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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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은 마이클 코넬리의 그 많은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이다. 그녀의 이름은 캐시 블랙. 2000년에 첫 등장한 그녀는 비록 그녀 자신이 주인공인 속편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뒤 해리 보슈의 '시인의 계곡'이나 미키 할러의 '탄환의 심판'등 다른 작품에서 자주 얼굴을 내밀게 된다. 그렇게 마이클 코넬리는 카메오처럼 그녀를 출연시키는데 거기서 코넬리의 연출 방법이 자못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단 한번도 캐시 블랙의 온전한 실체와는 만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녀의 흔적일 뿐이다. 기억 속의 존재나 머그샷과 같은 기록 속의 존재일 뿐이다. 유일하게 실존하는 캐시 블랙을 만날 수 있는 '시인의 계곡'에서 조차 그녀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캐시 블랙이란 진짜 이름의 온전한 실체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 밖에는 없다. 그 외는 모두 흔적이거나 위장일 뿐이다. 실재가 아닌 실재의 잔여물들. 그러니까 유령이다. 유령이야 말로 실재를 추정하게 만드는 실재의 잔여물이 아니던가. 단적으로 말해버리자. 마이클 코넬리는 '보이드 문'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인 캐시 블랙을 오로지 유령으로만 출현시키고 있다고.

 

  마이클 코넬리의 세상은 단적으로 버림받은 수컷들이 배회하는 세상이다.

  그 가득한 수컷들의 아귀다툼 가운데 캐시 블랙은 홀연히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마이클 코넬리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을 잔여물로써의 유령으로 만든 것일까? 먼저 이 의문을 풀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풀려야 '보이드 문'에서 마이클 코넬리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보이드 문'은 거꾸로 풀어가야 하는 작품이다.

 

  마이클 코넬리에게 유령은 무엇인가?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캐시 블랙이 유령이 되었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의 단서를 우리는 보슈라는 캐릭터를 만드는데 영감을 줬던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코넬리 기자 시절 그가 앉는 책상 위자 뒷 벽에 늘 붙어 있던 그림으로 '블랙 에코'에서도 나오듯이 보슈란 이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쾌락의 정원'이란 그림인데 사진은 그 중간 부분, 그러니까 점점 죄악에 물들어가고 있는 현세를 나타내는 그림 중 윗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령이 나온다.

 

  그러니까 저기 하늘을 날고 있는 존재들이 유령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늘의 색깔은 앞쪽에 있는 천상에 있는 하늘의 색깔과 같다. 이러한 동일함은 여기의 유령 또한 하나의 잔여임을 말해준다. 잔여는 흔적이지만 알고보면 실재의 연장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그 흔적을 통해 실재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잔여들은 일종의 틈새와 같다. 그 찢어진 틈새로 현실이 뒤덮고 있는 장막 너머의 진정한 대안 혹은 구원을 보게 하는 그런 창구인 것이다. 유령은 그런 존재다.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 헤메이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오아시스가 실재함을 말해주는, 그렇게 그들의 확신을 보증하는 존재다.

 

  이는 '보이드 문'에서 캐시 블랙이 새로이 만든 가명이자 '시인의 계곡'에서 해리 보슈에게 나타났을 때의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라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마이클 코넬리가 하도 노골적으로 이름을 지어놓아서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제인(Jane)'이란 이름은 원래 'God is gracious!', 즉 '신은 자비롭다'를 뜻하고 '데이비스(Davis)'는 'Son of David', 즉 '다윗의 계승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뜻하는 존재가 가지는 이름으로써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이클 코넬리가 일부러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후의 출연이 모두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찾고 있는 구원의 증표임을 뜻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정말로 캐시 블랙을 '쾌락의 정원' 하늘 위를 홀연히 날아다니는 유령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캐시 블랙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캐시 블랙이 어떤 의미의 존재이기에?

  그제서야 우리는 '보이드 문'으로 들어갈 것이 허락된다.

 

  

 

    

  생각해보자. 대관절 마이클 코넬리는 왜 여성 주인공을 가져온 것일까?

  그것도 그냥 여성이 아닌, 엄마를?

 

  그렇다. 엄마다! 이 소설은 엄마가 주인공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해리 보슈를 생각해 보자. 그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그는 거친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 살아남기 위한 수컷의 악전고투가 앞에 놓여졌고 죄악 가득한 세상으로 자신을 삼키려드는 '블랙 에코'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형사가 되었다. 그가 형사가 되었던 진짜 이유는 물론 따로 있다. 자신에게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엄마가 죽게 된 진상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 진실을 찾음은 세상이 앗아가 버린 엄마를 다시 찾아오는 것과 같다. 그것이 검은 메아리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이었다. 갇혀진 곳에서 메아리는 더욱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메아리로 부터 벗어나려면 비워야 했다. 엄마를 되찾음이란 바로 그것과 같았다. 세상이 덮어버린 어둠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로 메아리를 빠져나가게 하여 비우는 것. 그리고 그 텅 빈 공간(void) 안으로 엄마로 상징되는 구원의 빛을 들어오게 하는 것. 형사로서의 해리 보슈의 길은 그런 것이었다. '진실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란 말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과 같은 길.

 

  여기서 두 가지가 얼른 밝혀진다. 왜 코넬리가 하필 이 작품에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 그리고 제목으로 빈 공간을 뜻하는 '보이드(void)'를 쓴 것인지. 단적으로 그 둘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앞서 왜 코넬리가 캐시 블랙을 유령처럼 만들었는가에 대해 누누히 말했는데 그것도 이 때문이다. '엄마란 존재 = 보이드(void)' 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필연적으로 '보이드 문'이 되어야 했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대안의 궁극적 모습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코넬리는 이후의 작품에서 비록 그녀가 구원의 존재이긴 하지만 유령처럼 만들어 그 실체를 지워야했던 것이다. 모든 건 다 연결된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마이클 코넬리를 그저 평범한 스릴러 작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보이드 문'은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 결론처럼 덧붙인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마이클 코넬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픈 대안의 구현체라고. 그래서 코넬리의 작품 중 사실은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물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덧붙인다.)  

