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프래질 -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이끄는 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안세민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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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책은 진실로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기도 한다. 그런 책을 만났다.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가히 전복적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는 뜻이다. 무엇을 뒤집느냐고? 단순히 말하자면 '예측'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있다. '예측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것이고 예측 할 수 없다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건 인류가 가진 보편화된 믿음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경제학이 발달하고 사회과학이 발달하고 통계학이 발달했다. 단순히 말해 이 학문들은 왜 존재하고 이토록 성장했는가 하면 보다 잘 예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 그 숱한 이론들도 왜 생겨났던가? 따지고 보자면 좀 더 잘 예측하기 위해서였다. 이론의 이름으로, 법칙의 이름으로 때로는 기법의 이름으로 참 다양하게도 나타났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미래를 잘 예측해서 리스크를 가급적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오오! 찬양 받으라!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일지니!' 그 많은 이론들은 이런 찬송가와도 같다.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학자들은 저마다 솜씨가 좋은 예언자가 되기를 원했다. 세상은 원래 정해진 법칙 대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법이거늘 우리가 제대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직 발견해내지 못한 'MISSING LINK' 탓으로만 여겼다. 정말로 세계는 기하학적인가? 그렇게 선형적인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이 바로 나심 탈레브이다.(니콜라스까지 쓰기에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비선형적이라고! 이 말은 곧 세계는 '1+1=2' 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1+1= 1/2로도 나타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서, 비선형이란 당신이 약 복용량을 두 배로 늘리거나 공장 종업원 수를 두 배로 늘리더라도 원래 기대했던 대로 두 배의 효과를 얻지 못한다는 걸 말한다. , 세계의 본질은 완전히 예측 불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측을 잘 하겠다고? 천만에! 그건 절대 불가능이야. 오히려 그런 식의 인위적인 개입들이 더욱 우리를 힘든게 만드는 걸 알랑가몰라?'

 이게 나심 탈레브의 예측 가능성을 십계명처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에게 던지는 돌직구다. 한 마디로 너네들은 엉터리라는 말이다. 이런 예측 가능성의 신화는 주로 근대 이후 서구 사회를 양분화했던 소련과 미국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나심 탈레브는 양 진영의 가장 최고 대학의 이름을 빌어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기죽어 있을 그들이 아니다. 예측 가능성을 신봉하는 자들은 나심 탈레브에게 말한다. "뻥까시네!"라고. 그러자 나심 탈레브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뻥이 아냐.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보여주겠어!"

  그 말대로 한 권의 책을 낸다. 정말 얼마나 작심했던지 페이지 수만 해도 '찾아보기'까지 합해서 무려 754 쪽에 이른다. 그야말로 방대하다. 두께 자체가 마치 '어이, 예측 가능성의 쫄다꾸들, 난 이정도로 내 말에 대해 논리와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데 어디 너네 카드들도 한 번 까 봐! 정말로 진검승부 한 번 펼쳐보자구! 쫄리면 뒤지시든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손만 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벼리된 나심 탈레브가 만든 회심의 검이 바로 '안티프래질'이란 책이다. 그에 따르면 그 자신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안티프래질'은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을 깡그리 부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측 가능성에 대한 과잉 신앙이 무엇보다도 2008년의 금융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일 뿐이다. 나심 탈레브에 따르면 우리 세상엔 이 예측 가능성의 신봉이 가져오는 무수한 부작용이 있다. 사회가 원하는만큼 개선이 안되는 것도 예측 가능성에 대한 과잉 신앙으로 순리대로 흐르도록 놔두지 않고 자꾸만 이것저것 개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해마다 여름이면 진한 녹조 라떼를 선물하는 4대강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안티프래질 다음 개정판엔 전세계에 섣부른 개입에 대한 뜨거운 경고로 4대강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2008년 금융 위기로 가장 덕을 많이 본 사람이 다름 아닌 나심 탈레브다. 그 전부터 유일하게 장차 커다란 금융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하며 잇달아 미국 경제에 경고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예측 대로 금융 위기는 현실로 나타났고 예언이 실현되는 것 만큼 예언자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도 없으니 나심 탈레브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남의 비극을 밟고 행운을 거머쥔다는 게 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삶도 그리 순탄했던 건 아니다. 잇달아 미국 경제에 대해 날린 경고로 월 스트리트 저널은 나심 탈레브에게 지금 월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나심 탈레브는 행여나 암살되지 않도록 경호원을 둘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지상으로 진지하게 충고해 오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심 탈레브는 이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정말로 경호원을 둘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가 하게 된 것이 스스로 체력을 증진시키는 웨이트 트레이닝이었다. 안티프래질의 핵심 개념은 바로 이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나왔다. '안티프레질'을 위한 주요 방법론 중 하나로서 나오는 '바벨 효과'(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바벨이 아니라 운동할 때 드는 역기 비슷한 기구를 말한다.)는 바로 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자꾸 '안티프래질', '안티프래질'하는데 그 뜻을 몰라 궁금하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티프래질'이 뭔지 알고 싶어서 일부러 영어 사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쿡쿡. 실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당연하다. 나심 탈레브가 직접 만들었으니까. 쉽게 말하면 '안티프래질'은 '깨지기 쉬운'을 뜻하는 fragile의 반대말이다. 하지만 영어엔 그 반대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심 탈레브가 직접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Antifragile'이다. "뭐야, 별 거 아니네. 뭣하러 일부러 말을 만든담? 그냥 설명해도 되잖아!" 아니다. 하나의 단어는 나심 탈레브에게 중요하다. 그 이유를 그는 책에서 그리스 문화에서는 오래도록 '블루'라는 말이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 옛날 호머가 '오딧세이아'를 썼을 때 파란 바다를 뭐라고 표현했는지 기억하시는지? '오디세이아'에는 참으로 바다가 많이 나오지만 호머는 '파란 바다'라고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 어두운 와인 색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왜? 호머가 색맹이라서? 아니다. 파란색을 나타내는 말이 고대 그리스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엔 딱 네 가지 색깔 밖에 없었다. 하얀색, 검은색 그리고 무지개의 애매한 색깔을 표현할 때 쓰는 빨간색, 노란색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렇게 쓴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색맹이 아니었지만 단어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색맹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블루'라는 말이 태어나고서야 그리스 사람들은 색깔에 대한 지식을 보다 넓힐 수 있었다. 그걸로 나심 탈레브는 단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면 현존하는 현상 자체도 보지 못하는 문화적 색맹 사태에 빠지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측정 가능한' 프래질 보다 세상에 훨씬 많은 측정 불가능한 '안티프래질' 현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안티프래질'이란 말을 만든 것이다. 굳이 프래질이란 단어를 쓰는 것은 이 개념이 특히나 외부의 충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이 커다란 충격이 닥쳐올 경우 예상했던 대로 부정적 결과가 나타나면 '깨지기 쉬운' 프래질이다. 그런데 세상엔 그런 프래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충격이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문명이 바로 자연의 연속적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였다고 한 바 있다. 자연재해든 전염병이든 그게 그냥 부정적인 효과로만 머물지 않고 결국엔 인류의 문명을 좀 더 진보하도록 충동질했다는 의미다. 그런 면에서 아놀드 토인비가 바라보는 문명이란 '안티프래질'이라 할 수 있다. 측정불가란 그런 뜻이다. 깨지리라 예측했지만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와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대로 그러한 안티프래질을 가득 담아낸다. 사골을 삶듯 한껏 우려낸다.

