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빔 벤더스의 영화들은 한 개인을 다룰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니콜라스 레이를 다루었던 '물 위의 번개'가 그랬고 오즈 야스지로에게 헌정되었던 '도쿄가'도 그랬다. 그의 영상은 아무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인물을 처음 대하듯 하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움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 그저 정사각형의 평면으로만 알아왔던 것이 정육면체의 입체라는 것을 알게 되듯 더 깊이 그리고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번에 나온 피나 바우쉬에 대한 영화도 그러하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카페 뮐러'등 그녀의 작품들을 새롭게 재현하면서 또 그녀와 함께 했던 동료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드러나는 피나 바우쉬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재현된 그 순간, 절대로 똑같이 반복될 수 없는 동작의 한 순간이나 공중에 떠오른 물방울의 위치처럼, 전혀 새롭게 다가온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비록 빔 벤더스의 필터를 거친 피나 바우쉬의 삶이라 할지라도 그건 빔 벤더스의 피나 바우쉬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 우리들 자신의 피나 바우쉬라는 점이다. 당신이 피나 바우쉬를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 영화를 통해 만나는 피나 바우쉬는 오로지 당신만의 피나 바우쉬라는 것이다. 흔히들 영화는 공감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빔 벤더스의 '피나'만큼은 여럿이 춤을 추더라도 개인들의 동작은 다 다른 피나 바우쉬의 무용처럼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일대일 개인적인 대면이다.

 

 

 그것을 위해서 빔 벤더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는 하나 자신이 일종의 필터로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 했다. 일단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다. 무용과 삽입되는 회고 인터뷰는 최소한의 안내도 없이 무작위로 관객에게 던져진다. 그 앞에서 관객은 마치 무작위로 내던져진 퍼즐 조각을 대면하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 때문에 이 영화는 그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가진다. 영화란 늘 누군가의 의식과 눈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은 그의 눈과 의식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소외효과'란 관객에게 미칠 수 있는 감독의 시각과 의식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즉 관객이 오로지 자신의 눈과 의식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로 영화와 대화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 영화에서 불친절하고 낯선 형식을 가져온 것도 그 이유였다. 이 영화는 피나 바우쉬와 당신만의 대화이며 당신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채우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고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서도 빔 벤더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뷰 장면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인터뷰 장면과는 달리 이 영화에선 그들의 말과 그들의 얼굴이 따로 논다. 말은 들리는데 보여지는 얼굴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는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말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진짜 저 사람의 말이기나 할까? 하는 생각으로 영화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빔 벤더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인터뷰 역시도 지금 말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끝을 알 수 없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이게 결말이겠거니 싶으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순간! 그 결말은 또 다른 출발로 이어진다. 그렇게 진실과 거짓이 능수능란하게 뒤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며 해결이 오해로, 비극이 희극으로 마구 반전되는 작가 그가 바로 피에르 르메트르이다. 그가 다시 찾아왔다. 여름 미스터리 독서계를 뒤흔들었던 수작 '알렉스'에 뒤이어 그와는 스탠드얼론인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로 돌아온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있어 '플롯의 귀재'라는 별명은 여전히 마땅함을 보여준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한 대칭적 구도마저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의 처음 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소피가 자신이 보모로서 돌보는 레오가 죽었을 때 그를 품에 안고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처럼 절규하는 부분이 소설의 가장 마지막 이제 과거와는 완전히 결별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에 상징적으로는 죽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는 딸과 아버지의 대화 부분과 서로 댓구를 이루는 것 처럼 소설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이 정확히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블럭과도 같이 그 미세한 부분조차 정확한 계산으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맞추어진 것을 보노라면 흡사 매우 공정한 심판관을 보는 듯 하다. 아니, 사실 르메트르 그는 심판관이다. 말하자면 매우 최소화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권투시합과도 같다. 소피라는 여자와 프란츠라는 남자가 맞부딪히는 총 4 라운드의 권투시합. 바로 그 시합의 심판이 작가 르메트르이며 독자인 우리들은 관객인 것이다.

 

 

 ROUND 1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는 소피의 절규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돌보는 여섯 살 밖에 안되는 레오가 죽었기 때문인데 소피는 혹시 자신이 죽이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확신하지는 못한다. 다만 정황상 자신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될 뿐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전남편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그래서 소피의 정신은 온전하지 못하다. 잦은 건망증에 기억 상실증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불안에 겹쳐지는 사랑을 잃은 탓에 번져 나오는 우울증까지. 자신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진실을 확인할 생각도 않고 달아난다. 겨우 안정을 찾았나 싶었던 그녀의 삶은 다시금 불안한 도피자의 정처없는 유랑 속으로 떨어진다. 작가 르메트르의 매의 눈 같은 날카로운 필치는 이러한 소피의 마음 한 조각까지 모두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세세하게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영혼이 지금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그래서 뒤이어 그녀와 관계했던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제 그녀의 의심은 우리들에게도 전염된다. 혹시 정말로 그녀가 레오를 죽였을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도피한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은 점점 조여오고 최종적으로 신분을 세탁해 완전히 달아나려 한다. 신분을 세탁할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를 찾는다. 물론 영원히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필요한 때까지만 살 작정이다. 그 기한이 지나면 남편은 소피에 의해 폐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1 라운드는 오로지 소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르메트르가 선택한 3인칭 관찰자 시점 때문에 관찰자로 머무르면서 남김없이 드러내는 르메트르의 필치를 따라 소피가 지금 어떤 존재인지 그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소피는 그야말로 병든 영혼이며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 마땅한 가해자로 보인다. 그리고 순결한 희생자가 그녀 앞에 도래한 순간 2라운드가 시작된다.

