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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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힘이 있다. 비유하자면 자기 땅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 땅을 거닐어 보고는 그 다양함과 다채로운 풍요로움에 놀라 사실은 자기 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구나 여기게 만드는 그런 힘이 말이다. '정의'라는 게 그랬다. 그건 아주 익숙한 말이었고 그만큼 자명한 단어였다. 하지만 이번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니 내가 생각외로 정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정의란 게 정말은 무엇인지 몰랐으니 그만큼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 책 앞부분에는 마이클 센델이 과연 이게 정의로운 상황일까 하고 예로 드는 상황이 나오는데 난 그 중 어느 것도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다 말할 수 없었다. 다 정의로워 보였고 또 그렇지 않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알고보니 그게 내가 정의에 대한 엄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결과였다. 수박의 겉껍질만 핥고는 이게 수박의 맛이구나 하고 느낀 것과 같았다. 그 안에 있을 달콤한 붉은 속살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러한 표면밖에는 모르는 우리에게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맛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럼으로써 어느 것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상황인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이 책은 사유의 엄밀함을 강조한다. 잇달은 사례로 계속 우리가 생각한 것의 반전된 사례를 내놓는 것도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계속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다. 흔히 도저히 사유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아포리아'라고 한다. 마이클 센델이 든 사례를 보면 이러한 아포리아에 자주 직면하게 되는 게 바로 정의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이익 사회다. 여러 많은 집단들이 서로의 이익 추구를 위해 노력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사회인만큼 정의가 필요하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의'의 가치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추구하고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을 제대로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말해지는 정의가 제기 가능한 모든 반론들을 포용하면서 거기에 설득을 위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모든 수준에서 더욱 엄밀하게 사유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정의에 대한 사유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마이클 센델이 모든 관점에서의 정의를 이토록 세세한 사례들로 단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먼저 그는 정의가 궁극적으로 일종의 분배 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사회가 그 구성원 각자에게 어떻게 나누는가에 있어 그 기초가 되는 원리가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움을 얼른 '의(義)'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서양에 있어 정의란 어디까지나 분배란 관계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정의에 관한 모든 현대 논의에 있어 원초적 출발점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역시도 시민들에게 부와 명예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정의를 다룬 것이었다. 결국 여기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나눠야 한다’는 유명한 분배적 정의가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이 분배에 있어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입장의 주요한 정의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종의 정의론의 '본류(本流)'들이다. 대체로 이 본류들은 자신이 가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그 분배에 대한 정의조차 달라지는데 그 추구하는 각각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다.  그렇게 행복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이며 마지막으로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덕' 주의인 것이다.(얼른 와닿지 않는 용어일텐데 마이클 센델 자신이 그렇게 써놓고 있으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쓴다. 사실 이 이름은 보다 '공정하게'에 맞춰진 이름이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와 미덕이론의 차이점은 앞의 두 입장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미덕이론은 오히려 그것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회적 약자 입장에 먼저 서서 그들 스스로 충분히 살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배려해주고 그 다음 분배를 생각하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임으로 그래서 '미덕'이란 이름이 붙는 것이다.)

