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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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확실히 2000년의 9.11 이 미국 문화 전반에 가한 충격은 대단했다. 포스트 9.11 이란 말이 어느새 비평계의 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로 미국의 문화, 그것도 영화나 장르 소설을 비롯한 대중 문화는 분명히 9.11 의 전과 후로 그 경계가 나뉘게 되었다. 다시 말해 9. 11의 이후에 미국에서 생산된 대중 문화의 산물들은 그 영향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즉 9. 11 은 문자그대로 트라우마였다.

 

 그것이 트라우마라는 징후를 보이고 있음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슈퍼 히어로 최고의 걸작으로 생각하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 2'와 '다크나이트'는 9. 11의 강박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들이 영웅으로 겪는 곤경과 지게 되는 책임은 9. 11 이후의 미국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으로서의 대안에 대한 간접화법이기도 했다. 그건 소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폴 오스터는 최근에 나온 '보이지 않는'이란 소설에서 9. 11이 안겨준 상실과 고통을 과거의 회고를 통해 그 원인의 궤적을 복기해 봄으로써 치유의 통로를 찾는다. 이렇게 과거로의 회귀는 포스트 9. 11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라 할만한데 바로 이것이 트라우마를 가진 자의 증상이라서 흥미를 끈다.

 

 트라우마는 절대 치유되지 않는 상처이며 지워질 수 없는 얼룩이다. 그것은 불현듯 엄습해서 현실을 뒤흔들어버리는 그저 압도될 수 밖에 없는 아픔이다. 그 환기되는 아픔을 통해 트라우마는 현재라는 시간 자체를 정지시키고 당하는 주체를 늘 과거로 되돌린다. 그는 그 연장된 과거의 시간에서 도저히 달아날 수 없다. 그렇게 그는 현재를 살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 현재란 단순한 환영에 불과하고 정말로 그가 살아가는 건 영원한 과거일 뿐이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압도이며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몰입이다. 바로 이와 똑같이 과거에서 그 원인을 되새겨보려는 소설들 역시도 과거로 돌아가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건 필연이요 숙명이며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 비슷하게 묘사된다. 9. 11 의 트라우마성은 이러한 유사성에서 더욱 확증된다.

 

 폴 오스터 만큼 9 .11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스티븐 킹이다. 2000년 이후에 나오는 그의 소설들의 중심엔 무엇보다 9.11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실 그의 모든 소설들은 9. 11 에 대한 이러저러한 사유의 지점들을 나타낸다. '셀'은 그만큼 똑같은 공황과 미국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던 9. 11의 은유이며 그걸 보다 공동체 중심의 시야로 넓혀 살펴보려 했던 것이 '언더 더 돔'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 그야말로 9 . 11 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음을 뚜렷이 드러내는 작품은 바로 2008년에 나온 단편집, '해가 저문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이나 그 후엔 은유나 비유로 삽입되었던 9 .11 이 이 단편집에서만큼은 그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첫 단편 '윌라' 부터 마지막 단편 '선셋노트'까지 거기서 스티븐 킹이 이야기 하는 것은 9 .11 이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우린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바뀌었으며 이제 그 상처와 상실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야말로 정신분석가 앞에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그것과 더불어 사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담담히 고백하는 단편집인 것이다.

 

 이 '해가 저문 이후'에서 스티븐 킹은 9.11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할 말을 거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재의 아픔을 술회한 끝에 찾아오는 것은 이제 완전한 치유를 위해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폴 오스터 역시도 그랬다.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보이지 않는'는 이전 두 작품에서 현재 진행중인 상처와 상실을 충분히 드러낸 뒤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스티븐 킹도 그와 동일한 궤적을 보여준다. 그렇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상처를 객관화하여 온전한 치유의 대안은 무엇인지 탐색하는 작품이 바로 2011년에 나온 '11 / 22 / 63'인 것이다.

 

 

