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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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 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고 해도 좋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드디어 나왔다. 워낙에 거센 바람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명세 덕분인지 그래도 조금은 빨리 만나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일단 읽어 본 소감을 말하자면 한 마디로 후덜덜한 걸작이라는 할 수 있다.

 워낙에 요코야마 히데오 자체가 경찰 소설에 능한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이 소설에 나와있는 경찰 조직 내부의 알력 묘사는 거의 야마사키 도요코의 '하얀 거탑에 맞먹는다. 그런데 그 정도의 매력은 이 책이 가진 매력의 1/3 밖에 안된다. 듣기에 요코야마 히데오가 이 책에 공을 들인 게 10년이 넘었고 원래는 3년 전에 출간되어야 했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금 그 3년을 보다 완벽한 소설이 되도록 개정에 힘을 쏟았다고 하는데 과연 빈 말이 아님을 알겠다. 사실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함량은 그만한 공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고 보여지니까 말이다.

 

  이 소설에 대한 상찬은 10포인트 글자로 A4 2장 분량으로 떠들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건 사실 쓸데없는 말에 불과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일단 이 책을 읽기만 해도 얼마든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장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가진 장점을 말하기 보다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왜 '64'를 이렇게 만들었나를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어차피 리뷰란 책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렇게 여러 리뷰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필드에 노출되고 보면 저마다 그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그 견해를 나누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아직 접하지 못해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할 수 밖에 없는 독자들로서는 여러 다양한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온전한 코끼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상대방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해석을 더욱 풍부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렇게 리뷰로 가득한 필드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뭐, 변명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지만 내가 본 '64'를 여기에 풀어 놓으려 한다.

 

  먼저, 가장 먼저 들게 될 의문인 왜 하필이면 '64'인가 이야기 해 보자.

  소설에서 '64'는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날, 쇼와 64년(1989년) 1월 5일

세뱃돈을 받으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점심께 집을 나선 아마미야 쇼코는 근처 친척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두 시간 뒤, 아마미야의 집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P. 65)

 

  이렇게 '64'란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아마미야 쇼코가 유괴된 해를 말한다. 하지만 64의 의미는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납치된 아마미야 쇼코가 주검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 총력을 기울여 수사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때의 범인은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경찰 조직 내부에서는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통칭 '64'로 부른다. 이건 그들의 치욕이며 아픔. 한 마디로 트라우마였다. 이것의 트라우마성은 그 사건으로 완전히 파탄나버린 쇼코 가정의 아버지 아마미야의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아픔과 결부되어 더욱 강화된다. 소설 '64'는 트라우마가 그 배후에서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게 중요하다고 본다. 왜 요코야마 히데오는 하나의 연도를 가리키는 '64'를 하필이면 제목으로 했던 것인가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재 일본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독자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이다. 그것은 물론 2011년에 일어난 쓰나미와 일본 원전 사태 즉 '3. 11' 이다.

 

  3. 11 은 일본 내에서 그 때의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미국에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날을 통칭 9. 11으로 부르듯이 말이다. 3. 11은 그렇게 통칭 되고 있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소설에서 D 현경의 경찰들이 '64'라 통칭해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의 부름에 난 요코야마 히데오가 64 와 3. 11 사이에 연결 고리를 놓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은 3. 11 이전에 완성되었지만 개작 중에 그 일이 일어났으므로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는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일본 전역이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날만큼 떠들어대었으므로 작가로서 아무래도 그냥은 지나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이건 그냥 공상만은 아니다. 소설에 그 흔적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소설의 주인공 미카미가 잃어버린 딸, '아유미'의 존재다.

 

  소설은 사라진 아유미를 찾으러 온 미카미와 그의 아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장소가 하필이면 영안실이다. 수배된 아유미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자살한 소녀가 있어 그 지방의 경찰서장이 미카미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 소녀는 아유미가 아니었지만 이러한 장면 연출은 3. 11을 거친 일본인들이게 강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쓰나미와 원전 사태로 인해 폐허가 된 그 곳에서 희생자들을 찾으로 간 것과 너무도 흡사해 보이니까 말이다. 그 장면을 TV 보도로 숱하게 보았던 일본인들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이러한 장면 연출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연출을 요코야마 히데오이 명백한 의도로 본다. 물론 3. 11 을 연상시키기 위한. 왜냐하면 결국 아유미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이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아유미가 돌아오고 안 돌아오고는 소설의 주된 내용과는 그리 많이 상관은 없기도 하고 사실 이 소설이 3. 11의 영원한 트라우마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끝까지 아유미가 돌아오지 않아서 그녀 역시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것을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밝혀놓는다. 그러니 혹시 스포일러가 되었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미카미는 현재 D 현경 경찰의 홍보담당관이다. 원래는 형사부에 있다가 원하지 않았지만 인사이동을 당했다. 더구나 그는 20년전, 아마미야 쇼코의 사건을 담당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 새롭게 시작되는 트라우마 모두에게 겹쳐있는 상태다. 쉽게 말하면 그는 두 트라우마의 일종의 교집합과 같은 존재다. 그렇게 미카미는 둘의 경계 사이에 끼어 있다.

 

  이러한 미카미의 존재는 소설 '64'가 그렇게 안아버린 3. 11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나가야 하는가를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여기게 한다. 왜냐하면 이 미카미의 신체가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그것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엔 놀랍게도 미카미의 신체를 사이에 두고 짓이기려 드는 대립각을 세운 수 많은 고래들이 있다. 그렇게 여러 대립전선들이 미카미의 신체를 관통하는데 트라우마를 제외한다면 대락 세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일단 소설에서 나타나는 순서대로 말해보자.

 

  먼저 경찰 대 기자의 대립 전선이다. 홍보담당관으로써 경찰을 대표해 기자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미카미는 그야말로 그 사이에 끼인,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이다. 미카미는 미카미대로 비록 그 자신의 천직은 형사라고 생각하기에 홍보라는 일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해 홍보부가 형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바깥 창문이 하나도 없어 소통하지 못하는 경찰조직의 그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창문'이 바로 홍보부라는 생각으로 경찰과 언론이 유기적으로 잘 상생할 수 있도록 진정한 다리가 되어주려 한다. 하지만 경찰과 기자 그 누구도 이런 미카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경찰은 경찰대로 그저 미카미가 위압적으로 굴어서 기자들을 자신들이 뜻대로 할 수 있게 잘 길들여주길 바라고 기자는 기자대로 경찰의 상황따위는 알 바 없다며 자신들의 요구를 안 들어주는 것에만 아우성이다. 경찰과 기자 모두가 맹수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으려 하는 와중에 미카미는 이쪽에는 무능하다고 저쪽에는 권위적이다라고 물어뜯긴다.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그는 과연 개인의 신념을 무사히 지켜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도 그 신념을 테스트 하는 2교시 그리고 3교시의 시험이 남아았다.

 

  2교시의 시험은 경찰 내부 조직 간 알력이다.

  기자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갑작스런 경찰청장의 아마미야 방문으로 미카미가 소속된 경무부와 형사부 간에 별안간 격렬한 대립전선이 생겨버린 것이다. 형사부는 경찰청장의 방문이 경무부가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찰하러 오는 청장이 처음으로 들르는 곳이 바로 형사부의 최대 약점이라 할만한 아마미야 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를 미카미는 나중에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쇼코가 유괴되었을 당시 담당했었던 고다라는 형사가 남긴 메모가 있는데, 그 메모에는 20년 전 형사부가 했었던 수사에 존재했던 치명적인 오점이 적혀있으리라 추정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을 경무부가 쥐고 이번 경찰청장 시찰 건을 주도했다고 형사부가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카미는 늘 입버릇처럼 형사부가 자신의 고향이고 경무부는 잠깐 머물다 가는 곳으로 말할만큼 형사부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기에 이러한 형사부의 미카미에 대한 철저한 함구령을 통한 냉대는 난감하기만 하다. 형사부에서 정보를 주지 않으면 홍보부는 더욱 제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형사부는 형사부대로 경무부 소속인 미카미를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경무부는 경무부대로 당신은 형사부를 더욱 좋아하니까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이렇게 그 어느 쪽에서도 환대 받지 못하는 사이에 끼인 새우의 삶을 그는 또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등에 짊어져야 할 근심의 돌덩어리가 남아있다.

