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 보상
새러 패러츠키 지음, 황은희 옮김 / 검은숲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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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섣달 그믐날 샴페인에 얼큰하게 취한 새러 패러츠키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노래하기 혹은 누레예프와 춤추기처럼 그냥 상상만 하다 끝날 게 아니라면 1979년에는 소설을 써 보자고. 그리고 그녀는 9개월 동안 50페이지 분량의 소설이란 것을 썼다. 하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글 솜씨에 절망한 나머지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늘 하던 생업이나 제대로 하자며 결심할 무렵 뜻밖의 계기가 찾아온다. 그동안의 노력을 알고 있는 친구가 '탐정소설 전문작가 양성과정'이나 들어보라며 강좌목록을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서 패러츠키는 강의를 맡고 있던 스튜어트 카민스키를 만나게 된다. 그 카민스키에 의해서 50페이지 분량에서 망각의 세월 속으로 던져질 뻔 했던 소설은 다시금 생명을 얻어 이어나가다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난산 중에 태어난 아이와도 같이. 

 

  그게 바로 이제는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이자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평가받는 V.I 워쇼스키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시리즈의 첫 작품 '제한 보상(indemnity only)'은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우리나라 제목은 '제한 보상'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원뜻이 '~할 경우에만 보상'이라서 그렇게 옮긴 것 같다. 살짝 내용을 흘려 본다면 워쇼스키는 살인을 수사하는 도중 거기에 수상한 보험거래가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당시 막강한 노동조합은 실제로 70년대에 들어와 의료 보험까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데 이로 인해 각종 산업 재해에 대하여 보험을 통해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소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미스터리의 무대로 활용하고 있는데 제목은 바로 그걸 반영한다.)

 

 

   그 때가 1982년이었다. 패러츠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첫 문장을 쓴 뒤 4년 후이고 지금으로 부터는 무려 30년 전에 나온 소설인 것이다.(그러니 이야기의 배경이 약간 올드하게 느껴져도 괘념치 말길. 사실 소설은 70년대 말의 미국 상황을 그리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나중에 워쇼스키의 진짜 의뢰인으로 밝혀지는 맥그로라는 인물은 70년대 당시 한창 힘을 얻어가던 전미노조를 이끌다 마파아와의 결탁으로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 뒤 다시 전미노조 위원장을 노리다가 1975년 디트로이트의 한 식당에서 미스테리하게 사라져버린 '지미 호파'를 많이 연상시킨다. 지미 호파에 대한 것은 대니 드비토가 감독한 'HOFFA'란 영화가 잘 그리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제한 보상'을 읽으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세계를 더욱 생생히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 마디로 지금 누리고 있는 V.I 워쇼스키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늦어도 너무 늦게 나온 것이다. 미스터리의 강국인 이웃 일본에서는 V.I 워쇼스키가, 그것도 벌써 예전에, 여성 사립탐정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시리즈가 다수 출간되고 있는데 우라나라에서도 제발 이렇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여성탐정들에게 좀 가혹했던지라 더욱 간절해진다.

 

 

  이건 좀 잡담인데 일본에서 워쇼스키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그건 바로 우리나라에도 너무 유명한 아오야마 고쇼의 '명탐정 코난'이다. 거기엔 주인공 남도일처럼 독약의 부작용으로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한 여성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는 홍장미로 통하지만 원작에서는 '하이바라 아이(灰原 哀)'다.

 

    우리에겐 홍장미로 익숙한 하이바라 아이

 

 

  코난의 원래 이름 에도가와 코난이 에도가와 란포와 코난 도일 이렇게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의 이름을 따왔듯이 이 '하이바라 아이'도 똑같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사립탐정 둘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그 둘이 바로 P.D 제임스의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와 이 작품의 주인공 V.I 워쇼스키인 것이다. 그렇게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이름에서 그레이를 따와 일본말로 변형시켜 '하이바라'가 되었고 V.I 워쇼스키에서는 'I'를 따와 '아이'가 된 것이다. 에도가와 코난이 가장 대표적인 추리작가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을 보면 하이바라 아이란 이름을 이루고 있는 두 여성 사립탐정들 또한 일본에서는 그만큼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V.I 워쇼스키는 그런 존재이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발간된 레너드 카수토의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를 비롯하여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대표적 작품으로 꾸준히 연구가 이뤄져 오기도 했다. 그러니 쌓인 평가나 명성에 비해서는 정말 너무도 뒤늦게 소개 된 셈인데 이러한 비극이 비단 워쇼스키만은 아니다. 그녀와 더불어 또 한 명의 대표적 여성 사립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코델리아 그레이의 데뷔작 '여탐정은 환영받지 못한다'의 경우, 별로 팔리지 못한 탓인지 그대로 소리 소문없이 절판되고 후속작은 기약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까.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여탐정이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가 보다.

 

 

     워쇼스키는 1991년에 우리나라에는 '로맨싱 스톤'과 거기서는 사랑에 빠졌던 배역들이 서로 죽일듯이 싸운다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영화 '장미의 전쟁'으로 유명해진 캐서린 터너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바가 있다. 원작은 '제한 보상' 바로 뒤에 나온 'DEADLOCK'이란 작품이다. 

 

 캐서린 터너의 워쇼스키는 대체로 소설 속 워쇼스키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듯 하다.

 워쇼스키는 영화의 카피 그대로 스마트함과 섹시함을 고루 겸비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V.I 워쇼스키도 그러한 운명을 맞이할까 두렵다. 이제야 만났는데 별로 깊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없이 작별해야 한다면 코델리아 그레이가 그랬듯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아끼는 또 하나의 여성 탐정 앤지도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영영 떠나가 버렸는데... 

 

  때문에 워쇼스키만은 한 작품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길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발 한 번 읽어보라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다. 일단 읽기만 하면 그 진가는 저절로 알게 될 터이니 제발 손에 잡기라도 하라고 말이다. 이제야 우리말로 만나본 워쇼스키라는 캐릭터의 매력과 작품의 깊이가 남달랐기에 더욱 그렇다. 덧붙여 혹시 아는가? 이 워쇼스키가 예상 외로 히트를 치면 덩달아 지금 '87분서'가 그러고 있듯이 코델리아 그레이의 뒷이야기도 다시 들을 수 있을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니, 그 뒷이야기를 보고 싶은 자가 닥치는 대로 이 책을 홍보할 수밖에. 그렇게 이 글은 그런 사심이 아주 많이 가득 들어간 글이다. 어떻게든 비틀즈의 노래 제목대로 여성 사립탐정들과 'I WANNA HOLD YOUR HAND'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무튼 이제 나온 워쇼스키의 첫 작품 '제한 보상'은 왜 그녀의 시리즈가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불리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워쇼스키도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사립탐정을 했을 때 그랬듯이 내내 지인들로 부터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그만 둬.'라는 말을 무던히도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의 제목 역시도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원제는 'AN UNSUITABLE JOB FOR A WOMAN'인데 여기서 P. D 제임스는 'UNSUITABLE'라는 단어를 썼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워쇼스키가 들어야했던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말도 사실은 그와 같다. 정말은 모두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냐! 어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워쇼스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워쇼스키가 발견한 시체의 수사를 맡은 고참 형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토니가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지 않고 엄하게 키웠으면 지금쯤 어엿한 주부가 되었을텐데. 탐정 노릇 한다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 아냐." (P. 54)

 

 그런데 그 있어야 할 자리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남자들이 아닌가! 워쇼스키가 살고 있는 미국이든, 코델리아 그레이가 살고 있는 영국이든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건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남자들은 자기들이 정해놓은 그 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는다고 해서 나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래서 워쇼스키와 코델리아 그레이의 사립탐정 일은 그들에게 도전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니까. 그 형사에게 워쇼스키는 바로 이렇게 응수한다.