 제목의 '11 / 22 / 63' 은 존 F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오스왈드에 의해 피살당한 날이다. 모든 미국인들이 미국의 꿈이 죽어버린 날로 기억하는, 한마디로 대참사의 날이다. 제목이 이렇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로 된 것은 바로 소설의 이야기가 어떤 특정의 공간이 시간 여행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미국 역사가 이토록 암울하게 흘러가게 되어버린 결정적인 날이라 여겨지는 1963년 11월 22일에 일어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단적으로 말해 '과거로 돌아가 역사의 비극을 막는다'는 이 이야기는 그대로 폴 오스터가 '보이지 않는'에서 보여주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여기서 존 에프 케네디의 죽음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 9. 11을 막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스티븐 킹은 '해가 저문 이후'의 후기에서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9. 11 만큼이나 미국 역사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비극으로 꼽았었다. 스티븐 킹에게 존 에프 케네디 암살은 9. 11과 그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 동의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1/ 22 / 63'을 단순히 시간 여행자를 그린 소설이 아닌 '해가 저문 이후'에서 9 . 11이 남긴 현재적 상처들을 숨김없이 토해낸 스티븐 킹이 이제 그 아픔에서 어느정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 지금의 비극을 야기한 원인들을 되짚어 보고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이것이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가능한 대안을 탐색하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건 그저 구원의 도래만을 바랐던 그가('해가 저문 이후'에 일률적으로 흐르는 인물의 수동성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것들'과 'N'은 그 성향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단편들이다.) 이제 스스로 일어나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그래서 시간 여행이 하나의 공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스티븐 킹은 설정한 것이다. 스스로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주인공이 과거를 왜 고치려 하는가? 그리고 끈질기게 과거가 수정당하는 것을 막으려는 불가사의한 힘은 무엇인가? 과연 지울 수 없는 과거의 비극은 현재적 노력으로 봉합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등등의 작품을 읽는 사이 떠오르는 의문들 하나하나는 그대로 다시는 9 . 11이란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거대한 물음들의 조각들이며 이에 ' 11 / 22 / 63'이 보여주는 여정은 바로 그에 대한 스티븐 킹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소설은 그야말로 '사유의 네트워크' 라 할 수 있다. 여행의 풍경이 그저 객관적인 풍경이 아니라 사실은 나라는 주체와 풍경이라는 객체과 만나 어우러진 일종의 감성적 혼합물이듯 그대로 사유속의 여정이라 할만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 역시도 우리가 읽게 되는 건 온전히 그대로 스티븐 킹만의 사유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어 끊임없이 간섭하고 단락시키며 또는 수긍하거나 배척하는 우리네 사유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얼기설기 엮어진 테피스트리적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극되며 반성되고 성찰로 나아가는 소화의 과정을 스티븐 킹과 더불어 마치 '2인 3각'을 하듯이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고백했던 것. 그러니까 자신을 두고 뻐꾸기 처럼 남의 등에 달라붙어 기생하면서 사유를 살찌운다고 했던 것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스티븐 킹의 등에 달라붙어  우리에겐 어쩌면 강건너 불구경일 수 있었겠지만 미국 역사에 있어서는 일대 터닝포인트가 되어버린 '9 . 11' 이 정작 당사자인 미국인들에겐 어떤 것을 남겼으며 그들이 겪고 있는 현재적 아픔을 통해 어떤 미래를 향해 노력하는지를 그 사유의 흐름을 통해 알게되고 보다 우리 내면의 폭을 살찌우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을 추천한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소설에서 더욱 성숙해진 스티븐 킹은 분명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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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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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퉁이를 돌면 좁은 계단이 있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담배 냄새 가득한 그 계단을 올라가면 건물 4층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모르모트가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어둡고 칙칙한 그 곳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름도 아니나 다를까 '블랙'.  그래서 우리는 들어가면서 스스로 '어둠의 자식들'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보기엔 그래도 그 곳은 명색이 카페였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대화를 위해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었다. 뭐, 대화가 있기는 하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나누는 대화라 그렇지. 이 카페가 바로 앞에 앉은 사람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빛을 최소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골로 다녔을 때가 7년째라고 했는데 아무튼, 그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언어의 밀어 보다는 감촉의 밀어를 나누고 싶은 커플들이 찾았기 때문이다. 모르모트의 어둠이 남들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롭게 마음껏 감촉의 밀어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주인은 결단코 그런 목적으로 카페를 이 같은 분위기로 만든 건 아니었다고 했다. 거기엔 나름의 뜻깊은 철학이 있다고 언젠가 우연히 같이 술 마시던 자리에서 맥주 서너병에 불콰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의 의하면,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그는 시각에 의해 음악이 주는 느낌을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니까 청각적 환희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라 했다. 아, 내가 깜빡 잊고 말을 안했었는데 '블랙'은 그냥 카페도 아닌 음악 감상을 위주로 하는 카페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비공식적인 버전도 있었는데 지리한 장마가 그 어느 해보다 더 길게 이어지던 어느 해.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수리는 자꾸만 지연되었고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계속 지켰는데 장마를 피해 찾아온 커플들이 주인이 있음을 보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둠이 눅눅하게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더란다. 주인은 그게 반가워서 주문한 것만 가져다 주고는 거기서 무엇을 하든지 얼마나 오래있든지 상관하지 않았다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커플들이 삼삼오오 여름날 불빛에 몰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찾아오더란다. 그 때 그는 갑자기 '아, 이 가게는 빛을 가급적 없애는 게 생명이겠구나' 득도하게 되었고 결국 이런 분위기로 자리잡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어쨌거나 믿거나 말거나이고 뭐가 진실인지는 모른다. 하긴 유래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장인이 만든 무라마사라 하더라도 무우 따위나 썰면 식칼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그 곳을 우리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하나는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껏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주인의 취향은 우리와 비슷해서 더욱 우리를 거기에 붙잡아두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커플들이 여기를 찾았던 이유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럴 때 우리들은 서로 모른 척 하기로 미리 양해해 두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다시금 그 카페 이야기를 이렇게 새삼스럽게 꺼내는 이유는 내 음악적 성숙의 팔할이 바로 그 카페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 중 5할은 거기서 알게 된 어떤 '뮤즈' 때문이다.

 

 누벨바그로 유명한 감독 트뤼포의 영화 '쥘 앤 짐'은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 거기서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다.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청춘을 사로잡았던 우리보다 두 살 연상의 뮤즈가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패티 스미스'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와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 한 그녀의 생일 날이었다. 그즈음에 그녀는 실연을 했고(그러니까 우리는 짝사랑 중이었다. 우리들끼리는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생일을 기점으로 그 아픔을 모조리 잊기 위해 그는 주인에게 생일 선물의 의미로 각별한 부탁을 하나 했다. 패티 스미스의 'HORSES' 앨범 전곡을 틀어달라고. 오늘 우리들과 같이 전부를 감상하고 싶다고...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말하는 '1분'처럼 그 앨범의 전체 시간만큼 우리가 같이 들었던 그 순간을 영원한 기억으로 동결시키고 싶다고.