 

 이 사골 국물은 모두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해는 마시라. 책은 한 권이다. 보통의 책에서는 '장'으로 쓰는 것을 '권'으로 했을 뿐이다. 그렇게 1권에서는 핵심 개념이 되는 안티프래질을 설명하고 2권에서는 근대에 들어와 프래질이 특권화되고 안티프래질이 무시되면서 그동안 결국 우리를 예측 가능성의 신화 속으로 몰아넣은 '소비에트-하버드 환상'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왜 안티프래질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3권에서 보여준다. 그렇게 이론적인 작업을 마친 다음 4권부터는 안티프래질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이 전개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라 할 만한 옵션이 4권에서 설명되며 인식론적 방법이라 할만한 비선형성에 대해서는 5권, 그와 비슷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비아 네가티바'는 6권에서 이야기되며 그리고 마지막 7권에서 어쩌면 안티프래질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윤리의 문제가 등장한다.(왜냐하면 모든 게 예측 불허하다면 행위의 상호 통제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를 정초하기가 매우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메인 디쉬는 이렇게 이루어져 있으며 군데군데 깨알같은 저자의 유머가 감칠맛을 더한다. 때문에 약간 이해하기 버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나마 쉽게 읽히는 편이고 때에 따라서는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에 나오는 과자 '마들렌'과도 같다. 무심코 맛보게 된 그 과자가 단번에 오래도록 잊어버렸던 기억을 환기시키고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을 낳았듯이 이 책 역시도 읽는 이에게 그와 똑같은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다. 특히나 세상이 어디까지나 예측가능하다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문자그대로 전복이다. 보통 전복은 그 '급변'으로 인해 많은 저항을 부르는 법이지만 나심 탈레브는 그 근거로 온갖 분야의 연구 결과들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저항의 힘줄은 어느 순간 느슨해져 버린다. 이 책엔 그런 힘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생각에 대한 생각'이란 책으로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은 이 책을 두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 책'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인 것이다.

