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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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이 일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해였듯이 1995년도 그랬다.

아니, 그 충격만 놓고 보자면 사실 1995년이 오히려 2001년 보다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전후(Post World War 2)에 받은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백했다. 전후로 부터 40년간 이어지던 일본의 안전신화가 붕괴하는 것 같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충격으로 자신의 문학에 대한 근본 태도마저 바꿔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다. 1995년은 일본 지식인 사회 전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모두들 현재의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했다. 그 1995년, 일본에는 두 가지 비극이 일어났다. 하나는 천재지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재였다. 그 해 1월 17일 한신과 고베는 거의 도시 전체가 붕괴될 정도로 엄청난 대지진을 겪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0일 도쿄의 한 지하철 안에서 옴진리교 신도들이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승무원과 승객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이 사망했고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후 자국민이 자국민에 대해 일으킨 사상 최대의 테러였다. 전자 보다 후자가 끼친 충격이 더 컸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은 천재(天災)인데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각오하고 있었던 재앙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달랐다. 인간의 짓이었다. 그것도 일본인이 일본인에 대해 아무 이유도 없이 집단적인 무차별 살포를 한 사건이었다. 1968년 전공투에 의한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로 겪어보지 못했던 테러의 경험이었다. 일본은 더욱 휘청거렸다. 누군가 그저 잔잔하기만 한 일본 사회라는 수면에 문득 거대한 돌덩이를 내던진 것과 같았다. 안전은 그때까지 일본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일본은 안전하지 않았다. 더구나 옴진리교의 사고 체계조차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쓰카 에이지는 '전후 사회 내내 우리가 눈앞을 지나쳐 가는 다양한 사건을 그저 내버려 둘 뿐이고 그것들을 역사에 수렴시키는 절차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었던 것의 증좌'라고 하면서 이러한 옴진리교의 사상이 사실은 '오타쿠들의 하위문화로 부터 강력하게 영향받은 것'이라 말했다. SF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으로 부터 형성되어진, 부정적인 세계라면 무조건 새로이 부팅부터 시키고 보는 '리셋'과 현실 보다는 또 다른 세계가 더욱 긍정적이라는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사건을 낳았다고 보았다. 오타쿠들은 거품 경제 동안 마치 인큐베이터 속 태아처럼 편안히 일상을 누려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자신의 취미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회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안정에 취해온 결과였다. 사와라기 노이는 말하길 옴진리교 사건은 '역사가 기능부전에 빠진 장소에서 포스트 모던의 방법을 무제한으로 밀고 나가면 역사에 일격을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닫힌 원환'에 더한층 강고하게 묶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80년대 아사다 아키라가 '도주론'을 시작으로 열어젖힌 '뉴아카데미즘'이 일본의 변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들여왔던 이념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저 표피적으로 소비되면서 오히려 80년대들어 왕성해지기 시작한 일본 소비 사회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비를 찬양했고 그 소비를 통해 일본인들이 새로이 정체성을 써나가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변화는 커녕 안정과 향락에 더욱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일본은 죽 그 상태 그대로 흘러왔다. 그 어떤 수정의 시도도 하지 않고 고인 물로 있었던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옴진리교가 바로 그 결과라고 말했다. 고인 물은 필히 썩기 마련이다. 옴진리교 사건은 그 부패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계속 말한다. 일본은 결코 변하지도 않고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변했다고 생각해도 실은 변하지 않은, 그러므로 지금도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나쁜 장소'라고.

 

 그렇게 1995년의 사건은 일본이 다만 썩은 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생각해야 했다. 선택해야 했다.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위기는 기회다. 그 말 그대로 이건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면 그 때까지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부'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성하게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경제적 곤란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는 이들은 스스로를 상황에 길들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일본은 모처럼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 수구적으로 되어 버린다. 후쿠다 가즈야는 숙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무시되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다시금 복권되기 시작한다. 일본 국내 가요들이 외국 가요들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고 일본 전통 가요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가요들보다 더 많은 각광을 받게 된다. 고이즈미는 대중들의 지지 속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긍지를 가지라고 역설한다. 일본은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겁많은 거북이가 자극을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듯 일본도 그랬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일본은 2000년대를 보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결정적 파국인 2011년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맞았다. 결국 '폐쇄에의 집착은 늘 파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라는 사와라기 노이의 말은 옳았다. 그 모든 것을 보아왔던 이들에게 이건 차라리 단죄였다. 한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스스로 저버린 것에 대한. 그래서 그 아픔이 더욱 비통했는지도 모른다.

 

 

 

 

 

 

 새삼 이렇게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던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이번에 나온 온다 리쿠의 소설, 'Q&A'가 사실은 도쿄 지하철 내 사린 가스 테러를 다시금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M 쇼핑몰이라는 것으로 적당히 윤색하기는 했지만 이야기는 분명히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사건이 바로 그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오로지 질문과 대답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사린 가스 테러와는 달리 사건의 구체적 원인도 주동자도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인터뷰가 시작된 것도 그 탓이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도망가는 도중 다치거나 짓밟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렇다할 만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날 M 쇼핑몰 근저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던 이들을 번갈아가며 인터뷰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건에 가까이 있었던 자라도 멀리 있는 자들만큼이나 사건이 일어난 이유나 그걸 범한 자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건 그대로 수수께끼로 남는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공간으로...

 

 왜 온다 리쿠는 사린 가스 테러를 가져왔음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정작 그 원인과 주동자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침묵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 대화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응, 여기가 딱 블랙홀이야. M이란 큰마트 있잖아? 나가는 데 보이는 거기. 2월에 그런 큰 참사가 있고나서 지금은 영업 안 하지만. 보아하니 지형이란 입지 문제로 그 건물이 전파를 가로막는 모양이야."