 

 영문은 몰랐지만 오늘은 그녀가 주인공이니 원하는대로 다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인 역시도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패티 스미스의 앨범을 들었다.첫 곡 글로리아 부터 마지막 곡 엘레지 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서로의 실루엣만 바라보면서 말이다. 비트는 폭발하는 듯 했고 패티 스미스의 목소리는 읊조림과 절규를 넘나들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우리의 뮤즈였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패티 스미스는 그렇게 내 인생에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했던 한 여인의 눈물과 함께...

 

 

 '저스트 키즈'는 패티 스미스가 그녀의 연인이자 남편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였던 로버트 메이플소스의 죽음 이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가장 험난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원하는 꿈을 향해 노력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패티 스미스가 새삼 그 때를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 것은 이렇게 기록이란 형태로 영원히 동결시켜 이 결빙된 기록만큼이나 영원히 그 때 가장 아름다웠던 로버트 메이플소스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거기에 보존되는 것은 메이플소스만이 아니다. '저스트 키스'라는 제목 그대로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성숙을 시간의 결마다 아로새겨진 상처로 인한 아픔을 감내하며 치뤄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 인해 더욱 서로를 순수히 사랑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었던 그만큼 자유로웠던 시간 역시 보존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일종의 타임머신 같다. 과거의 시간 자체가 보존되어 있어 언제든 들여다 보기만 하면 그 때의 시간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아마 페티 스미스 역시 펼치기만 하면 그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 있는 경험을 무던히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이지 않을까? 나 역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정작 그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녀와 똑같이 '저스트 키즈'였던 그 때를, 패티 스미스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후의 그녀와의 느닷없는 이별로 일찍 아픔을 껴안아 버렸던 그 때를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이 책은 각주가 때로 본문 내용의 흐름을 끊듯이 그렇게 문장들마다 각주처럼 따라붙는 나의 기억들이 참으로 날 산만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패티 스미스 하면 바로 연동되어 버리는 기억들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날 방해했었던, 마치 사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날 부여잡아서 책으로 부터 자꾸 얼굴을 들게 만들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래였다. '미스틱 리버'와 '살인자들의 섬'으로 유명한 작가 데니스 루헤인에겐 대표작 시리즈물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이다. 거기서 여주인공 제나로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꼭 듣는 음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패티 스미스의 노래다. 데니스 루헤인은 제나로가 패티 스미스의 어떤 노래를 듣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난 그 노래가 뭔지 알 것 같다. 바로 앨범 'HORSES'의 첫 곡, '글로리아'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패티 스미스를 따라 'G - L - O - R - I - A'를 외치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저스트 키즈'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도 바로 그 노래였다. 이 노래, 정말 많이 불렀다. 그것도 함께. 같이 따라 부르면 더 즐거워지는 곡이라서 우리는 그 생일 이후로 종종 후렴구를 합창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합창은 함께 있어서 즐겁다는 표시였었고 함께 있어서 든든하다는 고백이었고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백마디 말보다 그 하나된 목소리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시간. 그래서 내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시간인지라 그 때 정말 예뻐보였던 뮤즈의 목소리를 아련히 되새기며 지금 이렇게 패티 스미스가 했던 것처럼 하나의 글로 결빙시켜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보냈던 이제 막 자유의 첫 햇살이 비쳐들기 시작하던 스물을, '저스트 키즈'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그 때의 우리들을 말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련다. 이 책은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게 해주었던 것 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할 수도 없다. 패티 스미스의 글을 객관적으로 읽기란 내게 불가능하다. 그녀의 이름 자체만으로도 나는 나의 그녀를 떠올리게 되고 패티 스미스의 삶 한 조각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결부되어 그 때의 우리들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미래의 것 보다는 과거의 것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저스트 키즈'는 그런 과거를, '한때 우리들에게도 빛나는 여름 바다가 펼쳐져 있었지' 하던 때로 돌아가게 한다. 비온 뒤 잠깐 볼 수 있었던 무지개와 같이 짧아서 더 아름답고 진한 그리움을 남기는 그 때로... 지금 이 순간 내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생각 없이 더 오래 더 깊이 잠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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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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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고전의 시대다. 여기저기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인간 처세의 방법까지 고전을 통해 배우고 있다. 고전의 중요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침이 없었으나 그 요청에 있어서는 시대의 격량을 따라 이리저리 부침해 왔던 게 사실이다. 단순히 말해, 살만할 때 고전은 나른한 귀족을 위한 관현악과도 같다. 너무도 지루해 단지 쉽게 잠들기 위해 필요할 뿐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저기 가지에 널린 과실을 따느라 바쁜 인부에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는 호메로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쇼! 정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만 닥치고 기다란 막대기나 가져오란 말이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전을 찾는다는 것, 그것도 열화와 같이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반영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전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지도처럼 왜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미로에 빠진 것처럼 의문투성이가 되어버린 삶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래 살아 남았는 걸 보면 뭔가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으로 문제집 푸는 아이가 모범 답안을 찾듯 고전을 뒤적인다. 사실 고전 열풍은 그런 믿음들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부추기는 책들을 통해 고전의 중요성을 새로이 체득하는 게 아니라 익히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고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즉 금연을 결심하긴 했는데 잘 실천은 하지 않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기 위하여 비디오를 보듯이 고전에 대한 책들 역시도 같은 이유로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책들이 더 쉽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되새겨준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고전 안내서를 찾는 것은 분명 고전을 읽겠다는 다짐을 보다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도록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전의 인플레이션은 시대의 디플레이션과 분명 관계가 있다.

