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자기정체성을 만들려는 이 열정은 불안한 현재에 직면해 이미 아는 과거를 지키자는 쪽으로 움직인다. 역사적 전환이라는 사건이나 경험이 기존의 감정이나 자신의 공간 감각에 맞지않으면 그 진리의 가치는 줄어든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더 편안하고 쉬운 과거의 격언이 최종적인 참조 기준이 된다.(p. 38)

타인과 자신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순수화하려는 이런 욕망 속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숨어있다. 이런 정체성의 기획에서는 알려진 것들이 너무나 끈덕지게 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미지의 것들은 배제된다. 여기서 현실은 자신이 뚜렷하게 표명한 자아상과 자신의 세계상에 포함되는 것 말고 다른 게 될 수 없다. (p. 37)

리처드 세넷이 25세에 쓴 `무질서의 효용`(다시 봄 간행) 중에서.
세넷은 이 보수화를 이끄는 순수화의 욕망이 삶의 특정 순간에 만들어지는 감정이라 보고 있으며 주로 청소년기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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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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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관의 살인'에 뒤이어 '수차관의 살인'을 읽었습니다.

요즘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시간날 때마다 다시금 복기하는 셈인데

읽으면서 과연 '관'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뭘까 하고 거기에 맞춰 하나하나 알음알음 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신본격의 기수'로 흔히 평가됩니다만 신본격이란 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알린 '십각관의 살인'은 좀 반칙이 있었죠. 본격 미스터리인 줄 알고 접근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트릭이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오는 바람에 다소 허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본격'하면 무엇보다 반 다인이 말했던 대로 '스포츠'처럼 공정해야 합니다. 그건 일본의 요코미조 세이시에 따르더라도 지적 소설로서의 추리 소설이 가져야 할 품격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신본격'이라는 말이 붙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정한 본격이 아닌 약간 반칙성이 있는 본격이라는 의미에서. 물론 농담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이 두 번째의 작품, '수차관의 살인'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이야말로 그 자신이 기수가 되는 신본격에 정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야 말로 신본격 아야츠지 유키토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수차관의 살인' 은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관 시리즈 중(물론 저는 암흑관 이후로는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작가와 독자간의 공정한 겨루기에 가장 중점에 두고 쓰여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데뷔작이 약간 반칙적이라는 불평은 저 말고도 일본 국내에서도 제기되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 작품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마치 '이 작품에 관한 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쑥 들어가게 하겠다'라는 유키토의 일념이랄까요, 하여간 그런 느낌은 받지못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정말로 추리 능력으로써 작가와 겨루기를 원한다면 이 작품만큼 좋은 작품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야츠지 유키토는 이 작품만큼은 예리한 분이시라면 초반에 모든 걸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위험마저 무릎쓸 정도로 최대한 공정하게 임하고 있거든요. 그만큼 추리로 '진검승부'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인 책입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이 '수차관의 살인'을 관 시리즈의 실질적인 원점으로 보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작 '십각관의 살인'과는 달리 이야기가 벌어지는 공간이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로 수렴된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게 '십각관'과의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바로 이 수렴을 통해서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시리즈가 가지는 중요한 매력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사실 '십각관'을 쓸 때 유키토는 '관'시리즈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관'시리즈가 줄 수 있는 '관'에게 투영된 독립적인 생명력 같은 게 없거든요. 이 말은 '십각관'까지만 해도 미스터리가 기능하기 위한 무대 장치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요컨대, '십각관'은 굳이 십각관이 아니었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 말이죠. 그저 살인이 벌어지고 해결이 이루어지는 이차원적 평면의 공간으로만 의미가 있었을 뿐 '십각관' 자체가 가진 분위기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감에 있어 유기적인 공조는 그대로 직선적 미스터리의 이야기 배경 뒤로 무화(無化)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수차관'은 다릅니다. '수차관'은 단순히 미스터리의 배경으로 남지 않고 독립적 존재와 그 깃든 독특한 분위기로서 분명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차관의 살인'은 '수차관'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죠. 왜냐구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라는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수차관의 모습입니다. 성벽에 붙어 있는 세 개의 거대한 수차. 바로 그 때문에 수차관인 것이죠. 이 표지엔 수로가 보이네요. 바로 저 수로가 이 '수차관의 살인'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인 1년 전,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가 표지에도 나와 있는 성탑의 발코니에서 추락하여 흘러간 곳입니다. 아무튼 바로 저 세 개의 수차가 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수차관'이 아니면 안되는가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왜 이 '수차'를 모티브로 가져왔을까요? 그가 이걸 가져온 건 그게 수차라서가 아닙니다. 유키토가 이 '수차'를 가져온 건 일종의 비유적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시계'의 비유로써 수차를 가져온 것이죠. 때문에 하필이면 세 개입니다. 바로 시간의 과거-현재-미래를 가리키기 위해서죠. 그렇다면 '시계관'처럼 아예 시계를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키토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시계 자체가 아니라 흐르지 않는 시간이었거든요. 영원히 고정된 시간. 바로 그래서 수차가 필요했습니다. 벽에 단단히 붙박혀 결코 움직이지 않는, 영원히 고립된 시간을 암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유키토 스스로 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하여 밝혀놓고 있기도 합니다.