 

 ROUND 2

 

 2 라운드에서 시점의 주인공이 바뀐다. 뿐만아니라 서술 스타일 역시 달라진다. 2 라운드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일기다. 프란츠라는 남자의 것으로 놀라운 것은 쓰여있는 시점이 소피의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라는 것이다. 프란츠는 일기에 우연히 소피를 보고 자신이 포기했던 계획을 다시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고 쓴다. 단순히 따라다닌 것만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 그녀의 삶을 조금씩 파괴하기까지 한다. 일기는 그러한 파괴의 기록이다. 그녀를 육체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부러 물건을 숨겨서 소피로 하여금 스스로 건망증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사람들로 부터는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한다. 프란츠는 점점 강도를 높여 그녀를 히스테리에 빠지게 하고 결국 그녀의 삶을 뿌리 째 파괴해 버린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라운드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진실을 알게 된다. 소피가 왜 그렇게 병든 영혼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진실이다. 그것은 소피 탓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서 그녀가 모르게 그녀의 삶을 유린한 프란츠 때문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프란츠는 왜 소피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 긴 세월에 걸친 프란츠의 치밀하고 집요한 파괴 계획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잔혹한 프란츠의 행위를 보며 저절로 이런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1라운드와 2라운드에 대해서만 말하자.

 

 '알렉스'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는 그냥 평범한 스릴러 작가는 아니다. 그건 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왜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을 바꾸었던 것일까? 문제는 1 라운드의 소피는 가해자인 줄 알았는데 피해자였다는 점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신적 문제는 사실은 프란츠가 의도한 결과였다. 진정한 가해자는 바로 2 라운드의 프란츠였다. 그런데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서로 바꾸는 것 말고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한 가지는 1 라운드와 2 라운드의 서술 스타일이 정확히 문학의 역사에 있어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의 역사로 보자면 그 서술 스타일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흘러왔다. 그것은 근대가 되고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어 결국 소설이 발명된 것과 일치하는데 사실 바로 여기에 3인칭 시점으로 변해야 했던 까닭이 있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의 접근이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그 이야기들이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에 있어서도 공감할 수 있게끔 만들어져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확실히 수신자 하나만 놓고 썼던, 그렇게 1인칭이 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내간체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 가지 밖에는 없다.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의 기록처럼 여기게끔 하는 것이다. 진실은 개인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모두 무릎 꿇릴 수 있는 만능열쇠와도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임을 알려줄 수 있는 서술 방법이 고안된다. 그것이 바로 3인칭 서술 이었다. 3인칭이 1인칭과 달리 사람들에게 보다 진실로 다가갈 수 있는 건 그것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3인칭을 읽을 땐 그들이 직접 본다고 생각하지 누군가의 필터로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1인칭을 읽을 때는 언제나 '나'라고 하는 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다고 여기게 된다. 즉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3인칭을 읽으면 보다 진실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나아감은 보다 진실에 가깝게 나아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역사에서 서술 스타일이 발전했던 그 까닭과 그럴 수 있게 한 원인이 모두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1 라운드'에서는 진실이 '2 라운드'에서는 관찰이 주가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더욱 놀라운 것은 소피 마음의 작은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보여주었던 그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던 르메트르의 필치마저 작가 자신의 정교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3인칭 시점이 객관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더욱 선명히 각인시키려는 의도로 말이다. 물론 그것은 독자들의 뒤통수를 내려치기 위함이다. 그 세세하게 묘사되었던 것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누군가의 설정이요 의도된 효과였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진실이라 믿었던 것은 '2 라운드'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지는 누군가의 관찰과 개입의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역사는 소설에서는 거꾸로 퇴보했다. 그 어떤 진실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영일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우리 역시도 3인칭을 읽으면서 어떤 진실을 본다고 생각했기 보다는 다만 그러한 관습적 믿음만을 소비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스스로의 것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든 아무튼 그러한 작위가 만들어낸 판타지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이 작위적 판타지.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르메트르는 1 라운드를 그렇게 공들여 소피의 심리를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묘사하다가 2 라운드를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단계의 스타일로 바꾸어 썼던 것이다. 근데 왜 갑자기 '진실로 보이게끔 설정된 환영'이 툭 튀어나오는 것인가? 이게 바로 르메트르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어 접근하고 있는 것. 프로이트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라캉에 의해서 모든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도 말해졌던 것. 그것이 바로 작위적 판타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이 소설의 저변을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다. 그것의 근거는 너무도 많다. 스포일러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소설 첫 부분 부터 소피는 '유사 엄마의 자리'에 서 있다. 레오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소피의 모습은 그대로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는 성모 마리아를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가져와 모성으로서의 소피를 더욱 구체화한다. 그런데 프란츠가 소피를 그토록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엄마와 관계가 있다. 좌절된 엄마를 향한 그의 욕망을 소피를 통해 대리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소피와 프란츠의 관계에 있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이 '돌봄'이라는 것도 한 근거가 된다. 사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보는 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러한 '돌봄'이 많이 나온다. 서로 상처입히고 죽이기만 하는 스릴러 장르로서는 상당히 이채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독특한 설정 역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를 드러내는데 있다. 소피와 프란츠는 그 욕망의 삼각형 안에서 여러 번 자리를 이동한다. 소피는 딸이었다가 엄마이기도 하고 프란츠는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소피의 욕망도 프란츠의 욕망도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늘 그렇듯이 충족되었다가 좌절되고 대리 만족으로 변질되기를 반복한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에서 중요한 것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징계의 개입이다. 아들은 2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개입으로 인한 3자 관계에로의 변화로 결국 자신은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사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해서나마 엄마의 욕망 대상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 권위의 받아들임이 상징계의 개입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언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때 그 아버지가 이루는 모든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진리라 여기고 그것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간다. 그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다. 진짜 자기 주체는 아니가 아버지가 설정한, 하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주체이다. 만들어진 주체. 진실이라 여기게끔 설정된 환영에 지나지 않는 주체. 이것은 그대로 '1 라운드'에서 보여준 소피와 일맥상통한다.