 

  마지막 3교시 시험은 더욱 그 범위가 넓어진다. 시험칠 때 범위가 넓은만큼 힘든 것도 없는데 과연 신은 미카미의 편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미카미는 이 격렬한(그냥 쓰는 형용사가 아니고 정말 문자 그대로 이들의 대립은 격렬하다.) 대립의 와중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형사부와 경무부 대립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 일종의 흑막을 말이다. 그건 바로...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걸 밝히는 것이 이 작품을 읽고 알게 될 즐거움을 뺏는 게 아닐까 싶어서. 아무래도 이 작품이 '하얀 거탑'의 뺨을 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스파링하듯 두들길 정도로 조직 내부의 치열한 암투를 잘 그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미스터리 부분도 꽤나 주가 된다고 보기에 이쯤에서 함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니 좀 두리뭉실하게 말하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결정적으로 여기에 존재하는 대립 전선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대립이다.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정부의, 좋게 말하면 통합이고 그 본질을 나타내자면 장악인, 음모에 맞서 지방 정부가 그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려 하는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미카미는 그 사이에도 끼어있다. 물론 여기서도 어느 한 쪽을 성급하게 손 들어 줄 수 없는 처지이다.

 

  이렇게 보면 미카미가 끼어 있는 이 모든 대립 전선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한 마디로 난처함 달리 말하면 안절부절이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자가 그렇듯이, 경계에 서 있는자는 그럴 수 밖에 없듯이 그는 늘 불안하기만 하다. 그 어느 조직도 그를 환대해주지 않으므로 무려 총경이라는 계급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와도 같이 오로지 혼자, '독고다이'로 진실을 찾아 나선다. 20년 전의 유괴 사건과 현재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대립까지도. 물론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지가 않다. 그런데 그가 이 모든 난관 속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정작 자신에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딸 '아유미' 때문이었는데, 가출하고 소식이 없는 딸 '아유미'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고 싶은 마음에 규정을 어기고 경무부 수장의 힘을 빌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된 난관이었던 것이다. 그 수장은 '딸의 수사'를 볼모로 잡고 그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했고 그 바람에 그는 그 명령이 자신의 천성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따를 수 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모든 대립 전선들이 뒤끓는 도가니 속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바로 이러한 미카미의 상태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3. 11 을 겪은 현재의 일본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아유미는 바로 3. 11 이 남긴 현재적 트라우마라고 말했다. 소설에서 아유미의 실종은 미카미에게 늘 현재 진행형적 고통이듯이 말이다. 그는 그 트라우마를 규정을 위반해서라도 서둘러 치유하려 했다. 하지만 그 섣부른 선택이 결국은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일본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발언이다. 왜냐하면 3. 11을 겪은 일본이 자신들이 안은 상처 혹은 비극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성찰하지도 않고 서둘러 파묻어버리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채 3개월도 안되어 3. 11은 공식 채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잊혀져 갔다. 당시에 그랬던 이유를 들어보면 해묵은 과거의 고통을 자꾸 되돌아보는 건 새로이 출발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전만 해도 그 문제점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았고 피해도 축소하기에 바빴다. 소설 '64'에서 미카미와 기자들이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 것은 한 노인이 어떤 임산부의 음주운전으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경찰이 그 임산부의 이름을 기자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즉 경찰의 독단적인 정보 통제 때문이었다. 이는 그대로 원전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독단적인 정보 통제와 너무도 닮아 있다. 이는 현재 일본 정부의 정보 통제에 대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비판으로 보여지며 이렇게 볼 때 결국 미카미가 처한 상황은 더욱 3. 11 이후의 일본 국민이 처한 상황과 같다. 지금의 일본 국민은 모두가 저마다 아유미를 잃어버린 미카미인 것이며 또한 쇼코를 잃어버린 아마미야인 것이다.

 

  이런 존재의 은유 또는 상황의 닮음을 이해해야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던지고 있는 지금 일본인들에 대한 대안적 속삭임도 들려오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건 단적으로 말해 개인의 독립적인 고유한 개인성의 쟁취 이다. 이것이 바로 요코야마 히데오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대립 전선을 가져 온 진정한 이유다. 그리고 왜 미카미가 자주 형사부를 자신의 고향으로 부르는지 또한 왜 그렇게 히데오는 미카미라는 존재를 몸과 마음이 달리 노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다. 소설 후반에 이 '고향'이라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된다. 이를테면 후반 경찰 청장이 시찰하러 오는 날 갑자기 20년전 쇼코의 사건을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고 그 때문에 사건이 전국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D현경에 온갖 중앙 기관지의 기자들이 몰려와 대대적인 기자회견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걸 볼 수 있다.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압도적 다수의 '손님'들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떤 성격이며 어떤 입장에 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나 발언을 했는지도 모르는 외부인들을 상대로 유괴사건의 기자회견을 진행해야 한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P. 566)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64'가 이런 이야기로 쓰여졌는지 단적으로 짚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밝히지 못하겠지만 왜 미카미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아마미야 역시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알려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앞서 말했던 이 소설이 대안이라고 말했던 독립적인 고유한 개인성의 쟁취란 단순한 기호화의 거부인 것이다. 위에 말했던 세가지 대립도 알고보면 그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찰 대 기자들도, 경무부 대 형사부도, 중앙 정부 대 지방 정부도 모두 각각의 상대방을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그저 기호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카미가 대표적이다. 기자들은 미카미를 고유한 미카미가 아니라 그저 홍보담당관이란 기호로 보았고 그건 경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형사부는 어떠한가? 한 때 같은 솥의 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미를 그저 자신들과 척을 진 경무부의 기호로만 본다. 경무부 역시 미카미를 그저 형사부를 잊지 못하는 기호로 볼 뿐이다. 아무도, 그들 중 그 누구도 기호가 아닌 인간 미카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단 한 명만이 그를 이해한다. 같이 딸을 잃은 아마미야 만이.

 

  이제 우리는 요코야마 히데오가 3. 11 을 트라우마로 겪고 있는 일본에게 진정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소설에서 쇼코의 사건을 그저 '64'라고 불렀듯이 지금 일본이 껴안아버린 비극인 3. 11 을 그저 기호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후 일본 정부가 했듯 서둘러 과거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모든 걸 섣불리 파묻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진정으로 비극을 치유하려 한다면 미카미가 그랬듯이 아마미야가 그랬듯이 그들 모두의 어려움을 저마다 유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그들 모두가 어떤 아픔,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64'에 담겨진 눈물이다. 소설의 장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비록 3. 11을 예상하고 요코야마 히데오가 10년의 세월을 공들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 꼭 나와야 할 때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저 위의 누군가가 잠시 운명을 튜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히데오의 진심은 사실 지금 일본 모두가 귀기울여 들을만한 것임은 틀림없다.

 

  3. 11 은 여전히 획책되는 은폐와 발굴하려는 아픔의 틈바구니 속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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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4와 3.11??
    from 책과 고양이와 이대호 2013-07-02 09:17 
    리뷰 잘 읽었습니다. 궁금한게요, 요코야마 히데오가 <64>를 통해 3.11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는 건 건 과대해석이지 않을까요? 다시 쓰긴 했지만, 3년전에 연재가 마무리 된 작품이구요. 아유미의 실종과 아유미가 가지고 있는 외모에 대한 고통, 그리고 그로 인해 미카미와 미나코를 힘들게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다시 한 번 읽어보고 곰곰 생각해보고 싶긴 합니다. ..... 내용 스포입니다.... 아유미로 인한 고통도 크게 다루
 
 
 



 

 



 4월달부터 망가진 몸에다 5월은 정말 여러모로 바쁜 일들이 겹쳐서 정말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6월은 어떻게든 재충전의 시간을 갖자고 마음먹고 있었죠. 마침 현충일과 주말 사이에 샌드위치 데이도 끼어있더군요. 그래서 요 시간을 무조건 활용하기로 했지요.

 

 그러다 비채 카페에서 나냥님이 올리신 이벤트 글을 봤습니다.

 이번에 나온 한승원 작가님의 신작 '겨울잠, 봄꿈'을 기념하여 마련된,

 

 '한승원 작가와 함께 하는 역사의 현장 걷기' 이벤트 !!

 

 

 


 

 

이번에 나온, '겨울잠, 봄꿈'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되고 처형되기까지의 마지막 나날들을 다룬 작품이죠. 

 

 

 

 오래전 부터 꼭 한 번 가봐야지 했었던,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 정읍이 답사의 대상이더군요.

 거기다, 날짜도 6월 7일!

 

 오호! 머릿속에서 왠지 저 위로부터 신탁이 내려오는 것 같았어요. '놓치지 말라'는.

 그대로 예스24로 '슝'하고 달려가 신청을 했고, 과연 의식 속에 둔중이 울렸던 그 울림은 역시나 신탁이었던지 덜커덕 당첨되고 말았습니다.

 해서, '룰루랄라~' 드디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만 먹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남역으로 아침 7시 30분까지 모이기로 되어 있는지라 저는 6시에 출발했습니다. 전날 새벽에 잠이 든 탓에 혹시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 알람까지 맞춰놓고 잤는데 왠걸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버리더군요. 어찌, 이런 일이! 이런 일은 여간해선 제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역시 그것은 신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또 잠깐 했습니다.