 

 "이 수차는 마치..."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내 말이 없던 기이치의 반응을 슬쩍 살폈다.

 "마치?"

 쉰 목소리가 가면 틈으로 새어 나왔다.

 "마치 이 저택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이 골짜기 공간에 정지시켜 놓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요"

 (p. 43)

 

 이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듯이 수차란 이러한 고립과 정지의 이미지, 즉 영원한 영어(囹圄)의 공간임을 암시하기 위해 고정된 시간의 비유로써 가져온 것이죠. 그렇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입니다. 흐르지 않는 시간,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 사건은 그 고인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달아나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소설에서도 반복되어 나오는 표현인 '섬처럼 떠올라 있는' 수차관의 모습을 강조한 표지인데 개인적으로 이 표지는 수차관이 가지는 핵심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말하자면 아야츠지 유키토는 무엇보다 '고립'을 강조하기 위해 그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이 '수차관'을 가공하여 소설에 넣었다는 것이죠. 벽에 붙은 수차는 정지된 시간의 상징으로, 섬처럼 홀연히 존재하는 수차관은 거기에 폐쇄되어 영어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의 상징이랄 수 있겠습니다. 이 수차관의 원래 주인은 이름난 화가였는데 그의 그림이 수차관 내부 회랑에 걸려 있습니다. 절대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 채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이 그림들 또한 형무소에 갇힌 '수인(囚人)'과 비슷한 이미지로 넣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수차관'은 '고립무원'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도록 설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갇힌 자들의 달아나고 싶은 욕망이 훨씬 선명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오지요. 때문에 수차관은 미스터리의 평면적 무대가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 존재로서 작품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유기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된 존재감은 이 '수차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었고 '관'시리즈가 가지는 중요한 매력을 형성하는데 일조를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작품이 가진 매력을 트릭 보다는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수차관의 살인'을 분위기 보다는 트릭에 좀 더 비중이 들어간 '미로관의 살인' 보다 더 우위에 놓겠습니다. '미로관의 살인'도 좋긴 좋았지만 '관' 시리즈의 중요한 매력이라고 생각되는 '관' 자체가 가지는 매력을 그리 살리지 못했기에 아무래도 '수차관의 살인' 보다 하위에 놓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여기까지 쓰면 제가 가장 최고로 치는 관 시리즈가 무엇인지 어쩌면 짐작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트릭은 '시계관', 분위기는 '암흑관' 이렇게 두 개를 최고로 칩니다. 뭐, 어디까지나 주관적 취향이에요.

