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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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나토 카리시가 돌아왔다. 그것도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설 '속삭이는 자'의 속편으로. 어떤 이들에겐 단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벗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그렇다. '속삭이는 자'는 그 해 읽었던 미스터리 작품들 중에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 속편이 나왔다는데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이름없는 자'는 과연 도나토 카리시 작품답게 설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시작부터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희생자들은 토마스 벨런이라는 제약 회사 사장의 일가족.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 아들의 신고로 출동하게 된 경찰들은 토마스 벨런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이 각각 자신의 방에서 총에 맞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토마스 벨런은 가장 마지막에 살해 되었는데 그건 범인이 그의 눈 앞에서 가족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밀라는 여전히 실종사건 전담반인 '림보'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토마스 벨런 일가족 처형 사건 현장으로 호출된다. 살인사건인데 왜 실종사건 전담인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이유는 곧 밝혀진다. 알고보니 막내 아들의 신고 전화는 범인에 의한 것이었다. 범인은 막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까지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름은 로저 벨린범인의 정체는 이미 밝혀진 것이다. 밀라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림보'의 벽에 붙은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 명단에서 늘 보아왔던 이름이었더 것이다. 그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실종자 상태였다. 말리는 바로 그 때문에 호출된 것이었다. 실종 이전에 로저 벨린은 병든 어머니를 혼자서 정성껏 보살핀 착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17년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일가족을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한 명의 로저 벨린처럼 실종되었던 인물이 갑자기 출현해 한 남자를 처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거기엔 예전 '림보'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형사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밀라는 이런 의문 속에 수사에 나선다. 수사 도중 밀라는 이 사건의 배후에 20년 전에 일어났던 미궁 속에 빠져 버린 한 사건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


 20년 전, 일곱 명의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은 결말이 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연방경찰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전직 군인, 배달원, 여대생, 은퇴한 과학 선생, 과부, 수제 속옷을 만들던 가게 여주인과 대형마트 여종업원 사이에 있을지 모를 연관관계를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모두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소한 단서 외엔 뚜렷한 공통 분모를 찾아낼 수 없었다.(p. 265)


 경찰이 밝혀 낸 것은 이 일곱 명의 실종 사건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이루스!'


 그 이름을 이번 '장기 실종자 연쇄 살인 사건'에서 보게 된 것이다. 바로 범인이 남겨 놓은 다음과 같은 쪽지에서.


 긴 밤이 시작됐다. 어둠의 전사들이 이미 도시에 침투한 상태다. 그들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분이 이곳에 오시기 때문이다. 마법사, 꿈의 주술사, 어둠의 주인, 천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진 카이루스님께서. (P. 188)


 2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이 쪽지로 밀라는 한 명의 수사관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베리쉬. 20년 전 사건은 경찰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베리쉬도 소속되어 있었던 '증인 보호 전담반'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건 '카이루스'를 유일하게 목격한 한 여인이 증인 보호 도중 카이루스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경찰뿐만 아니라 베리쉬 또한 이 사건으로 뼈아픈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그는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베리쉬의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매일 눈에 밟힌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어 경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인류학을 따로 공부했을 정도다. 조직에서 그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이제는 마피아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오해마저 사게 되어 왕따까지 당한다. 경찰에선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는 베리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와 편까지 들어주는 이는 오직 하나, 밀라 뿐이다. 그렇게 밀라와 베리쉬의 연대가 구축된다. 사실 둘은 닮았다. 둘 모두 트라우마가 있다. 밀라도 여전히 '속삭이는 자'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건 무엇보다 그녀의 딸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엄마지만 밀라는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엄마 집에 맡겨두고 매일 밤 앨리스 방에 몰래 설치한 CCTV로 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게 밀리가 엄마로서 하는 전부다. 밀라가 딸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타인의 아픔이나 괴로움, 고통 같은 것들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말리가 내내 실종 전담반 '림보'에서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라진 인간을 찾는 것을 통해 그 감정들을 헤아리고자 함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옷을 벗겨보면 그 알몸의 신체엔 곳곳에 흉터들이 즐비하다.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해한 탓이다.


