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거듭된 재회는 실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예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걸 이번에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나는 이미 2007년에 동서판으로 읽었고 8년만에 이번에 검은숲에서 나온 판본을 읽었다.



 여기엔 다시 재회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첫째는 아직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단편인 '어둠 속에 열린 창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책 뒤에서 일본에서 '문신 살인사건'이 판을 거듭할 때마다 쓴 다카기 아키미쓰의 글을 모아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글들이 꽤나 중요하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여기엔 일본 미스터리 세계에 있어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문신 살인사건'이 어떤 연유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착상되었고 집필되었는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문신 살인사건'에 매혹되어 그 뒷 이야기마저 심히 궁금했다면 이 책은 꼭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431 페이지에 있는 '탐정 소설 작법'은 자신이 '문신 살인사건'을 어떻게 썼는지, 그 인물과 트릭의 설정 그리고 전개에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소상히 밝히고 있어 작품 이해를 더욱 도와줄 뿐만아니라 혹여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어 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다시 '문신 살인사건'을 소장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래도 이건 보너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본편의 퀄리티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까 부가된 것 말고 핵심이 되는 작품이 예전 동서판 보다 나아졌는가를 따져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역시 눈이 가는 곳은 표지와 번역이다.


표지로 눈이 가는 이유는 동서판의 표지가 좋게 말해서 너무 아스트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판 미스터리의 띠지를 보관하지 않는 편인데 이 것만큼은 이렇게 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보이기엔 차마 부끄러운 그 곳을 띠지로 가려야했기 때문이다. 동서판은 원래 검열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70년대에 나왔는데 그런 상황에 어떻게 이런 표지가 버젓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무튼 그래서 홍길동이 호부호형 못하듯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내 책이요!' 하지 못했던 상황이 빈번했다.('아, 빌린거야.', '어쩌다 보니 줍게 되었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상황) 하지만 '문신 살인사건' 작품 자체는 너무 좋아서 제발 표지 갈이가 되었으면 했던 책이다. 그러니 이렇게 예전 보다는 훨씬 점잖은 표지로 새로 나와 주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문신 살인사건'은 표지 만들기가 꽤나 어려운 축에 드는 것 같다. 일본판을 검색해 봤는데 하나같이 표지가 별로였다.


 (오른쪽 맨 끝에 있는 것은 미국판 표지의 모습이다. 주된 소재가 밀실이 된 욕실에 팔 다리와 머리만 남아 있고 문신이 새겨진 몸뚱아리는 없는 엽기적인 사건이라 그런지 국적을 막론하고 표지가 참 괴이하다.)


 그런 표지들에 비하면 검은숲 판은 꽤나 잘 빠진 편에 속한다.



 그럼 이제 번역이다.

 동서판 '문신 살인사건'의 번역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번역이라 지금 감성으로 읽기엔 텁텁함이 많이 남는다. 그런 면에서 검은숲 판은 아주 매끄럽게 읽힌다. 역자가 '고백',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완전 연애'를 번역한 김선영인데 번역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전 판과 비교해 읽어보니 단어의 선택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검은숲 판이 동서판에 비해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을 꼭 짚어줘야겠다. 아무래도 '문신 살인사건'은 불가능에 가까운 밀실 살인 미스터리를 다루는 본격물이다보니 독자에게 현장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이 핵심이기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전 동서판은 좀 두리뭉실한 면이 있었고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었다. 그런데 검은숲 판은 그걸 다 해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미스터리의 핵심인 '3자 견제'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먼저, 동서판에서는 이렇게 나왔다.


 오로치마루는 커다란 뱀이 요술 부리는 거잖아요. 이야기책을 읽어보면 커다란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하고 커다란 괄태충을 타고 나타나는 쓰나데히메, 이들 셋은 도카구 산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요술로 서로 싸운답니다.(동서판, p. 69~70)


 반면, 검은숲 판은 이렇다.


 오로치마루는 이무기를 부리는 마술사잖아요. 책을 보면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와 거대한 민달팽이를 타고 나타나는 쓰나히데메, 이 세 사람은 도카쿠시야마 산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요술을 겨뤄요.(검은숲판 p. 78~79)


 동서판은 오로치마루를 설명하는 첫 문장부터 오로치마루가 뱀인 것처럼 독자를 혼동시킨다. 하지만 원래 오로치마루는 검은숲판이 말하듯이 이무기를 부리는 자다. 아마도 만화 '나루토'를 보신 분들은 이를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나왔던 3자 견제. 처음 '문신살인사건'을 볼 때는 나루토를 열심히 보고 있을 때였는데 덕분에 나루토의 전설의 세 닌자가 일본에서 예로부터 전승되어오던 3자 견제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이외 괄태충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민달팽이로 정확해졌고(사실 이 민달팽이는 정말 중요한데, 밀실 현장에도 남겨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추리를 위한 중요한 단서인데 동서판은 괄태충으로 표기해서 도대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검은숲판을 읽고서야 그것이 민달팽이인 줄 알았다.) 동서판이 그저 도카구 산이라고만 했던 것도 도카쿠시야마 산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번역이 보다 정확 혹은 정밀해졌다는 의미고 문장도 검은숲판이 소화하기에 깔끔하다.


