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음, 조옥경 옮김, 오강남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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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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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신화는 날조된 것일 경우가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거미의 계략'처럼...

 과거에도 그랬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가장 많은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한 종교의 상징과도 같은 성소.

 그 회칠한 거룩을 벗겨버리고 날 것의 허위와 배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다...


 '예루살렘 광기 / 제임스 캐럴 / 동녘' 

 




 


  영화 '명량'을 보고 새삼 생각하게 된 장군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

  언제나 먼발치서 이해했던 임진과 정유의 난.

  둘 다 이전보다 가까이 한 발을 들이밀기엔 이 책만큼 적당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선택하다...


 '난중일기 / 노승석 / 여해'









 참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던 고통을 허락한 신에 대한 변호.

 드디어 그 기회를 갖다.

 신앙이 가진 최대의 모순을

 당대의 천재가 어떻게 풀어나가는 지, 그 흥미로운 변론 순서에

 참여하다...


 '변신론 / 라이프니츠 / 아카넷'







  

현대 자본주의 도시에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코스로

리처드 세넷만한 것이 또 있을까?

현재의 세넷을 다진 초창기의 모습 속으로

여행하다...


'무질서의 효용 / 리처드 세넷 / 다시봄' 









 

 누군가가 내게 말하기를

 스피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윤리학'이 아니라 '신학정치론'이라 그랬다.

 그 신학 정치론을 위한 참좋은 길잡이로

 기대하다...


 '스피노자와 근대의 탄생 / 스티븐 내들러 / 글항아리'









 데카르트는 네델란드의 암스테레담에서 근대를 열고

 프로이드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현대를 열다.

 현대를 열어젖혔던

 그 뜨거운 세기말 빈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다...


 '세기말 빈 / 칼 쇼르스케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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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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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글 솜씨도 없고 귀도 한없이 얇은 나는 덥썩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종석은 '왜 글을 쓰는가?'부터 시작한다. 아, 그 전에 고종석은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좋다고 했는데 난 그냥 생략하련다. 마음이 무간지옥에 빠진 것처럼 착잡하니 그 한 자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이러면 또 글의 기품이 없어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와인 마시는 것도 아니고 소주병 까고 있는데 기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쓰다가 자판 위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의 수열들이 길게 펼쳐질 것이다. 흐음, 글의 앞은 기품이 흐르는데 뒤는 의미 불명의 긴 뱀꼬리라. 이거, 딱 '용두사미'가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기품을 지니는 길일 것이다. 하여, 자기 검열 따위 던져버리고 내키는 대로 쓰겠다. 당신은 지금 취중 작문의 현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더라? 아, 맞다. '왜 글을 쓰는가?'였지. 사실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봤다. 고종석은 조지 오웰이 말한 네 가지의 글쓰는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한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순전한 이기심에서 정치 목적인 동기로 옮겨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물만두님 추모 1회 리뷰대회 때였으니까 벌써 몇 년 된 것 같다. 정확히 얼마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썼었다. 방문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쪽으로만 썼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그래봐야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누군가 읽고 있구나 자각했던 것 같고 내 생각을 전달시키기 위한 쪽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좋아서 쓸 때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 고여 있었던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게 한 것 같다. 내가 비록 문외한이긴 해도 예전부터 고종석이 글을 그것도 참 잘 쓴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이론과 실기의 이중나선처럼 되어 있다.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의 실전으로 들어간다. 나는 실전이 재밌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분명 나는 뒤에 '개인적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실전 부분을 보니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을 이미 썼는데 왜 '개인적으로'를 또 쓰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가 개인적으로 말하지 집단적으로 말하던가?'라고. 읽는 순간 화끈했다. 자주 그런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지적해 주어 난 실전을 흥미롭게 읽었다. 의외로 고쳐야 할 습관이 많아서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얼굴 모르는 모두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성어도 많이 배우고 색깔을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되도록 중언부언 하지 않고 접속사는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생략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가 긴장을 낳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의','적' 표현도 가급적 삼가고 말이죠.