 

 바로 그렇게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이 근대라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을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다. 그런데 그것은 2 라운드에서 알게되듯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다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하다. 거짓의 놀음. 그 안에서 우리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는 욕망을 이루러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분명히 보여준다. '1 라운드'에서의 소피와 '2 라운드'에서의 프란츠처럼 우리가 주체가 되면 될 수록 왜 스스로에게서 더 소외될 수 밖에 없는지를. 그건 바로 우리에게 주체가 되도록 강요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로 만들어진 거짓 환영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그 뿌리에 자리잡은 본성은 오로지 허위와 기만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욕망을 이루려고 하면 할 수록, 그렇게 주체가 되면 될 수록 늘어나는 것은 오로지 자기 파괴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더욱 분명히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스포일러상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고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타자의 자리에 서는 수 밖에 없다. 소설의 결말이 보여주는 것 처럼 내가 아닌 '나'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나란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환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 나로 남아 있어서는 자기 소외의 여정에서 달아날 수 없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자의 위치에 서는 것. 그것만이 그 파괴의 여정에서 발을 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결국 '1 라운드'에서 소피의 도피 여정이 보여주는 의미도 이것이다. 거기서 소피는 소피 아닌 자가 되기 위해 계속 달아나는데 그 여정은 결코 자기를 포기하는 여정이 아니라 정말은 오히려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이다. 이것은 특히 '2 라운드'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집요하게 소피를 추적하는 프란츠의 여정과 대비되어 더욱 뚜렷이 강조된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런 식으로 구성과 내용의 모든 조각들을 가지고서, 그것도 아주 흡인력 있는 이야기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안에서 만들어 놓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아라는 것이 과연 정말 '나'인지 아니면 '남'에 의해 설정되어진 한낱 거짓된 환영에 지나지는 않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다소 투박하게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 찾기라고 할 수 있지만 보다 깊은 쪽에선 소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지금 내가 진짜라고 여기고 있는 내가 누군가로 부터 설정된 나일수 있다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의 위치로 옮겨가 나를 다시 한 번 스스로 재설정해보도록 하는 소설이다. 놀랍도록 빨리 읽히지만 그런 면에서 기억에서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

생각만해도 왠지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고 마음이 부담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철학.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꼭 한 번 벗해야 한다고 현인들은 말씀해 오셨지만 살아보니 일부러 그런 복잡한 생각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길을 가다 아주 예뻐보이는 철학책들이 내 옷깃을 부여잡아도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들을 피하듯  일찌감치 무시하고 그냥 지나치기 바빴던 철학...

 

 하지만...

삶이 예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거나 예기치 않았던 삶이 준비한 반전을 맞이하다 보면 도대체 사는 것의 의미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날이 사소한 불운들과 커다란 불행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겪다보면 도대체 이 모든 것들에 의미는 있기는 할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만 생각하는 삶은 근시안적이다. 그 때 그 때 닥친 일들을 헤치울 수 있을 뿐 보다 높은 곳에서 멀리 헤아리게 하지는 못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철학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부담스럽다. 뭔가 쉽게 철학이라는 것을 해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라면 좋겠는데....

 

그런 당신을 위해 툭 떨어진 책...

 

 

 

 

 

 

 

 그것이 바로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프랑스의 국제철학학교 교수를 역임했던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에 관련된 책을 펴냈는데 그 철학책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철학을 난해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 알고보면 철학이란 그렇게 어렵지 않고 현실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으며 현실을 보다 더 생생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는 로제 폴 드르와가 항상 책을 쓸 때 염두에 두는 점이기도 한데 그렇게 한결같이 이어져 온 로제 폴 드르와의 주제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책이 바로 이번에 나온 '일상에서 철학하기'이다.