 

 "아저씨, 전 탐정 일이 좋아요. 게다가 저는 게을러서 주부가 될 소질이 전혀 없어요."

 

 패러츠키는 여기에 특별히 '게으르다'는 말을 첨부한다. 그러고보면 워쇼스키는 우리가 여성스러움으로 생각하는 것에 전혀 걸맞지 않다. 집 청소는 거의 하지 않으며 요리 또한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남자 사립탐정처럼 늘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설사 요리를 하게 되더라도 요리 한다고 주변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아서 만드는 시간 보다 오히려 치우는 시간이 더 걸릴 지경이다. 한 마디로 워쇼스키는 가정주부의 품격과 영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스러움이란 그 가정주부의 품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가 가장 원하는 모습이 지금의 여성스러움으로 안착된 것도 같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모범이 아니라 사실상 족쇄였던 것이다. 여성들을 남성들이 원하는 자리에 있도록 하기 위한 옛날에 유행했던 말로 하면 '이데올로기적 장치' 같은 것. 그래서 워쇼스키는 일부러 저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은 이것을 전하고 싶어서...

 

 난 당신들이 만든 프레임에 걸려든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부터 벌써 자유로워졌다구요. 그러니 그 낡은 프레임으로 날 엮을 생각이랑 아예 하지 말아요.  

 

 

 워쇼스키 자신의 고백에 따르자면 이렇다. 

 

 "친한 여자 친구들은 여러 명 돼요. 그들이 내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남자들을 상대할 때는 본연의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P. 266)

 

 

  여기서 워쇼스키는 '본연의 나'라는 말을 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바로 워쇼스키의 모든 행동이 남자가 만든 프레임과 싸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니까 사립탐정은 그녀의 투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도 그 어떤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유하면서도 본연의 자신을 건 투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부장제 중심의 기성 권위에 있어서는 워쇼스키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도전이다. 한 때 워쇼스키는 결혼한 적이 있다. 4년만에 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 결별의 원인도 워쇼스키의 그러한 모습 때문이었다. 가정주부였지만 자신의 독립성을 내내 표출했던 워쇼스키를 남편은 오로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결국 결혼이 파탄났던 것이다.

결혼은 워쇼스키에게 있어 사회와의 마지막 타협점이었지만 결국 깨어짐으로써 워쇼스키가 걸어가려는 노선은 사회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길임이 드러났다. 그녀의 길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한, 이제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길이다. 그녀의 길엔 머무름이 허락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더러는 요동치는 경계 위만이워쇼스키 그녀가 거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렇게 워쇼스키 그녀는 사회의 바깥에 있다. 패러츠키는 그런 그녀의 존재감을 위해 우리가 아는(이라고 쓰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강요한'이라고 읽는다.) 여성스러움으로 부터 탈여성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워쇼스키가 그 쪽으로 내몰린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건 그녀의 자발적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지금 이 사회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자신의 아들과 딸이자 미래의 세대인 피터 세이어와 애니타 맥그로를 잡아먹고 있었다.(소설에서 의뢰인이 찾고자 하는 아들 피터 세이어는 시체로 발견되고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같았던 그의 여자 친구 애니타는 실종된다.) 그 고통과 비극의 '저그노트'를 멈추기 위해서는 뭔가 대안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안이란 언제나 안에 있을 때보다 그 바깥에 있을 때 진정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워쇼스키는 사회의 바깥, 그 경계 위에 서 있으려 한 것이다. 보다 제대로 사회를 바라보고 정확히 진단하여 진정한 대안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 국선 변호인이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꼈어요. 부패가 심한 조직이었어요.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의를 주장할 수 없는 시스템 때문에요. 그곳에서 나오고 싶었어요. 승률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어요."

 (P. 267)

 

 

 이러한 워쇼스키의 모습은 사립탐정으로 그녀의 선배인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가 그동안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같다. 같은 여성 탐정인 코델리아 그레이도 대안적 질서를 찾기 위해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든 존재다. 그렇게 워쇼스키는 그들의 정통 계승자이다. 하지만 그녀가 싸우는 방식은 우리에게 인습적으로 굳어진 여성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장정 두 남자와 겨루어도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이기기도 한다. 아무리 무섭고 어렵더라도 여성적인 나약함을 드러내기 보다는 당당히 대적하기를 더 선호한다.

 

 워쇼스키 그녀에게 '여성스럽다'라는 형용사는 없다.

 있다면 그건 오로지 '워쇼스키스럽다'라는 형용사 뿐이다.

 

 이러한 독립성 그리고 동등성 때문에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특별히 앞에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작품에는 그 당시 한창 발흥하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시다시피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60년대 말에,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나 70년대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당시의 페미니즘은 그 때 노조가 강한 힘을 얻었던 것처럼 사회주의와 긴밀히 접합되었고 그래서 급진적 경향도 다분했었다. 급진이라 함은 전복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그렇게 상대를 전혀 인정치 않음을 뜻한다. 워쇼스키는 시카고 대학(워쇼스키는 주로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한다.)의 여성 해방 동아리에 탐문을 위해 참석했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일련의 논쟁을 듣게 되는데 그 때 그녀는 어떤 피로함을 느낀다. 자신 역시 나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남성들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너무나 이상론에 치우쳐 있고 앞과 뒤를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적대에 그만 기가 질려버린 것이다. 이는 패러츠기가 당대의 페미니즘적 논의에서 느낀 피로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남성들의 권력에 권력으로 맞서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그건 단순한 남성들의 방식을 복제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남성주의에 오염되지 않고 그 본연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어쩌면 모성이 가지고 있는 타자에 대한 보살핌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패러츠키는 작품에다 이런 생각들을 엮어 넣는다. 우리는 이러한 타자로의 열림과 보살핌 그리고 연민을 소설이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워쇼스키가 위험을 피해 숨어든 로티 선생님의 집이다. 이러한 패러츠키의 순수한 여성주의적 대응에 대한 사유는 소설을 더욱 페미니즘 하드보일드로 여기게 만들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 '제한 보상'은 그동안 이름만 들었던 '페미니즘 하드보일드'의 진면목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제나로 앤지도 가고 코델리아 그레이와의 재회는 요원하기만 한 지금 그나마 워쇼스키가 있어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위안을 얻을 때는 워쇼스키의 작품이 계속 나와 줄 때이리라. 단 한 권으로 만나고 또 기약없이 헤어진다면 또 얼마나 상처를 받을 것인가! 그건 코델리아 그레이만으로 족하다. 그러니 제발 뒷 편을 발간해 주길...

