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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벌써 새해가 5일이나 지났고 신간추천의 시간이 도래했네요.

  늘 그렇듯이 신간들을 훑어보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바깥 일이 어떻든지간에 상관없이 이 시간만큼은 제가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 하는 것을 담뿍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도 정말 읽고 싶은 작품 5가지를 골라보았습니다.

 

    이름하여, 신간 스트레이트 플러쉬! 

 

     그냥 ' 5 '를 떠올리니 갑자기 영화 러브레터의 남자주인공 이츠키가 여자 주인공 이츠키에게 보여주었던 도서카드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생각났어요. 새해의 첫 신간 추천이니만큼 이렇게 은연중 마음을 고백하는 것 비슷하게 해보고 싶습니다. 하하하^ ^;

 

 

 

 1. 알렉산더 클루게, '이력서들' (을유출판사)

 

 

 

 

 

 

 라이너 베르네 파스빈더와 더불어 뉴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알렉산더 클루게. 하지만 클루게는 영화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책 그리고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2009년 아도르노상을 수상할만큼 꽤나 명망있는 작가이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이름이 있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그의 영화와 책들이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특히나 이번에 나온 단편집 '이력서들'이 더욱 반가운 것 같습니다. 저는 클루게를 그가 파스빈더와 더불어 만든 페이크 다큐멘터리 '독일의 가을'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붉은 여단에 납치되어 결국 살해되었던 사업가의 두 달을 쫓는 이 영화는 70년대 독일의 있어서의 계급적 상황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강한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작품을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한 것은 내용은 실제 사건 그대로이지만 재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 인물들이 아니라 배우들이 연기했고 묘사되는 장면 역시 실제 그대로가 아니라 연출된 것이거든요. 이런 면에서 '독일의 가을'은 아무리 실제 사건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를 매개로 삼는 이상 누군가의 필터에 의해 여과될 수 밖에 없는, 다시 말해 아무리 날 것 그대로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여도 누군가의 의식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의 재현에 불과하면서도 마치 진정한 사실인양 보이게 하여 그 자체로 보는 이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죠. 분명 클루게에겐 이런 시선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실제 사건을 다룬다고 하여도 이것이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영화뿐만이 아니고 문학에 있어서도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는 걸 우리는 바로 이번에 소개된 단편집 '이력서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서사기법들이나 아이러니하고 부조리한 설정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니까 말이죠. 클루게가 이렇게 다양한 비틀기로써 굳이 지금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으로 재현된 것임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작가나 감독에 기대지 말고 독자 스스로 펼쳐지는 사건에 대해 사유하게 함입니다. 정보의 홍수와 언론 장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자기 머리로 사유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읽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2. 고마스 사쿄,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폴리북스)

 

      

SF를 좋아하신다면 옛날에 고려원에서 나온 세계 SF 걸작선을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이 바로 고마츠 사쿄의 것으로 제목은 '지구가 된 사나이'였습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신할 수 있게 되고 차츰 그것을 유희로 즐기다가 나중에 가서는 어느 우주에서 지구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이야기적인 재미도 재미이지만 무엇보다 펼쳐지는 상상력이 아주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엄청난 크기의 거대한 똥 덩어리가 되어서 일본을 괴멸적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고마즈 사쿄 밖에는 없을 것도 같은데 그래서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알았던 작가이지만 그대로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읽었던 것이 아마도 '일본 침몰'이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고마츠 사쿄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지만 사실 제가 아는 사쿄의 매력은 별로 느껴볼 수 없었던 작품이라서 개인적으로 아쉬웠습니다. 일본 침몰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예측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정말 혼신의 노력으로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에 무리없이 우려낸 것은 역시나 사쿄라고 생각했지만 펑키하게 막 나가는 특유의 상상력적 유희는 별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볼 수 있었던 사쿄의 책은 이게 다였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볼 수없어 아쉬웠는데(이럴 때마다 일본어를 배워야지 하는 마음이 정말 마구 솟구치는데 아, 저는 천성이 너무 게으릅니다ㅠ ㅠ) 오오! 이번에 또 하나의 사쿄의 작품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일본 SF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는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가!

 내용을 살펴보니 중생대 지층에서 발견된 어느 방향으로 뒤집든지간에 모래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가 주된 소재라니 이번엔 사쿄의 상상력이 더 많이 발휘된 작품인 것 같아서 정말 기대가 됩니다.

 

 

 3. 콜린 멜로위, '와일드 우드' (황소자리)

 

 

 

 와! '와일드 우드'가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러스트 때문에 꼭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의 영국 포크 스타일을 보여주는 밴드 디셈버리츠의 리더답게 '와일드 우드' 역시도 나니아 연대기와 느낌이 비슷한 클래식한 판타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외국 블로거들의 글에서 이야기 자체가 압도적으로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보았는데 그래서 정말 궁금해집니다.

 

 

 

 

 

 

 

 4.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현대문학)

 

 

 

 

 

  아베 히로시가 가가형사로 나오는 '신참자'라는 일본드라마를 참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구로자와 기요시가 미나코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만든 5부작 드라마와 비슷하게 이 드라마 역시도 덮어놓고 단죄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래야 했는지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먼저 다가가는 그런 것이 느껴지던 드라마였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오랜 세월을 두고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닌교초를 무대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오랜 세월 오로지 하나만을 보고 살아 온 그네들의 묵직한 삶의 속살에 한 올 한 올 아로새겨진 나이테를 헤아리는 듯한 내용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그 중 신참자 스페셜로 방영된 '붉은 손가락'이야말로 그러한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에피소드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 히가시노 게이고는 감춰진 트릭을 밝혀내는 것을 어쩌면 사람의 속내를 밝혀내는데 대한 하나의 은유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에게 범죄란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속마음이 표출되는 계기이고 결국 범죄를 해결하는 것 역시도 서로가 단락되었던 마음들을 접붙이는 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들이 주가 되어 전개되는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의 히가시노 게이고를 통해 과연 그 문득 들었던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군요.