 

  이제 설명이다. 아니, 나만의 견해이므로 변론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버지'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같은 국적을 가진 작가, 존 하트처럼 마이클 코넬리도 사실은 '아버지'가 핵심이다. 그건 단적으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미키 할러는 중심에 있지만 해리 보슈는 변방 혹은 경계에 있다. 쉽게 말해 미키 할러는 '인사이더'지만 해리 보슈는 '아웃사이더'다. 이 둘은 사촌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이유는 단 하나다. 해리 보슈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다. 반면 미키 할러는 아버지가 죽을때까지 내내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해리 보슈는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축출된 자고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그래서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악습까지도 닮아 그의 복제가 되고 해리 보슈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결국 아버지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따지고 보면 늘 나쁜 아버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상대하는 자들은 모두 아버지이거나 그 아버지의 복제판이다. 한마디로 마이클 코넬리의 분신들이 맞짱을 뜨고 있는 대상은 '아버지'(라캉적 의미에서 지금 현실 사회의 상징계 질서 전체를 조직하고 떠받치는 주인 기표로써의)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와도 같다. 그런데 독자들이 이걸 못 본단 말이지. 해리 보슈만 해도 모두 6편에 걸쳐 그걸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스릴러라고만 생각한단 말이지. 어쩌면 마이클 코넬리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기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으며 자신의 소설은 바로 그 나쁜 아버지와 싸우는 것임을 몰라줘서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스탠드 얼론 '보이드 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얘기해주마. 도저히 못 알아듣지 못하게!'란 마음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드 문'은 설정은 단순해진만큼 의미는 더욱 노골적이 되어 하려는 얘기를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드 문'은 신기하게도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만나는 '탄환의 심판'을 닮았다.

  당신이 만일 그 둘의 협력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싶다면 '보이드 문'은 가장 적합한 선택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보이드 문'은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과도 같으니까. 어째서냐고? 그건 설정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명의 주인공의 설정이 해리 보슈, 미키 할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캐시 블랙은 해리 보슈처럼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다. 반면, 캐시 블랙을 뒤쫓는 사립탐정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를 우상으로 여기며 그의 자리에 서고 싶어한다. 이런 의심도 해 본다. 미키 할러의 원본이 바로 이 잭 카치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쨌든 참 닮아있다. 앞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차이점을 이야기 했는데 그건 그대로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는 일도 똑같다. 해리 보슈가 아웃사이더로서 사회가 정형화시킨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듯이, 캐시 블랙 역시도 그러하다. 그녀 역시 절도범으로 아웃사이더이고 오로지 카지노에서 거액을 딴 사람들만 노리는 나름의 신념이랄까 철칙이 있다. 해리 보슈가 비록 형사이긴 하지만 세상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들추어내어 사실은 세상에 균열을 야기하는 것처럼 캐시 블랙 역시도 숨겨놓은 잉여의 돈을 훔쳐 세상의 질서를 교란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일찍 축출된 자들이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교란하니 그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는 아들들은 그 균열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둘러 봉합할 수 밖에. 그렇게 미키 할러는 진실 보다는 협잡과 은폐로서 아버지의 법질서를 봉합하고 잭 카치 역시도 원래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는 것으로 벌어진 사회의 틈을 얼른 메우려 든다. 그는 돈을 찾기 위해 추적에 나섰으며 절도에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늘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같다. 이 소설은 그동안 해리 보슈가 해왔던 대로 잭 카치로 대변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싸우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주제를 명확히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맞서는 대상 역시 보다 쉽게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변형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캐시 블랙은 여성이 그것도 모자라 엄마가 된 것이다. 소설은 5년전 불의의 사고로 애인을 잃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다행히 가석방되어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살고 있는 캐시 블랙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현재 자동차 판매원이다. 그것도 운좋게 성공하여 일확천금을 얻은 주로 젊은 백만장자들을 상대로 차를 파는 판매원이다. 그녀가 주로 상대하는 새롭게 사회의 상층부에 편입한 젊은이들은 미키 할러와 같이 닮고싶은 아버지의 자리로 오르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뜻한다. 캐시 블랙이 그들이 더욱 재빠르게 달려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판매한다 함은 그녀가 이제 벗어나 있었던 아버지 세계로 편입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걸 지속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수감 당시 출산한 딸을 입양한 가정이 이제 자기가 못 볼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딸의 곁에 있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전의 그 일을 반복할 생각을 한다. 딸만 포기하면 언제든 세상인 마련한 안정된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걸 내팽개치고 딸을 위해 기꺼이 불안정한 경계 위의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는 해리 보슈와 캐시 블랙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정반대의 행동이다. 보슈와 블랙의 아버지는 책임지기 싫어서 그들을 버렸다. 하지만 블랙은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기 위해 오히려 사회가 주는 안정을 버린다. 이로서 분명해진다. 마이클 코넬리가 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가. 그가 벌이는 아버지와의 싸움에 있어 엄마의 존재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이유와 그 대안을 아울러 보여줄 최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을 떠맡고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잭 카치의 추적은 사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즉 양립불가능성 이다. 아버지의 질서 안에 거하면서 엄마로 있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진정한 엄마가 되려고 한다면 타협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캐시 블랙이 딸에게 진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에서 완전히 떠나든가 아니면 딸을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다. 자기 구원을 위한 대안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곳에서만 가능하다.

 

 

 

 

 

   제목 '보이드 문'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p. 82 ~ 83)

 

  이렇게 '보이드 문'이란 달이 그 어느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완전히 비어 있는 곳에 있는 달. 그것이 바로 '보이드 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캐시 블랙이 진정한 엄마가 되려면 있어야 할 곳이다. '보이드 문'이 무엇인지 캐시 블랙에게 설명해주는 레오는 그 말을 하면서 그 시간에는 절대 절도를 하려는 방에 있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 방이 있는 호텔은 사실 캐시 블랙에게 트라우마의 공간이기도 하다. 같이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그래서 같이 사회 바깥에서 경계 위의 삶을 살았던 애인 맥스가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던 순간 추락해 죽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꿈이 한 번 좌절된 곳이고 아버지의 질서를 넘어서려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한 번 꺾인 곳이다. 그렇게 호텔 쿨리오 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아버지 질서의 중심이다. 그런 곳답게 거기서는 오로지 내려다보기만 한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주인 기표가 그렇듯이 '까마귀 둥지'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잭 카치 역시 거기에 고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캐시 블랙이 다시 그 쿨리오를 턴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건 아버지 질서 자체와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쪽에서는 가장 중대한 위반이지만 캐시 블랙에게 있어서는 그로 부터 가장 머나 먼 벗어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녀는 레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보이드 문'이 일어나는 그 때 있지말아야 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구원이 오로지 '보이드 문'에서만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선언 같은 장면 연출이다.

 

 여기까지도 길게 썼다. 하지만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실 리뷰에 이런 설명까지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김에 이쯤에서 결말을 맺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자꾸 들지만 그럴 수 없다. 소설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 그걸 생략한다면 왠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아, '보이드 문'은 정말 훌륭한 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정도로 치밀한 작가였나 왠지 혀를 내두르고 있다. 아무튼 그걸 설명해야 한다. 남은 힘을 다시금 짜내보자.

 

   자, 앞에서 '보이드 문'은 타협의 여지가 없음 을 뜻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기엔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왜 없는가? 지금은 타협과 관용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게 얼마든지 대화와 타협 그리고 관용이 가능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마이클 코넬리의 대답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연히 'NO'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이클 코넬리가 높은 혜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해리 보슈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어쩌면 코넬리 자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왠지 그렇게 짐작된다.