 마이클 센댈은 이 세가지 본류의 의미와 한계들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물론 독자 머리로 먼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놓치지 않고서 말이다. 그렇게 공리주의는 재화의 효용성 측면에서 정의를 가늠하지만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법이기 때문에 과연 효용성이란 잣대 하나로 뭉뚱그려 계량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들며 자유 지상주의란 무엇보다 이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여로 결정된다고 여겨 그들이 획득한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과연 그 노고를 순전한 개인의 노고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모든 조건이 초기화 된 순수한 의미에서 공정한 출발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두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둘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압도적으로 달랐다. 전자쪽은 부모의 돈 때문에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는 학비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기거할 방도 잘 구하지 못해 편안히 공부를 할 시간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다. 들이는 시간이 다른만큼 그 결과도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건 불문가지다. 자유지상주의는 이런 차이를 무화시킨다.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개인들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자유지상주의의 정당화는 마치 이런 것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덕 이론은 바로 이것을 공격한다. 그런 자유 지상주의의 말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개인들의 차이 때문에 정말 공정성이라는 정의 관념에 투철하고자 한다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뒤에서 따라잡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 가진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항변한다. 내가 어렵게 노력해서 얻은 것들인데 왜 나눠주어야 하냐고 말이다. 요즘 사회 복지를 위해 부유층 증세를 말할 때마다 듣게 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사회로 부터 혜택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으니 그건 사회로 부터 나눠받은 것일뿐 온전한 자기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내 것'의 정당화로 자신이 투자한 노력, 비용을 내세우지만 센델이 예로 든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 뿐이므로 결국 결과에 의해서 좌우될 뿐인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 미리 선험적으로 모두 인정되는 보편의 가치인양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사 그 노력이라고 하는 것도 요즘 금융 투기에서 보듯이 결코 얻는 대가가 노력과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미덕 이론은 이렇게 사회가 나서서 분배가 해주어야 하는 정당성을 한껏 드높여 주지만 그렇다고 '전가의 보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센델에 따르자면, 일단 사회가 전면에 나섰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모두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미 그 극단의 사례를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목도한 바 있다. 사회에 보다 많은 권한을 몰아주는 것은 합리적인 견제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장치가 없을 경우 늘 그렇게 억압적인 사회로 변질할 우려가 있었다. 미덕 이론이 말하는 대로 바람직한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과도한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적절히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사유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가 나서서 이익을 조정하려들면 덜 받은 자들과는 분명히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견제와 균형은 그러한 갈등을 잘 조절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만큼 미덕 이론이 원하는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장치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원칙론만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니 문제라는 것이다. 즉 센델은 이 미덕이론이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론에 그칠 위험을 늘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다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차원에서 하트가 말했듯 개인이란 태어났을 때 부터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완전히 무지의 베일로 가리기엔 불가능하며 되도록 갈등의 소지를 줄이려면 무엇보다 한 개인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가 속한 그 공동체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 최대한 그를 존중해주는 쪽으로 분배하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서사적 정의론을 주장한 찰스 테일러와 함께 그러한 '공동체적 정의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렇게 세 가지 본류가 가진 의미와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정의론에는 왕도가 없음을. 어디까지나 지금도 계속해서 사유로써 채워 나가야 하는 빈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여기에 마이클 센델이 이 책을 쓴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 해서 그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사례로서 우리의 사유를 유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의론이란 우리 모두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먼저 우리 스스로 올바른 정의를 위한 사유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함을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를 위한 하나의 초대장인 것이다.

 그리고 촉발이었다. 이 책이 바탕이 되어 스스로 생각한 정의에 대한 사유들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사유들이 서로 활발하게 오고가는 광장으로 이끄는 손길이었다. 과연 그 바람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는 발간되자마자 우리나라에 거센 돌풍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 책에 자극받아 자신이 생각한 정의론들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그것에.