 

 

 이건 곁다리인데, 나름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처음에 난 이 부분 때문에 사립탐정으로서의 워쇼스키 핵심이 바로 '애도'에 있지 않나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 슬픔과 연민이 바로 그녀를 이끌어가는 주된 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이리저리 살펴 보았는데 징후는 완연하지만 딱 이거다 하고 내세울만한 것을 찾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이 한 권만으로는 역부족이겠다 싶어 이렇게 부록처럼 달아둔다. 다음 작품에서 이렇게 단초로 남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그래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일이에요. 애도라는 건 오래 지속되는 일이에요. 서둘러 그 과정을 끝낼 수 없어요.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년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이따금 애도하는 기간이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슬픔의 한 조각이 여전히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죠. 힘든 시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슬픔이 지속되는 동안 애써 거부하지는 말아요. 슬픔과 분노를 계속 억누를수록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만 더 오래 걸릴 뿐이니까요." (P.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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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요즘 방영중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계약직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는 정주리는 이 말을 곧잘 버릇처럼 되뇐다. 정주리가 계약직으로 있으면서 매일 느끼고 있듯이 이는 삶이 가진 가혹한 진실 중의 하나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사라질 수 있다.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그렇고 그런 수많은 부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만이 가진 고유의 존재 가치로써 빛나고 싶은 열망은 사실 인간이라는 실존을 가진 이상 근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욕망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진실의 확인은 섣불리 잡을 수 없는 악수와도 같다. 그래서 더러는 이를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여기고 순응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호히 거부한 채, 저항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데뷔작, 소설 '침대'에 나오는, 스무 다섯 살에 갑자기 자신의 침대에서 절대 나오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무려 20년 동안 침대를 떠나지 않은 남자, 맬컴은 바로 그 후자였다. 그가 7484일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저항의 일환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침대는 그 자신에게는 가열찬 투쟁의 장소였다.

 

 

  그가 20년 동안 저항했던 건 어릴 때부터 그는 이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인 맬컴의 동생은 이렇게 증언한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말하는 형은 자기만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 규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형 자신밖에 없었다. (...) 나는 그저 형이 일으키는 파도에 실려 흘러갈 뿐이었다. 문을 확 닫았을 때 생기는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날아 들어온 솜털처럼.

 그 시절은 형의 전성기였다.  형도 그 시절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 듯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 자체는 아닐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p. 42)

 

 

  맬컴은 이런 존재였다. 늘 자기만의 빛깔로 빛나고 싶은 존재. 수 많은 그렇고 그런 전구가 되기 보단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고 싶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용한 말에도 나오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주리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어간다. 결국 자신도 그렇고 그런 전구 중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날 맬컴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남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 네가 훗날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고. 너를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너를 기억할만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도 없다면? 네가 그저 과거에 있던 누군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흔해 빠진 인간일 뿐이라면? (P. 182)

 

 

"안 보여?"

"응,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나는 보여. 저게 바로 핵심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굳이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p. 183)

 

 

 

 그리고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나를 죽인 채,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를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의 존재 자체가 저항이었다. 개인의 개성을 서서히 마모시켜 정형화된 틀로 찍어낸듯한 그렇고 그런 일반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항전이었다. 600KG이 넘는 거구의 그 몸 자체가 철저한 비타협으로 사회로 부터 그가 지켜낸 존재성의 크기인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은 채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덴 늘 정해진 방향이 있고 그 방향 그대로 사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맬컴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맬컴은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내 고유의 존재 가치를 헛되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의 침대는 마을을 넘어, 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수 많은 팬레터가 세계 각지로 부터 날아든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했던 존재 자체로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섬'이 된 것이다.

 

 그렇게 600KG의 그가 머무르는 침대는 항성이 된다. 수 많은 혹성들이 주위를 도는. 혹성은 당연히 항성이 가진 인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맬컴의 아버지는 그동안 내내 미뤄두었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덤비게 되고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내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마저 독점하여 늘 질투와 외로움의 고통을 죽부인마냥 안고 살게 만들어 형인 맬컴을 싫어하고 어서 빨리 죽어서 해방되기만을 바랐던 동생마저도 변화되어간다. 그 인력은 어떠한 인력인가?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 자기 고유의 존재 가치를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정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해방의 통로를 찾토록 하는 인력인 것이다.

 

 맬컴은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소중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규격화된 존재로 되게 만드는지. 바로 거기엔 기생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가진 보다 더 큰 것에 달라붙어 자기 존재의 안정과 지속을 구하려는 욕망이 정작 자신들에게 더한 상처가 되고 있음을 그는 본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바깥의 것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마음 자체가 결국 자신의 것을 모조리 내줘서 자아를 텅 빈 항아리처럼 만드는 것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과 절연한다. 일도, 사랑도, 상식도, 삶의 의미도. 그는 그저 존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간다. 육체적 살의 확장은 그 내면성의 확장이다. 그 비대한 몸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듯이 그 안에 충만한 내면성은 사람들이 정말 바라보아야 할 곳으로 시선을 바꾸게 만든다. 진정한 구원과 해방이 있는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침대'는 그런 소설이다. 비대한 육체에 짓눌린 가족의 고통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구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말하는 구도의 소설이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이 소설이 어렵다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주제를 우려내는 설정이 독특한 만큼 이야기가 매력적이라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문장이 좋다. 표현도 참신하고. 작가 자신이 뭔가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흥미로움의 순도가 아주 높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정주리가 늘 되뇌는 말들을 스스로도 해 본 분들에게 얼마든지 권해드리고 싶다. 결국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든 이름없는 전구가 되든 그렇게 남의 이목을 끌고 못 끌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빛나고 있는가이다. 크든 작든 어떻든 그 내면에 지니고 있는 빛 말이다. 전구의 크기가 아니라 빛의 크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신경써야 할 것이 아닐까.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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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1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는 말이기도 하군요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라죠
그래도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신이 바뀌고 나서 도움을 바라야 하겠군요(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지도)

맬컴을 보고 사람들이 달라지기도 하는군요
자신만의 빛을 위해...