 

   그래, 그런 세계가 있다. 타협과 관용이 가능한 세계. 물흐르듯이 얼마든지 어울려 살 수 있는 세계가.

 

   요 네스뵈는 그러한 세계를 '조용한 사회'라고 불렀다. 물론 비아냥이지만.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러한 세계를 '무조음의 세계(MONDE ATONE)' 이라 불렀다. 무조음이란 음악용어로 으뜸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조음의 세계란 뚜렷한 중심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온갖 다수성으로 넘치는 세계. 그 모든 다수성들이 서로 타협과 관용으로 대등하게 어울리고 있는 세계. 그것이 '무조음의 세계'이다. 굉장히 좋게 보이는 세계다. 하지만 요 네스뵈의 말이 비아냥이었듯이 이 바디우의 말 또한 비아냥이다. 진실로 그리되면 좋겠지만 지금의 세계가 무조음인 건 어디까지나 외양에 불과하다는 비난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정말 그러하다. 많이도 분화되고 복잡하게 갈라져서 뭔가 뚜렷한 중심이 없다. 거대 이념들은 애시당초 사라졌고 이제는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똑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다. 한 끼 밥을 못 먹어 굶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산업개발이 한창이던 때를 못 벗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TV에서는 동성애자를 비롯 진보된 성담론들이 당당히 나오고 있다. 그렇게 어디는 정말 말도 안되게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또 어디는 정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앞서고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것들이 마구 뒤섞인 시대다. 그 잡탕찌개와도 같은 상황 앞에서 아무 것도 정의내릴 수 없는 시대, 그래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이건 환영에 불과하다. 정말은 여전히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갈등을 가리기 위하여 사회가 쓰고 있는 은폐 전략인 것이다. 그건 우리들이 바라보는 무조음이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분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은밀하게 선별과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판결이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 세계의 무조음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화하고 있는 조음성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사람들이 거짓 타협과 그로 인한 위안에 만족하고 살 수 있게끔 환영의 무조음을 조율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마치 마술사가 본래 의도를 감추기 위해 다른 손의 현란한 손동작으로 상대방의 시선을 교란시키듯이...

 

 궁극적으로 아버지란 마술사이다. 그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가 만들어낸 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협은 불가능하다. '보이드 문'이야 말로 구원을 위한 절대 공간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이클 코넬리는 마술과 환영을 소설에 가져온 것이다. 아버지 질서를 대변하는 잭 카치의 아버지는 마술사이다. 잭 카치 역시 소소한 마술을 부린다. 그것도 주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단적으로 마술에 의해 지탱되므로 타협이 불가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소설 곳곳에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것이 환영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초반 캐시 블랙이 타고 다니는 차 벅스터는 어떠한가? 왜 그 차에다 마이클 코넬리는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설정을 한 것일까? 거기서 캐시 블랙이 타고다니는 벅스터는 사실 그녀의 차도 아니고 '새 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할부금 미납으로 회수된 차' 라고 굳이 밝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캐시 블랙 자체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고 살고 있지 않나?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첫머리부터 그녀는 남에게 본명을 속이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군다. 마이클 코넬리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인가? 더구나 잭 카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까마귀 둥지를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한다.

 

  잭 카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까마귀 둥지'였다. 카치는 빈센트 그리말디가 지금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말디가 둥지 위에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노가 문을 연 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둥지 위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반드시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말디가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카치는 그 모든 게 이미지 관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묘한 속임수. 보안에 대한 착각이 보안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P. 166)

 

  소설의 이야기와는 크게 상관없는 그래서 안해도 그만일 말을 이렇게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위장과 착각은 곳곳에 있다. 모두가 남을 속인다. 그리고 모두들 속는다. 남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기도 하지만 어떤 땐 자신이 만든 환영에 스스로 속기도 한다. 소설에서 뭐든 다 알아내는 잭 카치마저도 커다란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드러난다. '보이드 문'은 연속된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파노라마다. 진실을 알기란 어렵고 반드시 배신이 뒤따라 붙는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았던 무조음의 평온한 세계가 알고보니 그 밑에 도사린 협잡과 배신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막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질서 자체가 인위적 마술과 같은 환영으로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을 알 수도 없으며 배신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어떻게 관용을 베풀고 타협을 하겠는가? 소설 속에 그 자신이 이리도 잘 형상화한 것처럼 마이클 코넬리는 아버지 질서의 이러한 기만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보이드 문'이야 말로 유일한 구원의 장소임을 캐시 블랙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 빈 허공이 아닌 다른 모든 공간은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이 같은 주제는 사실 소설 처음에 다 드러난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서 마이클 코넬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 것이나 같다. 소설의 처음에 캐시 블랙은 한 집을 방문한다. 그 집은 팔려고 내어놓은 집으로 텅 비어있다. 일상의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는 그 집은 그야말로 아버지 질서가 만들어 놓은 무조음의 세계다. 하지만 텅 비어있다. 실체가 없는 환영의 집인 것이다. 거기에 캐시 블랙은 위장된 차를 타고 위장된 존재로서 위장된 대화를 이어간다. 그게 아버지 질서에 속해 살던 캐시 블랙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처럼 포섭되어 있는 우리 모두의 진실이기도 하다.

 

  집을 나오며 그녀는 이제 '그 수평선을 향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캐시는 그렇게 마냥 달렸다'로 끝난다. 그게 마이클 코넬리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그는 우리 역시도 얼른 그녀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얼른 우리 자신을 위한 '보이드 문'을 만들어 놓을 것. 이게 소설의 진언이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 눈을 홀리는 환영의 영사막을 찢고 홀연히 캐시 블랙의 유령이 들어설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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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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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고독이다.

 

 

  특별히 감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리움을 느낀 것도 아니다. 만나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맞이하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건 오랫동안 질리도록 반복했다. 아무 데나 좋아, 모임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눈의 아이' p. 9)

 

 '눈의 아이'의 화자, 마에다 유카리는 너무도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는 미야베 미유키가 다음과 같은 탁월한 묘사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읽으면서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고 생각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방은 추웠다. 벽시계에 달린 온도계는 섭씨 사 도를 가리킨다. 잔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더니 자동응답기 램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고 보일러도 틀지 않은 채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의 금요일이다. (p. 10)

 

 그렇게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마에다 유카리는 몸을 녹이기도 전에 자동재생기 부터 재생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으면 그토록 서둘러 확인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은 마지막 문장인 한겨울의 금요일에 이르면 더욱 강해져 버린다. 그녀가 추위에 떨면서 잔업까지 마치고 온 날은 남들에게는 '불타는 금요일'이었고 그런 때 조차 그녀는 언 몸을 녹이기 보다 언 마음을 먼저 녹여야 할 정도로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움에 깊이 빠져있는가를 미야베 미유키는 이렇게 몇 개의 문장만으로 별다른 설명없이 절절히 느끼게 한다. 읽으면서 '이러니까 미야베 미유키인거야...'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히 일어나는 궁금증. 그녀, 마에다 유키는 왜 그렇게 고독하게 된 걸까?

