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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오래도록 미스터리 비평서에 있어 하나의 모범으로 자리잡아왔던 줄리안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 그 책을 보면 줄리언 시먼스가 '럼 펀치'의 엘모어 레너드나 '블랙 달리아'의 제임스 엘로이 같은 현대적인 작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란 다름아니라 형편없는 문장력 때문이다. 아무리 미스터리라고 해도 그렇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사회 하위 계층의 언어를 현실감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시먼스 자신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당연히 기울였어야 할 작가적 노력을 방기한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쉽고 간결한 문장이 좋긴 하지만 그저 작가 자신이 편하게 쓰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작품을 망치는 독(毒)일 뿐이라고 그는 전한다.

 

 

 

 

  하필 이 부분이 인상에 남았던 이유는 나 역시 현대 미국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자주 마주치곤 하던 그 표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나도 '뭐, 미스터리이니까!'하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시먼스의 말을 들어보니 아무리 미스터리이더라도 일단은 글로 된 작품인 이상 문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미스터리를 읽을 때에도 문장을 신경쓰면서 읽게 되었다. '끝까지 연기하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영국의 미스터리 작가, 로버트 고다드는 그렇게 해서 발견하게 된 작가이다. 그러니까 로버트 고다드는 무엇보다 좋은 문장으로 나를 매료시킨 작가라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고다드가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이 1986년이라 '블러디 머더'에서 언급되지는 못했지만 분명 시먼스 역시도 고다드를 좋아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고다드의 작품을 일컬어 '단숨에 읽기에는 너무 좋은 작가'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문장 때문이다. 만연체라서 의미를 파악하느라 여러 번 읽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심오한 은유와 상징들 때문에 멈춰서 시선을 송곳처럼 돌리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문장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어 십대 소년이 르느와르가 그린 독서하는 소녀의 그림을 바라보듯이 넋을 잃고 음미하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꾸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놀라운 은유나 심오한 상징도 없다. 단순하다. 평범하다. 그런데 왜 호들갑이냐고? 문장 하나만 놓고 보면 그렇다. 하지만 정작 고다드의 마법은 문장들이 모여있을 때 이루어진다. 아, 이걸 말로 설명하려니 정말 어렵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냥 예를 드는 게 낫겠다. 주인공 토비 플루어가 조지4세가 머물렀던 로열 퍼빌리언 궁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결국 헤어져버린 아내 제인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한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p.268)

 

 

 

 

 

 

 

 

 이런 식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장 하나하나는 색다를 게 없다. 그런데도 읽으면 묘한 매력이 있다. 특별할 것이 없는 문장인데도 여기에서 문득 시선이 멈추게 된다. 사실 토비가 '끝까지 연기하라'의 주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남의 아내가 되려하는 제인을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연기자로서의 자기 경력을 모두 희생해도 좋을 정도로 열렬히 말이다. 위의 말은 그 제인을 만나 한 차례 더 거부를 당한 뒤 나온 것이다. 애타게 되찾고 싶어하는 아내에게서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올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만큼이나 토비에게 아픈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는 그가 어느 정도로 제인을 놓쳐버린 것을 후회하는지 또는 지나가버린 과거를 얼마나 되돌리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읽는 독자는 그런 토비의 후회가,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게 고다드의 마법이다. 그의 문장들은 무심한 시선을 닮았다. 안으론 성게를 삼킨 듯 다시 게워낼 수 없는 날카로운 아픔이 있지만 문장들은 그런 내색없이 그저 먼 산에 떠 있는 흰 구름을 보듯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한 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는 내내 질질 짜면서 두 눈에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보다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온다. 마치 세계가 반전된 것과도 같은 감각 속에서 그 무심함이 참음의 몸짓이었으며 결국 흘러내린 눈물은 그렇게 했음에도 새어나왔을 정도로 더욱 컸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더 깊이 다가온다. 완전히 홀딱 벗는 것 보다 반쯤 벗는 것이 더 에로틱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마치 비어있는 용의 눈에 점을 찍듯,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마지막 문장을 빼놓고 읽어보면 이 한 문장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무심히 붙은 마지막 문장이야 말로 사실은 마술사가 '프레스티지!'하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렇게 문장의 매력에 대해 말한다는 건 리뷰에게 좋은 도움이 못된다. 문장에 대한 선호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제임스 설터 가 그의 소설 '어젯밤'에 썼던 그런 문장 스타일을 선호한다. 로버트 고다드는 제임스 설터의 문장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한 번 더 체로 걸러내는 듯한 함축과 군더더기를 많이 덜어낸 담백한 맛이다. 하지만 설터의 문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고다드의 문장에 있어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소설의 줄거리를 분석하거나 등장인물들의 상징, 또는 추구하고 있는 주제를 말하는 게 낫다. 사실 그런 쪽으로 리뷰를 많이 써 왔기도 하다. 로버트 고다드의 이 책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연기 인생이든 사랑이든 모든 것에서 거부당한 주인공 토피 플로어가 결국은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빠졌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화하고 그를 통해 보다 바람직한 선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주제로 쓸 수도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말한 뒤에 주인공의 상황과 그의 도플갱어라고도 할 수 있는 범인의 설정을 통해 그것이 넌지시 토니 블레어가 추구했던 제3의 길의 사실상 실패를 은유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문장의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고다드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기 때문에 더욱 이야기의 매력 보다는 문장의 매력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다드가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하여 군더더기를 잘라내고 모든 것을 한 문장에 응축시켜 놓듯이 문장의 매력을 알리는 것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과는 보시다시피이다. 호응이든 비난이든 감수할 작정이지만 일단은 로버트 고다드가 이제라도 국내에 소개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좋은 문장이 가진 매력이 작품의 매력마저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지극히 호불호가 갈릴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는 문장이 마침 소설에 나와 있었다. 그것을 인용하면서 나 역시 올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을 끝내려 한다.

 

 

 

 

 

 때때로 나는 통제력을 내려 놓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둘 때 최고의 연기가 나온다.