 

 좀 일찍 갔는데도 오늘 스텝으로 오신 분이 벌써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처음엔 스텝인지 몰랐습니다. 적어도 대학원생처럼 보이셔서 같이 답사가는 일행으로만 생각했죠. 하하^ ^ 그렇게 오늘 함께 가시는 분들이 하나 둘 모이고 버스는 8시 좀 넘어서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한 세 시간 정도 밖에 못 잔터라 버스에서는 휴게소 잠깐 갔다온 거 말고는 거의 졸았기 때문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정읍에 와 있더군요. 처음 온 정읍은 일요일의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으며 어디로든 활짝 열려 있는 풍경 때문에 왠지 느릿한 거북이의 걸음이 연상될 정도로 넘치는 여유로움마저 물씬 느껴지더군요. 바로 이 곳에서 구한말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생명력으로 활활 타올랐던 동학농민혁명이 태어났다니! 어쩐지 새삼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정읍에서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송참봉 조선 동네'라는 곳이었습니다.

 아, 동학농민혁명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것이었죠. '금강산도 식후경'은 황금률이니까요^ ^

 저는 몰랐지만 유명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1박 2일팀도 다녀가고 런닝맨도 거기서 촬영했다고. 송참봉이라는 분이(물론 실명은 아니에요.) 그의 조부모를 기리기 위해 당신들이 살았던 당시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대지 만여평 정도를 구입해 각지의 옛날 물건들을 모아 조성한 곳이라더군요. 그렇게 초가집 여러 채와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옛 물건들이 가득한 그 곳은 마치 옛날의 마을이 현재로 타임 슬립한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그 대략적인 모습이에요.

 

 


  이렇게 각 초가집마다 문패가 하나씩 붙어있더군요. 그래서 더욱 한 마을 같았습니다.

 



 우웃! 지게... 오랜만에 보네요^ ^

 


 

 


 이것 저것 많이 찍은 것은ㅠ ㅠ,

예정된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한동안 기다려야했기 때문이에요.

혼자 간 터라 별 다른 할일이 없는 저는 이렇게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떼워야했죠. 하하하^ ^

 

 

  그렇게 한동안 싸돌아 다니다 보니 오늘의 주인공 한승원 선생님께서도 어느덧 도착하시고 드디어 비채가 통크게 쓴 점심도 먹게 되었죠. 전라도 하면 역시나 넘치는 반찬의 갯수가 떠오르는데 거기도 그랬습니다. 찬거리가 정말 많더군요. 나중에 운영하는 송참봉 주인도 오셨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한 번 밥을 먹을 때 반찬도 한 꺼번에 입에 많이 넣었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밥을 먹으며 말을 할 수 없었던 거라 농을 하시더군요. 입담이 좋은 재미있으신 분이었습니다.^ ^

 

  이제 배도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답사를 할 차례...

 보다 내실있는 답사를 위해 정읍시청에서 담당자분께서도 오셨습니다.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로써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 발전과 계승을 위해 아예 따로이 전담 부서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오신분은 그 부서에 계신 분이었습니다.(성함과 직위는 제가 잘 못들어서 자세히는 말 못하겠네요. ㅠ ㅠ) 그 분이 오늘 저희들과 함께 다니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더 자세하고도 충실한 설명을 해 주신다고 하더군요. 오늘의 답사가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분이 그 담당자분입니다. 정말 하나하나를 아주 자세히 열의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처음 들른 곳은 바로 '동학혁명 모의탑'

 동학농민혁명을 처음 의논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으로 그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죠. 그 곳이 바로 '대뫼마을'이라는 곳인데 지금은 '주산마을'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답니다. 대뫼란 말 그대로 '대나무 산'이란 뜻으로 원래 이 마을에는 산처럼 많은 대나무가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져 그 정경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대뫼'란 예쁜 우리 말을 두고 '주산'이라는 이상한 명칭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일제시대 때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담당자 분께서 이 사실을 설명하시면서 참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무튼 바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 바로 '동학혁명모의탑' 입니다.

 

  바로 이 탑입니다.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이 정식 명칭인데 이 탑에는 '농민'이란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이 탑은 1968년에 사발통문의 후손들이 사비를 털어 세운 탑인데, 그 때는 '동학혁명'만이 정식 명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정식 명칭이 된 것은 2004년이었죠.

 

 

  나머지 탑의 삼면에 이렇게 사발통문이 새겨져 있더군요. 

 

 

  바로 이 곳이 1893년 1월,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지금은 개인 소유의 집이 된 터라 옛 자취는 남아있지 않지만요...



  이 집이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임을 알려주는 그 집 앞에 있는 안내판.

사발통문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어 담아봤습니다. 

 

 역사적 현장들이 동네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아가기 위해서는 동네를 가로질러 가야 했습니다. 가끔씩 컹컹 개 짓는 소리를 들으며 낮은 담장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낮의 한적한 동네길을 삼삼오오 모여서 걸어가노라니 어쩐지 소풍 가는 듯한 기분도 들더군요.^ ^ 

 

 그렇게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역시나 같은 대뫼 마을에 있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입니다.

 


  여기가 바로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입니다.

 

 이름없이 산화한 무명의 동학 농민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시민단체가 3년 동안(94 ~ 97) 주관하여 세워진 탑입니다. 계획하고 세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만큼 무명동학혁명농민군을 기리기 위한 그 뜻이 제대로 들어가 있습니다.(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나중에 보게 될 황토현 전적기 기념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은 당시 한 대통령에 뜻에 따라 급조 되었는데, 그로 인해 기념하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탓에 잘못 형상화하여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그 때 가서...)

 

 

 

 

 


  보시다시피 왼쪽(위)에서 오른쪽(아래)까지 무명 동학 농민군을 기리기 위한 탑들이 이렇게 조밀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통의 위령탑 하면 높기 마련인데 여기의 위령탑들은 보시다시피 조금도 높지 않습니다. 담당자분의 설명에 따르면 '무명'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하나의 평등한 개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대개 위령탑들은 그 영웅됨을 과시하기 위하여 웅장하게 세우는 법입니다만 여기의 탑들은 그 영웅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여기 이름없이 묻힌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와 같이 그저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고 한끼 밥을 위해 하루종일 노동을 해야했던 보통의 평범한 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승원 선생님의 '겨울잠, 봄꿈' 에서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던 것도 한 끼 밥을 위해서였죠. 왜 봉기를 일으켰느냐는 이토 겐지의 질문에 전봉준은 어릴 때 침묻은 강정 때문에 자신과 아버지가 겪었던 고초를 기억해 내고는 이렇게 속으로 부르짓습니다.

 '부잣집의 높은 문턱과 그 부잣집의 맵고 짠 밥 때문에 봉기를 한 것이다!(p. 88)'라고. 

 

 그렇게 이 한 그릇에 담긴 밥은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전봉준은 기꺼이 형장의 이슬이 되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 한 끼 밥의 소중함을 우습게 알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빼앗으려 드는 위정자들에게 바로 이렇게 외치기 위함입니다.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 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p. 216)

 

 어쩐지 저 한 그릇의 밥이 새겨진 위령탑을 보고 있으려니 그렇게 울부짖었던 전봉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위령탑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봉준의 고택.

 태어난 집이 아니라 그가 어릴 때 부터 봉기할 때까지 내내 살았던 집입니다.

 

 

 

 사진은 그 고택으로 가는 초입에 있는 길입니다.

 왠지 소설 속 한 장면이 생각나서 담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에서 전봉준이 말했던 그 '밥'의 의미와 얽혀있는 일화입니다. 전봉준이 그토록 밥의 소중함을 깨달은 계기이기도 하죠.

 

 언젠가 전봉준은 굶는 가족들을 위해 어렵게 변통한 보릿자루를 가지고 돌아가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강도는 그냥 나쁜 강도가 아닌 너무나 굶어서 부황에 걸려있는 불쌍한 자식들을 위해 강도짓을 해서라도 먹이고 싶은 불쌍한 가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전봉준은 그에게 가지고 있는 보릿쌀 반을 나누어 주고 가는데 또 한 명의 그와 비슷한 처지의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한 끼 밥이 없어서 처절한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 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끼 밥이야 말로 바로 하늘인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 일이 어쩌면 바로 이 길에서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 담아 봤습니다.


 전봉준의 고택으로 가고 있어서 그런지 이번 한승원 선생님의 '겨울잠, 봄꿈' 이 지금까지 나온 동학 소재의 소설과는 다르게 무엇보다 전봉준 개인의 내면에만 천착하여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려 했다는 점이 더욱 떠오르더군요.

