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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군대에서 마음 맞는 고참을 만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예외란 녀석은 있는 법이어서 그런 눈 먼 행운 하나가 내게 찾아왔었다.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정기휴가까지 맞춰 나온날, 우리는 전라도에 있는 고참 집으로 갔다. 그 집 마당 한 켠에 커다랗게 서 있는 나무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넓다랗게 펼쳐진 잎으로 수북한 가지들이 마치 집 전체를 보듬어 안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을 말하자 고참이 내게 그 나무가 있게 된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고참 할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날 무렵이라고 한다. 아들의 출산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가정을 떠나 먼 곳에서 오래도록 있어야 했던 아버지가 아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보게 될 자신의 빈자리를 이것이 대신해 주기를 빌며 심은 것이 바로 그 나무라 한다.

 

 "어디에서나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나무를 통해 알리려 하신 거지..."

 

 고참은 나무에 얽힌 내력을 그렇게 끝맺었다. 그러고 보니 굵은 가지들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듬직한 팔처럼 보였고 무성한 잎사귀들은 아들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이 쓰다듬고 있는 인자한 손가락처럼 보였다. 파란 하늘 아래 조용히 너울거리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 때는 정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 같아서 저런 게 부모의 마음이겠구나 하고 무심결에 감동했다. 그리고 참으로 전하기 어려운 진심을 저렇게 근사하게 남기진 그 아버지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어느 한 순간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곧 아들 곁을 떠나야 할 것을 안 아버지가 실로 오랜 낮과 밤에 걸쳐 고민한 끝에 나왔을 것이다.

 

 불현듯 이 일을 떠올리게 된 건 우연히 책 소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p. 228)

 

 나는 책보다 이 문장을 먼저 읽었고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그 때의 나무가 홀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김연수 작가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그런 나무를 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면 이런 문장을 토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나무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고 싶어하는 애틋함. 남김없이 그 속내를 전하고 싶은 절절함이 마치 그 문장의 말들 하나하나가 무심코 바다 속에 손을 넣었다가 우연히 만져진 생선의 비늘만큼이나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김연수가 세상에 날려 보내는 날개와도 같은 이 작품으로 날 인도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p. 27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읽고보니 이런 절망 가운데 생겨난 날개였다. 그러니까 타인의 진심을 알기도, 타인에게 내 진심을 알리기도 불가능하다는 절망 속에서 마치 키가 너무도 커서 아래로 부터는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위의 안개로 나마 수분을 공급받아야 했던 레드우드(p.12)처럼 그래도 과연 불가능하기만할까, 뭔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검은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처럼 띄워보낸 날개였다. 아마도 그런 절박함이 태어나자마자 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의 엄마 찾기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자그만치 25년이라는 그 긴 시간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진짜 핏줄을 찾는 것만큼 절박한 것은 또 없을테니까. 그렇게 카밀라에게 엄마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관계된 진실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빛바랜 사진으로 제시된 희망은 거기에 낙관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 나오는 나비와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p. 108)

 

 그녀를 그처럼 지치게 만든 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이었다. 진심을 알리고 싶거나 알고 싶은 사람들이 결국 절망해서 뛰어드는 소설 속 밤바다와도 같은 심연. 그런데 그렇게 건너기 힘든 심연이 된 건 그저 사람마다 속내를 알기 어렵도록 가림판 같은 것이 존재해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연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된 것은 사람들 스스로 가림판을 세워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리와 욕망에 몰두하느라 때로는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때로는 무관심해지고 싶어서 나온 가림판이었다. 교장 신혜숙이 보여준 열녀비는 그렇게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을 가로막는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그것은 '아는 척'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여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도, 진심으로 다가오고자 하는 마음도 단번에 차단해 버리는 그러한 고개짓을 조각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 '아는 척' 앞에서 타인은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어서 떠나주었으면 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진짜 알려져야 할 진실 역시도 쉽게 망각되고 만다. 진심을 알리는데 절망한 정지은이 뛰어들었던 그 밤바다처럼 그 까만 심연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출생의 진실을 찾기 위한, 엄마의 진심을 알고 싶은 카밀라의 여정은 그 심연 속에 망각된 기억들을 다시금 건져내는 것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카밀라를 바다에서 건져내고 절망한 카밀라에게 다시금 새로운 단서를 찾아주는 지훈의 직업이 손님들을 위해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건져내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것들 역시도 검은 바다와도 같은 광막한 심연 속에서 용케도 지워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았던 기억들 덕분이었다. 도서관 어디에 간직되어 있었던 정지은의 시와 산문이 수록된 '바다와 나비'라는 문집이 그렇고, 쉬이 잊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 즉 '양관'의 존재가 그랬다. 여기서 특히나 '양관'의 존재가 인상적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낸 이야기들의 보고, 양관은 서양식 건축물로 이미 존재자체가 이국적이다. 게다가 엘리스라는 서양 소녀의 비극적 최후와 겹쳐 유령이 출몰하고 악운이 따른다고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이 '양관'은 사람들에게 있어 건너편에 존재하는 '타자'였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가 찾고자 했던 모든 진실은 여기에 담겨 있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김연수가 이 작품을 통해서 찾고 싶었던 희망의 날개가 아닐까 하고. 카밀라로 하여금 진실로 인도했던, 그렇게 망각의 심연 속에서도 용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억들은 모두 '기록'이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건 사진이었고 문집의 글이었으며 라디오의 사연이었고 신문의 기사였으며 양관에 보존된 기록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하나로는 진짜 진실로 인도하지 못하는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데 모으고 나니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게 바로 김연수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

 