안타까운 점은 연기를 평가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그게 현실이다.(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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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3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제임스 설터 어젯밤,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체로 걸러내는듯한 -- 담백한 맛>이란 님의 말에 그만 꽂혔지 뭡니까.
꼭 읽어서 제 것화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친절한 리뷰 고맙습니다.^^*

ICE-9 2013-02-05 22:40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렇게 들러주시고 또 좋은 말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제임스 설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데 팜므느와르님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Shining 2013-01-3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가 아니라 문장이 좋은 미스터리, 라니. 이런, 읽지 않을수가 없잖아요ㅠ 전 최근에 로렌스 블록의 글을 좋게 읽었어요. 마초적이고 그렇게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들인데. 묘하게도 어떤 애절함이나 냉담함, 진실함 같은 것이 뒤엉켜서 이상한 감칠맛이 나더라구요(웃음). 아, 블러디 머더.. 추천받은 적 있는데 잊고 있었네요ㅠ 이번 기회에 읽어보겠습니다+_+

ICE-9 2013-02-05 22:44   좋아요 0 | URL
로렌스 블록, 저 역시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었을 때의 감흥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어요. 와! SHINING님과 같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니(더구나 메튜 스커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의 하나인데^ ^) 어쩐지 더욱 SHINING과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 '블러디 머더'도 정말 좋더군요. 미스터리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모범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

희선 2013-02-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은 미스터리군요 어떤지 보고 싶군요
저는 지금까지 이쪽 이야기 보면서 글이 안 좋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읽은 게 얼마 없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저한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그런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겠죠

그런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을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경험이 많아야 할 텐데
별로 없어서 말이죠


희선

ICE-9 2013-02-05 22:49   좋아요 0 | URL
미스터리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대중 친화적이 되어야 하는 이상, 나올 수 있는 문장의 패턴들이 그리 다양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요. 아마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리 작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 제약이 있고 또 그만큼 고민을 하게 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좋은 문장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다드를 꼭 좀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 희선님도 마음에 들어하시면 좋겠어요^ ^ 그리고 뭐든 경험이 필요한 법이죠. 양질전환이라는 말도 있듯이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저절로 감식안 같은 것이 생길거에요.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렇다고 제가 경험이 많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하^ ^)
 
그곳과 사귀다
이지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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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을 사랑한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담쟁이 덩쿨마냥 엉켜 있었다. 그래서 술래잡기 하기엔 딱이었다. 골목에 있는 모든 집들의 대문들이 우리의 작은 몸을 숨겨 주었다. 때로는 담장 위로 송이 송이 얼굴을 내민 장미가 맞아주었고 때로는 석류나 무화과가 숨어서 고개를 조금 빼내고 술래가 오나 안오나 이리저리 살피는 날 흐뭇하게 굽어보기도 했다. 물론 다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운이 좋지 못하면 시끄럽다는 할머니의 원성이나 떠들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아저씨의 박대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릴 때 동네 골목엔 추억이 많다. 놀면서 담장 마다 내가 찍었던 손바닥이나 디뎠던 발자국 만큼이나 알알이 여물어 있다. 그랬던 나이기에 서울에 와서 가장 많이 아쉬웠던 것도 내가 사는 주변에 골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있을 뿐 골목이 없다. 어릴 때 골목을 걸었던 추억을 떠올리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걷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릴 때의 골목을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건 그 곳에 있던 집들이 하나같이 다 달랐다는 사실이다. 담장 위로 보이는 나무들도 그랬고 지붕의 모습도 그랬으며 층수도 마찬가지였다. 골목의 집들은 저마다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집은 저렇게 생겼구나, 흐음 이 집은 이런 나무를 키우네 혹은 왜 저 집은 빨래를 저렇게 널까 하는 식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호기심을 보는 집마다 품어가며 걸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더러 피아노 소리가 담장 밖으로 들려오면 기대어 듣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엔 우리 집도 오늘 저걸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절로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골목을 걷는 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길었으면 할 정도로 즐김과 누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다르다.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모습. 더구나 그 어떤 사람의 소음이나 내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회색의 담벼락은 죽 놓여진 거리를 걷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거리는 즐김과 누림의 거리가 아니라 그대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줄여야 할 거리가 된다. 소거말고는 다른 의미라고는 없는 거리가 된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걷는 게 서울 사람이라고 하는데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걷게 된 건 어쩌면 골목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골목이 사라졌듯 사실 우리 주변엔 많은 공간들이 사라진다. 내가 사는 동네만 보아도 자주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갔던 단골 빵집이 사라졌고 만화책을 주로 빌려 보던 대여점도 사라졌다. 서점은 여기 살 때 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음반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때 이후로 서점과 음반은 내 일상의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 먹던 가게들이었는데 이제는 볼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공간의 사라짐은 단순히 어제 있던 것이 오늘은 없다 그 정도만이 아니다. 골목이 사라지면 그 골목과 공존하던 나의 모든 추억과 경험들이 사라진다. 서점과 음반 가게가 사라지면 그 곳을 통해 만났던 책과의 인연, 음반과의 인연 역시 사라진다.  아마도 내가 이지혜의 '그 곳과 사귀다'를 선택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란 무엇보다 공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존재이며 하나의 공간이 삶의 자리에 차지한 의미 역시도 생각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곳과 사귀다' 는 노래방, 놀이터 혹은 영화관과 같은 우리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50개의 공간에 지은이가 느낀 감정을 가볍게 터치하듯 써내려간 책이다. 그녀는 말하는 공간과 결부된 추억을 말하고, 가지게 된 인연을 말하며, 받게 된 위로를 말한다. 책에 담겨진 건 그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공간이 사람과 얼마나 많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 보게 된다.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용도를 넘어 인격적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지혜의 이 책은 공간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도록 한다. 요즘은 힐링이 대세다. 이지혜는 그 힐링을 공간으로부터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공간과 사귐, 즉 인격적 교감을 하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말이다. 이 책은 작고 가볍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을 가지고 지은이가 말하고 있는 공간에 가서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그러면 이 책이 좀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저자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덕분에 공간에 대해 마음을 열고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공간도 사람처럼 살고 죽는다.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을 보니 골목이나 음반점, 오락실등 내가 많은 추억을 보낸 낯익은 공간 몇몇이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공간들은 죽었다. 그리움으로 애타는 우리들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추억의 유물만을 남긴 채 석양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공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고서 슬프지만 다가 온 변화에 적응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빈 자리를 메운 새로운 공간들과 또 새롭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또 흐르다 보면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들 중 몇몇도 언젠가 분명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비워진 그 자리를 또 다른 새로운 공간들이 채워나갈 것이다.

