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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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나는 철새였다.

  어디든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른 적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때 집에 큰 위기가 찾아왔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들은 나를 따로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서 외할머니 집으로 외삼촌 집에서 삼촌 집으로 이사 온 날 돌리는 떡 마냥 돌아다녔다. 난 뻐꾸기 새끼였다. 남의 둥지에서 눈칫밥을 먹는 존재. 그렇다고 할머니나 외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외삼촌이 나를 홀대한 것은 아니지만 진짜 집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관찰력이 발달했다. 늘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세심하게 살펴야 했고 그 표정만큼이나 바깥 동정이나 사물에 신경 쓰느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늘어나는 건 관찰력만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는 존재는 의문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물어볼 수 없으므로 덩달아 해석하는 능력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게 객관적인 정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남의 도움을 쉽사리 요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내가 본 것을 내 식대로 해석하는 버릇을 억누르기란 곤란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에게 있어 관찰력과 해석력이란 일종의 생존 기술과도 같았으니까. 그건 연실에 아슬아슬하게 매어달린 연과도 같아서 내 말투, 내 행동 하나로 또 다시 이 연실에서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는 머리가 쑥쑥 자란다는 여섯 살을 난 그렇게 보냈다. 요컨대 어디에도 한 눈을 팔 수 없는 유년이었다.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한다.
  읽을 때마다 나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 뻐꾸기 새끼로 한 번 자라보았던 사람이라면 가지게 되는 더러는 소심증으로도 오해 받기 딱 좋은 세심한 관찰력과 어떤 것을 대하든 일단 먼저 내 식대로 해석해 버리는 버릇에다가 동시에 그것을 쉽사리 철회하지 못하는 고집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식이 많은 집에 늦둥이로 태어나는 바람에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두 살 때 다른 집에 양자로 갔다가 그 집이 이혼하는 바람에 다시 생가로 돌아오는 철새 생활까지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결국은 뻐꾸기 새끼였던 것이다. 비교적 소세키의 후기작에 속하는 소설 '한눈팔기'는 바로 그걸 소재로 삼아 쓴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일종의 생존 기술로서 그것들을 벼리고 벼려왔듯이 그 역시 자기 내부에 그러한 것들을 잔뜩 벼려두고 있음을 말이다. 그 역시 절대 한눈을 팔 수 없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한눈팔기'는 차라리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매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왠지 그렇게 이해가 된다. 사실은 나도 그랬으니까. 나 역시 얼마나 한눈을 팔고 싶었던가? 주인공 겐조가 그랬듯이 별 다른 수고 없이 운 좋게 세상을 훌쩍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얼마나 바랐었는지... '한눈팔기', 제목으로 이 네 글자를 쓸 때 한 자 한 자 글자 속으로 흘려보냈을 소세키의 절박함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소세키의 과거와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겐조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겐조는 더부살이를 하는 어린 뻐꾸기가 그러듯이 날개를 가지고 싶어 한다. 보다 고귀한 가치를 흠향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역시 고양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구차한 세속적 삶에 결박될 뿐이다. 마치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달라붙게 되는 거미줄과도 같이 그의 누나, 예전의 양부모 그리고 장인까지 가세해 비상하고픈 그의 발목을 부여잡는 것이다. 해서 희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씁쓸한 절망만 맛보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여정이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낙담과 배신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그런데 왠지 이 여정이 나에겐 낯설지가 않다. 아니 아주 낯익어 보인다.
 
  그렇다. 이건 완전히 내가 뻐꾸기 새끼로 지낼 때 매일 맛보았던 여정 그대로다. 그 때 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오시겠지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렇게 희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서도 부모님은 오시지 않으셨고 난 시작하면서 품었던 희망의 크기만큼 절망하면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리고 이런 하루는 고무줄이 늘어나듯이 이틀, 사흘 무한정 거듭되었다. 이러다보면 희망을 전혀 다르게 느끼게 된다. 바로 희망이란 것은 사실은 절망한 자들이 가장 절망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부르는 백조의 노래와 같다고 말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는 남지 않았기에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억지로 매달려 보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 희망이란 더없이 처연해 보인다. 그것이 실은 내 무기력의 증표이며 임박한 파국을 헛된 망상으로 잠깐 유예하는 것일 뿐임을 아는 까닭이다. 겐조의 여정이 정확히 그랬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나처럼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나와 똑같이 부모가 자기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 빈 골목을 마주하고는 실망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가며 붉은 노을빛이 밤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다 기대하는 것의 덧없음, 미래는 현재와 다르리라는 생각의 덧없음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나의 둥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제 나의 둥지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뻐꾸기 새끼로 더부살이하는 바람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표류의 감각이 이렇게 보다 확고한 '내 세계'의 정립을 저절로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소세키 작품에 한 결 같이 등장하는 집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미로를 헤매는 자들과 같다. 우리 앞으로 나 있는 모든 길이 그대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만 같아 우리는 불안하다. 때문에 더욱 우리는 출구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안심하고 출발해도 좋겠구나!'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출발을 위한 단단한 반석으로서 우리는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눈팔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저의 자화상이랄까요.