 이런.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책을 글 쓸때마다 사전처럼 옆에 놓아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실전의 시시콜콜은 유용하다는 의미다. 소주가 바닥났다.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가 든다.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글쓰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안도 희망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오웰의 네 가지 동기는 하나만 빼고 다 헛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개인의 순수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하나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래도 어쨌든 글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지금만큼은 이 지옥을 버티려고, 끝까지 버티려고 쓰는 것 같다. 다른 무언가로 뛰어들어서 이 짊어진 현실의 중력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정말로. 발 앞에 쓰러진 소주병처럼. 깨지지 않고 계속 뒹굴거리기 위해. 맞는 비유인건가? 여하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노래이길 바라고 나는 글이기를 바란다. 힘들면 힘들수록 많이 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이 참에 그 쪽 근육도 키워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뷰란 결국 한 문장을 위한 쓸데없는 군더더기의 집합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는 그 한 문장. 이제와 깨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고를 줄여주고 싶다.


 딱 한 문장으로 말하겠다. 이 책은 좋다. 이것만 읽기를...


다행히 자판 위로 안 쓰러졌다. 신의 가호일까? 이 나라에도 좀 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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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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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에코 파크'로 부터 6개월 후. 종말을 뜻하는 자정의 시각. 해리 보슈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깜깜한 거실에 앉아서 색스폰 소리를 듣고 있다.' 프랭크 모건의 'CITY NIGHTS' 앨범을.(소설은 정확히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 앨범이 확실할 것이다. 나도 추천하고픈 멋진 음반이다.)



 그런데, 소설의 첫 시작부터 보슈가 프랭크 모건을 듣는 일은 좀처럼 없다. 유별나서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마이클 코넬리는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프랭크 모건은 마이클 코넬리에게 중요한 재즈 뮤지션이다. 성공한 작가가 되기 전 힘든 시절, 그 불안과 암울의 시기를 그는 프랭크 모건을 들으면서 견뎌왔다. 그는 '타임'지에서 '찰리 파커의 제자로 마약 중독자가 되어 감옥까지 갔던 과거를 극복하고 30년이 지난 후 다시 녹음할 수 있었던'(이상은 라인업, P 69) 프랭크 모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프랭크 모건이 되고 싶었다. 힘든 과거를 극복한 생존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염원으로 그는 프랭크 모건의 음악을 자신이 한창 창조하고 있던 탐정의 사운드 트랙으로 결정한다. 이제 그 탐정은 내내 프랭크 모건과 함께 할 것이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틸 것이다. 동시에 모건과 같이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지 케이블의 '구슬프지만 희망을 주는 발라드인 '자장가'를 탐정의 주제가로 주었다.(같은 책, 같은 페이지) 보슈는 지금 바로 그 프랭크 모건의 앨범을 듣고 있는 것이다. 생존자의 음악이자 무엇보다 보슈의 분신과도 같은 음악을. 현재 트랙은 조지 케이블의 'ALL BLUES'다.


 그 때, 전화가 온다. 그를 사건 현장으로 부르는 전화다. 혹시 눈치챘는지? 해리 보슈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로스트 라이트' 이후로 소설은 늘 전화가 오는 것에서 시작했다. '클로저'도 '에코파크'도 모두 그랬다. 다시 경찰로 복직한 시점에 소설의 시작이 늘 걸려 온 전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언제나 그는 수동적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소환'으로 보인다. 언젠가의 페이퍼에서 해리 보슈는 지금 새로운 시기가 진행 중이며 그것은 속죄의 여정이라고 쓴 바 있다. 전화는 바로 그 속죄를 위한 호출로 보인다. 그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에 대한 참회로써. 그것은 세상이 무시하거나 은폐해 버렸던 '로스트 라이트'를 찾아내는 것으로 완수될 것이다. 같은 전화지만 '혼돈의 도시'에선 받게 되는 분위기가 참 다르다. 자정, 불 꺼진 방, 'ALL BLUES'라는 음악 제목까지 너무도 음울한 상황에서 소환되는 것이다.