 더구나 때로 동서판엔 생략된 곳도 존재한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와는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픈 걸 참고 문신을 하긴 했지만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거절해버려. (동서판 p. 203)


 여기서 생략된 부분을 검은숲판에서 알 수 있었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남편도 저도 말주변이 없습니다. 아픔을 참고 문신을 새기기는 했습니다만 구경거리는 아닙니다."하고 쫓아내." (검은숲판 p. 242)


 이런 이유로 솔직히 검은숲판으로 작품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편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검은숲판을 소장할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여기까지 현재 나온 검은숲판과 예전 동서판을 비교해 보았다. 원래는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달라진 표지와 번역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정작 작품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만 글이 길어지고 만다.


 일본 미스터리 문학 역사상 1948년에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이 지니는 위치는 각별하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모든 미스터리 작가들이 꼭 한 번은 도전하고 싶은 테마인 밀실 살인에 주력하고 있다.


 "이 창문은 바깥쪽에 쇠창살이 박혀 있어. 창문 안쪽에 자물쇠도 걸려 있는 듯하고, 유리는 전혀 부서지지 않았네. 그런데 입구도 안에서 잠겨 있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나?"

 "밀실 살인!"

 "바로 그걸세. 밀실 살인. 완전범죄. 모든 탐정소설 작가가, 아니, 현실의 범죄자가 영원히 갈구하는 엘도라도. 게다고 원해도 실현되지 않는 환상의 꿈이야."(p.113)


 그런데 사건 현장이 독특하다. 바로 '욕실'이다. 왜 하필이면 '욕실'로 했느냐에 대해선 작가 자신이 아예 작품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밝히고 있다.


 종래의 일본 가옥은 그 구조상 밀실 살인이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각각의 방은 맹장지와 장지문으로 간단히 옆방과 나뉘어 있다. 예컨대 독립된 공간으로 보여도 천장이나 마루 밑은 하나라, 천장 밑을 지나 벽장 속으로 숨어들거나 마루 밑을 지나 다다미라도 들어 올리면 간단히 침입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욕실은 순수한 일본 가옥 속에서도 다른 방과 완벽히 독립된 공간이다. 이 욕실 역시 바닥과 벽에 빈틈없이 타일을 바르고, 천장에도 모르타르를 발라놓았다. 문 아래위에도 틈은 없고, 마쓰시타 일행이 안을 들여다본 틈새로도 실이나 바늘을 넣기란 절대 불가능했다. 그 후 수사 당국은 현미경이라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현장을 수색했지만 비밀 통로  같은 단순한 트릭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p. 120)


 이런 공간에 몸뚱아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리와 두 팔, 두 다리만 놓여 있는 것이다. 과연 범인은 이런 밀실에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몸뚱아리를 가져갔는가가 '문신 살인사건'이 독자들과 대결하고자 하는 주된 수수께끼다. 정말로 여기엔 엘러리 퀸의 소설처럼 '지금까지 모든 힌트를 다 제시했으니 독자들이여 추리를 통해 범인과 그 트릭을 맞춰보라'는 뉘앙스의 도전문까지 나온다. 아무튼 욕실을 선택한 것은 일본 전통 가옥 구조상 욕실만이 온전히 밀실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에도가와 란포의 '천장 위의 산책자'를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갈 것 같다. 그 소설에서 관음증 환자인 범인은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며 그 집에 있는 모든 남의 방을 엿본다. 이런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욕실말고는 밀실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다 혹시 느낄지도 모르겠는데 작가가 은근히 미스터리 오타쿠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가옥은 구조상 밀실이 불가능하다느니 욕실의 설정에 대해서도 가능한 완벽한 밀실이 되도록 빈틈없이 묘사한 것이라든지. 오래도록 미스터리를 애호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 그는 '문신 살인사건'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냥 좋아서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일던 사람이었다. 무려 20년 동안 한결같이. 그가 '문신 살인사건'을 쓰게 된 것도 창작에 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해고 당한 뒤로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때는 패전 후였고 삶은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다. 그러던 차에 자기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썼던 것이 바로 이 '문신 살인사건'이었다. 당시는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미스터리계의 중흥을 위해 온갖 신인들의 원고를 받고 있었으므로 다카기 아키미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란포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란포에게서 '소설로서의 결점은 있지만 이만한 트릭과 플롯이라면 추리소설 애호가들의 정열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란 호평을 받고 그 란포가 이와야 쇼텐 출판사에 출판 의뢰까지 하게 됨으로써 '문신 살인사건'은 전격적으로 출간되게 된다. 결국 그 란포의 도움으로 다카기 아키미쓰는 미스터리 작가로 먹고 사는 꿈을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말한 매니아 단계에서 최종 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20년간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온 끝에 작가로 성공까지 했으니. 그는 이후에 이어진 '가면 살인사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대낮의 사각' '유괴' '파계재판'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일본 미스터리계에서 거성처럼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20년간 꾸준히 미스터리 소설을 독파하면서 쌓아온 내공 덕분이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읽음은 그냥 사라지지 않으며 널리 많이 읽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난 김에 소장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덧붙여, 이 작품은 일본 패망한지 얼마 후에 쓰여 전후의 윤리적으로 혼란스럽기만 했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뢰파'로 유명한 사가구치 안고가 딕슨 카의 '연속 살인사건'의 제목을 살짝 바꿔 쓴 '불연속 살인사건'과 같이 읽으면 그 때의 분위기를 한층 더 잘 느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유명한 미스터리의 애호가이기도 했던 안고인 지라 솔직히 본격으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해도 '연속 살인사건'은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만 하다. 안고의 '무뢰파' 담론을 알고 있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작품이 상식적 수준의 윤리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작품이므로. 


