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신간『침대』서평단 모집

 

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3월 중순이 지나가는데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네요. 독자 분들 환절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번에 새로 나올 민음사 신간 도서『침대』서평단을 모집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가디언》, 《선데이타임스》, 《인디펜던트》, 《에스콰이어》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David Whitehouse) 신간입니다.

 

이 책은 ‘이십 년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남자’, ‘세상에서 가장 뚱뚱한 남자’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어른이 되는 것=특별함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식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부모의 헌신, 젊은 세대의 사회적 무기력을 은유하는 맬컴의 삶, 특별함에 대한 동경과 형제 사이의 애증, 자족적인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어른이 되어 똑같이 생활에 치이면서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두려웠던 맬컴의 삶을 먼저 엿보게 되실 분들을 찾습니다.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3.03.15 - 2012.03.25(열흘 간)

- 추첨 인원: 20명

- 서평단 발표: 2013.03.26(화) 오후

- 서평 기간: 2013.03.27-2013.04.10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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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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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야말로 무기력의 계절이었다.

 

 

 

  무기력 의 사전적 정의는 뭘까?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나 힘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그 겨울 난 감당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 겨울 초입에 내가 마주했던 결과는 그 때까지 내가 보지 못했던, 아니 보았으나 믿고 싶지 않았던, 그래도 그나마 상식은 통하는 세상이겠지 하는 생각에 애써 덮어두기만 했었던 그러한 세상의 혹독한 진실을 보게 만든 것과 같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내가 믿었던 가치가 있었고 또한 그것이 무엇보다 옳은 것이라 믿었었기에, 더우기  그것은 늘 나의 앞 길 저만치서 하나의 불빛이 되어 이 어둔 밤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내가 실족하지 않고 제대로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그 신뢰가 여리고의 성벽처럼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 것을 확인한 날, 이 세상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무언가가 되어버렸고 대지를 계속 짊어져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아틀라스와도 같이 난 무기력 속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그랬기에 겨울은 정말 길었고 추웠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마음마저 그러하다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겨울의 길이와 추위가 몇 배나 더 되는 듯 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나그네처럼 봄이 되어 다시금 온기를 찾은 햇살은 자꾸만 나로 하여금 겨울 내내 꽁꽁 덮어쓰고만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벗도록 유혹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사람의 감정에도 통용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때 마음에 돋우었던 결기는 서서히 마모되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난 다시금 책이란 걸 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나면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게도 되었다.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은 그러던 가운데 만난 책이었다. 겹겹이 껴입고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이제는 좀 벗고 싶었던 나에게는 때마침 내린 단비와도 같은 만남이었다.

 

 

 

 이 책의 저자 박경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지과학 박사라고 한다. 그녀는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무기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녀가 중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지심리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Martin Seligman가 동물 실험을 통해 밝혀 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쉽게 말해 무기력이라는 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Martin Seligman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그림은
Martin Seligman 이 무기력이 학습되는 것임을 보여준 동물 실험의 모습
 
 
 하나의 방을 가운데 울타리를 놓아 저런 구조로 만들고 개가 A에서 B로 건너가려 하면 개가 있는 아래의 철판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찌릿한 고통을 주었다. 개가 울타리를 넘으려 할 때마다 저렇게 반복적으로 고통을 주었더니 개는 차츰 건너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엔 아예 울타리마저 치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B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Martin Seligman 은 이 실험을 통해 무기력이라는 게 무엇보다 만들어지는 것이란 걸 알게되었다. 무기력은 어느 순간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집적된 일종의 결과물과도 같았다. 모든 존재가 느끼는 무기력함이란 초기의 시도가 부정적인 결과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가지게 된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례대로 반복적으로 누적됨으로써 발생하게 된 하나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Martin Seligman 은 무기력이란 게 무엇보다 신체의 상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정의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냥 감정의 상태가 아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내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학습을 통해 받아들인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궁극적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 표지에도 나와 있는 '실패하면 어쩌지?' '해도 안될거야' '될 리가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기력한 상태마저 초래하게 된 것이었다. 즉 우리의 무기력이란 우리 내부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굳어진 나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기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열쇠는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바로 나의 내부에 있었다. Martin Seligman 은 결론적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무기력을 막을 수 있는 근원적 처방이라고 말한다. 저자 박경숙이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위의 그림처럼'학습된 무기력'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기력이란 상자로 부터 벗어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다른 것 없이 상자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자의 문이 애초부터 닫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닫혀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환경이 바뀌길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낙관하는 마으으로 그게 무엇이든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그녀는 책을 통해 충분히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것을 그녀는 그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까지 포함하여 아주 많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보여준다. 더구나 그 모습들은 어쩌면 우리 역시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그런 모습들이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살면서 우리들은 크고 작은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 그 첫 시작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들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첫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그 때 대부분 우리들의 시선은 직면한 문제에 두기 마련이다. 먼저 그 문제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 뒤 내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그 첫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나'이다. 그것도 냉정하게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시선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잠재된 가능성까지 믿고 응원하는 그런 시선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 시선이 바로 문제 해결의 50%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이라는 격언이 바로 문제를 직면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걸음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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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존 하트의 시작은 정말로 인상 깊었다. 그의 데뷔작 '라이어'는 내게 베르나르 베스톨루치의 영화 '거미의 계략'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거기엔 영웅으로만 여겨왔던 아버지의 죄를 발견한 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구축했고 그가 신뢰했던 세계가 죄의 대가였으며 기만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그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원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선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대로 묻어버리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아버지의 질서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위선과 기만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그 모든 죄악을 낱낱이 진실과 정의의 법정에 드러내는 것. 믈론 그랬을 경우 아들의 인생마저 파멸될 것은 불문가지다. '라이어'는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선 아들의 내면을 그리고 있었다. 존 하트의 '라이어'는 읽으면 '모든 문명은 사실 '살부(殺父)'의 욕망 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절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려는 욕망은 기성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란 바로 기성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그 아버지를 죽임은 대안적 세상의 새로운 도래를 염원하는 것과 같다. '라이어'는 그랬다. 거기엔 사회가 길들이지 못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강렬히 존재했고 결국 아들은 오디이푸스의 경로를 충실히 따른다. 그렇게 존 하트의 '라이어'는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소설이었던 것이다.

