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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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삶에는 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기 마련이다.

 흔히들 불행이라 부르는 명함을 들고 불현듯 방문하는 이런 불청객 때문에 삶은 자주 맨발로 작두를 타는 듯한 불안을 가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에도 이런 불청객의 방문은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7년의 IMF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그 불청객은 내일의 희망을 갖고 착실히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들을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집을 가진 자는 집을 잃었고  둥지 안의 새들처럼 도란도란 살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다. 삽시간에 절망과 공포가 교차하는 거리로 나앉게 된 이들은 새삼 삶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느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여기엔 그들이 책임질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른들 말씀이나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그대로 성실하게 자기 맡은 바를 다해 살았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경악말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대로 계속 순탄하게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IMF는 비웃으며 뿌리채 뽑아버렸다. 삶은 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허약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하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조금만 큰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져버릴 등잔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IMF는 그렇게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시켰다. 아버지의 말씀은 더이상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고 믿음을 얻지 못한 기성의 권위들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사라지고 카오스의 우주가 도래했다. 더구나 그 우주에 도사린 예측불허의 불청객이 가지는 압도적인 힘은 허무마저 가져왔다. 많은 이들이 이제 삶은 항로없는 비행이며 온전히 자기만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어디선가 주입된 머리 속의 말들은 그저 공허한 관념에 불과했고 오로지 손으로 쥘 수 있는 현실적인 것들만 유일한 가치로 여겨졌다.


 삶이든,사회든 똑같이 불청객은 불안과 허무를 동시에 가져와서는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발판을 없애 버린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열심히 달리다가 뒤늦게 자신이 허공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캐릭터와 똑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날 안심시켰던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구나 하는 통렬한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뭐랄까, 리부트(reboot)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 즉 모든 것을 다시금 시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실연이나 이혼을 겪고 다시는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알아가고 맞춰가야 한다는 게 싫어.'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는 불청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학도 불청객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불청객만큼이나 내가 딛고 있는 '발판 빼내기'의 전문가라는 뜻이다. 문학을 읽다보면 때로 경험하지 않는가?  문학이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의 창살을 문득 드러내어 내가 지금까지 조악한 편견에 갇혀 있었음을 일깨우더니 결국 갑자기 내 발 아래 놓여진 아득한 허공을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말이다. 흔히들 문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달라지게 만든다고 하는데 바로 그 느낌을 달리 일컫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일변시키는 것을 문학이 가져다 주는 자유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불청객은 꼭 회피의 대상만은 아니다. 그들이 주로 하는 발판의 제거는 아득한 추락의 공포와 함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겨움마저 가져다 주지만 사실은 그 추락의 깊이만큼 우리를 해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안정이란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길들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토끼와 같이 너무나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무리 내 목숨이 경각에 처해 있더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기른다. 원래는 '길냥이'였다. 야생의 습성이 강했기에 처음 집에서 키울 때 아주 애를 먹었다. 늘 바깥으로 달아나려고 해서 어떻게 나가지 못하게 하느냐가 매일의 고민이었다. 그랬는데 1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도통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안아 들고서 문을 열면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기를 쓴다. 이제 어떻게 데리고 나가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이 정도로 고양이는 이미 자신이 속한 세계가 바뀌었다. 지금 이 세계에 너무 길들여진 탓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는 것은 결국 세상이 만든 창살을 우리 스스로의 한계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내 집에 편히 거한다는 '안주'는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만든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렇다면 불청객은 오히려 열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문을 열고 사실은 히키코모리나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을 밖으로 내모는 존재인 것이다. 물론 불청객은 기존 세계의 파괴와 허무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파괴와 허무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안다. 그가 파괴하는 것은 실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틀이며 허무 역시도 그 틀을 떠받치는 근거의 삭제를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결국 그는 나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는 존재다. 그렇다면 실은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는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라는 단편집을 읽고 느낀 것을 갈무리한 것이다.

 이 단편집엔 모두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모든 단편에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을 깨닫게 된다. 바로 불청객의 존재이다. 8개의 단편 모두 불청객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삶에 느닷없이 출몰해서는 삶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똑같다.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5년만에 갑자기 돌아온 오빠와 그가 데리고 온 여자가 집안에 일으키는 변화나 '이사'에서 믿고 맡겼던 포장이사업자들의 주인공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의 파괴. '보물선'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던 이에게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던 이가 문득 찾아와 선사한 불행이라든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갑자기 찾아온 과거의 인연들이 가져온 혼돈(그들이 찾아오는 계기가 하필이면 '지진'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그렇다. 이렇게 8개의 단편 모두 누군가가 꼭 찾아와서는(그들은 '엄습'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문득 도래한다.) 나이테처럼 지울 수 없는 파문을 남기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 그러니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하는 왜 이렇게 자꾸 불청객을 등장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늘 혼란과 불안을 가져다주는 불청객을 말이다.