 아무리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집, 이 건물 전체에 휴대전화가 안 터져. 진짜야. 전화기 들고 건물 안이랑 주위를 걸어 다녀봤는 걸."(P. 144 ~ 145)

 

 소통 불능. 이것이 핵심이다. 트라우마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그것은 마치 블랙홀과도 같이 모든 이해를 위한 노력들을 빨아들여 무화시켜 버린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바로 '외부'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서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바로 그 존재인 것이다. 이로써 온다 리쿠가 왜 현실의 사건을 가져오면서도 그 이유와 행위자에 대해선 침묵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건 일종의 교정이다. 그러니까 95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수구와 보신의 원인으로 전락시켜버린 과거 행위에 대한 교정인 것이다. 이는 소설 속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확인된다.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결국 우리가 죽인 겁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에 찍혀 있던 많은 사람을. 당신들도 공범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그들을 죽인 겁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이미 여러 번 설명드렸을텐데요. 증오의 전파, 공포의 전염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의 기대 탓이라고 해도 될테죠. 이렇게 폐쇄된 시대에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을 잠시 잊고 열중할 수 있는 순간을 모두가 기다렸던 겁니다."(P. 135)

 

 이건 '닫힌 폐쇄가 파국을 불러왔다'며 사와라기 노이가 사린 가스 테러에 대해서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닌가. 때문에 온다 리쿠는 연어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내부로 편입되고 말았던 그 사건을 진정한 외부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외부'란 온다 리쿠에게 있어 중요하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가라타니 고진이 상정했듯 구원의 가능성을 배태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00년에 나온 전작 '달의 뒷면'이 그녀의 외부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달의 뒷면'은 미국 작가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대로 인간을 진짜와 똑같이 복제하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 존재들을 잭 피니가 했던 대로 부정과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달의 뒷면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인류의 다음 밤, 새로운 시작의 밤이." 이토록 그녀는 '외부'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지운 것이다. 사건의 이유와 행위자들을. 그것을 절대적으로 '외부'의 것으로 남겨두기 위해.

 

 절대적 외부가 되면 무엇이 되는가? 그건 하나의 빗금이 된다. 단절을 가져온다. 단절은 무엇인가? 나의 분리이다. 내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것. 즉 객체화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선악과'가 그랬다. 선악과를 가장 먼저 따먹은 하와는 자신의 알몸부터 가렸다. 선악과 때문에 새삼 아담 앞에서 그녀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아담으로 부터의 분리였고 하나님이 만든 세계로 부터의 분리였다. 그렇게 동떨어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란 존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녀가 육체를 가림은 그녀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오로지 자신으로서 보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단절이 보는 이를 보여지는 이로 만든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외부'는 그렇게 거울이 되어 바깥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이제 스스로의 내부로 되돌린다. '외부'는 자신과의 소통은 거부하는 대신 보는 이들 스스로 소통하는 것으로 이끈다. 그들은 '외부'의 대면을 통해 이제 스스로와의 대면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에 담겨져 있는 인터뷰들은 모두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온다 리쿠는 섬세하게도 인터뷰를 당하는 자들이 사건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고백한다. 그 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부인은 그 사건으로 매미를 잡아먹는 이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렇게 대답한다. 어쩌면 그건 그 때 불륜의 대상이었던 남자 아내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좋을 내면의 고백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어떤 건 마치 넘쳐 흘러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변한다. 그들은 사건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타인들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모습 또한 반추하게 된다. 사실 인터뷰의 진정한 기능은 그것의 확인이다. 외부의 것을 진정한 외부로 남겨두었을 경우 우리들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들여다 보게 하는. 그렇게 온다 리쿠의 'Q&A'는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욱 되물어 보는 소설인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향을 담는다. 어차피 외부를 통해 변화를 받아들임은 이상론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했음인지 소설에는 그 때 현실의 일본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더구나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존재들을 더욱 많이 확인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사건의 진실로 다가갈수록 더욱 그렇다. 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교착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대로 그 이후 일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때의 일본이 온갖 이론들을 가지고 외부와의 '교통'을 거절하고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걸 정당화했듯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그러하니까. 아예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그 외부의 힘을 이용하려들기까지 한다. 이로써 온다 리쿠는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것이 가리고 있었던 이면의 진실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그건 '타자의 배제'다. 그들에게서 타자들은 존중도 배려도 받지 못한다. 타인들의 비극은 자신의 행운을 실감할 좋은 기회가 될 뿐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폐쇄된 현재에로의 갇힘이 얼마나 타자를 배제하는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람을 죽일 때만 그런 게 아냐. 아주 나쁜 일이 있었을 때 남탓으로 돌리지 못하면 괴롭잖아? 절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구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편하지.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는 게 훨씬 편해. 그런 때를 위해 신이 있는거야. 난 알았어. 사람은 타인을 죽이는 동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남을 죽이기 쉽게 하려고 신을 만든거야.(P. 303)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하는 이는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이면서 그 사실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자다. 그렇다. 이 자는 신이다. 하지만 폐쇄된 현실에 갇히고 싶어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신이다. 외부를 인정하지 않는, 변화를 거부하는, 오로지 단일한 세계에서 나홀로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신인 것이다. 그 신이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죽일 수 있다고. 이 말은 그대로 이 작품이 쓰여질 때까지도 아무런 자성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제만 일관해오던 일본에 대해 온다 리쿠가 내린 단적인 정의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바로 그런 나라라고.

 결국 그 신은 사와라기 노이가 말하고 온다 리쿠가 화답했듯이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외부'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통해 온다 리쿠는 타자에 대한 배제가 바로 자신의 파멸로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킨다. 이 부각은 그 선명해진 주제로 인해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변화의 촉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소설은 2004년에 나왔다. 2004년 일본의 아베 내각은 헌법을 고쳐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이 능동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려했다. 이게 온다 리쿠에 대한 일본의 대답이었다. 그랬던 일본은 결국 2011년 3월 11일 미증유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실수하는 자들도 용서하지 않는다.

 

 흔히 온다 리쿠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환상적인 작품을 주로 쓰는 작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Q&A'로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녀야말로 늘 동시대의 일본에 대해 사유하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면모는 이전에 나온 '달의 뒷면'에서도 이미 엿보였으나 이번 작품에선 더욱 전면으로 드러나 있었다. 위에서 당시에 이루어졌던 일본 지식인들의 논의를 길게 설명했던 것도 'Q&A'가 바로 그 논의를 적극 반영한 것임을 나타냄과 아울러 온다 리쿠가 동시대에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하여 예민한 작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개인적으로 'Q&A'는 온다 리쿠를 재평가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온다 리쿠는 일본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참으로 갑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베 내각은 여전히 폐쇄된 원환에서 나오려 하지 않으며 이번 참의원 선거로도 드러났듯이 일본 국민들은 또 그걸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형편이니.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번 잘못된 흐름은 여간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작 그 계기가 찾아왔을 때 보다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Q&A'를 들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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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8-2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3페이지에 저도 띠지 붙여놨답니다. 많이 인상 깊었거든요.

Q&A는 몇 년 동안 봐왔던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이나 직감력은 항상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더군요. 참 무서웠어요... 읽으면서.
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거든요.