 

 이 책이 이토록 안티프래질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섣부른 예측으로 이루어지는 인위적 개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4권 이후부터 나오는 모든 안티프래질을 위한 방법론들은 그대로 바보 같은 예측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어설픈 개입'(나심 탈레브가 말하는 용어다.)을 막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마도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2008년의 금융 위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대로 시장의 논리에 따르라고 했지만 미국 정부는 인위적 개입을 단행했고 그 때문에 결국은 2010년 또 한 번의 커다란 위기를 겪게 된 데 있을 것 같다. 안수기도로 환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억지로 기도원으로 데려갔다가 두들겨 맞아 죽은 우리나라의 실제 사건처럼 이런 인위적 개입이 도리어 크나큰 화를 부른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앞서도 말했듯 4대강이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고 작금엔 부동산 시장 역시 그렇다. 가만히 시장의 법칙에 맡겨두면 알아서 조정될텐데 정부가 자꾸만 인위적으로 개입하니까 시장은 왜곡되고 더욱 막장으로 치닫는다. 나심 탈레브는 이걸 '의원성 질환'이라고 부른다. 빠른 해결을 위해 인위적 개입을 의도했다가 도리어 해를 입은 경우로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오히려 병만 더 얻게 된 것을 뜻한다.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문제가 좀 심각한 것 같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죽는 환자의 수가 교통 사고로 죽는 환자의 수보다 적어도 3배 크게는 10배는 많다고 하니까 말이다. 또한 병원균을 통한 감염 외에 의사를 통한 감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특정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닌데 병원을 자주 찾는 것과 같은 '어설픈 개입'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현실 사례에서 보듯이 해악을 초래한다. 그들은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예측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이러저러한 개입을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입증된 적은 별로 없다. 그 보단 어설픈 예측이 국토 곳곳에 남긴 상처만 더 많이 볼 뿐이다. 섣부른 예측으로 쓸데없이 많은 예산만 축내고 결국엔 처치하는 것마저 곤란해진 거대한 쓰레기 건축물들 하며...

 

 그러므로 안티프래질이 말하는 방법론이란 다름아닌 나타날 수 있는 리스크에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바벨 효과'는 바벨이라는 운동 기구가 양족에만 바벨이 있고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듯이 그렇게 오히려 프래질과 안트프래질의 양 극단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리스크 관리법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옵션은 하나의 목적을 정하고 달려가는 여행가이기 보다는 그 때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목적과 방향을 지속적으로 수정해가는 산책가처럼 계획 수립에 있어 다양한 방향과 변화를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안티프래질은 본래는 안티프래질한 세계의 리스크에 어떻게 적절하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책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예기치 않은 리스크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과잉 정보에 매달리게 되는 것도 어떻게든 리스크를 최소하화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심 탈레브가 말하듯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리스크 관리법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대개의 경우 수정되어야 할 하나의 신화로 부터 파생되어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심 탈레브는 바람직한 안티프래질의 태도로서 근대에서는 가장 공격받는 '꾸물거림'을 내세운다. 무조건 '빨리! 빨리!'를 내세우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비난받는 태도이지만 나심 탈레브는 이러한 태도야 말로 가장 현명한 안티프래질한 대처라고 강조한다. 무조건 덥석 물기 보다 과연 먹어도 좋은 것인가 먼저 이리저리 요모조모 다 따져보라는 것이다. 하나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정보 수집, 충분한 토론과 의견 수렴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이 태도의 중요성은 이미 4대강 사태에서 우리 역시 충분히 본 바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안티프래질의 말에 나름 공감이 간다. 대니얼 카너먼의 말 그대로 이전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더 풍성해진 것 같다. 현명함이란 어쩌면 많은 정보를 참조하면서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안티프래질'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리크스에 대하여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도를 그려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진정 보물지도가 되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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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0-1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생각에 관한 생각>을 보니 탈레브의 격찬이 있던데, 그 탈레브의 책이군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낼 가서 냉큼 사와야 겠어욤^^
알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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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10월의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했다.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른다. 9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하다.

 그러고보니 9월엔 남긴 리뷰도 별로 없네.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지 한번 헤아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9월의 신간들을 추천해보려 한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은

 읽어보지 못했다.

 비록 작품은 접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름은 알고 있다.

 의외로 이 작가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서 꼭 일본 소설을 이야기 할 때는 그 작가의 '일식' 좋더라며 한 번 읽어보라는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러 서점의 매대 위에서 그의 책을 보노라면 '이 작가가 그토록 유명한 작가였나' 생각하며 한 번 만져보기는 했지만 그게 실제 읽기로는 잘 연결되지 않았는데 그 때는 아무래도 유명세엔 어느정도 허세가 끼어 있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엔 일련의 추천 받은 작가들에 대한 실망의 경험들이 쌓여있기도 했고...

 그러다 문득 이번에 이 작품을 봤다.

 '결괴'라는 제목도 제목이려니와 인간의 악의와 심연을 명징하게 그려낸 소설이라고 하니 요즘 '악'만큼 내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또 없어서 이제라도 한 번 만나볼까 싶어진다. 듣기에 히라노 게이치로는 꽤나 현학적인 작가라는데 그런 작가가 그려내는 악의와 심판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고백한 바 있지만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를 한 순간에 바꿔버린,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 사건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옴 진리교 사건이다. 저번에 읽었던 온다 리쿠의 'Q&A'도 바로 그 옴진리교를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으로 다뤘던 작품이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도 바로 그 사건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한다. 2008년에 나온 히라노 게이치로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온다 리쿠와 비교해 읽어보면 더욱 재밌을 것 같다.

