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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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아버지처럼 큰 힘과 용기를 줄 때가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한 줄의 글귀가 어머니처럼 큰 위안과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과 글을 만날 때마다 늘 마음 속에 새겨두거나 시작노트 한 귀퉁이에 메모해두곤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꺼내어 마음 속에 새기거나 읽으면서 제 인생의 소중한 물과 밥으로 삼았습니다.

 

-  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중에서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란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이러한 고백은 비단 정호승님 만의 고백은 아닐 것이다. 우리 역시도 살아가는 어느 한 순간, 마치 자기 혼자 세상을 짊어지고 있는 듯 힘겨울 때 마음 어디엔가 새겨진 누군가의 한마디 때문에 위로를 얻고 격려를 느꼈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한없이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기만 했던 말 한마디가 문득 '해님달님'에 나오는 호랑이의 손에서 오누이를 구해 주었던 동앗줄처럼 그 어떤 것 보다도 더욱 튼튼히 날 지탱해주고 힘차게 끌어올려 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말이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그냥 괜스레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땐 정말 그 정도의 가치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런 느낌과 체험을 한 이들이 많았기에 시대마다 나라마다 여지껏 격언이나 금언의 형태로 '한마디'들이 그리도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7년만에 다시 만나보는 정호승님의 에세이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는 그러한 한마디의 힘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는 책이다. 한마디의 말로 응축되는 글들은 전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만큼이나  여전히 아픈 배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아서 삶이 가져다준 실패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벽 때문에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린 영혼을 따스한 위로로써 어루만지고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다시금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야말로 지금 무언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진 웹스터의 소설에서 주인공 주디에게 있어 '키다리 아저씨'가 그랬듯이 더없이 의지가 되고 더 높은 곳으로 활짝 날아오르기 위한 도약대가 되어 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정호승님의 글들은 모두 세 개의 묶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개인적인 느낌으론 그 말들의 대상이 각각 다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첫 묶음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는 뭔가를 하려고 마음은 먹었으나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아마도 그 때 용기를 갉아먹는 이유들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우려, 제대로 못해서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식의 불안 등등.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에 모여있는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겪고 있는 자들을 위한 정호승님의 귀한 조언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걱정하는 이들에겐 '광활한 우주의 시각에서 지금의 현실을 볼 것'과 '모든 벽은 문이다'라는 말로 현실에 가로놓인 장벽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그리고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식의 불안에 대해서는 정호승님 자신도 해마다 실패 기념일을 만들어 기념한다는 일화를 통해 '실패는 기념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의 싹을 틔우니' 오히려 실패에서 배울 것이 더 많으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견딤이 쓰임을 결정합니다. 내게 견딤이 있어야 귀하게 쓰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p. 49) 

 

 

생각한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것인가가 걱정스런 이들에겐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는 성철 스님의 말처럼 진정한 성과는 오로지 많은 시도와 노력 끝에 얻게 되는 법이니 시도와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바로 우리의 삶으로 여기라 말한다. 더구나 삶에 있어 모든 공부란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듯' 아무리 눈을 져다 부어도 우물은 그저 우물로서 존재하는 법이니 설령 실패한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은 본디 '나'라는 자아 속에 고귀한 자산으로써 남아있을 것이니 무가치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일단 무조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볼 것을 권한다.

 

  꽃이 보고 싶은 순간에 꽃씨를 뿌리면 이미 늦었다고 아예 뿌리지 않는다면 보고 싶은 꽃은 영영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은 꽃을 볼 수 없지만 일단 꽃씨를 먼저 뿌리는 게 중요합니다.(p. 41)

 

  인간은 목적을 달성하는 이에게 관심을 갖지만, 신은 열심히 노력하는 이의 과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목적은 결과일 뿐, 목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이 중요할 수록 과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적에 몰두하되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목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그 목적에 이르게 됩니다.(p. 171)

 

 두 번째 묶음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 는 이미 실패를 경험하고 용기가 꺾여진 이들을 위한 글 모음이다. '엎질러진 물 때문에 울 필요는 없다'는 말로 실패의 원인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늘의 곤경을 해결할 생각부터 할 것이며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듯' '진주조개가 스스로 이물질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듯' 실패 역시도 성장하는 과정중에 뒤따르게 마련인 성장통인 것이니 거기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 것을 일러준다 중요한 것은 화살이 자신이 떠나온 활 시위를 생각하지 않듯이 뒤를 돌아다 보는 것보다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엔 오늘 내가 느끼는 부정(negative)을 오히려 긍정의 계기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면 미래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미래가 더 불안하게 됩니다. 내 노력과 준비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여러 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래서 '미래학은 예언이 아니라 선택의 미학'이라고 합니다.(P. 285)

 

 세번째 묶음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는 첫번째처럼 머뭇거리는 사람이나 두번째처럼 실패로 방황하는 사람 모두가 나아감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아놓은 글 모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걸음 가운데 우리의 시야를 어디에 둘 것인지 그리고 나아가는 나의 보폭을 어느 정도로 결정할 것인지 그 모든 것을 행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내 마음의 중심은 또한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자애롭게 들려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산문집은 맨 앞에 인용한 그의 말처럼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순간, 또는 다시금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물과 밥이 되는 책이다. 여기엔 참으로 새겨두고 싶은 한마디의 말들이 많다. 그래서 어쩐지 제 느낌엔 그 말들 하나하나가 다들 깃털 같다. 하나로 모이면 날개가 되어 날아오르게 해 주는 그런 깃털들 말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공명해 왠지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마치 그대로 날아오르려는 듯 발돋음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많이 느끼게 되니까.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분들은 분명 이 책을 통해 적잖이 위로와 힘을 받으시리라 생각된다. 벽이 더 이상 벽이 아니라 바로 문 이라고 보게 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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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3-0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구매했답니다.
정호승님의 산문집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부록으로 손바닥 반만한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책이 왔어요. 제가 요즘 노안이 오는 중이라, 흐흐, 이 책 절대 안 보여염... 출판사에서도 알아주었으면! 에휴휴.