일본의 화산 폭발과 원전 사태, 그들의 암울함은 불안정한 섬나라에서 나온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오다쿠도 그렇고 속 마음을 안 보이는 태도도 그렇고 극단과 극단을 흐르는 문화도 그렇고. 처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참사에 대한 묘사도 그랬지만,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넘치는 전개도 굉장히 다가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뭐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어요, Q&A는.

헤르메스님, 잘 지내시지요? ^^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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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1박 2일'이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점 하나가 흥미롭다. 핵심적인 공통점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러프 스케치를 하듯 시작해 본다면 이 세 프로그램들엔 일단 늘상 현재로 부터 줄창 달아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글의 법칙'은 문명의 이기가 전혀 닿지 않은 정글이나 초원으로 달아난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로 유목민적이다.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짐을 싸들고 다시 또 어디론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 '러닝맨'은 어떠한가. 마치 러닝맨 게임에서 이름표를 떼듯, 언제든지 그리고 그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그렇게 모든 타인들이 잠재적 위협의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이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1박 2일'은 표면적으로 알려진 모르는 곳을 알아가는 재미 보다는 정작 얽메인 현실에서 훌쩍 벗어나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인물들을 만나면서 낯선 상황이 주는 자유로움을 별 것 아닌 게임들과 목적없는 수다들로 채워 만끽하게 해 주는데 더욱 치중한다. 문제는 이 세 프로그램들은 왜 자꾸만 달아나려고 하고 시청률에서 보여지듯이 대중들은 여기에 화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드리워진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이렇게 만일 이 프로그램들이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제 얼마나 우리가 가진 정형화된 삶의 모습에 질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우리들은 어릴 때 부터 어른들로 부터 일종의 정답같은 삶이 있다고 배워왔었다. 어릴 때 아이들의 꿈이 비슷비슷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겠지만 알고보면 엄마 아빠로 부터 그런 것이 좋다, 넌 그렇게 되어라는 말을 늘 들어왔었기에 그걸 단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삶의 여백을 채 몇 페이지도 채워나가지 못한 아이들이 알면 무얼 알아서 꿈을 운운하겠는가. 이렇게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기성품처럼 꿈이 비슷하다는 건 그런 것이 하나의 정답 같은 삶으로 우리의 뇌리속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는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항목들이 나열된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을 따라  마치 그 체크 리스트에 'V'자 표시를 하듯 항목들 하나하나를 이뤄가며 걸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우리 역시도 보다 큰 틀에서 보자면 '피그말리온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한 삶의 틀에다 우리를 억지로 끼워맞춰 그 조각이 생기를 얻도록 한 건 바로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병모 작가의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굳이 청소년 소설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사실 '피그말리온' 은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말했듯이 자신의 본래적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오로지 '대타자'라는 사회 일반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만을 그대로 복제하여 자기 욕망으로 알고 이루려 애쓰고 있는 지금의 모든 현대인들의 초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이야기는 지난 16년간 절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낙인도'라는 섬에 세워진 일종의 대안 학교인 '로젠탈 스쿨'에 '마'와 '곽'이라는 한 피디와 촬영기사가 취재를 위해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설립 의도도 교육과정도 교육 방침 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로 부터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거둬 자활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만 듣고 취지에 나섰는데 직접 그 현장을 보고나니 학생과 교직원을 다 합쳐 백 명 정도 있는 그 학교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로젠탈 스쿨은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기대하면 언젠가 그 결과가 재능의 발현과 목표 달성으로 나타난다는 로젠탈 효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는, (P. 42)

 

 알고보니,

 

 "말로는 아이들의 잠배력을 믿고 끌어올린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실제론 상한선을 두어 가면서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 아이들의 능력이 그 잘나신 사회 구성원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이 아이들이 사회에 충실히 부역하는 동시에 기득권, 그러니까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모아 놓고 순한 양이 되게 잘 길들이는 임무를 수행 중이시라는 거잖아요." (P. 170)

 

 이런 학교였다. 교육과정도 그들의 여가 생활도 그들이 정보를 얻게 되는 통로도 모두 어떤 정해진 상한선 아래로만 가능하도록 위로 부터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획일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면 그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엄벌에 처해지고 있었다. '마'피디가 보기에 거기는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아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와 같았다. '마'는 거기서 피그말리온을 떠 올리게 된다.

 

 피그말리온 이야기 같잖아.

 (...) 당신은 내가 말하고 믿는 대로 변모한다. 옛 이야기 속에서는 조각상이라는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조각가의 간절한 구애와 기대 끝에 살아있는 미모의 여인이 된다. 현대의 연극과 영화 속에서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가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상류층 악센트와 발음을 구사하지, 그것도 공작부인 급으로.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프로디테가 그 다리에 피를 돌게 하고 숨을 불어넣어주기 전까지 갈라테이아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조각상이었던 반면 일라이저는 귀족 숙녀처럼 말하게 되기 전에도 이미 인간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끝내 히긴스 교수를 떠나 화원 사업 종사자로 살아간 이유다. 말씨에 품위가 깃들고 쇼윈도가 있는 자기 가게를 가진 것만으로, 거리에서 꽃을 팔던 때보다 신분이 월등히 상승했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그런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자아가 최상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까. (P. 95)

 

 그렇게 여기서 '마'는 로젠탈 스쿨의 아이들이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일라이저와 똑같다고 생각하고 과연 인간의 자유롭고 다양한 욕망을 어떤 하나의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여기게 된다. 그 이후 '마'는 학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보단 학교 안에서 자신의 다양한 욕망과 가능성들을 억누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을 학교의 마수로 부터 건져내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된다. 그는 사사건건 학교의 교육관에 젖어 있는 교직원들과 맞서며 궁극적으로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 학교의 악행을 밝히려 한다. 거기에 조력자가 등장하는데 교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은희란 아이였다. 은희는 말하자면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서로 극과 극의 입장에 서 있는 '마'와 교장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학교의 사고 방식에 완전히 물든 것도 그렇다고 '마'가 대변하는 개인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과 욕망의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은희는 '마'를 도와준다. 딱히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학교의 모습은 어딘가 지나친데가 있는 것 같고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다시는 선량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희생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은희는 바로 그 때문에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지만 '마'를 돕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건 절대로 그녀가 '마'에게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이 모든 행동들은 오로지 은희 혼자만의 결단이었다. 작가 구병모가 이 소설의 결말에서 궁극적으로 '마'와 교장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우리가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 벗어나고 싶다면 결국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은희'의 길이기 때문이다.