 우리는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에 타인에게 가닿지 못하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김연수로 하여금 작가로 되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써도, 정지은의 글이 그랬듯이,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내보일 수도, 타인의 진심에 가닿을 수도 없다. 그 역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에 나온 그 나비처럼 아무리 검은 바다와 같은 광막한 심연이라도 글이라면 쉬이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건 소설 속에서 한국의 지도를 거꾸로 걸어 남해를 북해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도 작위적인 믿음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작은 날개 밖에는 가지지 못한 나비 앞에 놓여진 대양만큼이나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카밀라는 바로 김연수 자신이었다. 글로 하나가 될 수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그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카밀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절망에 입양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고 작가인 이상 글이 아무리 무기력하다고 하더라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글이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파도가 바다라면'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카밀라가 생애 처음 쓴 글로 인해 엄마를 찾는 여정에 나서게 되듯이 그와 똑같이 초심으로 돌아가 글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찾아냈다. 하나의 글이라면 모자라고 무기력할지도 모르지만 글이 모이고 모여 더 많아지면 심연을 건너갈 날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래서 여기저기 남겨진 글들이 모두 단서가 되고, 카밀라는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지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도움을 얻도록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죽어서 모두에게서 지워졌다고 여겨졌던 카밀라의 엄마까지 나서서.

 

  이 카밀라 엄마의 목소리. 현실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생각되었으나 분명히 존재하고 숨겨진 진실을 들려주는 존재가 조금은 뜬금없이 소설에 나왔던 것은 김연수가 글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어린왕자에도 나오듯이 굳이 글이 줄 수 있는 힘을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진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인 '양관' 역시 그렇게 타자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모두에게 버려지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정말 알고 싶은 진심을 들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글 역시도 존재하는 이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설령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알려줄 혹은 타인의 진심으로 다가갈 매개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의 상징으로써. 스스로 작가의 말 마지막에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라고 쓴 것도 사실은 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타인의 진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왜 굳이 '날개'로 비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왜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인용했는지도. 그것이 비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더 높이 날아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절망은 어쩌면 시야의 한계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아는 척'이나 하면서 쉽게 처내어 버린 수많은 잠재된 가능성 자체에 우리의 절망 역시 잉태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많은 세계를 품어야 한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글, 누군가에게 남아있는 기억, 때로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유령일지라도, 그리고 그 유령이 출몰하여 대부분이 기피하는 공간일지라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거기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서양 소녀 에밀리의 묘비를 끝까지 지켰던 양관 주인의 엄마처럼 그 모두를 긍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시야의 확장인 것이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날아오를 날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비상은 가능하다. 우리에겐 바로 믿음이란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저 믿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늘 글을 쓰고 노래하고 있음을. 비록 눈에 드러나는 어떤 증거도 없을지라도 어떤 글을 대하든 섣불리 가림판을 쳐서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진심을 다해 쓰고 노래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진심을 듣고 알아주리라 믿으며. 비록 들려오는 메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작가 김연수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마도 김연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다시금 인용했을 것이다. 그것도 여정이 거의 끝난 막바지에...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p.321)

 

 

 카밀라로 빙의했던 김연수는 이제 모든 방황을 끝내고 기꺼이 저 시 속의 작은 새가 되려한다. 세상을 긍정하고 심연마저 포용하여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전해지리라 믿으며 진심을 다해 노래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아들에게 항상 자신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무를 심었던 그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아버지가 그 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들이 그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서 느끼며 자라났다. 설령 그 아들에게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무 아래 섰을 때 나만은 그 진심을 느껴볼 수 있었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라는 말이 이미 죽어버린 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진실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가닿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날개'가 희망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날개 짓을 그만두지 않을 때다. 오랜 고뇌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아버지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결국 그 모든 여정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한 권의 믿음으로 담아낸 김연수처럼. 우리도 믿으며 자신의 진심을 담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으로 울창한 그늘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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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2012-10-2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이 댓글을 남기고 싶어 오랜만에 로그인합니다.

ICE-9 2012-10-30 00:09   좋아요 0 | URL
와, 들러주신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렇게 오랜만에 로그인까지하셔서 좋은 말씀 남겨주시다니 더욱 감사합니다.^ ^

이진 2012-11-2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와 나비, 저 시 박인환의 것인줄 알고 있었는데 김기림의 시였군요. 어쨌든 무슨 시든 헤르메스님의 리뷰가 더 좋은 걸요. 요새 헤르메스님 리뷰 학원 다니십니까? 원래 좋았지만 더 좋아졌어요!

ICE-9 2012-11-22 23:43   좋아요 0 | URL
웃! 소이진님 정말 고마워요. 요즘 리뷰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사실은 좀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소이진님 덕분에 왠지 힘이 나는데요.^ ^ 아마추어 주제에 슬럼프인가 싶어서 스스로 비웃기도 했는데 요즘은 정말 글이 생각대로 안되네요.ㅠ ㅠ 아무튼 고마워요. 힘이 부쩍 납니다.^ ^
 
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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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옷! 굉장하다! 이 책의 초반부터 저는 이미 이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사실 조 힐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가 그 유명한, 그 누구도 미국 장르 소설계의 거목임을 거부하지 못하는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버지 덕분에 유명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이 작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잘 한 선택일까 반신반의 하긴 했었죠. 그런데 왠 걸, 명백히 카프카의 단편 '변신'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도입부 부터 어, 이거 참신한데 중얼거리게 만들더니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했듯이 주인공 머리에 정말 악마처럼 뿔이 돋아나고 그 때문에 여자친구가 완전히 직설적으로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에서 이미 저는 오래만에 물건 하나 만났다는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전성기 때 스티븐 킹 소설을 읽는 듯 하더군요. 악마라는 명백한 허구의 사실을 일상적인 일들로 자연스레 여기게끔 설득력있게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현재 벌어지는 이야기의 갈등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와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하나 둘 풀어놓아 흥미와 긴장을 끝까지 지속시키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특히나 가장 많이 생각났던 건, 스티븐 킹의 '캐슬록의 비밀' 이었네요.