                                                              아무튼 그것을 한 번 표현해 보았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관찰력과 해석력으로 벼리고 벼려서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자아는 알고 보면 더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좀 더 제대로 된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겐조가 최후에 깨닫게 되는 것처럼 타인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보다 그 근원에 자리 잡은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먼저 세파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도록 신중해지려는 것이다. 소세키의 '한눈팔기'를 통해 나는 이러한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감지한다. 그리고 더욱 확신한다. 더부살이의 기억이 있는 우리 같은 자들은 '툇마루'야 말로 우리들이 서식해야 할 공간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제든지 남의 둥지로 들어가서 타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험을 이 미 했기 때문에 그 어디든 확고한 공간은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솔직히 더부살이의 기억은 내게 불편했고 현재를 불안하게 여기는 마음마저 남겼지만 이제 소세키를 통해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겐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겐조는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를 둔다. 완전히 자신에게 빠져있지도, 타인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집으로 치자면 안과 바깥의 경계. 정확히 툇마루이다. 그렇게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 공간에 머물렀기에 겐조 자신은 몰랐지만 어느새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지닐 수 있었음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 소설은 내게 무엇보다 위안이 되었다. 소세키는 결국 비슷한 과거를 가진 나에게 불안해할 것도 조급해할 것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내 그 툇마루에서 차분히 관조하면서 한 발 한 발 착실히 걸어가면 된다고 다독여 주었다.
 
  결국 '한눈팔기'는 한눈을 팔지 않으면서도 내 기억과 삶 그리고 세계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이 따스했다. 뻐꾸기 새끼로 있었던 시절에 내가 바라는 따스함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 때의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작품이 모처럼 찾게 된 둥지 같은 생각도 든다. 그 때문이리라. 마치 볕이 아주 잘 드는 툇마루와 같은 그 곳에서 소세키와 오래도록 나란히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러다 졸기도 할 것이다. 두 마리의 뻐꾸기 새끼들이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재미있다. 문득 소설과 독자란 것도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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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이 <길 위의 생>이었군요.
어쩌다 한눈 팔면서 책 이름은 본 듯해서요. ㅎㅎ
헤르메스님의 멋진 그림솜씨를 보고 나니,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뻐꾸기 새끼들 그림까지도 마구 보고 싶어 지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2-12-27 03:12   좋아요 0 | URL
와! OREN님 이렇게 들려주신것만 해도 반가운데 좋은 말씀까지 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브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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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 묶는 것은 조세핀 테이의 대표적인 시리즈 작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앨런 그랜트 경감이 나오는 시리즈죠. 죠세핀 테이는 '브랫 패러'를 쓰고 나서 바로 그랜트 경감 시리즈로 돌아가 다음 해, 1950년에 그랜트 경감 시리즈인 'TO LOVE AND BE WISE'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951년. 그랜트 경감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진리는 시간의 딸'을 내놓게 됩니다. 굳이 이런 계보를 밝히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왕 '브랫 패러'가 나온 김에 여기서 말한 테이의 작품들이 모두 나왔으면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브랫 패러'가 이처럼 그녀의 황금기에 나온 작품임을 알리기위해서 입니다.

 

 이 시기 조세핀 테이가 작품을 통해 천착하는 것은 2차 대전을 통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파시즘이라는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그런 그녀의 주제 의식을 참으로 잘 보여준 작품이었죠. 파시즘이라는 것이 독일이라는 특정한 나라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라는 특정한 인물과 집단이 있어서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편견과 이기심으로 배척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길 수 있는 것임을 잘 형상화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결국 이 시기의 조세핀 테이는 '우리 앞에 나타난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내내 질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프랜차이즈 사건'과 바로 뒤이은 이 '브랫 패러'가 가지는 설정상의 공통점들로 바로 추정 가능합니다. 일단 그 공통점에 주목해보죠. 두 작품 모두는 내부적으로 결속이 강한 집단이 한 편에 있으면 다른 한 편엔 그 집단의 유대를 위협하는 타자가 존재하는 구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작품의 서스펜스는 주로 이 둘이 충돌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 관계를 통해 이어지며 작품의 주제는 그렇게 결속이 강했던 집단이 타자와 얽히면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과 '브랫 패러'는 마치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따라 그리는 것처럼 이렇게 닮은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가의 질문은 반복되고 작가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작가에게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니만큼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해서 보다 그것을 심화시켜서 대답을 살펴보려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현명한 대답은 보다 깊은 숙고를 통해서라야 나올 수 있는 법이니 이러한 조세핀 테이의 반복은 쉽게 말하자면 나사를 한 번 더 조여 더 깊이 내려가 보는 것이죠. 

 

 그렇게 이 '브랫 패러'는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했던 것을 보다 아래로, 보다 깊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바깥 타자와의 간격에서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타자로 나왔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외부에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결속된 집단의 울타리 너머 그녀들이 사는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일원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해도 되나?'하는 식의 반성적 자문은 하지 않아도 되었었죠. 하지만 '브랫 패러'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타자는 더 이상 울타리 너머 저만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아예 가로놓인 간격 조차 없습니다. 즉 '브랫 패러'의 타자는 보다 깊숙이, 아예 그 집단의 일원으로 들어옵니다. 그것도 가장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 만한 가족의 일원으로 말이죠. 그래서 그 타자를 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하고. 다시 말해 반성과 성찰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된 것이죠.