 

  어쨌거나 상황은 이렇다. 고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고전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여지는 그래서 단 하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다. 고전은 어쨌든 먼 과거의 산물이다.  어떤 것은 수천년도 된다. 거대한 역사의 유물도 그 정도 세월이면 풍화되어 사라지는데 하물며 한 권의 책에 담긴 뜻이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서 있는 수천년 세월의 끝자락에서 원 뜻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건 그간에 있었던 인류 역사의 변화를 그대로 통째로 무시해버리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고전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게 새 포도주만은 아닌 것이다. 고전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이 시간에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그들의 말이 살아있지 못하면 고전은 그 평가가 아무리 높고 화려해도 그저 묘비명에 새겨진 좋은 비문일 뿐이며 그 아래 안장된 죽은 말들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전이 그 생명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것도 동시대에 알맞게 그 의미들이 새로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구리가 터져버려 나날이 속에 있는 밀짚을 쏟아내고 있는 허수아비처럼 진작에 먼 기억 속의 존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고전이 되지 못한 먼 옛날의 무수한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시말해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는 이유는 작품 자체가 원래부터 그럴 정도로 탁월해서라기 보다는 각 시대가 새롭게 해석해서 그 의미를 채울 수 있는 그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대다.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얼마나 적절히 잘 부합할 수 있느냐가 고전의 수명을 장단을 결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고전은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바꿔 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카멜레온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새로운 해석으로 열 수 있는 수로가 많았기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적재적소로 스스로를 변형하면서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숙연하게 된다. 이번에 나온 천명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소크라테스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이 바로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즉 과연 이 작품들이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의문에 대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일단 여기에 실린 내용부터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나아가고 싶다. 앞서 말한대로 여기엔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이렇게 앞의 세 작품은 소크라테스의가 혹세무민으로 아테나이의 법정에 선 이후부터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일화들은 여기에 다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인 '대화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크리톤'에서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함께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말인 '악법도 법이다'를 과연 어떤 연유로 말한 것인지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파이돈'에서는 기독교에 강한 영향을 끼친 '혼 불멸론'과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그리고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럼 남아있는 나머지 하나인 '향연'에서는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랑관'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곤하는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말은 다 여기서 나왔다. 사랑이 오직 그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도 그리 생각했지만 예언녀 디오티마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이야말로 궁극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일단 이런 고전을 말했을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절대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하는 방법인 개인간의 대화를 통한 '산파술'답게 오로지 대화로만 이루어진('소크라테스의 변론'만은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이므로 독백으로 채워져있지만) 이 책은 원전 번역이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너무도 대화체를 잘 살려 번역하셔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마저 가질 수 있어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이름만 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던 분들에게는 이 책이야 말로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책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애초에 내가 던졌던 전제. 그러니까 이 책이 지금 시점에 있어 어떤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로 돌아가보자. 즉 지금 시대에 가장 디플레이션 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문제에 대해 과연 이 책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를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에 있어 가장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지난 5년간 우리를 가장 스트레스 받게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건 정치다.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듯이 민주주의의 후퇴. 그것이 가장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기필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 공기도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알듯이 정의나 민주주의도 잃어봐야 그 가치를 안다. 우리가 마이클 센델의 책을 통해 새삼 '정의'라는 가치를 생각했던 건, 불공정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보이는 현상이 질문을 낳는 법이다. 그렇게 민간인 사찰이 이루어지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말할 수 없이 억압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우리는 고전을 찾는다. 동화를 보면 지혜로운 대답을 들려주는 존재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나무나 동물들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왠지 현명해 보인다. 아마도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존재라 보고 그런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명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시야의 넓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거기에 제대로 된 해답을 줄 수 있을 때 고전은 죽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거기에 좋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내가 이 책을 보고 다시금 놀랐던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건 소크라테스의 태도였다. '대화법'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으나 그 진면목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오늘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와 관련하여 여기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보여주는 특징을 말해보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무지한 청년과 대화를 해도 절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법이 없다.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 나아감의 보폭을 결정하는 것 역시도 언제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다. 그는 철저하게 듣는 상대가 나아갈 수 있을만큼 대화를 진행시킨다. 그 청년은 지혜나 언변에 있어 분명 소크라테스의 약자다. 