 

 구병모 작가가 은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 은희야 말로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피그말리온'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렇게 타인이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끔 스스로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피그말리온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결국 '마'와 '은희'는 같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은희의 손이냐고 물을 수 있다. 이 대답을 위해 중요해지는 것은 구병모 작가가 과연 '마'를 이 작품에서 어떤 존재로 설정했는가일 것이다. 사실상 '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끌고 가며 그래서 주인공이나 다를바 없지만 개인적으로 구병모 작가는 '마'를 절대 주인공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와 '교장'과의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완전한 대립 구도를 이룬다. 거기다 이 두 입장이 벌이는 논쟁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듯하다. 그야말로 상반되는 신념을 가진 목소리들의 전쟁이다. 이러한 대립구도와 목소리들의 전쟁을 생각한다면 이로서 '마'의 존재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로젠탈 스쿨의 학생들에게 들렸던 교장의 목소리처럼 이 '마' 역시도 그런 '대타자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즉 은희에게 있어 '마'의 목소리는 '교장'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 교장의 말 만큼이나 스스로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그 말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하는, 그렇게 사실은 피그말리온으로 만드는 목소리인 것이다. '마'가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 이름이 '마'가 된 것도 사실은 이 존재가 또 하나의 '말'의 은유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은데 '말이라고 하기는 무엇하니 그것과 똑같은 음을 가진 뜻의 한자어인 '마'로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즉 여기서 구병모 작가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마'의 말처럼 아무리 좋게 들릴지라도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오로지 혼자 힘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은희는 '마'에게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혼자 판단하여 그를 돕고 후반에 가서 '마'를 도와주는 아이들 역시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 그 자신의 판단으로 도와준다. 사실 '마'는 자신이 아이들을 학교로 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정작 구원을 받은 것은 오히려 '마' 자신이다. '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아이들도 별달리 달라진 점은 없다는 것이 이러한 점을 더욱 증명한다. 결국 구병모 작가는 이런 식으로 아무리 좋은 말이더라도 그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건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들 덕분이라는 걸 보여준다. 즉 '마'와 같은 좋은 이념이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체성의 확립이 오히려 좋은 이념이 자리잡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병모의 전작들을 고려해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구병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은희처럼 경계 위에 선 존재가 많았다. 세계는 항상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으러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 경계의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 속에서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스스로 글을 짓고 말을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그들을 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종장의 '곽'의 딸 예린이의 이야기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주체성과 그것을 갉아먹고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려는 세상의 싸움이 은희가 여전히 로젠탈 스쿨에서 투쟁하고 있듯이 그리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손을 뻗듯이 욕망에 충실함은 스스로를 주체로 만드는 행위지만 반면 세상은 그 예린이가 솜사탕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엄마가 대는 이유처럼 무한정 욕망의 충족은 오히려 너를 병들게 할 뿐이니 너를 위해서라도 억압과 교정은 필수적이라 말한다. 이렇게 나와 세상의 투쟁이란 항구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계위의 삶'이란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걸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보여주는 집요함처럼, 은희가 학교 안에서 스스로의 결단으로 당당히 싸워가는 것처럼, 결국엔 '마' 역시도 마지막에 깨달은 것 처럼, 그런 투쟁 자체가 오히려 그 자신을 주체로 만들어주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똑바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온전히 소화하여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섣불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마주 응시하며 저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계 위에 서 있게 되는 모든 주체가 되려는 이들이 보다 확실한 균형을 잡기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럴 때 '경계'는 그야말로 주체성을 위한 더없이 최적화된 공간이 된다. 문제는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을 긍정하며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늘상 경계 위에서 '피그말리온'의 운명을 뒤집어 씌워 획일적 틀에 가두려는 세상과 작품을 통해 싸워왔던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하는 것도 아직 그녀는 그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이어가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방어전을 치른 챔피언 같다. 앞으로 그녀는 한 차례 쉬면서 다음 시합을 준비할 것이다. 어떤 시합이 되었든 그 시합도 꼭 관전하고 싶다. 아무튼 스스로를 가두는 것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도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읽은 지금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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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
  2.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6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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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선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런 우리에게 상실이란 예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편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건만 그래도 우리들은 거부한다. 어떻게든 거기서 나만이라도 예외가 되고 싶어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욕망이란 게 사실은 ''파과(破果)'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학벌을 가지고자 하는 게 다 타인들로 부터 그럴싸한 인정을 받기 위함이니 말이다. 보기 좋은 과일이 먹기도 좋다란 말도 있듯이 그렇게 빛깔과 모양 좋은 과일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이라는 군침을 흘리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욱 '파과(破果)'란, 그걸 연상시키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스스로를 '파과'라 여기는 여성 살인청부업자 '조각(爪角)'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나이는 60대. 한 마디로 늙었다. 노년 또한 '파과'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당연히 기피의 대상이다. 소설은 그녀가 지하철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올라타자 소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노년에 따라붙는 혐오와 기피의 이미지를 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건 민폐까지도 넘나든다. 같은 지하철에서 앉아있는 한 젊은 임산부 여성에게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상스러운 말투로 역정을 내는 것이다. 그가 역정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임산부든 뭐든 상관없으니 얼른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마치 나이가 무기라도 된듯이 그는 인정사정없이 하소연하는 여성을 찔러댄다. 이게 서장의 뒷부분이다. 문득 의문이 든다. 구병모 작가는 왜 이런 묘사를 넣은 것일까? '고의는 아니지만'에서 충분히 맛을 보았듯이 구병모 작가는 어느 장면도 아무 이유없이 그냥 넣지 않는다. 여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이게 꼭 지하철에서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조각의 손에 죽는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나왔던 '조각'의 묘사가 흥미롭다. 왜냐하면 구병모 작가가 노년에 따라붙는 기피의 이미지를 나열한 뒤 '조각'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사람들이 간주하는 바람직하고 교양있으며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p. 11)

 

 여기서 문득 깨닫는다. 노년이 다 혐오와 기피의 대상만은 아님을. 그렇다. 임산부에게 무지막지하게 굴었던 그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지 않을 때 혐오하고 기피한다.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면, 다시 말해 '파과'가 '파과'답게 행동하면 우리는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에피소드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나온 것은 아닐까 싶다. 더우기 소설 가장 앞부분에서 인용된 시(詩)를 고려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 