 

 이것이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획기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이제 집단의 일원들은 대놓고 타자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의혹의 대상이 되고 불안한 가운데 내린 잠정적 결론만이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신뢰할만한 근거가 외부로 부터 전혀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그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자기가 스스로 믿음의 근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보다 한 차원 나사를 더 돌려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가 물어보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깥으로 부터 아무 것도 주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이 조세핀 테이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독일인이 2차 대전을 일으키고 거리낌없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자행했던 이유만 생각해봐도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때 그들이 그렇게 아리아인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그 외 다른 민족들을 하등 동물 취급하며 세계사의 유례없는 잔혹한 홀로코스트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파시즘'이라는 외부의 것을 통해서였습니다. 바깥에서 온 이데올로기에 그들의 이성과 영혼을 쉽게 내줘버렸기 때문에 양산되어진 비극이었죠. 물론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에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어쩌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독일인이 나치즘과 같은 광기의 포로가 되었나를 연구한 끝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쉽게 바깥의 유포된 선동이나 이데올로기에 쉽게 물드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 사고하기를 귀찮아하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을 도움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은 본성상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게으른 동물이다'라고도 하더군요.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복잡하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귀찮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문가들로 부터 일반인 모두가 그렇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우리 정치 현실에 있어서도 서민 코스프레 같은 감성에 호소하는 홍보 전략이 먹혀드는 것이죠. 안 그래도 살기가 팍팍한 현실이니 더욱 당장은 상관없어 보이는 문제에 매달려보지 않으려 합니다. 나치즘이 일어나던 당시의 독일도 그랬습니다. 지금만큼이나 그 때의 독일인들도 경제적으로 힘들 때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가 횡행했습니다. 히틀러가 유포하는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다시금 재현하자'라는 말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과거를 보라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 그건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리가 과거의 그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려는 세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태인이고 그들과 협력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이다."라는 악의에 찬 거짓을 진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나치 앞에다 바쳤으며 그렇게 이성이 마비되어버리자 소중한 목숨까지 필요하지도 않는 전쟁에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2차 대전 전체 사망자 거의 6천만명 그리고 유태인 사망자 6백만명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로서는 마치 세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 바깥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경계해야 하고 그 목소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이성으로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권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전자의 목적을 위해서 '프랜차이즈 사건'을 썼고 후자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브랫 패러'를 썼던 것입니다. 저만치 물러서 있던 타자가 가족의 일원으로 성큼 들어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은 2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썼는데 이건 '브랫 패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브랫 패러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먼저 제목인 '브랫 패러'는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난 브랫 패러는 원래는 영국 태생이지만 어찌어찌해서 미국과 멕시코를 떠돌다가 향수병으로 인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다가온 것은 브랫 패러가 자신의 조카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는 이름이 패트릭으로 8년 전에 절벽에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웨스트오버에 있는 애시비 가문을 이을 적자로 장차 그 가문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가 될 판이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는 바람에 그의 쌍둥이 동생 '사이먼'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 유예되었던 기한이 다 되어 곧 공식적으로 사이먼이 모든 걸 가질 판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브랫 패러에게 은밀히 제안해 옵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치 않은 패트릭을 패러가 정말 닮았으니 이참에 패트릭을 연기해 그 모든 걸 가져보지 않겠느냐고? 원래 브랫 패러는 재물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훌륭한 말들이 가득한 마굿간이 있다는 말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역시 말을 사랑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도 그랬듯이 말에 대한 사랑이 주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죠세핀 테이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행복해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예 목장을 배경으로 진행되어 말들이 전면으로 잔뜩 등장하니까요.)

 

  

 (사진은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웨스트오버의 풍경입니다. 이런 풍광을 바라보며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조세핀 테이가 그것을 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 지는 쉽게 상상이 갈것 같습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힙니다. 그래서 제목도 '브랫 패러'가 되었습니다. 즉 브랫 패러가 가짜인지 아닌지를 밝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브랫 패러가 들키느냐 안들키느냐가 중요한 서스펜스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프랜차이즈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이 '브랫 패러'에서는 바로 그 타자의 시선으로 결속이 강한 내부 집단을 관찰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낯선 타자를 앞에 둔 집단 일원의 반응들이 객관적으로 관찰됩니다. 더우기 그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자의 시선이라 더욱 면밀하고 정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이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무엇보다 신뢰의 근거가 될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차단된 상황 안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탐색하는 작품이니만큼 그것을 보다 세세하게 그리고 독자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포착하면서 또한 그러한 관찰이 작품의 진행과 별 무리없이 섞이도록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 설정이 택해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설정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다시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 즉 이 작품 역시도 '프랜차이즈 사건' 처럼 오래된 하나의 원본이 있다는 이야기로 돌아가봅니다. 그럼 과연 브랫 패러의 원본은 무엇일까요? 그 단서는 다름 아닌 이름에 있습니다. 즉 8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인 패트릭. 그것이 단서입니다.