 시작은 초등학교 동창생의 간만에 만나자는 연락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매일 사이좋게 어울려 놀았던 친구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먹서먹해져 그 후로 20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란 바로 같이 놀던 여자친구 하나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로 부터의 호출이었다. 눈이 오는 날에 살해되어 눈의 아이가 되어 영원히 열 두살로 남아있는 '유키'를 다시금 기억하기 위한...

 

 이번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들어간 단편집니다. 거기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눈의 아이'는 이 단편집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어째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 같은 걸 말해주는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무관심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유키가 죽었을 때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가 그녀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바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해, 모두 유키코의 가족이 사라지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런 안도감을 표현했다.

 

 - 장보러 가다가 유키코 엄마와 마주치면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 줘야 좋을지 몰라서 괴로웠어. 오죽하면 길모퉁이로 피해다녔다니까. 이제 그런 데까지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p. 12)

 

 유키코를 죽인 범인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 대한 불안 보다도 딸을 잃어버린 이웃의 비탄에 젖은 얼굴을 더 가까이서 봐야한다는 사실이 더 꺼림칙하다. 제삼자의 본심이란 그런 것임을 엄마로 부터 배웠다. (p. 13)

 

 어쩐지 이 말에서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했던 말, 그러니까 '타인의 얼굴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가 생각난다. 우리가 비탄에 젖은 얼굴들을 피하게 되는 건 바로 그 책임을 은연중에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하고 그것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 '눈의 아이'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다섯 편의 작품에 걸쳐 누누이 말하고자 하는 건 지금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개인의 모습은 다음 편인 '장난감'에서 보다 사회적 차원의 모습이 되어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은 더욱 직설적이 된다. 그 작품의 주인공 친척 할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아내의 죽음으로 오래도록 경영해 온 완구점을 팔아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가게를 그대로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 이웃이었던 같은 상가 사람들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가게를 팔게하려고 자식들을 부추기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흘린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하면,

 

 "문제는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평생 처마를 잇대고 살아온 분들이라 누구 한 사람 멋대로 가게를 닫고 '그럼 잘들 있게' 하고 떠나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동네에 돌아올 생각도 없는 자식들에게 완구점이 상속돼 땅이 팔리면 다른 가게 주인들도 이때다 싶어 상가를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이건가요? (P. 48)

 

 이런 이유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이러한 상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 동기가 '눈의 아이'에서 유키를 살해했던 이의 살인 동기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에 그 개인적 모습이 집단으로 확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 챙기고 보는 모습을 미야베 미유키는 두 편에 걸쳐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판을 미유키가 보다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서 하는 것처럼 이는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이기도 하다. 띠지에 나와있는 말에 의하면 이 단편집은 일본에서도 느닷없이 나왔다고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표작가로 늘 동시대의 일본이 가진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이 역시 그녀가 보고 느낀 일본 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느닷없이' 나왔다는 점에서 거기에 대한 발언이 그녀에게 절실했었음을 아울러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절실함은 단편집이 나아갈수록 그녀가 지금 일본 사회에 바라는 모습, 그러니까 대안이 더욱 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것에서 더욱 확증된다.

 

  그녀가 느끼는 문제점은 이미 앞의 두 편에서 나왔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유키와 그 할아버지처럼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그 이유를 환기시키는 자들이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유령이 되어 다시 돌아와 존재 자체로서 이기심과 무관심을 비난하는 일을 맡는다. 그 역할을 모두 '저편의 존재'가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011년 일본에서 가장 많은 '저편의 존재'를 만들고 말았던 3월 11일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이 정말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추리가 어느정도 가능하다. 바로 소설 속 유카리의 엄마나 상가사람들처럼 빠르게 3월 11일의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가고 있는 당시 일본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단편집 '눈의 아이'는 2011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미증유의 비극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때는 일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3. 11에 관한 것을 보기가 어려워져 있었다. 반응의 추이만 놓고보자면 일본 사회는 정말로 빠르게 그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갔던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발언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일본의 상황이다. 그녀는 그 무관심이 분명 의도적이라 보았고 그렇게 되는 이유를 하나는 책임을 짊어짐의 거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한 이기심이라 보고 바로 두 편의 작품에다 그것을 우려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 작품집을 내어놓은 것은 '돌이켜 봄'이다.

  그건 그 비극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이며 그 과거가 바로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에 궁극엔 그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떠맡음이다. 정확히 뒤이은 세 편의 단편들은 거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요코'는 '기억'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며 '돌베개' 그리고 마지막 '성흔'은 결국 사회의 궁극적인 치유는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해 뭔가 책임을 나누어 짊어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특히 '성흔'에 이르러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내어놓는 대안이 왠지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했다.

 

 넓게 보자면 우리는 이재민입니다. 그러나 집을 잃은 도호쿠의 이재민이 보기에 우리는 이재민이 아니겠죠. 말하자면 '후방 지원'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도호쿠의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그녀들 그들의 경험을 'THE ONLY ONE' 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이 'ONE OF THEM' 으로써 많은 참화 가운데 하나이며 여러 사람이 안고 있는 쓰라림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냉정한 시선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 이재민의 'THE-ONLY-ONE-NESS'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성흔'은 정확히 'ONE OF THEM' 의 작업에 속한다. 그러고보면 첫 단편 마에다 유카리의 경우는 완전히 'THE ONLY ONE' 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고독만을 생각했고 그렇게 늘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픔만 생각해왔던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ONE OF THEM'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완구점'에서 할아버지의 유령을 바라보는 것이나 '지요코'에서의 기억은 모두 'ONE OF THEM'하는 것을 뜻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러한 'ONE OF THEM'을 뒤이은 '돌베게'에서는 리포트 쓰는 것으로 마지막 '성흔'에서는 직접 대화와 참여로 더욱 확장해 나간다. 결국 이 단편집 전체는 'THE ONLY ONE'에서 'ONE OF THEM'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마지막 '성흔'에서 다시금 처음 '눈의 아이'에 나왔던 눈을 삽입함으로써 이 여정을 완결시킨다.