 

 '고아'가 되고픈 욕망. 존 하트의 소설엔 그런 게 존재한다. 그렇게 자기의 혈연을 지우고 뿌리를 지워 독립적 존재가 되려한다. '다운 리버'는 아예 쫓겨난 자식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그것은 누명을 쓴 것이지만 아들은 스스로 죄의 신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소설의 표면적 이야기가 아닌 왜 존 하트가 굳이 성경 속 탕아의 이야기를 가져왔는가 하는 그 내밀한 동기를 유추해 본 이야기다.) 그리고 그 경계선 바깥에서 아버지의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이는 '라이어'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라이어'는 그래도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아버지의 죄를 반추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들은 그의 영역을 벗어나 보다 먼 발치에서, 그렇게 더욱 객관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운 리버'에서 왜 존 하트에게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고아가 되면 될수록 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버지라는 기표 아래에서 위선과 기만으로 덧칠된 세상의 진실을 알아 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진실에 자신의 구원이 있기에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뒷걸음질은 더욱 거세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고아'가 된다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지향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 하트의 네 번째 작품의 제목 '아이언 하우스'는 주인공 마이클이 있었던 고아원의 이름이다. 이제 아들은 아예 처음부터 고아로 나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라스트 차일드'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도 존 하트는 작품이 이어질 때마다 보다 더 다음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버지 질서 속에 있었던 '라이어'에서 그 질서 바깥으로, 그렇게 좀 더 대등하고 객관적인 입장의 '다운 리버'로 나아갔듯이 '아이언 하우스'도 그 전작들로 부터 한 발을 더 멀리 뻗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아들은 '탕아'에서 '고아'가 되었다.  하지만 '내쳐진 존재'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은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언 하우스'는 '다운 리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 결정적인 전환의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작품이 '라스트 차일드'인데 애석하게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탓에 정확하게 그 근거를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언 하우스'를 통해 거꾸로 유추해 보건데 분명 거기에는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새로이 발견해 낸 차원, 즉 '책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존 하트가 걸어온 작품 여정을 총 결산하는 것과도 같은 이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 뻗은 발이 디디는 곳이 바로 '책임의 통감' 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의 죄악 때문에 자유로워지려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부(殺父)' 정당화 되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뿐이다. 그 자신이 새로운 구원적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면 '살부'라는 또 하나의 죄악을 더 하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오디이푸스가 왕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 사이의 대립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고아는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구원을 받는다. 그런 그에게 있어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책임을 떠 안는 것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달아나게 만들었던 아버지 죄악의 진정한 정체가 바로 '방기(妨棄)' 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 나쁜 아버지가 되는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내버려둘 때이다. 아버지는 언제 죄인이 되는가? 그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무시해버릴 때이다. 물론 그 내버림과 무시의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아버지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기는 아버지가 가진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질서가 위선과 기만의 베일로 둘러싼 죄악의 세계가 되는 것도 겉으로는 타인을 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오로지 이기적 욕망만이 전부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와 같은 이기적 악취에 질려 달아난 것이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그 비정함을 혐오해 아예 핏줄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그가 무엇보다 해야 하는 건 바로 '책임'을 떠 맡는 것 밖에는 없다. 이기적 아버지가 아닌 이타적 아버지가 되는 것. 그렇게 '방기(妨棄)'와 책임은 대립된다.

 