 

 

  김대현 작가의 '홍도'는 제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시놉을 읽어보니 아무래도 '홍도야 우지마라'의 그 홍도인 듯 하다. 그런데 그 홍도가 소설에서는 불사(不死)의 몸이다. 현재 그녀의 나이 무려 433살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름이자 노래인 홍도이 사연을 가지고 이렇게 불사의 존재가 헤쳐온 이야기로 만들다니.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홍도 그녀의 몸엔 조선과 일본제국강점기 그리고 한국의 현대사가 그대로 체화되어 있는 셈이다. 그 역사가 체화된 몸이 여인으로서 살아온 수백 년에 걸친 절망과 이별 그리고 아픔을 이야기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여인 잔혹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래의 익숙함 속에 쉽게 가리워져 버렸던 그녀의 아픔, 눈물, 목소리... 그렇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아픔과 눈물 그리고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읽어보고 싶다.

 

 

 

 증오만큼 지속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분노만큼 오래  간직하기가 힘든 것도 없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나?

 분노도, 증오도 오래 가지고 가자면 그만큼 품이 든다.

 그냥 사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아궁이가 활활 타오르게 하려면 끊임없이 마른 장작을

  넣어줘야 하듯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내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산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예리한 칼을 접을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때가 온 것일까?

 이 책의 소개글은 과연 사과의 소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생경한 풍경을 전해주고 있다.

  도약인가? 전향인가? 그 뚜겅을 열어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이렇게 한 책의 소개글을 쓸 때마다

  정말 내가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은

  내 머리를 사정없이 벅벅 긁는 일이다.

  내가 긴다이치 코스케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느끼는 요즘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소설의 자매편인 '요리코를

 위해'가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 것일까?

 정말 아무리 해도 도통 생각이 안 난다.

 완전 백지다.

 

 분명히 읽었고 으음, 괜찮네 까지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 1의 비극은 그 '요리코를 위해'의

 안티태제와도 같은 소설이라고 한다.

 그러니 읽어보고 싶다.

 내 팔랑귀는 이런 말에 혹하기 마련이다.

 그건 그렇고 기억하는 책보다 잊어버리는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꾸준히 리뷰를 써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여름의 맛'은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하성란 작가의 소설이다.

 표지의 복숭아가 참 맛나게 보인다. 작가의 이름과 표지에 이끌려

 소개글을 찾아 들어갔는데,

  헉!

  아무런 정보가 없다.

  대신 이런 말만 덩그마니 놓여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부족하여 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1 상담을 이용해 주십시오.

 

  행여 문지의 직원도 나처럼 연일 술판이라 쓰러지신 건 아닌지 상상하면서 '그렇다면 직접 찾아보지 뭐' 하면서 검색 신공에 들어갔다.

 

 

  언론 보도가 하나 나왔다. 설정이 재밌다. 주인공이 일본의 금각사로 관광을 갔다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발음상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 은각사를 금각사로 오해하고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반쯤 껍질이 벗겨진 복숭아를 받게 되고 그 때 먹은 복숭아의 맛과 당신은 복숭아를 정말 좋아하게 됩니다라는 남자의 저주의 말 때문에 계속 그 맛을 찾아다닌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총 10개의 단편은 바로 그 남자의 여정을 하나씩 담고 있는 셈이다.(여기엔 올해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인 '카레 온 더 보더'도 실려 있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이 소설이 감각으로 충만해 있음은 상상할 수 있는 듯 하다. 과연 그 감각들이 어떤 소설적 세계를 만들어갈 지 궁금하다.

 

 얼마전에 읽은 구병모 작가의 '파과'도 과일이라면 과일일 수 있는데 이렇게 과일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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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1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 예전에 <일식> 읽어봤는데, 생각이 안 나는군요 잘 썼다는 말은 들었는데... 자료 조사를 아주 잘해서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달도 읽어봤군요 이번에 나오는 <결괴>는 조금은 알기 쉬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성란 소설 설정이 재미있군요 한번 맛본 복숭아를 찾아다니는 이야기라니, 그러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겠군요

책을 읽고 써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려요 그래도 글을 남겨두고 나중에 보면 어렴풋이라도 떠올릴 수 있겠지요


희선
 
[개의 심장]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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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개의 심장'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뒤늦게 불가코프를 알게된 저에게 있어 오래도록 꼭 한번 읽어 보고팠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96년인가 열린책들에서 발간한 '개의 심장'은 벌써 절판의 운명을 걸었고 중고로도 구하기 어려운 참 만나보기 힘든 책이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개의 심장'이 특히나 반가웠습니다. 애타게 찾을 땐 한 권도 안 나오더니 창비에서도 '개의 심장'이 나와 약간 헛웃음도 짓게 만들더군요.