희선

ICE-9 2013-04-15 02:21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구원을 향한 내면성과 외면성의 대립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종교들마저 거기에 있어선 나뉘어지죠. 선종 같은 것은 내면으로의 깊숙한 침잠으로 해탈을 추구하지만 다른 종교들은 오로지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죠. 화이트하우스는 진정한 답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자는,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의 상징으로써 내면성이 충만한 공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침대를 소설 무대의 중요한 공간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어요. 리뷰에서는 안 밝혔지만 사실 이창동의 영화 '밀양'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전도연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정은 구원에 있어서의 외면성에서 내면성으로의 이행이죠. 그렇게 밀양을 보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선님께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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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쩍훌쩍...

  눈물이 아니라 콧물이 흐르는 소리입니다.

  봄은 저에게 그야말로 알러지의 계절인가 봅니다.

  쉴 새없이 코가 간질거리고 콧물이 흐르네요.

  하도 코를 풀다보니 머리도 여간 아프지 않은게 아닙니다.

  끈적한 엿처럼 달라붙은 두통을 매일 껴안고 사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신간 추천은 해야겠지요.

 

 

  이번 달에 가장 읽고 싶은,

  그래서 추천하고픈 작품은 바로

  브루노 슐츠의 작품집 입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건 아닙니다. 

  사실 예전에 길 출판사에서 슬라브 문학선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죠. 두 권이 나왔었는데 그게 바로

 '계피색 가게들'과 '모래시계 요양원'입니다.

 

  이번에 나온 이 작품집은 이제는 절판이 되어버린

  그 때 두 작품을 묶어서 새로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편이 실려있으며  번역자도 그 때 그 분입니다.

 

  절판된 책들을 찾아 다니셨던 분들에게는 더 없이 희소식인 셈이죠.

 

  브루노 슐츠... 그는 1892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시대애 폴란드의 유태인이라고 하면 장차 이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소설가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화가에다 문학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그 중 생전에 가장 각광받았던 것은 물론 화가로서였습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1930년대에 쓰여졌습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인 것이죠. 이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생전에 정체성의 혼돈을 겪은 인물도 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독일 지역이었던 드로회치에서 태어나 생활했는데 그 지역이 1차대전으로 원래 땅 주인이었던 폴란드로 돌아가게 되었죠. 그래서 그는 한 순간에 독일인에서 폴란드 인으로 정체성의 변화를 겪어야했습니다. 그는 또한 유태인이었지만 유태인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의 다층적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이 늘 그를 따라다녔는데 아마도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것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며 그래서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슐츠에게 가장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 책에도 실려있는 '악어들의 거리'겠지요. 독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제목이 많이 낯익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루노 슐츠의 '악어들의 거리'를 원작으로  미국의 퀘이형제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이 꽤나 유명하니까요. 바로 이 작품이죠. '악어들의 거리'를 메인으로 한 포스터 입니다.

 

 

  

  애니메이션 역시 슐츠의 원작 그대로 초현실주의적 분위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혹시 이 애니메이션을 아직 못 보셨다면 꼭 추천드리고 싶군요.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사실 악어들의 거리가 실린 단편집 초판은 브루노 슐츠가 직접 일러스트레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화풍의 삽화들이 실려 있었습니다.(소개하는 이 책에도 삽화가 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멋진 그림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되네요. 꽤나 인기가 있었던 화가라는 데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질 것 같습니다. 사실 브루노 슐츠는 2차대전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이 화가로서의 경력 때문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유태인이 당시 어떤 일을 당했던가 하는 것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슐츠 역시 그런 운명을 피하기 힘들었는데 한 독일인 장교가  그의 그림에 너무도 팬이었던지라 그를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그의 집에서 벽화를 그리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렇게 브루노 슐츠는 문학이 아니라 그림 때문에 그 암울한 시기를 비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행운은 그리 길지 못했고 살짝 비켜나갈 뿐이었습니다. 그 독일인 장교에겐 라이벌 장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그만 그 사실을 알고는 어느 날 빵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브루노 슐츠의 머리에다 총을 쏘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안타깝기가 이를 데 없는 죽음입니다. 그렇게 그는 역사의 발톱 아래 쓰러졌습니다. 더하여 당시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이며 쓰고 있었던 '메시아'라는 작품도 이로 인해 결국 미완으로 남았고 그 후 원고조차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슐츠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원고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환상의 원고나 다름없는데 신시아 오직이라는 미국의 한 소설가는 이 '메시아'라는 원고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슐츠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가 그 소설을 들고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이죠.

 

  쓰다보니 한 책을 가지고 너무 많이 이야기했네요. 아무튼 이렇게 여러 면에서 뚜렷한 영향을 지금도 끼치고 있는 작가인만큼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꼭 한 번 벗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미쓰다 신조를 좋아하는지라 이 작품이 발간된다고 했을 때부터 이미 관심이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읽으신 분들의 리뷰가 올라오는데 호평이 많네요. 그 중 '정말 무섭다'는 말이 또한 많아서 더욱 읽어보고 싶습니다. 미쓰다 신조에겐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으로 대표되는 도조 겐야 시리즈 말고도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작가 시리즈'란 게 있습니다. '작자미상'은 그 작가 시리즈 중 두번째 작품입니다. (첫번째 작품인 '기관'은 이미 출간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미스터리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면 '작가 시리즈'는 호러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이 '작자미상'이 가장 무섭다고 하는군요. 제가 좀 호러를 좋아하는지라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간평가단으로 읽어보면 좋겠는데 슬프게도 추천하신 분이 없으시네요 ㅠ ㅠ

 

 

 

 

 

 

 

 

 

 

 

 

 

 

 

 제가 지금 신간평가단 소설파트장을 맡고 있는데 그 중 하는 일 하나가 신간평가단 여러분들이 추천해준 작품들을 집계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어떤 책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아, 이 책은 이번 달 많은 추천을 받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는 어떤 감이랄까요 암튼 그런 게  은연 중 생기는데 폴 오스터의 '선셋파크'를 봤을 때 딱 그런 감이 왔습니다. 과연, 많은 분들이 추천해 주셨네요. 저 역시 폴 오스터를 좋아하는지라 좀 반갑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으로 부터 또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보고 싶네요.

 

 여기까지 쓰고는 잠시 쉬었습니다. 두통이 너무 심해지고 콧물도 자꾸 흘러내려서 말이죠.

알러지가 너무 심해지네요. 다음 두 작품도 꼭 읽고 싶고 특히 쿤데라의 책에 대해선 주절주절 하고 싶지만 그냥 간략하게만 말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좀 쉬고 이따가 또 집계도 해야 하니까요. 내일이 주말인게 정말 다행이네요.

 

 

 

  쿤데라가 왜 죽은 자들의 말에 집착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체제전복소설. 여기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이런 열망의 소설, 이런 발언의 소설

  한번쯤 꼭 보고 싶었습니다.

  '열외인종 잔혹사'의 그 작가라 더욱 관심이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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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4-06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아프지 말아요 ㅠㅠ
저도 알레르기성 비염에다 축농증까지 더해져 환절기만 되면 훌쩍훌쩍,
코를 풀다보면 어느새 감기까지 들러붙어 죽을 맛이지요.