  사실은 이 대립이 바로 '아이언 하우스'의 핵심이다. 이 소설엔 많은 '아버지의 기표'를 가진 존재들이 나오는데 모두 이 대립선을 중심으로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로 나뉘어진다. 다시 말해 주인공 마이클은 자신이 참조 가능한 많은 아버지를 만나는 셈이며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기꺼이 고아가 되어버린 아들이 좋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아이언 하우스'는 '라이어' 때 부터 '고아가 되려는 욕망'을 주제로 내내 끌어왔던 작품 세계를 일단락 시키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 작품은 '라이어'에서 부터 '아이언 하우스'까지 존 하트가 걸어왔던 여정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다. 시작은 그야말로 '라이어'다. 뉴욕의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 아래서 킬러로 일하던 마이클은 우연히 엘레나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새로이 눈뜨게 되고 그녀가 아이까지 가지는 바람에 이제 곧 아버지가 될 마이클은 더 이상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때까지 친아버지처럼 모시고 따르던 조직의 보스로 부터 빠져나올 결심을 한다. 그렇게 시작은 '라이어'와 똑같이 편입된 아버지의 질서로 부터 빠져나오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그건 '라이어'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리고 정작 문제 또한 보스에게 있지 않다. 유일한 아버지인 보스는 그 존재 자체를 버거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마이클에게 죽여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기력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 무기력의 아버지는 그대로 '다운 리버'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 역시 자기가 중심인 세계의 방관자이다. 약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계는 가동되지 않고 스스로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해 내부로 부터 허물어진다. 자멸은 무기력한 아버지의 소망이다. 더 이상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언 하우스'도, '다운 리버'도 그렇다. 모두 똑같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 세계의 위축은 아들이 진실에 눈뜨고 성장한 탓이기도 하다. 그건 정확히 우리의 성장 경험과도 일치한다. 자랄수록 아버지가 점점 왜소해진다는 것은 자식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대로 조용히 내파된다면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트러블 메이커'들이 있다. '고아'가 되지 못한 자들.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편안히 거주해 왔던 자들. 아버지가 가진 죄악의 진실을 보지 못했기에 여전히 아버지와 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아들들. 바로 그 아들들이 '고아'인 마이클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 아들들에게 '고아'인 마이클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죄악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이클이 그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누누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있는 한 아들들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다운 아버지로서 만족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이클을 '고아'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오게끔 유혹한다. 아버지의 질서로 다시금 편입시켜 그 얼룩을 지우려 한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아버지가 되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아'인 마이클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담긴 이야기의 한 축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존재들끼리의 대립이 아니라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들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세계와 방기의 세계. 그 대립에 회색지대란 없다. 아들들이 마이클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표면상으로는 분노이지만 사실은 질투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질투란 감정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들게 되는 감정이다. 그건 우리 절대적 무력함의 고백에 다름아닌 것이다. 즉 질투란 타협의 가능성이 애초에 봉쇄되었을 경우에 비로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들이 마이클을 질투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상호 타협 가능한 중간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나아가 스스로 억지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럼 정신분열증이 된다. 다중 인격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정체에 대해선 침묵하지만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축은 마이클에게 오로지 원심력으로만 작용한다. 갈등이 깊어지면 깊어진만큼 그는 더욱 기존의 아버지 질서에서 멀리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달아남 자체로 되는 것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정말 바라는 구원을 얻으려면 진정한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존 하트는 마이클에게 동생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같이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동생 줄리앙은 마이클에게 그 '달아남'이 진정한 구원적 상태에 이르도록 만드는 사다리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내내 방기와 책임의 대립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한다. 여기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모두 그 한쪽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동생이 있는 아비게일의 이웃에 사는 카라벨 고트로는 딸을 방기한다. 딸은 자기 엄마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집을 뛰쳐 나와 '마이클'처럼 스스로 고아가 되려 한다. 이렇게 소설엔 방기하는 부모와 거기에 대항해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존재들이 군집을 이룬다. 이로써 존 하트는 마이클뿐 아니라 그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책임을 떠 맡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안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존 하트는 아예 마이클로 하여금 동생 줄리앙이 당했던 학대를 방기하여 동생을 더욱 큰 고통에 빠뜨렸던 인물마저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 소설 내내 한 존재를 지키는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임을 맡는 것. 하나의 존재에 대해 진정한 책임을 느끼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 '아이언 하우스'에서는 진정한 책임 끝에 나오는 방어야 말로 동시에 구원의 '구축'인 셈이다. 새로운 아버지의 구축인 것이요 그가 중심이 된 진정한 대안적 세계의 구축인 셈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바로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다.

 

  이러한 구원의 분명한 제시는 이 소설이 지금까지 존 하트가 해왔던 것의 완결이라는 것을 더욱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 온 물음에 대한 일종의 최종 해답인 셈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고아'가 되려고 했던 아들은 여기에 이르러 그 진정한 해답을 찾은 것이다. 그건 바로 타인의 존재를 떠안는 것, 절대로 내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을 나몰라라 하거나 버려두지 않는 것, 그렇게 바로 책임이다. 그런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이 책임이야 말로 자유의 진정한 모습이다. 책임은 무엇보다 그 원인을 묻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환 관계가 아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전적인 내어줌 밖에 없다. 그래서 책임은 오로지 당위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그건 내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또는 어떤 이유로 떠 맡은 책임이 아니다. 진정한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있는 건, 오로지 책임을 떠안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방기할 것인가를 두고 선택할 결단 밖에는 없다. 그런데 방기는 오로지 나의 이기적 욕망을 따른 결과로 결국 거기엔 내 동물적 욕구든 혹은 이해타산이든 아무튼 원인이나 이해가 개입되게 되니, 난 그것에 종속되어 선택한 것일뿐 온전히 자유로 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당위로서의 책임을 떠안는 것이야 말로 자유인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내 순수 의지로 결단하고 떠 맡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적인 나의 자발적 의지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책임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의 모습이며 그로인해 개인은 더욱 진정한 주체가 된다고 말했다. 결국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는 이러한 칸트의 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왜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나는 길이라 했는 지, 그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칸트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으니 존 하트가 찾았고 그리고 여기서 내어놓는 해답이 어불성설인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존 하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탁월한 성취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우리가 읽어야 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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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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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그러니까 일본이 패전하여 전쟁이 끝났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라는 명탐정으로 이제는 명실공히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는 더없이 싱글벙글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야 자신이 꿈꾸던 미스터리 소설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그대로 칩거하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 나갔고 그 결실로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두 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혼진 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탐정의 역할을 맡는 '나비부인 살인사건' 이다. 특별히 이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번에 나온,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걸 끝으로 그 길었던 명탐정의 여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즉 그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사실은 바로 그 첫 작품 중 하나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을 일종의 리메이크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이 가지는 연관성은 이 작품을 읽게 되시면 유사한 사건이 나타나므로 바로 아시게 될 것이지만 그 밖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를 도와주는 도도로키 경부가 그렇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이 도도로키는 '여왕벌'에 이르러서야 등장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출연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 작품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도도로키 경부는 경시청에서 일하면서 탐정역인 유리 작가를 돕는 역할로 나온다.(물론 그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를 돕는 것과 동일한 역할인 것이다. 또한 전개 방식도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하다. 일단 첫 살해된 시체의 등장이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점이 비슷하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은 공연 준비가 한창중인 극장이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예전엔 유명한 호겐 가문의 저택이었으나 전쟁으로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린 집이다. 그렇다면 완전 다르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아니다. 시체가 드러날 때 거기엔 그 시체와 관련있는 사람들과 누군가로 부터 촬영 의뢰를 받고 들어간 세 명의 사진기사들까지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세 명의 사진기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소재이기도 한 '풍령'처럼 머리만 매달려 있는데도 놀라거나 달아나지 않고 의뢰한 대로 사진을 찍기까지 한다. 아마도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의 연출이 란포의 작품에도 있었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 작품이 바로 '석류' 란 작품이다. '석류'에서도 한 경관이 순찰 도중 버려진 집에서 살해된 시체를 발견하는데 거기엔 시체만 있지 않다. 공교롭게도 한 화가가 시체를 앞에 두고 잔뜩 귀기어린 얼굴로 열심히 그 시체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인데 연출되는 방식이 유사하므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어쩌면 이 '석류'에서 아이디어를 빌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그러고 보니 이 소설 역시도 '트렌트의 마지막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공공연히 나오는데 그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도 그러하다(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그 작품은 밝히지 않는다).)