 

 이렇게 '관' 시리즈의 매력을 개인적으로 되새겨 보는 오늘의 여정은 이것으로 끝맺게 되겠네요. 줄거리 소개 하나 없는 리뷰라니 좀 어이없어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런 소개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보실 수 있을테니 그런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어요. 뭐, 이런 식의 리뷰도 좀 색다른 맛으로 괜찮지 않을까요?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네, 물론 막무가내 억지 주장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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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7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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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부터 시작된 논어 열풍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 합니다. 논어에 대한 책들이 지금도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시작은 분명 중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중국 역시 사회주의 몰락 후의 러시아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더랬죠. 즉 중국 내 소수 민족과 지역들의 분리 요구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영토가 크면 다양한 민족과 지역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까지 중국은 러시아와 똑같이 사회주의라는 틀로 그들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니까요. 우열이 생기고 차별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대가를 치뤘었죠. 중국은 그런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얼른 통합에 나서야 했죠. 하지만 어떤 틀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 때 구원처럼 도래한 것이 민족주의였습니다. 한자동맹으로 나누어져던 독일이 같은 게르만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통일했듯이 중국도 그렇게 한 것이죠. 그 때, 기틀이 되어주었던 사상이 바로 공자의 '논어'였습니다. 그렇게 논어는 위로부터의 필요에 의해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 시절, 논어는 대표적인 구습의 사상으로 공식적으로 매장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논어일까? 왠지 호기심이 일더군요.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중국 고전 사상을 빌려와야 했다면 논어 외에도 도교의 노자나 장자의 책, 혹은 대표적인 현실주의적인 통치철학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일단 민족주의라는 것으로 하나로 묶는데 있어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장자'는 탈락입니다. '무위'와 '소요유'를 강조하는 그런 철학은 개인에겐 환영받겠지만 통치자들에겐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떤 통치자들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원할까요? 더구나 정치 사상으로써 그 철학들은 아주 헐겁기까지 하죠. 그렇다고 백성을 '빡세게' 만드는 한비자를 가져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비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유용성이야 많지만 일단 분위기가 너무 차갑잖아요. 그건 그대로 중국 사회주의의 분위기와 다를 바 없으니, 자본주의의 수용과 함께 이미지 변신을 꽤하는 중국에게 그건 별로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 주면서도 끈끈한 연대마저 놓치지 않는 '논어'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일단 '논어'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감도는 '인'을 강조하니까요. 아마도 지금 중국의 대중들이 논어에 몰려드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도록 맡지 못했고 때문에 더욱 그리움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내음이 논어엔 가득 드리워져 있었으니까요.


 그 인간학적 면모로 논어는 원래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하지만 처세의 책으로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나온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사는가?"도 실은 그러한 방면의 책입니다. 정치 철학이 아닌 처세에 보다 초점을 맞춘 책이라는 것이죠. 그건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 같네요. 저자는 우간린으로 중국의 경제학자이자 인재 개발 컨설턴트라고 합니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더욱 이 책이 초점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더욱 감이 오실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여타 논어 책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간린은 논어의 이야기를 공자의 제자인 자공을 주인공으로 하여 하나의 소설처럼 일련된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가 허다한 다른 논어 책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입니다. 물론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지루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루한 소설이 참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간린 이 사람, 참 맛깔나게 썼습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별다른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공자의 이야기를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썼습니다. 한 마디로 꽤나 읽을만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저는 우간린의 약력까지 의심하게 되더군요. 실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 논어를 깊이 이해하는 건 바라지 않고 그저 논어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벗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간린이 그저 대중들에게 논어를 쉽게 이해시키자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에겐 보다 더 큰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공자의 이야기에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사실 공자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자신의 알아줄 이를 찾아 유랑 생활을 했지만 그런 자를 만나지 못했고 결국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을 포기하고 은둔의 삶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공부나 하면서 '주역'이나 '춘추' 같은 것을 쓰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공자는 삶의 쓴 맛을 볼 대로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군주와 제자의 배신, 반복된 꿈의 좌절. 공자는 거친 길 위에서 허기와 피로의 나날들을 보내며 차오르는 아픔을 삭여야 했습니다. 우간린의 책은 바로 그런 공자를 가져옵니다. 우리와 똑같이 삶에 산적한 많은 문제들로 고민하고 아파했던 공자를 말입니다. 우간린이 바라는 것은 거기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공자가 겪은 문제는 비록 먼 과거의 일이라 해도 비단 공자만이 겪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알고 보면 우리 역시도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의 보편적 형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들로만 우간린은 이 책을 엮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공자가 찾아낸 현명한 해답으로 그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우리 역시 출구를 찾게하려고 말이죠.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그런 책입니다. 그냥 탁상공론이 아닌 실제 우리 삶에 뭔가 플러스적인 것을 주려는 책. 때문에 더욱 쉽게 대중들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렇게 소설 형식으로 쓰인 것이죠.