참 오랜만에 헤르메스님을 보는 거 같네요. 희희
미쓰다 신조의 소설은 세 권 정도 사두곤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만 한 가득입니다.
저는 호러를 무척 좋아해서...!

다음 신간평가단 언젠가요 아 하고 싶어라 ~.~

ICE-9 2013-04-11 05:13   좋아요 0 | URL

이런 소이진님도 저와 비슷한 처지에...
요즘 통 안 보이시더니 아프셨군요...
저는 아직도 진행중인데 소이진님은 부디 빨리 나으시길 빕니다.

작자미상은 저 밖에 추천을 안해서 그냥 주문해 버렸어요^ ^
도입부만 약간 읽은 정도라 아직 뭐라고 말은 못하겠네요.

저도 소이진님이란 신간평가단 꼭 하고 싶어라~.~

희선 2013-04-0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루노 슐츠,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네요 안타깝게 죽었군요
미쓰다 신조 소설은 아직 한번도 못 봤습니다
이 책 두 권 그림이 이어진 것인가 봐요
알라딘에 바로 들어왔을 때 이 책 두 권이 함께 있는 게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폴 오스터 소설을 보기도 했는데...
라디오에서도 새로 나왔다고 말을 하더군요

봄이라 그러시군요
그것은 어떻게 하면 좋아질지...
병원에라도 한번... 하지만 가고 싶지 않으시겠군요
나아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희선

ICE-9 2013-04-11 0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아직도 여전히 진행중이에요.
매일을 이렇게 코맹맹이에다 두통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일상이라니...
그래도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루노 슐츠의 최후를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죠. 더구나 그가 채 완성하지 못한 대작 '메시아'를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구요 ㅠ ㅠ
사실 저 표지에 혹했어요^ ^ 주문해서 실물을 받아보니 과연 멋지더군요.^ ^
미쓰다 신조는 자신있게 권해드릴 수 있는 작가입니다. 저는 도조 겐야 시리즈를 아주 좋아하는데 요코미조 세이시의 세계와 주제를 잘 계승하여 보다 확장시키는 작가가 아닐까 생각해요. 언젠가 꼭 한 번 벗해보시길 바랄게요^ ^

Shining 2013-04-1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어이쿠, 두통에 코맹맹이라니ㅠ 너무 힘드실 것 같아요ㅠ 계절에 맞지 않게 찬바람이 불어서 더 그런걸까요ㅠ

저도 숙제 일찌감치 끝내고(하하. 리뷰는 언제 쓰련지;) 보니까 선셋파크는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쵸? 그런데 다른 한 권은 어떤 책이 될지 모르겠네요+_+ 헤르메스님은 어떤 책이 선정될 것 같으세요?

아, 저 며칠 전에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읽었습니다. 후훗. 아마 헤르메스님 리뷰 아니었음 그냥 보고 지나치거나 나중에나 골랐을텐데 단번에 골라왔죠.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꾸벅).

ICE-9 2013-04-15 01:32   좋아요 0 | URL
우와! Shining님 반가워요. 거기다 제 걱정까지 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사실 요즘 몸이 말이 아니라서, 이제는 잇몸에 이빨까지 말썽이라 내일부터 치과까지 다녀야 해요 ㅠ ㅠ 그래서 더욱 Shining님의 위로가 힘이 되네요. Shinig님은 저와달리 내내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제가 집계한 결과를 Shining님께 살짝 알려드리면(아, 빨리 Shining님의 댓글을 확인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어요. 몸 때문에 흑 ㅠ ㅠ) 선셋 파크가 1위를 했고 2위는 배신당한 유언들이 했는데 표 차이가 무려 5 표가 나요.

그만큼 선셋 파크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한 가지 걱정은 이미 열린책들의 책을 평가단 도서로 했기 때문에 다시 선정될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보니 중복으로는 잘 선정되지 않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너무나 열화와 같은 추천이라 살짝 예외를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무래도 중복된 출판사를 피하고 많은 표를 얻은 작품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배신당한 유언들이 가장 유리하구요. 다음 4표를 받은 작품이 둘 있는데 (하나는 '주말'이고 하나는 '엿보는 고헤이지') 모두 이미 했던 출판사의 책들이라 다음 세표를 받은 작품들 중에서 문지에서 나온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한국 문학이 그동안 선정되지 않았으니 메리트가 있을 것 같아요. 같은 이유로 주원규의 너머의 세상도 될 가능성이 있겠군요.^ ^) 아무튼 제 예측은 이래요. 이대로 된다면 진지하게 자리도 한 번 깔아 볼 생각을 해야겠네요^ ^

'브랫 패러의 비밀'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리뷰에 있어서만큼은 제가 소심증이라 좋다고 말했는데 나중에 안좋다는 말 들으면 어떡하지 굉장히 걱정하거든요. (같은 이유로 끝까지 연기하라 선정되었을 땐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다른 분들 리뷰 보기가 어찌나 겁이 나던지^ ^;)
Shining님이 그리 말씀해 주시니 더욱 안심되고 기쁘네요^ ^

Shining 2013-04-15 12:52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예상치 못했는데! 쿤데라의 글을 추천하긴 했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했거든요(하하하). 그냥 사서 읽자, 싶은 마음_- 그러나 홍보하고 싶은 기대?ㅎㅎ 그렇군요, 출판사의 내부사정 등이 있을테니. 가끔 생각해 볼 때는 있지만 저는 무작정 제가 읽고 싶은, 혹은 읽혔으면 하는 글만 마구 쓰는데. 역시 파트장님은 다르시군요-_-b 헤르메스님이 자리를 까실 수(응? 쓰고 나니 말이 이상하네요;;) 있을지 저도 덩달아 궁금해집니다+_+

하하. 모든 글이 그렇지만 리뷰 쓸 때는 특히 그런 것 같아요. 그저 그럼, 혹은 제법 좋음, 보다도 좋다, 별로다, 라고 말할 때 특히 더요. 하지만, 저는 헤르메스님의 안목을 믿는답니다ㅎㅎ 여태껏 그랬지만 특히 이번 브랫 패러의 비밀, 덕분에요 :)

아프지 마세요, 헤르메스님ㅠ 제가 기를 보내드릴테니(!) 부디 빨리 나으세요 :^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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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HOW MUST GO ON....

 

  삶이 비극이라면 그건 어쩌면 머물지 못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뭐, 이것은 소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비로소 도달한 행복의 절정에서 꼭 듣게 되는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순간, 꼭 연인 중 하나는 마치 속삭이듯 이렇게 되뇌이죠. "이대로 시간이 멈춰지면 좋겠다..."고.