 아무튼 이 작품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조 힐은 분명 아버지로 부터 우등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외모가 우등 유전자라는 뜻은 아니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 인간이 가진 상식을 살짝 비트는 것만 가지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고루한 소재도 새로운 느낌이 날 수 있도록 빚어내는 능력. 그런 것에 있어서 UNCANNY 할 정도로 잘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조 힐의 이번 작품 '뿔'은 그것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뿔(THE HORNS)'은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버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면 영락없이 악마 같지만 사실 처음엔 그저 악성 종양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뿔이 생기자마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 글레나를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없는 아주 은밀한 어두운 욕망까지 다 말이죠. 그에겐 그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 앞에 선 것 처럼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욕망이 다 추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되고 편하고 보려는 이기적인 욕망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주인공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는 알게됩니다. 자기가 지금껏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이그가 세상의 진실을 알아가는 첫번째 장의 제목 역시도 '지옥'입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그에게는 세상이 지옥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자 친구가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그 누명을 자기가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그대로 꽤나 잘나가는지라 어떻게든 형벌을 받는 건 피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잃어버린 상처만 해도 스스로에게 버거운데 거기다 세간의 시선마저 의혹 일변도인지라 견디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 나락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죄책감이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세상은 깨끗한데 자기만 더러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자각에서 느끼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뿔이 돋아난 뒤로 그게 완전 뒤집어 집니다. 세상이 선이고 자기가 악한게 아니라 알고보니 세상 자체가 악이고 오히려 선한 건 자기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뿔'은 그런 '전복(SURVERSION)'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씨름판에서 보듯 호쾌한 뒤집기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전복성들이 넘쳐납니다. 지금 말한 주인공 이그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전복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존재의 전복입니다. 앞서 우리의 상식을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란 얘기를 했었죠. 그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 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그 앞에 서면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것, 그들의 욕망이 통제를 받지 않고 활짝 피어나도록 돕는 것, 그리고 뱀들이 따라오거나 목소리로 유혹하는 것. 이런 건 모두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발하는 효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악마가 가진 그러한 특성들은 오로지 대상의 파괴를 위해 쓰였습니다. 롤링스톤즈의 '악마를 위한 동정(SYMPATHY FOR THE DEVIL)'이라는 노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영혼과 믿음을 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러한 악마의 특성들은 세상이 감춘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니 세상 뿐만이 아니라 이그를 파괴시켜버렸던 저 과거의 비극에 숨겨진 진실마저 알게 합니다. 악마의 계교는 어디까지나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만은 다릅니다. 여기서 악마가 가진 모든 계교는 오로지 진실에 진실을 더하는 것 뿐입니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 힐은 주인공 이그가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하게도 성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그립니다. 특히나 이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뱀의 무리가 인상적인데요. 사실 그 뱀들의 존재는 소설에서 정작 사족에 불과합니다. 이그가 보여주는 능력중 그것만이 아무런 맥락도 효과도 가지지 못합니다. 뱀은 그저 이그를 따라올 뿐입니다. 그 뱀들이 모이고 모여서 뭔가 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그가 점점 악마로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 말고는 말이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조 힐이 왜 아무 의미도 없는 뱀 장면을 구태여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독자인 우리들에게 뱀이 하나의 신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죠. 점점 많은 뱀이 무리지어 이그를 따라오는 것이 그의 악마성이 완성되는 것을 뜻하듯, 예수가 나오는 4복음서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름처럼 따라다니는 신도의 수가 그의 성인됨을 완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네, 그 뱀은 이그의 그러한 성인됨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는 악마이지만 조 힐의 소설에서는 성인(SAINT)입니다. 그건 왜 일까요? 이그의 뿔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듯이 세상은 오로지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 욕망들로 넘쳐나는 지옥인데 오직 악마인 이그만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타자를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이기적인 존재인 악마가 이 소설에서는 가장 이타적인 존재인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전복성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애마 그렘린이 불에 탄 채 절벽에서 떨어지고 그로 부터 탈출하는 이그의 이야기는 이그가 악마로써 진정한 각성을 하게 되는 계기인 것 같더군요. 해서 그려봤어요 하하^ ^;



  이건 그냥 헛소리가 아닙니다. 조 힐이 작정하고 그것을 지향했다는 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 부터 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공 이름을 풀 네임으로 다시 한 번 말해볼까요? 그건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 입니다. 영특하게도 조 힐은 이 이름을 소설의 첫 시작으로 삼아 독자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그건 왜 일까요? 단적으로 바로 이 이름이 이 소설 '뿔'이 말하려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패러디였습니다만 그 여정은 초대 교회 한 사도의 여정에 대한 오마쥬입니다. 그 사도의 이름이 바로 '이그나티우스' 입니다. 뭐야! 이름만 같은 거 아냐? 하실수도 있는데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뒤에 나오는 이 '마틴'이란 이름 때문에 더욱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사자 먹이가 되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절, 그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가 결국 황제의 명령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끌려가 순교당하기 까지, 그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의 제목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즉 'Martydom of Ignatius' 입니다.


 이것으로 확실해지지 않을까요? 주인공 이그의 저 마틴이란 이름이 바로 '순교'를 뜻하는 단어 'MARTYDOM'에서 왔다는 것이 말이죠. 물론 이름의 마지막 부분인 '페리시' 또한 죽음, 특히나 비명횡사를 뜻하는 'Perish'이니 이그나티우스의 비극적 순교를 나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즉 조 힐은 이 이그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빗대어 써내려 간 것입니다. 악마의 여정이 사실은 가장 죄 없는 자의 순교 여정인 것이죠.(아마 그래서 이그의 힘이 유독 십자가 앞에서는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이그가 사탄이라서 하나님의 물건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역시도 사실은 아무런 죄 없이 순교나 마찬가지인 죽음을 당했던 이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즉 이그나 그 십자가 주인이나 사실은 동류이기 때문에 이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오두막'에서의 일로 더욱 확실히 증명됩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은밀하게 감추어 놓은 가장 커다란 반전입니다. 하면, 그는 왜 이런 반전을 마련해 둔 것일까요?