 

 이를 보다 더 확실한 단서로 만들기 위해 또 하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브랫 패러'라는 이름입니다. 소설에는 이 브랫 패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인공의 이름이 되었는지 밝혀주고 있는데 영어로 쓰자면 'BRAT FARRAR' 이렇습니다. 여기서 'BRAT'은 '사고 뭉치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수식어 같은 것이니 정작 중요해지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FARRAR'란 성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이 성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성은 'FARRELL'이었죠. 브랫이 우연히 타게 된 배의 선장이 이름을 잘 못 보고 표기하는 바람에 그만 'FARRAR'란 성으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FARRELL'은 유명한 아일랜드 성중 하나입니다. 얼마전 영화 '토탈리콜'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대표적인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파렐도 바로 이 성을 쓰고 있죠.

 

 

  

 그러면 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조세핀 테이가 하필이면 주인공의 성을 아일랜드 것으로 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세핀 테이는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소설에 나오는 '패트릭'이란 이름이 정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확실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요. 네 그 패트릭은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로 성 패트릭 이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그래서 지금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리는 이입니다. 그런데 이 패트릭에게 있어 원래 아일랜드는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로 끌려와 살게 된 곳이 바로 이 아일랜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노예로 착취당하던 중 탈출을 했고 오래도록 외국을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울과 같은 영적 체험을 한 그는 선교사가 되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그렇게 아일랜드를 이전과 다른 새로운 땅으로 바꿔버렸습니다. A.D 400년 전후의 일입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바로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브랫 패러의 이야기임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겠죠. 또한 이 패트릭의 일생이 그대로 소설에서 브랫 패러가 걸어가게 될 여정이라는 사실도 말이죠.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성직자라 할 수 있는 성 패트릭

 

 

 조세핀 테이는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를 내부적 결속이 강한 집단으로 부터 축출된 타자가 다시 돌아와 오히려 그 집단을 바꾸게 되는 것의 원형으로 보고 그걸 다시금 문학으로 형상화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패트릭의 쌍둥이 동생의 이름을 하필이면 '사이먼'으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바로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타자의 축출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사이먼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죠. 그렇게 가장 강한 내부적 결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패트릭과 사이먼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야말로 농후해집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는 사실 이 소설로 독자들에게 어떤 반전이나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과 같은 그렇게 결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정으로써 다가가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미리 위장하는 존재를 밝혀서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 탄로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통하여 서스펜스를 죽 이끌어 갔던 것도 독자들이 가급적이면 그 과정을 좀 더 음미해주길 바라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어쩌면 집요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과정에 독자를 붙들어 매여 두려는 것은 그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보다 주고 싶은 것이 홀로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정 앞에서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타인의 존재를 통해 이 소설이 차용한 성 패트릭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떻게 내부적 결속을 허물고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욱 바람직한 집단으로 재탄생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그럼으로 궁극에 가선 타자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 장을 덮는 가운데 깨닫게 만드는 것이죠. 조세핀 테이는 그렇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가졌던 '구원은 타인으로 부터 온다'라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끝에 가서 말들이 두리뭉실해진 것은 가급적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죠세핀 테이의 의도대로 그 과정을 온전히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려면 되도록 아무런 선입관이 없는 것이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긴 말을 쓰고 말았으니 어쩐지 이런 말들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네요. 그래도 조세핀 테이 입니다. 시간을 얼마든지 들여도 아깝지 않은 작가. 그러니 이 '브랫 패러'가 보여주는 과정을 마음껏 벗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기꺼이 권해드려 봅니다.

 

 

 [다음은 그냥 곁다리 입니다.]

 

 

  조세핀 테이의 소설답게 이 브랫 페러 역시도 두 차례 영화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1963년에 나온 프레디 프랜시스가 감독한 'PARANOIAC'이란 영화입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사이먼 입니다. 여기서는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한 감독 캐롤 리드의 조카가 되는 올리버 리드가 사이먼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제작사가 공포 영화 전문의 헤머 영화사라 원작 보다 좀 더 공포 분위기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또 한 편은 1983년 BBC에서 3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판본이 궁금한데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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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8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ICE-9 2012-12-1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비교해서 리뷰했기 때문에 혹시 전작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리뷰를 참조해 주세요.
 
볼륨 존 전략 - 10년을 전망하는 한국 기업의 선택
이지평 지음 / 와이즈베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일단 가장 먼저 제목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루 존(BLUE ZONE)이 아니라 볼륨 존(VOLUME ZONE)입니다.

 둘 다 시장(MARKET)을 뜻하는 건 맞지만 엄연히 다른 것을 가리킵니다.

블루 존이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그러니까 미개척지의 시장을 말하지만 볼륨 존은 어디까지나 이미 형성된 시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기업에게 있어 시장이란 무엇보다도 태아에게 있어 탯줄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윤이란 영양분을 공급받고 성장해 나갑니다. 문제는 그 탯줄에 매어달린 기업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 말고도 아주 많은 기업들이 그 탯줄에 같이 매달려 조금이라도 더 영양분을 빨아 먹겠다고 한계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탯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영양분의 양은 정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시장은 언제든 포화상태에 이를 수 밖에 없지요. 문제는 포화상태에 이르면 받을 수 있는 영양분은 턱없이 부족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리하여 기업의 고민은 생겨납니다. 여기에 이르면 기업이 그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쓸 수 있는 해결책은 다른 기업을 밀어내는 방법을 제외한다면 보통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아무도 입을 대지 않은 탯줄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적은 경쟁자가 매달려 있는 탯줄로 옮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자가 블루 존이라면 후자가 볼륨 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아까부터 볼륨 존, 볼륨 존 그러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냐구요?