 

  사실 이것은 비단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들만의 대사는 아니죠. 우리도 살면서 한껏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며 삶이 딱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영원히 결빙시키고 싶죠. 왜 우리는 이런 말을 되뇌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삶이 저 시간의 비탈을 굴러가기 시작하면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뾰족한 자갈돌과 진창으로 지금 느끼는 행복감이 이내 썰물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죠. 이 삶이란 가파른 비탈 길은 부드러운 잔디밭 보다는 자갈밭과 진창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행복과 평안이란 것도 정말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문에 마주한 행복의 순간을 우리는 정말 '비로소'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말 힘들게 찾은만큼 다시는 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 순간을 더욱 영원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런 대사, 그런 생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한 순간 혹은 기념할만한 순간을 꼭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이러한 결빙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요.

 

 

  COCOON UTOPIA...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는 자라나는 걸 싫어하는 거라고.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로 바라고 바라는 것은 태초에 내가 있었던 곳, 그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라고 말이죠. 내가 태어(胎魚)가 되어 머물던 어머니의 자궁이야 말로 정말은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인 셈이죠. 아니나 다를까 이건 원래 유토피아의 원초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토피아를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는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초원이 그들이 그렸던 유토피아의 모습이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태아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다름아니라고. 

 

 

  FIRST CRACK...

 

  그렇게 인간이 가진 욕망의 본질적 모습은 어쩌면 영원히 삶을 '모라토리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가 이러한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각인된 세상에 나온 그 최초의 기억이 바로 '추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써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가, 저 내부의 어디에선가로 부터 전해져 오는 힘에 억지로 떠밀렸거나 혹은 갑자기 천장이 열리면서 처음 보는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빛과 함께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격리되어 세상에 나왔죠. 우리의 자발적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전적인 추방이었고, 더 이상 양수의 보호를 받지 못한 우리의 연약한 피부가 처음으로 감지했던 건 차디찬 세상의 냉기였기에 또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한 유토피아로 부터 삶으로 나왔지만 그 첫 대면의 순간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죠. 그리고 내내 갑작스런 추방으로 인한 두려움, 안에 있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각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성장이 삶의 다음 순간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라면 그렇게 우리가 받은 성장에 대한 첫 인상은 절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울음은 당연했어요. 영원한 상실의 통감이었고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의 절절한 표현으로써의 울음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힘들면 힘들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막연히 떠올리게 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는 본질적으로 태아적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게 그건 사실 우리 욕망이 아니라 우리 그리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어요. 태초에 내가 있었던 그 '코쿤'에 대한 그리움. 우리가 행복 절정의 순간 멈추고 싶어 하는 것도 비로소 그 '코쿤'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드디어 왔어. 이제 나를 내몰지 말아줘.' 사실은 이런 말이겠지요.

 

  성장이란 우리를 저 사르갓소로 내모는 밀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뭐라도 붙잡고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삶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게 하고 가족을 가지게 하고 책임이란 짐을 두 어깨에 올려 놓습니다. 정말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렇게 내가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에 결빙되는 것이지만 이미 그건 잠시의 꿈으로만 맛볼 수 있는 머나먼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움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감정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그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한 번 누렸으나 이제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사무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을...

 

 

  ONCE AGAIN, KNOCKING ON HEAVEN'S DOOR...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위와 같은 문구가 될 것입니다. 네, 이 소설은 저도 모르게 앞에서 주절주절 말해버린 그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중요한 공간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인공의 과거에 관련된 '장미정원'이고 또 하나는 현재에 관련된 '가합동'입니다. 이야기는 이 두 공간을 중심으로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그렇게 이응준은 주인공 문하가 어떻게 가합동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장미정원'을 통해 이야기하고 또 어떻게 가합동을 떠나게 되었는지 '가합동'을 통해 이야기 합니다. 이 두 공간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주인공 문하에게 있어 앞서 말한 '코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거긴 태풍의 눈, 회전하는 팽이의 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일종의 정점. '이대로 죽어도 좋아'를 외칠 수 있는 공간. 문하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곳. 즉 어머니의 자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뿌리를 내립니다. 그를 단단히 받쳐줄 지지대가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미정원에 있어서는 배다른 형인 인하가, 가합동에 있어서는 박학다식한 거구의 산타페가 존재합니다. 문하는 거기에 기생합니다. 그는 달이 되어 장미정원에서는 인하의 궤도를 돌고 가합동에서는 산타페의 궤도를 돕니다. 그렇게 문하는 세계를 보는 방법과 이해하는 방법을 인하를 통해 배우고 세계와 마주하는 방법을 산타페를 통해 배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똑같은 건 아닙니다.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도는 항성 때문이 아니라 문하 자체가 이미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문하가 가합동으로 왔을 때 그는 최초의 균열을 겪은 태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인하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장미정원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창세기의 아담과도 비슷합니다. 그 때 금지된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듯 문하는 금기된 상황을 목격하고는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확 넓혀져버리니까요. 어쩌면 아담의 이야기 자체가 태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은유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문하는 성장에 따르는 고통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찾아온 곳이 바로 '가합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정원'이 자연적 코쿤이라면 '가합동'은 인위적 코쿤입니다. 다시 한 번 장미정원을 만들고픈 그의 욕망이 다다르게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차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하에겐 이미 더 이상 그런 곳이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구현된 장소 그 곳이 바로 가합동의 '하늘밥도둑'의 공간이며 그 구현된 인물이 '산타페' '물귀신' '미저리' '수인' 입니다.

 

 

   HAUNTED...

 

  이응준은 '하늘밥도둑'을 꿈결처럼 모호한 그래서 다소 비현실적은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거기는 내내 음악이 흐르는데 그 소리의 간섭으로 인해 공간이 가진 물리력이 자주 지워집니다. 더구나 손님도 거의 없고 도대체 산타페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는지 정확한 설명도 없습니다. 산타페는 별 이유도 없이 문하를 아끼고 문하 역시 그 애정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합동에서 모든 설정과 인물들은 마치 유령의 느닷없는 출몰처럼 툭툭 던져집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저리'를 만나게 되고 '물귀신'을 조우하게 되며 '수인'과 밥을 먹게 됩니다. '산타페'와의 첫 대면도 별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입니다. 이 상황을 이응준도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에서 운명과 우연이 뭐가 다르겠느냐고 말하죠. 가합동은 그런 공간입니다. 모든 우연이 허용되는 꿈같은 공간. 분위기는 흡사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적막한 공동 묘지를 보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이 주인공 문하를 비롯하여 다들 유령같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저리' '물귀신' '수인'은 툭 던져진 우연만큼이나 작위적인 존재들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이들은 마치 햄릿 앞에 나타난 아버지 유령과도 같습니다. 문하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거지요. 그들은 때로 침묵하고 때로 수다스럽지만 사실은 이렇게 쓰인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길 떠나라. 또 하나의 장미정원은 더 이상 없으니....