 

 한 10년 뒤에 작가가 또 한 번 '그곳과 사귀다'를 써 주면 좋겠다. 그 때의 남은 공간과 사라진 공간들을 보면서 내게 찾아온 '변화'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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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1-3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책들은 어떻게 발견하는거에요, 헤르메스님?+_+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습니다(꾸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ICE-9 2013-02-05 22:34   좋아요 0 | URL
SHINING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더욱 기쁘고 감사하네요. 제가 이 책을 통해 받았던 힐링을 SHINING님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희선 2013-02-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골목길 하면, 갑자기 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은 아닌데, 중학생 때 학교에 가는 길에 개를 만났어요
그길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날은 그냥 갔다가 그렇게 됐죠
개가 저를 노려보는 듯해서, 개를 보면서 뒤로 걷다가 넘어졌어요
아무래도 그때 기절했나봐요 그 길을 지나던 아줌마가 일으켜준 것 같아요
그러고서 학교에 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별일없이 살아있습니다

헤르메스 님은 이것저것 알고 싶었던 게 많은 어린이였군요
(지금도 그런 듯하고...)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어땠는지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희선

ICE-9 2013-02-05 22:38   좋아요 0 | URL
와! 어떻게 딱 맞추셨네요. 정말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캐물어서 자주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죠^ ^ 어릴 때 제가 가장 열심히 보았던 책이 어린이 백과사전이었다면 말 다했겠죠. 너무나 많이 봐서 책이 거의 떨어질 정도였어요. 저는 골목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참 많습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니 어쩜 당연하겠지요.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엔 그런 교류가 흔해서 소중한지 잘 몰랐는데 서울에 올라와보니 그런 교류들이 정말 소중한 것이더군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누려볼 수 없는 아이들이 어쩐지 좀 안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추억할 공간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많이 적을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추억의 풍성함은 떠올릴 공간의 풍성함과도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
 
B파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4
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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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성문학 못지 않은 탄탄한 문장력,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 그리고 탄탄한 구성력으로 한국 장르 소설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B컷'의 작가 최혁곤의 두 번째 장편이 나왔다. 그게 바로 'B 파일' 이다. 'B컷'이 2006년에 나왔으니 햇수로만 따지자면 7년만에 나온 셈이다. 제목에 꾸준히 B'를 쓰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여기에 어떤 작가적 신념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작품을 읽어보니 역시나 그렇다. 'B 컷'이 남에게 대놓고 공개하기가 꺼려지는 사진을 뜻하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 'B급' 인생을 살게 된 은퇴한 남자 형사와 여성 킬러를 중심으로 평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밑바닥의 삶을 조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B 파일' 역시도, 이번엔 모두 네 명으로, 더욱 사람 수를 불려 'A 급'들만을 위한 룰이 지배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생존과 진실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B 급'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최혁곤에게 'B'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린 혹은 내몰린 삶을 뜻하는 말이며 그래서 단적으로 말해 '피해자'를 상징하는 글자이다. 그러므로 그 'B'가 내내 쓰인다는 것은 자신의 작품을 가해자들에게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면서도 목소리마저 빼앗겨 변론과 호소의 말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돌려주어 자기 변론과 호소의 장으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때문에 두 작품 모두 그러한 인생들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B 파일'은 여러모로 'B 컷'과 연속선상에 있다 그래서 사람 수가 늘어난 것처럼 일종의 확장판 느낌도 난다.(무엇보다 이전 작품에서 깜짝 조연이었던 성전환자가 이번엔 주요 인물 네 명중 하나로 전면으로 나섰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부풀려진 것일까? 그건 관찰자 시점의 개입이다. 이전의 작품엔 오로지 참여자들만 있었다. 생존에 급급했던 그들은 도대체 자기들이 왜 이런 아귀다툼에 말려든 것인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B 파일'엔 참여자들만 있지 않다. 그들 중 두 명은 냉정히 판이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 시점의 필요 때문에 두 명이 네 명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면 이 네 명, 그러니까 스포일러 상 밝히지 못하는 누군가에 의해 'B 파일'로 분류된 조선족 출신이지만 한국에와서 성공한 은행원 리영민, 고참 기자 윤, 성전환을 바라는 킬려 미호 그리고 윤과 같은 신문사 신참 기자인 에스더, 또한 그 관계에 있어 미묘하게 둘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영민 과 윤' 그리고 '미호 와 에스더' 이렇게 말이다. 이건 그들의 독백을 듣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공통점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리영민과 윤은 성공한 은행원과 고참 기자라는 것에서 드러나듯 킬러와 신참 기자인 미호와 에스더 보다는 위에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상위에 있는데도, 아니면 그 상위에 있기 때문인지, 보여주는 모습은 미호와 에스더보다 지극히 소극적이다. 자신들의 처지 역시 'B 파일' 즉 사회 약자임에도 불구하고(리영민은 차별받는 조선족이고 고참기자 윤은 과거의 어떤 사건 때문에 신문사의 핵심에서 밀려나 문화부에서 일한다.) 그들의 처지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리영민은 같은 조선족 출신의 한국 사회 차별에 대한 불만을 귀찮게 여기고, 고참기자 윤은 여자 신참 기자가 상사에게 무참히 깨지는 광경을 보아도 시집이나 잘 갈 것이지 왜 사서 저런 꼴을 당하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변화를 싫어한다. 이대로 내 것만 잘 챙기며 평온하게 끝까지 가고 싶다는 '무사안일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는 리영민과 고참기자 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선명하게 부각된다.

 

 먼저 리영민,

 

 누가 뭐래도 한국이 좋았다. 주위에서 악덕 고용주 욕을 해대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시장의 수요, 공급과 관련된 문제다. 어느 체제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지 않은가. 그건 민족과는 무관한, 전적으로 개인 능력과 결부시켜 봐야 한다. (P.22)

 

 그리고 고참기자 윤.

 

 내키지 않았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속내를 모르니 당연히 거부감이 앞섰다. 편집국장이 윤의 능력을 신뢰해서 이런 일을 맡길리는 없다. 그렇다면 한가해 보여서? 그 쪽이 맞을 것이다. 저 인간 잣대로 보면 공연 담당 기자는 인터넷에서 긁은 정보와 보도 자료로 짜집기 하고 월급 축내는 종자로 보일 테니(P. 26)

 

 이랬던 그들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 따위 '개인의 능력 차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혹은' 어차피 밀려난 처지에 귀찮게 뭐하러'라는 말로 눈감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의 처지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위와 상황이 보호 장벽이 되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든든해 보였던 안전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리영민과 윤은 한 쌍이다. 리영민은 실제 참여자로서 이 모든 걸 온전히 겪고 윤은 그 직업이 기자인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것을 관찰한다.(어쩌면 윤 보다 훨씬 높고 안전해 보였던 편집국장이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 것은 그가 사실은 리영민과 완전히 같은 존재라는 걸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반면, 그 반대편에 있는 미호와 에스더의 관계는 적극적이다.