 

  아무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비슷한데 그건 사건의 중심에 음악과 관련된 하나의 단체가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제목을 딴 것에서도 감지되듯이 '오페라' 공연단이 나오고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선 '앵그리 파이러츠('분노한 해적들')'라는 재즈밴드가 나온다. 머리만 남아 매달려 있는 이는 원래 그 재즈밴드의 리더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비 부인 살인사건'에서 살해당한 나비 부인 역시 그 오페라 공연단의 리더이다. 이 역시 비슷하다. 더구나, 이것이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인데, 오페라와 재즈 모두 서양으로부터 들어왔을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야 비로소 일본에 널리 받아들여진 존재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오페라와 재즈 둘 다 변해버린 일본을 나타내는 단적인 상징이다. 그런 존재가 '나비부인 살인사건'과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 둘이 내적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에 중요한 캐릭터가 가지는 유사성도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사건의 의뢰자이자 중요한 목격자이며 결국엔 살해당하고 마는 혼조 나오키치와 '나비부인 살인사건'에서 중요한 화자인 나비 부인의 매니저 '쓰찌야 교조'는성격이나 분위기에 있어 그야말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스포일러상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이 둘이 사건과 얽혀있는 관계의 궁극적인 모습마저 참으로 유사하다.

 이 정도로의 열거로 이 둘의 유사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리메이크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려두어야겠다. 그는 이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를 개작하여 '이누가미 일족'으로 만든 바도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이렇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이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리메이크라면 의문이 하나 든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이다.(물론 요코미조 세이시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이후에 긴다이치 코스케가 나오는 '악령도'라는 걸출한 작품을 내놓는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 악령도의 사건을 맡는 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사건을 해결하기 전으로 한다. 즉 악령도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긴 했지만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긴다이치 코스케가 마지막으로 맡은 사건임에는 변함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 마지막에 가장 처음에 나온 '나비 부인 살인사건'을 다시금 새롭게 쓴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쓰여진 시점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바로 전쟁 직후라는 것. 그러니까 전쟁이 몰고 온 거센 시대적 변화의 한 가운데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왜냐하면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역시도 시작부터 그 변화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상 위에는 도쿄의 구역 지도(...)가 두 장 놓여있다. 오래된 쪽은 쇼와 28년(1953년)에 발행된 것이고, 최근 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쇼와 48년(1973년)판이다. 두 지도를 놓고 비교해보니 전쟁 전부터 전쟁 후, 그리고 전쟁 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쿄가 얼마나 급격하게 변해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p.7)

 

 한데, '나비부인 살인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유리 선생은 전에 고지마찌에 살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이내 고지마찌의 집을 남에게 맡긴 다음 자신은 구니다찌로 옮겨간 것이다. 그 때 나는 선생의 너무도 세심한 처사를 비웃기까지 했으나 그후 거듭되는 공습에 비웃었던 나는 오히려 세 번씩이나 피해를 입은 반면 세심했던 유리 선생의 고지마찌 저택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세상은 참으로 심술궂은 모양이다. 세 번씩이나 공습을 당한 탓에 알거지가 되어버리자 전에 비웃었던 일도 있고해서 유리 선생을 만나는 것이 쑥스러웠다.