 티셔츠를 벗으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쳐다보았다. 비쩍 마르고 상처로 뒤덮인 몸. 살이 찌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다면 아마 칼로 그 살들을 다 도려냈을 테니까. 세월이 흐르며 그녀의 몸을 점점 뒤덮은 흉터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고통을 의미했다. 자해하는 길만이 오직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96)


 밀라는 이런 존재였다.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혹시 자신이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생각한다.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 있어.'(P. 94)


 밀라가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해를 했듯이 베리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인류학'을 전공한다. 둘 모두 상실이 가져온 두려움에 대한 나름의 대처였다.


 '이름없는 자'는 결국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다름 아니라 '불안'이라고 보았는데 그처럼 평생 그림자와도 같이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과 두려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말하는 작품인 것이다. 밀라와 베리쉬만이 아니다. 실종자들 역시도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실종 또한 밀라의 예전 동료인 빈첸티가 잘 보여주듯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이루스는 바로 그 두려움이 낳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존재 모두를 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다. 밀리와 베리쉬는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려고 했다. 무시와 제거의 선택지는 그들에게 없었다. 하지만 실종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알기 보다는 무시를, 이해 보다는 제거를 택했다. '이름 없는 자'에겐 이런 '전선(FRONT LINE)'이 존재한다. 베리쉬는 그런 실종자들의 태도를 '악의 논리'라 부른다. 베리쉬는 말한다. 실종자들의 연쇄살인은 카이루스가 '악의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악의 논리' 이것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다. 베리쉬는 '악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미 사자는 자기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새끼 얼룩말을 사냥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비로운 행위입니까, 악의적인 행위입니까? 물론 어미 얼룩말은 새끼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으로 가면 어미 사자는 자신의 새끼들이 배고 고파 굶어죽는 장면을 지켜봐야 합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유는 채식주의 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P. 299)


 이렇게 악의 논리는 '선과 악의 모호성'을 전제로 한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분은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선은 누군가에게 악이 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악행도 얼마든지 용납된다는 '악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마키아 벨리의 말마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해도 좋다. 그는 돈은 전당포 노파와 같이 쓸모없는 이보다는 자기와 같이 사회에 도움이 될 지식인을 위하여 쓰여지는 게 더 가치있다는 이유로 노파를 살해한다. 어떻게 보면 범죄란 게 모두 사실 '악의 논리'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이루스 역시 바로 이 논리로 장기 실종자들을 살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죠."

  "로저 벨린과 나디아 니버맨의 경우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범행대상을 고를 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상 중에서 선택했던 거예요. 동기로 작용한 것은 단순한 앙심이나 복수가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었던 거예요."(P. 301)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이 결국 살인까지 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제거로써 가진 두려움을 씻었고 '악의 논리'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무시와 제거는 알고 이해하려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다. 감정적 차원의 시원함도 있다. 유혹은 거기서 온다. 덕분에 '악의 논리'는 꾸준하게 사랑받아왔다. 정당한 전쟁 논리엔 항상 그것이 동원되었다. 유럽의 십자군은 '악의 논리'로 이슬람 침공을 정당화 했고 독일의 나치는 '악의 논리'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우리나라도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악의 논리로 민주화의 열망을 탄압했다. 지금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악의 논리로 현재의 고통과 범죄를 서둘러 무마시키려고만 들고 있다. 일본이 원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이.


 '악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두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조건 무시와 제거로 두려움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악의 논리에 귀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도나토 카리시의 '이름없는 자'는 '속삭이는 자'의 속편답게 빼어난 드라마 아래 우리가 왜 '악의 논리'에 솔깃해지는 것인지 그 이유를 '두려움'과 관련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밀라와 베리쉬는 그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악의 논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악은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의 산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 학살과 같은 거대악조차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은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두려움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악의 논리'에 유혹당할 수 있듯이 악은 어떤 특정한 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나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그것을 오로지 나치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한 홀로코스트는 언제고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이 말하길, 그 비극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로 여기는 것. 즉 '악의 논리'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고 생활 속에서 지속된 자기 성찰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수반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말리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리의 삶은 괴물이 존재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범죄학자인 도나토 카리시는 이렇게 해서 현대성의 가장 커다란 문제를 작품 속에 형상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현대성 자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비슷한 주제를 도나토 카리시는 소설로 말하는 것 같다.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을 기다리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가장 크지만 이런 지점도 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이름없는 자'의 결말은 열려있다. 밀라는 아직 종착지에 이르지 못했다. 분명 후속작이 나올 듯 하다. 현대성이 가진 비극을 관통하는 말리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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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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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딸리는 머리로 생각해봤다.

