 그 가지의 손 끝에서 개념은 전혀 다르게 정립되고 그 바뀐 의미는 타자를 포용하는 여지를 더욱 넓혀준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있는 공간에 비례해 시원함을 가져다 준다. 자유를 느끼는 감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걸.


 그 자유를 향한 이 책의 여정은 철학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은 쉽고 내용은 부담이 없으니 지하철 안에서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얼마든지 벗할 수 있는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틀림없다.

 부디, 한 번 벗해보시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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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군요. 오랜만에 한 글자 한 글자 빼지 않고 읽었습니다.

ICE-9 2014-07-20 17:10   좋아요 0 | URL
제게 참 과분한 칭찬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 정말 감사합니다^ ^

2014-07-23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양쪽에 각각 나무딸기와 들장미가 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털털거리며 차를 몰았다. 오솔길 가장자리 어디에도 개암나무나 손질하지 않은 산울타리는 서있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차를 몰고 가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전부 달랐는데, 그 오솔길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솔길 끝 바다, P. 14 -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점점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지만 노인은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추억 속에는 한 결같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늘 행복한 풍경으로 그려지는 곳이. 그리고 생각하죠. '언젠가 꼭 한 번 그 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라고.

 이럴 때, 저는 작가들이 부럽더군요. 우리들은 겨우 찾은 추억이라도 기껏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나올 뿐이고 종국에 가선 저와 함께 사라져 버릴 터이지만 작가들은 마치 랜드마크를 만들듯 그 기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영원히 남겨둘 수 있으니까요. 극장판 '은하철도 999'를 보셨나요? 그것은 린타로가 가졌던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떠나는 메텔을 보며 줄줄 흐르는 철이의 눈물은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유년을 떠나보내는 린타로의 눈물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러한 애절한 그리움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파란색 잉크에 떨어진 천이 그렇듯이 마음 한 구석 점점 물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애절한 그리움이.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다 그런 그리움을 담는 것이겠죠. 린타로가 그러했듯이. 닐 게이먼도 그러합니다. 소설에다 그리움을 가득 실어 보내는 것이죠. 홀연히 바다를 건너 우리 앞에 도달한 다시 오지 못 할 유년에 대한 그리움의 배.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입니다. 


 네, 닐 게이먼이 돌아왔습니다. 환상문학의 거장이라는 타이들이 전혀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 닐 게이먼이 말이죠. 이 사진이 닐 게이먼의 모습이에요. 앞서 이 소설이 그리움의 배라고 했죠?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번 작품에 닐 게이먼의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유년의 자기 모습이 말이죠. 그는 책만이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던 유년의 자신 모습을 그대로 주인공에게 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소설에서 하는 어떤 행위들은 그대로 과거 자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닐 게이먼은 오래도록 잊었던 기억을 불러내게 만들어준 어린시절의 사진들을 많이 보내온 자신이 여동생에게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사진 같은 것.



 이게 진짜 그 사진인지는 모르겠어요. 이 사진은 소설 속에도 삽화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흑백으로 말이죠. 이 벽돌집은 닐 게이먼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어쩌면 진짜 사진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저 배수관 위의 소년이 어린 시절(소설에서는 일곱살로 나옵니다.)의 닐 게이먼이겠군요. 이 배수관 사진은 소설의 에피소드로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탈출기로.

 

 이렇게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램프를 들고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닐 게이먼의 사진을 가져왔어요. 사진처럼 추억의 램프를 들고 오래도록 망각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을 터널 속에서 길을 찾듯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은근히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나요? 그 여정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2013년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표지가 굉장히 근사합니다. 아무래도 이 말부터 할 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요. 한동안 갖고 다녔는데 주위에서 보는 이마다 예쁘다고 하더군요. 후후.


 띠지를 벗긴 모습이에요. 이런, 야간이라서 좀 흐리게 나왔네요. 윗사진처럼 파랑의 색감이 뛰어난데 이 사진에선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군요. 망했어요. 망한 사진이 문제라서 그렇지 표지는 정말 뛰어납니다. 거기다 햇살이나 형광등에 비쳐보면 표지 전체가 반짝거려요. 아마도 달에 비친 연못의 물결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러스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져왔더군요. 그것도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햄스톡 농가의 오리 연못 모습을 말이죠. 연못 위에 비친 저 두 개의 달이 하나의 반달로 겹쳐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마지막 문장은 이러합니다.