 미호는 진짜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이루기 위하여 청부 살인을 하고 그러다 뜻하지 않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되자 오히려 그 대상을 찾아내 복수하려 한다. 아마도 최혁곤 작가는 이 미호라는 이름을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신 시티'에 나오는 냉혹한 살인 기계 여자 킬러 '미호'의 이름을 따온 것 같다. 그 미호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인물이 바로 그(혹은 그녀)이다. 그건 신참기자 에스더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재수를 불사하고 기자가 된 것은 자신과 같이 기자였다가 억울하게 좌천당한 아버지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이들은 적극적이다. 그들은 부조리한 현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미호는 못 견뎌하는 남자의 신체를 진짜 여자의 신체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에스더 역시 자기 보다 미모도 수완도 '갑'인 CBS 여성 기자 양미라에게 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이 양미라 기자가 너무도 얄밉게 나와서 끝까지 제대로 본 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쉬웠다.) 더우기 이 에스더란 이름. 이 이름은 성경에서 집단 학살의 운명에서 유대인들을 구원한 여인의 이름으로 예로 부터 구원자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이 아니던가! 그렇게 바꾸려한다. 모자라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이렇게 네 명을 둘로 나눈 관계는 차이가 난다.

 

 이러면 그냥 'B 컷'의 구도를 써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네 명으로 늘린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명이 나왔다면 그 중 둘은 다른 역할을 맡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역할을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직업 역시도 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왜 관찰자가 새삼 여기에 나와야 했던 것일까? 그건 'B 컷'과 대비해 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B 컷'은 참여자들만 있었다. 그래서 생존하기에 급급한 아귀다툼의 현장만 나왔다.(이건 앞에서도 말했다.) 다시 말해  'B 컷'은 현상 뿐이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진짜 원인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흔히 전작의 약점으로 지적된 과도한 세태 비판의 개입은 작품의 근본이 참여자들만이 존재하는 게임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성찰을 부여하려다 생긴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작가가 그 약점의 원인을 제대로 인지했고 그래서 성찰적 지점들을 무리없이 통합시키기 위해 따로 이 관찰자 역할들을 설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이다. 세상은 왜 7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은 아픔이 반복되는가이다.  'B 컷'과 'B 파일'이 애초의 신념 그대로 피해자들의 진정한 변론과 호소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반복되는 아픔을 끊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하고 그 대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과정이 관찰이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그것을 야기하는 회전의 중심축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여 반복되는 비극의 연쇄를 끊는 것. 그것이 관찰인 것이다. 그러므로  'B 컷'과 대비하면 'B 파일'이 어디에 자리잡는지 곧 드러난다. 말했던 대로 그것은 성찰의 지점이요,  'B 컷'에서 이어지는 아픔의 연원들을 여기에 이르러 선명히 드러내려 한다는 것을. 최혁곤의 'B 파일'은 그러한 작품이다.

 

 이미 3부로 구성된 순서에서 이 작품이 추구하는 것이 드러난다. 3부는 이런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홍콩모텔 -> 2부  민주 일보 -> 3부 원더 랜드  

 

 

 읽어보면 이 순서가 그냥 놓여진 게 아니라 보다 분명한 목적을 두고 배열된 것임을 알게 된다. 또한 여기에서도 이 소설이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는 것이 성찰을 향한 '관찰'임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 순서가 정확히 우리가 관찰하는 과정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관찰의 과정에 있어 언제나 첫 시작은 대상이다. 먼저 대상이 놓여져 있어야 관찰은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살해된 한 여성의 시체로 시작을 여는 홍콩모텔은 죽음과 누명의 장소로 'B 컷'의 게임판이며 연이어 등장하는 'B급'으로 밀려난 네 명, 그 어느 누구도 살이의 피로와 아픔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진정 관찰을 위해 놓여진 대상인 것이다. 현상이 개화되면 관찰이 시작된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지 가늠해간다. 그게 바로 2부 민주일보의 과정이다. 아예 윤과 에스더가 일하는 신문사 이름을 제목으로 명기하여 이렇게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다. 관찰의 끝엔 결론이 있다. 파악한 원인을 통한 해명이 있다. 3부 원더랜드가 그렇다. 거기서 궁극적으로 이 모든 아픔들의 원인이 하나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이 소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이 밑바닥의 삶들이 이토록 힘든 이유는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지 않고 위로 부터 부과되어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피해자다. 그것도 자신들에게 아무런 원인이 없기에 아주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피해자. 제목 'B 파일'은 그것의 상징과도 같다. 누군가가 분류한 파일엔 'A 파일'과 'B 파일'이 있다. 'A 파일'은 지금은 미약하나 나중에 키워서 써 먹을 수 있는 존재들의 것이고  'B 파일'은 죽음조차 써먹을데가 없는 잉여인간들의 것이다. 하지만 최혁곤 작가가 내놓고자 하는 원인은 이 분류된 파일에 있지 않다. 그가 원인으로 제시하고 싶은 보다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이 파일 자체에 담겨진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다.

 