 

 이 시에서 미련이 없음은 더 이상 과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파과'를 '파과' 그대로 내버려두겠다는 것. 이는 '파과'를 그 자체로 받아들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파과'임을 자각하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조각'이다. 이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단 청부살인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거기에 아주 충실하게 행동한다. 앞서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으로 있었듯이 청부살인자의 전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선을 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청부살인의 세계로 이끈 스승이자 연인이기도 한 '류'가 겪은 비극으로 인해 '지켜야 할 것'은 절대 가지지 않은 그녀는 오직 개 한 마리만을 기르고 있는데 바로 그 개를 통해서도 이건 나타난다. 그 개를 구병모 작가는 그녀의 분신 같은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그녀가 새롭게 태어나려 할 때 개가 죽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바로 그 개의 이름이 '무용', 즉 '쓸모없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에게 그녀는 주인으로써 그래도 할 도리를 다 하고 더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늘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는 과연 그녀가 '파과'인 자신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가장 압권인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p. 222)

 

 더 이상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가 없다. 손 안에서 부서지는 갈색 덩어리는 그야말로 조각 스스로 생각하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그녀는 아파하고 아파하지만 '파과'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연민하여 눈물은 흘리지만 '파과'인 자신을 내치지는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조각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단, 조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강박사(그 가족을 포함하여)는 예외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p.102)'을 조각에게 알려준 강박사는 사실 조각과 같은 존재이다. 그도 파과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중요 인물들은 다 반대편에 서 있다. 조각은 청부살인을 한다. 프리랜서가 아니라 어엿하게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다. 기업 단위로 움직이는 조직의 일원인 것이다. 근데 거기서 자기들끼리 '청부살인'을 바꿔 부르는 단어가 흥미롭다. 구병모 작가는 세심하게도 여기다 '방역'이라는 말을 쓴다. 방역. 벌레 퇴치. 과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것이 '방역'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소설의 '청부살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소설에서 청부살인이란 '방역'이라는 말 그대로 과일을 '파과'가 되지 않게 하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그러고보면 그 에이전시에 있는 사람들 이름 역시 예사롭지 않다. 사무실에서 조각에게 의뢰를 알선해주는 여성의 이름은 '해우'고 조각과 같이 청부살인을 하는 젊은 남자의 이름은 '투우' 다. 한문 표기가 나오지 않아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들 이름의 '우'는 근심 우(憂)자로 보인다. 즉 '해우'는 화장실의 또다른 이름인 '해우소'와 같이 근심을 푸는 곳이고 '투우'는 던질 '투(投)'자로 근심을 먼 곳으로 집어던짐이다. 해우는 계속 사무실에만 있으므로 '해우소' 그대로 장소를 강하게 뜻하고 투우는 동작이므로 그렇게 근심을 풀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근심을 가지고 와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던져버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근심은 무엇일까? '방역'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 있듯이 바로 '파과'에 대한 염려, 두려움이 아니겠는가?

 

 결국 조각은 어차피 에이젼시로 부터 소외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각과 대결하게 되는 투우를 보면 이러한 조각의 고립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알고보니 투우는 자신의 인생을 '파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을 내내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파과'가 되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뢰인들이 그랬듯이 남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과일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소설의 비극은 언제나 스스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선을 넘을 때 일어난다. 투우도 그렇지만 조각 역시 마찬가지다. 조각이 청부살인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녀가 그 날 더부살이하게 된 당숙의 딸 방으로 들어가지만 않았던들, 거기서 허락도 없이 폐물만 구경하지 않았던들 그녀는 청부살인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류는 또 어떤가? 가족을 가진다는, 그렇게 청부살인자로서 선을 넘는 행위만 하지 않았던들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소설의 모든 비극은 언제나 그 너머를 욕망할 때 찾아왔다. 현재의 조각이 폐지 줍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강박사 가족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것도 다 그녀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은 탓이듯이.

 

 이로써 소설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설령 자신의 모습이 '파과'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변화의 거부가 아닌가?'하고 오해하기 쉽다. 물론 '파과'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며 '파과'가 되지 않으려 선을 넘는 걸 부정하는 게 변화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파과'인 자신을 기피하고 보다 온전한 과일이 되도록 힘쓰는게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우러난 동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으로 파헤쳐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이유를 찾게되는데 그건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즉 우리가 '파과' 되는 것을 두려워 함의 본질에는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남들 눈에 빛깔과 모양이 좋은 과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정체인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설이 이걸 바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손톱'과 관련된 네일아트 장면이다. 소설에서 이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하나는 첫부분에, 나머지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이 두 번의 반복된 등장은 한 마디로 조각이 얼마나 변했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는 조각의 변화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구병모 작가의 연출에서도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단 첫 부분에서 조각은 네일 아트에게서 유혹을 느낀다. 직원으로 부터 권유까지 받지만 결국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같은 자리에 있던 교복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곤 엉덩이를 슬쩍 당겨 옆으로 피하듯 비껴 앉는'(p.54) 대놓고 싫어하는 행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원이 자신을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로 취급해 버릴 것을 지레짐작한 탓이다. 그렇게 그녀는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손톱 꾸미는 일을 그만둔다. 이 손톱 꾸미기는 사실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인데 '손톱'이 바로 조각 자신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각(爪角)'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손톱'이다. 또한 그녀가 살인청부업자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손톱'으로 불리웠다. 호칭은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타인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조각의 호칭은 '대모'다. 존칭이라기 보다는 공격성이 무화된 이름인 것이다. 에이전시는 그 이름을 부르며 무시를 은밀히 깔며 투우는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손톱을 기르라'고 말한다. 때문에 '손톱'을 가꾼다는 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앞서도 보았듯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가로막힌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는 그 바람을 이룩한다. 더구나 한 손이 없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구병모 작가의 연출까지 고려하면 이 의미는 더욱 부각된다. 첫부분에서 시점은 어디까지나 조각에게 있었다. 조각의 입장에서 네일아트의 아름다움, 교복 소녀의 기피, 직원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정반대로 연출되어 있다. 바로 네일아트 직원의 입장에서 조각이 보여지는 것이다. 즉 거기서 조각은 더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하지만 첫부분에서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만 하던 조각은 마지막 부분에서 어쩌면 가장 열악한 위치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조각, 그녀가 얼마나 변해버렸는지는 더욱 두드러진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에서 늘 입밖으로 내지 못했던 '누구나 다 어머님이라 하나? 난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에요.'도 입밖에 낸다.