 나는 그걸 이 단편집이 쓰인 사회적 상황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단편집은 원래 2004년에 나왔는데 대부분 2000년을 언저리로 해서 쓰인 것들이다. 말하자면 IMF와 미국의 9.11 사태의 여파가 꽤 강력하던 시기의 산물인 것이다. 개인들이 불현듯 도래한 외부적인 힘에 마구 휘둘리던 시기. 내내 등장하는 불청객은 바로 그 힘의 은유가 아닐런지. 정말 우리에게 도래했었던 현실의 반영으로써 말이다. 그 때 우리들은 종횡무진 쏟아져 들어오는 불청객들 때문에 좌충우돌 하느라 잔뜩 불안했었다. 그들은 멀쩡히 안방에서 잘 살고 있는 아버지를 방에 갇히게 만든 '오빠'였고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부셔버린 '포장이사업자'였으며 남부러울 것 없었던 '재만'을 피고인 신분으로 국정원에 불러가게 만든 '형식'이었다. 불청객 때문에 삶은 쪼들리고 상처입었으며 완전히 부서지기도 했다. 어찌 불청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김영하는 8개의 단편을 통하여 내내 묻는다. 과연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불청객은 날선 톱니바퀴와 같다. 그들과 마주하면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깍여나가게 된다. 하지만 김영하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것이 독인지 아니면 득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바로 그 자화상을 아직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음이 나는 '오빠가 돌아왔다'의 단편들을 끌고간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은 그 때의 우리들은 상황 한가운데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이리저리 타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울을 볼 때 필요한 객관적인 거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몸에 와 닿는 피부의 아픔과 몸의 힘겨움만으로 불청객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뿐이었다. 우리에겐 거울이 필요했는데 김영하는 아마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의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 그 자화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은 모두 하나의 실험이며 그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불청객과 대면한 나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기 위한 거리를 만들어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단편들이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에서 느닷없이 끝나는 게 아닐까 한다.


 단편들 모두가 '기승전'만 있다. 여기엔 '결'다운 '결'이 없다. 불쑥 들어왔다 불쑥 나가버리는 불청객 같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욱 실제 삶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삶도 죽음에 이르기 전에는 '결'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결말이 주는 바로 이 황당함이 실은 김영하의 노림수 같다. 바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 같은 것 말이다. '소외효과'란 연극을 아주 인위적으로 만들어 관객을 연극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관객을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로서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것을 김영하가 쓰는 것 같다. 엉성한 상태의 이야기 덩어리로 만들어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음미하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거울로써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의 바퀴 하나를 빼버린 것과 같다. 끊임없이 덜커덕거리는 마차 위에서 어떻게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왜 이리 불편할까 하면서 내내 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 단편들은 불청객스럽다. 불청객이라는 존재야말로 '결' 자체를 거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청객은 틀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마련해주고자 함인데 분명한 '결'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버릴 테니까 말이다. 혹은 그래서 더욱 '결'은 없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불청객이 사실은 오롯이 우리 스스로 항로를 개척하게 만들기 위한 존재라면 진정한 '결'은 소설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설이 우리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결'은 어디까지나 우리 마음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정말로 김영하는 이것을 배려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꽤 매너 좋은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삶의 모퉁이마다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불청객은 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삶이 허약하기에 이 불청객들은 아무래도 불안한 존재이지만 '오빠가 돌아왔다'는 무조건 회피할 게 아니라 환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들로 인해 나 자신이 더욱 나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불청객은 순수한 응시를 가져다 준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이 덧씌웠던 시선에서 해방되어 나의 참된 시선으로 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청객이 두려웠던 것은 내 진실된 모습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던 데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신뢰가 바로 불청객에 대한 환대를 낳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오빠가 돌아왔다' 단편에서 왜 이혼해서 오래도록 따로 살던 엄마가 오빠가 데려온 여자에게 그렇게 했는지 또 오빠의 귀환을 계기로 바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는 지가 이해된다. 세상이 내 선택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세상이든 상관없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니까. 분명 '오빠가 돌아왔다'의 불청객들은 궁극적으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전령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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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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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국기의 재래. 정말 반갑다.


'십이국기' 1권, 가제본의 모습


 저자인 오노 후유미를 좋아한다. 그녀의 주 특기라고 한다면 호러다. 아마도 누군가의 기억에는 꽤나 무서운 이야기를 잘도 쓰는 여성 작가로 남아 있으리라. 나는 그 때문에 그녀를 좋아한다. 오노 후유미에게 있어 공포는 목적이 아니다. 실은 수단에 불과하다. 오노 후유미의 진짜 관심은 '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변혁을 갈망한다. 그녀는 일본 사회의 현재 모습에 염증을 느낀다.자기가 속한 일본이라는 사회가 좀 더 올바른 쪽으로 자리잡히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런데 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그 사유의 과정을 오노 후유미는 소설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회파' 작가다. 미스터리가 아닌 호러를 주 특기로 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 오노 후유미의 완성형은 '시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최고 걸작이더라도 완전한 무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시귀'와 같은 최고 걸작이 태어나도록 산파 같은 역할을 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귀' 바로 전에 나온 이 작품, '십이국기'이다.


 '십이국기'는 판타지다. 오노 후유미의 주 특기인 호러는 아닌 것이다. '십이국기'는 출판사가 먼저 제의해서 쓰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 오노 후유미는 판타지의 '판'자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짜'였다. 그래도 그녀는 이쯤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도전했다. 오노 후유미의 작품을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겠지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다. 출판사는 당시 유행 중이던 중세 유럽 스타일의 판타지를 원했다. 하지만 오노 후유미는 거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으로 하기 보다는 그래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세 유럽은 잘 몰랐지만 고대 중국이라면 잘 알았다. 그래서 판타지의 세계를 그 쪽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독특한 판타지인 '십이국기'가 태어났다.