 정의론이 늘 부단히 채워나가야 하는 사유의 빈자리인만큼 그보다 더 우리에게 요청되는 태도는 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의에 관해 생각하기를 넘어 기꺼이 나 자신의 말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정의가 변절될 때는 언제나 다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거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말하기를 그만 둘 때 언제나 소수는 자신의 뜻대로 정의를 왜곡시키고 그 뜻을 우리마저 따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정의의 왜곡과 변질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질문 자체로 정의의 순수한 이념을 지키는 일이다. 그 물음이 부단히 이어져야 하는 것처럼 센델의 이 책 역시도 늘 그렇게 읽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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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퍼펙트 베이비 - 완벽한 아이를 위한 결정적 조건
EBS <퍼펙트 베이비> 제작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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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말해 현실적으로 육아와 그다지 관계가 없는 나인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무엇보다 1부에 나오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체질이 다르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어도 어떤 이들은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편으론 아주 적게 음식을 먹는데도 오히려 살이 부적 찌는 사람들도 있다. 뭐,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진짜 말하려는 것은 바로 다음에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 과학은 지금까지 대체로 두 가지 이유를 말해왔다. 하나는 유전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된 이유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라온 환경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퍼펙트 베이비'는 여기에 대해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유전도 환경도 결정적인 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펙트 베이비'가 내세우는 새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태아 프로그래밍' 이다. 여기서 태아 프로그래밍이란 말은 임신 중 태아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태아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달라진 데는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고 거기서 무엇을 경험했으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이론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여기엔 역사적 경험이 단단히 한몫했다. 그러니까 세계 제2차 대전 중 네델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0년 겨울, 독일은 네델란드를 침공한다. 하지만 네델란드의 완강한 저항으로 침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겨울이라 식량이 부족할 것을 예상한 독일은 침공에 힘을 쏟지 않고 네델란드 주위로 단단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고립시키고는 그대로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에 돌입한다. 독일의 계산대로 혹한의 겨울 속에서 네델란드 국민들은 튤립 뿌리까지 먹어가면서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게 되고 무려 만여명의 네델란드 사람들이 아사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참혹한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태아 프로그래밍으로 연결된 것일까? 훗날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메디컬센터의 한 여성학자가 당시의 출생 기록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어떻게 되어있을까?'란 호기심에 추적해보니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만이나 당뇨, 심장질환등 성인병 비율이 유독 높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 태어난 이들은 부모에게는 없었던 병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유독 그 때 태어난 이들만이 성인병에 쉽게 걸렸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유전이라 할 수 없었다. 자녀들이 보여준 차이는 자라온 환경이 동일했으므로 환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그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로서 경험한 극심한 굶주림이 이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그렇게 해서 세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실험으로도 밝혀졌다. 임신한 생쥐를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 상황과 똑같은 조건에 놓고 출산할 때까지 관찰한 것이다. 대조를 위해 역시나 임신한 생쥐를 보통의 상황 속에 놓아두고 서로 비교한 결과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임신한 생쥐가 낳은 새끼수는 그렇지 않은 생쥐 보다 훨씬 적었고 그 새끼들의 체중 역시도 보통 새끼 생쥐들 보다 적었다. 즉 임신 중 어떤 상태에 있었으냐가 그 이후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보통 굶주린 가운데 태아 시기를 보내면 저체중으로 출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부터는 이러한 차이가 없어지는데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 상황이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체중으로 태어난 개체는 그렇지 않은 개체에 비해 콜레스트롤은 1,3배, 중성 지방은 1,5배 그리고 내장 지방은 무려 2배나 더 높았다. 즉 그들이 평범하게 태어난 이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은 것은 오로지 살찌우기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저체중은 쉽게 비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태아는 오로지 그 배고픔을 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장기에 대해서만 집중할 뿐 그것과 상관없는 장기는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아가 내버려두는 가장 대표적인 장기가 바로 '췌장'이다. 췌장은 인슐린을 생산한다. 인슐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 미처 소화되지 않은 영양소들은 포도당이 되어 미래를 위해 혈액 속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 포도당을 분해하여 세포 속으로 잘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슐린이기 때문이다. 췌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이 인슐린 분비가 어렵게 되고 그렇게 되면 혈액 속에 포도당이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이게 된다. 그러면 포도당이 넘쳐서 소변으로까지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당뇨'다. 태아적 경험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비만과 당뇨를 불러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그렇게 되도록 선택한 것이 상황이 아니라 태아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태아가 어떤 장기를 더 활발하게 가동시킬 것인가 선택한 것이다. 이는 장기만이 아니다. 여기엔 유전자도 해당된다. POMC란 유전자가 있다. 주로 체내의 지방 세포를 분해하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지방이 분해되지 않고 쌓여 비만에 이르게 된다. 열악한 임신 상황으로 태어난 저체중의 아이들을 조사해보면 공통적으로 바로 이 POMC 유전자 기능이 꺼져있음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태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때는 필요없었던 POMC 기능을 꺼버린 탓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유전자는 어디까지나 타고나는 것인데 어떻게 후천적으로 태아 마음대로 꺼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것이다.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 유전자의 DNA 정보는 주로 'GATC'라는 네 개의 기호로 코드화 되어 저장되는데, 훗날 이 'C'에서 'CH3', 즉 '메탈기'라는 게 붙어 있는 것과 붙어 있지 않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태어날 때 부터 그리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처한 환경에 따라 붙어 있거나 떨어지거나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죽을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CH3 존재 덕분에 상황에 따라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의 발견으로 유전자 기능 또한 개체가 얼마든지 임의적으로 스위치를 껐다 켜듯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후성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이 후성 유전학의 도움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전혀 그런 유전 인자가 없더라도 태아가 어떤 후천적인 상황에 처함에 따라 새로이 유전 인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전혀 그런 병력이 없더라도 태아는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퍼펙트 베이비'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다.

 

 그 뿐 아니라, 태아적 경험이 이후의 삶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비록 지금이 극심한 저출산 시대이긴 하지만 정부가 하는대로 그저 무턱대고 출산의 양만 늘릴 것이 아니라 출산의 질을 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임을 요청한다. 임신한 여성과 가정에 대한 정책으로 배려되지 아니하면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증가로 인한 장차 높은 성인병 환자의 급증으로 국가의 의료 부담마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부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이제라도 임부와 그 가정들이 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임신 환경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되지 않나 생각된다. '퍼펙트 베이비'는 생각 이상으로 부모와 자식이 끈끈한 연대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한 자녀를 '퍼펙트 베이비'로 만드는 데 있어 그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인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요즘은 점점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을 소홀히하는 추세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라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자각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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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데 아파트 관리소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파트 전기 관리부입니다. 지금 당장 에어콘 사용을 중지해 주세요. 전력이 과부하 상태입니다. 위험합니다. 당장 에어콘을 꺼주세요."

  몇 번이나 말한다. 에어콘을 꺼달라고...

 

  오늘의 현실도 이런 절박한 경고가 필요한 것 같다.

  특히나 UPPER CLASS들에게...

