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묵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시작은 '소설과 소설가'로 부터...
오르한 파묵이 자신이 바라보는 소설의 의미와 자신은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에 대해 말하는 책, '소설과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은 두번째 인생이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완성도는 그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 첫 문장이란 첫 소설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저렇게 시작했다는 것은 스스로 소설이라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독자들에게 역시도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순수한 내면적 진실의 발로로써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소설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말이죠.
오르한 파묵이 그동안 쓴 작품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물은 역시 '책'입니다. 스물 여덟 살 때 발표한 데뷔작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나옵니다. 더구나 그 책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그친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책'들은 막혔던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야말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책'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보듯이 아예 '새로운 인생'이란 말 자체까지 넣어가며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소설가이니 소설을 좀 더 팔아보려고 독자들에게 소설의 위대성을 심어주기 위해 불어넣는 거짓 환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그것도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감성과 지성에 있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말이죠. 그는 사랑이 필요했으나 그 어디서도 그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그림자만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나날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파묵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 주었던 것은 오로지 '책'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책으로 가득한 '바벨의 도서관'에 틀어박힘으로 불우한 시기를 건너온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그렇게 파묵이 익사하지 않고 건너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파묵이 책의 힘을 긍정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혼이 초래한 고독의 나날들 속에서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자신의 삶에다 책이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파묵은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깨달음이기에 저렇게 첫문장으로 소설이 두번째 인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는 반전되는 믿음...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은 그러한 파묵의 깨달음이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오스만이라는 한 젊은이가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통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져 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삶과 사랑에 눈 뜨지만 결국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좌절과 안타까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 이런 말이 이상한가요?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책이 가져다 준 인생을 새롭게 여는 힘에 대하여 말하는 책이라면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이 아니고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끝나냐구요? 그런 결말이라면 차라리 그 힘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해야되지 않느냐구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자면 분명 이 작품 자체는 그에 대한 반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먼저 그걸 단적으로 보여드리죠. 처음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읽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P. 9)
놀랍게도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첫 문장에서 부터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주욱 나중에 그 책을 지은 것으로 밝혀지는 철도원 르프크 아저씨의 죽음을 말할 때까지 책이 가져다 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격은 꾸준히 계속됩니다. 한 장에 걸쳐서 그러한 감격을 말하고 있는 1장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책이 가진 힘의 최종적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나는 빛의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P. 27)
빛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책이 오스만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상징하는 진실, 빛이 상징하는 긍정 그리고 빛이 상징하는 구원. 책은 오스만에게 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집약된 결정체라고도 할 만한 책과 함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또 하나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사랑 또한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소설 초반은 책에 대한 긍정, 보다 자세히는 소설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됩니다. 오스만은 그 힘을 충실히 믿으며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면 좋을 두 유형의 독자중 하나의 유형이기도 한,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 '소박한 신자'가 되어 소설에 나오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 믿고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은 여인, 자난의 사랑을 획득하려 애를 씁니다. 오르한 파묵이 피해야 할 유형의 독자로 분류했던 것을 오스만의 외양으로 선택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러한 오스만의 소망은 우려대로 역시 쉬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모르는 '크레타의 미궁' 속을 거니는 것과도 같은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도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그리고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이 페이지들에서 독자들이 듣는 나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한 이유는 내가 책으로 오염되고 거대한 사고들로 인해 저속해진 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P. 322)
그야말로 책의 힘을 순전히 믿었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지 않나요? 300여 페이지가 넘는, 시간적으로 는 수년에 걸친 여정을 끝낸 뒤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지독한 혼란 밖에는 없다고.