 

 정확히 그 의미를 말하자면 단적으로 신흥국 중산층 소비시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를 비롯한 소위 'BRICS' 국가들의 시장이나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지역의 시장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죠. 이 말이 처음으로 쓰이게 된 것은 2009년 일본의 노무라 총합 보고서였습니다. 거기서 일본 경제의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것이 바로 이 '볼륨 존'의 시장 개척이었죠. 그런데 왜 이들이 새삼 이런 시장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유례없는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해왔던 시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당시 일본 기업이 주력하고 있던 기존의 시장들은 소비력이 급감했지만 이 '볼륨 존'의 시장들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비력이 증가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시장에만 집착하지 말고 과감히그런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한다는 뜻에서 나왔던 것이 이 '볼륨 존'인 것입니다.

 

 현재 LG 경제연구원이자 일본 경제통이기도 한 이지평씨의 이 책은 바로 그런 '볼륨 존' 전략이 일본만이 아니라 같이 불안한 경제 전망을 공유하는 바로 우리 한국 기업 역시도 필요하다는 뜻에서 '볼룸 존' 전략을 소개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한국 기업에 맞게끔 운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이지평 연구원이 새삼 이 '볼륨 존' 전략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경제제전망에 대비해 보자면 좀 독특하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우리들은 앞으로의 세계경제가 3차 산업 중심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2차 산업인 '제조업'은 쇠퇴하고 3차 산업인 정보와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해 나갈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한미 FTA를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도 처음 시작은 그러한 전망에 있었죠. 그런데 이지평 연구원에 따르면 사실 세계 경제의 전망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지금 성장하는 시장들의 추세를 보고 판단하건대, 그는 세계 경제가 18세기 이전의 경제로 돌아갈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성장하고 있는 소위 '볼륨 존'의 시장들 중에서도 특히나 유례없는 성장을 보여주는 중국과 인도가 모두 자국의 엄청난 인구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구로 뒷받침되는 넓은 시장이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볼 때 그는 앞으로의 세계 경제가 '18세기 이전과 같이 인구 규모에 따라 경제 및 시장 규모의 위상이 결정되는 시대로 회귀할 것(P.23)'이라 봅니다. 여기서 인구 규모가 뜻하는 것은 단순히 구매력의 규모가 아닙니다. 이지평 연구원의 말이 꽤나 독특한 것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 경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정보 기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동력이 여전히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노동력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가 되기 때문에 특히나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의 위상이 여전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즉 '볼륨 존' 전략은 제조업의 중시가 바탕이 된 전략입니다. 때문에 시장의 개척과 활성화가 여전히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제조품이란 정보 기술에 비해 그 접근도나 이전에 있어 확실히 뒤떨어지니까요. 그래서 이 책이 뒷받침하고 있는 이런 전제를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향후 10년 우리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볼륨 존'에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그리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일 여기에 동의하시고 '볼륨 존' 전략이라는 것이 궁금해지셨다면 이 책은 필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볼륨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한 매우 실제적이고도 실천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2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이 그러한데, 여기서는 마케팅은 어떻게 하고, 시장 진입에 따르는 비용의 절감과 토착 시장에 먹힐 수 있는 효율적인 기술 혁신은 어떻게 할 것이며 선점한 경쟁 우위를 또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비롯 또 다른 '볼륨 존' 공략을 위한 시장의 잠재력 확인과 그 확대 방법들이 실제 사례들과 함께 잘 버무려져 제시되고 있습니다.(특히나 아주 다양한 사례들이 제시되어 있어서 책의 내용과는 별도로 읽고 알아가는 재미를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았습니다.) 또한 응용을 위한 본격적 케이스 스터디까지 6장에 나와 있어 이해와 실제로 접목하는데 있어 보다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름 독자를 위한 배려를 한 흔적이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앞서 이 책이 가진 전제의 독특성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기존의 것과는 뭔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거나 원하셨던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기존의 유명세를 떨쳤던 시장들이 그 생명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사실이기도 하니 이 책을 통해 좀 더 시야를 넓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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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소설 신간평가단 12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와! 12기라니!

  새삼 정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신간 추천을

  이렇게 다시금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솔직히 이 신간 추천을 하면서 비로소 어떤 책이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냈는지

  알았던 저로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다시 달려야 할 6개월 동안의 여정을 앞두고

  그 출발선에 선 지금, 이전보다 더 열심히 달려보리라 스스로 각오하면서

  12기의 첫 신간 추천을 해보려 합니다.

 

 

  올해는 정말 사건이라고 할만한 출간이 특히 많았던 것 같은데 그건 지금 들어서도 멈추지 않네요. 우리나라에 이 작가의 팬이 얼마나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 작가의 팬이라고 하면 너무나 놀라서 행여나 밥을 먹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순간 그 밥이 목에 탁 걸려서 켁켁거렸을 것이고 급히 물을 달래서 벌컥 들이켜서는 간신히 그 밥을 위장으로 밀어보내고 난 다음에 "우와! 그 책이 나오다니!"하고 탄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바로 그 작가가 개성으로 완전무장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작가에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그리고  알베르 카뮈 만큼이나 담배를 맛있게 피는 여류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요, 그 작품이 하이스미스 브랜드 중 최고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리플리 시리즈' 입니다.