 덕분에 책은 꽤나 읽을만 합니다. 글마다 맨 앞엔 이 글의 출처가 되는 원래 논어에 나온 공자의 말씀을 적어놓았고 마지막에는 공자의 가르침이라 하여 글의 요지를 간략히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짚어주는 건 너무 과잉된 친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공자의 말년을 잠깐 얘기했습니다만 바로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어째서 공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닌 어느 여성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한 여인이 구슬피 곡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찾아가 그 연유를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집안은 사냥으로 먹고살았는데 태산에 호랑이와 이리가 날뛰어 걸핏 하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벌써 10년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혀서 겨우 유골만 찾아왔다고 했다. 또 두 해전에는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는데 이번에는뼈조차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여덟아홉살난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p.314)


 그러자 같이 간 제자 하나가 다시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 곳을 떠나지 않았느냐구요. 진작에 떠났다면 아들만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았느냐구요.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원래는 산 아랫마을에 살았지요. 밭을 일구면서요. 그런데 탐관오리들이 어찌나 괴롭히는지 갈수록 말도 하지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곳에 호랑이는 있지만 그래도 포악한 정치나 탐관오리는 없지 않습니까." (p. 314)


 그걸 듣고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구나!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모두가 잡아먹히지 않지만 가혹한 정치 아래에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구나!(p. 315)


 그리고 그 날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와 음악을 고치고 '역경'과 예법을 바로 잡기 위한 연구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관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일조차 없었다고 하는군요. 어쩌면 공자가 자신이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정치에 그만 환멸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시는 그런 여인이 없도록 정말 자기가 힘써야 할 것은 위로 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아래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깨달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가호맹사성'이라는 공자의 말은 가슴의 현을 울립니다. 세월호의 수장된 아이들의 넋조차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또한 그러한 탓이겠죠.


 그러고 보니, 공자가 언급한 명재상이라 칭송받았던 관중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관중이 모시던 군주인 환공이 어느 날에 사냥을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우공의 계곡'이라 답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불리냐고 했더니 노인은 그 우공이 바로 자신인데 말 새끼를 어리석게 빼앗긴 곳이라서 그렇다고 했답니다. 환공이 빼앗기게 된 경위를 물으니 노인은 자신이 기르던 암소가 새끼를 낳아 그 새끼를 팔아 말 새끼를 사왔는데 여기서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노인에게 "소가 말 새끼를 낳을 수 없느니 그 말 새끼는 분명 훔친 것이다."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청년의 말재간을 당해낼 수 없었던 노인은 말새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웃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노인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해 우공의 계곡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환공이 재미있어하면서 관중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관중은 갑자기 사죄의 의미로 환공에게 두 번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노인의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바로 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면서요. 환공이 당황하며 그 연유를 묻자,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정치와 법률을 공명정대하게 운용되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노인이 그 말만 듣고 말 새끼를 청년에게 내주었겠습니까? 정치와 법률이 공명정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믿고 내 준 것이죠. 그러니 그렇게 만들지 못한 제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관중을 공자는 진정한 군자라 칭송했습니다. 이런 혜안과 책임감을 가지는 인물이 참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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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논어(論語)
    from 512 2015-02-14 15:04 
    유학의 정수. 논어.‘유교’ 하면 공자가 떠오르고, ‘공자’라는 이름은 딱딱한 인상을 줬다. 알지는 못하지만, 왠지 가까이하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공자를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들었다.어느 날 임권택 감독이 변영주 감독에게 “국악 좋아하느냐.”라고 물었다. 변영주 감독이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임권...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남재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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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언영색의 시대입니다.