  그들의 탐욕, 독선, 거짓과 협잡 그리고 오만으로

  시스템이 잔뜩 과부하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들끓고

  과부화된 시스템은 그 하중을 견뎌낼 여력이 없다.

  이러다 곧 블랙 아웃이 올지 모른다.

 

  이번의 신간 추천은 특히나 그런 경고를 담은 작품들을 골라본다.

 

 

 

 피에르 르메트르가 돌아왔다. 

 이미 신간평가단으로 두 번이나 만나본 작가이기도 하다.

 그간 소개된 '알렉스'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그가 현재 생존하는 유럽 스릴러 작가들 중에서 재미와 깊이

 두 마리 토끼를 가장 잘 잡고 있는 작가로 여기게 해 주었다.

 그는 특히 동시대의 현안들을 스릴러로 잘 버무려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 더욱 이번에 나온

 '실업자'에게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현재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가장 불길한 그림자는 '실업자'이다.

 해마다 높아지는 실업률, 그만큼 더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는

곳곳에서 갈등의 폭발을 불러 일으키는 뇌관이 되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실업자'는 바로 그 시한 폭탄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그것도 정면으로.

이 소설은 유럽미스터리소설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그 심사평이 인상적이다.

"직장인들이 겪는 절망과 위기감,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잔혹하고 지독하게 묘사해냈다" "소름끼치는 것은 주인공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데 앞서 만났던 두 작품에서 르메트르의 심리 묘사가 얼마나 치밀한지 여실히 맛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은 이 작품에 더욱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어쩌면 피에르 르메트르가 보내는 절박한 경고일지도 모를 이 소설을 다시금 만나고 싶다.

 

 

 신간평가단 파트장이 하는 일중 하나는 월초에 이루어지는 신간 추천을 집계하는 일이다. 이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이미 한 번 집계를 내봤는데 한국 문학쪽에선 유독 두 작품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나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이고

 다른 하나는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두 소설엔 공통점이 있다. '파과'는 60대의 여성 청부살인업자를 다룬 이야기이고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은퇴한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그 처지 역시 비슷하다. '파과'의 여성 청부살인업자는 한 때 킬러계의 대모라고 불리었으나 지금은 제목 그래도 남들에게 팔 수 없는 '파과'의 존재이고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역시 알츠하이머로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노쇠와 결함으로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 자체의 알레고리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론 이건 이번 대선으로 전면에 드러난 이 땅의 50대 이상에 대한 조롱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스친다. 아무튼 동시에 이렇게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게 내겐 심상치 않게 보인다. 딱히 팔릴만한 이야기라서 나온 건 결코 아니다. 생각해보면 징후는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니까 MB 이후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맹공으로 부터 우리의 살이가 심각하게 격침당한 뒤로 한국 문학은 과격한 경향을 때때로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제 여유롭게 사회의 현실을 담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때부터 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단면을 문학이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왔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현 시대의 소통법이란 폭력이고 생존법은 살인이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작품 모두가 다 내 관심 대상이다. 이미 '파과'는 가지고 있기에 이번 신간 추천에는 '살인자의 기억법'을 올린다. 

 

 

 새로나온 책 리스트에서 '개의 심장'을 봤을 때,

 난 이 책이 가장 압도적인 추천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헌책방을 뒤지면서 오매불망 찾았던 책,

 그토록 새로 발간되기를 기다렸던 책 중 하나였으니까.

 (설마, 나만 목빠지게 기다린 건 아니겠지?...)

 

 예상만큼의 추천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현재 순위가 4위니

 역시나 나만큼 이 책을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미하일 불가꼬프의 이 걸작은 개에게 사람의 생식기와 뇌를 이식한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개가 점점 사람으로 각성하는가 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갈등을 일으킨다.

 

 개에게 사람의 생식기와 두뇌를 이식한다는 것은 이념 주입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고 그 개가 사람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서 대립관계가 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작품을 통해 늘 소비에트 사회를 풍자함으로써 독재로 나아가는 사회에 경고를 보냈던 그이니만큼 이 작품엔 어떤 그의 목소리가 투영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전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책이니 당연 추천이다.

 

 

 현재 집계에서 외국문학쪽 선두는 바로 이 책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여름, 거짓말'

 시공사에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데 이 책은 '사랑의 도피'에 이은 두번째 단편집이다. 개인적으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장편보다 단편을 더 좋아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두고 '감정의 고고학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오랜 시간 내재해온 인간 보편의 감정들을 잘 파헤치고 복원해낸다는 의미다. 난 그런 섬세한 발굴과 복원의 붓 터치가 단편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느낀다.