 

 

 아무튼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영화로도 몇 번인가 만들어지고(그 중엔 '제7의 봉인'에 나왔던 막스 폰 시도우가 개-인간을 만드는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로 분한 것도 있습니다.) 소설에서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가 늘 아이다의 아리아 한 소절을 흥얼거리는 것처럼 오페라로도 몇 번 만들어진 만큼 어느정도 작품성은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원래 불가꼬프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다고 하죠. 필립 필리뽀비치가 흥얼거리는 오페라의 아리아는 그 꿈의 잔재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개의 심장'이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을 보았다면 불가꼬프가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런 이유로 필립 필리뽀비치를 작가의 페르소나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특히나 그가 개-인간 '샤리꼬프'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결정적으로 내치는 이유가 샤리코프가 교수에 대해 중상모략 했기 때문임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시의 불가꼬프도 근거없이 쏟아지는 음해와 온갖 중상모략 때문에 가장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요. 필립 필리뽀비치의 샤리꼬프에 대한 분노엔 어쩌면 불가꼬프가 당대의 소련에게 보내는 분노가 그대로 투영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과연 개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첫 장면부터 절 휘어잡더군요. 불가꼬프는 상상력이 참으로 왕성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개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없을테죠. 구정물 쓰레기통을 뒤지다 요리사로 부터 옆구리에 뜨거운 물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굶주림을 면할 조금의 음식을 위해 이리저리 구걸하고 눈치보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개의 심리가 참으로 리얼하게 느껴졌습니다. 보통 '개의 심장'은 혁명에 대한 반감을 노출시킨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만 저도 그것과 다른 의미를 잡아내기는 어렵더군요. 그만큼 불가꼬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가꼬프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혁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죠. 아시다시피 그의 고향은 키예프입니다. 그는 거기서 원래는 의사가 되었었죠. 그러다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지고 불가꼬프는 야전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러시아 남부 전선으로 참전합니다. 글고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불가꼬프는 갑자기 얻은 병으로 그제서야 군복무에서 해제되어 고향인 키예프로 돌아옵니다. 오래도록 떠나있었던 정겨운 고향이었지만 예전의 평온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고향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혁명이 맞물려 독일 점령군의 어용 정부와 그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내려는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러시아 혁명주의자들과 거기에 맞서 제정 러시아를 다시 복권시키려는 백위군들이 굶주린 개들이 던져진 뼈다귀 하나를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불가꼬프는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개의 심장'에서 보이는 혁명에 대한 반감의 실상은 바로 그거예요. 외부의 힘으로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 드는 모든 것을 그는 거부하는 것이죠. '개의 심장'도 정확히 그런 입장에서 쓰여졌습니다.

 

 샤리꼬프가 만들어기지 전,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의 말엔 이러한 반혁명적인 것들이 넘쳐나지요.

 

 "우리 아파트에서 더 좋아지는 쪽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거요. 그래요. 저 가수들을(조금 전 장면에서 방 일곱개를 혼자서 쓰고 있는 필립 필리뽀비치에게 방을 인민들과 나눠써야고 주장했던 볼셰비키들을 뜻함.) 진압하기 전까지는 다른 아파트도 모두 매한가지야! 오로지 그들이 자신의 연주회를 중지하기만 하면, 상태는 저절로 더 좋게 변화한다고!"  (p. 77)

 

 그건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가 언제 개-인간 '샤리꼬프'를 경멸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필립 필리뽀비치가 샤리꼬프를 경멸할 때는 대부분 샤리꼬프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무분별하게 따라할 때입니다. 샤리꼬프가 카우츠키의 책을 읽는다고 말했을 땐 놀라고 새삼 대견하게도 여기는 필립 필리뽀비치는 그 책을 읽고 내놓는 의견이라는게 당시의 볼세비키리면 늘 내놓는 의견을 그대로 따라한 것 뿐이자 네 생각을 말하라면서 대놓고 경멸하게 되지요. 볼셰비키들로 부터 한 자리를 얻어 청소과장이 되었을 때도 도시를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잡아들이는데(샤리꼬프는 원래 개였을 때부터 고양이를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가 인간의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고양이를 증오하는 것은 필립 필리뽀비치 말마따나 아직 그의 인간 두뇌가 채 접지되지 못하여 남아있는 개의 잔재인 것이죠.) 교수가 그 잡은 고양이들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샤리꼬프는 그걸 다람쥐 털로 만든 외투인 양 속여서 노동자들에게 월급 대신 지불한다는 말을 듣고는 경멸하게 됩니다.(원래 이 소설에 이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영어 번역을 보니 'credit scheme' 이란 말이 있더군요. 뒤에 실린 '악마의 서사시'를 보면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가 월급을 돈으로 받지 못하고 성냥이나 포도주로 받는데 그래서 'credit scheme'이란 월급 대신 받게 되는 물건이 아닐까 여겨졌고 그걸 비싼 다람쥐 털 외투로 속여 노동자들에게 파는데 샤리꼬프가 일조하고 있으므로 필립 필리뽀비치가 경멸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식입니다. 혁명을 통해 마치 대단한 존재라도 된 듯 뻐기지만 정작 하는 것이라고는 무분별하게 남의 것을 따라하거나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추악한 본성을 제한없이 드러내고 있으니 필립 필리뽀비치는, 그리고 불가꼬프는 혁명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죠. 하지만 필립 필리뽀비치 역시 그 보여주는 입장엔 그리 썩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일단은 엘리트 주의에다 제정 러시아적 귀족 취향에 꽤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하긴 불가꼬프 자신도 그랬죠. 그역시 제정 러시아의 복권을 위해 싸웠던 백위군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러한 혁명에 대한 경멸과 제정 러시아에 대한 은근한 향수를 내뿜고 있는 '개의 심장'은 1920년대의 소련에서 당연히 출간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지어진 지 60년이 지난 1987년이라더군요.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가히 얼마나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네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드디어 만나게 된 '개의 심장'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치고 열린책들판 '개의 심장'은 번역이 참 많이 아쉬운 소설입니다. 제가 러시아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직역 하느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직역도 좋지만 그래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좀 자연스럽게 다듬거나 의미가 정확히 통하도록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참 많이 남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끌림' 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의 말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물론 책에서도 별다른 설명도 안되어 있고 말이죠. 일례로 그 끌림이란 말은 이렇게 나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끌림...!"(p. 163)