 그리고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처럼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p.332)'고. 이만큼 그녀에겐 이제 스스로가 '파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붙여진 손톱이 진짜 손톱이냐 인조 손톱이냐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것 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바로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밝혀 왜 그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함이 바람직한 것인지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이는 전작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주제와도 이어진다. 거기서 '피그말리온'은 원전이 되는 그리스 신화와 똑같이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의 자화상을 의미했다. 그렇게 구병모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말들에 의해 스스로의 모습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가는지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번엔 '타인의 시선'이다. 말들과 똑같이 우리의 시신경을 교란시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긍정하기 보단 남들의 기준에 맞춰 늘 모자람과 부정적인 것만 부각시키는 그 시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설 '파과'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고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바로 여기로 부터 탈출해야 함을 아주 선명한 색채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것도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고도 선명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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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6 21:08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2.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
 
 
2013-08-17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RHK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간한 스릴러 소설을 통털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바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라 한다. 하와이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산후 휴가 중에 작가로 데뷔한 테스 게리첸이 로맨스 소설 작가에서 지금의 스릴러 작가로 변신하는 데 있어 그 시작이 되었던 작품이다. 지금은 그녀의 대표 시리즈가 된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만큼이나 인기를 얻었음인지 테스 게리첸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꾸준히 소개되었고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이스 콜드'는 그 시리즈 중 여덟번째 작품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이스 콜드'를 통해 처음 테스 게리첸과 만나므로 이렇게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마우라 아일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마우라 아일스에게 그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제인 리졸리.이번 작품만큼은 당신이 들러리에요."

 

 마우리 아일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소설을 보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단순 명쾌하다. 그동안 많은 스릴러 작품을 리뷰란답시고 해왔지만 이 작품만큼 그냥 술술 풀리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스 콜드'란 제목 그대로 '얼음처럼 차가운' 것만큼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도 없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그만큼 테스 게리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너무나 이정표가 확실해서 길을 잃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군더더기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명서대로 레고 블럭을 만든 것처럼 모든 조각들은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인 것이다. 시리즈 전체를 본 이들에겐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에 한해서만은 테스 게리첸 그녀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가운데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콜드'는 어떤 이야기일까?

 

 일단 마우라 아일스의 시작을 보자. 그녀의 이야기는 '그들의 관계는 끝나가고 있었다'로 시작된다. 누구와의 관계? 바로 그녀의 애인 대니얼 브로피와의 관계이다. 둘은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니얼 브로피 그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신과. 그렇다. 그는 신부이다. 마우라 아일스는 그가 자신과 결혼해주기 원하지만 대니얼 브로피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 곁에 있잖아요'하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마우라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우라는 대니얼이 선택해주길 바란다. 신이 아니라 자신을.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신부'라는 하나의 제도에 갇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제도를 떠나지 못한다. 선택은 늘 미뤄지고 그만큼 마우라의 번민도 가중된다. 이제 그녀는 묻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할까? 아무래도 대니얼은 신부라는 신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마우라는 깨닫는다. 그건 또 하나의 대니얼이 되는 것임을. 대니얼은 이대로 달아나자란 마우라의 말에 지친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잊으려 해도 세상은 늘 그자리에 있어요. 우린 결국 그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고."(P.17)

 

 그렇게 대니얼은 무모하게 변화를 가져오지 말자고 말한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마우라는 항변하지만 자신도 그게 옳다는 건 안다. 빌어먹을. 그녀 역시 대니얼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하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이 싫다. 그러니 갈등할 수 밖에. 대니얼의 말처럼 이대로 변화를 거부한 채, 상황에 안주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박차고 나가서 나 스스로를 새로운 변화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하는 것인지?

 '아이스 콜드'는 소설의 시작에서 제기된 마우라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의 여정이다.

 

 그들이 11월의 아침 공항에서 앞으로의 관계를 두고 말없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긴 하차구역이니 당장 차량을 이동하라고. 하지만 마우라는 그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못한다. 대니얼과 연인처럼 헤어지고 싶지만 그가 신부라는 것 때문에 남들의 눈이 무서워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경찰이 소리친다. "거기! 당장 차량 이동하시죠!"(P. 18)

 

 대단한 장면 연출이다. 단적으로 마우라 아일스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자신을 위해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그 궁극의 존재를 이렇게 선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제도다.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제도. 인간에게 그 직분에 맞는 모습만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타인의 시선으로 육화된 제도. 바로 그 제도가 가진 인간 모습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하고 억압적인 모습이 이렇게 그 제도적 권력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라고 할만한 경찰의 명령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테스 게리첸은 앞으로 마우라가 바로 이 획일성을 강요하는 제도와 싸우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언은 물론 실현된다. 와이오밍의 잭슨빌, 그 컨퍼런스에서 마우라는 옛 대학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름은 더그 캄리. 마우라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에 대한 기억은 그가 다리 하나를 다쳐서 절뚝거렸던 것이다. 더그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닌자 복장을 하고 옥상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완전 무모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그의 행동은 그가 소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세상이 규정한 대로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만큼 이성적이지 않은 무모한 존재지만 그건 세상의 입장에서만 그렇고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변화에 몸을 맡기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마우라가 같이 여행하자는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에 갇혀 자신의 사랑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더그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행길에 올라서도 더그는 무모해보이는 선택을 한다. 마우라는 그런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더그의 행동 때문에 마우라 일행은 결국 '천국'이라는 버려진 마을에 갇히게 된다.