 번지르르한 말들만 난무하고 실천이 뒤따르는 속이 알찬 말들은 만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저 한 순간만 속여 넘기고 보자는 무게 잃은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기꾼의 언어만 판치는 세상이니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믿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라!'는 현대인들의 모토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라이어게임'에서 순해서 늘 남에게 속는 여주인공은 이렇게 항변하더군요.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그건 잘못일 수 없습니다. 그게 잘못이라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여깁니다. 더러는 호구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드라마에서 그녀는 참 울화통이 터지는 존재입니다. 맨날 속으면서도 사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으이구, 또 속네. 이 답답아.'하며 가슴을 치게 됩니다. 사람을 믿는 게 옳은 건데 믿는 족족 그녀는 바로 파멸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이 시대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바로 불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생존법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런 시대입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건 '세상의 부와 권력을 가진 1%의 잘못이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남재일입니다. 그는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세상에 말을 건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기묘한 노출증의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유혹의 정치는 99%의 물질적 생활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와 개인의 정서까지 망쳐놓는다.(p. 7)



 이 유혹의 정치가 바로 번지르르한 말들이 넘쳐나게 한 원흉입니다. 그런데 왜 1%의 탓이냐구요? 그건 바로 이 유혹의 정치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문화적 전략(p. 7)'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1%는 자신의 지배 체제를 세 가지 방법으로 유지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협의 정치, 기만의 정치 그리고 유혹의 정치입니다. 저자는 곤충이 적을 상대하는 것에 비유해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보다 더 큰 적이 나타나도 달아나지 않고 오로지 위협만 하는 사마귀는 위협의 정치를, 물리적 충돌은 피하면서 자신의 그물에 포섭하여 천천히 포식하는 거미는 기만의 정치를, 마지막으로 숙주에 기생하여 이익만 취하다가 번식할 때가되면 뇌의 호르몬을 조종해 자신이 원하는 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연가시는 유혹의 정치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유혹의 정치가 지금의 1%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99%를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즉 연가시가 하듯이 개인을 세뇌시켜 그들이 원하는 규율을 스스로 부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은 1%가 원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하면서도 그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유혹의 정치'입니다. 가장 세련된 방식의 착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하는 이들이 자신의 선택이라 여기므로 실은 가열차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몰라서 아무런 반발도, 저항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1%의 꿈은 그렇게 '지배없는 착취'인데 바로 유혹의 정치가 그것을 이루어줍니다. 때문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 가벼운 말들, 그래서 거짓과 기만의 말들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유혹은 상대와의 진실한 약속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꼬이려는 말들이니까요. 그 대표적인 유혹의 말이 바로 욕망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 넣지요. 영화나 드라마의 현란한 상류 사회의 모습을 통해서나 광고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어떤 지위나 물건을 갖지 못했을 경우 모자란 인간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가장 많이 가진 자와 완벽한 상태의 육체를 삶의 기본으로 제시해 마치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사람으로써 인정받지도 못한다고 위협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신의 현재를 스스로의 기준이 아닌 보다 상위의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늘 현재의 모습을 채점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은 그것을 두고 현대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말했었죠.

 맞습니다. 성과가 전부입니다. 요즘 누가 과정에 신경쓰나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게 지금의 보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를 평가하는 눈은 누구의 눈일까요? 바로 1%의 눈이죠. 1%가 원하는 학력, 원하는 돈의 액수, 원하는 아파트, 원하는 체형, 원하는 스펙, 원하는 결혼, 모두 그것에 맞춰 우리 스스로를 보고 있지 않나요? 자신이 실제로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그저 군대에서 흔히 받는 '선착순 1명' 얼차레처럼 1%가 가리키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면서 그것을 나의 욕망으로 여기는 게 진정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짜증을 내고(보다 뛰어난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항상 나 상위에 있는 기준 때문에 더 무능하게만 보이는 자신 때문이죠.) 설령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을 이루더라도 자주 우리에게 남는 게 허무인 것이겠죠.