 

 "이렇게 내 경우로 이미 증거가 나왔습니다. 이야기하세요! 이 쁘리오브라젠스끼가 말했다고. 끝났어요! 끌림!"

 "끌림!"

 그는 다시 반복해서 외쳤다.(p. 189)

 

 "아주 특별하게 예외적인 병신 같은 놈."

 "그러나 그가 누굽니까? 끌림! 끌림!"

 교수는 소리쳤다.

 "끌림 추군낀!"(p. 192)

 

 이렇게 교수의 입버릇인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창비 판에는 뭐라고 되었는지 심히 궁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문판에는 'Klim'이라 되어 있더군요. 영어를 보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짐작 되었습니다. 물론 전혀 아무런 뜻이 없는 러시아 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Klim은 만트라의 하나로써 주로 욕망 혹은 정욕의 씨앗을 일컫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필립 필리뽀비치가 인간이 다시 젊어지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무리하게 개에다 인간의 뇌하수체를 연결한 결과 '샤리코프'를 태어나게 했으므로 바로 그 욕심, 혹은 욕망을 스스로 한탄하는 것이 아닐까(혹은 그런 의미로 불가꼬프가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보다 쉽게 독자에게 전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업보'란 말로 번역해보면 어떨까 싶어졌습니다. '업보구나!' 혹은 '업보야!' 이런 식으로...

 

 아무튼 이런 식으로 매끈하지 못한 표현,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 그리고 얼른 이해되지 않는 모호한 단어들이(이를테면 '덧신' 같은 것. 혹시 밸린키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고유명사로 써 주었으면 좀 더 명확하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장화를 신어야 하는 부분에 덧신을 신어라는 표현이 있어 의아하기도 했거든요.) 좀 있어 소설의 상황이나 대화들이 잘 와닿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사도 많이 나오는데 매끄럽게 번역되어 있지도 않고 거기다 같은 문장에서조차 경어로 썼다가 반말로 썼다가 마구 뒤섞여 있는 터라 더욱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러시아어에 경어가 따로 있어서 일부러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독자로서는 어조를 좀 통일시켰으면 좋겠더군요. 샤리꼬프에게도 경어와 반말이 혼용되어있어 등장인물들이 샤리꼬프들을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 것인지 얼른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밖에도 체크해 놓은 문장들이 많은데 러시아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이를테면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능숙하게 보드까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교수가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말을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끌림!"하고 말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 다시 또 영어판을 찾아보았습니다.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 은 딱 한 단어 'PHASE'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보통 'PHASE' 하나만 나올 때는 뭔가 최종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도 뜻이 통합니다만 그보다는 '진짜 인간이 다 되어버렸어' 이런 뜻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이 다 되어버린 '샤리코프'에게 더이상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게 되어버렸으므로 마지막과 같은 한탄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구요. 이렇게 아무튼 뭐랄까 글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는 번역들이 좀 있는데 (특히 사람 앞에 붙이는 호칭 같은 것. 서양에서는 의례 붙이곤 하는 DEAR 정도의 의미를 굳이 귀여운으로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씨만 붙여도 되지 않을까요? 이름앞에 '친애하는', '사랑스러운', '귀여운'과 표현이 자주 나와서 좀 어색했습니다.) 그런 걸 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더군요. 열린책들에서 나온 러시아 소설 읽으면서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문장들을 만나본 기억은 없는 것 같아서 이번 '개의 심장'은 더욱 아쉬움이 컸습니다.