그는 이제 소설을 포함한 텍스트를 불신합니다. 순진한 신도에서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찬 불신자가 된 것이죠. 또한 오르한 파묵이 경계하라고 했던 두 유형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전혀 곧이 곧대로 믿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만을 파악하려 애쓰는 독자 말이죠. 결국 오스만 신뢰 가득한 빛의 제국에서 불신의 창살로 가로막혀져 있는 자기만의 어두운 골방으로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오스만은 오로지 '책'을 쫓다가('책'이 가진 진실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애쓰다가) 이렇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정말로 텍스트 자체를 아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이여 밥줄이기도 한 '문학'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걷어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도대체 오르한 파묵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르한 파묵은 어떻게 역사를 끌어들이게 되었는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그리고 '고요한 집'에서 파묵이 느낀 한계
자, 잠깐 진정하세요. 우리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르한 파묵이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았던 것 처럼 획기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전환이 아니라 그의 작품 여정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당연한 '변화'였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작품,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까지는 단적으로 책을 포함한 텍스트(푸코 식으로 하자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어가는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까지 이어지던 텍스트가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세번째, '하얀 성'에 이르러서는 터키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외부의 타자라 할 수 있는 서양에 의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네번째, '검은 책'에 이르러서는 붕괴되고 급기야 다섯번 째, '새로운 인생'에서는 저렇게 격노에 차서 지금까지의 모든 신뢰를 철회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아무 이유없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역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에서 부터 역사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소설에서 중요한 화자 중 한 명은 역사가였죠. 거기다 그 역사가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을 폐허와 같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 터키어로 번역 해 출간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기점이 되는 '하얀 성'이 중세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것 자체가 초기의 책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붕괴시킨 장본인이 바로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오르한 파묵은 역사를 끌여들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터키의 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혼란했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게 됩니다. 터키의 현대사도 우리나라만큼이나 굴곡이 많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오래도록 군부 독재도 겪었죠. 그 당시의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학을 했던 것은 그 어둔 시대를 걷히게 해 줄 빛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오로지 그 시대가 어떤지 그 진실된 모습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므로 작가들은 리얼리즘적 기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채록하려 했었죠.
우리의 80년 '서울의 봄'과 같이 터키에서도 그러한 유화적 시기였던 82년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첫 작품, '제브데트와 아들들'도 그러했었습니다. 군부의 독재가 가장 치열했던 5년 동안 파묵이 오로지 그 작품의 집필에만 매달리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그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우리 작가들처럼 그 역시도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담기 위하여 리얼리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브데트씨 가족을 중심으로 65년에 걸친 세월을 리얼리즘적으로 담았지만 터키가 가진 진실의 빛을 드러내기엔 뭔가 미진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 작품, '고요한 집'에서는 서술 스타일을 달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다중화자를 도입하는 등 프랑스의 작가 로브 그리예를 비롯하며 현대소설적 기법을 적극 끌어들여 '고요한 집'으로 터키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담아내려 했었지만 역시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건 고운 모래와도 같이 움켜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했고 거기서 얻은 한 가지 답이 바로 역사였습니다. 흔히들 터키를 유럽과 동양의 접점이라고 부르듯,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느새 뒤섞어버린 터키의 혼합된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역사를 도입함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대상의 진실을 담기 위해서는 훗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대상의 순수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하고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터키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라보는 주체가 여러가지 다른 것들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카펫으로 유명한 터키, 그렇게 정체성 역시도 이런 저런 것들이 교차된 직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성찰이 '고요한 집'의 다중화자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오르한 파묵 스스로 어떤 모순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려 했으면서도 그 기법은 터키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리얼리즘이나 현대 소설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터 말이죠. 아마 그러면서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도대체 터키만의 정체성이 있기는 한가? 이 서양이란 외부로 부터 유래된 기법들로 부터 벗어나 온전한 터키만의 것으로 담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4. 드러나게 된 메워질 수 없는 간극... '하얀 성'...
아마도 그것이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터키인 호자와 이탈리아인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확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건 '하얀 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주인공과 호자가 서로의 문명적 지식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가 대체가능할만큼 분리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얀 성'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말이죠. 네, 제목에서 말하는 '하얀 성'은 파묵이 다가가고자 하는 터키가 가진 고유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어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는 눈 자체가 그 순수한 진실을 획득할만큼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건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두고 저만치에 있습니다. '하얀 성'은 바로 그 간격의 긍정입니다.