 

  그러니까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문하의 분신들이었으며 사실은 더 이상 장미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문하의 무의식이 자신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 불러낸 유령들이라는 것을 말이죠. 때문에 '가합동'의 공간이, 특히 그 '하늘밥도둑'이 비현실성으로 넘쳐났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 곳이 모두 마치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문하 의식 속에나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기에 정말 영원히 머무르려 했습니다. 그건 가합동에서 매일 같이 지내게 되는 인물이 가진 '산타페'라는 이름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산타페'는 번역하면, HOLY FAITH. 즉 성스러운 믿음이란 뜻입니다. 산타페란 이름은 문하가 가진 욕망의 투영이었습니다. 그는 그 정도로 다시 한번 그 장미정원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한 번 세상 밖으로 나온 태아가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그렇게 삶이란 비탈을 굴려내려간 이상 다시 그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공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들에게 불가능하니까요. 아담도 에덴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듯이 말이죠.

 

 인하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인하형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있는 것은 다만 작별뿐이라는 것을. 가합동의 공간과 인물은 모두 그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는 죽음으로, 하나는 미스터리한 영상으로 또 하나는 고백으로 문하가 왜 그 곳을 떠나야 하는지 알려주고 사라집니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같이 말이죠.

 

 

  LIKE GIRL IN THE RED SHOES...

  BUT, TRY TO HOLD ON...

 

  두 번의 추방, 두 번의 실패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영원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우리는 한 발 한 발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억울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어쩐지 긍정이라기 보다는 체념에 가깝다구요? 네,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느낀 것도 체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이 우리의 본질인 것을. 한 번 비탈길에 들어선 이상 한없이 굴러갈 수 밖에 없는 공과 같은 존재인 것을. 삶이 우리의 선택사항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삶은 비극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 동화 속에 나오는 분홍신을 신은 존재와 같아요. 그 이야기가 그토록 슬펐던 이유도 바로 그녀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들리면 무조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그녀처럼 우리도 한 번 어머니의 자궁 바깥으로 나온 이상 영원히 그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며 상실감과 외로움 속에서 삶이란 'SHOW'를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더구나 음악을 가릴 수 없는 그녀처럼 스스로 장르를 선택할 수도 없는 'SHOW'를 말이죠.

 

  제가 이 소설을 좋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이 아무런 섣부른 희망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충치를 낳게 만드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소설은 우리 삶의 본질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우리가 체념 속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진실 말이죠. 그저 견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정직하게 말해주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제목인 '느릅나무 아래 숨은 천국'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생각해보면 느릅나무는 땅 가까이 내려오는 가지들로 인해 왠지 축 저친 어깨를 연상시키고 그래서 얼른 하늘을 힘겹게 이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나무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렇게 모습 자체로 견딤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느릅나무가 아닐까 싶어요. 이응준은 바로 그 아래 천국이 숨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난 뒤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가에 머금게 될 한숨에 대한 위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그 견딤 자체만으로도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소설에서 산타페가 문하를 위로하고 격려했듯 그렇게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고자 함이겠죠. 작가 후기에 스스로도 이 작품을 앞으로의 문학 생애에 있어 벼리로 삼고 있는 걸 보면 그저 저만의 망상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런 소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문득 자신에게 신겨있는 분홍신을 보게 만들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 신으로 인해 아픈 발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어떤 걸 보게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한 상실과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을 같이 안고 살아가는 동지로서 왠지 이 말만은 해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모든 걸음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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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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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의 묘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 봅니다.

 사실은 테리 이글턴의 '보이지 않는 것의 날인'이란 책에서 읽은 문구입니다.

그건 거기 실린 한 챕터의 제목인데요, 바로 이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없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그냥 수사학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말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란, 거기에 살고 있거나 직접 가본 사람은 빼고, 그저 텍스트로 만나본 이탈리아 밖에는 없으니까요. 책이든, 사진이든, 영화를 막론하고 말이죠. 네, 우리가 만나는 이탈리아는 어디까지나 그 매체가 무엇이든 누군가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따지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란 순전히 텍스트 위에만 존재하는 환영적 대체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진짜 이탈리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직접 가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설령 진짜 이탈리아를 간다고 해도 이탈리아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죠. 정말은 다만 '확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가 익히 보고 들었던 그렇게 집적된 수많은 정보들의 확인. 그동안 글이나 사진으로 만났던 것의 실체를 확인하는 정도겠죠. 그것이 바로 실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매개로 알게 된 '이탈리아'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뿐이니까요. 쉽게 말하면 그가 정답인지 아닌지 답안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관광이 이내 식상해지고 별 재미없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나만의 진짜 이탈리아는 만나볼 수 없으며 끝내 체념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건 나는 도저히 '텍스트화된' 이탈리아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니까요. 그래서 관광객들은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사진 찍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의식적으로 실재(the real)을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도달한 실재마저도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다는 질투심(아시다시피 질투심은 내 무력함의 다른 표현입니다.)에 서둘러 또 다른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해서 찍은 사진은 바로 내가 매개한, 나만의 텍스트가 되니까 말이죠.

 

 '이탈리아는 없다'라는 말은 우리가 사실은 모조리 텍스트화된 상황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실재와 환영,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자아도, 가치관도, 취향도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구성물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나요? 그저 모든 것이 혼재된 뒤죽박죽의 텍스트 덩어리 말고는...

 

 움베르토 에코의 전작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그랬죠. 주인공은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사고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참 두뇌는 이상하기도 해요, 자신이 읽은 것만은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영혼은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안개 속인데도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나 시와 같은 이런 텍스트들만은 갓 잡은 활어처럼 뇌리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유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추리하며 누더기가 된 자아를 기워나갑니다. 뭐가 진실인지는 당연 몰라요. 사실 인간이 텍스트 너머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저 그런 텍스트가 만든 한계 안에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진실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바라 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였다는 것이죠.

 

  이는 그 전작 '바우돌리오'와는 또 어떻게 연결될까요? 사실 이 바우돌리오는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니니의 원조격인 인물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한창 벌어지는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바우돌리오는 자서전을 써 나갑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골의 무지렁이 농부의 헛것이 보이는 모자란 자식에 불과했던 바우돌리오는 그 문서에서 놀랍게도 당시 유럽에 있었던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마다 개입하여 사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내었음을 밝힙니다. 실제 인물들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교묘하게 엮이어 있어 읽는 이는 얼른 바우돌리오의 말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해낼 수 없습니다. 바우돌리오의 서술은 너무도 능숙해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소설임을 얼른 잊는다면 완전 진짜 사실처럼 들리니까요. 더구나 중세 역사하면 또 움베르토 에코 아니겠습니까? 완벽하게 재현된 거기서 '이건 가짜야'하고 우리가 찾아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따르죠.