  

 더운 여름이다. 마침 '크라임신'도 끝나고 두뇌 회전을 요하는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트릭들과 대결하면서 보내는 것도 좋은 피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니어스 그랜드 파이널'이 시작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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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망자가 현재 무려 31명이란다.
누구야? 메르스가 매년 찾아오는 독감에 불과하다고 한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 장본인은 권력 누수 방지에만 열심이다.
법단계설은 우리나라 헌법도 명시한 바고 법개론에서 배우는, 말하자면 법대생에겐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다. 헌법은 헌법>법률>명령>라고 밝힌다. 행정부의 시행령은 어디까지나 법률의 아래에 있다. 하지만 사회는 조석으로 상황이 바뀌고 정부가 처리해야 하는 일도 워낙 다변화되어 법률의 제정으로 다 소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구멍이 생기기 마련인데 하여 법률은 구체적인 범위를 정하여 행정입법에 위임하고 있으며 그게 바로 시행령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법률이 위임한 것을 벗어나 집행하는 시행령은 원칙적으로 무효다. 시행령을 위반하더라도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행정부와 여당은 까다로운 법 개정에 따르는 위험은 피하면서 자기들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시행령을 만들 수 있도록 법에서 세부를 정하지 않고 그저 대통령령에게 위임한다는 말로 퉁치는 흔히 헌법학에서 포괄적 위임이란 방법을 써 왔는데 그러다 예전 헌법재판소에 의해 헌법75조에 위배되어 위헌임을 확인받았다. 하지만 비대한 시행령의 존재는 없어지지 않았고 최근엔 포괄적 위임 금지를 피하기 위한 한줄 위임이란 것으로 더욱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이런 시행령의 비대화는 당연히 헌법 위반이며 더구나 견제와 균형의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에도 위배된다. 그러므로 비대한 시행령을 감시 통제하고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국회가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짜를 부리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거기다 거부권행사 찬성이 40%가 넘는다는 여론조사를 보고 아무래도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지껄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메르스에 대한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던 한 개그프로가 방통위의 징계를 받고 또 현재 가장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jtbc가 기소를 빌미로 정부의 탄압을 받다보니 더욱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최근 한 언론의 보도를 따르면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고 있다고 하는데 정말 나도 강한 유혹을 받는다. 국민을 봐도 희망이 안 보이고. 오늘 문재인의 대국민 호소는 좋더라. 하루빨리 호남자민련을 꿈꾸는 구태 세력을 박멸하고 강한 야성을 드러내 줬으면 좋겠다.

몰랐는데 북플은 쓰다가 나왔다 들어가도 자동적으로 임시저장이 되는 것 같다. 시간 날 때 짬짬이 끄적일 수밖에 없는 내겐 썩 유용한 기능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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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6-26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글이네요, 언제 제 맘에 들어오셨어요?

참 가관이더군요, 목소리 높아져서 까는 모습이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ICE-9 2015-06-27 15:11   좋아요 0 | URL
가관이 정말 장관이죠. 대선 토론 때, 엄마의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했잖아요. 정말 엄마의 마음으로 다스리고 있다면 엄마가 아프고 죽어가는 자식부터 신경쓰듯이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 대처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거기엔 전혀, 일말의 관심도 없죠. 지금 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걸 보니 예전 천안함 사건 때, 아주 어릴 때 버리고 갔으면서 아들의 장례식에는 오지도 않고 보상금만 챙기기 바빴던 한 장병의 엄마가 생각나더라구요. 사람들이 그 엄마 보고 뭐 그런 사이코패스 같은 엄마가 다 있냐 하면서 잔뜩 뭐라 했는데... 정말 많이 겹쳐보이더라구요.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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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여성성으로 생각하는 것들, 그러니까 다정함이나 보살핌 혹은 헌신 같은 것들 모두는 근대 유럽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논의가 있다. 대량생산 체제가 됨으로써 보다 강도 높은 남성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그에 따라 직장과 가정을 분리시켰는데 그러다 보니 남성 노동자의 신경을 오로지 공장에만 집중시킬 필요가 커져서 가정의 관리 책임은 온전히 여성이 맡도록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장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테일러주의에 의하여 노동시간이 초단위까지 관리되고 포드주의로 인하여 생산 과정 전체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파편화 되고 반복된 노동만을 하던 노동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관리와 작업 방식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혁명을 경험했던 유럽은 그 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기지 전에 해소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여성이 홀로 전적으로 관리하는 가정을 구현하여 탈출구로 삼으려 했다. 다시 말해 가정을 노동으로 지친 육신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따스하고 다정한 보금자리'라는 것으로 상징 조작을 한 것이다. 산업 혁명이 이루어진 19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가정을 이상향처럼 만드는 흐름은 생겨났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여파가 지나간 곳마다 어김없이 '가정의 이상화(化)' 작업 또한 병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에 대한 전말이다.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는 가정의 이미지는 이처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연히 여성의 이미지도 가공되었다. 가정이 진정으로 남성 노동자에게 쉼터가 되려면 무엇보다 여성을 거기에 맞도록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고 언제나 다정하며 남성 노동자의 고민에 공감할 줄 아는 여성 유형이 채택되었다. 한 마디로 남성이 가장 편안히 가정에 거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예전 영화 중에 니콜 키드만이 나왔던 '스텝포드 와이프'라는 것이 있다. 스텝포드 지역의 남편들이 아내를 세뇌하여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만든다는 줄거리인데 그 모습이 바로 19세기에 널리 보급시킨 여성의 이상적 모습과 판박이다. 단적으로 여전히 우리가 그 때 구축된 여성 모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인데 그 기원이라 할 19세기 당시의 여성은 주로 '천사'의 이미지로 가공되었다. 19세기에 여성을 두고 가장 널리 유행한 말은 바로 '가정의 천사'였다. 이 말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도 나온다. 울프는 작가가 되기 위해 자신은 늘 출몰하는 유령과 싸워야 했는데 그건 바로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가정의 천사라는 유령은 자꾸만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사회에 순응하도록 유혹했다고 말이다. 그렇게 사회는 천사가 지니는 덕목을 여성에게 요구했고 천사야말로 여성이 되어야할 바람직한 모습이라며 널리 유포했다.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여성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서 말이다.