 

 이렇게 둘의 시작이 비슷하다. 모두 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를 먼저 제시 혹은 암시하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변화'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있어 변화란 그것도 전쟁으로 인한 변화란, 무엇보다 그의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처음 등장하는 첫 작품' 혼진 살인사건' 때 부터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야기한 변화의 정체를 밝혀내고 거기에 대해 정작 자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누누히 탐색해 왔다. 다시 말해, 좀 거친 일반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나비부인 살인사건'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옥문도'에서처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이전까지의 일본을 통째로 뒤바꿔 버리는 변화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그 결단을 위한 사유의 여정들인 셈이었다. 시리즈 대부분 드러난 범죄들은 결단을 강요하는 변화의 현시였으며 그것은 대부분 시리즈의 주요 희생자가 되었던 여성의 신체로 상징되어 나타났다. 이리 되었던 것은 여성이야말로 전쟁으로 인해 가장 급격한 지위의 변화가 일어난 존재였기 때문이다. 듣기에 전후 일본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던 것이 여성들의 간통이라고 한다. 전쟁에서 많은 남자들이 죽은 탓인데 아무튼 여성들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찾아 나갔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였고 또한 쟁취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여성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성취 행동은 이제까지 전통적 일본 여성상에 여성들을 가두어 두고 있었던(요코미조 세이시에 나오는 희생자가 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모두 남성 중심 사회 안에서 가두어져 있거나 고립된 존재이다) 일본 남성들을 충격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젖도록 했는데 '혼진 살인사건'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것을 자기 작품의 또 다른 주 동력원으로 삼았다. 사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 주요 범죄자들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토록 많은 작품에 걸쳐 이루어졌던 여성 살해를 일종의 처형처럼 묘사한다. 즉 전쟁이 야기시킨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이 익숙한 일본 전통적 질서를 존속시키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처형인 것이다. 그건 '혼진 살인사건'에서 부터 이미 나타났으며 뒤이은 '옥문도'는 그걸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여기엔 정체성의 혼돈이 있었다. 여성들은 이제 달라진 일본의 정체성을 뜻했고, 남성들은 너무나 달라져서 자신이 알던 일본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과거에 버려졌다 현재에 쓸쩍 '끼어든 존재'와 같았고 작품에서 자주 나타났던 사생아의 존재란 다름아닌 여성의 또 다른 변형인 셈이었다. 이러한 사생아들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대부분 기존 질서에 안착한 사람들에게 '그 존재 때문에 우리 가문이 망하면 어쩌나' 식으로 불안과 의혹의 존재가 되는데 이는 정확히 남성들의 불안이 굴절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불안을 애써 '치욕'으로 은폐하는데 그것은 그 사생아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로지 제거하고픈 그들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기만적 술책과도 같았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러한 정체성의 혼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의 도가니에 있었다.

 

 문제는 긴다이치 코스케 역시 일종의 사생아, 그렇게 이식된 존재라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마치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78년에 이른 오늘까지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가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뿐만아니다. 참으로 박정하게도 요코미조 세이시는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영원히 거주할 자기 집 한 칸 조차 선물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여전히 얹혀살고 있다. 그렇게 내내 '나는 이식된 존재로소이다'를 그가 머리를 벅벅 긁을 때마다 떨어지는 비듬만큼이나 확실하게 드러내며 평생을 혼자서 군주를 잃은 사무라이처럼 유랑하듯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다르게 살면 절로 불안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이식된 존재들은 언제 잘려나갈지 모르는 가지가 되어버린 듯이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 해결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대항해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바 있지만 스스로가 안고 있는 불안이 기껏 찾은 해결책은 또 다시 회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항구적인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늘 변화무상한 정체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좋을지 각각 서로 반대편에 두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드러낸다.

 

 나는 나대로 그(긴다이치 코스케)의 공명담을 기록으로 남길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의 뇌세포 속에서 사건이 해결에 가까워졌을 때 긴다이치 코스케는 구제할 길 없는 고독의 그림자에 사로잡힌다"라고. 분명 그는 사건 그 자체를 해결해도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뿐 아니라 거기에서 또 새로운 드라마, 그가 해결한 사건보다 한층 무서운 사건이 전개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p. 12~ 13)

 