 

 정말 미야베 미유키가 뛰어난 것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눈을 다루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아이'에서 눈은 지극히 주관적 심상의 대상이다. 화자인 마에다 유카리를 비롯하여 거기에 등장하는 유키를 추억하는 모두는 오로지 눈을 유키와 관련해서만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극히  'THE ONLY ONE'적 입장으로 눈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더욱 강조된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만이 어두운 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빛을 내며 팔랑팔랑 내렸다.(P. 28) 

 

  그런데 마지막 '성흔'에서 첫머리 부터 등장하는 눈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전혀 다르다. 눈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눈의 아이'에서 나왔던 눈을 둘러싼 대화의 반복이라는 것은 그 때 눈에 대해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네 명이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증명된다.(알고보면 미야베 미유키는 정말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가벼움 속의 진중함이란 이 단편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반복된 대화에서 사람들은 눈에 대해 이제 이렇게 말한다.

 

쉰 살이 족히 되었을 관리인은 삼월에 도쿄에서 내리는 눈은 의외로 폭설이 되곤 하는 법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 청년은 대걸레를 한 손에 쥐고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에 대해 자기만의 이론을 한 자락 늘어놓았다. 수예 교실의 노부인은 추워서 목에 감은 내 머플러를 칭찬해 주었다. 부인의 애용품인 지팡이의 미끄럼 방지 고무캡에는 얼어붙은 눈이 덩어리져 달라붙어 있었다. (P. 127)

 

 여기서 눈은 첫 머리부터 더 이상 'THE ONLY ONE' 이 아니다.

 어미 '-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때만 되면 반복 가능한 'ONE OF THEM' 인 것이다. 더우기 그것은 청년의 말에 이르러 더이상 '눈의 아이' 때처럼 주관적 심상이 투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한낱 이론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마지막 노부인에 이르면 유일한 생명의 빛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있어 그 누구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덩어리째 얼어붙은 눈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ONE OF THEM' 이 지극히 확장된 것과도 같이...

 그러므로 '성흔'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로 인해 더욱 명확해진다. 보다 진정한 타인의 책임을 떠맡기 위한 'ONE OF THEM' 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그것인 것이다. 때문에 '성흔'은 희생자에게 가장 깊숙이 개입한다. 다섯 편 중 오로지 '성흔'만이 희생자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대안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 역시도.

 

 '눈의 아이'는 외관에 속기 쉽다. 그러니까 두께가 얇아서 가벼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소설인 것이다. 개인적으론 앞에서 주욱 써 온 바대로 지금 일본 현실에 대한 비판과 거기에 걸맞게 대안 역시도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 중 하나로 선뜻 꼽고 싶다. 녹록치 않은 깊이를 얼마 되지도 않는 부피의 이야기로 우려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미야베 미유키의 내공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과연, 미야베 미유키!'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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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27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의 아이, 라는 제목은 예쁜 느낌도 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군요
눈에 대해 그렇게 쓴 것을 알아챈 헤르메스 님도 대단하십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쓸 때는 그 말을 쓰지 않고 나타내는 게 좋다고 하던데, 그런 것도 잘 나타나 있군요, 본래 잘 쓰는 분이지만...
그런 것을 잘 봐야겠습니다, 저는 그냥 넘어갈 때가 많은 듯해요

사실 어떤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쉽게 잊기도 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는 그만 잊고 살아가라고 하죠 잊을 수 없는 일인데...


희선

ICE-9 2013-04-27 23:17   좋아요 0 | URL
아뇨, 저는 그저 강백호가 하듯이 살짝 거든 것일 뿐, 그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미유키가 대단한 겁니다^ ^
아픔을 지켜보는 자는 그들의 아픔을 유일한 아픔으로 존중해주어야 하고 아픔을 겪는자는 스스로 그것을 자기 혼자만 겪는 유일한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세는 정말 배워볼만 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아픔은 얼마든지 객관화하면서도 스스로의 아픔은 오로지 주관화만 시키고 있지요. 제대로 된 객관화와 주관화가 정말 필요할 것 같아요. 이번의 '눈의 아이'를 통해 다시금 이것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
 
[밀수꾼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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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밀수꾼들' 을 쓴 발따사르 뽀르셀 은 스페인 작가로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이미 16편의 장편소설을 쓴 그에게 이 '밀수꾼들'은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사실은 1968년에 세상으로 나왔다. 책 뒷 표지에 실린 소개글을 빌려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 보자면, '한 무리의 밀수꾼 사내들이 '보따폭호'라는 배에 밀수품을 가득 싣고' 지중해를 건너가는 이야기다. 그 일련의 여정을 담은 것으로 이야기 자체는 좀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엔 흔히 있으리라 기대되는 주인공 같은 것이 없다. 배에 있는 모두가 다 이 소설에서 아예 비중까지도 동등한 주연들이다. 이러한 일종의 주인공의 '민주화(?)' 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당신이 이 소설이 가진 이야기적 단순함에 좀 실망했다면 이 소설이 가지는 구성상의 특이성은 당신의 흥미를 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소설 자체는 항해 이야기의 원본격이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배가 다다른 하나의 공간들로 이야기가 분할되어 있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를 얼른 상상하기 어렵다면 어릴 때 본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연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소설은 그 '은하철도 999'와 정확히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은하철도 999'와 닮은 꼴은 그것 뿐이다. 거기엔 철이와 메텔이라는 뚜렷하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지만 '밀수꾼들'에게는 그런 주인공들이 없기 때문이다. 여정이 다다른 곳마다 분할되는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 역시도 돌림노래를 하듯 돌아가면서 맡는다. 하나의 주인공이 오로지 하나의 장소에만 군림하는 것이다. 발따사르 뽀르셀은 그런 구성을 취하면서 그 배에 올라탄 모두가 어떻게 밀수꾼이 되어 '보따폭호'에 올라타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러준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장소로 분할된 이야기들은 그 분할된 이야기 토막마저 현재와 과거로 분할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마치 '인수분해' 와도 같은 소설이다. 절대 나눠지지 않는 소수 같은 것을 찾아 끊임없이 나누고 나누는 소설. 그것이 바로 '밀수꾼들'이다.

 

  앞서 오디세우스를 슬쩍 인용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그걸 살짝 비튼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오디세우스도 지브롤터 해협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누비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건 이 소설의 여정과 그대로 닮아있다. 더구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늘 바다의 어떤 지점이나 하나의 섬을 중심에 놓고 진행되는데 '밀수꾼들'은 그 역시도 닮아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오디세우스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오디세우스가 이 소설에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부하의 의견 따위는 가볍게 묵살한 채, 자기 계획만 관철시키는 여지없이 몰인정하고 독선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그 원본이 되는 오디세우스에게 늘 따라다니는 비난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랄까, 이 소설을 '영웅없는 오디세우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여정의 중심이 되는 배를 밀수꾼들의 배로 설정한 것도 오디세우스를 슬쩍 비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발따싸르 뽀르셀이 왜 이렇게 구성을 취했는가도 이해는 간다.