 

 모처럼 나온만큼 독자들이 불가꼬프의 매력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도록 다가가기 쉽게 나와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이죠. 이런 아쉬움을 마침표처럼 남기면서 '개의 심장'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을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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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저 개를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하며 놀라워했을지도 모르는데... 개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결국은 바깥에서 바꾸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군요 마지막에는 다시 개로 돌려놓는다고 하더군요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군요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은 '진짜 인간이 다 되어버렸어'가 더 맞을 것 같네요


희선

까쨔 2015-04-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끌림은 추군낀의 이름입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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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핍과 순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 중의 하나로 시작한다. 쓰쿠루가 스무 살을 넘긴 그 해, 늘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뒤로 하루키는 왜 주인공 쓰쿠루가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짙은 구름으로 소용돌이치는 허무였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p. 9)' 밖에는 없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들려준다. 한 마디로 그건 상실 때문이었다. 그토록 완벽했던 '일체감'과 '조화로운 어울림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공동체로부터 쓰쿠루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쫓겼던 것이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아카, 아오, 구로, 시로. 모두 적색, 청색, 하얀색 그리고 검은색을 뜻하는 이름으로 그렇게 모두들 색채가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 이름에겐 그런 색채가 없었다. 그는 그걸 늘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름에 색채가 없는 만큼 자신의 삶에 뭔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게 있다고 여겼다. 다른 친구들은 이름의 색깔 그대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저 혼자 '텅 빈 그릇'처럼 산다고 여겼다. 쓰쿠루가 내쫓겼을 때, 죽음을 계속 생각할 만큼 억울하고 아팠지만 쓰쿠루가 단 한 번도 친구들에게 왜 그러는지 다그쳐 묻는다거나 스스로를 변호하려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형도 시인이 언젠가 '내 영혼은 온통 검은 페이지니 누가 들여다보려 하겠는가?'했던 것처럼 스스로 색채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리 당한 것이라 스스로 납득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왜 제목이 하필이면 '색채가 없는'이 되었는지 이해할 듯하다. 즉 다자키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16년동안 다자키가 한 것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늘 사람들이 도착하게 되는 '역'을 만드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살았다. 그는 '우연히 주어진 땅'이라 여기는 '도쿄'에서 '망명자'로 살아왔다. 되도록 '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체류허가를 박탈당하지 않도록(p.421)' 조심스럽게 말이다. 한 마디로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그가 그 곳에서만은 강제 출국 당하지 않도록 기를 쓰고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스무 살 때의 아픔이 아직도 번번이 목에 걸려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은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과 정면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수영장 밑바닥에 오래 가라앉아 있는 돌처럼 묵혀둘 뿐이다. 하지만 쓰쿠루가 다시금 새롭게 만나게 된 여인 '사라'의 말대로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p.51)다. 아무리 깊이 묵혀두고 애써 잊어버리려 하여도 한 번 일어난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쓰쿠르의 노력은 위험을 만났을 때 타조가 하는 짓과 같다. 자신의 적에게서 위협을 느낄 때 타조는 달려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땅에다 눈을 감고 얼굴을 박는다고 한다. 그렇게 눈감아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진짜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타조의 짓이 적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듯 쓰쿠루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진정으로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가려면 얼레에 매인 실을 끊어야 하듯이 진정으로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면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과거의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가 늘 함께 있고 싶은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라가 바로 그 여인이다. 그건 늘 수영장 물 아래 밑바닥에서 두 귀를 막고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에게 있어 삶이 모처럼 선사해 준 부활의 기회였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삼켜서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먼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것부터 토해내어야 한다. 뚜껑을 덮어두고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그 과거의 상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례를 떠난다. 그건 과거로의 여정이다. 그 순례의 쓰쿠루는 연어 인간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추방한 그 장본인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산란하기 위하여 자기 내부에 가득 깃들어 있었던 아픔을 '컥컥' 토해내는 여정인 것이다.

 

 앞서 '색채가 없는'이란 말은 결핍을 본질로 하고 있는 다자키 쓰쿠루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뒤이어 제목에 '순례'가 나오는지도 수긍이 간다. '순례'란 궁극적으로 보자면 다름 아닌 결핍의 효과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걸. 따지고 보면 우리의 발길을 바깥으로 이끄는 것은 현재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순례의 발걸음은 그렇게 텅 빈 그릇과 같은 삶을 메우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 하루키가 바로 그 충족을 위하여 다자키 쓰쿠루를 순례로 이끌었던 것인가를. 과연 이 소설은 쓰쿠르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색채'를 찾아주는 이야기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하루키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2. 하라다 그는 왜 그렇게 사라졌는가? 혹시 괴테의 '파우스트' 변주는 아닌지?

 