 

 사실, 한승원 선생님이 가는 도중의 버스에서 직접 밝히시기도 하셨죠. 당신은 이번 작품에서 최대한 전봉준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셨다고. 그래서 소피를 보지 못함으로 인한 안절부절, 참을 수 없는 가려움, 벼룩 같은 것의 물림에 대한 귀찮음 등등 혁명가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면 도려내 버렸을 그러한 하잘 것 없는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는 전봉준의 모습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참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겨울잠, 봄꿈'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작품이 한승원 선생님이 동학에 대해 처음으로 쓰신 것도 아니죠. 버스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전봉준에 관한 '겨울잠, 봄꿈'의 이야기는 일전에 나온 작품에서 전봉준 이야기만 빠뜨린 것에 어떤 부채감 비슷한 마음에서 쓰여진 것입니다.(이제부터는 존칭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바로 그 전작이 1994년에 나온 '동학제'라는 소설입니다. 발간 연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것입니다. 고려원 출판사에서 모두 7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동학을 다룬 작품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송기숙의 '녹두장군'입니다. 공교롭게도 송기숙과 한승원은 고향이 같습니다. 모두 장흥 출신입니다. 얼마전 타계한 이청준도 같은 장흥 출신이죠. 아마도 그래서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업었을 것입니다. 장흥은 전봉준과 같은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된 후 다시금 동학 농민 3만명이 모여 항전을 계속하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동학농민혁명전쟁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격전지였으니까요. 그 '석대들' 벌판에 깊이 새겨진 역사적 상흔이 있는만큼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송기숙과 한승원이 보여주는 동학의 모습은 많이 달랐습니다. 송기숙은 동학농민혁명의 그 혁명적 모습에 더 중점을 두고 보여주려 한 반면, 한승원은 동학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려는 듯,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죠. 그건 제목에서 부터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한승원은 이미 제목에 제사를 나타내는 '제'를 써놓고 있으니까요. '제'는 그가 태어난 어촌에서 늘 행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엔 풍어와 무사귀한을 바라는 모든 인간적인 간구들이 집약되어 있지요. 그렇게 '동학제'는 인간들의 애욕, 욕망들을 한껏 보여주었습니다. 겁간이 나오고 불륜이 나오며 관능이 나옵니다. 그러한 모습은 전봉준이나 김개남 같은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렇게 한승원은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들이 삶에 대한 강한 집착, 애욕이야말로 그들의 생생한 생명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음식남녀', 즉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 말한 바 있죠. 제가 보기에 한승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간다움, 그 생생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입니다. '겨울잠, 봄꿈'에서 전봉준이 그토록 강조하는 '밥'은 아마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겨울잠, 봄꿈'은 사실 '동학제'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승원의 생각은 동학 사상에 비추어봐도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동학은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한울님'으로 저마다 모두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또한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 또한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답사 후기에 어울리지 않게 객쩍은 소리를 많이도 늘어놓았습니다만, 왠지 전봉준의 고택에 간다고 하니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전봉준의 고택에 도착했습니다.


 

 

 고택의 외관입니다. 제가 가지고 간 게 단렌즈라서 마당에서는 집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바깥으로 나와 담았습니다. 저렇게 토담이 둘러싼 집에는 보는 방향에서 가장 오른 쪽에 부엌 하나가 있으며 그 왼쪽으로 방이 세 개 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방에 전봉준의 사진이 걸려있고 책상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 방이 전봉준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책을 읽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그는 또한 날로 심해지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개탄했을 것이며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어떻게 하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삶을 구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원래는 마당도 작은 그야말로 평범한 농민의 집인데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 옆의 대지를 사서 잔디밭을 조성해 놓아 첫인상은 꽤나 부유해 보입니다. 관람자가 많으니 그 편의를 위해서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옛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더군요.

 

 

 사진은 바로 그 잔디밭에서 찍은 고택의 모습입니다. 맞은 편에는 마침 딸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계시는 한승원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어쩌면 한 강 작가에게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한 것 같습니다. 담당자 분이 초가 지붕을 때마다 갈아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몇 겹이나 쌓여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거기서 전봉준의 삶을 들었습니다. 원래 농촌은 배척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관살이 하기가 사실은 매우 힘들다고 하는군요. 전봉준도 타관살이였습니다. 아버지 때 다른 고장에서 여기로 이사온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가족은 전혀 그런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타관 살이하는 사람의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라는군요. 그것으로 우리는 전봉준의 아버지와 전봉준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지 유추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고택의 뒷쪽 모습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전봉준이 사랑했던 아내가 아마도 가장 많이 이 뒷편을 걸었겠죠?

 

 고택의 바깥에는 전봉준이 생전에 길어다 마셨던 우물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택의 맞은편에도 역시 초가집이 있는데 이 고택보다 크고 깔끔해서 처음엔 그게 전봉준의 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니더군요. 그 초가집은 고택을 관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택의 답사를 마친 다음,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 '만석보터'를 찾아 떠났습니다.
 


  여기가 바로 '만석보터'입니다.

 


   이것은 만석보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만석보 유지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비문은 강암 송성룡이 썼는데 왜 '지비'가 아니고 '유지비'를 썼을까 혹 의문이 들지 않나요? 그 해답은 바로 이 비석 옆에 있는 안내판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름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라서 사진도 올리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만석보유지비'에서 '유'자와 '비'자를 빼고 읽으면 바로 그 안내판에 쓰여져 있는 이름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강암 송성룡은 특별히 '유'자를 넣은 것이죠. 그냥 '터'를 넣어도 될텐데 왜 굳이 '지'를 넣어 이렇게 공개적으로 발음하기 어렵게 만든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담당자 분께서도 그 안내판을 맡았던 직원에게 왜 그렇게 썼냐고 물어보셨다고 하는데 그냥 아무 이유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합니다. 행정편이주의가 드러나는 씁쓸한 사례죠.

 

 아무튼. 이 만석보가 동학농민혁명 답사 코스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이 만석보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을 당기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만석보는 배들평야(현재 명칭은 이평)로 들어오는 두 개의 큰 하천, 그러니까 동진천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만석보를 만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원흉 조병갑인데 아시다시피 '보'를 만드려면 농민들에게 부역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 그는 몇 년치 물세를 탕감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부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기꺼이 부역에 나섰는데 '보'가 완성되자마자 조병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물세를 거두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부역은 부역대로 하고 물세 또한 저번 보다 더 많이 받으니 농민들이 가만있을리 없죠. 결국 이 만석보의 만행으로 인해 농민들은 봉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진은 만석보유지비 맞은 편에 있는 배들평야의 모습입니다. 보시는대로 정말 광활하죠. 이렇게 넓은 평야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들바람이 참으로 시원했습니다. 사실 그 날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이미 만석보터에 이를 때만 해도 저마다 지쳐있었죠. 하지만 만석보터의 시원한 들바람 덕분에 더위로 인해 몸에 달라붙은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는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실 것입니다. 담당자님도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여기에만 오면 피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겨울에는 정말 오기 싫은 곳 중에 하나라고. 별다른 뒷말이 없었어도 이내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만한 바람이 겨울에 불면 그것은 그대로 재앙에 다름아니겠죠. 

 

 

 그렇게 만석보터에서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만끽한 다음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로 떠났습니다.


'만석보터'를 지나 그 다음으로 간 곳은 바로 말목장터였습니다.