 

 

 웃! 왠지 제목에서 부터 뭔가 난해한 게 느껴져... 하는 당신을 위해 책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자면...

 

이 책은 절대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그런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에 가장 합당한 정의는 아마도 '놀이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여기에는 모두 101가지의 일상에서 별다른 노력없이 즐길 수 있는 철학 놀이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밑줄을 그어야 할 부분은 '별다른 노력없이'란 부분이다. 정말로 이 책에 실린 놀이들을 하는데는 별로 힘들일 필요가 없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라든가 '반짝이는 별 내려다 보기' 혹은 '소리를 줄인 채 TV 화면 보기' 같은 것이 부담을 줄 리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런 경험들이 과연 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

 로제 폴 드르와는 정말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할 수 있는, 별 것 아닌 것으로만 보이는 이러한 101가지의 경험적 놀이를 통해 분명히 철학적 경험으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보자...

로제 폴 드르와는 101가지 모든 놀이를 이야기 하기에 앞서 항상 그 놀이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그 효과까지 미리 설명해 두고 있는데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에 걸리는 시간과 필요한 소도구 그리고 효과는 그에 따르자면 이렇다.

 

소요시간 20 ~ 30분 / 도구 없음 / 효과 집중력

 

 내가 이 놀이를 택한 건 리뷰를 쓸 때마다 내가 늘 겪었던 경험이기도 해서이다. 나는 리뷰를 쓰기 전에 보통 먼저 머리로 대강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실제 글로 옮긴다. 그런데 머릿속으로 글의 분명한 세부까지 다듬고 나면 슬며시 꾀가 생긴다. 이 정도로 마무리 해 놓았으면 그냥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되니까 나중에 써도 상관없겠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미루다가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데 그렇게까지 세부적으로 다듬어 놓았던 내용이 막상 글로 옮기게 되자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걸 많이 경험했다. 그건 결코 내가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듬어 놓은 그 상태 그대로 옮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글로 실체화되려는 순간에는 뭔가가 맞지 않고 앞과 뒤가 틀어지며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블럭처럼 위태위태 하기가 일수였다. 이런 반복된 경험들이 내게 있었음은 로제 폴 드르와의 바로 이 글을 읽고서야 생각났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현실을 쉽고 분명하게 재현해낼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상당 부분 착각일 수도 있다.(p. 67)

 

 경험상 이 말은 진실이었다. 그저 옮기기만 하면 될 정도로 다듬어 놓았는데도 막상 글로 그대로 옮기기조차 쉽지 않았다.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란 놀이는 바로 이러한 떠올리는 것과 현실로 하는 것과의 괴리라는 재현의 어려움을 체험하는 놀이다. 그러면 이 놀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철학적 경험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에 혹은 마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착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마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서슴없이 남들 앞에서 남의 말을 듣기도 전에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카메라처럼 정확히 현실을 모사하고 또 재현해낼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상상으로 사과 깎아보기'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로제 폴 드르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당신이 이 체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현실에 얼마나 불충실한지,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재현하는 데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관한 것이다. 평소에는 "현실? 그쯤이야 뭐..."라고 생각하는, 유난히도 잘난척하는 우리의 정신이 말이다.(p. 7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겸허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사과를 먹기 쉽게 조각내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이 소화하기 쉽게 잘라내고 다듬고 더러는 왜곡시킨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다 온전히 총체적이고 진실된 현실을 담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야 한다. 신이 입은 하나요 귀는 두 개를 만드신 것도 마음에 본래적으로 각인된 그러한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로제 폴 드르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는 별 거 없어보이는 그런 경험들을 통해 철학적 경험들로 인도하는 책이다. 정말 놀이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돈오점수'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상식적인 견지에서 철학은 언제나 일상의 경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왔다. 일상이 멈추는 곳. 철학은 일상에서 뚝 떨어져 나온 공간에서나 가능한 사색적인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로제 폴 드르와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상이야 말로 철학적 사색을 위한 더없이 훌륭한 공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특별한 공간을 선택할 필요도,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 '뜨거운 태양 아래 배깔고 한숨 자기'나 '아무에게나 미소 짓는 것' 혹은 '헌책방에서 탐닉하기'나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아다니기'와 같이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았던 행동들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고보니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비유는 도라에몽이 가지고 있는 '어디든지 문'일 것 같다.