 이렇게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시리즈 내내 그 궁극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내려진 모든 해답 뒤엔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의혹이 붙었다. 말하자면 그 의혹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그는 시리즈를 거듭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마지막 사건인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가지는 의미는 명확해 진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건이라면 결국 여기서의 해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탐색의 최종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요코미조 미스터리의 집대성'이라는 증명 시리즈로 유명한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가 찾아낸 최후의 해답, 그가 전하고픈 최후의 전언이 각인된 작품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 작품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그 사생아성 또는 '이식성(移植性)' 을 그야말로 한껏 드러낸다. 그건 시작에서 부터 나온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의 시작은 사건의 주 무대가 펼쳐지는 호겐 가문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부터 비롯된다. 거기서 우리는 이 소설의 주요한 인물들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게 되는데 그건 모두 '끼어든 존재'라는 것이다. 즉 주요한 등장인물들 중 '적자'가 없다. 양자건, 사생아건 모두 편입된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 '이식(移植)의 존재들' 이다. 이러한 '이식성(移植性)'은 작품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재즈밴드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재즈 역시도 미국으로 부터 이식된 문화이기 때문이다.(또한 스포일러상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후반에 드러나는 중요한 비밀 역시도 이러한 '이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이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물음은 그 전까지와는 다르다. 이것은 이 작품만이 가지는 독특성 때문이다. 그 독특성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 간직된 그 세월의 길이가 다른 작품들하고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긴다이치 코스케가 사건의 진정한 해결 하기까지에 걸리는 시간은 무려 '19년 8개월' 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해결에 소여된 누적된 세월의 길이가 이 작품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그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식된 존재들은 과연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가?' 이다. 그는 왜 이것을 묻는 것인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시작부터 '변화가 가져온 두려움을 어떻게 풀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의문은 쉽게 풀린다. 즉 변화를 긍정시키는데 있어 '이식'이 향후 어떻게 되었나 그 여정을 보여주는 것만큼 설득력이 있는 것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나 자체로서 변화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데 참조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내린 최종 결론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이 나온 해가 1978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나왔고 그만큼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쟁이 가져온 변화 뒤 일본이 걸어온 여정을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 모든 관찰의 결과 내린 해답이었고 그건 무엇보다 '실재(real)'를 바탕으로 했으므로 관념 속에서 해답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확신 속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론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도록 하시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미련 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이식의 존재들은 '혼진 살인사건'의 세 손가락 사나이에서 부터 내내 있어왔다. 긴다이치 코스케 자신 역시도 '이식의 존재'였다. 대부분 그 이식의 존재들은 기존 사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같은 이식의 존재였던 긴다이치 코스케의 도플갱어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자기 분신의 행동들을 보면서 어떤 게 이식의 존재로서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인지 탐색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 근저에는 언제나 불안이 있고 나이 먹어 갈수록 안정에 대한 희구는 더욱 강력해진다. 머리로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살아도 좋은 것일까 불안해서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 해 시리즈마다 거듭되는 사건들의 정황은 그 자신의 불안과 걱정을 투영한 거울인 셈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 거울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일종의 사유 실험을 한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정황들이 설령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모두 '과거형'이었으므로 그것은 관념적 실험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글로 전해진 간접 증거일 뿐, 눈으로 직접 들여다 본 직접 증거가 아니었다. 그래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늘 의혹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데 이 작품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드디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직접 증거를 가지게 된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 오랜 세월동안 긴다이치가 그것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긴다이치 코스케가 지켜보았던 존재는 '이식된 존재의 완전체'와도 같았다. 그런 존재를 그는 더 이상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이보다 더욱 직접적인 증거가 어디 있으랴!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지는 가장 커다란 독특성이며 바로 이와 같은 직접 증거로 인해 요코미조 세이시는 거리낌없이 긴다이치 코스케를 은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를 일본에서 유랑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를 아예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더욱 광할한 대륙에서 유랑자로 살려고 내모는 것과도 같이. 과연 그대로 긴다이치 코스케의 절친 작가 Y는 미국에다 백방으로 코스케를 수소문 했으나 찾지 못한다. 그는 이제 포착할 수 없는 존재, 그렇게 내내 기존의 질서로 부터 탈주하는 존재, 즉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민적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존재성. 긴다이치 코스케의 육체 자체에 각인되어버린 유목민적 존재성.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변화가 야기한 정체성의 혼돈에 천착한 요코미조 세이시가 그 여정을 집대성하면서 내린 최종 결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처음부터 이러한 이식된 존재성을 가지고 변화를 사유해왔던 것일까? 그건 그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세상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미스터리 소설을 쓰게 한 주요한 동기마저 되었다. 그 모습을 하나의 직접 증거로서 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나비부인 살인사건'이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계획적인 살인이 있었던 시대, 말하자면 선생님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던 시대는 좋은 시대일까요? 아님 나쁜 시대일까요?"

 "그야 좋은 시대지. 계획적인 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었다는 증거야. 뭔가 살인이란 것만해도 얼마든지 죽여도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애를 써가며 치밀하게 계획 따위를 세우겠냔 말일세. 사회가 진보됨에 따라 인명을 존중하게 여기는 확률도 높아지는 법이지. 그리고 인명이 존중되면 될수록 살인에 대한 제재는 더욱 엄격해지고 말일세. 때문에 그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 범인들은 복잡하고도 교묘한 계획을 세울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교묘한 계획적 범죄가 발생할수록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겠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앞으로의 일본은 대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뜻대로 진보적인 시대가 올까요?"

 "그야 오겠지. 이렇게 언제까지나 인명이 값싸게 여겨지는 시대가 계속되었다가는 견딜 수 없을테니 말이야. 앞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시대가 올거야"

 

 바로 이것이 요코미조 세이시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미스터리 소설을 쓰겠다고 달려간 이유이다. 그가 애초부터 바랐던 세상은 이것이었다. 전쟁을 야기한 거대한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존중받으며 마음껏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게 요코미조 세이시가 바랐던 세상의 모습이었다.  또한 그것은 정확히 모든 영토화로 부터 탈주하여 그 개인의 고유한 주체가 될 것임을 촉구했던 들뢰즈가 '유목민'에 새긴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요코미조 세이시는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에 이르러 자신이 염원하는 세상이 바로 긴다이치 코스케와 같은 유목민적 정체성으로 가득한 세상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바로 거기서 자신이 내린 최종 결론이 정말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대한 내밀한 속내가 처음 나왔던 '나비부인 살인사건'을 새롭게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렇게 끝났지만 그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가 지향했던 세상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지금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너무도 쉽게 버려지거나 위기에 처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한다. 그의 염원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염원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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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지금까지 읽은 세이시 중에서 뭐가 젤 좋았어요? 아니다, 베스트 3를 말해주세요. 이 책 두 권이라 망설이고 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너무 재밌잖아요. 그걸 아니까 갑자기 헤르메스님은 많이 읽으셨을 것 같고 순위를 매겨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ICE-9 2013-03-24 23:32   좋아요 0 | URL
앗! 이렇게도 반가운 아이리시스님 댓글에 이제서야 답글을 달게되다니...
더구나 요코미조 세이시에 관한 것인데 빨리 보고 답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제가 요즘 바쁘고 또한 남는 시간은 프라하의 묘지 읽느라 완전 정신없네요 ㅠ ㅠ