 그래서 단편을 더 좋아한다. 아직 국내에 한번도 소개되지 않은 단편들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므로 당연히 관심 대상이다. 앞서 말한 그 인간 보편의 감정들 중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이 대표적으로 형상화하는 건 죄와 책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의 소설들은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늘 공전하는 궤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소포클레스의 '오디이푸스'를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범 국가 독일인이라면 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감각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시점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 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시대란 죄는 있으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무리들로 가득한 시대가 아닌가.

 일본의 아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저 UPPER CLASS들 하며...

 남들에겐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만 예외가 되려는 존재들을 칸트는 '악마'라고 단적으로 정의내렸다. 정말 그런 악마들이 너무나도 많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참으로 진저리날 정도로...

 이런 시대적 상황이 다시 한 번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들을 호출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읽고 싶다.

 

 여기까지 저녁에 썼고

 지금은,

 

 새벽 세시가 좀 넘었다.

 덥고 덥고 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앉은 의자의 절반을 고양이가 누워서 차지하고 있다.

 지금 난 엉덩이를 거의 의자에 살짝 걸친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자판 위로 돌아다녀서 쓸 수 없게 만들더니

 (제발 손가락은 깨물지마! 발가락도!...)

 이제는 이렇게 아슬아슬한 포즈로 글을 쓰게 하는구나...

 

 다시 신간평가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늘 시작할 땐 이번엔 진짜 제대로 활동해보자 마음먹는데

 끝날 때 되새겨보면 항상 도루묵이었던 것 같다.

 이번엔 그렇게 안되도록 좀 채찍질을 매섭게 가해봐야겠다.

 

 

 아무튼 13기 소설 신간평가단 여러분들 정말 반갑고 환영합니다.

 앞으로 더불어 좋은 추억들을 많이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마음으로 노래 하나를 선물할까 합니다.

 좀 오래된 밴드인 RENAISSANCE의 'CLOSER THAN YESTERDAY'란 노래입니다.

 

 

 

As morning leaves the night
Opening my eyes
I feel that you are close to me
And yet your heart is time away
But I can't hold a dream
That sleeps within my yesterdays
And so coming very close now
I see my destiny
Is to make you part of me
And to hope that you might be
Pure and free

[Chorus:]
Leave memories on the wind
To spend moments in endless flight
Held over by all you mean
I feel you nearer the darkest night
Closer now, than yesterday

Hoping for a chance
To find you loving me
In the distance searching there I'll be
In time

you may come to me
To fall into the world
That once we left so far behind
To learn

with each passing moment
As tomorrow comes for me
In the shadow of my life
For eternity to find
The light I see

 

[Refrain]

Make believe, Life is just a story.

you may live in wonder,

Of all that's been before

You are all, all that I believe in,

All I really need,

Inside for ever more.

 

 가사에 나오듯이

 이 신간평가단 활동을 통해 인생의 그늘에서 영원히 찾아 다니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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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 - 내가 그린 일러스트로 그림엽서와 카드 만들기 행복한 손놀이
아키쿠사 아이, 고이즈미 사요 지음, 허앵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손으로 손수 만든 카드 참 만나보기가 힘들죠?

어릴때만 해도 겨울방학만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다 신년 카드다 해서 이것저것 손수 만들던 기억이 참 새록새록한데...

수채색연필의 느낌 참 좋아합니다.

요즘은 디지털로 뭐든 다 매끄럽게 잘 나와서 오돌토돌한 손 맛이 느껴지는 그림들이 오히려 더 그립더군요. 아카쿠사 아이와 고이즈미 사요가 함께 지은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이란 책을 만났을 때 제 두 눈이 '하트 뿅뿅'이 되었던 것도 그런 아날로그한 카드에 대한 추억과 손맛 가득 느껴지는 수채색연필의 느낌 때문이었죠.


이렇게 만든 사람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카드들 만들어 보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은 그림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런 카드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입니다.

첫 장을 열면 저렇게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종류의 수채색연필과 함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24가지의 색깔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왼쪽 위 모퉁이에 있는 빨간 색연필 통은 제가 가지고 있는 수채 색연필입니다. 대표 수채색연필중 하나로 파버카스텔사의 24색 세트가 소개되어 있어 제가 가지고 있는 12색 세트를 한번 슬쩍 넣어봤어요^ ^



수채색연필은 무엇보다 색의 배합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죠. 그래서 24색이라 하더라도 배합에 따라 얼마든지 무궁무진한 색깔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병아리들처럼 말이죠^ ^


굵기도 다양하게 해서 선 터치의 느낌을 다변화시킬 수 있고 수채물감과 무리없이 어울리기 때문에 배경은 붓을 통해 칠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죠. 또한 종이의 질감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종이를 통한 효과도 노릴 수 있기도 하구요. 뭐, 그야말로 수채색연필은 손수 만든 카드에는 더없이 적합한 도구인 셈이죠.