ICE-9 2013-03-12 18:19   좋아요 0 | URL
와! 달여우님 저랑 너무 비슷하세요^ ^ 저 역시 정호승님의 산문집을 좋아하는지라 바로 구해 읽게 되었거든요^ ^ 저도 그 작은 책 있어요. 저는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문제점도 있겠군요. 아무튼 정말 반갑습니다^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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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사랑스러운 표지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2012년에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으로 표지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왠지 읽으면서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누워서 고양이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간질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느꼈다. 손가락을 살살 간질거릴 때마다 고양이는 기분좋게 갸르릉 거려주고 살짝 꼬리를 흔드는 그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분수처럼 흩어지는 그런 느낌...

 

  소설은 일단 영화 '시월애'가 참 많이 생각났다. 이정재와 전지현이 나왔던 그 영화도 이 소설과 똑같이 같은 하나의 공간을 두고 서로 시간대를 달리하는 두 남녀가 편지를 주고 받던 그런 이야기였다. 어쩌면 정말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 영화에 영향을 받아 쓴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영화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최근에 함께 나온 '패러독스 13'도 알고보면 당시 방영되었던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살짝 변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뭐, 아무튼 호기심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한 리뷰가 얼마나 되나 살펴보니 무려 133개나 된다. 정말 압도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우라나라에서의 히가시고 게이고 인기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인 것 같다. 정작 나로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만난 게 얼마되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우리나라 영화 말고 일본 영화) 때문에 들춰보았던 '용의자 X의 비밀'이 처음인 것 같은데 그 시기 즈음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도 순수 작품에 대한 관심 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원작으로서의 궁금증 때문에 보았다. 이를테면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면 그 원작을 찾아 읽고 '회랑정 살인 사건'을 보면 또 그 원작을 찾아 읽는 식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정말 많이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우리나라만 해도 '백야행'과 '용의자 X의 헌신' 두 작품이나 된다.) 그것만 해도 얼추 한 반 정도는 보았던 것 같다. 일단 그 정도의 경험으로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대해서 말하자면 색다른 시도이긴 해도 완전한 전환은 아니고 행여 색다른 시도라 인정한다 해도 그게 한 때의 기분전환으로 쓴 일시적인 변주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준 정황상 다다를 수 밖에 없는 종착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이다.(원래는 여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쓰다보니 꽤나 길어져서 과감히 생략했다. 훗날 제대로 밝히기로 하고 바로 패러독스13과의 비교로 넘어가려 한다. 널리 양해해주시기를...)

 

  기왕에 말이 나왔기 때문에 '패러독스 13'과 한 번 비교해 말해 본다. '패러독스 13'은 2009년에 나왔다. 나미야 잡화점이 나오기 정확히 3년 전이다. '패러독스 13'은 일단 SF 다. '패러독스 13'은 새로이 나타난 블랙홀의 영향으로 13초간 지구 전체의 시간대에 문제가 생긴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니까 13초란 순간이 모든 지구에서 삭제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왜냐햐면 사람의 기억이란 어디까지나 그 시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수정되면 기억 또한 수정되어 바뀌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혹 이것이 이해 안되신다면 필립 K 딕의 '유빅'을 읽어보실 것을 추천드린다. 거기 나오는 능력자들 중 하나는 임의적으로 과거의 시간을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수정을 당해도 누구도 자신의 과거가 수정되었는지 모른다. 바로 몇 초전만 해도 전혀 다른 현재를 살고 있었는데도 완전히 달라진 현재를 진짜 자신의 현재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패러독스 13'의 13초 실종의 효과는 이런 것이다. 아무튼 결국 그 순간이 지구에 도래한다. 그런데 정작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 했던 과학자들의 말과는 달리 지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오직 몇 몇 만이 텅 빈 지구에 남아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그들조차 미래가 별로 순탄치 않다. 지구가 마치 격노하는 것처럼 요동을 치기 때문이다. 지진, 쓰나미가 바통 터치를 하듯 그들에게로 밀려든다. 폐허와 절망만이 그들에게 남겨진 모든 것이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패러독스 13'은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지는 하필이면 그들만 살아남게 된 진짜 이유도 꽤나 충격적이다. 읽어보시면 왜 굳이 이 작품을 인용해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말하려 하는지 아실 것이다. 그건 두 작품의 분위기가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패러독스 13'이 그림자라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을 두고 말한다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갈릴레이 교수라면 '패러독스 13'은 '용의자 X'다. 그런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일단은 여기서도 기본적으로 시간의 교묘한 뒤틀림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경향에는 한 가지 작품이 더 존재한다. 그것은 2010년에 나온 '플래티너 데이터'다. 흥미로운 것은 앞의 두 작품이 모두 다크한 버전이라는 것이다. 밝고 희망찬 버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밖에는 없다. 불과 1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까닭은 무얼까? 133편이나 되느 리뷰들 중에서 그저 그런 한 편의 리뷰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일부러 이런 계보학적 질문을 해 본다.