아무튼 전 지금까지 나온 긴다이치 시리즈는 다 읽어보았는데요. 그 중에서 베스트3를 꼽으라면 이렇게 꼽겠습니다^ ^

그 첫번째는 '옥문도'
긴다이치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요코미조 세이시 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사회와 가치관의 변화를 그 특유의 괴기스러움과 잘 버무려 미스터리적으로 잘 형상화내었다고 생각해요.

두번째는 '이누가미 일족'
전형적인 '후더닛'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기도 하죠. 아이리시스님은 영화를 좋아하시니 이치가와 곤이 영화로 만든 작품도 덤으로 추천드리고 싶네요.

세번째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
범인의 의외성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트릭이기도 하구요. (어쩌면 저만 그럴 수 있겠지만^ ^;) 세이시 특유의 괴기스러움이 미스터리와 잘 융합되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요? 아이리시스님의 베스트 3는 과연 어떤 작품일 지 궁금하네요^ ^

아이리시스 2013-03-25 21:02   좋아요 0 | URL
저는 몇 개밖에 안 읽어서 잘 몰라요. 읽는동안 재미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다 읽었을 거라는 짐작은 맞았어요, 신기하게도 그럴 거란 감이 왔거든요. 꼽아주신 베스트3는 읽어보고 싶었던 것들인데 기회가 안닿았거든요. 헤르메스님이 적어주신대로 우선순위에 놓고 읽어볼게요. 세 작품 중 1,2번은 제목도 여러 번 들어보고 유명하다는 것도 아는데 제가 읽어본 작품들이 하나도 없다니..헛읽었어..헛읽었어ㅠ.ㅠ

자주자주오세요. 제 댓글에 답글달러..

ICE-9 2013-03-27 00:11   좋아요 0 | URL
와! 초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리시스님 서재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데 적당한 이유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거든요. 이렇게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제 마구 가서 흔적을 남기겠습니다^ ^

아이리시스님 이나가키 고로가 긴다이치 코스케로 분한 일본 드라마 시리즈가 있는데 혹시 보셨나요? 제가 본 긴다이치 시리즈 드라마 중(뭐,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본 게 별로 없습니다만^ ^;) 가장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혹 보시지 못하셨다면 추천드리고 싶어서요. 거기 이누가미 일족부터 시작해서 악마의 공놀이 노래,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여왕벌 그리고 팔묘촌이 있는데 이것도 보시면 더욱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옥문도가 없는 건 유감이지만 연출이 좋더군요.^ ^

아이리시스 2013-03-27 20:11   좋아요 0 | URL
긴다이치 시리즈는 종종 보긴 하는데 못본 게 훨씬 많을 거예요. 분기별로 몇 개씩 정해서 감상을 하긴한데 추천해주신 건 못봤어요. 꼭 챙겨볼게요. 책구입보다는 빠를 듯ㅎㅎ 헤르메스님 고마워요.

앗, 근데 저는 제가 댓글 많이 달테니 헤르메스님 잊지 말고 답글을 달아달라!! 시위한건데요..제가 어떻게..부끄럽게..제 서재 와서 댓글 달아요!!! 라고 말하겠어요. 지금 하고 있음..( '') 히히

헤르메스님 서재, 시간도둑이에요!

2013-03-27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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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했군요.

  요즘엔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느낄 사이도 없이 너무도 바쁘네요.

  덕분에 이렇게 새벽까지 깨어 있습니다.

  몸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신간 추천이니 이렇게 휴식 삼아 즐겁게 임해 봅니다. 

 

 

 

 

  첫번째 추천은

 

  에드 맥베인의 '아이스' 입니다.

  장르 소설 팬들에게 이 이름은 새삼스럽게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름이죠. 뭐, 87분서의 작가라고만 하면 그냥 통용됩니다.

 

  87분서 시리즈는 경찰들이 주인공이 되는 경찰소설이지만 이전의 경찰소설들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어 지금까지도 경찰소설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는 시리즈죠.

 

  그러니까 그 전까지 경찰 소설들은 모두 주인공이 하나이거나   아니면 '스타스키와 허치'처럼 두 명이 앙상블을 이루는 일종의  버디물일 뿐이었는데 에드 맥베인은 그렇게 한 두 명의 경찰이 아니라 87분서 전체를 자신의  작품 주인공으로 삼은 것입니다. '87분서 시리즈'의 첫 작품 '경찰 혐오자'의 서문에 보면 그가  어떻게 이 시리즈를 생각해냈던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형사 한 명으로는 시리즈물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았고,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야기로 엮어 나가면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려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형사들이 가득 들어앉아 있는 수사실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이 함께 집단으로 주인공이 되는 것도 좋을 듯 했다. 사실 내가 '87분서'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형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처럼 '집단적 주인공' 이라는 개념을 활용한 소설은 없었다. 당시로서는 이 아이디어가 매우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집단적 주인공의 역할을 해내는 형사들의 수사실을 설정한 것이다. 물론 배경은 뉴욕이었다.'