 

  이미 수십년에 걸쳐 영화화가 몇 번이나 되어 그 문학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를 증명한 리플리 시리즈는 모두 다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는데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그 전부가 다 발간된다고 합니다.

 

  더러는 알랑 드롱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영화 '태양은 가득히'나 아니면 맷 데이먼의 연기를 더욱 눈여겨보게 만들었던(아니면 쥬드 로를..) 영화 '리플리' 때문에 그 첫 권을 읽으셨던 분들도 계실텐데 그때 그 뒷 이야기가 궁금했던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호재가 찾아온 셈입니다.

 

  아무튼 이번 11월, 그 시리즈의 첫 세 권이 모두 출간되었습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1995년에 죽었으니 거의 평생에 걸쳐 리플리 시리즈를 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작품, 재능있는 리플리와 바로 두번째 작품, 지하실의 리플리만 해도 무려 15년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때문에 우리는 이 간접 사실로 하이스미스가 리플리를 자신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매개물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리플리 시리즈의 각 작품들은 당시 하이스미스가 바라보던 인간관, 사회관을 집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리플리를 보면서 사실은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데 있어 너무도 이채로운 시선을 가진 하이스미스의 영혼을 탐색해 들어가는 것이죠. 쓰다보니 저만의 경우를 성급히 '우리'라고 일반화시켜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작품 보다 작가 자신에게 더 관심 것을 어쩔 수 없이 느꼈을 것이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를 읽었을 때 엘프리데 옐리네크에 더욱 관심이 가듯이 말이죠. 아무튼 저는 예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네 권의 단편집을 읽고 정말 이 하이스미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수십년에 걸친 내면의 여정을, 비록 지레짐작이지만, 엿보게 하여 줄 이 작품들이 꼭 읽고 싶고 그래서 더욱 추천하고 싶군요.

 

 

 요즘 가장 활발하게 간행되고 있는 것은 세계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순한 재미 보다는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쪽으로 사람들의 취향이 변한 것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가뜩이나 경기가 불황이니 아무래도 쪼들리는 우리는 돈을 쓰는데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보다 가치 있는 쪽으로만 비용을 들이다보니 이미 역사적으로 제대로 검증을 받은 세계문학을 선호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고전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위기는 세계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미스터리 문학에까지  그 여파를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미스터리 문학에서도 고전의 붐이 슬슬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엘릭시르는 본격적으로 가치가 검증된 고전 미스터리들을 선별해 발간하고 있고 '검은숲'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더불어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2대 거장으로도 불리던 모리무라 세이치의 가장 대표작 '증명 3부작'을 발간했습니다. 이 역시 미스터리 팬 역시도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을 낸다는 취지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던, 혹은 질낮은 번역으로 그 우수성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던 작품들을 보다 좋은 상태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오래 이 상황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절대 경기가 장기 불황에 빠지길 바란다는 의미는 아니구요~^ ^;) 이번에 나온 고전 미스터리들을 모두 추천해 봅니다.

 

 

 

 

 

 

 

 

 

 

 

 

 

 

 

 

 마지막 '빅 클락'은 케네스 피어링이 2차 대전 직후의 1946년에 발표한 소설인데 주인공 자신이 탐정이자 추적하는 대상이기도 한 당시로서는 꽤나 흥미로운 설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추적한다'라는 설정에서 보듯 이 소설은 그대로 전후, 전쟁이 가져온 혼란으로 인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또한 그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운 설정과 그것이 자아내는 서스펜스 효과가 뛰어나 이미 두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더구나 첫 영화는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에 의해서 영화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며 칭찬받은 바가 있고 두번째 영화는 80년대에 만들어져 신보수주의 아래서 어느새 잃어버린 개인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뛰어나게 접근한 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 '빅 클락'은 조지 오웰 식으로 말하자면 빅 브라더가 설치면 설칠수록 그 이야기의 생명력이 더욱 살아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출판사를 배경으로 하기에 책을 좋아하는 이로서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고전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존 맥도널드의 탐정, 트래비스 맥기.

  그 역시 우리들에겐 그저 '풍문으로 들었소' 하는 탐정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인, 1964년에 나온 '푸른작별'도

  마찬가지죠.

 

  그랬는데, 이렇게 나왔네요.

 하드보일드를 사랑하시는 분들에겐 조금 더 입이 벌어질만한

 출간이 아닌가 합니다. 트래비스 맥기가 주로 살고 있는 보트를

 아래서부터 찍은 표지도 인상적이네요.

 

 아무튼, 풍문으로만 들었던 60년대의 대표적인

 반영웅, 트래비스 맥기가 어떤 투박한 매력을 보여줄 지

                                        기대됩니다.

 

 

 

 원래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에 추천한 신간들이 죄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작품들이네요. 그래서 아예 제목도 이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무튼 기나긴 겨울밤, 그들의 유명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대로 한 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습니다.

 

 

 

 

 아, 이런 신간 추천 집계를 하다가 이 작품을 빠뜨려버린

 것을 발견했네요. 지금 제가 심한 목감기에 걸려서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 효과가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군요.