 

 의문은 하나 더 있다. 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필이면 오일 쇼크가 일어났을 때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 나미야 잡화점은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하나는 숨어든 세 명의 청년이 살고 있는 현대의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우유 통에 상담용 편지를 넣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바로 그 시간이 지금으로 부터 30년 전, 오일쇼크로 한창 위기 담론이 떠돌던 일본인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80년대의 버블이 있기 바로 전 위기의 일본을 그린다. 왜 그럴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녹아있는 희망과 긍정의 메세지를 기억하면 여기의 답은 얼추 나오는 것 같다. 그것은 그 때의 일본이 현재의 일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은 그 때만큼이나 위기다. 새삼 쓰나미와 지진 그리고 원전 사태로 정의내려지는 2011년의 3. 11을 거론할 것도 없다. 지금도 여전히 엔저를 고수해야 할만큼 일본은 그 자신있었던 경제에서조차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오일 쇼크 이후에 일본은 눈부신 80년대의 성장이 있었다. 모두들 그 때가 일본의 가장 전성기라고 이야기들 한다. 그러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통해서 무얼 주려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잘 견디면 오일 쇼크 후의 호황기처럼 다시금 좋은 시절이 찾아올 것이다'라는 메세지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장에 세 명의 청년들이 하필이면 호황기의 일본을 예언하는 편지를 쓰는 것도 바로 그 과거를 환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말해 그 때 히가시노 게이고가 등장인물의 손을 빌려 편지를 쓰면서 상정했던 수신인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일본인들이었다는 이야기다. 오일 쇼크 때 모두들 먹거리를 사재기 할 정도로 이제 일본은 끝났다라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가장 눈부신 전성기가 온 것처럼 바로 그 때를 떠올리며 희망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가 전하고픈 진심은 마지막에 나오는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글 진심으로 기원합니다.(P. 447)

 

 문제는 정작 이 편지의 수신인이 30년 뒤의, 바로 오늘의 일본을 살고 있는 세 청년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30년 전의 목소리다. 오일 쇼크로 인해 위기에 빠져 있던 그 때의 일본으로 부터 온 목소리인 것이다. 똑같은 위기요 절망의 상황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의 목소리. 그래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같은 위기와 절망에 빠진 현재의 세대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전하고 있다. 이 이상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려 하는 것이 어떻게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까?

 

 이는 이러한 경향의 시작이 되는 '패러독스 13'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그 때도 완전 폐허였고 생존이 절망적이 상황이었다. 그 때 생존자들은 어떻게 했던가? 나미야 잡화점 처럼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었던가? 아니었다. 생존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가차없이 버려졌다. 아내가 머리를 다쳐 살아날 가망이 없자 그의 남편은 기꺼이 안락사를 시킨다. 그러면서 억지로 도움을 줘서 일으키기 보다는 그냥 내버려 둬서 운명에 맡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한다. 비정함이 하나의 원칙이었던 게 '패러독스 13'이었다. 이는 '나미야 잡화점'이 간직한 우주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엔 아무래도 현실 사회의 영향이 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재미있는 건 요이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도 그렇고 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그렇고 이상하게도 작가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소설에서 이렇게 작가가 주고자 하는 것이 선명하게 부각되는 경우가 또 있었던가 싶다. 좀 더 살펴봐야 제대로 말 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이건 최근에 들어와서 생겨난 경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요런 부분이 좀 흥미롭다. 작가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작품보다 더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이 부분을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133편에 또 한 편의 리뷰를 더하며 이 글을 여기서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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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4번째군요, 어느 정도나 썼는지 그런 것도 찾아보다니...
이 이야기는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한테도 힘을 주지 않나 싶어요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오늘 들었던 라디오 방송에서 이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어요
패러독스 13에서도 마지막에서는 달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것은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희선

ICE-9 2013-03-12 18:30   좋아요 0 | URL
하하,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은 이 책을 어떻게 느꼈나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리뷰를 찾아봤더니 그만큼이나 올라와 있어서 놀랐더랬습니다^ ^ 희선님도 패러독스 13 읽으셨군요. 근데 이 소설 사실 다른 컨덴츠로 옮기기가 좀 그랬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미 게임으로 나온 '절체절명도시'와 너무 유사하기 때문에. 사실 그 게임 영향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아무튼 나미야에 비해선 좀 모자람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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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제가 처음 만나보는 요이다 슈이치의 소설입니다. 예전 신간 추천할 때도 썼습니다만 전 이 소설을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간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소개글에 그렇게 나와 있었거든요. '현재 '약자'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거나 한 때 있었던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거대한 사회 권력, 기득권층에 맞선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뭔가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인 '추적자'와 비슷한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읽어보시면 분명히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의 사회 권력의 기득권층과 싸우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사실 초점이 좀 엇나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평성(헤이세이) 원숭이와 게의 교전도'입니다. 제 생각엔 제목에 이미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다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서 '평성'은 현재 일본에서 사용중인 연호를 말하고(예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중에 '평성 너구리 대작전'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의 '평성'이나 여기의 '평성'이나 의미는 같습니다.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죠.) 원숭이와 게의 싸움은 일본에 전래되는 유명한 동화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그 이야기는 해설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고 하는군요.