 

 

 

 5. 요이다 슈이치, '원숭이와 게의 전쟁' (은행나무)

 

 

 

    이 책을 보고 싶은 건

   물론 요이다 슈이치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내용 때문입니다.

 

   지금 '레미제라블'이 흥행몰이중이라지요.

   한국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흥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우시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랬다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사회의 약자들이 권력의 기득권층과 맞짱 뜨는 이 소설을 읽고 싶습니다. MB가 되었던 당시에는 그래도 이준기의 일지매가 있어 마음을 풀어주더니 이번에도 공교롭게도 비슷한 고전 영웅 '전우치'가 방영되고 있는데 서민을 위로하기는 커녕 오히려 '왕'을 위로하기 바쁘네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아무데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마음 이렇게 영화나 책으로 달랠 수 밖에...

 

 

 

 그리고 하나 더,

 마음이 지독히도 허한 이번 겨울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노래 하나 첨부합니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으니 정말 위로하는 듯 느껴지는 가사더군요.

 

 

 

 

 

 Jesus, don't cry
You can rely on me, honey
You can combine anything you want
I'll be around
You were right about the stars
Each one is a sett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Don't cry
You can rely on me honey
You can come by any time you want
I'll be around
You were right about the stars
Each one is a sett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Voices whine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Your voice is smoking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Our love
Our love
Our love is all we have

Our love
Our love is all of God's money
Everyone is a burning sun

Tall buildings shake
Voices escape singing sad sad songs
Tuned to chords strung down your cheeks
Bitter melodies turning your orbit around

Voices whine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Your voice is smoking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Last cigarettes are all you can get
Turning your orbit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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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1-1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시린 일요일 아침,
저도 노래에서 위안을 받고 가네요. ^^
 
청춘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마쓰모토 세이초와 모리무라 세이이치...

 

  '청춘의 증명'은 1976년에 나온 '인간의 증명'으로 시작된 이른바 '증명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이다. 

 

 

 

 흔히들 마쓰모토 세이초와 이 작품의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양대 산맥으로 부르곤 하는데 그렇게 같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묶이지만 사실 이 둘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전제하고 하는 말이지만,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하여 되도록 거리를 두고 끝끝내 불편부당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그 대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자신의 견해마저 피력하는 등 작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참여자로서 행세하려 한다. 그렇게 관찰과 참여, 바로 이것이 세이초와 세이이치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세이초의 주인공들은 관찰하고 듣고 해석하는 행위가 주를 이루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주인공들은 생각 보다는 먼저 적극적인 행동과 실천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에 있어서는 명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들의 비중이 크지만 모리무라 세이이치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물론 기본적으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도 범인을 찾는 미스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표면상 그런 역할을 맡는 형사 보다 그 범죄를 둘러싸고 얽혀있는 인간들의 애증 관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모리무라 세이이치에게 있어서 범죄란 수면 아래 잠자고 있었던 들끓는 인간들의 애증관계를 밖으로 노출시키는 계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범죄란 거짓과 탐욕 그리고 비겁함을 숨기고 있었던 개인들의 내면과 그것들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던 사회의 숨겨진 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소설들은 일종의 '재판장'과도 같다. 나타난 범죄가 고발하는 피의자들이 서로 자신의 혐의 없음을 증명하고 변호하느라 들끓고 있는 재판장인 것이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제목에 '증명'이라고 쓴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범죄가 '당신이 과연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고발하면 피의자는 거기에 대해 자신의 인간다움을 증명한다. 이것이 '인간의 증명'이다. 이번엔 범죄가 '당신에게 과연 청춘은 있었는가?' 고발한다. 거기에 대해 피의자가  청춘에 대해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번의 '청춘의 증명'인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증명3부작은 그렇게 범죄가 부정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증명에도 어디까지나 조건은 있다. 진정한 증명이 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전작 '인간의 증명'에서 제목의 이 말은 딱 한 부분에만 등장하는데 그 때가 바로 자신의 인간다움을 행동으로 증명했던 부분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세이초의 소설들이 다소 건조하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는 반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뜨겁고 때로는 격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자리 선점에서 비롯되는 차이는 다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더 나아가서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마저도 영향을 미치는데,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어디까지나 객관적 관찰자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마츠모토 세이초는 사회가 만들어버린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작품을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왠지 동시대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남의 일처럼 내버려둘 수 없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행동가적인 면모를 간직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먼저 사회 이곳저곳에 양산된 여러 개인들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그 아픔과 비극의 태피스트리를 통하여 거꾸로 사회의 부조리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사회를 비판하는 형식에 있어 마츠모토 세이초가 연역적이라고 한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귀납적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마도 이런 차이, 그러니까 사회에 대한 기탄없는 비판, 참여자로서 그 고통과 대안의 형성마저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의지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내는 부조리에 대한 마쓰모토 세이초와 구별되는 이러한 차별적 접근이 같은 사회파이지만 선배인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와는 또 다른 산맥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게 아닐까 싶다.

 

 

 

 

 

 2.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네 개의 청춘...

 

 

 이러한 모리우라 세이이치의 독특성이 가장 잘 드러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1977년에 나온 '청춘의 증명'이다. 파노라마식으로 인물을 배열하는 것도 더욱 확장되었고 2차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 같은 국민들마저 파멸로 이끌어 갔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 역시 더욱 통렬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이 그 어떤 작품보다 전면적으로 드러난 이 작품에서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하필이면 '청춘'이란 주제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청춘'이 상징하는 미래 역시 어떻게 물들여 버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볼 때 여기엔 모두 네 개의 청춘이 나온다.