삶의 비참함에 대해...

아마도 그건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허기를 채운다는 게 충분조건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필수조건이 되어버렸기에...


이 빌어먹을 허기!

그건 나의 삶을 대한민국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삶들 중의 하나로 얽매었고

끝도 없는 타협과 불합리한 권위와 어리석은 맹목 앞에서의 굴종을 낳았으며

결국 내 두 날개를 모두 잘라 작고 소심한 키위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예전에 생각했다.

육두 문자를 오프닝으로 가볍게 읊조린 다음 왜 우리는 식물처럼 광합성을 못할까 하고.

설마 바로 그 말을 이 만화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회 생활에 연륜이 쌓이고 인간 경험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득도하게 될 때가 있다.

한 눈에 보기만 해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감히 잡히는 때가 말이다.

물론 그 감이 100%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웬만큼은 들어 맞는다.

때로 그 혜안은 작품에도 적용되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이 장면으로 이 만화는 지극히 내 취향의 만화일 것임을 직감했고

결국 더없이 정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장면으로!



나도 고수를 생으로 씹는다.

왜 고수를 꼭 빼달라고 하는지 이해 안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안면몰수하고 누군가는 '주접 떨고 있네'할만큼 이 작품에 찬사를 늘어놓아 보자.

이제와 경고하자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똘끼 충만한 편견 가득한 리뷰다.

메롱, 속았지?

하지만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뭐가 나빠? 



 '먹는 존재'는 올해 읽은 그 어떤 작품보다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반했다.



거침없이 작렬하는 육두문자를 BGM으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직설에 마조히즘을 느끼면서 반했고


상사에 대한 쉬발리얼리스틱한 저항에는 설레었으며


기존 만화의 음식 맛에 대한 표현을 모조리 작파하고 19금 애로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에는 경탄하였다.


 그럼에도 가볍지 않았고 직설로 무장한 분명 사회 밑바닥 삶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서 길어진 그녀의 통찰은 열 권의 인문서보다 더 뇌리에 둔중한 충격을 주었으며 아픔과 분노에는 나도 모르게 덮고 있는 요를 꽉 쥘만큼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여 생각했다. '쉬르발! 이런 게 진짜 만화고 우리 인생사 아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작품은 효자손 같은 거라고.

그냥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게 아니다. 알지만 표현의 능력이 모자라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우리를 대신해 적당한 표현을 찾아주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답답할 때가 참 많지 않은가? 누군가 그 말을 딱 찾아 일러준다면 가려운 등을 효자손으로 긁은 것처럼 시원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효자손이다.


 나는 그런 걸 주는 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알맞은 표현은 중요하다. 그건 어떤 구체성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더라도 막연하다면 그건 나의 선택에,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적합한 표현의 말로 구체화 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정초로 사유와 행위의 누각을 지을 수 있다.


 구약에서 신은 모세가 말을 잘 못해서 걱정이라고 하자 그를 대신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아론을 주었다. 나는 좋은 작품은 이런 아론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하면서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던 사유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고 잘하면 실천까지도 나아가게 하는 존재.


말이 되는 지, 과연 이해 될런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진심이다.


 다른 거 없다.

 "앗! 이거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할만한 것들을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작품.

 그것이 내겐 정말 좋은 작품이다.


'먹는 존재'가 그랬다.

나의 '아론'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스토킹을 했다. 

그러다 찾아낸 작가의 블로그.

거기에 이게 있었다. 큭큭큭...


공자가 말하길 인생사 꼭 필요한 건 '음식남녀'라,

즉 '식'과 '성'이라고 했는데

실수겠지만 그걸 절묘하게 표현한 것 같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할 건가요?