 여성의 존재는 지워졌다. 여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성의 그림자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도 남성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을 때만 겨우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성의 욕망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계속 주장할 경우엔 죽음마저 가능할 정도의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아니, 그저 불응만 해도 학대와 폭행이 이어졌다. 당시 '가정의 이상화(化)' 작업은 가정의 사회로부터의 격리도 가져왔는데, 그것은 사회가 가정을 가장인 남성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사적 영역으로 인정해버리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아무리 가정 안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경찰은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의 당연한 권리로 존중해 버렸다예를 들어 당시의 유명한 영국 교수 트리벨리언이 쓴 '영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남자가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여겼으며 신분이 높건 낮건 아무런 수치심 없이 하는 일이었다.(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에서 인용)" 여성은 법의 보호는 커녕 호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참는 것 뿐이었다. '가정의 천사'라는 미명 아래 정작 자신을 구원할 날개는 모조리 제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 원고 앞에다 적은 메모에 나온 말 그대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순전히 남성적인 사회에서, 법을 만드는 것도 남성이며 소송을 걸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남성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일에 대해 판단한다.('인형의 집' 작품 해설 p.134에서 인용)


 노르웨이의 작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1879년에 출간되었으니 바로 그런 시기에 집필된 작품이다. 따라서 그 때의 시대상이 작품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을 남성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가정의 천사'라 불렀듯이, 이 희극에서 남편 헬메르 토르발이 아내 노라를 귀엽고 철없는 이미지를 한껏 강조하는 '종달새'나 '다람쥐'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초반 노라의 관심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어떻게 집안을 꾸밀 것인가에만 맞춰져 있는데 그 또한 당시 사회가 남성이 보다 쾌적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여성에게 높은 청결 의식과 집을 아름답게 꾸밀 것을 요구한 것과 일맥상통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안주인인 노라에겐 정작 돈을 관리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조차 마음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로 남편에게 통제당하는데, 이것 역시 남자에게 재정 관리 권리를 몰아주기 위해 여성의 낭비벽과 약한 자기 통제력을 강조했던 시대상의 반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형의 집'을 읽으면서 19세기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 적나라한 현실을 목도할 수 있다. 당시는 지식인들조차 여성에게 신은 지적 능력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떠들던 시절이었다. 남성만이 쓸 수 있었던 펜을 들고 자기 표현을 하는 여성들은 히스테리적 광기의 소유자로 치부되어 압도적인 비난을 받았고 인격적인 모독과 함께 존재마저 묵살되는 일이 흔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남성의 모습이었다. 실낙원을 쓴 존 밀턴도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그만큼 용기 있는 작품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 아무래도 그가 쓴 '페르 귄트'처럼 사회의 상식에 매몰되지 않는 분방한 자유주의자인데다 '민중의 적'처럼 사회 변혁 의식 또한 높은 그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모습은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에게도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 초반의 노라는 남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인형처럼 보이지만 10년만에 만난 여자 친구 크리스티네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사실 노라는 남편의 통제를 잘 받지 않으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어느 여성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노라에 대한 인식은 변하는데 노라가 크리스티네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사실 우리에게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노라 : 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구나. 다들 내가 진지한 일은 아무 것도 못한다고 생각하지.(P.24) 

 

 노라는 사실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인 존재였다. 더우기 그 적극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시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는 일절 돈 거래를 하지 못했는데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의 서명까지 위조해서 이탈리아에서의 요양에 필요한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에 유포되었던 수동적인 여성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고자 그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꼭꼭 숨겨두는데 결국 이것이 나중에 가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남편의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닐스 크로그스타드란 남자가 불미한 일로 해고할 위험에 처하자 노라에게 위조 서명된 대출 건을 빌미로 남편에게 해고 철회를 부탁하도록 협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닥차지 가녀는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라 : 아, 이런! 나에게 겁을 주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도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사랑 때문에 한 일이잖아.(P. 47)


 그러나 아무리 이런 그녀이더라도 이 상황의 타개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가정을 지키려면 남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로써 입센은 거꾸로 드러낸다. 제아무리 강한 여성이더라도 가정의 굴레에 빠져 있는 한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끝내 그 사실은 남편에게 들통나고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낸다. 남편을 위해서, 오직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 자신이 바깥 사회에서 받게 될 위신의 타격만 걱정할 뿐이다. 남편은 노라가 그동안 현숙한 아내의 연기를 했을 뿐이며 진실은 사기꾼이었다고 비난한다.