이를테면 진중권 앞에 선 초등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얕잡아 보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자신을 스스로 초등학생으로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러면서도 그는 설득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진리도 주장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상대방이 먼저 대답함을 통해 언제나 납득 시킨다.  설득과 납득.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적 태도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설득은 진리는 오직 말하는 자에 있고 듣는자는 오직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듣는 귀만 있지 말할 입은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설득'이다. 하지만 '납득'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맞춰 그의 헤아림을 기초로 모두의 진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듣는 귀뿐만 아니라 말할 입까지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납득인 것이다. 지난 5년을 생각해보자. 미국 쇠고기, 4대강, 인천공항 민영화 그리고 지금의 철도 민영화까지 정부가 내내 해온 것은 설득이었다. 아무리 여론이 반대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득은 포기가 없다. 진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으면 쉽게 단절이 일어난다. 그렇게 듣는 타자는 버려지고 '강행'만이 남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설득의 절기요 '오해'는 설득의 절세 신공이다. 우리 역시도 정부로 부터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하다 혹은 오해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들은 말하려는 입은 있어도 들으려는 귀가 없다.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다른 견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위장된 통로로 대화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듣는 타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거수기로 만드는 것.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설득의 근본 모습은 이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 했던가? 제대로 된 증거자료를 가지고 납득시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대화의 태도에서 무엇보다 '납득'이 민주주의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건 '합의의 중시' 이다. 먼저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고 언제나 그것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게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 대화의 원칙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바로 '우리가 합의한 대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상호가 인정한 사항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상호 납득 가능한 진리를 찾아간다. 솔직히 놀라웠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오류를 저질렀을 때조차 요즘 '100분 토론'에서 흔히 보듯이 '에이~ 그게 아니죠.'하는 식으로 통박하지 않았다. 그러기 보다는 언제나 '당신과 내가 합의한 것에 따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먼저 자신이 시인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그 오류를 발견하도록 도왔다. 사실 '납득' 역시도 바로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철저한 '우리가 합의한 바에 따르자면'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그걸 시인했다면 지금 이 말도 시인할 수 밖에 없겠군' 하는 생각으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납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의 중시'가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라는 걸 굳이 '설득과 납득'처럼 지난 5년의 경험을 들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지금 우리 현실에서 '합의'나 '약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해졌는가만 떠올려도(대통령조차 선거 공약은 홍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으로 내가 내세웠던 고전의 전제, 즉 지금 현실의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고전이라 할 수 있다에 대해 나름 응답을 해 보았는데 제대로 대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네 작품이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은 설명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길 고전은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 그냥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고전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져서 시대가 자신을 요구할 때 나와야 고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점점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이 때, 이 책은 그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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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컴퍼니, 착한 회사가 세상을 바꾼다 - 기업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힘
로리 바시 외 지음, 퓨처디자이너스 옮김 / 틔움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2013년, 새해 벽두부터 온라인은 민영화란 단어로 들끓고 있다. 수도와 의료 민영화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가스와 전기 민영화까지 이런 저런 우려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밀려올 파도에 대비해 단단히 준비하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민영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공공성이 기업의 사적 이익 추구에 심히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생각 속엔 기업은 어디까지나 주주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움직이는 집단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같은 윤리적인 것들은 그러한 이익 추구 앞에서 쉽게 무시되기 마련이다 라는 생각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제까지 보여준 기업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외국의 민영화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대표적인 예가 볼리비아의 수도 민영화 다. 유명한 다국적 기업이기도 한 벡텔사가 볼리비아의 수도를 총괄하자마자 2주도 지나지 않아 수도 요금이 곱절이나 인상되었다. 가난한 서민들은 급증하는 수도 요금을 견디지 못해 처마에 통을 달아 빗물을 모아 사용했는데 벡텔은 그것마저 자신의 기업 이익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볼리비아에 압력을 넣어 경찰로 하여금 그것마저 강제로 철거해 버렸다. 해도해도 너무한 처사에 분노한 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벡텔은 볼리비아로 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민영화의 결과가 대부분 이러하다. 그건 후진국과 선진국마저 가리지 않는다. 미국의 의료 민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이웃인 일본의 전력 민영화조차 이윤 극대화를 위한 비합리적인 비용 절감과 방만한 관리로 인해 결국 원전 사태라는 전무후무한 비극을 가져왔으며 영국의 가스 민영화는 비용은 비용대로 높아지고 가스의 질은 질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표출하여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민영화의 문제점은 오로지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만 기업이 움직이면 과연 어떤 부작용들을 불러올 수 있을지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왜 꼭 그래야만 할까? 윤리적 경영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지도 한참 되었는데 왜 아직도 사회적 가치와 약자를 배려하는 윤리는 그저 이윤 추구의 장애물로만 기업가들에게 인식되고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오로지 내 이익만 챙기면 된다고 유포했던 신자유주의도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미국 경제 위기와 유로 경제의 악화로 서서히 퇴조해가고 있고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사회적 가치를 부르짖는 요즘인데  이제 그 패러다임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나?