 오노 후유미로 하여금 '십이국기'를 쓰게 한 또 하나의 유인(incentive)이 있었으니 바로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 영웅 전설'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소설을 좋아했는데 그러다 주인공 황제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실은 영원히 죽지 않는 , 말하자면 불로불사이고 그러다 나쁜 왕이 되어 버리면 바로 불로불사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기초가 되어 '십이국기'의 독특한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이번에 나오는 1권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 여주인공 요코의 여행 동반자가 되는 라쿠슌을통해 다음과 같이 말해지고 있다.


 "한 임금이... 오 백 년?"

 "물론이지. 왕은 신이야. 사람이 아니야. 하늘은 그 왕의 기량만큼 나라를 맡기지. 그러니까 능력 있는 왕일수록 치세가 길어."

 "흐음..."

 "왕이 바뀌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만큼 좋은 왕을 얻은 나라는 풍요로워지지. 특히 연왕은 여러 개혁을 이룬 수완가야. 명군이라면 종왕도 명군이지만, 주국은 안온하고 안국은 활기 있다고들 하지." (p. 321)


 '요코'와 쥐인 '라쿠슌'


  뭔가 '성군지상주의'랄까? 플라톤의 '철인' 사상 비슷한 냄새가 난다. 오노 후유미가 '은하 영웅 전설'의 자장 안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민주주의를 만능의 체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십이국기'의 나라들은 동시대 일본의 곁에 있다. 주인공 요코는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가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난 '게이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십이국기' 사람들이 '허해'라 부르는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즉 '십이국기'와 요코가 살던 현대 일본은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나라를 이루고 있는 근본 체제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십이국기'가 '은하 영웅 전설'처럼 현재의 일본과 전혀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그것을 일종의 대차대조표 삼아 거꾸로 지금 체제의 대안을 그려보는 오노 후유미만의 사유 실험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오노 후유미는 '십이국기'의 체제를 정교하게 세공한다. 1권을 읽으면서 다 알 수 있는 부분인데다가 설명하다 자칫 스포일러를 남발할 수 있기에 여기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분명 소설을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설정에 꽤나 공을 들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시귀'도 그렇고, '흑사의 섬'도 그렇고 이런 아주 정교한 배경의 설정이야말로 오노 후유미의 특기라 할 만하다. 읽다보면 오노 후유미가 정작 이야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세계를 만들고 질서를 구축하는데 더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스스로 즐기지 않으면 그만한 공을 들이기가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가 왜 하필이면 이런 개인적 역량이 나라의 운명마저 좌지우지 하는 설정을 하게 된 것인가가 드러난다. 1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코의 여정은 오노 후유미가 그런 체제를 상정했던 이유의 설명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오노 후유미가 그녀의 모든 작품을 통털어 천착하고 있는 '혼종'의 주제가 나타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쯤에서 오노 후유미가 왜 호러를 즐겨 쓰는지 말해야 할 것 같다. 오노 후유미에겐 언제나 외부의 감각이 중요하다. 폐쇄된 자아를 허물고 바깥으로 눈과 마음을 열게 만드는 감각이다. 오노 후유미는 그 '변화', 궁극엔 '혼종'이 구원의 통로라고 여긴다. 자아든 사회든 할 것 없이 말이다. 그녀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고인 웅덩이'다. 외부에겐 일체 마음을 열지 않고 기존 자신의 것만 오로지 고집하는 것을 그녀는 혐오한다. 그건 일본이 바깥의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폐쇄 사회인 것에 대한 그녀의 염증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호러를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도 같은 외부의 감각으로 벽을 흔들려는 것이다. 내부를 허무는데 호러만큼 충격을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십이국기'에도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의 여정은 정확히 이것을 보여준다. 처음 '허해'를 건너온 요코는 절망한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혼자서. 게다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첫 여정에서의 요코의 모습

('허해'를 건너온 뒤, 요코는 원래 부분만 빨강이던 머리카락이 모두 빨강이 되었고,

얼굴과 모습이 이전과 달라졌다. 나중에 여행하는 나라의 옷으로 갈아 입는데 사람들은 요코를 사내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허해'를 건넌 뒤, 요코는 철저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요코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허해'를 건너온 자들을 '해객'이라 부르는데 요코가 있는 나라는 그 해객을 체포하려 한다. 더구나 한 번 '허해'를 건너오면 다시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버려졌다. 그녀에게 익숙한 것들은 모두 '허해' 건너편에 있다. 여기는 그 경계의 바깥인 것이다. 외부의 감각이 압도적으로 충만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예전의 나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변할 것인가? 변한다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코의 여정은 내면의 여정이다. 거기서 요코는 비로소 진실한 인간 관계가 어떤 것인지 눈을 뜨고, 인간 존재에게 있어 확실한 경계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녀 역시도 지금까지 그녀가 생각해왔던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이러한 요코의 변화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 투영된 오노 후유미의 본심이 아닐까 싶다. '십이국기'는 그런 면에서 '시귀'와 연결되며 그 보다 긴 호홉으로 '나와 타자', '변화와 혼종'의 주제를 천착한다.('십이국기'는 아직도 완간되지 않았다.)