후후...


아론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얼른 나와서 갑갑증을 좀 뚫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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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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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세의 할머니 루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지만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네시.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의 울림. 몸집이 거대함과 의도를 암시하는 숨소리의 울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을 그녀는 호랑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떨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가보니 호랑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새로운 느낌, 대단히 중대한 느낌.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p. 11)


 정말로 대체 그 소린 무엇이었을까? 아들 제프리의 말대로 꿈결의 연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느꼈던 그대로 이제껏 별 탈 없이 굴러왔던 인생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다음날. 과연 그 호랑이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정체모를 한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육중한 몸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그 존재감의 과시와 이름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화상으로 자주 드러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가 얼른 연상되는 그녀는 루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는 자기가 루스를 돌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루스는 썩 내키지 않는 그녀를 자신의 둥지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프리다는 막무가내다. 역시 호랑이는 프리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이 느닷없이 도래한 두 여성의 흥미로운 동거 이야기는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여성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 우리는 루스의 과거를 보게 된다. 그 과거에서 드러나는 루스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루스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 해리와 똑같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에 프리다의 출현은 그녀의 조용한 삶의 수면에 문득 생겨난 파문과 같았다. 느닷없는 동거는 변함없이 돌고 돌았던 궤도의 이탈이었다. 그건 지금껏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위험이었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갇혀 있던 삶에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모험은 탈옥에서 오는 두근거림이었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이가 다시 예전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대한 병장이 다시는 부대를 뒤돌아보지 않듯이.


 그녀의 이름이 하필이면 '루스'인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루스'는 잃어버리다란 뜻의 'lose'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점점 상실(lose)해 간다.


 이로서 호랑이 소리가 암시했던 중대한 일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건 바로 이제 다시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신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는 과거의 삶을 상실해야 했을까? 작가 피오나 맥팔레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해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루스라는 존재 때문에 노년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노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외감, 무력감을 말하는. 분명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식상한 표현이 될 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남성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여성은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물론 결말은 이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루스와 프리다, 그녀들 모두에게 닥쳐온 비극은 누구 때문이었나? 바로 남자들이다. 루스가 프리다에게 날로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예전의 연인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한 집착이 프리다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을 낳았다. 프리다는 남자 친구 조지를 신뢰했다. 그녀가 루스를 찾아와 헌신적인 노동을 한 것도 조지 때문이었다. 루스와 프리다. 둘은 결국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다. 독립적으로 뭔가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루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들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전화로 걱정을 전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리처드조차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지만 정작 그녀가 얻는 것은 소외와 착취 뿐이었다. 프리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남성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불신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초반 해리의 죽음에 나왔던 앨런이라는 존재가 참 의미심장해진다. 앨런, 그녀는 착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5년 전 남편 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해리는 늙어서 '시궁창의 개'처럼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해리 앞에 가던 차를 멈추고 다가와 그렇게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바로 앨런이었다. 루스는 그녀를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불렀다. 루스는 앨런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진 낯선 이가 어느 날 나타나 다른 어떤 이유 없이 오로지 선의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앨런이 그 증거였다.(p. 32)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가능성이 무엇보다 여성에게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한 정도의 구원은 소설에서 오로지 앨런만이 준다.


"당신은 정말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이에요" 필립이 말했다.(p. 369)


 다른 이는 아무도 루스에게 주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전의 연인 리처드도, 두 아들도.

 남자들은 사실 루스가 키웠던 수컷 고양이와 같았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토해서 더럽히는 존재들.