 

  오디세우스는 지금 우리들에게 소설의 원형과 같은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설의 아르케. 그것이 오디세우스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모습은 모두 그로부터 발원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하나의 주인공이 세계를 쑥 빨아 삼키는 것과 같은 구성도 알고보면 오디세우스로 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뽀르셀은 어쩌면 지금 헤게모니를 거머 쥔 그러한 이야기적 구성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뭐, 근거는 빈약한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이 소설이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외양을 취하면서도 어떤 식의 뚜렷한 변별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왠지 그 상상이 그렇게 근거가 빈약한 것만은 아님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상상은 더욱 신빙성을 띄게 된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이념적 헤게모니를 차지해 가고 있던 사회주의와 그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보수주의가 정면으로 맞붙은 첫 이념의 대결이었다. 물론 나쁜 것은 보수주의였다. 당시 민중들이 지배층만의 이익 추구와 수구에 진절머리가 나서 합법적 선거로써 '사회주의' 정권에다 주권을 양위해 주었는데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지배층들이 프랑코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발발하게 된 것이 스페인 내전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이 지루하다고 생각된다면 동시대를 다룬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있다.)

 

  내전의 악인은 너무나 분명했고 민간인들의 학살마저 잇달아 일어났으나 바깥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헤밍웨이 같은 지식인들을 비롯한 민간인 개개인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시 공격받고 있던 '인민전선'을 위해 나서게 되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된 이념 안에서 범 민중들의 연대가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의 구성은 그같은 역사적 경험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 '밀수꾼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따라가보면 거기엔 반드시 '스페인 내전'이 있음을 보게 된다. 모두가 각자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참여했고 결국 그게 시발점에 되어 지금의 배에 이르게 되었음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소설과 스페인 내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된다. 이 소설이 나왔던 68년은 여전히 프랑코 정권이 득세를 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유럽은 '68혁명'이라는 새로운 자유의 물결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었지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마지막 파시스트 정권이라는 세간의 평가답게 그 물결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밀수꾼들'은 사실 그와 같은 스페인의 상황을 은유한 소설이다.

  왜 소설이 굳이 '밀수꾼의 배'를 가져왔는가? 그 때의 스페인이 밀수하는 자들의 마음과 똑같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내내 경찰의 수색과 추적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을 나타낸다. 점점 넓어지는 경찰 수색을 피해 아예 '죽은자들의 섬'으로 달아나 숨기도 한다. 뽀르셀은 그 시기 스페인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에 올라탄 모든 등장인물들은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극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마음의 현재와 과거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 '밀수꾼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은 내게 하나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바로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이란 그림이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 제리코는 뗏목에 올라탄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구조를 위한 수건을 흔들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실의에 빠져 낙담만 하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보내는 자가 있는 반면 더없이 무덤덤한 자들도 있다. 그렇게 상황은 하나지만 그 반응은 이토록 다양하며 또한 개별적이다. '밀수꾼들'이 취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이와 같다. 그런데 좀 더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더욱 닮은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소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혹시 뽀르셀이 정말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쓴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1816년,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보트에 메달린 뗏목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해서 모두 400명의 승선 인원 중 146명이 살아남았다. 그 뗏목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끌고 있던 보트에는 메두사호의 선장이 타고 있었는데 뗏목이 보트가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자 선장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뗏목은 오래도록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엔 살기 위해 인육을 먹게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형법을 공부하다보면 '긴급피난'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그 중요한 사례로서 지금도 형법학 교과서에 꼭 인용되는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선장 말인데, 여기 '밀수꾼들'에서도 똑같은 선장이 나온다. 동료 하나가 다쳐서 얼른 육지로 보내 치료를 해야 할 형편이지만 그 선장은 어디까지나 밀수를 성공시켜 자신의 이익을 취할 생각에 그렇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메두사호의 선장과 똑같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이 있어 제리코의 그림이 이 소설에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 선원들의 반응 역시 제각각이다. 어떤 이들은 선장이 말이 옳다면서 따르지만 또 어떤 이들은 선장의 행위가 몰인정하다면서 반박한다. 거기에 가장 많이 반박하는 이가 2등 기관사 쁘루덴시이다. 그는 배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에 대한 선장의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항해 도중 그의 고향 섬에 다다르게 되니 거기서 육지로 보내주자고 요구한다. 이 소설이 당시의 스페인을 담아내고 있으므로 그 환자란 아무래도 당시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박해와 탄압을 받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선장과 쁘루덴시는 그 사람들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무시해 버리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익 따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그렇게 이 소설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만큼이나 인간 군상에 대한 파노라마이다.

 그런 식으로 그 아픔 앞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나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소설이다.

 

 더하여 오디세우스와 연결해 보면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이 그저 순수하지만은 않고 어떤 특정의 정치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뽀르셀이 이 소설에서 오디세우스 이래로 이어져 온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을 탈피하는 것은 그 소설적 장치들이 세계가 하나를 중심으로 위계적으로 재편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프랑코 독재 정권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므로 의도적으로 그것을 허물고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도록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소설적 저항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러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사유의 지점들을 던져주므로 좋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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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저께 예스24의 퀴즈를 풀다가, 어떤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지문에 인육을 먹는다가 답이었는데, 제가 틀려서, 이게 무슨 책이고 무슨 문제지 했었는데, (책을 읽느라고 읽는데 맞힌 수준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ㅋㅋ) 어쩌면 리뷰에 쓰신 저 배의 일이었는지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배 얘기도 있고, 파이 이야기에도 있도, 뭐 여럿 있긴 하지만요. 이 책은 정말..평이 여럿이네요. 헤르메스님은 별 다섯인데.. 스페인 내전이나 스페인 역사를 알고있다면 좀 더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오락가락해요!

ICE-9 2013-04-27 23:22   좋아요 0 | URL
앗 아이리시스님 언제 또 이렇게 다녀가셨나요? 얼른 환영의 인사를 해드려야 하는데 늘 이렇게 늦네요^ ^; 큭큭, 저도 그거 풀어봤어요. 예선 점수가 정말 잘 나와서 어, 이러다 천만원 상금도 턱하니 타는 거 아냐 했는데... 본선 문제는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서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못 풀겠던데요^ ^;
전 솔직히 별점이 후한 편입니다. 후해도 너무 후한 편이에요. 처음 알라딘 서재할 때는 이렇게 많이 노출될지 몰라서 그냥 무조건 다섯개주고 했는데 그게 지금은 타성이 된 탓인지 조금만 만족해도 그냥 다 줘 버리곤 합니다. 그러니 제 별은 너무 믿지 마세요. 앞으로는 별을 줄 때 좀 신중해져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보단 다른 분들을 믿으세요.^ ^

희선 2013-04-27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서는 한두 사람이 돋보이지만,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않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안에서 빛나보이고 싶어하지만...
그런데 책을 볼 때는 한두 사람만 따라다니며 보는 게 편하기도 해요^^

스페인 내전을 알고 있다면 소설을 좀더 잘 볼 수도 있겠군요
거기에 헤르메스 님은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그림도 알고 계시는군요


희선

ICE-9 2013-04-27 23:25   좋아요 0 | URL
제 말이 그말이에요. 우리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위계 질서를 만들곤 하는 건 어쩌면 소설적 경험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중세만 해도 귀족과 평민 그리고 성직자의 구분이 있을지언정 평민간에는 그렇게 쉽사리 위계를 나누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어쩌다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서로 높고 나눔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것도 이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거기에 어떤 근대의 동학이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 망상도 해 봅니다^ ^
줄리언 반스의 소설 중에 10과 1/2장으로 된 세게사란 소설이 있는데 거기에 이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그 때 제대로 알게 되었죠^ ^
 
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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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마을, 개틀린...