 '십이국기'는 예전에 '조은세상'에서 발간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마저 우리나라에서 방영했기에 아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전에 나온 판본은 두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엉성한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삽화가 대부분 삭제된 것이었다. 나는 지금 가제본을 받아 읽었고 가제본을 받을 때 엘릭시르가 먼저 밝히기를 가제본엔 삽화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기에 삽화 쪽은 뭐라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번역에 관해서라면 가히 '일취월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단, 이전의 혼란스럽기만 했던 표기와 호칭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어 대화도 한결 산뜻하게 들려온다. 덕분에 더욱 쉽게 지금 읽고 있는 상황을 머리에 그릴 수 있었다. 번역만큼은 믿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솔직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번역한 이가 '시귀'를 번역한 추지나이기 때문이다.  삽화에 관해서라면 정식 발매본엔 신조사의 재간행본 그대로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가 삭제 없이 모두 들어간다고 한다. 야마다 아키히로의 일러스트를 좋아했다면 이번 '십이국기'는 '반드시 소장!'이 아닐까 싶다.


 자세한 사항은 엘릭시르가 보내온 'Q&A'를 참조.

  


  어쨌거나 십이국기의 재래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완결까지 다 나온다고 하니, 이러다 영영 결말을 못 보게 되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했던 나에게는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만큼 기쁜 소식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마음 힘든 것 투성이인 요즘, 이렇게 나마 또 조금 숨 쉴만한 것을 얻는 것 같다. 오래도록 나의 산소 호흡기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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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4-11-04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잠깐만요... 헤르메스님 서재 놀러왔다가 이런 소름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서고 숨이 턱 막히는 소식이.......
와........ 헤르메스님한테 먼저 반갑다고 인사했어야 하는데.....
결말까지................... 와....

ICE-9 2014-11-05 02:36   좋아요 0 | URL
오! 소이진님 방가방가~!!
워떻게 지낸데요? 정말 많이 궁금했어요~^ ^
사실 이 소식 들었을 때 소이진님도 많이 좋아하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역시 그러네요. 저와 똑같이~!!
같이 제발 완결까지 무사히 나올 수 있도록 빌자구요~^ ^
그리고 잘 지내고 있는 거죠? ^ ^
 
신의 손 밀리언셀러 클럽 104
모치즈키 료코 지음, 김우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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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골키퍼나 투수처럼 손으로 하는 일에 남다른 능력을 가진 친구에게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오, 그는 정말 신의 손을 가졌어."


 또한 때로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을 예감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정말 신의 손이 한 일이야."


 '신의 손',

 그것은 재능이자 운명이다. 신이 허락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라 여기기에 얼른 운명으로 생각되는 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운명적인 것은 비극의 아우라를 가진다. 하물며 그것에겐 죽음의 냄새마저 도사린다. 죽음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고 도저히 변경 불가능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불행이듯 운명은 자주 저주처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가능하다. 재능은 곧 저주라고.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어느 날 아주 오래된 나무를 본다.

 수백 년을 산 나무다. 장자의 옆에서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나무는 말이죠, 그저 오래 살고 있다 뿐이지 별 쓸모는 없어요. 집을 지을 수도 없고 문짝으로도, 바퀴로도 도대체 사용할 수가 없어요. 아마 세상에 이렇게 쓸모없는 나무도 찾아보기 힘들 걸요."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때문에 이 나무는 이토록 오래살 수 있었던 것일세." 나무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천재들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했는데 이 사실을 대비해 보면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의 다음과 같은 말은 꽤나 설득적이다.


"이것(스파이더맨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다!"


 '신의 손'은 그 모순을 함축한 말이다.

 이를테면 카인의 표식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바람에 신으로부터 영원한 유랑의 형벌을 받는다. 그는 신에게 애원한다. '이런 살인자의 몸으로 세상으로 나갔다간 저의 죄 때문에 언제 다른 사람들 손에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신은 카인의 이마에 표식을 준다. 그리고 세상에 선포한다. '이 표식을 가진 자를 건드리면 내가 똑같이 보복하리라.' 카인은 안심하고 세상에 나간다. 표식을 가진 탓인지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동시에 아무도 자기 곁에 다가오지 않는다.


 카인이 잘 보여주듯이 피터 파커가 말하는 저주란 고독이다. '신의 손'은 에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화염검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질시와 몰이해라는 가위로 싹둑! 

 천재가 불길한 것은 묘지를 배회하는 유령과도 같은 그림자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홀로 죽거나 고독에 미쳐서 광기의 희생양이 될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도 같은 그림자를...


 소설 '신의 손'에 드리워진 것도 그런 그림자다.


이 소설은 14회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수상작인 '대회화전'으로 먼저 소개된 바 있는 모치즈키 료코의 데뷔작이다.


2004년 집영사문고본으로 첫 간행되었을 때의 표지.