 

 얼른 보기에 이 갇힘은 더그의 무모함 때문이고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이 갇힘이 바로 마우라가 더그에게 보내는 의심 뒤에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정체 때문이다. 읽으면서 이런 연쇄에 주의해 보면 '천국'에의 갇힘이 더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우라 자신 때문임을 알게 된다. 즉 그녀가 더그의 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마을에 갇히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다. 이는 갇히게 된 마을의 정체를 보면 확인되는데 다름아니라 그 마을은 오직 한 명의 종교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음교'의 신도들로만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인하게 되듯이, 마을의 이름으로 보나 '모음교'의 성격으로 보나 이는 정확히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기독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너무도 명확해서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마우라는 바로 거기에 갇힌 것이다. 그녀가 정말 너무나 싫어하는 그 공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를 어떻게 더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결국 마우라의 의심이, 비록 그것이 일말일 망정, 갇히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인이여, 부족한 건 네 믿음이니라."라고 게리첸에 마우라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뒤돌아보는 바람에 그대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룻의 아내. 마우라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게다가 그 마을은 지금 차디찬 눈 속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 분명 모두들 어디론가 급히 떠나가 버린 형국이다. 이는 비록 일말의 미련은 남아있을 망정 마우라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오로지 인간에게 획일적인 정체성만 강요하는 제도의 단적인 진실이다. 사람들은 그 제도가 스스로를 지켜주고 대니얼 브로피가 그러듯이 더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 줄 것이라 믿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제도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제도는 오로지 제도만 고려할 뿐이다. '모음교'의 교주가 신도들을 위해서 한 일 모두가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이었듯이 제도도 그러한 것이다. 그 종교에서 주로 희생되는 것은 어린 소녀들이다. 제도에 갇힌 소녀들을 교주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유린하고 남자들마저도 닥치는대로 소녀들을 범한다. 그 소녀들을 보호해주어야 할 엄마라는 여성들은 오히려 교주의 뜻이라며 소녀들을 내어주기 바쁘다. 기계와도 같은 지극한 수동성. 그게 '모음교' 엄마들의 본질이었다. 테스 게리첸은 왜 이토록 여성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보여주는 것일까? 답은 한 가지다. 소녀는 현재 마우라에 대한 은유이며 엄마란 미래 마우라에 대한 은유라는 것. 해서 제도, 거기엔 아무런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마우라가 진정 스스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곳인 것이다. 그게 설사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이러한 철저한 희망의 말살. 이는 테스 게리첸이 마우라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이라도 깡그리 없애기 위하여 일부러 갇히게 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뒤의 장면이 제인 리졸리로 바뀌어 마우라의 죽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진정한 변신은 이전 존재의 전적인 죽음에서만 가능하니까.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듯이.

 

 변화에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네오에겐 모피어스가 필요했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겐 토끼가 필요했으며 단테에겐 베르길리우스가 필요했듯이. 이제 걸어야 할 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기에 아무래도 앞에서 등불을 들고 길잡이가 되어 줄 이가 필요한 것이다. '아이스 콜드'에서는 줄리언 퍼킨스란 소년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가 마우라에게 말하는 자신의 이름은 '생쥐'다. 생쥐란 제도의 바깥에서 그것이 구획해 놓은 것을 넘나드는 존재다. 생쥐는 모든 곳에 있을 수 있고 모든 곳을 다닐 수 있다. 정확히 줄리언 퍼킨스가 그렇다. 테스 게리첸은 그 제도로 부터 달아난 자였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한 부모에게서 양육되지도 못했고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마을이 아니라 산 속에서 홀로 산다. 테스 게리첸은 줄리언의 할아버지도 그런 존재였음을 밝혀 이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립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할아버지로 부터 배운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통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마우라까지 챙겨줄 정도다. 한 마디로 전적인 외부의 존재인 것이다. 단적으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줄리언이 사회가 부여한 이름이 아닌 자기 스스로 정한 이름을 말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줄리언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생쥐라 말한다. 이러한 줄리언의 의미는 경찰에게서 마우라를 구해줄 때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공항에서의 경찰 모습으로 대표되듯이 소설에서 경찰이란 기독교와 더불어 제도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그 경찰과 겨루는 것이 바로 줄리언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줄리언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즉 제도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고 스스로 홀로 서는 것만이 이제 마우라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말이다.

 

 이게 '아이스 콜드'의 핵심이다. 차가운 얼음을 뺨에 댄 것과도 같이 선명히 전해져오는 테스 게리첸의 진심인 것이다. 꾸준히 시리즈를 읽어왔었다면 보다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마저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우라 아일스는 행여 제도가 강요하는 획일성에 저항해 스스로의 다양성을 추구해가는 존재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시리즈의 한 쪽 축엔 제도와의 싸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마지막에 나오는 마우라의 독백이 그래서 더욱 결연하게 들린다. 이건 어쩌면 테스 게리첸의 각오인지도 모른다.

 

 '눈 때문에 차단된 골짜기. 나는 나만의 골짜기에 갇힌 거야.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P. 447)

 

 그 진상은 이제 전작들을 읽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테지만 아무튼 '아이스 콜드'만은 차디찬 눈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냉혹한 제도를 마지막 장면의 폭발과도 같이 산산히 날려버리는 소설이었다. 마우라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골짜기에 갇혀 있다. 하지만 비극은 그러한 갇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 손에 구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존재의 구원을 자꾸 남에게 의탁하느라 '모음교'와 같은 독재의 종교도 생기고 편협하고 획일적인 제도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해지길 바란다면, 진정한 나라는 주체로 서고 싶다면, 무조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대로 제도에 의존했던 시각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이제 타자와 세계를 바라봄을 뜻한다. 변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각의 바꿈. 나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담는 것. 변화란 이토록 주체화와 연결되어 있다. 마우라가 줄리언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고유한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콜드'는 그 둘의 단단한 매듭이다. 어쩌면 이전의 마우라와 같은 우리들마저 끌어올려 줄 지 모른다. 분명 여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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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탐하다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아버지!

 아버지! 이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 이성복, '그해 가을' 중에서 -

 

 

  소설에 나오는 FBI 요원 그레이디는 말한다. 프랭크는 아비저로 부터 '총알과 시체의 유산'을 받았다고.

유산이 있다.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게 되는 유산이. 말하자면 하나의 총체적 세계이다. 거기서 아들은 선택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나 자신이 될 것인가? 정답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어렵다. 이미 선택하는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에 깊이 침윤된 까닭이다. 그건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나'란 것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존재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처럼 결심과 의지로 훌쩍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새와도 같이,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불태워야만 가능하다. 그럴때만 부활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된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새가 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고. 껍질이란 자신을 이루고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깡그리 부술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의 해방은 어렵다. 그러니까 '총알과 시체의 유산'으로 부터 말이다.

 

 마이클 코리타는 흔히 '신성'으로 불린다. 새롭게 나타난 젊은 별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데뷔작 '오늘 밤 안녕을'은 미국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인 만 20살에 나왔다. 스릴러 작가로 치면 아직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을 나이에 그는 데뷔를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젊은 세대에 속하고, 가족적으로 비유하자면 아들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그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많다.(난 아직 '숨은 강'을 읽지 못했기에 그건 빼고 하는 말이다.)'오늘 밤 안녕을'에서 주인공 사립 탐정 링컨 페리를 찾아와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의뢰하는 이는 '존 웨스턴'이라는 아버지다. 그런데 코리타가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흥미롭다. 70대 후반의 이 꺽다리 노인은 왕년에는 제법 건장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말라빠지고 배는 쭈글쭈글한'모습이다. 눈빛만은 보이는 건 뭐든지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날카롭지만 정작 그야말로 마치 세월이 고압의 흡입기라도 되어 남김없이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그가 링컨 페리에게 2차대전 이야기를 한다. 탑골 공원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왕년에 내가'를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노인들처럼...