 

 어미 게를 속이고 죽인 교활한 원숭이에게 새끼 게들이 앙갚음 하는 내용의 전래동화다.(p. 548)

 

 아마도 여기서 원숭이 를 거대한 사회 권력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래동화만 놓고 봐도 그렇죠. 이건 마르크스로 치면 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니까요. 원숭이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요이다 슈이치는 원숭이를 그걸로 상정하고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 소설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힘있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떤 풍경들은 더러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 무작정 정거장에 내리게도 하지요. 그런 정도의 풍경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하나의 계기로 작용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의 소개글은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것이죠. 만일 이 이야기를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로 심심한 작품이 되어 버립니다. 사회 권력층이 나타나고 그 도구로써 야쿠자들이 움직이는데도 정작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이다 슈이치는 그 대목을 서술할 때 조차 평이할 뿐이고 등장 인물들 또한 이렇다 할 불안감이나 위기감을 보여주지 않아요. 자기 자신이 당사자인데도 마치 영상 속에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인양 초연함이 있습니다.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말이죠. 더구나 해결 장면에 가서는 더 가관입니다. 정말 흐지부지 모든 갈등들이 정리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구나 싶더군요. 만일 갈등 초반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감을 부여했다면 결말 부분이 정말 허탈했을테니까요. 소설에서 유일하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부분은 조용히 피어올랐다 조용히 사그라지는 모기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소개글 식으로 이 소설을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적 강자와의 한판 승부로 몰고가려 했다면 김어준 식으로 '실패!'라는 것이죠.

 

 해서, 원숭이는 분명 다른 것을 뜻할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쓰고 상도 여러 개 받은 요이다 슈이치 정도 되는 작가가 초보자가 봐도 한 눈에 문제가 드러나는 허술한 설정을 할 리는 만무하니까요. 아마도 그 원숭이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했느냐가 밝혀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요이다 슈이치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제목처럼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나옵니다. 소설의 시작은 정말 '새끼 게'처럼 작고 좁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도쿄의 가부키초 술집 계단과 간판 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에서 아기를 안고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마지마 미쓰키의 모습에서 시작하니까요. 그녀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 벌써 오래도록 연락이 끊긴 돈 벌러 고향을 떠난 남편을 찾아 도쿄로 상경한 참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더 이상 어디 갈 데도 없어서 거기 쭈그려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보여지듯이 그녀는 작디 작은 존재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런 문장을 첨언하여 그녀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지 강조해서 보여주지요.

 

 설마하니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모르는지 그럭저럭 그 자리에서 20분 가까이 쉬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미쓰키를 알아채지 못했다.(p. 7 ~ 8)

 

 그렇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너무도 작고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보여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요이다 슈이치가 바라보는 '새끼 게' 의 전형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했던 '새끼 게'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존재가 되는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마지마 미쓰키만 봐도 그렇습니다. 후에 도쿄에 정착하게 된 미쓰키는 자신이 상경한 사연이 알려져서 방송까지 타게되고 결국 유명인이 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모두의 시선 속에 당당히 드러나는 존재가 된 것이죠. 이는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던 미쓰키를 처음 발견한 준페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BAR'에서 가게에서 통용되는 한국말을 몰라서 사실은 거의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준페이는 후일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출마하여 일본 정치의 희망으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존재감이 한없이 엷었던 존재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한 마디로 성장 소설인 것이죠. 그러면 원숭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히 어떤 계층 이나 세력 같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여기의 원숭이는 등장인물 각자마자 마주하고 있었던 상황 혹은 한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고 낙담과 절망 속에 늘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그런 처지나 조건들 말이죠. 결국 원숭이란 등장인물 각자가 '나는 안 돼'라고 느끼게 만드는, 그 너머의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대한 벽과도 같은 한계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소설이 제목에서 뜻하듯 서로 싸우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현실에서 느껴지는 장벽을 너무 크게 보고 구차한 변명이나 해대며 포기하기 바쁜 자신과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아마도 그래서 전 요이다 슈이치는 굳이 '교전도'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 소설을 일종의 그림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 그림이란 예를 들자면 브뤼겔의 그림 같은 것이죠.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저마다 다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브뤼겔의 그림 말이죠. 그렇게 이 소설엔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동일한 비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해 나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말하자면 이 소설은 서로가 모두 다른 빛을 내는 이채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그림과 같습니다. '교전도'는 어쩌면 같은 '새끼 게'로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입을 침묵시키려는 요이다 슈이치의 의도입니다. 이토록이나 많은 사례들이 있다면 변명의 여지 또한 줄어들테니까요. 그러니 보다 분명하게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하려는 것이 드러나는 것 같네요. 이 소설은 정말로 뭔가 위안이 되려하고 힘이 되려 합니다. 그냥 사회를 스케치하듯 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려 하는 책입니다. 솔직히 읽다보면 여기에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연대가 좀 과잉되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 유행중인 '치유계'를 표방하고 있지도 않은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다 착하고 성실하게 나오니까요. 미쓰키의 무책임한 남편인 도모키까지 그렇습니다. 소설이 잔잔한 물처럼 긴장감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욕망을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꼭 이루겠다는 강렬함이 없습니다. 그 보다는 설사 협박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이득 보다 먼저 남의 상황을 헤아리고 배려합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니 심심하고 잔잔할 수 밖에요.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 이러하다 보니 과잉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과잉이 나타나는 건 작가가 무리를 해서 입니다. 꼭 하고 싶은 뭔가가 있기에 무리하는 것이죠. 저는 그게 주제 같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정신이죠. 새끼 게들이 서로 협력해서 원숭이에게 복수한다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무엇보다 같이 있는 이들에게 마음 문을 열라는 것을 촉구하는 소설입니다. 미쓰키와 준페이가 일하는 주점의 마담 마키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내 곁에 누가 있는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니까요. 주어진 처지와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도 준페이와 사노 요코의 관계처럼 다 그러한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입니다. 그렇게 이 소설은 나 아닌 타인의 소중함과 왜 그들을 관용하고 연대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주지시키려고 요이다 슈이치는 다소의 과잉마저 무릎 쓴 것이죠. 그래서 아마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학적 성취 보다는 요이다 슈이치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주려는 것이 너무 분명한 나머지 계몽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현실이 너무도 저를 무력하게 만드는지라 이 소설에서라도 위안을 받고 싶어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이다 슈이치의 전작도 궁금하더군요. 찾아보니 '요노스케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일단 그 소설부터 읽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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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디바 2013-02-2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혹평한 소설인데 이렇게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점에 놀랐어요. 헤르메스님의 혜안은, 작가의 다른 의도를 읽어내시는군요. 매우 흥미롭게 봤습니다. 원숭이와 게가 아예 따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묘파한 것이다라는 분석이 인상깊네요. 저도 사실 이 작가를 처음 접해서 호감을 갖기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의 따뜻한 시선을 저도 독서에 참고해보려고 합니다. : )