 이름에서 이미 알아차렸을 지도 모르지만 료코는 여성작가다. 1959년에 태어났으니 데뷔작은 40대 중후반에 나온 셈이다. 흔한 말로 늦깎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기에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무명 작가로서의 삶이 길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이 소설, '신의 손' 때문이다. 소설이 저자 료코와 똑같은 여성 작가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기스기 교코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녀를 만나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그녀는 분명 신이 부여했으리라 여길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글에 대한 열정은 더 커서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을 남겼으나 한 번도 출간되지 못했다. '신의 손'을 가졌으나 내내 무명 작가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 속에 괴물을 한 마리 키우는 것과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녀는 세상에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이 키우던 괴물에 끝내 먹혀버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다. 어차피 소수만 알고 있었던 존재. 그 이름은 곧 세상에서 잊혀져 버린다.

 그런데 10년 후, 불현듯 그 이름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대중과 평단의 호평 속에 공신력 있는 문학상을 받은 한 소설이 실은 기스기 교코의 작품을 훔친 것이라는 고발이 나온 것이다. 고발한 주체는 다카오카 마키라는 여성.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사인 히로세를 통해 기스기 교코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편집자 미무라에게 자신의 원고를 보내 그것을 증명하려 한다. 미무라가 그 원고를 본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분명 기스기 교코의 것이었다. 더구나 그 원고는 단 한 번도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가 사라진 기스기 교코일까? 미무라는 히로세를 만나 그 진상을 알아보려 한다. 밝혀진 사실은 다카오카 마키는 기스기 교코가 아니라는 것. 더구나 그 둘 사이엔 아무런 접점조차 없다. 생판 남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카오카 마키는 어떻게 세상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기스기 교코의 원고를 가지게 된 것일까? 미스터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는 누구도 몰랐던 기스기 교코의 진실된 초상으로 인도한다.

 기스기 교코의 초상을 보았을 때,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바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에 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남성 중심 문명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여성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사회의 가장 구석진 자리(격리된 공간의 일종으로써)인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물론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재능으로나 지성으로나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비범하다. 실은 바로 그 때문에 다락방에 갇힌 것이다. 그녀의 재능과 지성으로 남성 사회를 유지시키는 남성만이 가지는 전유물들을 획득하여 남자들을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에게 그건 전복의 징후였고 더구나 길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보이지 않는 다락방에다 가두게 된 것이다. '광기'의 팻말을 여성의 목에다 걸거나 '괴물'로 치부하여...

 실제로 19세기에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글쓰기를 과감하게 감행했던 여성들은 모두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굴레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글을 쓰려는 여자들은 그 시기 남자들에게, 그것도 작가인 남자들에겐 더욱 주제 넘은 건방진 짓이었고 그 어떤 미덕으로도 상쇄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악행이었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므로 감히 펜을 통해 경계를 넘으려 했던 여성들은 당연히 쏟아지는 비난과 격리를 감수해야 했다. 쓴다는 것엔 그만한 위험이 뒤따랐다. 재능은 그녀들에게 저주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의 손'의 기스기 교코 역시도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오직 그것만이 그녀 삶의 전부다. 그녀는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수 년간 오로지 열정만으로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엄청난 양의 글을. 남성들은 그녀를 길들일 수 없었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그녀에게서 펜을 뺏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가 남성 사회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암시로 그녀가 쓰는 글들은 대부분 범죄와 파멸 그리고 죽음이라는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사회의 안정된 기반을 허무는 이야기들. 그렇게 그녀는 격리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오로지 남성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도 교코를 상대하는 편집자들은 모두 남성으로 소설은 설정하고 있다. 19세기 여성들이 글을 쓰는 남성 작가들에게 포위되어 다락방에 '미친 여자'로 갇히게 되었듯이 교코 또한 똑같이 갇히는 것이다. 정녕 기스기 교코는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신의 손'은 사실 이런 이야기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이고 결국 기스기 교코의 실종과 오랜 세월이 지나 불현듯 도래한 그녀 원고의 비밀도 풀리지만 보다 심층적으로 보자면 남성의 음경이라 할 수 있는 펜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 쓰기 싫지만 이만큼 그걸 선명히 드러내는 말도 또 없는 것 같아서 부득불 쓴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도 같은.

 과연 그녀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결말에 밝혀지는 비밀은 누구에게는 실패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난 성공으로 보인다. 그녀는 그것으로 모든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성들에게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영원한 물음표의 존재. 19세기의 상황으로 보자면 그것이야 말로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던 펜을 되차지한 여성의 모습이랄 수 있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가장 독립된 여성의 모습이니까.

 광기가 투쟁이고 격리가 해방이다. 이런 비틀림이야말로 남성 중심 세계의 중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벗어나게 만드는 날개인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결말을 긍정적으로 본다. 더구나 뒤늦게 출현한 원고는 교코를 둘러싼 모든 남성 가해자에게 그대로 복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투쟁(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은 성공한 것이다. 같은 여성 작가인 모치즈키 료코는 어쩌면 아직은 무명 여성 작가로서 데뷔하기 험난했던 경험으로 교코에게 빙의되어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지도 모른다. 교코가 토해낸 언어들은 그대로 소설을 쓰던 당시 료코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료코인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게 교코로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료코가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먼저 알려진 '대회화전'과 꽤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회화전'의 전개는 좀 '스타카토'적인 면이 있었는데 '신의 손'은 '레가토'적인 면이 강하다. 그 이음새를 단단히 하는 것이 투명하게 묘사하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다. 그래서 더욱 교코의 고독과 방황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쩌면 남자인 나보다도 지금도 펜을 들고 기꺼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려는 여성들이 더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신의 손'은 그런 그녀들을 위한 연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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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맨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6
오리하라 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그랜드 맨션'은 2013년에 나온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이다. 이게 정말 얼마만에 만나보는 그의 작품인가? 1951년에 태어나 1988년에 '다섯 개의 밀실'로 데뷔한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 3부작과 '~자' 시리즈를 비롯하여 정말 많은 작품을 썼는데 그래도 내게는 오리하라 이치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서술 트릭'이다. 분명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인 '도착의 론도'로 처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도착의 론도' 자체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다.