 이 변화된 분위기에는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일까? 그 제공은 전작 '에코 파크'에 있었다. 해리 보슈는 다시 한 번 실수와 잘못을 했고 커다란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실패했다. 봉쇄된 '에코 파크'는 영원히 지어지지 않을 후회와 죄책감의 성지나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그는 그 값을 치뤄야 했다. 자정의 전화는 그 소환인 것이다. 6개월 뒤 해리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업무가 바뀌었고 파트너도 달라졌다. 해야 하는 일은 특히 어려워서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살인 사건이었고 파트너는 자신과 무려 20살이나 차이나는데다 다른 문화권 출신이었다. 다시 적응해야 했고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그의 삶은 '리셋'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가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쉰 여섯 살의 그는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로 지금보다 2~3킬로그램 더 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 흙갈색 눈은 맑고 또렷했고 산마루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도전을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슈는 자기 눈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살인사건 수사의 기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현관문을 나가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무리 먼 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럴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어떤 총알도 자기를 맞힐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P. 13)


 조금 과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자신감에 찬 모습이다. 코넬리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보슈의 영웅다운 면모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함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해리 보슈에게 있어서만큼은 마이클 코넬리는 새디스트이니까. 맞다. 이건 덫이다. 나중에 뼈 아픈 자각을 안기기 위해 놓아둔 치즈 한 조각.  이 장면은 중요하다. 앞으로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시각이다. 소설의 원제는 'THE OVERLOOK'이다.


 OVERLOOK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내려다 보다, 감시하다 그리고 간과하다. 영어 시간이 아닌데도 이 의미를 모두 말하는 것은 이 세 의미 모두가 소설의 중요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차례로 이야기해 보자. 

 

 OVERLOOK : 1) 내려다 보다.


 소환한 사건은 한 남자가 스키마스크를 쓴 이들에게 권총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다. 장소는 멀홀랜드 댐 위의 산마루. 바로 가까이에 한 때 마돈나가 소유했다는 저택이 있는 그 곳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바라는 성공한 삶의 성소와도 같다.


 저택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서 집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이로운 장관을 선사할 것이 분명했다. 보슈는 그 인기 여가수가 탑에 올라가 서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P. 17)


 여기, '내려다보다'가 직접 언급된다.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여가수다. '아메리칸 드림'은 많은 미국인들의 욕망이다. 그걸 나타내려는것일까?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하루에만 족히 200명이 올라와 어슬렁거리는 곳이다. 여기서 마이클 코넬리는 미국인들이 꿈꾸는 욕망의 진짜 모습을 밝힌다. 그건 내려다보기 위해서라는 걸. 모든 것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싶다는 군림의 욕망. 그것이 미국을 지배한다. 마돈나가 그것을 대변한다. 미국은 타인을 이 야경과도 같이 발 아래에 꿇리려는 욕망의 집합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야경. 마돈나는 매일 밤 이것을 보았던 것인가?


 거기서 OVERLOOK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가 발아한다. 바로 '감시하다'의 OVERLOOK이다.

   

  OVERLOOK : 2) 감시하다


 그건 먼저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피해자의 신분증을 살펴보고 있는데 뜻밗의 인물이 나타난다. FBI 특수 요원인 레이철 윌링. '에코파크' 이후 6개월만이다. 보슈는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슈와 레이철 사이에 로맨스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에코사건'에서 레이철은 보슈에게 단단히 실망했다. 보슈는 그릇된 판단으로 레이철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녀는 그의 과오를 반사시키는 거울이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이 피해자는 감시 대상이라고. 그것도 국가 안보를 이유로. 놀라는 보슈 앞에 피해자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준다. TLD라는 반지를.



실물은 이렇게 생겼다. TLD에서 D는 DIAMETER로 방사능 계측기를 뜻한다.


 아시다시피 암 치료에는 자주 방사능 물질이 이용된다. 때문에 병원은 그런 방사능 물질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을 주로 다루는 의학자들이 끼는 반지가 바로 TLD 반지인 것이다. 피해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방사능 물질을 마음만 먹으며 쉽게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방사능 테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테러의 위협 때문에 미국은 TLD 반지를 낀 사람들을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정확히는 감시하고 있다. 때문에 사망자로 보고되자마자 바로 FBI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OVERLOOK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는 발현된다.


 미국이 가진 욕망의 진실을 본 보슈는 이제 미국이 온갖 감시로 얼룩진 세상임을 본다. 테러 방지란 명목으로 미국은 천지사방을 불철주야 감시하고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경찰도 FBI를 감시한다. 그들의 조수 노릇이나 하는 건 사양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한다. 내부든 외부든 예외는 없다. 보슈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핫바지로 만들지 않을까 싶어 FBI에게 날을 세운다. 레이철 윌링도 그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알고보니 피해자는 범인의 협박 때문에 방사능 물질을 밖으로 빼돌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범인들은 총으로 그를 죽이고 방사능 물질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제 언제 어디서 방사능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토록 긴박하지만 미국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들은 혹시 다른 조직이 자기들 몰래 정보를 빼돌리지 않을까만 노심초사한다. 공조는 없다. 다른 조직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감시는 타인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결국 여기서 OVERLOOK이 가진 첫째 의미와 둘째 의미는 연결된다. 오로지 나만 군림하여 타인을 내려다보려는 욕망이 그대로 타인에 대한 감시를 초래한 것이다.