만석보터에서 말목장터까지는 그리 멀지 않더군요. 하지만 담당자 분이 없었다면 정말 찾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목장터에는 이렇게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말목장터'임을 알려주는 요 안내판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죠. 제가 듣기엔 여기에는 원래 두 가지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동학혁명의 최초 시발점으로써 전봉준이 말목장터에서 일장 연설을 할 때 그 옆에 있었던 감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웠던 '말목정'이라는 정자죠. 하지만 이제 그 두가지는 없었습니다. 감나무는 지난 태풍에 쓰러져 결국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옮겨졌고 '말목정'은 농민이 주축이 된 혁명에 양반 문화의 소산인 정자로 기념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라는 비판에 철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렿게 말목장터임을 알려주는 안내판만 남게 된 것이죠. 이 말목장터는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집결지로 그 불길이 처음으로 타올랐던 곳입니다. 말목장터는 부안, 정읍 그리고 태인으로 모두 갈 수 있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야말로 사통팔달 지역으로 근방에선 가장 큰 장터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죠. 여기서 1894년 혹한의 1월. 전봉준은 봉기를 촉발시키는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역시나 조병갑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조병갑은 고부군수로써의 임기를 다하고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민들도 드디어 학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배들평야와 같은 너른 평야가 있어 익산 보다는 빼앗아 먹을 것이 더 많다고 여긴 조병갑은 익산으로의 부임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로비와 획책으로 고부로 부임한 신임군수마저 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다시 고부 군수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제 겨우 빛이 보이는가 했는데 다시금 암흑을 마주하는 것만큼 분노하게 되는 일도 없죠. 더구나 그것이 오로지 불법 로비와 허용되지 않는 꼼수 때문이라면 더욱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동학 혁명의 불길은 그렇게 당겨졌던 것입니다. 먼저 바꾸기를 염원해서가 아닌, 상황자체가 혁명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은 말목장터의 도화선을 타고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해 갔습니다. 그리고 관군과 맞서 최초의 대승리를 이루어냅니다. 그 곳이 바로 '황토현'입니다. 한자로 하면 도대체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감이 잘 안 오는데 순 우리말로 풀어보면 여기서 '현'이란 '재'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이르는 말인 것이죠. 황토현이라 부르지 말고 황토재 혹은 황토고개라고 하면 더 의미가 확실히 전달될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 한자말로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사실 '배들평야'도 지금 공식 행정구역 명칭은 '이평'입니다. 뜻을 알고 보면 정말 웃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평'을 풀이하자면 배나무가 많은 평야란 뜻이 됩니다. 하지만 저번 사진에서도 보셨듯이 거기엔 배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배들평야'란 원래의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배들평야란 배가 드나드는 평야란 뜻인데 일제 시대 당시 이 행정 구역 이름을 담당했던 사람은 그걸 단순히 배라는 과일이 나오는 평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배나무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평'이란 이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더구나 지금까지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구요. 사정을 알고나면 코미디가 따로 없는 셈이죠. '만석보터'가 차마 이름을 공공연히 부를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배들평야'와 '이평'과의 관계는 사실 동학농민혁명운동을 기념하는 사업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 기리는 작업이 아닌 그저 어떤 정권의 기호에 따라 급조되고 행정편의주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오히려 그 본래적 의미를 흐리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황토현전적지'가 그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황토현 전적지에는 그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이고 또 하나는 거기서 두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있는 황툐현전적지기념관입니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은 비교적 오래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63. 10월 3일에 건립되었죠. 동학혁명운동을 기리는 작업이 꽤나 오래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개막 행사엔 당시 대통령 후보로 한창 선거운동 중이던 박정희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웃기는 건, 그 때 전봉준 장군의 친 딸이라고 80 넘은 할머니 한 분이 나와서 꽃다발도 받고 기념 사진도 찍고 했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전봉준 사후 3년 뒤에 출생한 분이였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꼼수를 부린 것 같은데 이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해프닝이 공식적으로 벌어졌다니 요즘에도 많이 보게 되는 모습이기도 해서 어쩐지 침울해 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황토현전적지기념탑은 그런 우여곡절을 안고 지금도 이렇게 서 있습니다.

 

 


 기념탑의 윗 부분 모습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치였던 '제폭구민 보국안민'이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의 한자가 틀렸습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보'자는 지키다의 '보(保))'가 아니라 '돕다'의 보(
輔) 자죠. 서체도 너무 유려해서 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원래 기리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의 분위기와 맞지 않습니다. 탑을 건립할 때 원래 기리고자 하는 것을 그다지 잘 헤아리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아닐까 합니다.

 



 탑의 아랫부분입니다. 단렌즈로는 전체가 다 안들어가서 할 수 없이 이렇게 나눠서 찍었습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라는 이 탑의 정식 명칭이 저렇게 중앙에 새겨져 있습니다. 

 



  탑의 (보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있었던 황토현 싸움을 나타낸 부조. 그 뒷 부분엔 사진으로는 안 찍었습니다만 '겨울잠, 봄꿈'에도 나오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들이 함께 불렀다는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노래 가사와 전봉준을 기리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 가사를 볼 수 있습니다. 황토현은 높은 고개답게 내려다 보는 풍광이 정말 좋습니다. 날이 좋으면 동학농민혁명에서 첫 무장 봉기가 일어났던 장소인 '백산'도 보인다는군요. 그 때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모였는지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겨울잠, 봄꿈'에도 나오는 말이죠. 말인즉슨 당시 농민들이 모두 죽창을(첫 글에 나온 '대뫼마을' 기억하시죠. 그렇게 대나무나 많은 고장이었으니 대나무로 만든 죽창도 많았을 것입니다.)들고 모였는데 그래서 앉으면 손에 들고 있는 대나무 밖에는 안 보인다 해서 '죽산', 서면 입고 있는 흰 무명옷 밖에는 안 보인다 해서 '백산'인 것이죠.

 


  그래도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담아보자는 생각에 꽤나 멀리까지 가서 간신히 찍은 사진입니다. 마침 한승원 선생님이 걸어오시다 딱 찍히셨네요^ ^

 

 이렇게 기념탑을 둘러보고

2시 방향에 나 있는 길을 따라서 바로 가까이에 있는 '황토현전적지기념관'에 들렀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는 이렇게 기념관의 전경이 나타납니다.

 

  기념탑과는 달리 기념관은 전두환 정권 때 세워졌습니다. 세워지게 된 까닭도 알고보면 좀 기가 막힙니다. 전봉준 장군이 전두환과 같은 천안 전씨라서 사실은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은 마음에 위의 주도로 만들게 된 것이라더군요. 그러니까 이 기념관은 전적으로 윗분의 기호에 부합하기 위한 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결과물도 원래 기리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 본래의 뜻과는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황토현전적지기념관'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오로지 선전효과만 기대하면서 만들게 되면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물이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문은 전봉준 동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념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문입니다. 이렇게 안에 문 하나를 더 두는 것은 보러 오는 자들이 좀 더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보이는 현판은 이 문을 '보국문'이라 하고 있습니다. 현판의 한자를 보면 기념탑의 한자가 어떻게 틀렸는지 바로 알 수 있죠.


 

 

 

 

  안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동상입니다. 담당자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 동상도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장군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상임에도 불구하고 맨상투를 함으로써 그 위엄을 스스로 깎아버리고 있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전봉준 장군이 압송되는 그 사진을 모델로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장군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면 좀 더 숙고해서 격에 맞게끔 형상화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셨습니다.

 

 

  사진은 동상의 뒤에 양쪽으로 서 있는 부조 중 하나를 찍은 것인데 이 부조는 더욱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형상화된 농민들의 모습이 원래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던 농민들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말목장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절박함 끝에 나온 혁명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조엔 그런 농민들의 고통, 절박함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라인드로 매끄럽게 갈아버린 탓에 농민들이 표정과 모습은 한없이 부드럽기까지 합니다. 유홍준 선생님은 혁명운동이 아니라 '소풍 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는군요. 너무나 그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상태로 형상화된 탓에 '20세기 최대의 문제작'이라고도 하셨답니다.


 


   대뫼마을에 있었던 무명동학농민위령탑에 새겨진 농민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왜 그 부조가 문제인지 제대로 드러납니다. 이 위령탑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세워졌죠. 하지만 이 기념관의 동상과 부조는 한 정권자의 지시로 빠른 기간에 세워졌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가 그와 같은 문제점을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동상과 부조는 그 외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제작자 때문입니다. 김경승이란 사람으로 일제 시대 때 친일 미술인들이 주축이 된 관변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입맛에 맞는 미술품을 만들어 온 친일 행적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국회에 있는 이순신 동상이 일본도를 차고 있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동상 역시 김경승의 것이었죠. 동학농민혁명은 무엇보다 항일 운동이었기 때문에  친일 인사가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만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부조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고귀한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김경승은 해방 이후 이승만 동상이나 맥아더 동상을 만드는 등 언제나 정권과 친화적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 전봉준 동상도 그간의 그런 이력 때문에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가 친일 인사인지라 그가 제작한 것은 모두 철거되는 게 옳은 일이지만 이미 한 번 세우는 것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것은 그만큼 재정이 드는 일이어서 이 또한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보다 많은 이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주는 수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이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에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동상에서 (보이는 쪽으로) 왼 편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사당입니다. 늘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날은 문이 잠겨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동상에서 물러나 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기념관이었습니다. 기념관을 들어가면 정면에 이렇게 전봉준 장군의 초상화가 있습니다만 이 또한 꽤나 문제가 많은 '문제작'이었습니다. 일단 농민혁명의 주축이었던 사람에게 양반의 모습, 그것도 대감의 모습을 입힌다는 것이 모순이고 표정 또한 너무나 표독스럽게 그려져 있어 과연 이 초상화가 전봉준 장군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미움받도록 하려는 것인지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초상화에서는 흠모의 마음 보다는 다가가려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이래저래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은 씁슬한 느낌만 가득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안고 기념관 정문을 나오니 바로 그 정면에 저렇게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보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설립된 재단에서 만든 것인데 거리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정면입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기념관입니다. 좀 오래 둘러봤는데 정말 내실이 있더군요. 그래서 안내자 없이 정읍에 와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돌아다녀 볼 생각이라면 먼저 이 기념관부터 들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되더군요.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얻고 유적지를 답사한다면 더욱 내실있는 답사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1층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할 당시 조선 백성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망태를 발견했습니다. '겨울잠, 봄꿈'에서 우금치 전투에선 농민들이 불타는 망태를 굴러서 일본군들에게 대항했다길래 도대체 어떻게 생긴 물건일까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을 여기서 풀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1층에 있던 당시 동학농민혁명을 외세는 어떻게 보았는지 그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일본 신문들은 동학농민혁명들은 조선을 깨끗이 하려는데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들 혹은 배를 뒤집으려고 달려드는 악어들 이렇게 아주 부정적으로만 묘사했더군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2층에 올라가면 중앙에 둥글게 커다란 그림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혁명과정과 관련있는 것들만 발췌해(그러니까 그 큰 그림 중 관련있는 일부분만 찍었다는 이야기죠.) 찍어봤습니다. 지금까지의 답사 과정이기도 해서 함께 하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그림이라서 혹시 저작권이 문제될지도 모르는데 만일 문제가 있다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1.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들의 학정.