 'A 파일'이든 'B 파일'이든, 이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보는 시각은 똑같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이 아닌 이용 가능한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이 목록에 오른 사람들의 존재 가치는 분류한 자에게 있어 도구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래서 쓸모가 없으면 쉽게 버린다. 그 누군가 중의 하나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충견을 원했는데... (P. 394)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위에 있는 자들이 아래에 있는 자들을 오로지 이와 같은 시각으로만 보고 있기에 우리의 현실은 이리도 '홍콩모텔'과 같은 느닷없는 추락,고통 그리고 죽음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왜 네 명 중 두 명인 리영민과 윤을 하필이면 보다 상층의 존재로 설정했는지 드러난다. 편집국장이나 양미라의 삼촌이 되는, 현재 잘나가는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나 직업이 자신을 보호해 줄 튼튼한 장벽이라 여겼지만 보다 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 한 번 움직이자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리는 것을 경험한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한 번의 파도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로써 최혁곤 작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탄탄한 안정은 부질없는 꿈이라고 말한다. 경찰 서장이 무심코 술김에 한 말 때문에 결국 옷을 벗게 되는 소설 속 장면처럼 말이다. 마치 천라지망처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 항구적 불안. 바로 그것이 도래된 연유에는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시각이 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자신할 수 있을까? 사업가들이 비정규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공장주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국 노동자와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면 성적 소수자와 같이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는 나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의 시각이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이러고 보면 다른 두 명, 즉 미호와 에스더는 리영민이나 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일단 미호는 존재 자체가 경계 위에 있다. 그는 남자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즉 태어난 것과 전혀 다른 타자적 신체를 받아들이려 하는 존재인 것이다.(이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작품에 와서 전면에 등장한 것도 3부에서 제시한 저 시각에 어떤 대안 같은 것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비단 미호의 신체만이 아니다. 그/그녀가 걸어온 길 또한 그렇다. 그/그녀를 결국 킬러에 이르게 했던 살인들은 모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 결과였다. 그렇게 그/그녀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고유한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로 보는 자였다. 이는 에스더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경찰서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며 결국 할머니와 시위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미호와 에스더는 모두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아픔을 유발시키고 있는 현재의 근원적 시각으로 부터 모두를 치유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시각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이 소설에서 유일한 구원자적 존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만큼이나 이야기했으니 이 소설이 내게 나무랄 데 없었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문제는 3부다. 미호와 에스더를 이리도 정성껏 구원자적 존재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력이 없다는 게 참 아쉽다. 몰입도도 좋고 이야기를 차츰 절정으로 이끌어가는 것도 좋아서 풍선처럼 한 번 거세게 폭발할 순간만을 기다리며 잔뜩 부풀리고 있는데 톡 터뜨려 주기는 커녕 그냥 입구를 더욱 묶어 버리니 뒷 맛이 영 개운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미호의, 그 이름의 진짜 주인이 되는 '신 시티'의 미호만큼이나  무자비한 복수신을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이렇게 끝내기엔 그동안 죽은 사람들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최혁곤 작가의 잠자리가 과연 편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혹시 꿈마다 소설에서 죽은 원혼들이 '내 생명 돌리도~'하고 나오는 것은 아닐지. 뭐, 그만큼 아쉽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것은 현실적 결말을 추구한 결과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현직 기자이다 보니(그는 현재 경향신문 기자다. 소설 속의 기자 묘사 장면들이 더없이 현실감 넘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통화중 녹음 기능이 안되어 기자들은 아이폰을 이용하지 않는다든지, 수습 기자 때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것을 마와리(일본말이다.)라고 부른다든지, 경찰서 기자실이나 편집실의 모습 같은 이런 저런 기자 생활의 디테일한 면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얻게 되는 또 하나의 자잘한 재미들이다.) 장르적 쾌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마무리지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만일 그랬다면 3부 부분을 더욱 늘려야했지 않았나 싶다. 인물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정리되는 느낌이 있다. 더구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죽음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것도 의아하다. 다들 너무도 쉽게 납득해 버리는데 그런 행동들이 거기까지 공들여 설정해 놓은 것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화끈하게 폭발시켜 버렸으면 하고 자꾸 아쉬움이 든다. 그랬다면 같은 B 파일의 존재로서 동병상련을 느꼈던 우리의 답답한 마음도 그와함께 휘발되어 버렸을 테니까...

 

 이런 저런 약점은 있지만 그래도 결론지어 말하자면 앞에서 죽 이야기 한 대로 그 속만은 꽉 차 있는 좋은 작품이다. 깊이도 재미도(뒷 부분이 많이 아쉽긴 하지만) 한국 장르 소설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나아갔구나 하고 새삼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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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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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화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박정희에 대한 선망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가장 성공적인 팩션으로도 알려진 '영원한 제국'이 사실은 박정희를 비호한 작품이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만큼 알려진 바이다. 그 때 이런 말을 듣고 설마했던 사람들도 다음에 그가 박정희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인간의 길'을 내놓았을 때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뭐, 이건 별로 감춰진 사실도 아니다. 그가 당당하게 자신의 그러한 선망을 공표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건, 굳이 과거의 전력을 들추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보다는 그의 작품에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어떤 신념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또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작품인 이 '지옥설계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기 있기에 부러 언급하는 것이다.

 

  그 신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보다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들을 선도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단순히 말해서 그에겐 '엘리트 주의'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선망은 바로 그러한 신념이 구체적 모습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그는 철인에 의한 통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라고 말했던 플라톤의 후계자다. 그 철인의 역할을 이 작품 '지옥설계도'에서는 '강화인간'들이 맡는다. 이름 자체에서 바로 그의 신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소설을 주로 이끌어가는 주체들인 강화인간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원래 태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약물의 의해 인위적으로 강화된 인간이다. 그것도 몸이 약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죽게 된다. 그래서 강화인간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종의 '어 퓨 굿맨', 즉 '소수의 정예들'이라 할 만하다. 강화인간이 엘리트 주의가 신체화된 표현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단서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보통 인간들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들을 보여준다. 엑스맨으로 치자면 '매그니토' 급인 자우얼이란 중국인은 중국 정부에 의해 처음 강화 인간으로 육성된 자로 무지렁이 산골 농부 청년에서 삽시간에 세계 자본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천재가 된다. 또한 역시 액스맨으로 치자면 '프로페서 X'라 할 수 있는 한국인 이유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구나 그는 집단 최면을 걸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구태여 이 둘을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에 비유한 것도 사실 이 둘이 그 둘과 비슷한 능력 그리고 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자우얼은 매그니토가 자력의 힘으로 금속을 마음대로 움직이듯이 세상의 돈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에겐 야망이 있는데 그건 강화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약한 인간들이 강화인간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건 매그니토의 신념 그대로이고 또한 그가 오로지 외부적인 것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자우얼 역시 돈이라는 외부적인 것 밖에는 못 움직인다. 반면 이유진은 그야말로 '프로페서 X' 다. '프로페서 X'가 텔레파시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움직이듯이 그 역시 그러하다. 또한 뮤턴트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오로지 지배만을 고집하는 매그니토에 반발하여 인류와의 조화와 공생을 추구하는 '프로페서 X' 처럼 이유진도 그것을 추구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자우얼에 반대하여 강화인간을 주축으로 하는 '공생당'을 만든다. 그 공생당의 핵심 맴버이기도 한 캘빈에 따르면 공생당은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한다.