 군림만 하려는 욕망이 거대한 뿌리를 내린 미국에서 타인은 더이상 대화와 협조의 대상이 아니다. 보슈와 FBI 사이에 존재한느 것은 속고 속이는 협잡과 폭력 뿐이다. 둘 다 상대방은 오로지 이겨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결국 OVERLOOK이 가진 마지막 의미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군림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만 자신들이 정말 돌아보아야 할 자들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간과다. 뼈아픈 후회를 동반하고야 말 해서는 안되는 잘못.  




 OVERLOOK : 3) 간과하다.


 그들은 놓쳐버린다. 그건 그들이 정말 보아야 할 것이었다. 간과는 보슈가 신참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해줄 때 나타났다.


 30년 전쯤 월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어. 여자와 그가 기르던 개가 익사체에서 발견됐지. (P. 119)


 30년 뒤에 어떻게 단서를 찾아 그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통해 선배의 지혜를 들려줄 작정이었으나 애송이라 깔보았던 파트너는 보슈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한다. 개는 왜 죽였냐고. 보슈는 당황한다. 거기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 당시에는 개를 왜 죽였는가 하는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P. 120)


 그는 간과했던 것이다. 개의 죽음이라고 그 이유 같은 건 무시해버렸다. 보슈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깨닫는다. 그는 사회가 간과해버린 '로스트 라이트'를 되찾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의 속죄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 역시 사회가 범했던 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속죄는 사회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이었으나 소설에서 그가 보여주는 경로는 사회와 정확히 똑같았다. 그는 어리석었고 그 때문에 간과했다. 보슈만이라도 보아야 했었는데 남들과 똑같이 무심히 지나쳐버렸다. 이로써 마이클 코넬리는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명확히 드러낸다. 우리는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은 눈 뜬 장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보슈에게 느닷없이 닥쳐온 깨달음처럼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렇게 되는가? 애초에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정확히 'THE OVERLOOK'일 뿐이었다. 타인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눈이 아니라 내가 군림하기 위해 내려다보고 혹시 내게 피해가 오지는 않을까 감시만 하는 눈이었다. 눈은 원래 바깥을 보라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눈이 보는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장님과 마찬가지였다. 간과는 당연한 결과였다. FBI가 그랬고 보슈도 그랬다. 성과에 목마른 국토안보부를 이끄는 하들리도 마찬가지였다. 간과했기에 진실을 보지 못했고 어리석게도 계략에 휘둘렸다. 바보들의 우왕좌왕.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간과는 결국 자기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마이클 코넬리는 그 간과, 궁극적으로는 자기 본위적 욕망의 함정을 일러준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위만 보고 가다가는 발 아래 놓인 진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걸. 'THE OVERLOOK'은 부머랭이다. 남을 해치우려 날리겠지만 그건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다.


 파트너의 질문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된 보슈는 드디어 이런 말을 내놓는다.


 국민의 안녕과 사회안전은 산마루에 죽어 자빠져 있는 저 남자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우리가 그를 잊으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P. 130)


 이제 그는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줄줄 딸려나오는 기억들. 간과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이미 베트남전에서 경험했음을 알게 된다. 한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서 그 아래 땅굴에 숨어있는 베트콩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었다. 지휘관인 대위은 날마다 보슈와 같은 병사들을 내려보냈지만 사상자 수만 늘어났다. 하지만 포기하거나 다른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간과 때문이었다. 그에겐 오로지 상관의 호감만 보였다. 병사들의 목숨은 보이지 않았다.