 남북전쟁을 아직도 '주들 사이의 전쟁'이나 '북부의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부를만큼 그 곳은 폐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로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남부의 가치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건 비단 생각만이 아니었다. 마을 자체의 모습도 그러했다.

 

 개틀린은 영화에 나오는 작은 마을들과 달랐다. 혹시 50년쯤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또 몰라도. 우리 마을은 찰스턴에서 너무 멀어서 스타벅스도 맥도널드도 없었다.(...) 도서관에는 여전히 컴퓨터 도서목록 대신 도서카드가 있고, 고등학교에는 여전히 칠판이 있고,(...) 근처 극장인 시네플렉스에 가면새 영화 디브이디가 나올 때쯤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개틀린에 깜짝 놀랄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마을은 촌구석 중에 촌구석이었다. (P. 12) 

 

개틀린은 그러한 곳이었다. 웅덩이처럼 고여있기만 한 마을. 옹고집처럼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온 공간. 그래서 시간마저 내버려두고 비켜나가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 그 곳이 바로 개틀린이었다.  

 

   

 

 이러한 곳에 갇힌 채, 매일 마을을 떠나기만을 바라던 열 여섯 살 소년 이선 웨이트는 매일 밤 한 소녀의 꿈을 꾼다. 언제나 신비로움으로 가득했던 그 소녀는 낯익은 마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낯선 매력이었기에 이선은 꿈 속의 소녀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이선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소녀 자체가 마을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국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 사랑은 또한 마을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이선이 가진 열망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이선에게 여름날 우연히 떨어진 낙뢰처럼 정말로 낯선 이방인 하나가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

 

 

 

 

 이선에게 있어 리나는 마치 자신이 늘 꾸었던 꿈 속의 소녀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과 같았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뒤로, 새로 전학 온 여자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어딘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어쩌면 우리보다,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을 아는 아이일 수도 있었다.(P. 31)

 

 

 이선은 곧 리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런데 리나 역시 그런 이선의 관심이 필요했다. 오래도록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 온 곳은 이방인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것도 상서롭지 못한 '레이븐 우드'라는 성을 가진 이방인이라면, 더구나 주로 타고 다니는 차가 '장의차'라면. 당연히 리나는 학교에서 소외 당한다. 그런 리나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가 바로 이선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개틀린과 레이븐우드 가문을 놓고 보자면 이선과 리나는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선에게 있어 마주해야 할 난관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따돌림과 괴롭힘 정도는 사소한 장난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리나에겐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밀이 있었고 거기다 가혹한 운명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 시련 앞에서 이선과 리나는 자신들의 사랑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두 여류 작가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공동으로 쓴 판타지 소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삶에 있어서 우리 역시도 언젠가는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변화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해 온 개틀린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감으로 넘쳐나는 여주인공 리나가 이루는 뚜렷한 대비는 이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정말로 이 소설의 중심엔 하나의 '전선(FRONT LINE)'이 있는 셈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한 번 결정된 것은 영원히 고수하는 그렇게 운명에 종속된 존재들과 그러기 보다는 오히려 변화에 자신을 열어 한껏 받아들이는 그렇게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존재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전선이 말이다. 거기서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 사이에서 꾸준히 서로를 지켜나가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운명을 비어 있는 페이지라 생각하고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임을 설득력있게 밝히고 있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그 주제를 주로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임이 바로 타인을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은 타인에게 우리 마음을 여는 것과 같다고 그녀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현재 미국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즉, 2000년에 일어난 9. 11 사태 이후로 미국에서 압도적으로 높아져 버린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 개틀린의 모습은 현재 미국의 반영과도 같다. 특히 그건 그 개틀린을 마음껏 주무르고 다니는 링컨 부인을 중심으로 한 DAR(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미국 독립 전쟁 참가자 자손들의 부인 애국 단체를 말함.)에서 드러난다. 그 DAR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배척과 적대가 높아져가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빗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이선과 리나를 둘러싼 개틀린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대로 작가인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마주한 미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녀들은 거기서 현실의 미국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첫 머리에 나온 남북전쟁에 대한 개틀린의 인식과 일부러 DAR 단체를 소설 속으로 가져온 곳은 바로 그것을 명확히 밝히기 위함이다.

 즉 현재의 미국은 흑인을 노예로만 취급했던 남북 전쟁 전의 남부와 별 반 다르지 않다고.

 

 그 남부가 타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고수하다 파국을 맞았듯이, 현재의 미국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다간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타인에게 보다 자신을 열고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바로 이러한 그녀들의 진심이 담긴 소설인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비록 판타지의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보다 깊숙한 곳에서는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잘못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타자와 변화에 대해 한껏 자신을 열고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이야 말로 다름아닌 미국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이 소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있다. 그것은 주체적이 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절대 남의 손에 결정이나 판단을 맡겨두지 말 것을 요청한다. 자신에게 놓여진 운명을 앞에두고 리나의 태도가 변했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 리나처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할 것을 소설은 권한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이러한 제안 역시도 현실 미국의 모습과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9. 11 이후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공 때  했던 것들 때문이다. 그 때 부시는 이라크에게 대량의 살상 화학 무기가 있다는 것으로 침공을 정당화했었다. 미국의 모든 언론들은 부시의 이러한 말을 받아썼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 말에 휘둘러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진실은 전혀 달랐다. 이라크에 있다고 했던 살상 화학 무기는 없다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대중들은 그저 전쟁을 목적으로한 선동에 휘둘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제 머리로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막대하게 희생된 이라크 민간인들과 아직도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많은 참전 군인들의 영혼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그대로 나타내려는 듯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리나와 대적하는 주요한 흑의 주술사 리들리와 세라핀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자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에서는 그 능력을 일컬어 '세이렌'이라고 부르는데 이 능력은 있지도 않은 허위의 사실들을 가지고 대중들의 생각과 판단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부시 정부와 언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은유한 것과도 같다. 리나는 바로 이런 존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난 저 여자나 저 애한테 관심이 없어. 그냥 일반인들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일반인들이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 얼마나 앙심을 잘 품는지. (P.566)