 헬메르 : 아, 깨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팔 년 내내... 나의 기쁨이며 자랑이었던 그녀가 사기꾼이며 거짓말쟁이, 아니 그보다 더한 범죄자였다니!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이렇게 흉한 일이었다니! 아아! (P.108)


 헬메르 토르발은 그동안 노라가 연극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순간 노라도 깨닫는다. 자신이 남편 말마따나 정말로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아내의 모습을 연기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가 소중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이 한낱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온전한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누군가가 원하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면 그가 있는 곳은 어디나 거짓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짜 집이 아닌 '인형의 집'.


 그 집 속에서 그녀는 인형이었다. 그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 그녀는 그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가 보호와 안정을 원한 탓이기도 했다. 인어공주의 계약과도 같이 말이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욕망하는 왕자와 맺어지기 위해 자신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목소리와 사람의 다리를 맞바꾼다. 목소리라는 자신의 주체성을 희생하고 사람의 다리라는 사회의 규격에다 자신을 끼워맞춘 것이다. 노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사회가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포기했다. 알량한 안정과 보호를 이유로 말이다. 모든 것을 잃고난 지금에서아 비로소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면 보호와 안정 또한 소용 없다는 것을. 인형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보호도 안정도 진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때문에 그녀는 제발 남아달라는 남편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뛰쳐 나간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그녀의 표현대로 하자면 '온전히 자유롭기 위하여'


 이처럼 '인형의 집'에서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것과 진정한 자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입센이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시대를 앞서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현재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도 여성에게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다. 뭔가 목소리를 낼라치면 남자들에게서 곧잘 '히스테리 부리는 거냐?'는 말과 함께 손쉽게 묵살되거나 심하면 온갖 여성 혐오적인 반응마저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반응없이 여성의 목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 여성 학자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것은 19세기의 여성들이 사회가 인위적으로 조작한 모습을 자신의 본성으로 여기고 맞춰나갔듯이 현재의 여성들 또한 여전히 그 때의 유물이라 해도 좋을 '여성스러움'의 굴레에 갇혀 있는 지금엔 특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제2의 성'으로 페미니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바 있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여자들이 자신의 나약함이 아닌 강인함을 사랑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가능해지는 날, 그날 비로소 사랑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 삶의 근원이 될 것이다.(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 P. 217'에서 인용 ) 


 지금 여성의 진실은 남성의 언어로 많이 오염되어 있다. 여성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진정한 소통과 이해 역시 가능해질 것이다. 그 때까지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남성이 엮어놓은 조작과 왜곡의 그물을 자를 언어의 칼을 벼리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선구안적인 시각으로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왜 '인형의 집'이 결코 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될 수 없음을, 현재도 얼마든지 경청할만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만개하는 그 날까지 '인형의 집'은 언제까지나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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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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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엔 세월호가 있었고 올해는 메르스가 있다.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수수방관이나 다를 바없는 무력한 대처도 모자라서 비밀주의로 일관하는 정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언론 통제에다 진실을 알려는 국민의 욕구마저 다짜고짜 유언비어 엄단이라며 협박부터 하고 보는 모양새까지 마치 좀 더 광범위하게 세월호 참사가 또 한 번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든다. 메르스는 형벌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분명한 책임 규명과 엄중한 심판으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에 대한 신의 독화살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우리는 일부만이 겪은, 그렇게 그들만의 아픔이라 여겼다. 하여 신은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만들었다. 남의 일이기에 강건너 불구경했고 그랬기에 교통사고라며, 유족은 보상만 바라고 인양은 세금 낭비라는 망언도 서슴없이 했다. 하여 신은 우리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말해야 할 것에 침묵했다. 누군가 비를 맞고 있을 때, 그 비 역시 언젠가 우리들이 맞을 수도 있을 폭우였기에 곁에 서서 함께 견디고 더불어 이겨나가야 했지만 우리 모두는 자기만 피할 수 있는 우산을 찾기 바빴다. 하여 신은 서로를 불안하게 보도록 만들고 아예 홀로 격리시켜 버렸다.


 메르스는 신의 집게 손가락이다. 그것은 똑바로 우리를 항하면서 다그치듯 책임을 묻고 있다. 어찌하여 외면했냐고,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서둘러 잊어 버렸느냐고. 메르스는 우연한 재난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이. 그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주 보지 않았던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자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가혹하게 복수해 왔다는 것을. 모든 위정자들은 과거의 아픔일랑 서둘러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라고 잘도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결착 짓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그런 미래란 그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과하다. 저 끝에서는 과거에 행한 무책임한 망각이 계속 불꽃처럼 타 들어와 결국은 폭발시키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메르스처럼. 그러니까 세월호를 강 건너 불구경 했던 우리에게 남아있던 미래란 심지는 고작 1년 뿐이었다. 진정한 미래는 심지를 끊을 때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절은 오로지 분명한 원인 규명과 엄중한 심판 그리고 통렬한 자성만이 가져올 수 있다.