 이 책의 제목이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이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남재일은 지금 우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진정 자유로운 주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이 무게 없는 유혹의 말들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장 보드리야르는 제대로 해석을 해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라 말했지만 남재일은 알랭 바디우의 힘을 빌어 더 멀리 나아가려 합니다. 단순히 해석만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으로 그 거짓과 기만의 말들을 봉쇄해야 한다고 말이죠. 즉,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진리 사건(알랭 바디우는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진리 사건의 예로 듭니다. 그 사건은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진리 사건이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말이 육신으로 현전하는 것이죠.)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죠. 몸으로 실천되는 말들의 확산. 이것만이 유혹의 정치에 대한 유효한 대안이라 그는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기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입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발적 복종으로 이끄는 여러 유혹의 말들을 분석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사유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여기엔 우리를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많은 말들의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5부에 걸쳐서 열 한 두개의 짧은 글들로 말이죠. 설명은 어렵지 않고 분량도 부담없기 때문에 가볍게 벗하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말들의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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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론 - 이탈리어 완역 결정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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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에게 끌린다는 것은 굶주렸다는 증거다.

 꿈꾸는 세상이 그다지 원대하지 않는데도 마음을 기대고 싶은 이상이 도무지 나아가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행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급히 먹는 떡이 체한다지만 기다려도 너무 기다렸다. 보이는 세상이 미치도록 답답하여 화병으로 죽지 않으면 기다리다 굶어죽을 판이니 체증 따위가 뭐가 두렵단 말인가? 제발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 뭔가 가시적인 결과 좀 보여줘. 그래야 내가 이 허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참을 수 있지 않겠어? 군주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다. 그렇다고 군주론에 나오는 '군주는 빼앗은 땅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이전 지배자의 친족을 남김없이 학살해야한다'는 말까지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지독한 허기가 군주론으로 이끈다. 그런데 정작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것도 그의 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공자와 비슷한 데가 있다. 공자처럼 그 역시 공명심이 강했고 공자가 유세했듯이 일선 정치의 무대에 서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공자와 마키아벨리, 둘 다 현실정치에 대한 지독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 허기가 공자에겐 '논어'를, 마키아벨리에겐 '군주론'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나아간 곳은 달랐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비슷했다. 모두 혼돈의 도가니. 중국의 춘추전국으로, 이탈리아는 교황,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피란체 등의 5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평안과는 거리가 먼 시절. 바깥을 둘러보면 지금만큼이나 갑갑증이 몸 가득 차오르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안정을 바라던 그 시대에 공자도, 마키아벨리도 어떻게 하면 안정을 얻을 수 있는가 생각했다.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고민이었으나 도출한 대안은 달랐다. 공자나 마키아벨리나 사람을 보는 시선을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사익추구의 경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공자는 칸트적인 데가 있었다. 자신의 이익만 우선하려는 경향을 막으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러자면 무엇보다 그 누구의 이해로 기울지 않는 불편부당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칸트처럼 하나의 당위로써 중용적인 '인'을 가져왔다. 한 마디로 높은 이상을 통해 사익 추구의 경향을 '예'라는 틀로 스스로 억압하게 만들어서 한데 묶으려는 것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똑똑하다면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현명하게 선택할 테지. 공자는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달랐다. 마키아벨리는 공자가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자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바보야, 그래도 문제는 이익이야! 사람은 말이지, 죽는 것보다 자기 재산 뺏기는 것을 더 싫어한다고!"


'사람은 아버지의 원수보다 재산상의 손실을 더 오래 기억 한다'


 마키아벨리는 사람이 중심이었다. 그는 당위로는 절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물가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당나귀를 끌고 가기 위해 당근을 눈앞에 보여주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그 습성을 잘 이용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사람들을 그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헤아리는 것.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겐 '현실'이란 것이었고 정치의 바탕이었다. 인사가 만사요, 사람에 대해 제대로 통찰하면 만사불여튼튼이었다. 군주론이 정치 논문(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군주론을 논문이라 부른다.)임에도 한비자처럼 처세술의 용도로도 읽히는 것은 이런 관점 탓이다.