 

 

 

 전범국가로써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란 측면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먼저 일본의 패망이 더욱 짙어지는 시기에 청춘을 보낸 '야부키 데이스케'. 다음으로,  군부가 이기적 욕망으로 일으킨 전쟁에 그저 가해질 위해가 두려워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편승해 버렸고 내내 자신 또한 그 가담자 라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청춘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가사오카 미치타로' 그리고 전범 국가의 기억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사오카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면서 더욱 커다란 이기적 욕망으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만 달려가는 망각으로 더 많은 과오를 쌓아가는 청춘을 대변하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의 아들, '가사오카 도키야'. 마지막으로 패전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반성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태의 악습과 부조리를 답습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에 대해 냉소하지만 결국 행동으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냉소를 표현할 뿐인 청춘을 대변하는 야부키 데이스케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 이렇게 넷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가 굳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청춘을 이렇게 병렬적으로 놓고 보여주는 것은 전쟁에 뛰어들었던 유일한 청춘인 '야부키 데이스케'가 묘사했던 일본과 그의 아들 야부키 에이지(그는 소설에서 유일한 '십대'이기도 하다.)가 살고 있는 일본이 과연 다른 것인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는 소설에서 오로지 이 부자(父子)간의 대화만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입증되는데 자꾸만 일탈로 엇나가는 야부키 에이지에게 아버지 야부키 데이스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스무 살이 되면 무조건 전쟁에 끌려 갔었다. 전쟁에 끌려가면 살아 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고작 이십년 밖에 되지 않는 인생이었어. 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았어. 죽음만을 짊어진 청춘이었다."(p.231)

 

 그 전에 야부키는 아들에 대해 걱정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만큼 고민이 많겠지. 우리 세대는 그런 고민은 전혀 없었잖. 오래 살아봐야 스무 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스무 살이 되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했지. 그런 사고가 머리에 박혀 있었으니 고민할 틈도 방황할 여유도 없었지.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인생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분명했어. 제 인생인데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지."(p.223)

 

 이제 막 피어나려는 청춘에게 죽음만을 짊어주었던 전범국가로서의 일본. 하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청춘들이 믿었던 대로 거창한 이념에 있지 않았다. 결국엔 오로지 군부 자신들만의 권력욕과 탐욕에 있었음이 야부키의 전우(戰友)였던 아키토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한 몸 바칠 수 있어. 하지만 요즘 특공대(이 특공대가 바로 가미가제 특공대다. 야부키도 바로 이 특공대 소속이었다.)는 군부의 위안거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우리는 인간으로 죽는 게 아니라 일개 병기로서 던져져 죽는거야(p.258)"라고 곧잘 말했던 아키토가 자살 공격에 나섰지만 내내 기체 결함을 이유로 돌아오자 이를 의심했던 군부는 그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그리했던 것임을 밝혀내고 아키토의 약혼자 스미에를 조사랍시고 불러내어 자신들이 보는데서 비인격적으로 발가벗겨서 결국 그 성적 수치심으로 자살하게 만든다. 그리고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키토가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로 복수를 위해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해 오자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저격 명령을 내려 버린다. 이렇게 스미에에 대한 군부의 저열한 인면수심적 태도와 아키토의 저격 명령에서 나타난 오로지 자기 목숨만 구하고 보자는 치졸한 모습을 통해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성격을 단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어리석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목적을 위해 갓 스물의 청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본을 또한 규탄하는 것이다.

 

 

 3. 통렬한 속죄의 요구...

 

 하지만 모리우라 세이이치에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건 과거에 그토록 커다란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통렬한 자기 비판과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전쟁이 아로새긴 아픔을 그토록 절절히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그저 한국 전쟁이라는 경제적 특수가 가져다 준 과실에만 취한 나머지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고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소설의 곳곳에서 피력한다. 그래서 그러한 무비판적 편승이 어떤 미래가 가져왔는가? 그것을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특히 야부키 에이지의 눈으로 드러낸다.

 

 일류의 덧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동안 계속될 치열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낙오된 것이다. 에이지는 부모님의 기부금으로 도내의 이류 사립 고등학교에 2차 모집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1학년 1학기 때까지는 이곳에서 어떻게든 뒤쳐진 것을 만회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친구들은 낙제생으로 '어차피 우리는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어딜 가도 성적순으로 처음부터 선을 그어놓으니 열등감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교사들도 낙제생들을 격려해 새 출발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열정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학원이나 과외 아르바이트에 정신이 팔려있었다.(p.236 ~ 137)

 

  반성없는 과거가 가져온 것은 이런 것이었다.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던 그 때의 선은 여전히 남아 이제는 학력이란 이름으로 청춘들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그 때의 청춘들이 신체적으로 죽었다면 지금의 청춘들은 낙제생이란 라벨이 붙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있었다. 그 때 비국민 스미에를 바라보았던 시선 그대로 낙제생으로 라벨 붙여진 오늘의 청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국민이 아닌 자들이 그대로 사물이었듯이 오늘의 청춘들 또한 한 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오늘의 일본에서 그대로 겹쳐지는 황당한 이상에 집착해 파멸로 향해가던 그 때의 일본을 본다. 그리고 그 오만한 독선과 잘못된 망상 아래 점점 주검이 되어가는 청춘들을 양산했던 그 때와 지금의 일본이 같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과거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속죄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바로 이러한 속죄가 현재 일본에게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 이 '청춘의 증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한 때의 잘못을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는 가사오카 미치타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사오카 미치타로에 대한 '비겁하다'는 그의 연인 아사코의 통렬한 비판은 사실 제대로 된 속죄없이 전범국가임을 오로지 망각하려고만 드는 일본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아사코조차 나중에 보여주는 모습처럼 정작 비겁하다고 비판하면서도 말로만 그리할 뿐 아무런 실제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과거의 과오를 반복할 뿐이다. 참다운 속죄는 어디까지나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며 모리우라 세이이치는 일본에게 바로 그런 속죄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가사오카에게 평생 속죄의 죄책을 짊어지도록 만드는 원흉인 구리야마는 결국 일본이 그런 정도의 속죄를 하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구리야마는 야부키의 전우였던 아키토의 스미에를 자살로 몰고간 장본인기도 하다. 야부키에게 비극을 주었던 구리야마가 다시금 가사오카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이 구리야마는 전범이면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같은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과거의 향수를 일깨우는 존재가 되어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움을 구걸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또 다른 한 청춘의 삶마저 일그러지게 만든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병원균과도 같다. 곳곳마다 출몰하여 타인의 인생에 짙은 어둠의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비극은 내내 반복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그렇게 구리야마는 왜 속죄가 일본 스스로에게도 구원이 되는지 거꾸로 잘 보여주는 존재다. 그런 존재는 구리야마뿐만이 아니다. 가사오카의 처 도키코나 아사야마 유미코의 남편 기다 준이치도 과거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와 망각에의 강요가 결국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될 지 잘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사실 소설 '청춘의 증명'에서 인물들이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오직 단 한 가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통렬한 반성, 그것이다. 