 이제 한 권의 소설을 이야기하려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란 소설로 이제는 제법 우리에게도 익숙할 이름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산 자와 죽은 자'라는 작품이다. 당신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 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 이 소설은 정확히 지금 우리들 모습의 반영이었다. 소설은 복수극이다. 바로 그 복수를 당하는 대상에서 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복수자에겐 리스트가 있다. 오래된 과거에 한 여인에게 죽음을 선사한 자들의 리스트다. 그런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죄책은 동일하지 않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주도한 자들도 있고 단순히 조력한 자들도 있다.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자들도 있다. 하지만 복수자의 총탄은 동일하게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머리나 심장을 뚫는다. 죄질은 달랐으나 형벌은 동일하다.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복수자였던 이우진(유지태가 연기했던)의 말이다.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적극적으로 저지른 자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자의 죄책이 같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맞다. 우리 형법은 분명히 '정범'과 '방조범'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복수는 그렇지 않다. 복수자의 눈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그 놈'이다. 중요한 잘못을 했든, 사소한 실수를 했든 그들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대체 불가능의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장본인인 것이다. 복수자의 눈에 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똑같은 일원인 집단이 있을 뿐이다. 시선이 다르다. 법정이라는 제3자가 아니라 당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방은진 감독의 영화 '오로라 공주'도 그러지 않았던가? 엄마인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초래한 이들 모두에게 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죽음으로 복수하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야 말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복수자라는 것을.


 "그들이 무관심이나 욕심 때문에 야기한 고통을 그들도 직접 겪게 하려는 거죠."('산 자와 죽은 자. p. 410)


 복수자인 역사는 단죄한다. "너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문득 상기할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현실이라는 것을. 당사자인 우리에게 역사의 복수를 피할 구실 따윈 없다. 우리 모두가 한데 어울려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래도 우리는 변호하고 싶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침묵했을 뿐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 것 같다. 밥벌이의 힘겨움 앞에서 좀 더 제대로 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오지랖으로도 보인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가지치기가 필수이듯이 이 각박하고 피말리는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적당한 무관심과 망각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역사는 바로 그런 우리의 생각을 비난한다. 그런 항변이, 변호가 역사를 망친 진정한 장본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의 본심을 보기 때문이다.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과 망각. 그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것은 주도적으로 역사를 망친 장본인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어쨌든 모두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자기 본위적 욕망의 발로가 아닌가! 드러난 외형은 각자마다 다를지라도 뿌리는 같으니 역사에겐 모두가 똑같은 가해자인 것이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다. 개체는 다를 지언정 가라앉는 본성은 똑같듯이 아무리 오대수처럼 그저 자신이 본 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 뿐이라 해도 자신과 누나를 괴롭힌 자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우리 개인의 행위를 보지 않고 그것을 낳은 본심을 본다. 그리고 그 본심에 있어서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사실 레나테 롤레더, 파트릭 슈바르처, 베티나 카스파 헤세가 한 일은 중벌에 처해질 죄는 아니다. 이미 기억에서 지워지고 마음속에서 정리된 사소한 실수, 인간적인 실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긴 시간이 지난 후 무시무시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p.473)


 메르스는 그런 우리에 대한 단죄이다. 소설처럼 세월호 참사를 남의 일이라며 무심히 정리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렸기에 날아온 총알인 것이다. 하여 우리는 소설 속 리스트의 인물들과 똑같이 치사율 40%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 우리의 무심과 망각에 대한 대가를 이토록 뼈저리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와 죽은 자'는 타우누스라는 가상의 마을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다.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간단하다. 남의 비극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아무리 오래된 과거의 아픔이라 하더라도 결코 잊지 말고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관심을 갖고 기억할 것을 원한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버지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홀로 분투했던 여인 카롤리네 알브레히트처럼. 주인공 형사인 보덴슈타인과 피아 보다 바로 그 여인의 여정이 소설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보여주기 위하여 넬레 노이하우스는 가족을 가져왔다.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로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로 넘치는 때로 정했다. 가족에 유념해서 보다 보면 여주인공 피아의 결혼이 소설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 피아는 신혼 여행을 앞두고 있다. 피아는 신혼 여행을 다녀온 뒤 동거 중인 크리스토퍼와 정식으로 결혼할 작정이다. 하지만 저격 살인이 일어나자 그녀는 도저히 사건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신혼 여행을 미룬다. 크리스토퍼는 홀로 외국으로 떠나고 피아는 독일에 혼자 남아 수사를 계속한다. 결국 크리스토퍼와 피아가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때는 사건이 해결된 다음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부러 에필로그까지 써가며 독자들에게 그들이 행복하게 결혼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꼭 가족의 결합이 사건 때문에 저지당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의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 내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성립이 더 이상 불가능해 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이런 독백까지 한다.


 집에서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새 집을 얻은 행복한 가정. 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가정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p. 453)


 궁금해진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왜 구태여 가족을 소설의 중심으로 가져왔으며 사건과 가족의 불가능성을 연결짓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가족은 가장 개인적인 영역이다.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심함과 과거 잘못에 대한 망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개인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가 저지른 타인의 아픔을 방관하고 그 잘못을 무심히 쉽게 잊는 것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삶과 그다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 자신의 영역과 타인의 영역을 쉽게 나누고 담을 높이듯 그 경계가 확고하리라는 생각에 어디까지나 타인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쉽게 치부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넬레 노이하우스는 묻는다. 하여 그녀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행했던 것처럼 그러한 타인의 비극과 사회의 잘못에 대한 무심과 망각이 만연된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적 영역의 형성도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넬레 노이하우스는 용의주도하게도 범죄의 모습을 하필이면 '저격'으로 가져온 것이다. 날아가는 총알은 그 어떤 경계도 넘나들기에. 또한 피해자들은 가장 사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것과 같이 그 어떤 개인도 사회가 초래한 타인의 비극, 사회의 실패와 과오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조약돌이든 바윗돌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복수자인 역사에게도 몸통이든 깃털이든 다 똑같이 보이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사회의 가장 작은 자의 아픔이라 할 지라도 내 일처럼 관심을 갖고 귀기울이며 그들이 당한 일과 이유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와 메르스처럼 무심과 망각은 언제나 반복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2차 대전의 과오와 만행을 어느새 잊고 날로 우익화 되어가는 독일 국민만큼이나 비슷한 착각과 오해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어 줄 듯 하다. 타인을 아프게 하고 영혼마저 이기심으로 굳어버린 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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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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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를 모르고 읽었다면 스티븐 킹의 소설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에 웬 낯선 타자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점차 그 공동체를 파괴시켜 나간다는 이야기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익히 보던 것이었으니까요. 대표적인 것으로 제가 가장 무섭게 읽은 '살렘즈 롯'이 있고 타자와의 전면전이 치뤄지는 '미스트'도 있으며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를 공포소설로 훌륭하게 형상화시킨 'NEEDFUL THINGS(흔히 '욕망을 파는 집'으로 알려져 있는)'이 있지요. 특히 이 '욕망을 파는 집'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더 스토어'는 '욕망을 파는 집'과 유사한 경로로 진행되거든요.