 그걸 프리다가 걸레로 말끔히 닦아내듯 치유를 줄 수 있는 건 앨런 뿐이었다. 프리다도 줄 수 있었다. 루스는 (진짜였는지 연기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랑이를 해치운 프리다를 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안전을 그녀가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루스가 프리다가 하자는 대로 군말없이 한 것도 앨런이 주었던 것을 프리다가 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스는 앨런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아울러 프리다에게도 고마웠다. 프리다는 집과 고양이와 루스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쏟으며 자기 몸이 닳도록 일했고 호랑이를 쫓아내주었다.(p. 266)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프리다마저 루스와 똑같이 여전히 남성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리다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다면, 루스 역시 더이상 리처드나 아들들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프리다와 연대하려 했었다면 아마도 결말의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앨런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난 프리다와 겨우 몇 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앨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p.367)


 

소설의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앙리 루소의 '이국의 숲에서 우산을 든 여인'의 그림이 나온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홀로 우뚝 섰을 때 가지게 될 자유를 뜻하는 그림인데 커버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바로 이런 소설인 것이다. 결국 루스를 두려움에 젖게 했던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남성 혹은 그 남성에 여전히 얽매인 자신이 아니었을까?


 좀 더 보편적으로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이 소설은 독립적으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거나 의존하지 않는 것. 그런 이유로 루스가 하필이면 노년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노년이란 무엇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남성, 여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그것들이 삶을 좀 더 쉽게 걸어가게 만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우리의 보행을 어렵게 하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내 걸음만 늦춰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도 잦다. 이 소설은 문득 그런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비록 이 세상에 온통 흙비가 내리더라도 나 홀로 우산을 받치고 견디려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연대도 그 때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독립한 나가 될 수 있었을 때에.


 난폭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소설이 거꾸로 보여주듯이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홀로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 뿐이다. 프리다와 루스는 그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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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피파 마피아'는 독일의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잔뼈가 굵은 토마스 키스트너의 르포르탸쥬다.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영화나 미니시리즈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에서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된 이들의 검은 커넥션을 흔히 '마피아'라고 하는데 제목 그대로 공익 단체라 세금까지 면제받고 있는 '피파'를 철저히 사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역사는 꽤나 길다. 처음 결성된 것이 1904년으로 벌써 백년이 넘은 조직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힘이 미미한 조직이었다. 종주국인 잉글랜드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창 진행되던 제국주의에 발맞춰 축구의 인기가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파급되자 피파도 힘을 키워갔다. 오늘날 피파의 힘은 제국주의가 바탕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피파의 힘이 강성해진 것은 3대 회장을 역임했던 쥘 미레 때였다. 그의 헌신과 노력으로 소수 나라들 간의 리그에 불과했던 월드컵은 무려 85개국 출전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월드컵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축구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지금의 피파란 온갖 사적인 착복과 뇌물이 오고가는 추악한 부패의 온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을까? 토마스 키스트너는 그 최초의 계기로 1974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아발란제를 꼽는다. 피파와 관련해 아발란제의 취임은 의미가 크다. 아바란제의 취임으로 피파의 성격이 협회에서 기업으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은 피파의 모습은 아발란제가 만든 것이다. 아발란제는 오로지 주관하는 월드컵에서만 나오는 수익으로 근근히 운영되던 피파를 일신하여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나갔다. 덕분에 겨우 직원 12명에 불과하던 피파는 무려 120명의 직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 현재 피파의 매출은 작년만 해도 1조 4천 백억원.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는 지 알길이 없다. 피파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4년마다 예산을 집행하고 결산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사를 받은 적은 아발란제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피파는 회계와 감사를 한 민간 기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는데 그 기업은 회장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회장의 전횡을 감시할 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고 피파가 벌어들이는 그 많은 돈들은 모두 눈 먼 돈일 뿐이다. 엑셀 경이란 사람은 예전에 이런 현명한 말을 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피파 마피아'는 전임 회장 아발란제와 현재의 회장인 블라터로 이어지는 악취로 들끓는 부패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책이다.