 

 

 이렇게 실천에 기반한 진실된 속죄를 그토록 요구하는 '청춘의 증명은 오늘날 일본의 모습을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새로이 출범하는 아베 정권은 전범국가의 반성 속에서 규정되어진 자위대는 오로지 자국이 침범받았을 경우에만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상의 전쟁 포기 조항인 일본 헌법 9조와 전범들의 위폐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부터 들고 나왔다. 이는 다시금 저 '대동아공영'을 부르짖던 시대로 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단 한 번도 진정한 속죄가 없었던 일본이 그대로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음은 결국 행동이 수반된 속죄가 없이는 과거의 악업을 반복할 뿐이다라는 '청춘의 증명'이 보여준 그대로가 아닌가 말이다. 어두운 과거가 교훈을 배울만한 역사로 남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속죄가 이루어졌을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 일본이나 또 우리나라에서 보듯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이 현재에 다시금 생생히 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어둔 과거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 반복을 원하는 자들은 구리야마처럼 오로지 그 어둔 과거 속에서 이권을 얻을 수 있었던 자들 뿐이다. 그 반복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청춘의 증명'을 통해 성찰적 무장(武裝)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덧붙여,

 

 '청춘의 증명'은 이번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때문에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여기 적어둔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중에 '비트'가 있다. 청춘만화의 대표작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인데 처음 읽었을 때 인상이 강하게 남아 아직도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남주인공이 여 주인공에게 경매 노예로 팔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아르바이트 비를 받아가며 해 주는 것인데 그녀가 요구했던 것은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관람하고 그 결과와 거기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억해 오는 것이었다. 남주인공이 그렇게 보고 온 것을 여주인공에게 들려주면 그녀는 마치 자기가 그걸 진짜 가서 본 것인양 자기의 입시 경쟁자들에게 말하여 별로 노력을 안한다는 인상을 주어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는데 별다른 표현 없이도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느끼게 해 주어 참 대단한 에피소드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청춘의 증명'을 보니 그 장면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소설 속 유일한 십대인 야뷰키 에이지가 같은 반의 수재를 위해 그와 똑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것이 77년이니 90년대에 나온 '비트'가 이를 표절한 것은 분명하다. 나름 아주 인상깊었던 장면이 이렇게 표절의 산물이라니 씁쓸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은 표절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더욱 그 뒷맛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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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무라의 증명 3부작의 인간과 야성은 사두었는데 읽지 못했어요. 어쩌면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안 읽을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재밌을 것 같은데 한국 소설 읽기도 벅차요.
어, 그러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년엔 행복하고 힘찬 일만 가득하길. 헤르메스님 만나고 서로 글 읽고 댓글 달고 인사 나누고 교감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도 쭉... 들를게요~ 항상 반가이 맞이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ㅎㅎ

ICE-9 2013-01-05 23: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라면 정말 한국 소설 읽기만도 벅찰 것 같아요. 아참 나도 이번에 소이진님이 추천한 한강 읽고 있어요. 리뷰대회 도서이기도 해서 덥썩 들게 되더라구요^ ^
소이진님도 2013년 정말 뜻깊은 한 해가 되길 빌게요. 추구하는 문학에서도 원하는만큼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길 바라겠습니다. 저의 VIP이신 소이진님. 저 역시도 올해 더 많은 교감을 위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신의 1 - 송지나 장편소설 신의 1
송지나 지음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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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힐링'이 대세다. 세계 성인 자살률 1위의 나라답게 얼마나 많이들 아프고 힘든 것인지 세대를 막론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여기서는 위로, 저기서는 치유. 그렇게 모두들 '힐링'을 찾는다. 이렇게 모두가 아프고 힘들다는 것. 그렇게 오늘날 고독과 좌절, 무기력과 우울증이 흑사병처럼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진실을 거꾸로 드러내는 듯 하다. 그건 그 힘듦과 아픔의 원인이 개인에게서 비롯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개인을 넘어선, 뭔가 보다 구조적인 것.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거하고 있는 전체 시스템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 징후는 이미 몇 년 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서 드러났다. 그건 우리가 익히 배워왔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과 현실적인 세상이 보여주는 괴리감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내가 믿었던 가치들이 세상의 폭력과 탐욕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내가 믿어왔던 것은 무엇인가?' 혹은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망연자실함 가운데 떠올랐던 질문들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그 때서야 세상이 가면을 벗고 그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우리가 믿고 생각했던 것은 한낱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나타난 멘토에 대한 열풍도 사실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풍의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는 내가 꿈꾸는 세상과의 간극은 매일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켜온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내가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사람으로서의 멘토가 아니라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나와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멘토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기적 탐욕'이라는 한가지 색깔로 채색하려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지키려 스스로 영토를 만들어 나갔던 흐름이 일종의 '멘토' 찾기의 열풍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은 안다. 진정으로 제도적 힐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개인의 힐링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마치 환부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진통제만 먹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환부를 도려 낼 진정한 '한 방'의 힐링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다렸고 새끼 손가락을 수줍게 구부리듯 서로의 동지됨을 확인하며 서로 위로하고 지탱해주며 같이 거세게 내리는 세상의 비를 맞으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을 견뎠고 이제 그 긴 겨울의 끝이 비로소 보이는 듯 했다. 대선이 다가온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싱크홀이 생겨버린 마음에 술을 들이부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다음 날.