 잊힌 기억처럼 혹은 황혼 속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과거 속으로 희미해져버린 것.(p. 287)


 일러스트는 그 연못이 주인공에게 무엇이었나를 잘 나타내고 있는 듯 보여요. 바로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었던 유년 중 가장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러스트의 저 검은 고양이는 바로 주인공의 분신이랄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 분신과도 같은 고양이가 내내 연못을 바라보고 있군요. 잊힌 기억처럼 희미해져가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곳에 있고 싶다는 바람 같은 것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어쨌든, 저 마지막 문장에도 어떤 아쉬움,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지죠. 저는 '은하철도999' 극장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유년을 상징하는 메텔을 떠나보내야 하는 철이의 눈물.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 주인공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괜한 비유는 아니에요. 정말 이 소설에는 메텔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나오거든요. 그 메텔처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시켜 주는 누군가가. 

 

 소년에겐 누나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때문에 엄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이 아버지라는 상징계의 질서로 좌절되자 그 대리충족의 대상으로서 누나를 원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분명 그런 것이 있어요. 뭐랄까 둥지 같은 존재로서. 네, 저는 누나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더욱 감정이입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메텔과도 같은 존재가 누구냐구요?



 그 전에, 참고로 원서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연못을 위에서 본 모습을 나타냈다면 원서는 아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군요. 저 연못 아래에 있는 소녀가 바로 주인공과 함께 모험을 하게 될 '레티 헴스톡'입니다. 헴스톡은 닐 게이먼의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친숙한 이름이죠. 닐 게이먼이 다른 소설에서 자주 반복해서 쓰곤 했으니까요. 다른 작품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존재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닐 게이먼의 팬으로서는 드디어(!) 헴스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랄까요. 팬으로선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벌떼처럼 달려들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죠. 네, 어디까지나 게이먼의 팬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저 소녀가 바로 메텔입니다. 이름은 벌써 말했죠? 레티 헴스톡이라고. 소설에서는 11살 정도로 나옵니다. 정도로 표현한 것은 사실 이 소녀의 나이가 11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요. 얼마나 오래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레티 헴스톡은 엄마랑 할머니와 삽니다. 농장엔 이 세식구가 전부에요. 남자는 없어요. 엄마는 중년으로 보이고 할머닌 노인으로 보입니다만 진짜 나이는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무려 할머니는 달이 하늘에 생기는 걸 직접 봤다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나이 계산이 불가능해요. 네, 이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훌쩍 초월한 존재들이죠. 주인공에게 그들은 '대양'에서 왔다고 그래요. 소설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티는 자기들이 오래된 나라에서 대양을 건너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레티의 어머니는 그게 오래전 일이라 레티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며, 그 오래된 나라는 가라앉았다고 했다. 레티의 할머니인 헴스톡 노부인은 딸과 손녀 둘 다 틀렸고, 가라앉은 곳은 진짜 오래된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진짜 오래된 나라를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헴스톡 노부인은 그 진짜 오래된 나라는 폭발했다고 했다. 

 

  그들이 온 통로가 바로 OCEAN, 즉 '대양'입니다. 원서 제목의 'OCEAN'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바다로 바뀌었군요. 아마 '오솔길 끝 대양'이 어감상 별로 좋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양'이 바다를 가리키는 것 아니에요. 사실은 헴스톡 농장 뒤쪽에 있는 오리 연못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 연못을 헴스톡 사람들은 '대양'이라 부릅니다. 원서 표지는 그 대양 아래로 가라앉은 레티를 나타내는 것이에요. 저 상황도 사실 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것은... 으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기가 어렵네요.

 

 

 

 그렇게 헴스톡 농장은 초월적 존재들이 사는 초월적 공간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아버지가 딱 한 번 주인공을 두고 '핸섬 조지'라고 부르긴 하는데 진짜로 조지라서 조지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어릴 때의 별명을 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단 한 번도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닐 게이먼이 일부러 주인공을 익명의 존재로 남겨두려 한 것 같네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세를 내준 자기 방에 살던 오팔 광부가 자동차에 숨져 있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발견합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차에 주인공이 방해가 되자 어디 데려다 놓을 데가 없나 살피고 있는데 마침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 농장에서 잠시 데리고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소녀가 바로 레티였죠. 주인공은 그렇게 하여 오솔길 끝에 있는 헴스톡 농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대양'이라 불리는 연못에서 기이하게 죽은 물고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물고기 내장 속에 있던 은화 6펜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돈이 들어옵니다. 그 후, 밀납인형이 되어버린 할아버지가 자신의 입 속에 숨막히도록 무언가를 자꾸 집어넣는 꿈을 꾸게 되는데 겨우 일어나 뱉어보니 은화 6펜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은화를 들고 헴스톡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헴스톡 노부인은 대양을 통해 무언가가 이 세상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노부인 스스로는 들러붙어 나오기에 '벼룩'이라 부르는. 하지만 그대로 놔주면 세상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는.