 그 이유란 간단합니다. 홀연히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악마가 되기 전의 이그는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모르는 우리들은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아픔이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 때의 이그처럼 스스로를 세상의 오점으로 여기고 괴로워하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꾸며진 모습을 진짜 모습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계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 진실된 모습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의 눈이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자아, 여기서 조 힐이 왜 하필이면 우리를 경계 바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악마라는 소재를 택했는가가 드러납니다. 그건 악마가 주로 하는 일 때문이죠. 네, 바로 사람들의 혼을 빼앗는 것 말입니다. 악마가 이 혼을 빼앗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조 힐은 경계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특별히 그 소재로 악마를 택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혼'이 가진 상징 때문이죠. 그런데 '혼'이란 무엇인가요? 영혼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왜 악마는 그 영혼을 그토록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죠.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시각에 불과합니다. 조 힐이 여기서 추구하는, 그리고 오래도록 계속되어온 악의 상징에 따르면 악마가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건 그게 진짜 존재라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미셀 푸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영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의 체제 안에서 '신체를 규범화하고, 신체를 사회적 존재로 물질화 하는 역사적으로 특정된 사변적 관념'이라고 말이죠. 즉 악마가 영혼을 취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이 푸코의 말처럼 그것이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의 몸을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게끔 강제적으로 주입된 특정된 규범적 관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게끔 주입되었을 뿐인 관념말이죠. 악마가 취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가져가 홀가분하게 비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돌을 치워주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므로 악마는 사실 우리의 영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그에게 돋아난 뿔이 그랬듯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여 오히려 우리를 그 거짓의 관념으로 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아닌게 아니라 소설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그가 주로 하는 것도 사실은 이것이죠. 사람들을 멍에로 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 물론 여기서의 악마 개념은 종교적 의미가 모조리 탈색된 개념입니다. 아무튼 조 힐이 그리는 악마는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 힐은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 세상의 진실을 보게 만들 메신져로 악마만큼 적당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조 힐의 '뿔'은 이런 소설입니다 재미로도 물론 탁월하지만 거기에 담겨진 전복성이 더 놀라운 소설입니다. 사실 그가 이것을 위해 악마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맛보게 되니 더욱 놀랍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두 눈에 세상이 아무리 굳건하게 보여도 이 정도의 시차 교정만으로도 전혀 다르게 보일만큼 사실은 허약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이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 보이든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늘 경계 저 바깥으로 넘어가 보다 객관적으로 음미해 보아야겠다는 다짐은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도 보다 새로운 진실을 위해 경계 안에서 형성된 나를 죽이는 일이니 일종의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자유로운 우리를 위해 그런 매일의 순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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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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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이런 궁금증 가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왜 어떤 나라는 잘 살고 어떤 나라는 못 살까?'

 

 한번쯤 다른 나라를 부러워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런 의문 또한 한번쯤 품어본 즉 한데요. 사실 이 질문은 아주 오래도록 학자들을 괴롭혀온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근대 초기 때부터 말이죠. 그 대표적인 학자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삼권분립을 주창한 저서 '법의 정신'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입니다. 단 두 권 밖에 없는 그에게 또 다른 저서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사실은 그 의문을 풀어보려는 시도였기도 했었죠. 오래도록 여러 지방을 여행 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풍습들은 몽테스키외로 하여금 역사적인 삶에는 일반적인 모습이 없으며 각 나라가 지닌 역사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고 그를 통해 그는 '풍속'을 그 사회를 알 수 있는 가장 주요한 통로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 '왜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할까?'를 풀어갔죠. 그가 주목한 건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각 나라가 지구상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 역시 달라져 나라 사이에 불평등이 생긴다고 보았죠. 지금도 우리가 흔히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는 생각, 그러니까 그들이 못사는 건 더운 나라라서 한 없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그 생각은 바로 이 몽테스키외에게서 비롯된 것이죠.(최근 이 몽테스키외의 이론은 '총, 균, 쇠'를 쓴 제레미 다이아몬드에게도 이어져 보다 세련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똑같은 한계는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같은 열대 기후에 속한 나라라 할지라도 다 똑같이 열악한 건 아닙니다. 이를테면 싱가포르가 있지요. 그러니 환경적 요인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고 후일 시간이 지나 거기에 대해 전혀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학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막스 베버 입니다. 그 역시 이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은 왜 서양에서만 자본주의가 부흥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나라들에선 왜 자본주의가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는 이것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정신)'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특유한 개신교 논리가 자본주의가 발흥되도록 했고 결국 서양과 동양의 불평등을 낳았다고 본 것이죠. 그렇게 막스 베버는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원인이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결정적인 해답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외의 존재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지금 우리 가까이에. 네, 바로 우리 한국입니다.  우리는 지금 분단국가입니다.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하는 한민족이 서로 갈라져 있습니다. 다시말해 북한과 우리는 문화적 차이가 그리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금 북한과 남한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2006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이 게시한 이 사진처럼 말입니다. 이 사진은 우리나라의 밤을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은 빛으로 여기저기 반짝이지만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같은 문화적 요인을 가지고 있지만 차이는 이렇게 눈에 확 띌 정도로 극명합니다. 그러니 막스 베버의 이론도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이죠. 그럼 도대체 뭘까요? 어떤 이들은 '무지 이론'을 내세웁니다. 이름만 거창할 뿐 사실 별 거 아닌 이론입니다. 즉 그 나라가 가난한 건 국민이나 통치자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론이 쉬운 만큼 속 편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뭐든 그 나라의 탓으로만 돌려버리면 되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국민이나 통치자가 부유해지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까요? 물론 아니죠. 이건 우리나라만 생각해도 바로 답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사대강'이 있지요.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40조가 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재정상 부담하기 지극히 어려운 비용입니다. 거기다 우리 국민 전체의 90% 넘는 사람들이 이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고 그 때문에 바로 얼마전엔 한강 식수가 '녹조 라떼'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했죠. 40조는 그냥 허공으로 증발한 셈이 되어버렸고 앞으로 이런 인위적인 자연 재해 때문에 또 얼마나 추가 비용이 들어가야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재정은 점점 어려워지고 정말 써야할 데에 못 쓰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만큼 더 가난해지겠죠. 자아, 사정이 이렇습니다. 국민은 분명히 보다 현명한 대안을 알고 있었고 또 한 목소리로 알렸습니다. 하지만 저 위에 있는 자들은 듣지 않았죠. 그들이 믿는 기독교에서 말하듯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소통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뭐, 다들 아시지 않을까요? 그들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올 '돈' 때문이란 걸. 이게 핵심입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건 환경의 요인도, 문화적 요인도, 무지 이론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나라가 가난하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층의 엘리트 계층이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 하기 때문이죠. 대대손손 잘먹고 잘살기 위해 그들의 주머니만 불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은 이런 것을 '착취적 제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를 다른 나라보다 못살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제시합니다.