 

 

 "천만에, 우리의 관심은 오직 행성에 있어. 인류의 대다수가 가난해졌고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렸어. 지구 환경은 점점 악화되고 행성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지. 그런데도 이 행성의 미래에 관한 결정들은 어떤 정부보다도 많은 돈을 주무르면서 돈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인간들, 선거에 의해 뽑히지도 않는 인간들에 의해 내려지고 있네. 우리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거야."(P. 49) 

 

 이 말을 일부러 인용한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왠지 나는 여기서 왜 이인화가 강한 소수에 의한 지도체제를 원하는지 그 이유를 보게되는 것 같다. 이 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자본가 계급에 대한 원망이다. 바로 이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재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 자체에 대한 경멸이 거꾸로 그 자본가 계급을 발 아래 두고 마음대로 휘둘렀던 박정희에 대한 선망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가 싶은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그렇게 크게 이 자우얼과 공생당 그리고 강화인간을 제거하고 싶은 인류의 대립 구도로 전개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엑스맨적 구도와 흡사하다. 물론 이 소설은 강화인간들이 전면에 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당의 설립자 이유진이 살해된 이유와 그 범인을 추적해가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엑스맨에 있어서는 지배냐 아니면 조화냐의 구도였지만 '지옥설계도'는 자본과의 타협이냐 아니면 새로운 가치 질서의 수립이냐의 구도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하필이면 '지옥설계도'일까 궁금하실 것 같다. 사실 제목의 지옥은 진짜 지옥은 아니다. '매트릭스'처럼 가상 세계의 지옥이다. 먼저 왜 이런 세계가 등장하게 되었는지 말하는게 순서일 것 같다. 이 세계는 이유진이 죽을 때 만들어졌다. 앞서 이유진의 능력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집단 최면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의식적으로 뿐만아니라 특히나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유진이 살해당할 때 그의 능력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어 버렸다. 그런데 공생당의 강화인간들은 강한 텔레파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 이유진의 능력을 수신해 버렸다. 그게 의식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에 이유진의 집단 최면 능력을 텔레파시로 수신받은 공생당의 강화인간들은 모두 그 정신이 이유진이 만든 최면 세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즉 식물인간 같은 처지가 되어 정신만은 이유진이 설계한 최면 속 세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 세계의 이름이 바로 '인페르노 9'이다. 영원한 꿈만 꾸는, 그렇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들을 다시금 깨우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하다. 이유진은 미리 그 열쇠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설계도'다. 소설은 이렇게 이유진을 죽인 이유와 범인과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지옥설계도'를 찾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제목에 지옥설계도가 전면에 나온 것은 사실 이 소설이 인터넷 게임인 '인페르노 9'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후기에 있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과 게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 게임의 설정이 어떠하고 추구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프롤로그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아예 '인페르노 9'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삽입되어 있는데 게임에 구현될 세계가 대략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게 될런지 짐작케 한다.(수십페이지에 걸쳐 인페르노 나인의 연대기를 말해주는 부록까지 있다.) 그렇게 게임을 위해, 게임과 융합된 소설이기에 제목이 '지옥설계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왜 일부러 저런 복잡한 설정으로 굳이 인페르노 나인을 끌여들였는지 이해가 된다. 공생당 당원들이 집단 최면으로 인페르노 나인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한 마디로 우리가 온라인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은유다. 이렇게 한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인페르노 나인이 그냥 가상세계가 아니라 게임적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굳이 게임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의 면면 때문이다. 게임적 세계임을 드러내는 이 '인페르노 나인'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강화인간들이다. 보통 인간들 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들만이 들어간다. 또한 그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자본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려하는 자우얼에게 맞서 공생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지구를 구원하려는 자들이다. 작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강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들. 그들만이 인페르노 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이만큼 말하면 눈치채셨을 것 같다. 맞다. 작가는 게임에 참여하는 자들의 존재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굳이 인페르노 나인에 들어가는 절차를 복잡하게 설정하고 강화 인간이라는 존재들을 가져온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존재들은 소수의 정예들 뿐이다.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능력으로 무장한. 인페르노 나인은 그런 자들만이 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니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말라!'

 

 '지옥설계도'는 이 외침을 위한 소설이다. 여전한 엘리트 주의와 엑스맨과 차이나는 구도 그리고 강화인간과 인페르노 나인의 설정은 복잡하게 뒤엉켜 '오늘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기존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가치관만이 가능하다'라는 것을 부르짖으며 여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그가 게임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그건 뭐 당연하지 않을까? 아직도 우리에겐 게임에 대해선 부정적 시각들이 지배적이니까. 게임은 유희의 마당이요 현실 도피의 통로요 오로지 시간만 낭비할 뿐인 백해무익의 터전이니까. 셧 다운제가 이 모든 부정적 시각들을 체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필요했을 것이다. 게임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통로가. 플레이를 하는 데 있어 당당해질 수 있는 이유가.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이렇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시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게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실 나는 게임에 그다지 부정적이지도 않고 저번 '어번던스' 리뷰할 때 썼던 것처럼 게임이 지금 현실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얼마든지 새롭게 보완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옥설계도'가 이러한 취지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지옥설계도'도 엄연한 소설인 이상 그것이 얼마나 충실히 구현되어 있는지 또는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또 달리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작가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지옥설계도'가 좋은 소설인가 아닌가의 문제뿐입니다' 그리고 '좋은 소설은 어떤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한 사람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그려져 있는 소설'이라고.

 

 명시한 작가 자신의 좋은 소설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말하자면 그렇게 좋은 소설로 보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부대끼는 한 사람의 모습들은 이유진의 죽음을 추적하는 국가정보원 김호 그리고 공생당의 강화 인간들인 이유진, 새라 워튼, 벤, 준경 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열된 어느 인물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는 진실된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짧고 때로는 다른 에피스드들이 끼어들여 산만해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 혹은 고뇌에 몰입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엔 이 소설이 너무 디테일하다는 것도 한 몫한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리얼리티를 보다 충실히 하려고 그랬겠지만 정보 기관이나 세계 정세 또는 경제 지식 혹은 이런 저런 이론들이 너무나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어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인물들의 감정 동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진행되는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그러니까 독자들이 이야기적 흐름을 잡을 수 있게) 순서로 나오지 않고 더러는 마치 두더쥐잡기 게임에서 튀어나오는 두더쥐처럼 나온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산만하게 나와서 더욱 몰입이 방해되었다.(사실 그래서 이 소설을 몇 번이나 리와인드 했는지 모른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던 것은 정말로 작가가 공생당이 말하는 가치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새라 워튼의 이야기는 작가가 그것을 믿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지만 후반에 밝혀지는 범인에 대한 술회에서는 어쩐지 스스로도 그런 것을 불신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과도 관계되기에 이런 믿음에 대한 통일성은 꼭 지켜져야 할 것 같은데 읽다보면 어떤 혼돈과 망설임의 지점들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소설을 소화시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좀 더 분량을 늘이더라도 인물들의 고뇌가 충실히 드러날 수 있는 긴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임과 동시에 진행하느라 어려웠을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 따르면 눈깜짝할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라니 어쩔 수 없이 잉태하게된 부족함 같기도 하다. 게임을 전혀 새롭게 인지시키려는 시도 자체는 좋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이 소설을 쓰게 한, 그가 온라인 게임에서 느낀 게임 참여자들의 헌신적인 순교자들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공감시키기 위해서라도 보다 긴 시간을 두고 차분히 숙성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욱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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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0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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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3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년을 기다리며 필립 K. 딕 걸작선 9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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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 봐...'