 여기서 오리하라 이치는 자신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서술 트릭을 사용할 수 있는지 가득 보여준다. 서술트릭의 효과는 결말에서 뒤통수를 맞고 반드시 다시 읽게 된다는 것인데 '도착의 론도'가 꼭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 트릭에서 유독 강세를 보이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아니, 일본만이 유일하게 서술 트릭을 다룬 작품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오리하라 이치는 거기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던 작가라 할 수 있었다. '도착 3부작'은 마치 서술 트릭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나를 실험하려는 듯한 인상마저 짙게 풍기는데 그만한 재능이 바탕되어 있기에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그랜드 맨션'도 도착 3부작의 노선을 따른다.

 즉 서술 트릭이 주가 되는 작품이다.


 표지가 너무 멋지기에 아무래도 표지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보았을 때 역대급 표지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책에 대한 호기심을 부채질하는 표지가 또 있을까 싶다. 작가의 이름이 뭐든 장르가 뭐든 상관없이 닥치고 펼쳐서 읽고 싶어진다. 원래 책을 위해 만들어진 표지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책 내용과 묘하게 상통한다. '그랜드 맨션'은 같은 공동 주택에 사는 서로 다른 7명을 하나의 단편마다 하나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연작 소설처럼 되어 있는데 그 중 밀실 살인을 다룬 '시간의 구멍'이 바로 표지의 그림과 상관있다. '시간의 구멍'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설정을 따왔는데 거기서 라스꼴리니코프의 역할을 맡은 미스터리 소설 수집광 청년은 정말 구하고 싶은 책이 드디어 나왔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구할 수 없게 되자 평소 쌓아놓은 현금이 많다고 자랑하던 옆집 할머니의 돈을 훔쳐올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죄와 벌'에서의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국 드라마 '유토피아' 덕분이다. 끝까지 이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던 '엘리스'에게 경배를!)가 바로 그 할머니인 것이다. 그는 온갖 추리 소설의 트릭을 다 꿰고 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할머니를 밀실 살인하려 계획을 세우다 우연히 지진으로 인해 할머니와 자신의 방 사이에 있는 벽에 사람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돈을 훔치려 한다. 그러니까 표지의 그림은 바로 그 벽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남자지만.


 그런데 여기까지 들으면 '어째서 이 소설이 서술 트릭이라는 거야?'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아무래도 벽에 난 구멍을 이용한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보일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 서술 트릭이 사용되고 있다. '시간의 구멍'은 청년의 방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완벽한 밀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누군가 취조 받는 것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인물들을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누군가 던진 테니스 공이 뒤통수를 때리듯 알게 된다.


 '그랜드 맨션'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일곱 개나 모여있는 것이다. 저렇게 등장인물들이 혼동되기도 하고 공간이 뒤섞이기도 하며 시간도 뒤죽박죽이 된다. 서술 트릭은 내가 코스모스라 알고 있던 우주를 뒤늦게 카오스라고 알려 둔중한 충격을 주는데 그것을 통해 과연 내가 무엇을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까지 나아가게 만든다. 즉 확실한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거나 잠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 트릭은 가뜩이나 폐쇄된 사회라고 알려진 일본에게 그 외부로 사유의 문을 여는 좋은 통로가 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유독 일본에서 서술 트릭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서술 트릭의 매력을 잔뜩 느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랜드 맨션'이다. 사실 소설의 '그랜드 맨션'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거 공간에 사는 이라면 결코 살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공간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층간 소음', '스토킹', '살인', '절도', '사기', '학대' 그리고 '방화' 가 모조리 일어나기 때문이다. 7편의 이야기는 이것들을 하나씩 담고 있는데 읽다보면 절로 '뭐. 이런 곳이 다 있어!'하게 된다. 어쩌면 오리하라 이치는 이 '그랜드 맨션' 자체를 지금 일본 사회의 은유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날로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지만 일본도 사정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 주거 공간에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살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다. 이 말은 내가 타인에게로 열려있어야 그만큼 나 역시 생활의 안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생각해 보면, '그랜드 맨션'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은 타인과 겨우 벽 하나를 두고 살 뿐인데도 철저히 자신의 이익과 욕망만을 관철시키려 한 것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일본이라는 사회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의 근본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런 이기적 존재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에 오리하라 이치는 슬쩍 서술 트릭을 가져온다. 믿었던 세계를 한 순간에 허물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을 넘어 외부의 타자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것이야 말로 오리하라 이치가 '그랜드 맨션'을 통해 주려는 메시지다.

 서술 트릭이라는 형식 자체가 주제인 것이다.