 

 그것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의 그 이유를 밝혀갑니다. 어째 이유가 너무 단순하기도 하고 게다가 경제학이 너무 정치적으로 기운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여 좀 믿을 수 없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문인지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장장 641 페이지에 걸쳐서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즐비하게 나열하면서 그 의심을 불식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가서 이 말을 새삼 다시금 확인하게 되지요. '진리란 본디 단순하다'라는 것을...

 

 아무튼 이 책은 나라마다 존재하는 불평등을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나라가 어떤 제도를 가지고 있는지, 즉 제도적인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러한 제도적인 관점은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장하준 교수도 취하고 있는 관점인데 어쩌면 지금 영국 경제학의 주류가 '제도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왜 경제학이 이토록 정치적인 관점을 가지느냐 하실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거기에 대해선 저자들이 이렇게 분명히 답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정치를 외면해왔지만,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려면 정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 그간 경제학은 정치적 문제들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가정해왔다. 세계불평등에 대해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p. 110)

 

 그러니까 저자들은 정치적 관점에 기운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한 정치적 문제들이 경제적인 문제에 분명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상 보다 정확한 경제적 분석을 위해서라도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한 정치적인 문제들을 고려한 결과 결국 한 나라의 경제적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착취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 포용적 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뉜다 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착취적 제도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p. 121)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로지 지배 계급의 이익만 불리는 제도인 것이죠. 반면 포용적 제도란 자신의 재능에 가장 걸맞는 직업과 소명을 추구할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뿐만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장을 통해 그럴만한 기회를 잡을 수(p.121)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저자들은 바로 이 포용적 제도가 번영의 원동력이라 봅니다. 이 정의에서 보듯이 포용적 제도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능력에 따른 성과가 주어지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능력에 맞는 성과를 가져갈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느냐 입니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가 착취적 제도냐 포용적 제도냐를 가르는 기준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능력보다 옛날 고려의 '음서' 식으로 출신 성분이나 뒷 배경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SSM 처럼, 대기업이 막강한 자본으로 동네 자영업자들의 상권을 몰아내는 것 같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착취적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이 착취적 제도가 한 나라의 번영을 막게 될까요? 이게 바로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 제도가 많은 이들에게 인센티브를 주지 않아서 각 개인들이 보다 나은 향상을 위해서 아무런 창의성도 노력도 혁신도 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느냐가 한 나라의 번영을 좌지우지 하는 열쇠라는 게 이 책의 결정적인 핵심입니다. 여기서 어쩌면 많은 분들이 '뭐야?' 하실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다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을 듣기 위해 시간도 없는 우리가 무려 641 페이지나 읽어야 하나 눈을 찌푸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럴 때 옛날 저의 은사 한 분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아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비록 경제학 책이고 아담 스미스의 논의를 보다 많은 근거로서 세련되게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을 절절히 체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경제와 정치의 그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말이죠. 우리는 흔히 생각해왔습니다. 경제와 정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래서 잘살게만 해준다면 까짖 것 정치적 불평등쯤이야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눈부신 경제 발전에 비하자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정치현실은 낙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보다 분명히 보여줍니다. 정치적 문제의 해결과 경제적 문제의 해결은 같이 간다는 것을! 그것이 인센티브로만 설명되는 문제점은 있습니다만 사실 인센티브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인센티브가 중요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못지 않게 정치적 인센티브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최근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고 장준하씨 처럼 말이죠. 그런 면에서 일독을 권해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결국 정치적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번영을 위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책이니까 말이죠.(물론 여기에 미국과 한국이 '포용적 제도'의 대표적 나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은 저 역시 좀 불만이 있습니다. 아마도 인센티브를 오로지 경제적인 것만 고려한 탓이겠죠.) 이제 정말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오늘의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벗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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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1시를 갓 지나가는 지금...

  저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공황 상태 입니다.

  장문의 리뷰 하나를 썼다가 어이 없는 실수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죠...

  놓쳐버린 글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쓸 때 더 좋은 느낌이 들었던 것 같고...

  이제는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그 글의 자취를 더듬어 보니...

  꽤나 잘 쓴 글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저런 미련이 참으로 오래가네요...

 

  눈 앞에서 사라져서 그렇겠죠...

  다시는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오지 못할 글이라 더욱 그렇겠죠...

  글도 사람도 세월도 사라짐은 이리도 질긴 미련을 남기는 법인데

  왜 막상 있는 그 순간엔 이런 걸 깨닫지 못하고

  더 조심하고 더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이번이 11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신간 추천 페이퍼로군요.

  그렇게 이것도 이걸로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니...

  역시나 진한 미련이 남습니다.

 

 그런 미련을 담아 어쨌든 마지막 신간 추천 달려봅니다.

 처음은 팀 파워스의 디클레어 입니다.

 

  

  

 

 

 

 

 

 

 

 

 

 

 

 

 

 

 

 

 혹시 팀 파워스의 소설을 읽어보셨던가요?