 이렇게 변화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은 머리로 오로지 이익 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기업가들을 향하여 이제 윤리적 경영은 단순한 이념이 아닌 성공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임을 설득하는 책이 있으니 그게 바로 로리 바시 외 3인이 공저한 '굿 컴퍼니' 라는 책이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굿 컴퍼니, 즉 선한 기업이 성공하며 그렇지 않은 기업은 도태된다는 것이다. 얼른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다. 돈을 많이 벌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통념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착한 회사 지수' 라는 것을 만들었다. 일단 그 착한 회사 지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부터 얘기해 본다면 그건 세 개의 항목으로 산출된다. 즉 좋은 고용주(Good Employer), 착한 판매자(Good Seller)  그리고 선량한 집사(Good Steward), 이렇게이다. 각각의 항목은 모두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즉 좋은 고용주는 회사의 종업원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로 그 지수의 크기가 결정되며 착한 판매자는 고객들에게 어떻게 응대하고 있느냐로 그리고 선량한 집사는 사회 공동체에 대하여 어떻게 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단순히 말해, 직장 내 민주주의, 고객 중심주의 그리고 기업의 사회 환원과 사회 공헌도가 착한 회사 지수의 척도인 셈이다. 저자들은 이런 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영 잡지인 포보스가 매년마다 발표하는 그 해의 세계 100대 기업들의 착한 회사 지수를 산출했다. 그리고 경영 이익을 많이 낸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가 착한 회사 지수와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는지를 보여 '착한 회사가 성공한다. 선함은 성공에 필수적이다'라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맞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놀랍게도 착한 회사 지수가 좋은, 그렇게 선한 기업들은 모두 그렇지 못한 기업들 보다 영업 이익이 많았고 주가 역시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로 착한 기업이 성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이 책의 2부인 '착한 회사 지수'에서 상세한 도표를 통해 아주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달리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여기서 드러나는 우리가 더욱 주지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업의 환경이 이제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것을 1부, '사회적 가치의 시대'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요지는 이제 소비자들은 단순히 제품만을 구매하지 않고 이 제품들을 어떠한 사람들이 만들었는지도 소비에 있어 중요한 사항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소비'란 말이 이제 어느덧 정착된 것처럼 동남아 아동 노동을 착취한다고 해서 '나이키' 불매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나 아이들에까지 총을 쥐어 그들의 피값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한다고 해서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이름 붙여진 것을 국제적으로 유통시켰다고 해서 일어났던 드비어스에 대한 불매운동 등이 이 같은 변화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제 소비자들은 자신의 돈을 단순히 물건을 구입하기 보다는 보다 높은 가치에 쓰기를 원한다. 2부, '착한 회사 지수'에서 보여준 결과는 환경이 이렇게 착착 변해가고 있음을 바로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기업에서 브랜드 가치의 비중이 날로 커진다는 것이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단지 물건 하나를 구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물건으로 표상되는 기업의 브랜드 역시도 구매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기업은 이제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로서 먼저 소비자들에게 다가온다. 단적인 예로 '애플'이 있지 않은가? 기업이 아무리 제품을 잘 만들어도 브랜드 가치에 타격을 입으면, 달리 말해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 기업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만큼 오늘날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해서 '경험 경제'의 공동 저자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기업은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의 경험 수준을 높이고 그들의 변신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p. 45) 고.

 

 쉽게 말해 자신들에게 투자하면 보다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험 경제의 중요성은 단적으로 스타벅스 현상에서 드러나고 있다. 보다 저렴한 커피들이 얼마든지 가까이에 있는데도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까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샀던 것은 무엇보다 '친절함, 편안함 그리고 차원 높은 서비스'(p.45)로 정의되는 스타벅스 경험을 선호했기 때문인 것이다. 경험 경제는 소비자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제품의 효용이 아니라 바로 가치임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업이 자신의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신뢰도를 키우려면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보다 높은 가치에 그들의 돈을 투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우기 연구에 따르면 가치 선호도에 있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이 바로 윤리적 가치임이 또한 드러났다. 그러므로 자신의 브랜드 가치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은 착해져야 하는 것이다.

 

 기업은 이제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윤리적 가치를 말이다. 거기에 있어 기업은 현재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 어떤 가치를 창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저자들이 만든 '착한 회사 지수' 는 그러한 가치 고양을 위해 기업들이 집중해야 할 실제적인 목표 사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직장 내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며 경영 가치를 무엇보다 고객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며 그리고 사회 모두가 더불어 잘 살기 위한 방향으로 사회 환원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지 않았을 경우 바로 타격을 입을 것임은 외국의 사례를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바로 알 수 있다. 얼마 전 부하 직원을 청부까지 해서 폭행했던 주식회사 피죤의 회장은 그간 부하직원들에게 비민주적으로 대했던 것까지 몽땅 드러나 이제 주식회사 피죤은 물건을 만들 때 회사 이름마저 지워야 할 정도로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는 회사가 되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얼마전 방송에서 출산하면 천만원을 주는 등 아낌없는 사원 복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제니퍼 소프트'라는 회사는 '좋은 회사'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면서 검색 순위 1위에 오르는 등 단번에 유명해졌다. 이러한 사례는 윤리적 가치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아직도 다른 건 다 필요없고 돈만 잘 벌면 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그런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래도 설득이 안된다면 당장 '굿 컴퍼니'라는 책을 보라. 이 책을 통해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착한 회사가 되는 것이 그 첩경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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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1-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기업만의 문제는 아닌듯합니다.
음식쓰레기를 바다에 매립하는 것을 금지한 이후,
지난 연말부터 연초까지 저희 아파트는 음식쓰레기 대란 중입니다.
고양이만 신이 났지요. 하루 안 치워가니, 길거리에 늘어진 음식쓰레기가 장난이 아니랍니다. 여름이었으면 어땠을까 아찔하고, 인간이 사라진 세상은 음식쓰레기 썩는 냄새만 진동하려나 싶어집니다. 그리고... 음식 쓰레기를 줄여야겠구나 건조기를 사야하나 고민 중입니다.