 


 


  2. 엎친데 덮친 격, 고부 군수로 부임해 오는 조병갑... 

 

 

 3.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사발통문...



 
 4. 말목장터에서의 연설...

 


  5. 백산에서의 봉기



 

 6. 황토현에서의 승리... 


 
 7. 전주성 함락...

 

 

 8. 손병희가 이끌던 '북접'과 전봉준이 이끌던 '남접'이 하나되는 순간...

 

 

 9.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

 

     이 때 동학농민군과 대치했던 일본군은 모두 200명, 관군은 2,500명.

    동학군은 남접이 1만명, 북접이 1만명, 김개남이 이끌던 8천명까지 해서 도합 2만 8천명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거의 수만에 가까운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기관총에 의한 학살이었다고 합니다.

        

 

 

 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답사 일정은 공식적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말이죠. 기념촬영까지 끝내고서 마지막이 늘 그렇듯이 왠지 모르는 아쉬움을 입가에 조금은 쓸쓸히 머금고 있을 무렵 뜻밗의 낭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비채에서 저녁을 쏘겠다는! 마침 출출할 무렵이라 그 소식은 더욱 반가웠고 벌써 예약까지 되어있다는 식당으로 우리는 '슝~'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육회 비빔밥을 먹었는데 비빔밥만 나오지 않고 여럿이서 같이 떠먹을 수 있도록 세수대야 같은 커다란 그릇에 미역국까지 같이 나오더군요.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

 


 

 나중에 들었는데 오늘 갓 잡은 소로 만들었다는 육회비빔밥도 맛있었지만 미역국이 정말로 환상이었습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숟가락이 자꾸만 미역국을 향하더군요. 알고보니 오늘 답사를 담당하셨던 분이 소개해주신 식당이라더군요. 과연, 그래서 맛이 좋을 수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무튼 모두 정말 맛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이번 답사의 화룡정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데 그 식당 이름을 미처 뇌리에 새겨두지 못했습니다. 흑 ㅠ ㅠ)

 

  이렇게 유월의 초입을 뜻깊은 시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답사를 마쳤습니다. 더러 사정없이 내리쬐는 땡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쯤은 답사를 통해서 얻게 된 것들에 비하면 주저없이 감수할 작은 희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정에 없었던 저녁까지 마련하면서 끝까지 보다 내실있는 답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감내해 주신 비채에게 아낌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언제고 한 번 꼭 돌아보고 싶었던 답사를 더욱 풍성하게 맛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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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 김학범 교수와 함께 떠나는 국내 최초 자연유산 순례기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1
김학범 지음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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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은 안타까움의 소산이다.

현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문화의 중요성이 날로 대두되면서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 발굴하고 아울러 그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적극 홍보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무엇보다 해마다 늘어나는 명승지정의 개수로 증명되는데 가까운 중국을 예로 들자면 국가 지정 명승은 208건, 지방 지정 명승은 2,560건으로 도합 2,768 건이라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이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라서 일본은 모두 360건의 국가 지정 명승이 있다. 이 뿐 아니라 북한마저도 320건의 명승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우리나라엔 지정된 명승이 얼마나 될까? 아마 북한보다는 많겠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나라가 훨씬 관심도 많고 앞서 있다고 생각 할 테니까. 하지만 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가 명승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인데 2003년까지 지정된 명승은 단 7건에 지나지 않았다. 2003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명승 지정과 보호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 2013년 5월 현재 모두 104 곳의 명승을 지정했다. 꽤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북한의 절반도 안되는 숫자다. 이래가지고서야 그동안 문화강국이라 외쳐온 사실만 부끄러울 뿐이다. 현재 문화재 위원회 천연기념물분과 위원장으로 재직 중인 김학범의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 기행'은 바로 이런 안타까움에서 태어난 책이다. 이렇게 부족한 명승의 숫자는 결코 우리의 국토가 적어서 명승지 또한 적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우리 것이 가진 아름다음에 관해 관심이 없고 그로인해 찾고 발굴하며 기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김학범의 이 책은 안타까움을 낳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고쳐보고자 태어났다. 우리나라의 명승이 가진 아름다움을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실히 완상케 하여 그 가치와 보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한데, 책을 읽다보면 과연 이런 것도 명승이 되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정원' 이나 문경새재나 대관령 옛길이나 벼랑길 같은 '옛길' 뿐만 아니라 '법성진 숲쟁이' 같은 전통 포구 앞의 마을 숲이나 내앞마을의 '백운정'과 '개호송숲'과 같은 화려한 문화재에 비한다면 어쩌면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는 곳까지 모두 명승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른바 유명한 고적, 아름다운 산수로 대변되는 명승의 개념이 오히려 너무 협소하다고 한다. 명승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이름이 높다거나 대대로 아름답다고 칭송되어 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의 정원이나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 또는 아무나 언제든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저수지나 숲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기리고 보존할만한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니거나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명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가까운 일본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은 일찍이 정원을 명승에 포함했는데 사실 306건의 일본 명승 중 200건이 바로 정원이니까 말이다.


(사진은 이 책의 첫 장을 여는 길재가 세운 금오산 채미정의 모습. 벽체 없이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다. 특히 이 채미정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의 풍광이 수려하다고 한다.)





책은 그렇게 달라져야 할 명승의 개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듯 익히 우리에게 알려진 명승이 아닌 우리가 새로이 관심을 갖고 찾고 발굴해야 할 명승들에 더욱 주안점을 두어 그 쪽으로 관심을 유도하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명승들을 소개하는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책의 첫 장을 '고정원', 그러니까 옛 선조들의 정원들의 소개가 차지하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에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길재가 금오산에 지었다는 채미정과 그림으로 남아있는 양산보의 '소쇄원'을 비롯한 14개의 '고정원'과 경남 원학동에 있는 수승대와 '춘향전'이 공간적 배경으로 유명한 전남 남원의 광한루원을 포함한 6개의 '누원과 대'와 퇴계 이 황과 그를 모셨던 기생 두향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단양의 구담봉과 과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했다는 문경새재와 함께 한 14개의 '팔경구곡과 옛길'을, 그리고 가야산의 해인사, 두륜산 대흥사, 속세를 떠나있는 곳이란 이름의 속리산 법주사를 비롯한 8개의 유명한 역사와 문화 명소 뿐 아니라 아름다운 지중해풍의 풍광과 더불어 농경 자체가 하나의 문화 경관이 되어버린 남해 '기천 마을의 다랑이논'이나 같은 남해지만 이번에는 오래된 어업문화를 보여주는 '지족해협의 죽방림'을 포함한 7개의 전통산업 문화 경관까지 모두 49개의 우리가 알고 찾고 보고 느껴야 할 명승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사진은 함양에 있는 화림동 계곡에 있는 거연정의 모습. 주위 경관과 어울림을 최고로 꼽는 한국의 미학이 참으로 잘 살아난 곳이라 할 수 있다. 이 화림동 계곡은 특별히 팔정팔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여덟개의 정자와 여덟 개의 담이 있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사진은 팔정팔담으로 유명한 화림동 계곡의 모습.)



전문가답게 설명은 우아한 물결처럼 막힘없이 유려하게 흐르고 또한 쉬워서 비록 많은 수의 명승을 소개하고 있으나 한달음에 읽어버리게 만든다. 거기다 그 풍광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사진까지 곁들어 있어 이해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82페이지에 있는 거연정의 경치 사진이나 90페이지에 있는 하원의 하지 사진 또는 130페이지의 죽서루 사진이나 162페이지 도담상봉 일출 사진 그리고 240페이지의 공주 고마나루 솔숲 사진은 빼어나게 멋져서 한동안 눈길을 붙드는 것을 넘어서 꼭 거기 가서 그 경치를 바라보았으면 하는 소망마저 가지게 만든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명승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아래에서는 개인적으로 특히나 인상깊었던 곳을 몇 가지 말해본다.