 우리나라에도 필립 K 딕 상을 탔던 그의 데뷔작 '아누비스의 문'과 자신을 스팀펑크의 대가로 각인시켰던 두번째 작품 '라미아가 보고있다'가 소개되었었죠.(아, '캐러비안의 해적'도 있군요)

 

 

 

 

 

 

 

 

 

 

 

 

 

 

 '디클레어', 즉 '선언'은 2000년에 나온 그의 다섯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팀 파워스는 두 번째 작품 부터 자기의 문학 세계는 스팀펑크라고 규정해왔기 때문에 물론 이 작품 역시도 스팀펑크 계열 입니다.

 

 스팀펑크란, 혹시 오토모 카츠히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팀보이'를 보셨는지요? 그 애니메이션을 보셨다면 스팀펑크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듯 한데요,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허구의 판타지를 절묘하게 조합한 세계를 말합니다. 즉 일종의 대체역사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가정법적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군요. '만일 세상에 석유가 발견되지 않고 모든 것이 증기기관으로 되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스팀펑크라고 합니다. 원래는 사이버펑크에 대한 반발로 나왔었죠. 조지 오웰의 1984 처럼 고도로 발달하는 과학기술은 그만큼 인간 통제 기술 또한 발달하는 것을 암시하는데 그 때문에 SF 작가들에겐 '전체주의'의 위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에서 비롯된 전체주의 사회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펑크'정신을 본받아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부르짓는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되는데요. 그것을 범주화해서 부른 것이 바로 사이버 펑크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필립 K 딕이 이 사이버 펑크의 대표적인 작가였죠. 사이버 펑크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대중들로 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고 그래서 인기 또한 굉장했습니다. SF의 주류가 그렇게 사이버 펑크로 흘러가자 과학 기술을 그렇게 위험시 하는 것에 반발하는 작가들이 오히려 과학 기술의 매력을 더욱 드러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주로 썼던 시대가 하필이면 과학 기술이 왕성하게 발달하던 무렵의 근대 초기였기 때문에 '스팀펑크'라는 말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처음 한 것은 스팀펑크의 대표적인 작가 K. W 지터였는데요. 왜 그런 말을 했냐고 했더니 '우리 소설에는 컴퓨터 대신 증기 기관이 나오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스팀펑크로 빠지는 바람에 길어져 버렸네요. 아무튼 스팀펑크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있음직한 일들로 실제 역사를 더욱 풍부한 텍스트로 만드는 장르물입니다. 그리고 팀 파워스는 거기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고 있지요. 팀 파워스는 스스로를 스팀펑크라 규정짓지만 그렇다고 과학기술의 매혹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스팀펑크라 말하는 것은 SF적 의미는 탈색된 배경 시대가 근대 초기이고 거기에 허구의 역사를 섞는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례로 그의 스팀펑크 대표작 '라미아가 보고 있다'가 다루는 세계는 19세기의 문학이죠. 그렇게 그는 과학이 아닌 문학과 역사의 스팀펑크를 다룹니다.(이런 식이라면 인디아나 존스 역시도 스팀펑크 계열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그는 고정적인 스팀펑크가 아닌 변화된 스팀펑크를 추구하는데요. 이번의 '디클레어'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이번엔 시대까지 19세기를 탈피했습니다. 다루고 있는 시대가 냉전시대이니까요. 냉전시대하면 가장 뭐가 떠오르시나요? 아무래도 역시 스파이겠죠. 007의 전성기이기도 하니까요. 스파이는 냉철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로 움직이는 존재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팀 파워스는 아무래도 이러한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들이 환상의 세계와 접속하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가 궁금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디클레어'는 바로 그러한 이면의 접속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스파이들이 가진 현실 논리를 압도하는 환상의 존재들을 접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저 역시 궁금하군요. 그래서 기꺼이 이 달의 추천 신간으로 꼽으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니 뎁이 주연에 제작까지 맡아서 만든다길래 관심이 있었는데 번역까지 금방 나와 주었네요. 두번째 제가 추천하고픈 신간은 헌터 S 톰슨의 '럼 다이어리'입니다.

 

 안 그래도 조니 뎁의 헌터 S 톰슨에 대한 사랑은 각별한 걸로 유명합니다. 영화화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를 테리 길리엄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이도 바로 이 조니 뎁이었죠. 주연까지 자청해가면서 말이죠. 자신이 창립한 영화사의 첫 작품으로 오래도록 작가의 책상 서랍에 잠들어있다 작가가 죽은 후에 뒤늦게 발견된 이 작품을 선택한 것만 보아도 톰슨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톰슨의 작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독자의 시선인데요.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는 마리화나에 중독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국을 담고 있었죠. 이번의 럼 다이어리는 알콜 중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푸에르토리코 입니다. 그렇게 미국이 아닌, 미국에서 밀려난 자들의 땅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알콜 중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여 선택해 봅니다.

 

 

 

 올 해는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이 많이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같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어두운 기억 속으로'가 나오는군요.

 

 이 소설은 한 남성으로 부터 집요한 학대를 받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보니 저번 신간평가단 선정작으로 읽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와 비슷한 이야기로군요. 비슷한 시기에 여성의 억압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주 나온다는게 저에게는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억압된 여성 욕망의 분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의 억압에 대한 반복된 표출이 어떤 징후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모든 작품이 순식간에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게 그 흥미를 더욱 부추깁니다. 아무튼 일단은 그 실체를 확인해보고나서 생각해야되겠지요. 그래서 선택해 봅니다.

 

 

 

 

 5월달 즈음에 어떤 작가분(알고보니 여기 알라딘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으시더군요)과 밤새워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거기서 우연히 이 백가흠 작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그의 작품을 봐야지 했었는데 마침 이렇게 신작이 나와 주었네요.

이 작품 부터 거꾸로 한 번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신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

 세스 노터봄.

 그의 신작이 나왔군요.

 아직 '필립과 다른 사람들'의 여운이 남아 있는데

 2004년에 나온 이 작품은 또 어떤 색다른 여행의 매력으로

 인도할 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브라질과 호주, 오스트리아와

 네델란드 무려 4개국을 돌아다니는 이야기라니...