 스포츠는 공정이 생명이지만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비열한 권력게임이다.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데다 그 많은 돈을 제 주머니에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는 자리인만큼 회장 선거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부패의 악취는 결코 숨길 수 없다. 누군가는 맡고 조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아발란제와 블라터의 악행에 맞서 피파를 지키려 해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발란제와 블라터는 평소에 챙겨 놓은 비자금을 살포해 이들의 도전을 막았다. 거기에는 2002년의 한국 월드컵도 자유롭지 못하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의심한다. 그 때 한국이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가게 된 것엔 당시 블라터를 지지하지 않았던 정몽준과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 전에서 비론 모레노 심판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이탈리아 선수 토티가 일대일 상황에서 송종국의 태클에 걸려 넘어진 것을 두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판정하여 퇴장시킨 것은 많은 논란을 가져온 판정 중 하나인데 모레노가 그렇게 했던 것이 바로 블라터가 정몽준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정몽준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월드컵에서 높은 성적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일까 뒤이은 스페인과의 8강에서도 한국을 승리로 이끈 명백한 오심이 반복되었다. 정황은 있었다. 월드컵 후에 모레노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월드컵 전만 하더라도 빚이 많아 생활에 쪼들렸던 모레노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큰 돈이라도 들어왔는지 돈을 펑펑 물쓰듯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이탈리아 팀의 주장이자 수비수로 뛰었던 크리스티안 파누치는 "모레노 심판은 오직 한국이 8강에 진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적과도 같았던 한국의 4강 진출.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꿈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모종의 뒷거래가 가져온 결과였을 뿐일까? 하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행도 마다않는 블라터의 행보를 보노라면 그저 순수한 꿈의 성취라고 믿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피파의 현재는 경기에서 맛보는 순수한 감동마저도 오염시키고 있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서문에서 한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규제 없는 권력이 얼마나 끝없이 부패할 수 있는지의 사례로 보아줄 것을 당부한다. 마침 우리에게도 해수부 마피아, 원전 마피아 같은 관피아들이 쏙쏙 드러나고 있는 상황. 비록 축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다가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재미까지 있어 읽는 부담도 적으니.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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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한 결혼정보회사가 대한민국 젊은 남녀들이 과연 얼마나 연애를 하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열 명 중 두 명 꼴로 연애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말 번화가에 나가보면 나 빼고 다 연애하고 있는 것같아도 실상은 이러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려 한다. 경제적 상황도, 놓인 미래도 끝도 없이 불안하기만 하니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바야흐로 싱글이 대세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그렇게 된다는 게 비극적이긴 하지만 앞으로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된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독신의 오후'를 쓴 저명한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앞으로 일본 남성 3명 중 1명은 죽을 때까지 싱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남성의 경우엔 이러한 연애와 결혼 포기 풍조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경제적 고난이 젊은 세대에게 더 빨리 닥쳐온 탓이 아닐까 싶다. '초식남'이 그 증거다. 이 말은 칼럼니스트인 후카사와 마키가 당시 유행하고 있는 일본 젊은 남성의 라이프 스타일을 두고 지칭한 신조어였는데 그건 여성스런 취향을 가진 젊은 독신 남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보다 넓게는 일찌감치 연애를 포기하고 싱글로 살아가려는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찌나 '초식남'의 인기가 강했던지 아베 히로시가 주연한 드라마 '결혼못하는남자'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 그만큼 일본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싱글'이 보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신의 오후'는 남자들 사이에서 싱글이 선택이 아니라 운명처럼 여겨졌을 때 나온 책이었다.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듯이 이 책이 일본에서만 무려 75만부가 팔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우에노 지즈코는 싱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특별히 '싱글력'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과연 남자들에게도 싱글력이 있을까 하고 묻는다. 여성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보편적 특성을 두고 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같다. 우에노 자신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1948년 생이다. 책은 2009년에 나왔다. 대략 싱글로 살아온 연륜의 크기가 얼마인지 짐작된다. 그런 그녀이기에 싱글의 삶에 대해 이렇게 쉽고도 설득력있게 쓸 수 있었을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책은 부정적 답변에서 비롯되었다. 남성들은 싱글력이 아예 없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그걸 그녀는 늙으면 누구나 한 번은 닥치게 마련인 간병의 문제와 사별의 문제를 통해서 보여준다. 섹스 문제도 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이 책은 보편적인 남성 싱글의 삶을 다루기 보다는 중년 이후 싱글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목이 '오후'인 것은 그 때문이다.