 허기는 자주 조급증을 낳는다. 그건 그대로 '군주론'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더욱 현실적이 된 것은 그의 조급증이 한몫했다. 그는 빠른 결과를 원했다. 사실 공직을 바라고 쓴 글이기도 해서 더 그랬다. 이상은 알콜 램프로 라면을 끓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시간이라면 마키아벨리는 물론이고 군주론을 읽는(그가 염두에 두었던)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조차 하품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수출해야 하는 품목에 대한 PT처럼 현실 가능한 것을 알기 쉽게 요점 정리해서 알려줘야 했다. '군주론'은 그런 스타일의 책이고 그에게 이것은 '단기 계획'이었다. 그는 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군주론'은 대망의 목적을 위한 단기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가 바라는 대망의 진정한 모습은 '로마사 논고'에서 구체화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군주론을 읽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무나 답보적인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이상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주려고 하는 것인데.(우리라고 한 것이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나 하나는 아니라는 바람으로 굳이 써 본다.)


 꼭 그런 세상이 오리라 믿는 우리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같아서 말이다. 점점 가빠져오는 호흡 때문에 아예 포기해버릴까 싶다가도 현실정치의 교본이라는 여기서 라면 행여 스포이트처럼 방울방울 떨어지더라도 그 물로 지독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달랠 것 같아서.


 어쨌거나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술술 읽히니까. 이해하는 데 가장 적은 뇌세포와 시간을 요구하길래 읽었다. 솔직히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나 따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원래 번역에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그저 원문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허기는 해소할 수 있었냐고?


 하나는 얻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말라는 거.

 그러고 보니 재확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기는 깨닫게 한다. 사람은 결코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것을(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알지만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뭐가 옳은 지는 알지만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안 한다는 뉘앙스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죽을 때까지 유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옳은 걸 안다면 행동하리라 생각했지만 여보세요,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사람은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 역사 속의 몇몇 영웅들 때문에 무량할 것 같지만 어불성설! 그러면 이런 분통터지는 세상이 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군주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릇 백성이란 다정하게 다독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을 꾀하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부득불 백성에게 피해를 끼칠 경우 그들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제압할 필요가 있다.(P. 74~75)


 지금 우리가 당하는 그대로가 아닌가. 습관처럼 해외 유람하시는 저 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시는 분도 군주론은 읽었나보다.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새겨두실 것이지.


 공화국 체제 하에서는 군주국에 비해 더 큰 활력과 증오, 더 큰 복수심이 작동한다. 과거의 자유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잠자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P. 97)


 아니면 그 뒤의 말에 더 집중하기로 하셨나?


 가장 확실한 방안은 그런 체제를 말살하는 것이다.(P. 97)


 진짜라면 소름이 쫙!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읽었다면,


인간은 해롭게 생각된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은혜를 입으면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백성은 자신의 지지로 보위에 오른 군주보다 이런 군주에게 더 우호적이다. 군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다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원칙은 군주는 늘 백성을 자기편으로 삼아두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경에 처했을때 속수무책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P. 134)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절반이 아니라. 그것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데.


 그러니 이런 말은 더욱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네요.


 군주는 앞서 언급한 선한 품성을 구비하지 못할지라도 마치 이를 구비한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있다. 장담컨대 실제로 그런 뛰어난 품성을 구비해 행동으로 옮기면 군주에게 해롭지만 구비한 것처럼 가장하면 오히려 이롭다. 자비롭고, 신의 있고, 정직하고, 인정 많고,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리하는 게 좋다.(P. 195)


 적어도 자기가 한 약속은 지키는 척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도...


 군주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탐욕스럽게도 백성의 재산과 부녀자를 빼앗는데 있다. 대다수 백성은 군주가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한 대략 자족하며 살아간다. 군주의 경계 대상은 소수의 야심 많은 귀족들이다.(P. 199)


 어쩌다 리뷰가 이렇게 되었나? 군주론의 말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나도 모르게 지금의 현실에다 이입해버렸나 보다. 냉정해질 수가 없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인데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좋은 리뷰 쓰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다. 읽을 때부터 분통, 푸념, 넋두리의 짬뽕이 될 것을 알았다. 그런 시대니까. 제정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시대니까. 그러니 이 리뷰로 군주론이 어떤지 가늠하려 하지 말라. 직접 읽고 스스로 군주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좋겠다.


 부록으로 이탈리아의 역사, 군주론의 출현배경 및 그 용어 설명, 거기에 군주론과 관련한 서한을 비롯 마키아벨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군주론의 인명사전까지 거의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두툼한 부연 설명이 있으니 그게 이 글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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