 

 노부인은 레티에게 '그것을 묶고, 길을 막고, 잠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티는 동료로서 주인공을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반대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레티. 결국 그녀는 주인공을 데리고 대양을 통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존재를 찾아 숲으로 떠납니다.

 

 드디어, 만나게 된 존재. 그것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얼굴은 너덜너덜했고, 눈은 천에 뚫린 깊은 구멍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없는 회색 캔버스 가면뿐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다 너덜거리고 찢어진, 폭풍에 휘날리는 가면.(P. 72)

 

 다시 말해, 이렇게...

 

 

 그 존재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결국 레티는 이 존재를 물리치나 그 전에 절대 놓지 말아야 했던 손을 주인공이 그만 놓쳐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주인공은 정말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수수께끼의 미인 가정부 '어슐러 몽턴'이 나타나 자신을 집에 가두고 아버지를 유혹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바로 어슐러 몽턴입니다. 이 일러스트는 '팬아트'인데 소설에서 도망가는 주인공을 하늘에서 날아 쫓아가는 그녀를 그린 것입니다. 이 장면 묘사 정말 좋더군요. 일곱 살 아이가 폭풍우 치는 밤에 무시무시한 존재로부터 쫓기는 공포와 긴박감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역시 닐 게이먼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묘사가 그리듯이 되어 있어 상상만으로도 얼마든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만과 편견'의 영국 감독 조 라이트가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 장면이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

 

'오솔길 끝 바다'는 정말 환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끝까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 불허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존재들까지 등장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마구 부채질하고 있죠.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공포스런 존재였던 '청소부'들 처럼.

 

 

 


그들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칠흙같이 검었다. 너무나 검어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눈 속의 얼룩 같았다. 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새는 아니었다. 새들보다 더 오래된 존재였다. 수십, 아니 수 백 마리가 원과 고리와 소용돌이를 만들며 날았다. 새는 아니지만 퍼덕이는 그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P. 207)

 

 

 어릴 때, 가을이면 들판에 저렇게 까맣게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새떼들을 보곤 했는데 혹시 닐 게이먼도 유년 시절에 그걸 보고 저런 기이한 생물을 상상해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은 그 막강한 헴스톡 노부인도 여간 처리하기가 까다로워 '말썽쟁이들'이라고 부를 만큼 공포스런 존재입니다. 그만큼 강하고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 존재들이(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청소부라 부르죠.) 일곱 살 주인공을 먹어치우려 달려드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참 운도 지지리 없군요. 어린 나이에 이토록 무서운 공포와 몇 번이나 맞딱뜨리다니.

 

이제 대강 소설의 분위기를 아셨나요? '오솔길 끝 바다'는 이런 소설입니다. 여러 차례의 고난을 통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근저에는 다시 재회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여있는. 어쩌면 이 때문에 어른이 된다는 것의 서글픔까지 묻어나는 소설입니다. 닐 게이먼은 이 소설을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다더군요. 그건 어쩌면 주인공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들 중 하나가 어쩌면 독자인 어른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스스로 약해서 권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은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왔던 어슐러 몽턴의 모습, 욕망 충족을 위해서라면 앞 뒤 안 가리고 뭐든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청소부들'의 모습. 분명 언젠가는 우리들 역시도 그 모습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대양'이라는 물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이 소설이 그처럼 반추의 의미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원해서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특히나 주인공의 에필로그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거기서, 어른이 된 주인공은 헴스톡 노부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전 합격했나요?"

 오른 쪽에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짙어지는 황혼에 가려서 읽을 수 없었다. 왼쪽의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람으로 사는 일에 합격이나 불합격은 없단다."(P. 282)

 

 

 주인공의 이 같은 질문을 어른인 독자들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야?'하는 것 같은 질문을. 어쩌면 주인공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도 독자들이 감정 이입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원래 닐 게이먼을 좋아했습니다만 이 소설은 특히나 마음에 드는군요. 이야기도 나무랄 데 없이 재밌고 뜯어보면 여러 상징이나 비유들이 제법되어 꽤 독해의 재미까지 주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 위해 제격인 작품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도 이 오솔길로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시렵니까?

저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유년의 연못으로...


 

아래 사진은, 외국에서 나온 '오솔길 끝 바다' 한정판입니다.

근사해 보여서 가져와 봤어요. 우리나라도 이 소설이 많이 팔리면

이런 한정판으로 내어줬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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