(16세기 후반 퇴계로부터 '동방의 도학을 전수할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남언기가 전라도 동복현 사평촌에 은둔하면서 지은 정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고반원'이라 한다. '고반'이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 '고'는 이룬다를 뜻하고 '반'은 머뭇거려 멀리 떠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뜻 그댈 은거할 집을 이름이다.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임대정은 바로 이 '고반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자가 있는 '상원'과 정자 앞의 사각형 연못 둘을 중심으로 한 '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연못의 이름을 각각 '상지'와 '하지'라 하는데 사진은 그 하원 중 하지의 모습이다.)





(사진은 단양팔경중 하나인 도담삼봉의 일출을 찍은 것이다. 도담에 떠 있는 세 봉우리가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퇴계 이황은 이 아름다움에 반해 '도담상봉'이란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 또한 이 도담삼봉을 사랑한 이들 중 하나다. 그가 호를 '삼봉'이라 한 것도 바로 이 '도담삼봉'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진에 보이듯이 중간 봉우리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삼도정'이라 한다. 이 정자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찾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사진은 단양에 있는 '석문'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선 할머니로 유명한 마고할미의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양 팔경 중 하나인 석문은 커다란 문과 같이 생긴 바위로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자연유산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동천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시다시피 겨울에 가면 더욱 빼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후기엔 남종화가 유행했는데 사진에 보이는 운림산방은 바로 그 남종화의 산실이기도 하였다. 운림산방은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지은 것으로 그의 다른 이름은 '허유'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중국 당나라 남종화의 효시라 알려진 왕유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허련은 추사 김정희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고향인 진도로 내려와 초가를 짓고 거처했는데 그 이름을 '운림각'이라 짓고 그 앞에는 커다란 연못과 정원을 만들어 그 풍경을 그리면서 말년을 보냈다.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말했던 허련의 말년이 그대로 풍경이 되어 화한듯한 느낌의 명승이다.)



(사진의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이다. 신라가 망했을 때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바로 이 하늘재를 넘었다. 하늘재는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 이 하늘재는 접경지역에 있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날 수 밖에 없는 고개였지만 한 편으론 문명 교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전해질 때도 바로 이 하늘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하늘재는 여러가지 얼굴로 무려 2,000년의 역사가 간직된 곳이다.)


(백제를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다. 백제 사람은 곰의 후예라 할 수 있다. 금강이 공주시 유역을 굽이돌아 흘러가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마나루는 풀이하자면 '곰나루'라 할 수 있다. 사진은 이 고마나루에 조성된 솔숲을 찍은 것이다. 아침이면 뿌옇게 몰려오는 안개에 어슴푸레하게 잠긴 솔숲이 그야말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언젠가 꼭 한 번 찾아가서 그 아침 안개에 젖어들어가는 솔숲을 바라보고 싶다. 그 마음으로 특별히 담은 사진이다.)





이제 결론이다.

안타까움이 너무 깊으면 오히려 그것이 알찬 씨앗이 되어 우렁우렁 커다란 결실의 나무로 자라난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에 딱 걸 맞는 책이다. 지나친 상찬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읽어보면 이 책의 진가는 알게 되리라 믿는다.




바야흐로 곧 휴가철이다. 이미 해외 쪽은 예약이 모두 꽉 차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렇다면 너도 나도 다 가는, 남들과 똑같은 해외여행으로 금쪽같은 휴가를 보내기 보다는 그렇지 않아서 오히려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되어 줄, 이 책에 소개된 잘 알려지지 않은 명승들을 한 번 찾아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일부분을 분명 형성하고 있는 역사의 경관 속에서 그 역사를 더듬어 가면서 거기에서 파생된 '나'라는 존재를 한 번 반추해 보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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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0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림산방, 이런 곳에서 살면 아주 조용해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공기도 아주 맑겠군요 뒤로는 산, 앞에는 물이 있다는 말 ‘배산임수’ 가 절로 떠오르는 곳이네요 하늘재도 걸으면 참 좋겠네요

우리나라에도 경치 좋은 곳이 많죠 그런 곳을 찾아내고 잘 지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으로 봐도 멋지겠지만, 실제로 가 보는 것도 좋겠군요 저는 어디 가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연을 만난다면 그것은 좋겠습니다^^


희선

ICE-9 2013-07-21 01:2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통해 이렇게나 좋은 곳이 많다는 걸 비로소 알았어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나라는 정말 갈 곳이 없어하고 불평했던 제가 다 부끄러워지더군요. 언젠가 꼭 거기서 자연을 더없이 만끽하게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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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지우 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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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살았던 고향집은 기차역 부근에 있었다.
일제 시대 때 지어졌던 그 역은 가끔 완행열차나 서고 볼 것이라고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모를 노송하나가 전부인 아주 작디 작은 역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동심을 유혹하기엔 충분했다. 어린 시절은 'SIZE IS MATTER!'라는 영화 고질라의 메인 카피처럼 커다란 것을 동경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칙칙폭폭'하는 왠지 거친 호흡과도 같은 소리를 내는 거대한 디젤 기관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기 위해 얼마나 자주 놀러 갔었는지 모른다. 여름날이면 넓다란 그늘을 드리우는 노송에 기대어 역에 내리는 사람 구경도 하고 철로에 귀를 대어 기차가 오는지 안오는지 듣기도 했다. 별 것 아닌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흠뻑 빠졌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향처럼 조용히 미소가 피어오르는 유년시절의 좋은 추억이다. 새삼 그 추억을 말하는 건 내 인생에서 기차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어린 시절의 동경이었고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새벽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로 인해 자유롭게 되기를 부채질했었던 기차. 그래서 나 역시 비슷한 추억이 있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브 라이너 감독의 영화 '스탠 바이 미'를 좋아하고 윤후명의 소설 '협궤열차' 또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나 철길을 따라 걸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협궤열차를 비롯한 이런저런 완행열차를 타고 이름모를 역에 내려 정처없는 순례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사회로 나오면서 느림의 미학인 기차 여행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미루게 되고 차츰 철도 환경도 달라져 이제는 기차에서 느긋하게 풍경을 완상하는 것이나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 이름모를 낯선 역을 만나는 즐거움도 자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차는 내 삶에서 물러났다.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물러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다시금 기차에 대한 매력을 일깨워 준 책을 두 권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아주 결정적인 것으로 일본 만화가 하야세 준으; '에키벤'이다. 음식을 소재로 한 만화는 일본 만화에 있어 이미 하나의 주류적 장르이지만 그래도 '에키벤' 같은 만화가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에키벤'은 제목 그대로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말한다. 오랜 철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은 이 에키벤의 역사 또한 깊어서 각 지역마다 혹은 각 노선마다 유명한 에키벤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만화 '에키벤'은 바로 그걸 소재로 한 만화다. 그렇게 만화는 각 노선이나 각 지역에서 유명한 에키벤들을 스토리와 곁들어서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는데 읽다보면 거기 나오는 에키벤들이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워서 어느새 기차를 타면서 그 에키벤을 먹고 있는 모습을 동경하게 된다. 이 만화를 읽은 때가 이미 일본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전이라 그 때는 정말로 에키벤을 테마로 한 일본 여행 계획을 짜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본말고 우리나라 기차 여행의 묘미도 새로이 되살려줄 책이 하나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다 드디어 만나게 된 게 바로 이제 이야기할 '기차여행 컨설팅북'이란 책이다. 사실 RHK에서 나오고 있는 '컨설팅북' 시리즈를 좋아한다. 처음 만났던 것은 '주말여행 컨설팅북'이었는데 실제로 그걸 가지고 여행 계획을 짜보거나 가지고 다녀 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런 경험까지 있어 '컨설팅북'을 특히나 신뢰하게 되었는데 그 시리즈 세번째로 이렇게 '기차여행 커설팅북'이 나오다니 개인적으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먼저 책 표지를 넘기는 날개에 이 책에 참여한 저자들이 나오는데 그 소개글을 가만히 읽어보면 '기차여행'이란 테마가 먼저 기획되고 거기에 맞춰 쓰여진 책이란 걸 알 수 있다. '주말여행 컨설팅북'은 그러한 뉘앙스를 못 느꼈기 때문에 어쩌면 컨설팅북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특별히 기획된 책이 아닐까도 싶다. '컨설팅북'의 매력이란 한마디로 뭐랄까 일종의 '눈높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철저하게 사용자 편에서 자신에게 마춤한 여행을 스스로 계획하고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있다는게 이 시리즈의 장점이다. '기차여행 컨설팅북' 역시도 마찬가지다. 기차 여행 준비서부터 다녀볼만한 각 철도 노선의 역을 중심으로 한 여행지 소개에 이르기까지 초보자의 눈높이에서 말해주고 있다.



사진은 책의 부록인 '한국철도노선도'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엔 이렇게 많은 철도 노선이 존재한다. 보통역의 위치가 나와 있어 오히려 그런 역으로의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는 퍽 유용해 보인다.