 

 

 

 아무리 당신이 지루한 일상 속 공간에 있다고 해도 로제 폴 드르와의 이 문을 꺼내고 들어가기만 하는 새로운 경험과 의미로 채워지는 일상을 만나게 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히 말씀드리자면,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기로 생각하셨다면 일단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가급적 버스나 지하철 혹은 강의실이나 도서관 같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는 피하시는 것이 어떨까 말씀드리고 싶네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쳐 흘러내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지하철에서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자로서의 말이니 유념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라는 말을 우리는 식상하리만치 흔히 보지만, 또 곧이곧대로 믿고 보았다가 실망한 경험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지만 이 책 만큼은 그 말이 순도 100%의 진실입니다. 16세의 말기 암환자로 언제 멈출지 모르는 폐를 위해 별도의 산소통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소녀 헤이즐. 예정된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모든 치료는 다만 그것을 조금 지연 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인, 마치 사형집행일이 예정된 사형수와도 같은 그 마음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새벽이 찾아올 때 풀잎들이 그렇듯이 저절로 마음 여기저기 돋아난 감성의 잎새에 송알송알 슬픔이 맺혀서 커지고 커지다가 그 잎새가 무게를 못 이겨 절로 눈물로 뚝 하고 떨어지게 되니까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그 날은 잔뜩 흐렸던 오후였습니다. 또 하나의 태풍이 저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태풍이 이제 막 지나갔는데 또 하나의 태풍이 온다니. 삶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의 연속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편이죠. 아직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태풍이, 험난한 난관이 닥쳐와도 하얗게 비어있는 미래로 인해 내일을 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그것도 곧 닥쳐올 것이 확실히 예정되어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지요. 어쩌면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은 먼저 이별을 예감해야 하고, 하고 있는 일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해야 하며,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없어졌을 경우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할테죠.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로도 지울 수 없는 힘겨움을 짙고 길게 남기기 때문에 그로 인해 늘 미안해하고 늘 아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겠지요.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힘겨운 고통과 끝없는 상실감만 주고 가는가?

 도대체 내가 겪는 고통 그리고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 이 모든 고통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는 있기나 한가?

 

 헤이즐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한 책이 그녀에게 빛을 가져다 주었죠. 피터 반 호텐이 쓴 소설 '장엄한 고뇌'가 바로 그 책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안나 역시 헤이즐 처럼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해서 그 소설을 수십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이 그토록이나 숭배에 가깝게 열광적으로 읽은 것은 그 책이 바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엄의 고뇌'에서 그 부분 알지? 안나가 체육 수업인갈르 하기 위해 축구장을 가로 질러 가다가 풀밭에 그대로 엎어지고 그래서 암이 신경계에 재발했다는 걸 깨닫는 거. 그렇게 일어날 수가 없어서 얼굴이 축구장 잔디에서 1인치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은 상태로 꼼짝 못하고 풀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빛이 풀에 비치는 모습을 알게 되는...,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안나가 인간성이라는 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 휘트먼적인 계시를 받게되는 부분이었어. 그 부분 알지?"(p. 185)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인간성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신경계에 재발한 암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듯이 자신에게 닥쳐온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운명 역시도 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에 열광적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반복된 독서는 사실 자신의 삶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에 다름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난 뒤 내내 현존하는 고통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었고 그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성경에서 말하듯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고통과 죽음 같은 것을 허락하는 것이냐?'는게 그 질문이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심이다' 하는 게 당시 대표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게 바로 구약 성서의 '욥기'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기독교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을 믿는 모든 종교들은 고통을 다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아무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헤이즐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수 십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읽을만큼 강하게! 그렇게 위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정작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자신은 죽어 없어지는데... 사후세계의 존재가 불확실한만큼 그 의미의 여부 또한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헤이즐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고통과 죽음의 의미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의미에 집착해 보았자 자신은 그저 미래가 아직 결정되어지지 않은 운 좋은 이들이 삶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가지도록 봉사하는 것 뿐임을. 정확히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집착은 그저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불운을 좀 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부당함을 희석시키려는 자기 기만에 불과할 뿐임을...

 