 

  하지만 또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쓴, 그렇게 텍스트화된 역사 뿐이고 정말은 그것과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진짜 역사는 바우돌리오의 말대로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소설과 역사가 그리 잘 구분될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지구에 다시금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일이 일어나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책이 다 사라지고 오로지 바우돌리오만 남게 된다면 그 후의 사람들은 바우돌리오를 유일하게 중세 역사를 설명하는 역사서로 믿는 것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와 똑같이 우리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중세 역사서가 사실은 그 때도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가 있어 당시 사람들을 재밌게 하려고 쓴 소설일지 모르고 말이죠. 정말 누가 알겠어요? 그 역사서가 쓰여진 그 때 그 시간으로 가서 목격하지 않는 한, 과연 누가 소설과 역사를 딱 구분해낼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더없이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바우돌리오' 이후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그건 이것입니다. 실재와 환영의 경계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과 역사가 분리될 수 없듯이 진실과 허위의 경계 따위도 없습니다.  아니 문제는 그걸 구분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더욱 인식해야 할 확실한 사실은 오로지 이것.

 

우리에겐 오로지 '텍스트' 밖에는 없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텍스트들로 교직된 세계를 걸어가는 또 하나의 '워킹 텍스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프라하의 묘지'는 그런 노선을 취한 것입니다.

  이 소설은 히틀러로 하여금 '아우슈비츠'를 만들어서라도 유태인 말살을 결심하게 만든 문건, 지금까지 많은 반유대주의에게 정당성을 가지게 해 준 문건, 분명히 하나의 텍스트로 실재하는 문건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과 사실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문서 위조에 능숙한 재능을 가진 시모니니가 어떻게 해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이란 위조 문서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말하자면 그 기원을 제대로 밣혀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텍스트에 텍스트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선 이것이야 말로 가장 제대로 된 대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텍스트의,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를 위한, 워킹 텍스트들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 소설은 소설이라 부르기에도 좀 애매합니다. 여기서 에코에 의해 순수하게 창조된 인물은 오직 단 하나 주인공 시모니니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나머진 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서라는 텍스트에 기재된 사항이라는 것이죠. 에코는 당시의 문헌, 신문, 역사서나 회고록 혹은 전기에 나와있는 인물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이 90%, 허위가 10%입니다. 참으로 역사 르뽀와 소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과 같은 19세기에 유행한 대중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멩이는 실재인데(물론 어디까지나 텍스트 상으로만) 껍질은 허위인 것이죠. 더구나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19세기적 대중 소설의 문체로 번역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에코는 독자들이 무엇보다 옛 소설의 형태로 받아들이기 원했습니다. 진실이지만 허위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원한 것이죠. 왜 이렇게 했을까? 단순히 옛 소설에 대한 향수나 느끼면서 느긋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느끼는 움베르토 에코는 그리 친절한 작가는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쓴 이유는 제 생각입니다면 역시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있는 것은 다만 오로지 텍스트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죠.

 

 이러한 역사와 소설의 모순된 뒤틀림은 사실 앞서도 말했듯 역사와 소설,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을 그리 쉽게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텍스트들 뿐이며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텍스트의 중력으로 가득한 '이벤트 호라이즌'을 홀연히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날개가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완전한 실재 혹은 진리가 내뿜는 압도적 열기에 바로 흐물거리며 녹아버릴 밀랍으로 된 이카루스의 날개 뿐이겠죠.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 태도를 요청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텍스트 밖에 없으며 우리 존재의 진실은 다만 '워킹 텍스트'라는 자각을 가진다면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건 쉽게 말해 겸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믿는 것이, 혹은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완벽한 진실이 아님을 아는 것. 그렇게 나란 존재는, 내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취향까지도 모두 실재와 환영이 뒤섞인, 진짜와 가짜가 마구잡이로 혼재된, 본래와 이식된 것이 아메바처럼 융합되어 있는, 잡탕찌개임을 아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모론의 계보를 거꾸로 거슬러 훑는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의 이와 같은 부분에서 이 책이 왜 그와 같은 태도를 요청하는지는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가?(그렇게 엄청난 행운은 고사하고 그저 소박한 바람이라도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나는 그마저도 얻지 못하는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도 내리는 복이 왜 나한테는 오지 않는가?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 자신이 무능한 탓도 있으련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을 불행하게 만든 죄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뒤마는 욕구 불만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천둥산 꼭대기에서 열린 모임에서 어떤 무리가 그대의 몰락을 계획했다는 식으로...

 

  따지고 보면 뒤마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에 비추어 나는 그 시절에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P. 146 ~ 147)

 

 

 

  시모네 시모니니는 프라하의 묘지에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태인을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태인을 증오했습니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할아버지의 증오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죠. 우리의 증오란 그러합니다. 대부분 사실은 모두 매개된 텍스트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직접 느끼고 경험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감각하고 경험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조차 사실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형식을 매개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해석한, 정해진 규칙으로서의 '말'을 알 뿐입니다. 당신이 보는 색깔도 마찬가지죠. 세상에 진짜 빨강이 있을까요? 아니 아예 우리 세계에 색깔이 있을까요? 완전히 독립된 실재로서 존재하는 색깔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은 우리가 모두 알지 않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이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색깔이란 빛에 의해 덧칠해진 시각적 정보를 우리의 두뇌가 해석한 영상일 뿐인 것을. 어디까지나 진짜 색깔이 아닌 매개에 의한 하나의 텍스트 뿐인 것을. 사실은 개야말로 진실된 세상의 색깔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은 무채색의 세상인데 우리가 멋대로 색깔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정밀히 따지고 든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정말로 텍스트 뿐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에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로 '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라고 말했죠. 벗어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주된 소재이기도 한 '안개'야 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며 세상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바로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재하는 프라하의 묘지입니다. 이렇게 프라하에는 실제로 유태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 꼭 한 번은 들르게 되는 관광명소이기도 하지요. 원래부터 유태인은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이곳 프라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묘지가 있는 곳은 그렇게 유태인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은 아무 곳에나 묘지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사는 곳에다 묘지를 쓸 수 밖에 없었죠. 그것이 바로 저렇게 많은 묘지들이 하나의 군집을 이루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프라하의 묘지 자체가 유태인들이 받았던 박해 혹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실재(the real)로서 말입니다. 그 어떤 허위의 기입이나 조작으로 지워버릴 수 없는 하나의 얼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저기에 가본데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프라하의 묘지'는 당신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언어가 매개되지 않는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란 그렇습니다. 영원히 당신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을 아무리 내뻗어도 만질 수 없는 절대적으로 저- 너머의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좁은 틈 앞에서 기껏해야 사진을 찍거나 강 밖에서 공무도하가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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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3-27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장미의 이름> 읽으려고 한 적 있어요 그런데 앞부분만 조금 보고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보면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비슷하게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한테는 뭔가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온 책을 본 적도 있는데, 비슷하지만 다른 것도 같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별로 겸손하지 못하군요^^

<프라하의 묘지>는 읽는 데 어떤가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테지만, 도서관에 왔더라구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