ICE-9 2013-03-12 18:24   좋아요 0 | URL
이런, 여의님 이제야 댓글을 달아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하네요. 처음으로, 거기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해 주셨는데 말이죠. 요즘은 너무 바빠서 책 읽고 글 쓰고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댓글 확인을 일일이 못하게 되네요. 따스한 마으으로 작품을 대한다고 해주신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해서 그 말씀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네요.^ ^

희선 2013-02-2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 소개글은 좀 지나치게 쓰지 않나 싶습니다
권력층과 싸우지 않더라도,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벽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가는 우리나라를 좋아하나 봅니다, 소설에 우리나라 사람 이름이 자주 나와요, 요노스케 이야기에도 나온답니다, 대학을 갓 들어간 요노스케가 자라가는 이야기거든요
이 작가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고, 그저 요노스케 이야기는 읽어서...^^


희선

ICE-9 2013-03-12 18:27   좋아요 0 | URL
과장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번 건 좀 핀트가 어긋나서 말이죠. 아마 소개글에 혹해서 읽었다면 좀 평가가 그리 좋지못했을 것 같아요. 아, 역시 그랬군요. 이 작가가 우리나라를 좋아하고 있었군요. 희선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욱 요노스케 이야기가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이미 요노스케를 읽어보신 희선님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 NFF (New Face of Fiction)
메이어 샬레브 지음, 정영문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아모스 오즈에 이어 우리나라에 또 한 명의 이스라엘 작가가 소개되었다. 그가 바로 메이어 샬레브다. 1948년 이스라엘 나할랄에서 태어난 그는 텔레비젼과 라디오등에서 일하다가 1988년 첫 작품 '푸른 산'으로 데뷔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논픽션이나 아이들 책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해왔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라는 것으로 2011년에 나온 그의 가장 최근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주목하게 된 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아모스 오즈 외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번역자다. 혹시 얼마전에 나온 '어떤 작위의 세계'란 소설을 읽어보셨는지? 더없이 독특한 문체에 소설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그 정체불명성으로 오히려 더욱 고유의 가치를 지녔던 그 소설의 작가 정영문이 바로 이 소설의 번역가이다. 그 때문인지 전혀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어쩐지 정영문적 분위기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는데 특히나 그렇게 다가왔던 건 이 소설 역시도 별다른 서사가 없었던 '어떤 작위의 세계'처럼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이지만 사실은 연대기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 메이어 샬레브와 그 가족의 역사인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는 지극히 자전적이다. 그는 아예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려는 듯 자기 가족의 사진들까지 함께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별 다른 사건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보통 가족들이 그렇듯이 남의 이목을 확 끌만한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일상에서 그리 잘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메이어 샬레브가 굳이 이렇다할 굴곡도 없이 평범했던 삶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란 형태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할머니 때문이다. 더없는 개성으로 무장한 할머니의 존재를 소설이란 형태로 영원히 각인시켜 시간속에 풍화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의 잡설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메이어 샬레브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할머니가 가지는 고유한 존재 가치를 이 소설에 담으려 했는데 그래서 다른 그 어떤 소설로도 대체 불가능해 보였던 '어떤 작위의 세계'를 쓴  소설가가 이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더없이 적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영문의 번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내겐 이 소설을 주목할 가치는 충분하다.

 

 잠시 환기를 위해 여기서 밑줄을 그을 게 있다. 그건 '고유성'이다. 그러니까 샬레브의 할머니처럼, 그리고 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 소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그런 고유성이다. 왜 메이어 샬레브는 이것을 담으려 했던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 소설에 주목하게 된 세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다. 그건 바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나할랄' 이다. 나할랄은 키부츠와 같은 공동체다. 역사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1930년대. 이스라엘 유태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의 바람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치고 그 영향으로 많은 유태인들이 쏙쏙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바야흐로 초기 이스라엘 정착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두 개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바로 키부츠와 나할랄이다. 하지만 1936년에 생겨난 나할랄은 키부츠와 조금 달랐다. 키부츠는 경작할 땅이 자기들 소유였으나 나할랄은 그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에게 있었다. 즉 국가로 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키부츠는 뭐든지 집단으로 경작하고 나누어 가졌으나 나할랄은 개인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즉 자기가 가꾼 것은 자기가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할랄은 키부츠 보다 더욱 농업 중심적이 되었다. 키부츠는 농사에서 수공업까지 생산 방식을 다변화시켜갔으나 나할랄은 계속 농업만 고집했다. 그래서 더욱 세파에 물들지 않고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런 나할랄이다.