기업도 개인도, 모두 사회적 가치를 고려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저 개인조차 재활용쓰레기 음식쓰레기, 이런 사소한 것부터 힘들어하네요... 에효.

제니퍼 2013-01-1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SBS 리더의 조건에 제니퍼소프트 이원영 사장님 책상 위에 이 책 있는거 봤습니다.
흠... 아직까지는 무늬만 착한 회사가 많은 것 같아요.
진정성 있게 착한 회사들이 모이면 정말 세상이 바뀔것 같습니다.
착한 회사 제니퍼 홧팅!!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2011년에 나온 우타노 쇼고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지금까지 보여준 우타노 쇼고 월드에 있어서는 다소 UFO와도 같은 작품이다. 라고 말하면 의미가 오리무중해질테니 더욱 알송달송하기 짝이 없는 우타노 쇼고 월드라는 말에 대해서 먼저 밝혀보자. 개인적으로 우타노 쇼고 작품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내 관심의 더듬이가 향하는 쪽은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 중에서도 꽤나 호불호가 갈리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나 '여왕님과 나' 같은 작품들. 물론 여기엔 그에게 또 한 번에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안겨 준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도 포함된다.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작품들이야말로 여타의 다른 일본 미스터리 작가들과 구별되는 우타노 쇼고만의 독보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우타노 쇼고의 독특성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을 바라보는 일종의 필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단적으로 현재 우타노 쇼고가 밀어붙이고 있는 작품들에 내재된 세계관이 그야말로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잘 보여준 일본 특유의 포스트 모던적 특성을 마치 복제라도 하듯 충실히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밀실살인게임' 은 그러한 경향이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밀실살인게임'과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을 같이 놓고 보면 우타노 쇼고가 현재 구축하고 있는 '월드'의 '코어'가 무엇인지 명확히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아즈마 히로키의 그 책은 무엇보다 문화에 대한 오타쿠적 소비 방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히로키는 그 방식에 현재 일본의 포스트모던한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다. 정보의 생산 보다는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에 얼마나 많이 저장할 수 있는가가 더 의미있는 시대. 현실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 보다 오히려 가상 세계의 규칙과 가치가 더 우월한 시대(이를테면 미소녀 게임에 등장하는 히로인과 얼마든지 실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리하여 더이상 전통 근대의 사유 방식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소비를 히로키는 과감히 '포스트 모던'이라 불렀고 그것은 또한 일본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에도 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여기에 대해서는 미야베 미유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앞으로 일본은 날로 보수화되어 갈 것이라 전망했다. 그리고 그 전망대로 우리는 일본 보수의 끝판왕을 현재 보고 있는 셈이다. 앞에서 말한 우타노 쇼고의 작품들은 히로키가 말한 특성들을 마치 아주 푹 고아놓은 사골 국물처럼 잘 우려내고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일본 포스트모던에 있어 총론이라면 우타노 쇼고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응용한 각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우타노 쇼고 앞에 흔히 잘 붙는 수식어는 '반전'이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벗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가 보여준 막강한 반전 때문에 '유주얼 서스펙트' 이후에 브라이언 싱어가 그랬듯이, '식스 센스' 이후에 나이트 샤말란이 그랬듯이 '반전'이란 말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독자의 지갑을 열게 하는데 더욱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장르 소설가이다 보니 스스로도 자신에게 붙어버린 라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벼들듯이 아예 그 반전을 스스로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다.

 

  그러한 유희로서의 반전을 보여준 첫 작품이 내 생각엔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 아닐까 싶다.(일본 원전을 읽을 수 없는 관계로 번역판만 기준으로 한 생각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한 페이지가 멀다 하고 반전을 선사한다. 혼자만의 상상인가 싶으면 현실이고 현실인가 싶으면 상상인 경우가 허다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리얼한 것'으로 부터 점점 멀어져 오로지 유희만이 존재하는 게임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제목인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은 그야말로 적합해 보인다. 현실적인 것으로써의 '세상의 끝'이자 현실의 원칙 따위 우습게 무시하는 '게임'으로서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은 일본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1988년에서 1989년까지 모두 네 명의 여자 아이들을 살해한 미야자키 쓰토무의 사건 을 바탕으로 쓴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범죄 때문에 이것이 히로키가 말하는 오타쿠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적 구현의 첫 시작이라는 점이 더욱 확증된다. 바로 그 미야자키 쓰토무는 무려 5천장이 넘는 호러 비디오를 소장한 이른바 호러 오타쿠로 그 호러 비디오 때문에 그런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냐는 거센 여론이 일어나 오타쿠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타노 쇼고는 반전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 혹은 집착이 게임적 유희와 같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또한 오타쿠적 문화 소비와 연결된다고 보아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시작이었던 듯, 그는 그것을 더욱 밀어붙인다. '세상의 끝'이 던져버린 것은 오로지 현실과 가상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규칙이었으나 '여왕님과 나'에서 던져버린 것은 아예 누구나 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 세계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물론 일본 사회에서 실제 일어난 충격적인 범죄가 영향을 미쳤다. 바로 2004년에 일어난 나가사키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소녀가 같은 반 친구인 여학생을 커터칼로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범인이 초등학생 여자아이라는 점과 범죄 장소가 초등학교라는 점에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로 어른들이 지금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인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으로 움직이는 낯선 존재.  그렇게 우타노 쇼고는 그 사건 역시 그 전 사건과 일련의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한 세대라는 점까지 반영하기 위하여 '여왕님과 나'를 더욱 극한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밀실살인게임'은 이런 경향 속에서 이해해야만 왜 우타노 쇼고가 그렇게 썼는지, 그게 단지 팔릴만한 작품을 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게 이해된다.