5. 그 메울 수 없는 간격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
문제는 그 긍정 후의 삶입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터키의 역사는 파묵의 소설이 간행되는 동안 변해왔습니다. 보다 안 좋은 쪽으로요. 터키와 쿠르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입니다. 84년 쿠르드족 만의 노동당이 출범하면서 터키와 쿠르드간의 갈등은 심해져 갔습니다. '하얀 성'은 그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립이 파묵에게 '하얀 성'과의 간격을 각인시킨 것이죠. 결국 터키는 92년 본격적으로 무력으로 쿠르드족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서양에서 침략 받는 대상이 아닌 침략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터키는 고유의 것을 잃고 차츰 밀쳐내려 했었던 서양을 닮아나갔습니다. 그건 그대로 적극적으로 타인이 되려는 것과 같았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것이 바로 네번째 작품, '검은 책'입니다. 이건 당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절망의 기록입니다. '하얀 성'에서의 간격은 이제 더욱 넓혀지게 되는데 그건 그들 고유의 것을 이제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죠. 진실인 것도, 신뢰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파묵은 이제 그 부재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 진실을 주고자 한다면 그건 어떤 진실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입니다. 글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걸 철회하는 일. 글이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반박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책이 가진 힘에 대하여 공박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믿음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든, 무언가를 읽든 그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파묵이 깨달은 바 대로 우리의 눈 자체가 근대 이래로 형성된 서양의 인식론에 길들여진 탓인지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날 것 그대로로 보지 못합니다. 무언가 그 뒤에 어떤 것, 배후의 진실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사물을 넘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를 상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념' 같은 것을 말이죠. 민족도 포함됩니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의 주요 요인은 민족 때문이니까요. '새로운 인생'에서 파묵이 공격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우리를 보면 터키인이나 쿠르드족이나 다 같은 것을 왜 그 배후의 것을 가지고 이리도 반목하는 것인가? 사실 그 배후란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보다 나중의 작품 '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지요. 바로 이 때문에 파목은 '새로운 인생'에서 초기의 믿음을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6. 고유의 사물에게로...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순수 박물관'
그러자 새로운 차원이 열렸습니다. 그 배후의 것을 보려고 하지 않자 사물 그 자체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존재하는 나와 사물간의 직접적 관계 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사물들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 박물관'을 파묵 스스로 만들었을만큼 사물 자체를 중요시 하는 것이 다음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기점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섯번째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은 사물 자체가 육성을 가질 정도로 그것이 전면화된 작품이었죠. 물론 이러한 사물 중시의 모습은 '새로운 인생'에서도 드러납니다. 글로는 잡아낼 수 없는 인물의 핵심을 포착하기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싼, 그 존재의 흔적이면서 그 기억이 새겨진 잔여물이기도 한 사물들이 나열되는 장면이 곳곳에서 개진되는 것이죠. 그렇게 그는 사물로 나아갔습니다. 사물들을 뒤에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더욱 사물들의 진실을 가려버리는 배후로 부터 사물들을 건져내고 그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물만이 가진 고유의 연대기를 헤아리는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각자의 진실들이 그 자체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선시 되는 파묵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파묵이 다다른 곳은 그렇게 '순수 박물관'입니다. 파묵의 작품 여정 처음에서 회고해 보자면 그가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이기도 했습니다.
7. 타자와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을 위하여...
여기까지 숨가쁘게 오르한 파묵이 거쳐왔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책을 읽고 난 뒤 제 나름의 생각이니 별로 구애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부디 오르한 파묵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리는 것은 지금 쿠르드족 문제는 다행히도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겐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가벼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해 가장 선진적인 문명 국가라는 유럽조차 외국인 혐오가 거세게 확장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는 점점 타자에 대한 배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여 무려 천 명이나 사상자를 내었었죠. 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배후가 있다는 상상으로 오히려 실재하는 개체를 죽여나가고 있다는 파묵의 우려가 공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사실 그들이 배후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자기들 스스로 온전히 순수한 정체성의 소유자여야 합니다만 파묵이 '하얀 성'이나 '검은 책'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사실 그러지도 못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 고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만큼 이리저리 혼합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나'가 아닌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 '집단' 속의 '너'가 아닌 보여지는 그대로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르한 파묵이 '순수 박물관'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고유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통해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대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있고 시대가 있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현존하는 것과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대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여덟 권의 책이 놓여진 '순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된 최종 결론 입니다. 차후에 오르한 파묵이 또 어떤 사유의 지점을 보여줄 지 궁금하고 당신이 그 책들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될 느낌도 궁금하군요. 그 순수한 응시와 교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