 바로 그 집착의 무용성을 오매불망 그리워 해 온 피터 반 호텐와의 직접적 만남에서 헤이즐은 여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헤이즐이 '장엄의 고뇌'에서 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일들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건 안나의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호텐과 만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왜 그토록 의미에 집착했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도 알게 됩니다. 바로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녀는 미래라는 게 이미 결정되어져버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미래란 다름아닌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미래였습니다. 자신이 부재한 거기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이 자신의 상실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될 수 있도록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죠. 그것이 안나의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호텐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신이 모든 불행에 대해 침묵하듯이 말이죠. 신이 헤이즐에게 가져다 준 불운과 마찬가지인 호텐의 폭언을 들으면서 미래는 우리가 도무지 어쩔 수 없으며 삶은 오로지 이 현재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거기서 헤이즐은 숫자 '0'(삶) 과 '1'(죽음) 사이에는 무수한 무한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 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 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 보다 더 커요. 저희가 에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주었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일도 꽤 많이 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거야.(p. 273)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이란 다름아닌 수 많은 현재입니다. 헤이즐은 삶이란 바로 현재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총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저 더 큰 총합이 있고 더 작은 총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더 큰 총합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해도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총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색깔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남겨진 자들을 위해 오늘을 부정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 주어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다 많은 의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보다 현명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이즐은 그동안은 자기가 죽고 난 뒤 남겨질 어거스터스의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그의 애정을 거부했었지만 호텐을 만난 다음 들른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는 드디어 어거스터스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합니다. 지금 존재하는 현재를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으로 싱싱한 초록으로 채색하기 위해서... 이 안네 프랑크는 사실 '장엄의 고뇌'의 안나와 이어지고 그녀들이 모두 상실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헤이즐의 이 행위는 안나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헤이즐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해 자기 스스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습니다. 결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문득 고 정채봉 선생님이 쓰셨던 우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심한 바람 때문에 삼일간 배를 타지 못해 여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이야기인데 한 사람은 바람이 잦아들어 배를 타기만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간동안 옷을 빨고 식물을 가꾸는 등 바람을 핑계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이 가져다 준 비어버린 시간을 적극적으로 의미로 채워갑니다. 삼일에 불과했지만 배를 오르는 그들의 행색은 하지만 참으로 달랐습니다. 삼일 간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행색이 꼬질꼬질 해져버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웠던 사람은 깨끗한 의복에 열매를 맺은 식물마저 안고 있었죠.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비유임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를 짧지만 이 이야기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됩니다. 헤이즐은 바로 이 우화 속 '현재를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우는 자'가 된 것이죠. 그러고보면 헤이즐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생애를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연인에게 '어거스터스'란 이름을 부여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거스터스란 이름은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바로 8월을 나타내는 '어거스트' 때문이죠. 이 두 이름이 비슷한 것은 '어거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어거스터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터스는 로마에서 케사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였습니다. 그는 케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7월'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고 자기도 질 수 없다며 '8월'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원래 8월은 31일이 될 수 없었는데 케사르가 31일이면 자기도 31일이어야 한다면서 아예 그 날 수 까지 31일로 바꿔버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라는 그야말로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바꿔버린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결정된 미래에 상관없이 지금 존재하는 현재에 모든 것을 거는 어거스트에게 그 이름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죠. 어거스트는 자신도 암환자에다 더구나 그 때문에 한 쪽 다리까지 절단된 상태이지만 그로 인해 비관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하지도 않구요. 오히려 더없이 주어진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삽니다. 헤이즐에게 '장엄의 고뇌'가 있다면 어거스트에게는 '새벽의 대가'가 있습니다. 한 영웅의 고군분투 대학살 생존기인 '새벽의 대가'는 모든 현재를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어거스트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울리는 책입니다. 그는 친구 아이작이 당했던 실연을 보복할 수 있게끔 도와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헤이즐이 어거스트에게 끌린 것도 당연하겠죠. '장엄의 고뇌'에서 찾고 싶었던 진정한 해답은 바로 어거스트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깊이 느끼게 해 주는 책입니다. 존 그린은 그것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삶과 죽음에 있어 가장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영혼을 데려온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었요. 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p. 325)

 

그렇습니다. 아무리 헤이즐 처럼 어거스트 처럼 그 삶이 한계지워져 있다고 해도 결국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재라는 사실을.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만일 존 그린이 이 책을 선택해서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그 때 헤이즐이 들려주었던 그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겠습니다.

 

  나도 좋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스커레이드 호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면서 '가면(MASK)' 한번쯤 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현대란 어찌보면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상사에게 야단 맞을 때는 아무리 억울해도 수긍한다는 가면을 써야 하고 시시하기만 한 상사의 농담에도 아주 웃겨 죽겠다는 가면을 써야 합니다. 이런 저런 가면을 하도 많이 쓰다 보니 어느 때는 진짜 내 얼굴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조직사회에서 버티려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납득시키지만 점점 진짜 나를 잃어간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씁쓸함은 달랠길이 없죠. 그리고 보니 프로이트도 여기에 대해 말했던 것 같군요. 사회는 개인의 솔직한 욕망들을 인정하지 않는데 ( 그렇게 되면 너무도 다양하고 한계가 없는 개인의 욕망 때문에 사회의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개인들이 그 사회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짜 욕망을 감추고 사회가 원하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 때 개인들이 쓰게되는 가면을 프로이트는 가면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실은 사람의 자아라는 것 자체가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만큼 가면이란 우리에게 필수이며 스스로 다른 것으로 꾸미는 위장은 삶과 불가분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이렇게 보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생활 25주년을 기념하는 작품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그대로 우리 삶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호텔 이름이 사실은 '코르테시아도'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가면무도회를 뜻하는 '매스커레이드'라 이름 붙인 게 아닌가 싶어지네요. 아마도 제목 자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말하려는지 직접 드러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코르테시아도 호텔의 프런트 담당 나오미는 손님이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만은 최상의 만족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열혈 호텔리어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루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떨어지는데요, 그것은 최근 도쿄에서 잇따라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하여 경찰들이 호텔 직원으로 위장 취업하게 되었다는 그것입니다. 형사로서의 자질은 어떨지 몰라도 호텔리어로서는 초심자라 어설프기 짝이 없어 손님들의 기분을 망치고 호텔의 신뢰를 떨어뜨릴 것이 분명한 그들이 나오미로서는 여간 달갑지가 않은데요. 그래서 나오미는 결심합니다. '연쇄살인 수사야 어쨌든 아무리 형사라고 해도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은 호텔리어가 우선이야! 어엿한 호텔리어가 될 수 있도록 내가 가르치겠어!'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각오로!