책의 구성은 '철도노선도'처럼 역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각 중요 철도 노선마다 꼭 들러볼만한 역을 중심으로 여행지를 세부적으로 소개하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이국적인 근대 건축물들이 많아서 나도 언젠가 가보려 하는 강경역으로 가고자 한다면 강경역이 위치한 호남선 항목을 찾는다.(얼른 노선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처음의 목차에서 지역별로 찾아도 된다.) 그러면 강경역 항목이 나오고 저렇게 지역과 코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뒤로 책장을 넘기면 코스로 꼭 가보면 좋을만한 곳들 그러니까 '구 남일당 한약방'이라든지 아니면 '강경역사문화원'나 '중앙초등학교 강당'이나 '강상고등학교 사택'(모두 근대건축의 이국적인 미를 보여주는 곳들이다.) 혹은 '죽림서원' 같은 곳들의 보다 상세한 설명이 나오게 된다.



책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코스는 자가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중교통에 맞춰 설정되어 있으므로 기차 여행을 하는 이에겐 더욱 최적화된 셈이다.(때문에 각 여행지마다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편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강경역'과 더불어 언젠가 한 번은 꼭 가야지 했지만 잊고 있었던 곳들을 다시금 만나 더욱 눈을 번뜩이며 이번엔 기필코 가야지 마음먹게 되는 곳을 더러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하동역과 곡성역이 내겐 그랬다.



하동역은 무엇보다 감명깊게 읽은 '토지'가 태어난 곳이라 꼭 가고픈 곳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마음만 있었지 정작 실천은 못하고 오래도록 잊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다시금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사진은 하동역 항목의 맨 앞부분. 강경역과 같이 지역의 소개와 교통편 그리고 에디터 추천 코스가 간략하게 나와있다. 책을 보니 하동엔 그것 말고도 유명한 게 많았다. 화개장터가 있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지만 4월이 되면 구례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25KM의 도로가 모두 벚꽃으로 뒤덮인다는 섬진강 벚꽃길 백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인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6KM의 '십리 벚꽃길'의 존재를 알게된 것은 이 책을 통한 또 하나의 수확이었다. 사진의 벚꽃들이 너무나 유혹적이라 봄에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동역 항목의 맨 앞부분을 넘기면 이렇게 대표 추천 코스 각 여행지의 세부적인 설명이 전개된다.




토지를 좋아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평사리 최참판댁'. 토지의 주요 무대가 되는 평사리 마을과 최참판댁을 소설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드라마 '토지'도 여기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주말에 가면 서희와 길상이가 혼례를 치르는 장면도 볼 수 있다고...



아무래도 기차 여행이 테마라면 곡성역을 빼놓을 수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곡성역은 '은하철도 999'를 좋아한다면 지나칠 수 없는 증기기관차에 대한 로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섬진강 기차 마을'이다. 어른 청소년은 6천원, 어린이는 5,500원의 왕복비용으로(이 책에 실린 모든 정보는 2013년 4월 것이므로 이대로 믿고 가도 상관없을듯 하다.) 증기기관차 여행을 즐길 수 있는데 '은하철도 999'의 기분을 한 껏 낼 수 있을 듯 하다.



읽다보니 기차 여행의 좋은 점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가용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게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정도의 일정이라면 다른 건 하나도 필요없이 그저 기차에 몸만 실으면 되니 이보다 더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는 길이 또 있을까? 사실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전까지는 가지고 있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기에 기차역에 도착하고 난 뒤부터는 어떻게 해야할 지 좀 막막해서 기차여행을 선뜻 떠나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대담하게 시도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대중교통 정보가 자세히 나와있는 이 컨설팅북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제 곧 휴가철이다. 혼자서 기차여행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화가 나는 소식이긴 하지만 철도 민영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다고 하니 기차 요금이 턱없이 오르기 전에 미리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보다 저렴하게 기차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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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 새로운 수요를 만드는 사람들
크리스 앤더슨 지음, 윤태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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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면 그건 책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보여주어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책이 넓혀주는 시야란 현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건 미래도 마찬가지다. 책은 현재를 넘어 도래할 미래 또한 보여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보다 현명하게 미래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까 책은 한 마디로, 정보의 부족 혹은 시야의 한계로 인해 치르게 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미연에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이다.

 

 굳이 이러한 책의 유용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번에 나온, '롱테일 경제학'으로 이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크리스 앤더슨의 또 하나의 역작, '메이커스'가 바로 그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메이커스'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달라진 현재의 모습과 더불어 도래할 미래의 모습을 정확히 밝혀 우리가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그래서 만일 당신이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고심하고 있었다면 좋은 조언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그렇다면 크리스 앤더슨이 보여주고 있는 미처 우리가 몰랐던 변화된 현재의 모습과 도래할 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대답은 '메이커스'라는 제목 자체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일단 전작 '롱테일 경제학'에서 크리스 앤더슨이 보여주었던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그 책에서 크리스 앤더슨은 동시대 소비자들의 취향이 다변화되고 또한 이전 시대의 소비자들과는 달리 이제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그 취향을 실현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소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상품이 선호되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 보았다. 그렇게 크리스 앤더슨은 앞으로 날로 '틈새시장'이 생겨나고 중요해질 것이며 이제 그것을 적극적으로 창출시키는 것이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다. 정말로 이제 사람들은 대중의 일반적 성향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그러한 다변화된 취향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틈새시장'의 중요성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패스트 패션으로 유명한 '자라'가 거기에 대한 좋은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롱테일 경제학'에서 상정했었던 시대적 환경은 '메이커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메이커스'는 ;롱테일 경제학'에서 보다 더 한 발 나아간다. 그러니까 보다 더 현실적으로 '틈새시장을 어떻게 창출시킬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롱테일 경제학'에서도 그랬듯이 크리스 앤더슨은 여전히 제조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산업이라 본다. 비록 지금이 정보화 시대이고 산업의 근본적 구조가 '원자'에서 '비트'로 옮겨갔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크리스 앤더슨에게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로 인한 디지털 환경의 획기적인 변화는 한 마디로 제조업의 근본 환경을 바꿔 보다 더 제조업이 왕성해지도록 하는, '슬램덩크'식으로 말하자면 '왼손은 거들 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디지털 환경이 됨에 따라 이제 개인이 얼마든지 공장에서만 할 수 있었던 작업들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사진관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예전에는 사진 현상을 위해서는 꼭 사진관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예전엔 전문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사진 앨범 하나도 가지기 어려웠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 사진관에서 하는 일들을 개인이 집에서 혼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에 의하면 제조업 환경도 그렇게 바뀌었다. 설계 프로그램의 발달로 이제 개인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의 설계를 할 수 있고 거기다 그러한 이들이 설계한 상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이른바 '메이커 스페이스(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공방'을 생각하면 될 듯 하다.)'의 발달로 굳이 전문가나 공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그래도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시겠지만 크리스 앤더슨은 그것도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많은 지식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됨(이를 '오픈소스 라이선스'라고 말한다.)으로써 얼마든지 자신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상품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있다면 '메이커스', 즉 수요 창출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시대에는 자신에게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상품화 시키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세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했다.

 

  1. 제조업체들이 제조할 만큼 인기가 있는가?

  2. 소매업자들이 계속 진열할 만큼 인기가 있는가?

  3. (광고나 상점 쇼윈도를 통해) 소비자 눈에 들어올 만큼 인기가 있는가? (p. 102)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구현시키기 위해 더 이상 타인들에게 그 평가와 심판을 맡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원하면 얼마든지 누구나 능동적인 '메이커스'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은 실제 자신이 구상했던 '스프링쿨러'를 상품으로 만들었던 과정을 밝힘으로써 이것이 그저 허황된 공상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까지 하다.

 

- 이렇게 변화된 디지털 환경의 덕분으로 이제는 '책상 위 공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진은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책상 위 공장'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현재 나와있는 물건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변화된 현재와 도래할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개인의 창의성과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임을 분명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조직을 등에 업지 않으면 개인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어떤 집안, 어떤 지역, 어떤 학교, 어떤 회사, 이런 것들이 나 자신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우리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존재의 가치는 많이 왜소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바라는 직업이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안정을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그만큼 스스로의 존재가 왜소하다는 생각에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제 달라졌다.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다가 올 세상은 그런 조직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만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메이커스'의 시대다. 앞으로 더욱 왕성해질 틈새시장들의 존재는 이러한 '메이커스'들의 양산과 활동에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노력하는 자세 그리고 도전 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로서는 남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평준화의 길 보다는 이렇게 도래할 시대에 맞춰 준비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즉, 이제 '개인 제조업자(메이커스)'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 혹은 기술을 습득하는데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크리스 앤더슨에 따르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있다면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더 좋은 '메이커스'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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