 모두 남자들은 한계를 보여줬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남성의 경우, 특히 기성 세대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환경 안에서 자라오고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내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삶을 특히나 힘들어했다. 단적인 예로 일본에서 노년 부부의 배우자 간병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간병받는 이를 살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사별의 경우에도 남성들이 홀로 있는 것을 더욱 어려워했다. 전통적인 일본 남성 가치관에 따라 집안의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바깥 일만 했기 때문에 살림을 꾸려가는 것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거기다 퇴직은 곧 모든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이 되고 직업 말고는 다른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는 그들은 삶의 의미를 달리 쉽게 찾는 것도 어려워서 이제 홀로 보내야 할 시간들이 모두 우울과 불안으로 닥쳐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길들였던 습관은 그대로 남아서 자식들에겐 늘 권위 있는 가장으로 행세하려고만 드니 가족으로부터 고립마저 초래해 싱글의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우에노 지즈코는 책을 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노년으로 가면 갈수록 쇠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본 남성의 싱글력을 길러주려는 책이다. 그 구체적인 노하우를 많은 싱글들의 실제 삶과 평생 싱글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까지 더해 가르쳐 주려는 책인 것이다. 싱글로 맞이할 수 있는 삶의 모습 전반을 다루면서도 내용은 소화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거기다 어조가 솔직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배우자를 간병하는 남성의 경우 해소하기 어려운 성욕 문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내야 행복할지 어떨지 몰라도 남편이 참 안됐어요. 남자 50대면 한창 나이인데 성욕을 체념하고 살아야 하다니 말이에요"

 어렵쇼, 그 사람은 섹스는 부부끼리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라면 그토록 아내를 아끼는 멋진 남성의 애인이 되어 "당신 덕분에 나는 아내 간병에 전념할 수 있어,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건만. 싱글은 이럴 때 진정으로 자유롭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는 대체 남성 편만 들고 여성에게는 적이 될 심보일까?(p. 53)


 75만부 중의 한 만 부 정도는 이 말 때문이지 않을까? 이 봐, 정색할 것은 없다고. 물론 농담이니까.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촌철살인 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 지점들을 꽤 짚어주는 편인데도 어조가 이런 식이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진중함을 이런 가벼움으로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익히고 싶은 것인데 높은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언감생심이다. 과연,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에서 젠더 분야의 선구적 이론가이자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고 한다.  


 '독신의 오후'를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한 가지는 만일 정말로 노년 남성의 홀로 삶이 그토록 힘들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로 어떤 안간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전 삶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안간힘 말이다. 이 안간힘은 생각 이상으로 힘이 세다. 노년이 되면 될수록 고집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게되지 않는가. 이는 노년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쇠약과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로 자존감이 극도로 위축되는 것인데 노년에겐 이제까지 늘 지녀온 자기 생각이나 습관을 포기하는 일도 자존감의 상실로 받아들여 지는 탓이다. 이렇게 자존감과 연결된 것이기에 안감힘을 써서 버티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겨서 잘라내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우에노 지즈코는 변하지 않으면 도래하는 것은 비극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노년이 자존감을 지키려 그토록 매달리는 통칭 '보수(지녀온 자기 것을 내내 고수한다는 점에서)'는 알고보면 매뉴얼과 같다. 대부분 자기가 계획하고 판단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부로 부터 주입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당신들은 늘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 안한다고 하시면서 독신인 자녀에게는 왜 빨리 결혼 안하냐고 다그치는 부모나 친지들도 실은 매뉴얼 대로의 삶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은 쉽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입되 매뉴얼을 좀 더 자유로운 쪽으로 업데이트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낯선 삶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일도, 오래도록 싱글로 산다고 해서 자신을 '패배한 개'처럼 여기지 않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사카이 준코의 베스트 셀러 '노처녀의 절규'에는 남편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30대 이상 여성을 '패배한 개'로 정의하며 자기 비하를 보여준 끝에 "그래요, 나 노처녀예요. 그게 뭐 어때서요?"하고 반문하는 퍼포먼스가 나온다. 싱글 남성 세계에서도 모태 싱글 40년차입니다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요?"라는 상식이 통하게 되면 남성들도 훨씬 편해질 텐데 말이다(p. 82)


 이런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 기꺼이 삶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맞이하려는 태도. 결국 '독신의 오후'가 권하는 부드러운 홍차란 이런 원기를 북돋아주고자 함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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