 '욕망을 파는 집'의 영화 포스터.


 잠시 '욕망을 파는 집'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웃간 인심이 좋아 정겨운 작은 마을 캐슬록에 'NEEDFUL THINGS'라는 가게가 문득 나타납니다. 무엇을 파는 지 궁금해하던 마을 사람들 눈에 가게가 쇼윈도에다 걸어둔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팝니다'라는 푯말이 보입니다. 호기심 많은 꼬마 하나가 시험삼아 들어갑니다. 노인인 주인에게 꼬마는 자기가 가장 갖고 싶지만 엄청 희귀한 야구 선수 카드를 말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정말로 구해줍니다. 푯말이 말하는 게 진짜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저마다 은밀히 가지고 싶었던 것을 구하기 위해 가게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빛이 오는 곳에 그림자도 따라오는 법이듯 욕망이 차츰 실현되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불행도 찾아옵니다. 마약처럼 자신의 거듭된 욕망 실현에 중독된 나머지 파멸로 치닫는 것이죠. 결국 캐슬록이란 평화로웠던 마을 전체가 마을 사람들끼리의 증오로 인한 서로에 대한 학살로 깡그리 파괴되고 맙니다.


  '더 스토어'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니퍼'란 작은 마을에 '월마트'와 비슷한(저자 자신이 '더 스토어'의 아이디어를 '월마트'를 보면서 떠올렸다고 하는군요.) '더 스토어'가 들어옵니다. 주인공 빌은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코스는 '더 스토어'가 들어올 부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빌은 거기서 사슴이나 동물들이 죽어 있는 것을 봅니다. 동물들의 사체는 사냥이나 사고가 아닌 그냥 거기 와서 자연사 해 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게다가 '더 스토어'는 여러 지점에서 점원이 총으로 손님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극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곳이란 걸 알게 됩니다. 빌은 '더 스토어'에 웬지모를 사악함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 스토어'는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옵니다. 다양한 물건을 가까이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과 많은 고용으로 경기가 오래도록 바닥을 치던 '주니퍼'에 활력을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죠. '욕망을 파는 집'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게를 좋아했던 이유인 '욕망을 쉽게 이루어준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유로 주니퍼의 마을 사람들 역시 '더 스토어'를 좋아합니다. 하물며 빌조차 '더 스토어'로 가 그 많은 상품을 본 뒤론 그 곳을 파라다이스로 여겨 버립니다. 그러자 '욕망을 파는 집'이 마을 사람들을 지배했듯이 '더 스토어'도 차츰 주니퍼의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언론을 돈으로 사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만 내도록 하고 경쟁하는 작은 가게들은 주인을 죽여서까지 몰아내 버리며 급기야 주니퍼 의회를 장악해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법까지 바꿔버립니다. '더 스토어' 앞에서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기관은 죽고 아름답고 인심 좋았던 '주니퍼'는 오로지 '더 스토어'만이 만인지상의 존재로 군림하는 파시스트적인 마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욕망을 파는 집'에서 사실은 악마였던 가게 주인에게 영혼을 모조리 빼앗겼던 캐슬록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이렇게 비슷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더 스토어'는 그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욕망을 파는 집'과 차이가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욕망을 파는 집'이 욕망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사람을 파멸해 나가는 지를 밝혀 공포를 주로 개인적인 측면에서 드러낸다면 그와 달리 '더 스토어'는 공포 자체를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세력이 사람들의 욕망 실현을 빌미로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려 가는가 하는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가져온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더 스토어'의 모습이 읽다보면 소설에선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생생한 리얼리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호러라는 덧칠을 하긴 했습니다만 현실에서 월마트와 같은 SSM이 작은 지역의 상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소설이 가급적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SSM, 즉 기업형 슈퍼마켓이 무분별하게 진출하여 골목상권을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보다 집중하고 있는 그 측면의 공포를 통해 왜 우리가 SSM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내버려 두어선 안되는지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독자를 자기가 속한 현실의 문제로 인도하고 거기에 대해 사유를 통해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포의 변증법'을 쓴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가 자본주의가 은밀하게 감춰둔 독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되는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통해 여실히 밝힌 적이 있지요. 그런 면에서 '더 스토어'도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소설이라면 분명 잡아내지 못할 지점까지 내려가 소비지상주의가 모토로 되어버린 현재 자본주의 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고 인간을 길들이며 또한 사회마저 자기 뜻대로 통제해 나갈 수 있는 지, 일상에서 얼른 깨닫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독소를 잘 짚어내주고 있으니까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1부와 2부를 이 소설과 곁들여서 읽으면 더욱 '더 스토어'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실듯 합니다. '더 스토어'는 사실 거기에 나오는 장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현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부정적인 면을 말할 차례로군요. '욕망을 파는 집' 보다 담고자 하는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만큼 부작용도 따랐는데요, 그건 바로 이야기가 시야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작가가 공포와 사회적 주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기 싫어서인지 이 둘을 긴밀하게 엮기 위한 설정과 상황들이 곳곳에 보이는데 읽다보면 그게 오히려 이 소설의 악재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단 등장인물의 소비가 너무 심하다는 측면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초반의 그렉 하그로브를 들 수 있을 것인데 이 사람은 건설업자로 '더 스토어'의 부지 공사를 맡는데 이야기 초반에서 '더 스토어'를 반대하는 빌과 공청회에서 대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뭔가 둘 사이에 '더 스토어'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것 같은데 얼마 안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그것도 직접 묘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죠. 거기다 그 딸이 주인공의 딸에게 나타나서 '더 스토어'에 뭔가 불길한 것이 있음을 은밀히 알리는데 그것도 그것으로 그칠 뿐, 소설에서 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과 전개에 있어서 구멍이 불쑥불쑥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단단하게 잡아주지 못하고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오히려 소설이 주고자 하는 공포조차 반감되는 면이 존재하지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요. 공포에 관해서라면 딱 이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에 공포를 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게 오히려 소설을 덜 공포스럽게 만드니까요. 바로 독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밤의 매니저'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밤의 매니저'라는 좀비 비슷한 존재들이 나옵니다. '비슷한'이라고 굳이 말을 한 것은 소설에서도 그 정체를 딱히 단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영혼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두교에서 주술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좀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제 생각으로는 '욕망을 파는 집'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이들이 육신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런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바로 이 부분이 그 자체로 좋은 소비지상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된 이 소설을 그 비판의 날마저 무디게 할 위험이 있는 초현실로 넘어가게 만드는 데요. 정작 이 존재에겐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이야기에서 이 존재를 빼버려도 전개상 별 무리가 없고 꼭 있어야할만큼 소설 주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어쩌면 '욕망을 파는 집'과 마찬가지로 '더 스토어'에 포획된 영혼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렇다면 소설이 더욱 디테일하게 보여줬어야 했을 것 같아요. 그저 죽여서 되는 것으로만 끝내 버리니 영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이 존재들은 결말에서 중요한 역할까지 하는데 존재 자체의 맥락을 짚어낼 수 없으니 결말도 그렇게 확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아무래도 분명 공포 효과의 증대를 노리고 나온 존재들 같은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수록 오히려 공포의 수치가 하락하도록 부추겨요.