 

 세상의 모든 소음과 격리된 채 송지나의 '신의'를 읽었다.  허망한 마음에 숙취까지 가세하다보니 그 날 오전의 내 시야는 온전하지 못했었는데, 새삼 그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신의'란 드라마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송지나씨가 쓴 드라마라서 관심은 있었지만 그 때는 정말 일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설로 나왔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뒤에 소설로 나오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 적당히 신기했고 그래서 한 번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인데 그 때까지 난 제목의 '신의'가 이 '神醫'인 줄 알았다. 소개에서 여주인공이 고려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로 불린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새삼스럽게 들여다 본 제목의 한자는 그게 아니었다. 믿음을 뜻하는, 정확히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信義'였다.

 

 

 

 

 왠지 글자가 뭉클했다. 그것만큼 또 무가치하게 버려진 말은 또 없다고도 생각되었다. 사실 알고보면 15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은 퇴색되어버린 그 말이 지닌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오로지 한가지 바람으로 기꺼이 한 표를 던졌다고 할 수 있었다. 선거 때의 공약이 표를 끌어모기 위한 홍보용에 불과하다며 당당하게 말을 바꾸는 세상이 아닌. '국민의 뜻대로' '국민을 위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등등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가 엄마를 찾듯 '국민', '국민' 하지만 하는 걸 가만히 보면 막상 그 '국민'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세상이 아닌. 말이 제 뜻 그대로 쓰이며 그 말로 이루어진 '법'을 비롯한 약속들이 엄중히 지켜지는, 그렇게 '신의'가 온전히 제 무게를 갖는 세상을 바라면서 던진 표였다. 가느다란 하나의 지류지만 그대로 꿋꿋하게 세상의 한파를 견뎌오던 사람들이 모처럼 서로 만나 하나의 커다란 강줄기가 되어 바라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물줄기를 열어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저 4대강에 수도 없이 널린 '보'들 처럼 현실의 장벽은 강했고 우리들은 신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폐허를 남겼는지 쓸쓸히 지켜보아야 했다. 물론 그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뭔가 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잠시 잊게 만들었을 뿐.

 

 소설 '신의'의 배경은 고려말이다. 원나라를 등에 업고 기철이 왕보다 더 큰 권세를 부리며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아부 떨기 바빴던 시기. 권력 앞에 이념은 빛을 잃고 오로지 껍데기로만 남아 오히려 그들의 홍보를 위해 쓰이던 시기. 지식이라는 것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신념을 굳건히 하고 낮은 자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출세와 탐욕을 위한 아부와 타산 그리고 협잡을 위해 쓰이던 시기. '신의'라는 것이 패배한 군대의 깃발만큼이나 갈가리 찢겨진 시기. 그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 그대로였다. 송지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소름이 끼친다. 이런 인간들은. 기철의 뒤를 따르며 최영은 연회장을 채운 인물들을 둘러본다. 하나 더 먹고, 하나 더 가지는 것이 생의 전부인 이것들. 타인의 아픔 따위에는 무감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는 후안무치한 것들. 세상을 파먹는 좀벌레 같은 것들.

 문제는 이러한 것 몇 명 때문에 수천, 수만 명의 가엾은 것들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 보니 그 가엾은 것들 또한 후안무치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염치도 예도 사람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어진 존재들이 눅눅한 곰팡이처럼 번식하며 세상을 점점 뒤덮고 있었다. (P. 274~ 275)

 

 아아... 이건 고려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송지나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곳을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이번 대선을 통하여 똑똑히 보게 된 모습이기도 했다. 가라앉았던 숙취가 다시 올라오고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울렁이면서 기어이 억눌렀던 눈물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하늘 문을 통해 강림할 신의(神醫)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주인공 최영처럼 냉소적이 될 것인가? 갈피는 잡기 힘들고 마음은 그저 보물을 잃어버린 상자처럼 허망하며 그 빈자리 가득 상실로 인한 아픔만 들어 찰 뿐이다. 소설을 읽고 나는 알았다. 이 소설은 송지나 개인이 견디기 위해서 쓴 것임을. 스스로 힐링하기 위해 쓴 것임을...

 공민왕에게 '그런 우리와는 다른 왕이기에' 더욱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최영의 말에선 공약 따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현재 지도자에 대한 냉소를 보았고 끝까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최영의 모습에선 송지나가 그러한 것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 열망을 보았다. 나도 최영에게 빙의된 송지나와 같은 냉소와 열망으로 견뎌왔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여주인공 은수에게 칼을 맞고 죽어가는 최영만큼이나 아프다.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꽤나 예언적이다. 하늘 문을 통해 데려온 은수처럼 우리도 구원이 도래하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은수에게 칼을 맞은 최영과 똑같이 품었던 희망만큼 아프고 꿈에 대한 믿음의 크기만큼 쓰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견뎌가야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그 뒤에 더 많은 날들이 앞으로 남아 있기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칠흙 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을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믿는 건. 미래의 전망 따위는 무가치 하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으면 정말 그런 미래가 오고야 만다. 하지만 현재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면 그 미래를 바꾸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 미래의 형상은 어디까지나 오늘 행하는 '조형'에 달려있다는 게 바로 내가 아는 바고 믿는 바다. 그러니 버티련다. 좀 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단단히 지탱하련다. 은수와의 약속을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구현과 똑같이 여겼던 최영처럼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나 스스로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련다. 물론 길은 멀다. 최영에겐 기철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오히려 이런저런 감정낭비로 소모할 시간이 없음을 더욱 느낄 뿐이다.

 

 " 내 이름을 무시하는 자, 누구야 막아 봐."(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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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2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글은 정말 보물 같은 리뷰입니다...
지금까지의 리뷰 중에서 가장 감성적이면서 직설적이고 아픈 글인걸요.
아... 어서 기운 차리죠!