 

 바로 이러한 나할랄이 이 소설에서 전면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주목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먼저 소개된 작가 아모스 오즈는 키부츠 출신이었다. 그의 오래된 키부츠의 경험은 비록 오래전에 거기로 부터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작품에다 키부츠적 경험의 흔적을 남겼다. 쉽게 말해 아모스 오즈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아, 이런게 키부츠적인 것이로구나.'하는 유추가 가능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생겨났으며 이스라엘 정신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나할랄이 흔적이 드러나는 작품도 보고 싶었다. 작품을 통해 이런 것이 나할랄이로구나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난 것이다. 샬레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스라엘 초기 정착민이다. 나할랄이 세워질 때 부터 같이 있어 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나할랄적 정신으로 충만하다. 말하자면 고유한 나할랄을 느껴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가족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의 원초적 정신을 그 나할랄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태어났고 온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새 체화되어버린 나할랄을 말이다. 그는 나할랄이 바로 자신의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그 할머니만이 가진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개성.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신념이 나할랄이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것이 다 좋지만은 않다. 할머니의 모든 점이 가족에게 다 환영받지 못했듯이. 거기엔 누그러뜨러야 할 고집도 덜어내야 할 막무가내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기대한 것만큼 소출하지 못하는 땅이라 해도 그 땅을 버릴 수 없는 농부처럼 말이다. 그것은 단단한 기억으로 결부되어 있고 바로 그 연대된 기억이 자신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렇다. 간직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 그것이 나할랄이고 이스라엘이다. 그는 그렇게 할머니를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나할랄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인 '모샤브' 그대로다. '모샤브'는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각자의 소임이 있고 그 나름대로의 고유의 운명이 있는 것이니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함부로 내치거나 방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모샤브'다. 그것은 대지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처럼 무한의 긍정이다. 그 모샤브 정신에 의해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남편의 형이 보내준 진공청소기를 버리지 않는다. 비록 잘 사용하지도 않고 거기다 결국 고장까지 나서 이제는 사용만 하면 오히려 바닥을 더럽히더라도 말이다(할머니는 무엇보다 깨끗한 것에 집착한다. 청소는 그녀의 지상명령이다. 할머니의 이러한 깨끗함에 대한 집착을 때묻지 않은 이스라엘 고유한 이념에 대한 추구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에게 있어 효용성은 존재의 쓸모를 결정하는 가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효용성을 뛰어 넘어 그 존재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것을 다만 금지된 욕실에 보관할 뿐이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다. 어떤 배쳑도, 버림도 없는 금지된 욕실은 그야말로 '모샤브'로 충만한 영역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냥 버려야 할 물건들이 한없이 보관되어 있다. 쓸모는 없을지 몰라도 그 자체로서 가족들과 추억과 결부되어 고유의 존재적 가치를 가지는 물건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지된 욕실'은  지금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이스라엘 과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종의 이스라엘 흑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메이어 샬레브는 모샤브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 어떤 과거든 버리지 말고  과거의 잘못을 똑똑히 기억해 둔 상태로 다 안고 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모샤브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건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전기청소기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전기청소기는 그 금지된 욕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태평양을 건너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전기청소기의 타자적 특성 그리고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어쩔 수 없이 현재 이스라엘과 분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로 전기청소기는 그 팔레스타인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전기청소기를 할머니는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는 깨끗함에 오로지 방해물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는다. 40년간이나 살뜰하게 보관한다. 후에 그 전기청소기를 만든 회사의 대리점주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딸이 와서 높은 가격에 팔라고 해도 응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매매란 존재의 영혼을 버리는 것과 같다. 존재의 가치는 현실적인 이득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나와 함께 한 이상 대지와 농부가 그렇듯이 운명적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모샤브에 충실한 할머니의 신념은 그렇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보여주는 배척은 원래 이스라엘을 이루는 중요한 신념인 모샤브에 위배되는 것이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샤브를 통한 신의 명령은 선민의식에 빠져 타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하나까지도 나와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으로 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러한 귀 기울임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이 진정 시오니즘을 주장하고 싶으면 초기 정착민들이 믿었고 삶의 일부분으로 체화시켰던 '모샤브'부터 실천하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욕실을 금지시켰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벽은 다만 구획일 뿐이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이것은 샬레브가 이스라엘에 보내는 중요한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야말로 타자의 열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는 이러한 소설이다. 감상을 말하자면 소설은 좋았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어도 잔잔한 가족의 일상은 언젠가의 내 가족들마저 떠올리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따스한 온천에 한가롭게 잠겨있는 곰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건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번역 덕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읽고 싶었던 나할랄 이야기라서 방금 전 갓 잡은 연어를 먹은 곰처럼 든든하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곰으로써 최대의 행복이나 다름없다. 한 편으론 또 욕심이 생긴다. 더 많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들려주는 작가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이러한 곰의 소망은 언젠가 이루어질까? 문득 어느 날 강을 거슬러 올 또 한 마리의 연어와도 같은 이스라엘 작가를 곰은 한가롭게 누워서 꿈꾸고 있다. 아, 생각만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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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2-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아주 특이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저는 엊그제 이스라엘 산(?)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볼 수 있는 곳이 없어 그만두었습니다만 이스라엘 산은 영화도 책도 다 귀하군요. 이제 한국에 두 명 소개되었다니. 박한 거 같기도 하고, 그 나라 자체에 작가라는 직업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을 거 같구요. 정영문 번역이라니... 와우!! 이스라엘에 관심이 가는 군요. 이 소설 찜할게요. 헤르메스님 굳밤 :D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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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단은 사회 전체가 원하지 않는  자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의 걸작 서부영화 '하이눈'을 닮았다. '하이눈'에서 그 초대 받지못한 손님은 악명 드높은 무법자로 총솜씨는 귀신 같은데다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 자가 감옥에서 풀려나 마을로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보안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소식을 미리 들은 보안관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안전 보다는 마을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아예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 한 몸 희생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렇게 무법자에게 찍혀버린 보안관은 그 역시 무법자와 마찬가지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이러한 '하이눈'은 50년대의 미국에 광풍처럼 불었던 찍히기만 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을 당해야 했던 '메카시즘'을 은유하면서 사회가 '낙인에 의한 고립 효과'로서 얼마나 손쉽게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여기서의 낙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낙인을 받은 바 있고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또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낙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사회가 존립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을 재생산하는 것은 인류의 그 시작에서 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희생양'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낙인을 통한 희생양을 줄기차게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이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은 사회 내부에 갈등들이 점증하여 더 이상 기존 사회의 역량으로는 그것을 무마하기 어려울 때 생겨난다. 즉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비틀어 일시적으로나마 그 끓는 열기를 식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생양이란 일종의 진통제와도 같다. 궁극적인 치유는 가져오지 못하지만 한 순간의 분풀이로 일시적인 무마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이렇게 낙인의 원인은 낙인을 받는 대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낙인은 오로지 사회의 일방적인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다. 역사적으로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낙인을 찍어 희생양을 양산해왔다. 나치의 유태인이 그랬고 십자군 원정에서의 이슬람 교도가 그랬다. 그건 종교가 같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에서 보여지듯 카톨릭 교도에게 있어 개신교 교도 역시 희생양인 건 마찬가지였다.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역시도 이러한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이다. 여기에선 남자 주인공 토비아스가 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역할을 맡는다. 그는 갓 스물 살이 되었던 10년 전 같은 동급생 소녀 둘을 죽였다는 혐의로 10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를 배척한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토비아스의 집안은 예로부터 고향에서 알아주던 유지였지만 그 일로 인해 파괴된 지 오래였다. 토비아스는 아버지를 도와 그런 집안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그를 10년 전의 죄로 배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절대 자신이 저지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 거기에 대해 무죄라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 자체로서 마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다. 한 번 찍혀버린 낙인은 결코 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뿐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많이 보아온 이야기일 수 있다. 전과자를 주인공으로 한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실 이와 비슷하지 않았던가? 집단적인 배척을 받는 무죄한 희생양의 이야기는 영국의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도 참 많이 다루었던 소재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그걸 개인의 문제로 풀지않고 집단의 문제로 풀었다. 그건 당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녀가 그런 작품을 한창 쓰던 무렵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이 모조리 파괴되어 살길이 막막해진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영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렇게 섞여든 동유럽과 러시아 사람들로 인한 마을의 변화를 담아내려 했었고 거기에 그 존재들은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로 자주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우리는 크리스티의 대표적 탐정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 전쟁 이후 몰려 든 러시아와 동유럽의 어중이 떠중이들 때문에 전과 같이 마을이 순수하지만은 않고 비밀과 안 좋은 소문들이 가득한 음험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푸념을 곧잘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넬리 노이하우스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그저 하나 더 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넬리 노이하우스도 이걸 토비아스 개인의 비극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집단적 배척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서 드러나는데 그들의 똘똘뭉침엔 어떤 합리적 이유도 없고 그저 달리 분노할데가 없으니까 마침 잘 걸렸다는 식의 배척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토비아스는 그들에게 있어 두더쥐 잡기 게임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넬리 노이하우스가 더욱 드러내려 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를 잃어버린 사회적 증오이다. 이런 면이 아가사 크리스티와 비슷한 것이며 그렇기에 그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듯이 이것도 어쩌면 현실 사회의 상황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토비아스는 무엇을 은유하는 것이고 또 넬리 노이하우스는 이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넬리 노이하우스가 독일인임을 생각하면 여기에 대한 답은 한결 쉬워진다.