 이건 커트 보네것의 말이지만 누군가 필립 K 딕의 1966년 작품, '작년을 기다리며'를 읽고난 뒤 들었던 기분을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말하겠다. 그건 이 작품이 내게 무엇보다 '힐링'이었기 때문이다. 필립 K 딕이 이 책에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비록 이 책이 66년에 나왔고 지금은 무려 47년이 지난 시점이긴 하지만 내게 딱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그런 힐링의 힘이 간직되어 있을 줄은 몰랐고 정말 우연히 읽게 된 것인데 마치 나에게 주려고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 양 얻게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궁금하실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내가 받은 힐링의 느낌을 충실히 전하는데 바쳐야 할 것 같다. 때문에 아무튼 일단은 내 자의적으로 끌고 가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 필립 K 딕이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 에릭에게 왜 그런 결단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필립 K 딕의 소설을 즐겨 읽으면 알겠지만 딕은 언제나 자신의 소설 속에 쓰던 당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기를 좋아한다. 딕의 소설의 묘사되는 부부관계가 대부분 그리 원만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당시의 딕 자신이 그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또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작품 곳곳에 나오는 마약을 통한 기묘한 체험도 모두 자신이 직접 흡입한 LSD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때문에, 이건 필립 K 딕의 소설을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팁이기도 한데, 사실 필립 K 딕의 소설은 그것을 쓸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고 읽는 게 더 좋은 것이다. 아무튼 그 정도로 필립 K 딕의 자전적 체험이 소설 속에 눅진히 깔려 있기에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필립 K 딕의 소설은 그가 상처받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현재를 어떻게 관통해 나갈 것인가 그 해법을 스스로 찾아보는 여정이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쓸 때의 딕의 상황 때문에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 때의 딕 상황은 역자 김상훈의 후기에 그 상황이 잘 나와 있는데 그걸 여기에 다시 인용해 본다.

 

  딕이 본서 '작년을 기다리며'를 집필한 것은 히피운동이 세계 청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노골화되던 1963년의 일이었다. 사생활 면에서는 세 번째 아내인 앤과의 결혼 생활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약물 과용에서 비롯된 극심한 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최악의 시기이기도 했다. 딕은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연료 삼아' 하루에 A4용지로 6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워낙 박한 고료 탓에 생계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먹고 살기 위해 또다시 암페타민에 의존하며 글을 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P. 402)

 

 이 작품을 다 읽고 이 글을 읽으면 작품의 모든 내용이 바로 이러한 미국의 상황과 그 때의 딕 처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란 걸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 느껴지는 딕의 상황은 그야말로 '악순환' 혹은 '막다른 골목'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소설 '작년을 기다리며'의 주된 분위기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단 소설의 모든 관계들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주인공 에릭은 아내 캐서린과 이혼할 지경에 이르고 지구는 현재 우주  전체를 두고 싸우는 지구 보다 훨씬 문명이 발전한 두 외계 종족간의 싸움에 휩쓸려 있다. 그 두 외계 종족이란, 하나는 인류의 먼 조상이 되는 릴리스타 종족이고 다른 하나는 곤충과 닮은 리그라는 종족이다. 물론 지구는 자신의 조상이 되는 릴리스타 편에 서서 리그인들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에릭이 아내 캐서린을 믿지 못하게 되듯이 지구 역시 자신의 우방인 릴리스타를 믿지 못하게 된다. 릴리스타가 전쟁에 미온적으로 참여하는 지구를 못마땅하게 여겨 틈을 보아 강제적으로 합병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들은 모두 믿음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이어가야할 책임이 있는 존재들은 모두 병적으로 죽음에 집착한다. 관계를 완전히 없앨수도 없고 또 계속하다니 견딜수도 없고 해서 스스로를 파멸시켜서 그로 부터 해방되려는 것이다.

 이렇게 남편 에릭은 도저히 캐서린으로 부터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자살을 원하고 지구의 최고 권력자 지노 몰리나리는 빠져나올길 없이 점점 악순환만 가중되는 지구 운명에 대해 책임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에릭과 몰리나리는 딕의 당시 모습을 고려한다면 그대로 딕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그건 애커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현실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더욱 과거의 향수에 젖고 싶은 딕의 마음을 체현한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에릭이나 몰리나리 못지않게 악순환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릭이 느끼는 결혼의 고통이나 몰리나리가 안고 있는 지속의 막중한 책임감은 당시 딕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을 둘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딕의 분신들이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살을 원하고 있음은 그 때의 딕역시도 죽음으로써 해방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작품 속 지구의 상황은 그대로 당시 미국과 베트남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딕은 릴리스타와 같은 미국의 개입이 순전히 베트남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작년을 기다리며'는 당시 자신의 처지와 미국의 당시 상황등 어디까지나 현재를 바탕으로 직조된 견직물이었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악순환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처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은 사실 당시 그와 똑같은 악순환에 빠져 있던 딕이 당시의 곤경으로 부터 헤어나려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한 번 흡입하기만 하면 바로 심각하게 중독되어 버리는 무서운 마약이지만 과거나 미래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여 지금 지구가 처한 상황을 해결할 비책도 되는 약, JJ-180 이다.