 

 아무튼 쇼고는 그렇게 달려왔다. 그런 식으로 스타워즈에서 제국군이 '데쓰 스타'를 만들듯이 자신만의 월드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2011년. 이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이 나왔다.

 

 그런데 다르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보여 준 우타노 쇼고 월드와 노선을 같이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유희가 없다. 작품은 '벗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의 편집자와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쓴 것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그것이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은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의 자기장 안에 있다. 무모하게 말한다면 그 작품을 일종의 리메이크라고도 할 만 하다. 주인공의 상황, 성격 그리고 전개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마치 그가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 주었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 새로이 시작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래, 이왕에 호기를 부려 본 거 나도 '여왕님과 나'를 쓸 때의 우타노 쇼고처럼 끝까지 가 보자. 그래서 단정지어 말하자. 이것은 결별이라고. 뒤이어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지금까지 보여준 우타노 쇼고 월드로 부터의 명백한 이탈이라고 말이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이 무수한 반전들로 채워졌듯이 이 작품 또한 무수한 반전들로 채워진다. 후반에 커다란 반전들이 나온다고 해서 이 작품이 오로지 그것을 위해 뛴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일종의 크레셴도에 불과할 뿐 반전들은 작품 전반에 걸쳐 내내 등장한다. 그건 또 하나의 주요 배역이라 할만한 스에나가 마스미의 용모(주인공 히라타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중년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20대였다.)에도 있고 동료직원들이 그녀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히라타가 마스미와 같이 있는 것을 보고는 원조교제 같은 것이 아니냐고 놀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에 히라타가 여고생과 데이트를 하면서 이것저것 원하는 대로 사주는 장면이 나와 '뭐야 히라타 그런 사람이었어' 하는 순간 알고보니 아내의 여동생 딸로 밝혀지는 순간에도 있다. 이런 식의 보이는 것과 드러나는 반전의 진실들이 봄날 대나무 밭에 이리저리 돋아나는 죽순들처럼 곳곳에 산개해 있는데 이로써 느끼게 되는 건 여기의 반전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희로써의 반전이 아니라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매개하는 것으로써의 반전. 다시 말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명한 첫 문장처럼 삶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다양하고 깊은 속내를 감춰두고 있다는 것을 우타노 쇼고는 반전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에서 우타노 쇼고는 유희에 천착하느라 방기해 버렸던 삶을 다시금 껴안으려 하고 있었다. 환상이 아닌 현실, 도피가 아닌 책임. 그것이 다시금 그 옛날의 터닝 포인트로 돌아간 우타노 쇼고가 다시금 보여주려는 핵심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타노 쇼고는 작품에서 받게 되는 인상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현실과 연동하는 작가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하게 된 계기도 역시 현실로 부터 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이 책의 발간 연도를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일본 국민들이 과연 그 해를 잊을 수 있을까? 미국인들이 9.11 때문에 절대로 2001년을 잊을 수 없듯이 일본 국민 역시 2011년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 해 일본 역시도 9.11에 맞먹는 비극을 겪었으니까 말이다. 미국에게 9. 11이 있다면 일본에는 3. 11이 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이 일으킨 비극의 날이. 똑같이 11일에 일어났다는 것이 왠지 모골마저 송연해지는 이 비극 앞에서 향후 미국 문학이 위안과 연대로 나아갔듯이 똑같은 아픔을 가져버린 일본 문학도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타노 쇼고 역시도 그 3.11 때문에 이같은 변화가 생겨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3. 11 이후의 일본 문학이 9. 11 이후의 미국 문학과 비슷한 경로를 밟아가고 있음은 이전에도 여러 징후가 있었다. 무엇보다 미나토 가나에의 변화가 그랬고 국내에 발간된 비교적 최근의 일본 문학들에서도 그런 특성은 현저하게 드러났었다. 무엇보다 2012년에 방영된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한 구로자와 기요시 감독의 동명 5부작 드라마는 3. 11 이후의 일본 문학의 현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자성에 대한 촉구였고 삶이 타자와 결부되어 있음에 더욱 눈과 귀를 기울이려는 흐름이었다. 거기에 지극히 현실과 동떨어진, 오히려 현실 보다 더 우위의 가상 게임에 천착하던 우타노 쇼고 역시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라웠다. 이것이 과연 '여왕님과 나' 그리고 '밀실살인게임'으로 이어졌듯이 또 하나의 연속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을지 아니면 그냥 한 번 던져본 변화구에 불과할지 그건 아직 모르겠다. 현재의 일본 문학이 보여주는 자성의 기운이 갑자기 뒤덮게 된 우익의 장막 아래서 어떻게 그 생명을 이어갈지 궁금한 것과 똑같이 우타노 쇼고가 보여 줄 다음의 행보 역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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