 대위는 3군단 지휘부로부터 대책을 마련하라고 날마다 독촉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날마다 늘어가는 사상자 때문에 괴롭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가 가능했지만 3군단 대령의 호감은 대체가 불가능했다.(P. 177)


 그 때, 보슈는 정확히 깨닫는다. '그 전쟁에서 졌다는 것을. 적어도 자신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날, 또 하나를 더 깨닫는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종종 내부의 적과 싸우게 된다는 것을'



보슈가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였을 당시 소속된 부대의 휘장. '열대 번개'라는 번역보다는 '트로픽 라이트닝'으로 번역이 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지명인 '텐 사우전드 팜'은 만 개의 손바닥이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썼기에 더욱 그렇다. 참고로 트로픽 라이트닝은 제25보병 사단의 별명이다. 휘장의 모습 때문에 '일렉트릭 스트로베리'라 부르기도 한다. 벤 스틸러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트로픽 썬더'라는 제목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그 내부의 적이 바로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렇게 뼈져리게 깨달았으면서도 보슈도 결국 내부의 적에게 패배해버렸던 것이다. '에코 파크'에서 자신의 과오를 낳게 만든 것도 이 것이었다. 바로 이 깨달음을 위하여 그는 소환된 것이었다. 그 깨달음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대사 중 하나를 가져온 다음과 같은 보슈의 말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챨리는 파도를 안 타니까.(Charlie don't surf!)"(P. 174)  


 이 대사는 영화에서 서핑광으로 나오는 킬고어 대령이 한 대사다. 그는 서핑을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멀쩡하게 잘 있는 베트남인 마을을 헬기 부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 음악을 배경으로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이 헬기의 기관총에 난사당하고 폭발로 죽는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해변을 차지하냐고 묻자, 킬고어는 저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미국은 서핑을 하지만 베트콩은 서핑을 안 한다고. 대사에서 챨리는 베트콩을 부르는 미군의 은어다.(소설의 주에는 빠져있는데 아무래도 은어다 보니 밝혀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킬고어는 자신의 욕망말고는 다른 모든 것을 간과하는 극한의 장님이다. 이 대사를 인용함으로써 마이클 코넬리는 자기 본위의 욕망이 초래한 간과가 얼마나 큰 비극마저 불러올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마이클 코넬리는 이 소설을 썼던 것이다. 'OVERLOOK'으로 점철된 소설을.


 다시 소환된 해리 보슈가 걸어간 속죄의 여정은 이 'OVERLOOK'을 결연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내부의 적에 휘둘리지 않고 타인들을 인정하고 자신과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번에 보슈가 찾아야 할 '로스트 라이트'였다. 그건 소설 후반부 다음과 같은 보슈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배수구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하루하루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 검은 수쳇구명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이들도 있고 좀 멀리 있는 이들도 있다. 그 검은 구멍이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빙빙 도는 물이 언제 자기를 움켜쥐고 그 어두운 수쳇구멍 속으로 밀어넣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중요한 건 맞서 싸우는 거야. 보슈는 혼잣말을 했다. 쉼 없이 버둥거려 보는 거라고. 그 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계속 버텨 보는 거야. (P. 267)


 그 물이 내부의 적이며, 'THE OVERLOOK'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멋진 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아니라면 누가 과연 이 정도로 주제로 인도하기 위해 세밀하게 형상화하고 정교하게 배치할 것인가? 마음으로 읽다가도 어느 순간 머리로는 두번 세번 읽게 되는 소설. 그러기에 마이클 코넬리를 좋아하고 해리 보슈와의 동행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 지금까지 한국판 제목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원제 그대로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위에서 언급한 페이퍼는 아래의 먼댓글로 달아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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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코넬리의 두 번째 기회, 그 속죄의 여정...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4-07-30 06:43 
    누구에게나 두번째 기회가 있는 법이다. 물론 운이 따라야 한다. 누구는 잡고 누구는 잡지 못한다. 미키 할러는 운이 좋았다. 그는 보슈가 말했듯이, 자신의 죗값에 대해 '탄환의 심판'을 받았으나 다시 살아났으니. 단순히 살아났다는 것만이 아니다. 삶 자체가 변했다. 진정한 구원이 어디에 있는 지를 깨달았고 그를 위한 속죄의 삶이 시작되었다. 해리 보슈도 운이 좋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거리가 어두운 것은 밤보다 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미국의 흑인들만 보아도 그렇다. 2008년에 인종과 교육이 결부된 불평등은 그 약자의 위치에 있는 흑인의 수명을 평균 12년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되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주의일 때 비해서 사망률이 남자는 49%, 여자는 24%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다. 문자 그대로 불평등은 사람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계수가 증가할수록 사망률도 늘어났다. 이런 면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예란 테르보른의 책 제목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 책 제목처럼 정말로 이 세계는 '불평등의 킬링필드'이니까 말이다.