 

  이 각오에 희생양이 된 사람이 바로 경시청의 닛타입니다. 사실은 그 역시 이 호텔 직원 위장 수사가 그리 달갑지가 않았어요. 연쇄살인사건의 유일한 단서인 암호를 뛰어난 추리로 해독해낸 그이니만큼 호텔에서 언제올지 모르는 범인을 기다리기 보다는 바깥에서 단서들을 찾아내어 추리를 통해 숨어있는 범인을 추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죠. 하지만 명령은 명령. 본심을 숨기고 순종하는 가면을 쓸 수 밖에요. 그것만으로도 실은 괴로워 죽을 지경인데 이 나오미란 여자는 수사를 위해 임시로 쓴 것에 불과한 호텔리어라는 가면을 자신의 진짜 얼굴이라는 듯이 시종일관 가르치고 야단치고 성가시게 굴고 있으니 더욱 고달플 수 밖에 없습니다. '제길! 나는 형사라구!' 몇 번이나 그렇게 어필해 보지만 투철한 신념의 소유자 나오미 앞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뿐!

 

 

  여기까지 이르면 우리는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은 제목 자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던 대로 가면과 위장이 핵심이라는 것이 말이죠.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 바로 그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매스커레이드 호텔'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그것에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람들이 가면을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륜의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호텔을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가져온 까닭입니다. 만일 당신이 호텔의 프런트 직원이라면 불륜이라는 자신의 진짜 욕망은 숨기고 그저 잠만 자러온 것 처럼 가면을 쓰고 온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겠죠. 거짓말엔 개인차가 존재하니 능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서투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그 가면을 쓴 자들 앞에서 당신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바로 그 질문을 위하여 호텔이라는 배경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예 소설에는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호텔에서 사용하는 교묘한 속임수마저 등장하기까지 하지요. 이것까지 고려하면 바로 이 질문이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질문 자체라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바탕해서 보자면 사람들이 타인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 가면 아래 깃들어 있는 진짜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쓰고 있는 가면을 그게 진짜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각시탈에서 어떻게든 각시탈을 벗겨서 그 정체를 알고자 했던 일본 형사 슌지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각시탈의 정체가 누구이건간에 그 활약만으로 환영했던 조선 백성들은 후자라 할 수 있겠네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에서 이 두 가지 반응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하겠는데요. 그것은 정확히 그 두 반응이 소설 속에서 각각 하나의 인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오미와 닛타 입니다.

 

 소설 속에서 형사 닛타는 프런트에서 내보인 손님의 가면에 만족하지 않고 의심하고 의심해 어떻게든 그들이 쓴 가면을 벗기고 맨 얼굴을 드러내보이고자 합니다. 반면에 나오미는 설령 그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맨얼굴을 상관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썼다면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가면을 가면 그대로 존중해 줍니다. 그렇게 둘은 상반되면서 가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각각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닛타와 나오미 커플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들 입니다.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두 반응들을 모두 아우르면서 그 진정한 해답을 추구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닛타와 나오미는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탐정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게이고의 뛰어난 점은 주제에 천착하느라 미스터리를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를 끝까지 몰입시키는 필력은 여전할지 몰라도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많이 퇴색되었다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만 이 '매스커레이드 호텔'만은 거기에 대해 제대로 된 카운터 펀치를 먹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쇄 살인 사건마다 남겨진 수수께끼의 숫자 암호를 푸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범행 수법의 교묘함이나 범인의 의외성이 가져다 주는 반전의 맛 또한 기가 막히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만으로써도 25주년이라는 기념작에 충분히 값할만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주목하고 싶은 것은 주제와 관련해서 닛타와 나오미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추리의 특색 입니다. 거기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하필이면 커플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그 이유가 더욱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 못지 않게 그 반응들이 또 어떻게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아울러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들 각자의 추리 스타일인 것이죠. 탐정으로 활약하는 닛타와 나오미는 가면에 대한 반응만큼이나 추리 스타일도 상극인데요. 비유하자면 닛타가 C S I 같다면 나오미는 브라운 신부와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닛타는 C S I 가 드러난 물리적 증거만을 추적하듯이 철저히 사건의 보여지는 부분에 천착합니다. 그에겐 행위의 결과만이 중요할 뿐 행위자가 처했던 상황이나 그 마음의 과정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죠. 반면 나오미는 닛타가 무시하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큰 주목의 대상이 됩니다. 왜 하필이면 그가 그때 그렇게 해야 했을까가 나오미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닛타가 그 겉모습만 보는 사람이라면 나오미는 그 안에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이 가면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과 정확히 반대입니다. 가면 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맨 얼굴을 보려고 했던 닛타는 그 반응대로라면 나오미처럼 행동했어야 했었습니다. 가면 그 자체를 본 모습만큼이나 존중했던 나오미는 그 반응대로라면 닛타처럼 행동했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죠. 그들은 완전히 거꾸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겠죠.

 

 '히가시노 게이고는 왜 이렇게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했을까?'