'힐링'하니까 생각난 건데, 얼마전 페이퍼를 쓸 생각만 한 게 있어요. 그러니까 '힐링'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우리를 둘러싼 질문과 대답이, 그것들이 전부 힐링되지 못할 것이란 것이라고. 아, 복잡하네요.

ICE-9 2012-12-31 20:4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을 생각하면 오늘의 이 패배가 더욱 뼈져리게 느껴지네요. 소이진님에게 얼마나 힘겨운 미래가 될지 상상도 못하겠어요. 아무튼 어서 기운 차리고 이 악물로 버텨봅시다. 불끈!

아이리시스 2013-01-1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드라마를 참 좋아해서 책도 읽어볼까 했는데(송지나 작가의 인터뷰도 봤고요) 헤르메스님 리뷰가 정말 좋아요. 고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도 맞고요. 아마 드라마에서는 특성상 사랑이 빛났지만 결국은 시대를 엿볼 수 있었어요. 공민왕의 고뇌가 고스란히 주제가 되고, 나라와 신하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 보면 내가 왕이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들을 다 좋아하거든요. 저는 '신의'의 신이 그 '신'인줄 몰랐어요. 관심이 없었어요. 중의적으로 읽힐 거라고 생각만 했는데.. 드라마는 각자의 역할에 빙의해야 쓸 수 있는 작업이고, 소설은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 좋다던 작가의 말에 소설도 드라마만큼 좋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는데 저는 일부러라도 책 구해서 볼 것 같아요^^

ICE-9 2013-01-26 01:42   좋아요 0 | URL
와! 아이리시스님 반갑고 또 좋다고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
저도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신의'가 방영되었을 때 꼭 보고 싶었는데 놓쳐버려서 그 아쉬움에 소설판을 잡았는데, 리뷰한대로 이 소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놓쳐버린 드라마가 무진장 아쉽게 여겨지더군요. 하지만 일단 소설로 시작했으니 드라마를 보면 그 느낌을 잃어버릴까봐 소설을 다 보고 볼 작정인데 그래서 더욱 뒷 이야기들이 빨리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

abante10 2013-07-2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거의 잘 안 보는 제가, 필 꽃혀서 가슴 아프게 이 드라마를 봤었지요...그 때 가을... 대선에 대한 희망을 안고서...설마 바뀌겠지 설마..하지만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결과를 보고서, 저는 오히려 님과 반대로, 책으로 나오면 사야겠다는 결심이 대선멘붕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버렸어요.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했고 더 이상 신의에게도 내 맘을 둘수가 없었죠. 가끔 문득문득 떠오를때면 애써 무시했죠. 현실이 시궁창인데 무슨 드라마니 소설이니...하지만 폭염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여름 어느날 문득 신의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들어온 이곳에서 님의 글을 읽고 또 대성통곡을 하고 싶어지네요...가슴이 꽉 막혀 있는 돌맹이는 언제 부숴질까요...ㅠㅠ

ICE-9 2013-07-31 23:34   좋아요 0 | URL
abante10님의 댓글을 읽노라니 이 리뷰를 썼을 때 먹먹했던 느낌이 다시 오롯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더욱 어둠이 짙어지고 희망 역시 한줌도 채 안남은 듯 하여 마치 빈상자처럼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요즘은 버티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은 그렇게라도 버텨야겠구나 이겨내야겠구나 마음을 다잡으면서... 언젠가 가슴을 짓누르는 돌맹이가 완전히 부서지는 그 날까지 avante10님도 부디 잘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어번던스 - 혁신과 번영의 새로운 문명을 기록한 미래 예측 보고서
피터 다이어맨디스.스티븐 코틀러 지음, 권오열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당신이 만일 공학도라면, 그것도 로켓 공학도라면 누구보다 빨리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안자이 X- 프라이즈 프로그램에 응모하는 것이다. 안자이 X- 프라이즈 프로그램은 X-프라이즈 재단이 매년 개최하는 민간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우주 여행 공모전으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NASA와 달리 그렇게 천문학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사람을 우주 여행시킬 수 있는 방법을 실제적으로 찾아내는 이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는데 그 상금이 무려 천만달러나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4년 10월 4일. 버트 루탄과 그의 투자자들은 스페이스 쉽 원으로 주최측이 요구하는 대로 2주 사이에 62마일 상공을 두 차례 비행함으로써 천만달러라는 상금을 획득했을뿐 아니라 민간 로쳇으로 최초로 우주여행에 성공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 X-프라이즈 재단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피터 다이어맨디스이다.

 이 책, '어번던스'를 보았을 때 그래서 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하나는 물론 공학계에서는 유명한 X-프라이즈 재단을 이끌고 있는 피터 다이어맨디스의 책이라 놀랐고 다른 하나는 이 책 역시도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처럼 낙관적인 미래관을 보여주는 책이라 놀랐다. 과학계에서 이름 높은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성격의 책을 냈다는 것은 바야흐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어쩌면 '어번던스'에 우러난 낙관적인 미래관은 안사이 X-프라이즈 프로그램에 비추어 볼 때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 공모전 자체가 추구하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도 우주 여행이 가능하다는 생각 아래에는 테크놀로지 앞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신념이 분명 바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 '어번던스'도 바로 다가올 눈부신 테크놀로지의 발전 앞에서 우리가 우려하거나 비관해야 할 것은 그리 없을 것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제목 그대로 풍요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바라보는 풍요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 저자의 말을 직접 빌어와 본다면 그들이 바라보는 풍요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능성의 삶을 제공하는 문제다 (...) 모든 사람이 아등바등하며 그날그날 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꾸고 행동하는 데 자신의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세계다.(P. 35)

 

 '어번던스'는 바로 이러한 풍요로움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잠재성들을 무한히 펼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들의 풍요로움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우리에게 찾아왔거나 앞으로 찾아올 기술들이 어떻게 우리를 무한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로 인도할지 이 책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말을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현실을 고려하자면 미래는 더욱 더 비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우리에게 각인된 인지 편향에 대해 설명한다.