 이제 불평등을 막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살만하다고 해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평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체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불평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계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에 아이즈너와 애번즈는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망률을 높인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로 오스카 상을 받은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신 배우들보다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상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사실 이런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엄친아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학생들처럼 우리 역시도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지는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평등의 폐해는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진다고 한다.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3분의 2가 타인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겨우 3%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신의 정도가 불평등에 비례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해졌다. 이것이 또한 최근 더욱 극심화된 불평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벤지만 디즈데일리는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이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과연 불평등이 그런 역할까지 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 분열마저 가속화되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은 사회로 하여금 화합을 위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어 사회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용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력과 권력 엘리트를 제외한 사회 성원 대다수가 부담한다. 이래저래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물고 뜯기게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크게 상처입지만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약자들도 더욱 무시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다. 의원들은 결집도 못하고 로비력도 제로에 가까운 약자들을 자신들이 일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그저 표가 필요할 때만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약자들은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거기에 쓸 자원을 사회가 마련하기 어려운 탓이다.


 불평등을 줄여야 할 당위는 이렇게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평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불평등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 불평등', '자원 불평등' 이렇게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고 '실존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 '자원의 불평등'은 '행위자로서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로 한 국가나 사회의 평등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향해야 할 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불평등의 세 가지 모습은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평등 문제는,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인간이 능력에 대해 다차원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장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p. 211)


 그러한 폭력 혹은 인위적 방해 장치를 저자는 불평등 매커니즘이라 하여 주로 네 가지 행위 범주로 구분하는데 그건 '거리두기','배제', '위계화' 그리고 '착취'다. 이렇게 특정 행위 중심으로 범주적 세분화를 하는 것은 차이와 차별 구별 문제와 같이 불평등을 논의하는데 있어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개념 혼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한 상황마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흔히 치부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온 궤적과 지금 세계의 불평등한 실상을 드러내고 이 불평등을 완화시킬 가능한 대안적 세력과 방법을 탐구한다. 거기서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더이상 산업노동자가 변화의 주축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계급적으로 동질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연대'에 의해 평등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 내다본다. 거기엔 제3세계의 도시 빈민과 변변한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과 전문적인 중산층도 포함된다. 게다가 여성이나 소수민족 그리고 동성연애자들까지 저자는 중요한 평등화의 동력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지배엘리트들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불평등한 자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퇴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또 이렇게 단언한다. 이제 그렇게 평등을 공급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공급량이 부족해졌다고. 즉 더이상 위로부터의 평등화 노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저 이질적인 평등화의 동력들이 연대해 아래로부터 평등화를 가져오는 것. 평등은 이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래는 앞으로 불평등의 결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평등의 동력도 반평등의 저항 동력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합집산이 되지 않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뭔가 구심점이 필요하다. 투쟁을 선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는 세력 같은 것이.


 저자는 그 세력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산업근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당분간 평등의 기회는 노동운동의 힘과 리더십의 능력이 아니라 중산층의 방향 정립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p. 224)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새로운 21세기 '중산층' 시대가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활약할 무대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의 모호한 계급 개념이나 제각각인 규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근로자, 농부, 전문가 같은 지배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구를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p. 226)


 예란 테르보른이 이렇게 중산층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호하고 어찌보면 텅 비어있는 것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연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인 듯 하다. 무색의 물이 하나로 잘 섞이듯이 말이다. 중산층에 대한 낙관론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 모호한 정체성을 디딤돌 삼아 세력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금은 중산층 붕괴의 시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중산층이 여지없이 내려앉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중산층에게 그 역할을 맡길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위기 때문에 더욱 중산층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단단히 연대하리라 기대하는 것일까?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불안한 예감이 든다. 중산층에게 닥친 위기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을 보전하기 위해 불평등을 조장하는 당에게 표를 주는 것으로. 또한 임대아파트와 같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자신의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로 가는 통학로 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문을 달아 막아버리듯 빈자들을 격리시키려 들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점점 게토화 되어가는 형편이니. 그러므로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화의 염원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노력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봐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이런 이야기다. 불평등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었다. 이 책이 초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불평등은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더구나 수명까지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를 위한 출발의 책으로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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