 26세에 독학으로 갈고 닦은 내공이 어느정도인지

 시전했던 문학 비평서인 '아웃사이더'로 일약 유명해진

 이런저런 잡학에 있어서는 거의 지존급이라 할만한 콜린

 윌슨의 무려 SF 소설입니다. '아웃사이더'에서 추구했던

 것을 러브 크래프트에게서 받은 영감으로 써내려간 소설

 이라고 하는데 그의 방대한 지식이 어떻게 녹여나 있을지

 기대됩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어요.

 이 소설은 이번에 새로이 런칭되는 '미래의 문학'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의 문학' 시리즈는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협소한 SF물을 집중적으로 발간하는 시리즈입니다.

                                          이미 그 출판 블로그에 시리즈에 수록될 작품 리스트가 공개되었는

                                          데, 아, 정말 꼭 보고 싶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발 목록 그대로 다 완간되고 더욱 길게 이어지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응원의 의미로 추천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작품 역시 풍문으로 유명세를 꽤나 떨쳤던 작품입니다.

                                          그러니 이 역시 뜻밗의 진가를 확인할 기회가 왔다고 해야겠지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제목을 바꿀 필요는 없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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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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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에게 알려진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지만 실은 1983년 부터 작품을 발표해 온 꽤나 연륜이 있는 작가입니다. 이제야 알려졌기에 그동안 꽤나 무명으로 있었나보다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미 93년에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네치카'로 세계문학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 때부터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녀를 유럽의 주요 상을 모두 휩쓴 러시아의 보석이라 불렀고 이웃 일본마저도 우아하게 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매우 러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지도에 비해 사실은 뒤늦게 소개되었다고 해야겠죠.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이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조금 의아하지는 않으셨던가요? 도대체 러시아 작가와 박경리님의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수상했을까 하구요. 저는 궁금하더군요. 물론 사실 그 때까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을까 궁금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 문학의 대모이신 박경리님과 러시아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교차점을 알기 위해서 말이죠.

 

 

 

 읽고나니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야 말로 박경리 문학상에 걸맞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러시아의 '토지'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이었거든요. 박경리님의 토지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시나요? 암울해지는 역사적 상황과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굳세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상이 아닌가요? 그야말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파국으로 부터 역사와 사회를 구원하는 그런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토지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박경리님이 새삼 '토지'를 제목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토지란 바로 생명을 산출해내는 것, 그렇게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여신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죠. 이러한 여성성의 긍정과 구원으로서의 그 힘을 강조하는 것이 '토지'라고 한다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린 '소네치카'도 그렇고 그 뒤에 나왔던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 책, 2001년에 러시아 부커상을 받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쿠코츠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자면 저는 일단 '소네치카'를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이 '쿠코츠키의 경우'를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왜냐하면 사실 이 두 작품은 꽤나 닮은 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한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하죠.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전개되니까요. 그러므로 좀 더 세부로 들어가 그 닮은 점들을 살펴봅니다. 일단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사합니다. 지적이지만 성격은 유약하며, 유럽 문명 세례를 받았고 그 때문인지 현실주의적이고 모든 가치에 회의적인 남자 주인공이 보다 러시아 전통적이며 성격은 강건하며 현실 보다는 이상을 그리고 고귀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주인공에 먼저 반하여 청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의 주인공 커플인 파벨과 엘레나는 그야말로 '소네치카'의 로베르토 빅토르비치와 소네치카의 판박이 입니다. 또한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성향이기 때문에 잘 섞이지 못하고 결국엔 불화하게 된다는 것도 유사합니다. 또한 새로이 변화하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딸 이름이 '타냐'인 것도 똑같습니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가진 성격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마저 음악가라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열거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잔뜩 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바로 결론으로 뛰어넘어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사실 '소네치카'를 전혀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본 소설이라고...

 

 '소네치카'를 읽고 이 작품을 보시면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드려 보았습니다만 아무튼 이것은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소네치카'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지만 '쿠코츠키의 경우'에서 쿠코츠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소네치카가 여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두고 쓰여졌다면 '쿠코츠키의 경우'는 남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놓고 쓰여 진 작품인 것이죠. 즉 여성을 매개로 밟아갔던 궤적을 이번엔 남성을 매개로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작가 울리츠카야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하는 것인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죠.

 

 아시다시피 93년의 소네치카와 2001년의 쿠코츠키의 경우엔 시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도 사회 속의 존재인 이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문학이란 사회와 시대를 비쳐주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워진 시대의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통해 대안을 주려 한다면 더욱 동시대와 더불어 부대껴야 합니다. 다른 작가라면 모르겠지만 충실하게 러시아 리얼리즘을 고수해 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대표작을 새로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보려 했다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근거가 될만한 상황이 러시아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분쟁입니다.