 

  그러니까 토비아스는 바로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은유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통해 통일 독일 이후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때 같이 있었으나 저편에서 건너온 자들이 되어버린 동독인들과 같이 토비아스 역시 누명을 쓰고 고향에서 쫓겨나 10년간 수감되어 있다 풀려난 존재이고 토비아스가 오래도록 감옥에 있었듯이 동독 역시도 소련 연방에 의해 강제적으로 편입되어 오래도록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넬리 노이하우스가 토비아스에게 그러한 이력을 선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독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게 하여 토비아스가 바로 서독에 내려온 동독인들의 은유적 존재임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토비아스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 배척 역시 은유이다.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 된지도 벌서 십 수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서독인들의 동독인들에 대한 배척, 즉 그들의 무분별한 희생양 만들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흥미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은 사실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독일 출신 감독 볼프강 베커를 통해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바로 영화 '굿바이 레닌'을 통해서 말이다. 거기서 주인공 아들은 동독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동독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연극을 벌여 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이렇게 '굿바이 레닌'은 체제가 무너진 뒤의 동독 사람들이 겪게되는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고 있었다. 동독인들이 그만큼 혼란을 겪었다면 몰려 내려온 동독인들로 인해 서독인들 역시 혼란을 겪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바로 그 '굿바이 레닌'에 대한 서독인들의 대답인 셈이다. 