 

 바로 여기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녹아들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해답은 그 반전된 태도에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 마디로 이것은 '가면에 대한 진실과 존중의 문제'입니다. 닛타는 진실을 나오미는 존중을 상징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우리는 진실을 최우선적 가치로 고려합니다. 존중도 진실을 기반으로 했을 때 정당하다 여깁니다. 그래서 흔히들 가면을 쓴다는 것에 가식적이라 경멸을 보내고  자신이 그것을 써야만 할 때는 씁쓸함을 느끼는 것이겠죠.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닛타를 통해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게 꼭 진실을 따져보는게 좋은 것인가? 진실과는 상관없이 그저 존중만 해주면 안되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 반문을 위한 존재가 바로 나오미 입니다. 반문은 보통 해답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경우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도 마찬가지죠. 그의 해답은 다름아닌 나오미에게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닛타의 추리가 가로막혔을 때 마다 활로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나오미라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아니, 나오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있죠. 닛타와 파트너로 나오는 나이 든 형사. 타인을 대하는 태도나 생각에서 여러모로 나오미와 유사한 그 형사 역시 닛타가 올바른 해결을 향해 가도록 때때로 출구를 열어줍니다. 보다 더 결정적으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진짜 원인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답을 더욱 명확하게 말해줍니다.(이것은 중대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빼겠습니다. 아마도 읽으시면 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곧 알게되리라 생각합니다.)

 

 

 

                        가면에 대해 진실 보다는 존중에 우위를 두는 나오미를 그려 봤습니다.^ ^

 

 결정적으로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것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나오미를 통해 내어놓는 대안은 진실 보다는 먼저 존중에 더 우위를 두자는 것이죠. 그래서 나오미라는 캐릭터를 손님이라는 타인의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열혈 호텔리어로 만든 것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무리할 것이 뻔한 타자의 요구에 최선을 다해 응대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죠. 오히려 그러한 나오미의 모습이 너무나 바보같아서 독자인 우리들 속이 다 답답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결코 거기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습니다. 형사로서의 신념이라면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않는 닛타 역시 굴복시킬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신념이 가장 강하게 맞부딪히는 장면이 있었죠. 바로 경찰들이 범죄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일어날 걸 알면서도 호텔 측에 숨긴 것을 나오미가 알게 될 때였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한다는 나오미의 신념과 드러난 진실만을 쫓는다는 닛타의 신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독자는 그 때 닛타의 편에 서서 나오미의 결단을 답답하게 여겼을지 몰라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지한 것은 결국 그녀의 그런 우직한 결단이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옳았기 때문이었죠. 닛타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호텔측의 상황 따위 상관하지 않았지만 나오미는 범인 체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던 그들의 심정을 먼저 헤아렸고 그래서 결국 자신의 태도를 양보 했습니다. 닛타는 보다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면 지금의 작은 희생 따위 치뤄도 좋다고 여겼지만 나오미는 아무리 작은 희생이라해도 그것은 끝까지 보호되어야 한다고 여겼죠. 바로 이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닛타가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나치즘을 낳고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불러왔으며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종교를 이유로 한 테러리즘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극을 낳았던 '근대성(modernity)'이 지녔던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 시학'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츠베탕 토도로프는 '민주주의 내부의 적들'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그것을 두고 '정치적 메시아주의'라 불렀습니다. 그는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을 단적으로 '나 아니면 안된다' '보다 더 나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은 얼마든지 치뤄도 좋다'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닛타가 보여주는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토도로프는 그 책에서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얼마나 많은 비극을 가져왔는지 낱낱이 열거하고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오미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면 바로 나오미의 우선은 존중 부터 하고 진실은 그 다음에 추구하는 그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죠.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코르테시아도 호텔에서 한바탕 치뤄진 가면무도회를 통해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던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매스커레이드 호텔'은 미스터리적으로도 좋았지만 현대가 만들어내는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극복할만한 대안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밖에 없는 '가면'이라는 것을 통해서 제대로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더욱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 더구나 미스터리와 주제의 깊이를 동시에 추구할 경우 대부분 하나를 소홀히 하게 되거나 따로 놀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러지 않고 미스터리 자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 유기적으로 잘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를 보다 명확히 하고 깊이있게 만드는데 확실히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만족스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상에서 가면을 쓴다는 것에서 느꼈던 씁쓸함을 조금쯤은 지울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에서 별로 만족을 못 느꼈던 분들에게는 오랜만에 다시금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 외칠 수 있도록 할만한 작품인 것 같네요. 팬이 아니시더라도 미스터리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와 어떻게 엮이어야 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니만큼 보다 깊이 있는 미스터리를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9-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헤르메스님 그림 자주 그리시는 군요 ㅎㅎ
타블렛이라도 하나 장만하셨습니까? ㅎㅎㅎ

ICE-9 2012-09-09 22:25   좋아요 0 | URL
뭔가 새로운 변화를 줘 보려는 시도로 이해해줘요.^ ^
그런데 자꾸 그리다보니까 이거 꽤 재미가 붙는 걸요.^ ^

이진 2012-09-10 00:09   좋아요 0 | URL
그림에 소질(?)이 있으신걸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