책은 사계절 어느 때라도 계절에 맞는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로 나눠 수채색연필로 일러스트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벗꽃 풍경을 수채 색연필로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봄하면 벗꽃이겠죠^ ^

보시다시피 단계별로 나누어 그림 그리는 과정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기에 그림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고 쉽게 따라할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번엔 여름.
여름하면 뭐니뭐니해도 역시 바다의 풍경이겠죠. 바다색을 나타내는 게 멋지네요. 이런 카드를 여름에 받게 되면 왠지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요.

이번엔 가을. 도토리와 귀여운 다람쥐만큼 정감있는 가을을 전해주는 그림도 없을 것 같아요.

오른쪽 윗 부분의 수채색연필로 다람쥐를 그리는 방법 독특하네요. 이렇게 또 한 수 배웁니다.


겨울엔 역시 크리스마스 카드와 신년 카드겠죠. 이건 십이지신을 모델로 해서 만든 카드입니다. 매년 그 해에 해당되는 동물로 손수 그려진 카드를 보내면 그냥 사서 보내는 것보다 더욱 도타운 정이 쌓일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각 계절마다 어울리는 카드를 그려 보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그 과정 역시 친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쉽게 그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수채색연필의 매력이 더욱 살아나는 쪽은 카드 보다는 역시 여행할 때 스케치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여행할 때마다 자주 그렇게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책 역시도 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더군요.


여행할 때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이렇게 수채색연필로 남기는 것은 어떨까요?

훗날 그 풍경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사진보다 더욱 잘 살아날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작은 스케치북 같은 걸 자주 들고다니곤 합니다. 이 책으로 풍경 그리는 법을 익혀두셔서 여행할 때 직접 본 풍경을 그려보시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되실거에요.


이렇게 말이죠. 확실히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이런 그림은 풍경과의 내밀한 교감에서 우러나온 것과 같으니 사진보다 더욱 진하게 그 때 본 풍경의 느낌을 진하게 되살려 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수채 색연필에 익숙해지시면 보다 난이도가 있는 꽃그림에도 이렇게 도전이 가능합니다. 꽃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수채색연필로 직접 자기가 좋아하는 꽃그림을 그려볼 수 있으실겁니다.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은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아기자기한 정감이 넘치며 그리는 이의 마음 또한 그 결마다 한껏 드러날 수 있는 그림을 직접 그려볼 수 있도록 쉽고도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아마도 별 무리없이 흠뻑 그림의 세계에 빠져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러니 그동안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던 분들은 이 책을 통해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어떨까 싶어요.


이토록 다양한 수채색연필의 세계에!

여기에 있는 그림들을 모두 이 책을 통해 다 그려볼 수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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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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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끝났다. 날들은 온기를 잃었다. 사람들로 가득 붐비던 여름의 해변은 황량하게 버려졌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가버린 여름의 축제를 아쉬움으로 곱씹게 만드는 계절,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한층 더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

 

 75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미국은 그런 계절이었다. 72년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75년 베트남 전쟁 패배로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나라와 거기에 투영되었던 이상이나 꿈들은 광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윙윙' 메마른 바람소리만 맴돌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공허와 회한만을 가득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마치 이것의 반영이기라도 하듯, 이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비극은 모두 가을에 일어난다. 소설의 첫 죽음인,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던 여자 아이 모니카가 죽은 건 가을이었다. 뒤이어 낙마로 달랜더 부인의 아들 레슬리가 죽었던 것도 가을이었다. 여주인공 네드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때도 가을이었고 네드라가 자신의 남편 비리를 떠났을 때도 그랬다. 마치 운명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네드라는 아예 가을에 죽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공교로운 시간의 겹침은 아무래도 우연의 소산이라 보기는 힘들고 그 자체로 분명히 하나의 의도를 드러낸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70년대의 암울했던 미국의 분위기에 대한 비유이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의 말을 살짝 인용하자면,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었던 '모든 단단한 것들은 이제 대기 속으로 녹아 흩어져' 버렸으며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암시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은 58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20년 가까운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이 보여주는 그들의 궤적은 마치 이제 곧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황혼의 아스라한 마지막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가버린 미국에 대한 레퀴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진혼곡이 사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듯 이 소설 역시 그저 지나간 것의 씁쓸함만 되새기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70년대 초반 미국이 그랬듯이 이제 곧 닥쳐올 희망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둔 밤 가운데 어떻게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욱 말해주려 한다고 생각된다. 즉 이 소설은 주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그것은 갑자기 닥쳐온 밀물에 느닷없이 무너지는 모래성만큼이나 연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해변으로 떠 밀려온 유실물들로 생존해 나가듯이 삶이 아무리 산산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 파편 속에서나마 삶의 지속을 위한 교훈은 없는지 또한 찾아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끝이라고 해서 그냥 닫혀진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마저 포용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그 끝을 계속 열어보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나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항로이다.