곁다리 : 사진의 배경은 로저 워터스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해, 그 붕괴의 현장에서 핑크 플로이드의 대표적인 앨범 'THE WALL'을 라이브로 공연했었는데 그 실황을 담은 LP의 커버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랬듯이 벽의 붕괴가 곧 구원이라는 '그랜드 맨션'의 근원적인 주제와 통하는 것 같아서 놓아보았다. 거기다 곧 아주 오랜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신작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환영의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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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8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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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부'는 나쓰메 소세키가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관두고 아사히 신문의 전업작가가 되어 '우미인초'에 이어 두 번째로 연재한 작품이다. 1907년, 6월에서 10월까지 '우미인초'를 연재하고 2개월을 쉰 다음, 1908년 1월부터 4월까지 연재했다. '우미인초'는 꽤나 인기를 얻어 백화점에선 '우미인초'란 이름을 붙여 목욕가운을 팔았고 귀금속점에선 '우미인초 반지'를 팔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춘원 이광수가 '우미인초'에 영감을 받아 근대 최초의 장편 소설이기도 한 '무정'을 썼다. 다소 불안한 가운데 시작했던 첫 연재 작품이 성공을 거둔 탓인지 소세키는 두 번째 연재물에선 더욱 과감하게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문학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렇게 해서, 나쓰메 소세키 작품 세계에서 가장 이채로운 빛을 발하는, 때문에 가장 소세키답지 않은 소설로 늘 손꼽히는 '갱부'가 태어났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열 아홉의 청년이 죽을 결심을 하고 가출한다. 게곤 폭포나 아사마 분화와 같은 유명한 자살 명소를 찾아 가려고 정처없이 걷고 있는데 한 사내가 갱부가 되지 않겠느냐며 접근해 온다. 호기롭게 가출은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더없이 막막하고 외로웠던 그는 별 생각도 않고 그만 승낙하고는 사내를 따라 광산으로 간다. 평생 서생으로만 살아온 탓에 정식 광부는 되지 못하고 조수가 된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정반대인 거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갱부가 되어 남으리라 생각하고 버티지만 결국 폐가 약하다는 진단을 받아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이게 끝이다. 소설은 전혀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점에서 문득 끝난다. 더구나 그 때까지 끌어온 이야기도 이거다 싶은 줄거리가 없을 정도로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았기에 이 갑작스런 종결은 더욱 황망하다. '기승전'만 있고 '결'은 없었던 '풀베개'와 똑같다. 소설은 딱 절반을 잘라 전반은 사내에게 이끌려 광산까지 오게되는 과정을, 후반부는 광산에서 일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게 전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완결이 아닌 과정의 소설이다. 결말의 지점에서 마치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오로지 그 하나의 끝을 위해 존재해 온 것인 양 만드는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결말을 없애버려 소설의 모든 부분이 저마다 존재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소설인 것이다. 즉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죽음과도 같은 결말 위에서 독자 자신이 거쳐왔던 소설의 시간을 과거로 회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모든 시간을 지금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재로 만들어 참여하게끔 만든다. '갱부'는 소세키의 그런 의도로 쓰인 소설이다.


 이것은 소세키의 문학관과 연결된다. 앞서 '갱부'는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으로 더욱 밀고나간 작품이라 했다. 그렇다면 소세키가 추구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건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다. '하이카이적인 것'이란 쉽게 말해 하이쿠를 탄생시킨 원천 같은 것을 말한다. 하이쿠는 바쇼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일본의 봉건 체제가 몰락하면서 발전한 '하이카이렌가'가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더불어 점점 형식화되자 바쇼는 그에 반발하여 그것을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이쿠'가 되었다. 즉 '하이카이카적인 것'이란 형식 자체가 전무했던 본래의 하이쿠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소세키는 평생 그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서양의 근대에 맞서 일본적인 것을 수호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소세키는 메이지 유신의 인물이다. 이는 곧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한 나라가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보다 거대한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예로 '도련님'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세계 보다는 국수주의에 물들어 점점 제국화 되어가는 일본에 반발해 나온 작품이었다. 그가 하이쿠를 문학의 이정표로 가져온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서양 문학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선망을 가졌던 서양 문학이 곧 종말하리라 예견했다. 그것은 그에게 바쇼를 절망하게 했던 도쿠가와 체제의 '렌가'와 같았다. 그것은 너무 형식적으로 굳었고 그 규격화되다시피한 획일적인 형식 탓에 스스로 아무리 리얼리즘이라 표방하고 있었어도 존재하는 세계를,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바쇼가 그 '렌가'는 렌가가 아니라고 보았듯이 소세키도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언젠가의 강의에서 소설가의 임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자신의 심리적, 감각적 체계를 통해서 '비아(非我)'인 세계의 객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서양 문학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지 못했다.