 

 

      체첸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공격에 초토화되어버린 체첸의 그로즈니 시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미국 이상으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거의 수천여개에 이르는 소수 민족이 있다고도 하죠. 레닌이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라는 것을 형성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던 민족 감정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개방의 흐름을 타고 곳곳에서 분출되었습니다. 다수이자 늘 지배자적 위치를 점유해왔던 러시아 민족은 그러나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적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치를 요구하는 타민족의 요구와 그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러시아 민족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첨예화되어갔고 그러다 결국 화산처럼 터져나왔던 것이 바로 체첸분쟁이었던 것입니다. 작가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였던 러시아가 분열되고 그럴 뿐만아니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해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야했던 것입니다. 흔히 진정한 작가는 시대적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 둔감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올리츠카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는 체첸분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죽음과 파괴를 초래하는 이와 같은 비극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실현된 것이 '쿠코츠키의 경우'였고 결국 러시아를 순진하게 긍정했던 '소네치카'는 다시 쓰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네치카'와 '쿠코츠키의 경우'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유대관계가 '쿠코츠키의 경우'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엔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가 달라도 토마처럼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 줴냐와 같은 혈연이 아니라서 거부했던 엘레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보듯이 혈연이 바탕이 된 관계만큼이나 공고합니다. 울리츠카야는 끊임없이 같은 부모라는 것, 같은 피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 것,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는 공고해지는 것이라는 걸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또한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바꼈습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와 '쿠코츠키의 경우'의 파벨은 앞서도 말했듯이 존재론적으로 유사하지만 둘이 자아내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는 결국 소네치카와 결별하고 맙니다만 '쿠코츠키 경우'의 파벨은 병이 들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엘레나를 끝까지 함께하면서 보살펴 주지요. 더구나 자기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파벨입니다. 반면 엘레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문제는 소네치카와 엘레나가 똑같이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울리츠카야는 엘레나를 톨스토이를 신봉하는 공동체 출신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녀를 사회주의 성립 이전의 전통적 러시아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회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러시아일까요? 그것은 레닌이 다른 소수민족들을 소비에트 안으로 받아들이기전의, 그러니까 순수하게 러시아 민족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엘레나가 그토록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는지 우리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엘레나가 바로 체첸분쟁을 일으킨 러시아 민족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엘레나는 순진한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십 분의 일, 아니면 천 분의 일의 진실이 있단 말이죠. 그리고 난 믿어요. 모든 사물이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p.74)"

 

 이렇게 말이죠. 이는 그대로 단순히 피일 뿐인데 그냥 피가 아니고 그 이상의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보지 않죠.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어떤 민족의 한 사람, 어떤 계급의 한 사람, 어떤 이념의 한 사람으로만 볼 뿐입니다. 그 민족, 계급, 이념 아래서 고유의 색깔로 빛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지워져 버립니다. 그저 어떤 민족, 어떤 계급, 어떤 이념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보통 명사로만 존재할 뿐...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러한 엘레나를 통해 체첸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로 보지 않고 자꾸만 그 위에다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는 행태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커다란 비극을 부르지 않았냐고 말이죠. 더이상 엘레나가 상징하는 순수한 러시아라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러시아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외침을 들려주기 위하여 울리츠카야는 순수한 러시아를 여성성으로 형상화했었던 '소네치카'를 완전히 새롭게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안 역시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단순히 말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죠.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전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파벨을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 파벨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스로 '내면 투시'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의 몸 속의 종양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올리츠카야가 파벨이 어떤 사람인가 보여주기 위해 단적인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가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붙이지 않고 보이는 대로 그것만 믿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는 엘레나와는 달리 지금 보이는 존재 이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데 상관없었고 엘레나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이 긍정의 모습으로 볼 때 울리츠카야가 그 대안으로써 파벨을 가져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안을 상징하는 인물인 '타냐'를 보면 이 책이 '타인을 있는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비극의 반복을 막는 길이다'라는 주제를 가졌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타냐는 결국 세르게이라는 음악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충실한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합니다. 타냐가 그런 생애를 사는 동안 그녀는 내내 음악과 같이 있습니다. 마치 울리츠카야가 이런 식으로 음악이 바로 구원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이 말이죠. 그런데 음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실 음악이야 말로 그 자체로 밖에는 만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다른 그 어떤 것도 그 이상의 의미로 부가될 수 없는 그렇게 그 순간에 귀로 들려오는 음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만이 전부인 게 음악이 아닐까요? 이렇게 울리츠카야는 타냐를 통해 음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그녀가 파벨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려 합니다. 이렇게 보아온 대로 '쿠코츠키의 경우'는 체첸 분쟁으로 터져 나온 시대적 아픔에 울리츠카야의 작가적 양심이 반응한 결과요 성찰한 산물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개에 이르는 러시아 곳곳에 분포된 다양한 민족들은 지배와 배쳑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러시아'라는 하나의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같은 존재라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데 과연 그게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게냐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울리츠카야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와 엘레나의 관계를 통해 응수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어떤 공통의 근거를 가져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고. 우리가 같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은 타인을 의심부터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그 의심을 지워줄 근거를 찾게 되고 그래서 민족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 그 존재 자체보다 눈에 더욱 크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그대로 그냥 믿으라고. 어차피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그냥 믿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파벨과 타냐처럼, 줴냐와 엘레나처럼 오래도록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가 가졌던 그 존재 자체로의 긍정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울리츠카야의 진심이 들어있습니다. 시대적 현실의 아픔을 내면의 성찰로 길러낸 끝에 나온 것이기에 그 진심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심은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들어야 할 목소리 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비정규직이나 직업 또는 학연이나 지연등 보이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원래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그 이상의 의미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로 인해 가해지는 차별과 받게 되는 아픔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귀기울여 할 목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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