 

  하지만 노이하우스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만은 아닌 왜 그러한 혼란이 생겼느냐까지 물으려 한다. 그것은 토비아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일어난 범죄 때문에 마을에 온 보텐하우스와 피아 형사 콤비로써 드러낸다. 이 원인의 추구에 있어 노이하우스는 수사 과정 뿐만 아니라 보텐하우스와 피아 콤비의 사생활까지 가져와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거기에 대한 해답은 둘의 결혼생활로 제시된다.

 

  소설에서 보텐하우스는 이미 결혼이 파탄나 있고 피아는 새로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모두 삶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 바로 이를 통해, 정확히는 이들의 변화에 대한 태도를 통해 노이하우스는 궁극적으로 그 혼란이 생기게 된 까닭을 탐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둘의 사생활은 작품의 중심이 되는 토비아스의 귀환으로 비롯되는 범죄 이야기와는 맥락상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작품엔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의문은 노이하우스가 왜 굳이 이런 설정을 했느냐로 향한다. 결국 깨닫게 되는 건 그녀가 사실상은 두 개의 이야기를 병행시킨 것은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걸 천착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토비아스의 이야기로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의 생산'으로 수렴되는 야기된 정체성 혼란의 상태를 천착하고 보텐하우스- 피아 콤비의 이야기로는 그렇게 혼란을 야기하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천착하려 했다는 말이다. 굳이 둘로 나눠야 했던 것은 이게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넬리 노이하우스는 현상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그 원인과 대안까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둘의 이야기로 나누어 전자엔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유추하고 후자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원인과 극복가능한 대안을 담기위해 두 개의 물길을 작품에다 열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토비아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일단 사회가 작위적으로 행하는 낙인을 통한 희생양 생산을 충실히 보여준 다음 거기 가세하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모습으로 가져오면서 넬리 노이하우스는 묻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바로 동독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느냐고. 이들의 불합리가 우리들이 가진 증오의 불합리가 아니냐고. 그리고 그러한 증오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방관과 무시는 또 우리들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증오를 보았을 때 방관하고 무시했던 것과 같지 않냐고. 넬리 노이하우스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고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작품에서 하려한다. 그래서 보텐하우스와 피아가 나오게 된 것이다. 물론 특히 피아가 중요하다.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관심을 갖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피아라는 존재는 최소한 방관과 무시만은 하지 말자고 하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다시 말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그 피아처럼 자신의 과거를 고집하지 말며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열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 제안을 위해 넬리 노이하우스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더 가져온다. 그가 바로 토비아스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존재인 '아멜리'이다. 아멜리는 토비아스의 귀향과 비슷한 시기에 마을에 온다. 원래 오기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멜리는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애쓴다. 새롭게 다가온 변화를 할 수 있는 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건 상황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을 모두가 배척하는 토비아스를 비롯 사람들이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는 존재까지 아멜리는 다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그녀는 변화를 긍정하는 태도의 상징이다. 이는 피아와 아멜리 모두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텐하우스를 고려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결혼의 파국이 가져온 변화를 결코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구나 같은 수사관을 이렇게 설정했다는 것은 통일 이후 변해버린 체제에 대한 서독인들의 태도를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결국 사건의 해결을 누가 하는가가 넬리 노이하우스가 가지고 있는 대안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넬리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일본식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 통일 이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독인들에 대한 서독인들의 증오를 '낙인으로 희생양 만들기'라는 소재로 풀어가 본 작품인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시하는 대안은 단순하게 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피아와 아멜리가 보여주는 대로 변화에 대한 긍정이다. 내가 처한 변화된 현실에의 긍정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아멜리와 피아의 이야기를 통해 충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분단 국가로서 독일의 현실은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수십년간이나 서로 다르게 살아온만큼 아무래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조선족이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 시선을 생각해 보면 통일 이후 북한 주민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도 서독인들의 시선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다. 갈등을 현명하게 푸는 방법은 일단 상대를 긍정한 상태에서 그들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긍정하고 들으려는 귀를 준비시키는 넬리 노이하우스의 이 작품은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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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2-1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면서 보텐하우스와 피아에 대한 일은 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했는데...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개인의 일은 그럴지라도 나라에 일어난 일은 좋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것만 생각하며 봤는데...
사회파 미스터리였군요


희선

bggg 2013-05-2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이책재밌게봤어요.추리물을워낙좋아라하는지라…^^
요즘보는책은<너무예쁜소녀>라는독일스릴러소설인데요,마치한편의스릴러영화를보는듯한느낌이에요.
너무재밌어서책읽자마자절반가까이읽어버렸어요.이제아까둔결말부분을읽을차례인데요…아직풀리지않는의문하나!도대체왜죽였을까??


자운영 2019-12-13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책 내용은 읽는자의 몫이지만 한권의 추리소설을 읽고 사회현상, 사회 와 국가, 사회집단의 심리까지 들어야 볼 수 있는 독후감을 써 낸다는게 쉽지 않음을 , 그래서 독자는 혼자 읽고 느끼는 것 보다 더 폭넓은 독서를 할 수 있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에 한 줄 남깁니다. 독후감 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