 일단 '나'가 사라져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이룩된 3인칭 관찰자나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품이 특정한 상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어디나 널리 통용되는 보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분명 협소한 한 개인이 보고 느낀 것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칭의 이동으로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시켰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문학은 쉽게 진리를 말하고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로까지 자처하면서 스스로 권위를 쌓아나갔다. 그러자 작가는 독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진실로 작가와 독자는 화자와 청자라는 차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대등한 개인들의 관계일 뿐이었으나 작가와 문학이 진리의 대변자로 자임하면서 독자는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버렸다. 그 수도사처럼 독자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은 신과도 같은 작가가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해석하는 게 전부였다. 문학이 진정 근대를 이룩한 계몽의 산물이라면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대화와 토론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가 이룩한 민주주의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독자가 할 수 있는 건, 누가누가 작가의 뜻을 제대로 찾아내나와 같은 정답 맞추기 밖에는 없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서 문학 수업에서 자주 들었던 '밑줄 좍'이야 말로 실은 문학이 죽었다는 선포에 다름아니었다. 문학은 그 형식이 권위가 되어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했을 때 이미 수명이 다했던 것이다.


 서양 문학은 개인을 '개인'이 아니라 '대중'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이 아닌 '보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내 식대로 사는 게 아닌 '보편'적인 방식으로 살게 만들었다. 서양 문학은 개인의 자유와 거기에 뒷받침된 가능성을 보편의 굴레로 구속했다. 그렇게 '국민'을 만들고 개인을 '국가'아래 종속시켰다. 문학이 국민국가의 도래를 가져왔다고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했던 건 이런 이유였다. 당연히 문학의 진정한 사명인 세계의 객관적인 진실마저 드러내지 못했다. 문학이 독자에게 주입한 것은 기실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쉽게 보편의 탈을 썼고 '누군가'의 눈과 판단은 '우리'의 눈과 판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내 눈과 내 머리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틈엔가 이식되어버린 남의 눈과 머리로 보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사람을 만드는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소설과 동시에 탄생했다. 사실은 문학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닐까?


 소세키는 그것을 보았다. 문학이 결국은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세 가지가 중요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의 산물임을 밝히는 것. 그 개인조차도 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실수도 하며 인간적으로도 좀 모자란 한계 많은 존재로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대변자이니까. 둘은 서양 문학의 규격화되다시피한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그러한 형식으로부터의 이탈이야말로 문학의 진정한 모습이다. 셋은 결코 보편이나 진리를 자처하지 않는 것. 섣불리 다 안다고 주제넘게 나대지 않는 것. 어디까지나 이건 불완전한 한 인간의 소박한 견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 그래야 독자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독자를 대등한 참여자로서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카이적인 것'의 실체다.(물론 소세키의 제안에 따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바로 이 '하이카이적인 것'이 '갱부'에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나 '갱부'를 읽다보면 참 많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바로 홍상수의 영화 제목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다. 그 영화에서 고현정이 분했던 인물은 자꾸 자신을 나무라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해요."


 이 대사에서 '나'를 '세상'으로 바꾸면 그대로 '갱부'에서 소세키가 독자에게 정말 들려주고자 하는 말이 될 것 같다. 즉 '삶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불확실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섣불리 다 안다고 함부로 단정짓지 마라.는 것.



 사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내내 주장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감독의 진심은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가 분한 인물인 '문호'의 입을 벌려 다음과 같이 문자 그대로 폭발했던 적이 있다.


 니가 어디서 줏어들은 게 널 고질(홍상수식 조어로 극중에서 문호에게 '교수님 저질 같아요.'라고 말하자 문호는 그럼, 너는 고질이냐? 고질이 뭐냐? 라고 대꾸한다.)로 만드는 게 아냐. 너 책 많이 읽었어? 니가 읽은 그 책들이란 거 있지. 그게 다 죽은 새끼들 찌꺼기야. 니가 믿는 것들이란 다 그런 새끼들의 자기 정당화야. 아전인수야. 알아? 딱 니가 아는만큼만 갖고 애기하는 거야. 마. 우리가 뭘 아니? 뭘 확실히 아니? 왜 꼴값을 해. 씨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통렬하다. 바로 이 말을 나쓰메 소세키는 '갱부'를 통하여 할 수만 있다면 독자나 당대 일본 사회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서라도 해주고 싶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세키는 진심으로 문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갱부'를 과정의 소설(소세키 스스로는 반복적으로 '갱부'는 소설이 아니다. 이런 건 소설에 맞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편의상 이렇게 쓴다.)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어때?'하는 식으로.


 '갱부'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하이카이적인 것'은 바흐친이 소박한 농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밝혀냈던 것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과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다름아닌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라 정의한다. 쉽게 말해 옛날 조선 시대의 한 장터에서 양반을 조롱하는 마당극을 보고 있는 민중들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들은 기존 권위를 풍자하고 해학하여 실추시키고 자신 역시 그 세계에 대등한 참여자임을 각인시킨다. 풍자와 웃음은 그들의 무기이며 연대를 위한 끈이 된다. 마당극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곳곳에서 구경꾼들의 이런 저런 말들도 오고간다. 마당극은 한껏 열려있다. 그런 화자와 청자 사이의 넘나듦이 무한히 가능한 공간이다.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세계가 있으며 그 모든 세계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저마다 존중받아야 하 개체로서. '민중적이고 카니발적인 세계 감각'이란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갱부'는 바로 그 지점으로 나아가려는 작품이다.


 '갱부'는 1907년에 쓰여졌다. 시점을 생각하면 소세키가 '갱부'에 투영한 태도가 더없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바야흐로 일본은 파시즘적인 제국의 발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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