 허다한 공포 영화와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공포는 결코 졸라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섭게 만드려고 잔혹한 장면, 섬뜩한 연출, 음산한 음악을 깔아도 그 맥락이 이해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공포는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수용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창조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무서울 때는 언제나 보거나 읽는 자의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개입될 때죠. 남이 만든 장면이 아니라 내가 연출한 장면을 통해 공포는 불현듯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용자의 적극적 해석 여지(우리는 이것을 공감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를 만들지 못하는 공포는 그저 '제발 무섭게 느껴줘!'라고 조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거죠. 그런 공포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하고 그저 소비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밤의 매니저'가 그러하다는 것이죠. 특히나 밤의 매니저가 되는 제이크의 경우에는 앞뒤까지 맞지 않아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더 스토어'의 점원인 그는 물건을 소소하게 훔치다가 발각되어 밤의 매니저가 되는데 앞에서 우리는 부랑자 사냥을 통해 아무리 불법적인 일이더라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더 스토어' 점원의 모습을 보면서 '더 스토어'가 얼마나 점원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거든요. 그런데 높은 위치에 있는 제이크가 점포의 물건을 훔친다구요? 앞서도 말했듯이 아무래도 작가가 편하게 캐릭터를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의 전개상 캐릭터가 막상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가지치기하듯 쳐내는 느낌이랄까요.

소비지상주의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난하는 소설이 이번엔 저에게 소비의 남용을 지적당하고 있다니 어쩐지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식으로 작가는 더욱 소비의 질 나쁜 측면을 알려주려는 것일까요? 후후. 아무튼 벤틀리 리틀은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는데 좀 더 이야기를 꽉 장악하고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스티븐 킹보다 판돈이 올라가서인지 이야기에 좀 휘둘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별 다섯 개를 주는 것은 비록 90년대에 나왔으나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이고 63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는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너무 궁금해서 중간쯤 읽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말부터 읽고 다시 중간으로 돌아갔을 정도예요.(빌의 딸 '서만사' 때문이었어요. 저는 서만사의 변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소비 남용을 말해야 겠네요. 그건 바로 여성을 너무 수동적으로 소모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도적 역할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몫이고 여성은 그저 아내 '지니'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불안해하거나 '서만사'처럼 조종당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아요. '더 스토어'에서 여성 점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소설이 너무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가 하는 텁텁함이 읽다가 들었던 것이 이제야 생각나는군요.으음, 별 하나 정도는 깎아야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어쨌든 기대되는 작가라는 점에는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길 바라며 그런 면에서 최고의 호러 소설에 주는 브람스토커상 수상작(90년)이자 90년대 최고의 호러 소설중 하나로 손꼽히는 'THE REVELATION'이 발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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