 

  인지편향이란 우리가 바깥의 어떤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향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이미 존재하는 우리 내부의 선입견을 스스로 진실이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이러한 인지편향이 생겼냐 하면 그건 우리가 단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 결정은 결코 쉽지 않다. (...) 인간은 좀처럼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하며 모든 결과를 알 수도 없다. 설사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전체 데이터를 분석할만한 시간적인 유연성도 신경학적인 능력도 없다. 오히려 우리의 결정은 제한적이고 종종 믿을 수 없는 정보를 기초로 내려진다. 더 나아가 뇌의 처리 능력 부족이라는 내적인 한계와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외적인 한계의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황을 위한 문제 해결 도구로 '어림법(HEURISTICS)'이라는 잠재의식적 전략을 개발했다.(P.59)

 

 바로 이러한 쉽게 말해 우리 무의식에 존재하는 어림잡아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인해 인지편향이 생기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들이 가장 많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확증편향'이다. 즉 자기의 선입견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찾거나 해석하는 것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우리에게 널리 유포된 미래에 대한 비관론은 바로 이러한 대표적인 확증편향에 불과하다고 본다. 여기엔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어 대중을 통제하에 두려는 권력과 미디어의 역할까지 더해져서 지금 전개되고 있는 테크놀로지들이 정말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 그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번던스'는 그러한 우리 눈에 '편향'으로 씌어져버린 콩깍지를 벗겨내어 기술이 가져다 줄 미래의 참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미치오 카쿠의 '미래의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의료와 교육 분야 더하여 민주주의까지 특히 어떤 혁신들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자세히 보여준다.

 

 읽으면서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은 교육 분야였다. 거기서 나의 편향을 깨뜨렸던 것은 '게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언어학자 제임스 지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는데 제임스 지는 게임을 통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당당히 이렇게 주장한다.

 

  "게임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진지하고 깊은 학습을 시간낭비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P.298)

 

 왜냐하면 그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관찰해 본 결과 그 과정이 그대로 학생들이 오래도록 어렵고 복잡한 학문을 배우는 과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도 잘 알듯이 똑같은 과정인데도 학습에 있어서 아이들은 쉽게 지치는 반면 게임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지는 게임이 주는 이러한 학습의 유용성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게임은 암기 위주의 구식 교육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위기 대처 능력이나 어떤 것을 경영하고 기획하며 전략과 전술을 짜는 능력  그리고 창의력과 혁신능력까지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비단 제임스 지의 주장만은 아니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미국 내에서 이런 교육방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신시내티주의 데이스쿨을 비롯하며 많은 학교들이 이미 그 방법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들에게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게임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어릴 때 부터 부모와 학교로 부터 형성된 인지편향이 어쩌면 게임이 가지고 있을 긍정적인 측면까지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서 피터 다이어맨디스가 왜 첫 머리부터 자기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인지편향에 대해서 설명했고 그 인지편향을 후반의 여러 사례들을 통하여 부수어나가는지 그 이유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피터 다이어맨디스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좀 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보의 발자국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아버린 인지 편향으로 닫혀진 마음 때문이며 바로 그 마음을 열어야 그 발자국들을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임을 말이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요 마음이다. 피터 다이어맨디스가 풍요를 무엇보다 가능성으로 정의한 것도 현명했다. 수전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독재자 역시 아무리 자신에게 권력이 많아도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르며 끊임없이 "좀 더!"를 외친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수전노는 오로지 돈 그리고 독재자는 오로지 권력 그렇게 획일적으로 오직 하나이며 다른 가능성들은 닫혀있다. 그들이 끊임없이 굶주림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닫혀진 가능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볼 수 없기에 언제나 남아있는 간극만을 느끼게 되며 그 모자람 때문에 끝없는 허기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풍요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다. 보다 다양한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보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나날이 풍요로울 것이다.

 

  결국 풍요란 것도 알고보면 파랑새처럼 우리 곁에 있었다. 다만 닫혀진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했을 뿐...

 

  알고보면 '어번던스'를 읽고나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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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2-2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정말 다양하게 읽으시는군요...
감탄 중입니다.... 평안한 연말되시고, 즐거운 일 담뿍 생기는 새해 되세요.

ICE-9 2012-12-29 02:28   좋아요 0 | URL
제가 원래 잡식성이에요^ ^ 그러고보니 정말 올해도 얼마남지 남았네요. 달여우님도 잘 마무리 하시고 더욱 행복한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
 
감상소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3
미하일 조셴코 지음, 백용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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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소설'을 읽고나자 갑자기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였다. 언젠가의 밤, 그 친구는 입원한 병실에서 간호에 지친 그의 가족들을 잠시 쉬게 하느라고 홀로 그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내 손을 부여잡았었다. 그리고 숨 가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파... 도와줘..."