 

 그렇게 소설은 과연 처음엔 참으로 단단하고 완벽한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대함을 믿고 있는' 비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p.65)' 여기며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나날을 그리며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리라 생각하고 있고 '네드라'는 '식사와 침대 시트 그리고 옷'이라는 오로지 '실존의 핵심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가사와 거기에서 비롯된 허기를 메워줄 뉴욕에서의 사치스러운 쇼핑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50년대 중산층 백인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그 'WASP'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50년대는 분명 그랬다. 냉전시대 덕분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의 승리로 고양되었던 미국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중산층 백인 가정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그저 가벼운 나날들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와서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가려졌었던 인권과 평등 문제가 불궈지고 거기에 차츰 사람들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이제 그런 미국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인권과 평등 모두에 있어서 사각지대에 있던 흑인과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엄과 권리를 부르짖었고 거기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대처로 인해 국가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로부터 개인의 전적인 해방을 주장하는 히피즘도 나타났다. 60년대에 들어와 이제는 전처럼 '파티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픈 욕망'도 없고 '유명한 사람들을 알고 싶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네드라의 변화는 정확히 이를 나타낸다. 그녀는 아울러 '혼자 있는 것'이나 '나이 드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히피즘이 바로 그랬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히피즘의 모토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네드라는 남편이 아닌 남자 지반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행복한 부부란 건 지루해. 더 이상 믿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 행복한 부부란 건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고'하면서 남편 비리와의 이혼을 생각한다. 비리 역시 카야란 여성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되면서 결혼을 이미 선택한 이상 다른 것은 할 수 없게 만드는 굴레로 여긴다. 균열은 이렇게 찾아왔다. 균열로 두 갈래로 나뉘어버린 흐름이 물과 기름처럼 전혀 만나지 못했던 당시의 미국이 그랬듯이 비리와 네드라의 결혼 역시도 그저 의무감에서 지속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파국의 가을이 찾아왔고 그토록 완벽하고 견고해 보였던 비르와 네드라의 결혼은 대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똑같이 60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케네디는 암살 당하고 그동안 꿈꾸었던 모든 이상에 대한 차가운 마지막 비웃음이기라도 하듯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손에 의해 벌어진다.

 

 여전히 50년대의 미국을 믿는 중산층 백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비리는 그제서야 묻는다.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 다정하고 쾌활한 웃음이 넘치던 애머갠셋의 집은 이제 비워졌다. 결국 그는 네드라에 대한 기다림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을 팔아버린다. 거기서 보냈던 완벽한 여름은 이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계절에 열여섯의 네르다는 당시에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탈출했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한껏 열린 계절. 하지만 그 여름의 의미는 이제 변질되었다. 네드라는 애머갯센의 집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또다시 탈출을 꿈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자신의 내적인 삶에 충실하기 보다는 비리의 고백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p.67)

 

 거기서 환한 햇살은 이제 더 이상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주목을 향한 열망에 가리워져 있었던 삶의 진실을 보게 만든다. 빛 가운데서 은폐는 더 이상 힘을 잃는다. 이는 소설 초반부터 이미 나와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비리와 네드라의 집을 묘사할 때 부터 말이다.

 

 강가의 집은 온실의 지붕을 따라 철제 장식이 있는 집이다. 강가의 집이라 오후 햇살을 받기에는 지대가 너무 낮았다. (...) 집은 정오가 되면 찬란한 햇살에 잠겼다. 칠이 더러워지거나 벗겨진 곳이 눈에 뛴다.(p. 24)

 