 

 그렇습니다. '87분서'의 매력은 바로 이 '집단적 주인공'에게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한도전' 같은 것이죠. 그렇게 무협이 서로 겨루는 둘이 '합'을 이루어 관객에게 영화적 매력을 선사하듯이 '87분서'도 캐릭터와 캐릭터간의 '합'이 독자들에게 소설적 매력을 선사하는 시리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추천하는 '아이스'는 1983년에 나온 작품으로 무려 1956년에 시작된 이 시리즈의 36 번째 작품으로 장편만 모두 54 편에 이르는 이 시리즈에서 비교적 중반기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중반기는 이미 30번이나 넘게 조율되어온 캐릭터들이 더없이 원숙기에 이른 시기로 사실 이 시기의 87분서는 범죄 해결 보다도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합'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기입니다. '아이스'는 바로 그러한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하는 것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으로 미국 NBC에 의해 1996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장편만 54편인데 지금까지 번역된 것은 겨우 세 편에 불과합니다. '87분서'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정말 적게 나온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읽어줘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추천입니다.

 

 

 

  여러분은 추리라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탐정이 행하는 추리는 정말 진실의 파악일까요?

  혹시 그저 화려하고 빈틈없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존 딕슨 카의 두 말할 것 없는 최고 걸작 '화형 법정'은  여러분들의 추리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헐어버리는 그러한 작품입니다. 신탁과도 같이 여겼던 탐정을 통한 진리의 확인은 절대 불가능이며 그 탐정을 통한 우리의 안도가 사실은 얼마나 기만인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존 딕슨 카는 그 어떤 탐정소설 작가들 보다 더욱 본격에 치중해왔던 작가입니다. 그런 그가 본격의 기본 전제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그래서 더욱 그의 결론이 진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추리의 본질에 대해서 낱낱이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당신이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무조건 잡고 보아야 할 작품이라 감히 생각합니다.

 

 

 

 

  와, 정말 세상은 넓고 알아야 할 작가들은 많은 것 같습니다.

 

   발따사르 뽀르셀.

 

 저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입니다.

 그런데 해양 문학의 거장으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었다고 하는군요. '해양 문학'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라서 말이죠. '밀수꾼들'은 발따사르 뽀르셀이 처음 쓴 본격 모험 소설이라고 하는데 배경이 '지중해'라고 합니다. 해양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지중해'에 대한 로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또 없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장르에, 그 장르의 대표 작가 그리고 좋아하는 배경. 이건 뭐, 제가 추천할 수 밖에 없도록 삼박자를 다 갖추었네요. 그러니 당연히 추천 도장 '꽝!' 찍습니다.

 

 

 

 

 

  역시나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작가.

  하지만 그녀가 천착해왔다는 세계가 사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절 유혹합니다. 그녀가 지금까지 다섯 작품에 걸쳐 천착해 온 근친 살해, 보험 사기 사회의 병리적 현상과 폭력은 사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절대 '모르는 척' 해서는 안 될 문제이기도 하죠. 

 사실 이렇게 당당히 대면하는 작품을 보고 싶었습니다.

 피하지 않고 그 한 가운데를 가르고 들어가는 작품을 말이죠.

 그래서 피칠갑이 되어버린 사회를 해부하려는 안보윤의 작업을 기꺼이 관전해두고 싶네요.

 

 

 

 

 

 뭘 망설이겠습니까?

 존 스칼지의 작품이고

 더구나 'LITTLE FUZZY'의 리부트라니 !!

 읽을 수 밖에 없잖아요!!

 

 

 

 

 

 

 

 

 

 

 

  우주항공학을 전공하고 소프트웨어 공학자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소설가 안드레아스 에쉬바흐는 우리나라에 이미 '지저스 비디오'와 '제로배럴'로 소개된 작가입니다. 에쉬바흐의 작품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현실적인 SF'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저스 비디오'에서는 시간 여행을, '제로배럴'에서는 석유 고갈 이라는 SF적 설정을 가져오지만, SF란 말이 통용되는 것은 거기까지 입니다. 설정만 빼면 이야기 진행 자체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보다 정확히 에쉬바흐의 작품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SF라기 보다는 스릴러라고 해야 하겠네요. 아무튼 현실감 넘치는 묘사에 있어서는 꽤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에쉬바흐의 '1조 달러'는 지금 가장 사람들 욕망의 대상이 된 '돈'에 관한 소설입니다. '너무나 막대한 돈' 과연 그 돈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건 어떻게 쓰여야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가를 묻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쯤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기에 저 역시 그의 대답을 들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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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3-0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두 사람이 아닌 집단이 주인공이라니, 실제 일을 하는 사람은 아주 많기도 하죠
경찰도 함께 수사하고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범인을 잡으려고 하잖아요
책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군요
앞으로도 우리 말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아직 읽어본 책은 없지만...)

화형 법정, 인터넷 서점에 오면 바로 보여서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해양 문학이라는 것이 있군요, 이런 것도 몰랐습니다
여기에 소개해주신 책 모두 관심이 가는군요


희선

ICE-9 2013-03-12 18:22   좋아요 0 | URL
화형법정은 개인적으로 정말 추천드려요. 저는 예전에 동서문화사 판으로 읽었는데 뭐랄까요 미스터리에 대한 시각을 전혀 새롭게 열어준 작품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뭔가 영감을 주었던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이 책과 함께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읽어보시면 더욱 좋을 듯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