 
  당장 뛰어나가 간호사를 불렀다. 당직 의사가 달려왔고 휴식을 취하던 그의 가족들도 들어왔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고 죽은 듯이 자는 친구를 난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새벽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까지 내내 나를 잡았던 친구 손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라는 거대한 밀물은 나를 그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일상으로 떠밀려갔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그 손의 감촉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삶이란 건 무정하다. 또한 잔인하다. 언제나 예고 없이 이별을 가져다주어 참회할 순간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내게 있었던 그 많고 많은 평범한 날들 중 하나였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고 학생식당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오후 강의에서 살짝 졸았던 것까지도 똑같았던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 뒤, 도서관으로 가서 기말 리포트 준비를 위해 자료 복사를 했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도서관의 거대한 유리창으로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햇살이 책상 위로 자신의 붉은 나신을 드리우는 것을 보면서 난 그 소식을 들었다. 친구가 떠났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누군가 세상 전체를 진공관을 씌워버린 듯 정적에 휩싸여 버렸다. 아니,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려왔다. 흐느낌. 그리고 울먹이느라 띄엄띄엄 어렵게 이어지던 목소리.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마치 칼바람 앞의 문풍지 같았다. 그 손은 그날 밤 친구가 도와달라며 잡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 떨림은 질책으로 들렸다. 너는 어찌하여 그 날 밤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만의 일상에 골몰하느라 그를 무심히 잊어버리고 있었느냐 하면서 잔뜩 꾸짖는 것 같았다. 좀 더 신경 써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고 그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해 용서받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죄책감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때로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이 가진 비정한 손톱이 할퀴어버린 깊은 상흔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친구가 떠난 순간을 회상하면 더욱 괴로웠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그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난 밥을 먹으면서 오늘은 반찬이 별로네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게 사람을 정말 치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영원한 상실의 순간에서조차 동물적 일상 행위를 반복하게 만듦으로써 나를 더욱 더 구차하게 만들고 그런 내 뒤에서 삶이란 것은 크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가버린 친구가 생각났고 그 때 못했던 참회를 위해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건 이 소설에서도 그 때 내가 들었던 삶이 내는 비웃음 소리를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상소설'은 여덟 개의 단편들이 모여 있다. 그렇게 그 각각의 단편들의 주인공이 되는 존재의 삶을 하나씩 담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삶을 만만하게 본다. 그들이 가진 능력에 비해 현실은 무기력하다고 생각한다. 피아니스트 아폴론 세묘노비치도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반 이바노비치도 오케스트라에서 트라이앵글을 연주하여 세상에서 지극히 사소한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세상 변화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보리스 이바노비치 코토페예프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한결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패배한다. 자기가 하기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조율 가능해 보였던 삶은 그들이 매달리려 하자마자 그들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어 그들을 압도해 버린다. 결국 그들이 듣게 되는 건, 주저앉은 자신의 등을 짓밟고 서서 차갑게 웃고 있는 삶의 비웃음 소리뿐이다. 이 소설엔 그런 비웃음이 가득하다. 강인하고도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 무기력한 인간들을 가지고 놀면서 내는 야멸찬 비웃음 소리가 말이다. 듣기에 이 소설은 러시아 풍자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평가받게 된 것 역시 이 책에 가득한 비웃음 때문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그 비웃음 속에서 삶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서글픈 초상을 확인한다. 절망한 세묘노비치는 무덤지기로 살다 생을 마감하고 이바노비치는 그 모든 재산과 아내까지 빼앗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삶의 잔인함은 아무리 사소한 직분을 맡았다고 해도 내버려두지 않으며 '라일락 꽃이 핀다'의 볼로딘은 그래도 이 세상 사랑만큼은 고귀한 가치라 믿었으나 결국 확인하게 된 것은 사랑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이 고작 타산의 결과일 뿐이며 결국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낙담한다. 그렇게 그들은 패배하고 굴종하며 타협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이라는 장벽을 뚫고 나가겠다고 작심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는 건 그들 모두가 자동차 충돌 실험에 쓰이는 오로지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진 '크래쉬 테스트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했다. 이 소설은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연약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시관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연약한 크래쉬 테스트 더미들... 

                        그 연약함 때문에 서로를 껴안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 관람을 마쳤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비관이 아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은 확인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친구에게 새삼 참회의 편지를 써야겠다고 느꼈던 것도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셴코는 우리의 연약함이 종착지가 아니라 사실은 출발지라고 말한다. 즉 이토록 우리가 연약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홀로라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셴코는 말한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때문에 '무서운 밤'이란 단편에서 보리스가 하는 이 같은 호소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거기서 삶이 숨긴 잔인한 진실을 우연히 알게 된 보리스가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걸 듣게 된다.
 
"저... 제발 부탁인데요.... 이 순간 한 인간이 파멸하고 있습니다..."(p. 121)
 
  호소는 연약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어려움을 홀로 해결할 수 없기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 밤 내 손을 부여잡으며 도움을 호소했던 친구처럼 말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조셴코는 바로 여기서 우리가 연약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더욱 더 적극적이 될 것이다. 조셴코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토록 연약함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난 그 친구에게 참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잊고 무심히 내버려두었던 나를 말이다. 너무나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에 과연 친구가 나를 용서해 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미안함 때문에라도 앞으로는 더욱 다른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오늘 밤은 아주 긴 편지를 쓰게 될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 연약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또 없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 후회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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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1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안그래도 오늘 헤르메스님 생각했단 말이야!
이렇게 제 생각과 알맞은 시기에 찾아와주시니 반갑습니다... 헤헤
일단 댓글 먼저 달고 글을 읽어야지. 저도 마침 오늘 리뷰 하나 쓰려구요.

ICE-9 2012-12-17 03:26   좋아요 0 | URL
와! 그래도 절 잊지않고 생각해주는 건 소이진님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소이진님 리뷰를 읽지는 못하겠고 내일(라고 했지만 벌서 오늘이네요.) 얼른 달려가 확인할게요.^ ^

2012-12-1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2-2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마음 아팠습니다.
오래도록 남아있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니까요. 다들 그렇게 도움을 주고 받을 때도 있고,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고, 그게 인간인 듯 합니다. 편지를 쓰셨나요? 긴 편지가 되었을거 같아요.

헤르메스님, 그림은 헤르메스님께서 그리시는건가요?
살짝 뒤틀린 등짝이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

ICE-9 2012-12-29 02:27   좋아요 0 | URL
와! 달여우님 정말 반가워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을만 되면 이유없이 마음이 아려와요. 그동안 저도 모르게 널어놓은 아픔은 또 얼마나 될지 생각도 하게 되고... 그 탓인지 편지 정말 쓰기가 힘들더군요. 아직도 제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 미안함의 크기에 새삼 놀랐습니다. 쓰고 지우고, 때로는 구기고, 멍하니 있다가 좀 울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

네. 그림은 제가 그렸는데, 어떻게 하면 껴안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이게 될까 고민하다가 저렇게 그렸는데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시나요?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