 햇살은 이렇게 완벽한 가정이 사실은 어떤 위장임을 드러낸다. 두번째 문장에서 가정이 환영에 불과한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것은 햇살을 충분히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걸 은연중 드러내기도 한다. 햇살의 이러한 의미는 이보다 먼저 소개된 '어젯밤'에 나오는 첫단편인 '혜성'에서도 암시된다. 그 단편의 주제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인데 여자주인공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러다 환한 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몸으로 깨닫게 된다. 빛은 이렇게 진실을 드러내는 창구가 된다. 네드라는 여름의 환한 햇살 속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진실과 진정한 자기 욕망을 깨닫는다. 네드라에 대한 비리의 미련은 그런 빛을 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한 봄볕 속에서 자신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공교롭게도 그 때의 깨달음에 이르게 한 건 거북이다. 사실 그 거북이는 이전에도 한 번 나타났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P. 67)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이건 이 소설의 대전제다. 두 번 등장하는 거북이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려 하는 것은 그 전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북이와 마지막의 거북이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인용된 문장의 거북이는 먼 눈으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저 생각없이 걷고만 있다. 한 마디로 이 거북이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길을 선택한 순간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비리가 그랬다. 그는 한 번 가정을 선택했다면 아예 다른 선택은 생각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카야에 대한 미련도 아이들을 위해서 접고 이탈리아에서의 다른 여성과의 만남으로 또 한 번 삶의 변화를 맞딱드렸을 때 조차 여전히 네드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지막의 거북이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슬처럼 맑은, 연한 색의 눈이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고 '등딱지 속으로 몸을' 숨긴다. 비리가 땅에 내려놓기까지 했으나 움직이지도 않는다. 걷지 않는 거북. 주위의 상황을 가만히 헤아리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그걸 보고 비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은 숨을 쉬는 듯했다. 마치 그를 알아보고 숲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변화를 느꼈다. 깊게 감사하듯 감동을 느꼈다. 피가 머리를 빠져나와 온몸에 돌았다.(p. 436)

 

 여기에서는 빛의 변화도 감지된다. 처음 거북이를 떠올렸을 때 비리는 이제 막 비쳐드는 아침 햇살 속에 있었다.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햇빛이었기 때문에 모처럼 깨닫게 된 삶의 대전제에 대해서도 그릇된 태도를 지향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는 오래도록 고통을 느낀다.  그가 그 햇살을 '차갑게 느낀'(p.65)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포근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였다.

 

 이미 이 소설이 새로이 열려는 시작이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암시되고 말았다. 그렇다. '변화를 받아들임'이다. 손 끝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쥐려 애쓰지 않는 것. 방생을 하듯 닥쳐온 변화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제임스 설터가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그마나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언이었다. 소설에서 햇살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햇살은 앞서도 진실을 밝히는 창구가 되었듯 다른 여러가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 네르다는 사랑스러운 햇살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녀의 딸 프랑카와 함께 햇살 속에 있을 때는 성스러운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햇살일까? 이는 그저 가을이란 계절(처음에 난 이 소설을 가을의 소설이라 말했다.)이 여름날 그 많았던 햇살을 그리워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 눈부심, 따스함 보다 사실은 그 충만함 때문이다. 빛은 장소와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자신을 나눠주는 것이 바로 햇빛이다. 그만큼 타인에게 열려있고 다른 세계에 열려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햇빛이다. 제임스 설터가 햇빛을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때의 미국이야 말로 필요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비리와 네드라처럼 60년대의 미국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때의 균열은 그때까지의 거짓된 환영을 부수고 새로이 이상적인 미국을 열 수 있는 변화의 계기도 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닥쳐온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과거의 가치를 고수했고 다른 변화를 이끌었던 이들조차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보단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국 미국은 제멋대로 뻗어나간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터는 거기에 다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노인 화가처럼 여전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잎새를 붙이려 한다. '끝이 아니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 걸어야 할 땐 걷고, 웅크릴 땐 웅크리는, 그렇게 세계를 두루 살피고 변화에 나를 열며 타인과 서로 교감하자.'는 잎새를. 때문에 이 소설은 환멸을 딛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세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만큼 환멸도 반복되었다. 미국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90년대 초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릭 루디라는 작가는 그 때 다시 한 번 붕괴된 가치관을 제임스 설터처럼 70년대의 한 부부에게 닥쳐온 가치관의 위기에 빗대어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게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만든 이안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었던 '아이스 스톰' 이었다. 어쩌면 릭 루디는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들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의 위기를 그리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위기를 형상화하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나날'이 나온 2년 후에 영화 감독 로버트 브레송은 '아마도 악마가'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설터가 느꼈던 비슷한 환멸을 드러낸 영화로서 여기엔 어른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소년들이며 그들은 그 어떤 이념도 믿을 수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 한다. 더이상 어른들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로버트 브레송은 제임스 설터와 우리를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총체적 꿈은 깨어졌으며 우리는 그 파편들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공유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제임스 설터의 세밀화가 그저 개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는 분명한 동시대에 대한 언급이었고 대안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유통기한이 70년대에 머무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시대에 대한 환멸만큼이나 이 소설의 생명력 또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릭 루디가 '아이스 스톰'에서 다시 한 번 비슷한 세계로 들어간 것과도 같이 2001년의 9.11에서도 그 뒤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또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에서도 늘 다시금 들춰지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그만큼의 희망 역시 깃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한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러리라 생각한다. 시대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이 몸을 가위처럼 누를 때마다 소설 속 그녀가 잎새를 보았듯이 그 세밀하고 사려깊은 문장들 틈에서 자신만의 희망 광맥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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