 

 '오늘 밤 안녕을'이 이렇게 첫 시작부터 미이라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코리타가 보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버지를 양산해 내었고 또 그런 아버지들이 떠 받쳐온 미국은 코리타에게 지금 그런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아버지의 이름은 '웨스턴'이다. 그 '서부'야말로 무엇보다 전통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웨스턴을 이어받은 아들은 살해당하고 그 아내와 딸은 실종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충실히 따랐던 아들의 마지막이 파멸인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 가족까지 포함해서. 그게 지금의 미국이 아들 세대에게 물려주고 있는 유산이었다. 2차 대전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던 것처럼 '총알과 시체의 유산'이 물려줄 수 있는 건 파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코리타는 그래서 아들 세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들의 유산에서 벗어나 역사와 미래를 바로 그 자신들의 몸으로 직접 떠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걸어 나오게 된다. '오늘 밤 안녕을'에서는 링컨 페리가 그리고 '밤을 탐하다'에서는 프랭크가. 바로 아들들이. 코리타의 분신들이.

 

 그렇게 '밤을 탐하다'는 스탠드 얼론이지만 '오늘 밤 안녕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코리타가 거기서 천착했던 주제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밤을 탐하다'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물론 프랭크고 다른 하나는 '노라'라는 여인이다. 공통점이 있다.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살인 기계가 되는 훈련을 받은 자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게 내내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라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를 스스로 꾸려나가려 한다. 하나는 아버지가 비록 죽고 없어도 그 세계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자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 세계를 지속해 나가는 자다. 그렇게 다들 아버지의 유산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다. 아버지 세계가 감옥과도 같다는 것은 이미 소설의 첫머리에서 부터 제시된다. 소설의 첫 장면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프랭크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지금 프랭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유와도 같다. 그에겐 아버지로 물려받은 길을 걷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만큼의 재능이 있지만 아버지로 부터 각인된 세계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노라도 마찬가지다. 노라의 첫장면은 같이 일하고 있는 제리라는 남자의 시선 속에서 드러난다. 그 제리의 눈에 노라는 정비소를 꾸려가는 어엿한 경영자라기 보다는 그저 남자를 유혹하려 드는 '암컷'일 뿐이다. 노라는 지금까지 무시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남자들만의 영역인 정비소 일로 들어왔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만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리의 불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그들은 갇혀있다. 하나는 스스로, 다른 하나는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이는 정확히 우리 무의식을 그 근저에서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언어로 스스로를 번역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오로지 아버지의 눈으로만 평가하게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언어가 하나의 질서가 되어 자리잡음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이제는 외부의 눈으로써 그 언어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들의 진정한 해방은 이 자아와 타자 둘 모두에게 완강히 붙들려 있는 '아버지의 언어'로 부터 자유로울 때만이 가능하다.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밤을 탐하다'가 프랭크와 노라 둘 모두를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둘이 하나인 것은 똑같이 매개자가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즉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서도 계속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그 아버지의 언어를 지속시키는 매개자들 말이다. 프랭크에게는 아버지 질서가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공간인 '토마호크'를 지키는 에즈라가 있고 노라에겐 앞서 말한 '제리'가 있다. 그렇게 매개자들이 아버지의 공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공명시킨다. 분명 프랭크와 노라에게 아버지와의 간격은 그만큼의 해방인 것이지만 매개자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그 모자람만 부각시키고 그렇게 죄의식을 일깨워 더욱 아버지와 닮아지려 애쓰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내부는 매개자들로 인해 구원을 가져올 곳이 없으니 구원은 전혀 다른 쪽, 그러니까 완전한 외부에서 와야만 했다.

 

 바로, 데빈이다.

 

 데빈은 프랭크에게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든 자신의 원수이다. 그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아버지와 굳게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의 삶이란 전적으로 데빈을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코리타는 이 기표를 비튼다. 표면적으로만 증오이지만 진실한 의미에선 그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때문에 코리타는 데빈을 그런 존재로 만든 것이다. 원수만큼 스스로에게 외부적인 존재도 또 달리 없을테니까. 이는 데빈이 온 장소에서도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플로리다. 서늘한 아침공기가 솔잎과 장작 연기를 타고 흐르는 울창한 숲과 호수로 가득한 '토마호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땅. 데빈은 바로 그런 땅에서 왔고 그만큼이나 타자인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류들은 말한다. '구원은 오직 타자로 부터 온다'고. 당연하다. 온갖 매개자들이 들끓기만한 내부는 전혀 다른 언어를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알고보면 프랭크는 바로 그 그레이디 때문에 갇히게 된 셈인데 그는 가장 강고한 아버지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만한 FBI의 요원이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프랭크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신만은 보다 강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려는 은밀한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만큼이나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던 자가 사실은 프랭크를 가둔 진정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FBI가 되어 내부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다.

 

 그러므로 외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데빈은 바로 그 요청에 응답한 존재인 것이다. 과연 절대적 외부의 존재로써의 데빈은 프랭크와 노라의 세계에 메워질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다 랭크와 노라에게서 보자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매개자들마저 제거하여 프랭크와 노라에게 자신들만의 언어를 돌려준다. 이런 존재이기에 데빈의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것도 당연하다. 이게 바로 이 소설에 투영된 코리타의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삼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열림만이 현재 미국이 물려준 유산으로 부터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너'라는 말만으로도 입증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마이클 코리타는 아들 세대에게 밤만 탐하도록 만드는 이제는 집착 밖에는 남지 않은 쭈글쭈글한 주검과도 같은 미국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 의문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신성'이라는 젊은 세대이기에 그런 의문과 스스로 풀어가는 노력에 더욱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그 결실을 충분한 깊이로서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기까지의 이르는 과정만큼은 위에서 말했듯 충분히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또 이야기 역시 흥미롭기에 여전히 그 다음의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1982년생인 그는 아직 젊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젊음이라는, 아직 남겨진 그 무한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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