 

 

 그러므로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더욱 뚜렷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주체적이 되는 것이야 말로 타자와 변화에 한껏 자신을 열어놓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자와 변화에 선뜻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것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바깥으로 부터 주입된 선입관 때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미처 직접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면서 타자들에 대한 생각과 판단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이라면 아랍인들이 그럴 것이고 우리들이라면 지역주의에 의해 왜곡되었거나 못사는 나라들에 대한 우월감에 삐뚤어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럴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겐 막상 직접 만나 대하고 보면 어떤 순간 그동안의 생각들이 그저 근거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런 편견을 가졌던 자신을 반성하고 그런 것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더 많은 좋은 시간을 그 타자와 더불어 가질 수 잇었을텐데 많이 아쉬워하게 된다. 내가 주체적이 되지 못했음에 놓쳐버렸던 타자들이나 희생해버렸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주체적이 되라는 요청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주체적이 된다는 것과 타자와 변화에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이선과 리나의 여정에 그 둘을 긴밀하게 엮어놓은 것이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다. 지금 유럽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우익이나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배척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를 나누고 있는 그 많은 경계선들은 알고보면 있지도 않은 것에 기초한 환영이거나 전혀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귀를 홀리려 드는 수많은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목소리로 부터 우리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왜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두어야 하나? '뷰티풀 크리처스'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할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마음으로도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건 마치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와도 같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사람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유일한 소리라고 말했던 '다이모니온'인지도 모른다. '다이모니온', 그것은 자기 내면, 그러니까 정확히는 바로 양심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뜻한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의 대화는  그대로 '다이모니온'과 같았다. 그리고 그 귀기울임은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스스로를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분명한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온갖 세이렌과 세라핀의 유혹으로 부터 온전한 당신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라고...

 타인을 제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 소설은 현재 영화로 제작되어 포스터에 나온 바와 같이 4월 18일 날 개봉된다고 한다.

 인용한 스틸 사진은 모두 이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저작권 또한 영화사와 배급사에 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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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제목도 낯익고 지은이도 낯익다.

 

  '최고의 공부'라는 제목은 얼마전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의 마지막 화 소제목이었다. 그 제목으로 지금 세계 최고의 명문대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던 게 기억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공부 방법과 비교해 주어서 더욱 인상 깊었는데 옥스포드를 비롯한 서양의 명문대들은 주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상호 토론하는 것을 주요한 공부 방법으로 삼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로지 홀로 공부했다. 그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로 듣고 말을 했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일방적으로 듣고 책을 읽거나 필기하는 것 뿐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행한 실험은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이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과제를 놓고 서양의 학생들은 주로 말을 하면서 해야 제대로 해냈고 동양의 학생들은 말없이 생각만 해야 제대로 잘 해냈다.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주고 수학 전문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실험에서는 서양 학생의 경우 아무 부담없이 얼마든지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했더라도 전혀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았는데 반면 동양의 학생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쳥한 경우에는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다. 이렇게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은 분명히 차이가 났다. 실험을 주도한 교수는 동양의 경우 말로 하기 보다는 묵상을 통해 정답에 이르는 것에 길들여져 있고 타인의 도움을 잘 구하지 않는 것도 서양보다 더욱 타인의 평판을 신경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자신의 체면이 깍이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대학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늘 해오던 것을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진정한 공부의 의미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이후로 우리가 내내 어른들로 부터 공부에 대해 들었던 말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저 '기계'가 되라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물어야 할 때에 묻지 않고 이렇게 어른이 다 되어서야 새삼 공부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교육의 비극이 아닐까 한다. 낯익은 제목 때문에 잡게 된 켄 베인의 '최고의 공부'는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저자의 이름이 낯익은 것은 역시 방송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전 EBS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을 것이다. EBS가 그때 켄 베인 교수를 특별히 섭외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주제에 대해 켄 베인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What the Best College Teachers Do' 란 책이다. 제목 그대로 최고의 강의로 유명한 명문대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나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책이다. 이번에 나온 '최고의 공부'는 원제가 'What the Best College Students Do' 로 그 책의 자매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가장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여주는 명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공부 방법을 실제로 디테일하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은 그러한 각론이라기 보다는 총론에 가까운 책이다. 그러니까 실제 방법 보다는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켄 베인은 왜 거기에 더 중점을 두었는가? 그것은 공부야 말로 동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켄 베인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예전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했던 연구를 소개한다. 그 대학교 학생들의 공부 방법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모두 세 가지 패턴의 공부 방법이 나왔다고 한다. 하나는 책이든 무엇이든 주어진 것만 습득하고 보는 '피상적 유형'  다른 하나는 좋은 성적이든 아니면 출세든 어떤 목표를 미리 세워두고 거기에 맞춰 공부를 하는 '전략적 유형' 마지막으로 별다른 목표 없이 그저 자신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알아서 공부를 하는 '심층적 유형' 이렇게다. 각 유형별 학업 성취도를 살펴보니 마지막 '심층적 유형'이 앞의 두 유형 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즉 공부에 있어서는 그 동기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동기가 되었을 때 더욱 많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켄 베인은 내가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며 공부는 또한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바로 세계의 리더들은 어떻게 공부했는지 보여준다. 과연 그들은 모두 내적 동기에 따라 공부한 자들이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최고의 학습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내적 동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메타 인지(metacognitive)'다. 이 '메타인지' 또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인데 그건 쉽게 말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리더들은 모두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래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현상태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유동하는 정신으로 자신을 더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구에 따르면 보상 같은 게 주어지는 외적 동기 보다 순수한 자기 만족을 위한 내적 동기가 더욱 공부를 오래 지속시키고 성취도 또한 더욱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공부에 있어 그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켄 베인은 그 동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이런 스타일로 책을 썼던 것이다.

 

 읽어보면 여지껏 내가 행했던 공부 방법과는 너무나 달라 왠지 많은 아쉬움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진작에 이렇게 말해주는 책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더욱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 같은 성인들 보다는 한창 공부 중인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늘 하고 있는 공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서 더 이상 지겨운 것이 아닌 보다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부를 지겨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켄 베인은 특히 이걸 '기대 실패' 라 부르는데 우리의 두려움과는 달리 이러한 '기대 실패'야 말로 더욱 공부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해외에서 오래도록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공부를 잘 했는데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대 실패'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외에 살면서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닌 전혀 낯선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대 실패'를 느꼈기 때문에 더욱 현재 상태에 머무르거나 자만에 빠지지 않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보다 확장된 관심으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실패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공부에 대한 지겨움은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음에 기인한다. 이렇게 공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때문에 더욱 제대로 공부라는 것을 바라보게 해 주는 켄 베인의 이 책, '최고의 공부'를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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