 이거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읽으면 정말 안절부절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우연히 스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점을

 선으로 잇듯 펼쳐놓는 세스 노터봄인지라 그래서 왕가위식 스

 타일도 왠지 연상되는 이 작가가 잃어버린 낙원으로 여기는

 풍경이 궁금합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새벽 2시 46분 이네요.

 언제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걸까요.

 11기 마지막 신간 추천이라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잘해보려 했는데

 그렇게 몰입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네요.

 그런데도 고작 이런 결과라... 하실 분도 계실 듯 하여 어쩐지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많은 미련이 남지만

 (하긴, 뭐든 미련이 안 남겠어요? 어차피 인생이란 미련을 쌓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으로 마지막 신간 추천을 마치려 합니다.

 

 GOOD BYE AND GOOD LUCK, 11TH...

 

 

 

           왠지 11기를 떠나보내는 제 마음이 이 노래 가사 같네요. 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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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6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도 지난 달에 그런 실수를 했는데요,
서재지기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복구가 되더라구요.^^
마지막 신간 추천, 저도 오늘 했습니다. 에세이^^

ICE-9 2012-10-07 23:5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다니^ ^
정말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오늘 어깨가 뭉쳤는지 키보드도 칠 수 없을만큼
통증을 느껴서 더욱 기분이 안 좋았는데 프레이야님의 댓글을 보니 한결 힘이 나는 듯 합니다. 그리고 해결 방법도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님은 에세이 분야셨군요. 마지막이니 저처럼 아쉬움이 크셨겠어요^ ^

2012-10-08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0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퍼 수집하기
폴 클리브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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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P. 74)

 

 폴 클리브의 데뷔작 '쿠퍼 수집하기'는 이 스릴러가 뉴질랜드 산(産)인 것만큼이나 독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두 가지나 되는데 하나는 위에 인용한 말처럼 이 소설이 '연쇄 살인마'를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연쇄 살인마를 사냥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미드로도 만들어진 '덱스터'를 통하여 본 적이 있지만 정말로 그가 왜 연쇄 살인을 하며 그런 일을 하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 그냥 모으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이 작품엔 또 하나의 독특성이 있는데요. 그것은 보통 스릴러의 경우 쫓기는 자와 쫓는 자가 일대일로 겨루는 이를테면 '톰과 제리'식의 게임인데 반하여 이 스릴러 '쿠퍼 수집하기'는 그 구도에 앞서 말한 연쇄 살인마를 수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끼어드는 '3파전'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지운 감독의 영화 중에 세 명의 캐릭터가 서로 물고 물리는 레이스를 펼쳤던 영화가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게임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소설을 주로 이끌어가는 그 세 명을 잠깐 소개해 본다면,

 

 

 PROFILE NO.1 : GOOD GUY

 

  먼저 '좋은 놈'인 테이트 전직 형사가 있습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고 범인 체포에 아주 능력있는 형사였지만 자신의 딸과 아내를 차로 들이받고 그 때문에 딸을 죽인 자를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사로이 처형한 일로 죄의식을 느껴 결국 형사를 그만두고 경력을 살려 사립탐정을 했으나 딸 아이는 영영 떠나버렸고 사랑스러웠던 아내는 그 사고로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요양원에 있어 그 괴로움에 거의 삶을 포기하듯 살아가다 결국 음주 운전으로 한 여자아이를 들이받고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이제 막 풀려난 자입니다. 출감하자마자 예전 그의 형사 동료 슈로더가 그들이 살고 있는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를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제복 입은 사람만 살해한다고 해서 '제복살인마'란 별명이 붙은 여성 연쇄살인마 '멜린다 X'를 추적하는 걸 도와달라고 의뢰해 옵니다. 하지만 그 의뢰에 채 뛰어들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변호사 도노반 그린의 방문을 받습니다. 사실 그는 테이트가 음주운전으로 들이받았던 여자, 엠마 그린의 아버지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원수와 다를바 없는 테이트의 변호사가 된 건 그 역시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테이트를 직접 처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죽이려는 찰라 테이트의 간곡한 설득으로 딸 아이의 생사여부를 지켜보고 결행하기로 작정하게 되었고 결국 기적적으로 딸 아이가 살아나자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죠. 그렇게 도노반 그린과 테이트는 같은 죄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테이트의 처단을 도노반 그린만 유일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찾아와 말합니다. 엠마 그린이 사라졌으니 찾아 달라고. 그 때 살려준 빚을 그것으로 갚으라고.

 

 

 PROFILE NO.2 : BAD GUY

 

 그리고 나쁜 놈, '쿠퍼'가 있습니다. 그는 엠마 그린도 다니고 있는 대학의 범죄 심리학 교수입니다. 주로 연쇄살인마를 상담하여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데 책도 한 권 저술했지만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도 수집하는 게 있습니다.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 입니다. 그는 그러한 병적인 수집욕을 범죄심리학자로서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애써 자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언제 돌출될지 모르는 살인 충동을 그것으로 애써 잠재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 그 연쇄살인마의 엄지손가락을 페덱스로 받았던 날 그는 테이져를 맞고 납치됩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한 남자가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라고 말하더니 사람을 죽일 때의 느낌을 들려줘 라고 말하죠. 가까스로 살인 충동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스스로는 선량한 시민이라 여기고 있는 쿠퍼로서는 정말 미치고 펄쩍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ROFILE NO.3 : STRANGE GUY

 

 

 쿠퍼를 가두고 광기로 몰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이상한 놈', 에이드리안입니다. 그는 오래도록 살인 병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있었고 그 때문에 연쇄살인마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관련된 책도 많이 읽은 사람입니다. 정신적 성숙은 채 자라지 못해 자신의 욕망을 어디까지 실현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놈'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뿐이니까요. 책으로만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연쇄살인마의 병적인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연쇄살인마의 신체 부위를 수집하는 '쿠퍼'를 수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에이드리안은 그 쿠퍼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에서 읽은 대로 그의 살인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의 기호에 맞는 여인까지 납치해오는 성의를 보이죠. 그는 쿠퍼에게 연쇄살인마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비극적인 과거와 관련된 것이었죠. 그가 쿠퍼를 수집해 알고 싶어했던 건 그 과거와 관련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쿠퍼는 에이드리안에게 있어 일종의 대차대조표와 같은 것이었죠. 그에게는 살인도 수집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자신이 진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죠.