 

 왜 여기서 마약이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그 때의 딕이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이 '암페타민'이라는 마약이었음을 볼 때 쉽게 이해된다. 이렇게 딕의 실제 삶을 알고 읽으면 설정의 많은 것들이 이해된다. 그가 암페타민을 통해 그래도 고료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듯이, JJ-180 은 처음엔 그저 무서운 무기였으나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처음 그저 죽기만을 바랐던 에릭은 그 약으로 이제 자신이 뭔가 타인에 대해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독자가 되는 걸 무릎쓰고서라도 그 약을 먹고 시간을 이리저리 오가며 지구를 구할 방도를 찾아 다닌다. 다시 말해 그 때의 에릭에겐 유일하게 그 약만이 삶을 계속하게 만드는 희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건 현실의 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오로지 암페타민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에릭이 JJ-180 에 걸었던 희망은 그대로 딕이 암페타민에 걸었던 희망이었다. 그는 간신히 버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에게 개입했고 딕의 상황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JJ-180 역시도 이 악순환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에릭이 느꼈던 좌절은 그대로 딕의 좌절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도 현재에서도 구원의 통로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젖히기 위해 몰리나리는 스스로 죽는다. 그렇다면 에릭도 그래야할까? 소설의 마지막은 마치 점점 거세어지는 죽음의 유혹과 싸우는 딕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딕의 마음에 떠오르는 수많은 망설임들은 소설 속에서는 에릭이 분신으로 나타나서 이런 저런 선택을 강요한다. 거기엔 결국 마약 중독으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내 캐서린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분신도 있고 지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벗어버리고 그저 자기 인생에만 열중해 살아가는 분신도 있다. 아마 이건 모두 그 때 딕에게 들렸던 유혹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끝내고 자유로워져라' 아니면 '미국이 베트남을 깽판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네 인생이나 잘 챙겨!' 하는 등등의 육체의 죽음 혹은 영혼의 죽음을 부르짓는 목소리들 말이다. 이러한 수많은 유혹과 망설임은 더욱 그의 신경을 혹사시켰고 그래서 어서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제목 '작년을 기다리며'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로 돌아가고픈 딕의 염원을 절박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은 건 몰리나리가 선택했듯 죽음 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자살하지 않는다. 인생에 짐만 되니 제발 아내 캐서린을 포기해 버리라고 미래의 자신이 간곡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절망하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어디에도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싸워 나가리라 생각한다. 식물인간이 된 캐서린과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지구지만 먼저 나서서 껴안으려 한다. 왜? 도대체 왜?

 

 이런 것들조차도 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브루스의 말이 옳았다. 이것들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태양과 하늘 아래에서 미미하게나마 자기 자신만의 조그만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뿐이며,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한 요구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수레들이 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서 티화나의 쓰레기가 널린 골목에서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저 양동이 속으로 피신한 존재에게는 아내도, 직업도, 아파트도, 돈도 없고, 그런 것들과 조우할 가능성조차도 아예 없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에서, 저 수레가 자기 존재에 부여하는 가치는 나보다 훨씬 더 높다.(P. 391) 

 

 바로 여기서 에릭이 왜  다시금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하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브루스의 작은 수레 장난감을 보면서 에릭이 깨달은 것은 '저렇게 작은 것도 살려고 하는데 왜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진 내가 포기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에릭은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지속이야말로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의 의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의 자기 증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싱겁다. 그동안 보여준 절망의 크기에 비해 여기서 가지게 된 삶의 의지는 다소 미미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삶은 그냥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딕이 말하는 삶은 일종의 감각이다. 그것도 고통과 대면하며 시련과 싸움으로서 얻어지는 감각이다.

 

  무엇을 해도 합법이고 무엇을 해도 가치 있는 일은 생겨나지 않는 도시. 에릭은 생각했다. 그런 도시에서는 인간은 어린 시절로 억지로 끌려가게 된다. 블록 쌓기 완구나 다른 장난감 따위에 둘러싸인 채로, 전 우주가 손에 닿는 곳에 있었던 시절로. 이런 자유의 대가는 크다. 성숙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P.371)

 

 아내를 저버린다는 행위는, 나는 그런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 나만의 특별히 쉬운 상황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 하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P. 395)

 

 

 그가 말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여기서 잘 나타난다. 그는 오히려 삶은 시련과 불안정 속에 처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성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실 속 화초가 되기보단 들판의 잡초가 되는 것. 그것이 딕이 바라보는 삶이고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의 자기 증명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싸우는 가운데,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닥쳐진 죽음 앞에서 끝까지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진정한 삶은 도래할 것이라 그는 믿는다. '작년을 기다리며'는 그런 책이다. 어려울 수록 더 환영하라는 책이다. 왜냐하면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딕의 솔직한 내면이 짙게 투영된 소설이었기에 마지막에 찾은 이 각오가 그래서 더 마음 찡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의 힐링 또한 그렇체 찾아왔다. 당시의 현실에서 딕이 느꼈던 절망, 소설 속에서 에릭이 느꼈던 좌절감을 나 역시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느끼고 있었다. 딕과 에릭이 방황했듯이 나 역시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다녔다. 딕과 에릭이 가장 많이 떠올렸던게 죽음 혹은 회피였듯이 나 역시 포기나 타협 이런 말들을 떠올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비슷한 마음, 비슷한 경로를 보여준 딕이 오히려 이래서 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왜 더욱 즐길만한 상황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힐링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나는 그러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에릭의 말을 인용하련다. 맨 앞의 문장만큼이나 진실인 이 문장을...

 

 묘한 기분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소름 끼치는 사건이어야 할 이 전쟁 한 복판에서 뭔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내다니 (...)  그 아연 도금된 양동이 안에 숨어있던 레이지 브라운 도그 수레가 갖추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욕구가 내게 생의 활기를 불어 넣다니. 아마 나도 마침내 그것의 동포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곁에 서서 내 자리를 지키고 그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처럼 싸우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싸우고 때로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기쁨을 느끼기 위해. (P. 393)

 

 

  Thank you, 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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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ㅋㅋㅋ 헤르메스님 제목 어떡해!!!!

ICE-9 2013-01-26 01:37   좋아요 0 | URL
어서 와, 이런 제목 처음이지?
소이진님께도 이렇게 들려드리고 싶네요^ ^

마녀고양이 2013-01-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의 걸작선이 벌써 9권이 나왔군요....
3권까지 사놓고, 아직 읽지도 못했는데... ㅠㅠ.
거기다 예전부터 이 작가를 좋아해서, 옛날에 사놓은 책과 약간 겹치기도 하고.
정말 커다란 창고를 가지고 싶어요, 책을 왕창 꽂아놓을.
아니면 지하도서관이나 다락방도서관.

그런데, 저자의 그런 사정을 듣고나니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확실하네요.
헤르메스님, 평온한 한주되셔요.

ICE-9 2013-01-26 01:41   좋아요 0 | URL
과연 완간이 가능할까 생각했었는데 정말 무서운 속도로 완간으로 나아가고 있네요^ ^ 흑흑 저도 예전의 필립 K 딕과 얼마나 겹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전 유빅까지 전에 나온 건 거의 다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걸작선을 소장하는데 정말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저 역시 가뜩이나 집이 좁은데...ㅠ ㅠ
재즈광으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공항의 비행기 격납고를 자신의 소장 재즈 음반 창고로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정말 돈을 많이 벌면 그런 창고 하나 가지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