 

 

 소설은 이렇게 세 명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면 떠오르는 의문은 이것이죠. 왜 작가 폴 클리브는 이런 설정을 택했던 것일까? 그러게 정말 왜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요? 잠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 영화로 돌아가보죠.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명한 서부 영화 'GOOD, BAD AND UGLY'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합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습니다. 북부의 산업자본주의가 남부의 전통적인 농경자본주의를 대체하던 순간이었죠.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한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레오네는 일부러 그 시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영화에 나오는 'GOOD, BAD AND UGLY'의 세 사람을 모두 지금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의 원형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거기엔 타인이 어떤 처지에 빠져있던 아무런 관심없이 ㅇ로지 자신이 원하는 돈만 추구하는 'GOOD'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인의 삶 따윈 파괴해 버리는 BAD'이 있으며 있는 거라곤 오로지 돈에 대한 저급한 욕망 밖에 없어서 신념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그저 비굴하게 이리저리 오고가면서 돈 벌 궁리만 하는, 그래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UGLY'도 있습니다. 즉 레오레는 보여주려 했던 것이죠.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셋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김지운 감독도 비슷한 생각에서 그 영화의 설정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은 굳이 웨스턴 틀을 가져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였습니다. 레오네의 미국 남북전쟁과 똑같이 일제라는 돈에 종속된 한국 사회를 나타내는. 그러니 거기에 나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이 이상화되고 키치화되어 본래의 그 뜻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아무튼, 폴 클리브가 하고자 하는 것도 레오네와 김지운과 비슷합니다. 그 역시 이 세 인물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투영하려 한 것이죠. 특히 이 '신자유주의'라는 지옥 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을 말이죠.

 

 네, 이 소설 '쿠퍼 수집하기'는 이 지옥을 견뎌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크라이스트처치'에 대한 묘사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소설의 '크라이스트처치'는 어떠한 도시입니까? 폴 클리브는 소설 초반에 그 곳이 어떠한 곳인지 꽤나 공들여 묘사합니다. 그를 통해 밝혀지는 그 도시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 곳은 '도살자'나 '멜린다 X'와 같은 연쇄살인마들이 활보하는 도시이고 테이트가 교도소에 4개월 가량 갇혀있는 동안 범죄율이 50%나 증가한 도시이며 엠마 그린의 사소한 친절조차 범죄로 오해되어 따귀를 얻어맞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도시였습니다. 테이트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렇게 바로 대답할 정도로 말이죠.

 

 "이 도시 말이야. 아니, 사회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넨 이 크라이스트처치를 어떻게 생각하지?"

 "이전보다 아주 나빠졌지."

 난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즉시 대답했다. (P. 21)

 

 폴 클리브는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얼마나 지옥인지 보여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타까지 날려줍니다.

 

 이제 그들은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라는 글자가 가로로 새겨진 2미터 높이의 회색 벽돌담을 지나쳤다. 이 도시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환영합니다'란 문구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누군가가 처치(CHURCH)에 스프레이로 X 자를 긋고 '도와주소서(HELP US)라고 적어놓기까지 했다.(P. 22)

 

 '크라이스트처치'는 이런 장소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중에 밝혀지는, 에이드리안도 있었던 '그로버 힐스'와 닮았죠. 겉으로는 사회의 부적응자를 요양하고 치료하는 병원이었으나 그 실상은 수감된 자들에게 가족을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 사적인 복수를 허용해 주었던 그 '그로버 힐스' 말이죠. 그렇게 '그로버 힐스'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원형과도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늘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할 수 밖에요. 하지만 신은 죽었고 구원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사적 복수의 공공연한 실행은 이것을 뜻하는게 아닐까요). 자신이 저질렀던 사적 복수로 인한 죄책감을 이제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갚으려 하는 테이트, 오로지 혼자 살아남는 것에만 전념하는 쿠퍼 그리고 사회가 가한 억압 속에서 정말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려 자기 존재의 진실을 알기 원하는 에이드리안은 어쩌면 우리의 것과도 닮아있을지 모르는 각 자가 만들어가는 그 구원의 궤적을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쿠퍼가 에이드리안에게 대차대조표였듯이 테이트, 쿠퍼 그리고 에이드리안 역시도 우리의 대차대조표인 것이죠.

 

 장장 631페이지에 걸친 여정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뉴질랜드산 스릴러에다 연쇄살인마를 수집하는 이야기에다 3파전으로 전개되는지라 더욱 흥미를 느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특히나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어 더욱 읽을 맛이 났습니다. 그러니 이 흥미로운 '대차대조표'를 여러분도 한 번 보심이 어떨까 싶어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나서 쿠퍼를 수집한 에이드리안이 그에게 처음했던 말을 여러분 역시도 하게 될 지 모르겠네요.

 

"내 컬렉션이 된 걸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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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0-0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흥미로운 설정이네요.
굉장히 독특한 부분을 집어서 말씀해주셔서, 정말 손이 절로 갑니다.
헤르메스님 서재에 들어오면 항상 꼴까닥 넘어간다니까요,, ㅎㅎ.

잘 지내고 계시죠?
작성한 글을 하나 잃어버리셔서, 속상하시겠어요... ^^

ICE-9 2012-10-07 23:59   좋아요 0 | URL
우와! 마녀고양이님. 또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해 주셨군요! ^ ^
저는 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지만
마녀고양이님은 어떠세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요즘 마녀고양이님의 그 주옥같은 글들을 못 읽으니 너무 허전해요.
많이 바쁘셔서 그런 것이겠죠. 여유가 되실 때 꼭 글 좀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