그 말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상의 '뒤틀림'이다. 어쩌면 당신 역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참으로 기묘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따라다니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바로 하라다의 존재다. 도대체 그는 왜 나온 것일까? 소설의 중반에서 그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끝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쓰쿠루에게 완벽했던 고등학교의 공동체적 경험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즉 '순례의 해'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지만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종적을 감춘다. 베르만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순례의 해'는 이어지지만 그는 나오지 않는다. 문득 지금은 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고 있을 '보이저2호'가 생각난다. 거기엔 혹시나 만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들에게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로 문명화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그게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것만은 살아남을 것이다. 존재했던 인류의 메아리로써. 하라다 역시 사라진 뒤에는 메아리로 존재할 뿐이다. 소설 후반에 쓰쿠르가 수영장에서 우연히 하라다와 닮은 이를 보고는 그 역시 자신의 목에 걸린 가시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하라다란 이름도 색채가 있다. 그건 회색이다. 쓰쿠루를 결정적으로 추방시킨 장본인이 바로 검은색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시로'라는 걸 떠올려보면 회색은 그 검은색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색이므로 어쩌면 하라다와 시로는 일종의 존재의 연속으로 모두 쓰쿠르에게 메울 길 없는 상실을 가져다주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기엔 또 뭔가 부족한 게 있다. 하라다가 들려주는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의 에피소드다. 도대체 특정 개인에게 죽음을 건네줄 능력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있으며 또 그런 자들은 사람들이 가진 색채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왜 나온 것일까? 그 이야기의 의미나 진실 역시도 두 번 다시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라다는 음반과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바로 이런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어정쩡하게 끝나버리는, 그래서 뭔가 뒤틀려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구성을 소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하루키는 왜 하라다를 등장시켰으며 이런 에피소드를 본격적인 순례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배치한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있어 얼른 들어오는 것은 '미도리카와'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도 색채가 있다. 바로 녹색이다. 그 녹색의 이름을 가진 자가 회색의 이름을 가진(정확하게는 하라다의 아버지. 이름은 같다.)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를테면 자네는 악마라는 걸 믿나?"(p.102)

 

 아! 이 말에서 깨닫게 된다. 하루키의 미도리카와 에피소드는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변형한 것임을. 단서는 이미 하루키에 의해 주어져 있다. 저 '악마'라는 말 외에도 미도리카와가 '녹색'이고 하라다는 '회색'임을 감안한다면, 이 말은 저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명한 문장, '모든 진리는 회색이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 그대로가 아닌가! 미도리카와가 죽음을 건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만큼 극적인 삶의 변화를 메피스토텔레스 역시도 파우스트에게 건네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하루키의 의도는 보다 분명해진다. 미도리카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에게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려는 것임을.

 

 하라다는 바로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그 때문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결핍을 메우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깨닫게 된다. 보다 더 큰 절망의 원인은 결핍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에 있었음을.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와 같다. 한 마디로 구원은 그 부족한 것을 메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킬 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바로 그 말을 위해서 하루키는 기꺼이 하라다를 영원히 부재하는 존재로 남겨두는 구성상의 뒤틀림을 무릅썼다. '상실'이라는 그 상태 자체에 우리의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시선 자체에 우리의 아픔마저도 달려 있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3. 정말은 그 바라보는 시선에...

 

 그렇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우리가 살면서 필연코 직면하게 되는 결핍과 상실을 그저 메우고 치유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쓰쿠르가 소설 후반에 하게 되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멀리 핀란드에 이르는 순례의 여정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은 왜 하루키는 그 시선을 문제삼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건 분명 이 소설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전의 소설들, 그러니까 1995년,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가스 살포로 인해 이제까지의 문학적 태도를 그동안의 '디태치먼트(무관심)'에서 '커미트먼트(전념, 헌신)'으로 전면 수정한 그에게 있어 그 첫 일보가 되는 '태엽감는새'부터 얼마전에 나온 '1Q84'까지는, 그 결핍과 상실을 메우는 일이 중요했다. 하루키는 그동안 바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해서 써왔던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외부로, 타인으로 향하는 소설을 써 왔지만 그 동기는 어디까지나 지금 문득 안아버린 결핍과 상실을 메우고 치유하는데 있었다. 이는 물론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가스 살포 사건이 새삼스레 확인시킨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 앞에서 이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하루키 스스로의 응답이었다. 그는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가 무엇보다 오래도록 고착화되었던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에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 폐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외부로, 바깥으로,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더 이상 그런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소설 후반에 펼쳐지는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언뜻 보아서는 전작의 태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하루키의 세심한 연출과 대화에 주목하면 뚜렷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바로 이 소설은 '위로'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로 이어지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정이 아닌 위로의 여정이다. 물론 위로도 치유의 일종일지 모른다. 하지만 둘이 전적으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이 둘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그건 아마도 위로든 치유든 그 받는 대상에 대한 평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치유는 그 받는 대상 스스로 부정토록 여기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위로는 그 스스로 긍정하도록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직접 남을 위로할 때를 떠올려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위로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되는 것이 그 받는 대상 스스로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그와 같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 모두는 늘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쓰쿠루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쓰쿠루는 색채가 없는 그가 색채가 선명한 친구들로 인해 모자람이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것이 바로 쓰쿠루였다고. 이를테면 그는 구로가 만든 도자기의 색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색채는 남편의 작품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양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어떻게 부각할 것인가, 그것이 색채에 주어진 역할이었다. 색채는 아주 엷고 과묵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문양의 배경을 이루었다.(P. 329)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타인들을 빛나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빛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거꾸로 나눠주는 존재였다. 쓰쿠루는 자신의 색채 없음으로 그 공동체로 부터 추방당했다고 여겼지만 아카는 그토록 완벽했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결정적으로 그렇게 빛을 나눠주던 쓰쿠루가 도쿄로 홀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핀란드에서 하얀색의 이름, 구로는 그 시절 쓰쿠루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주변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사랑받고 긍정받는 존재였다. 텅 비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텅 비어있을 수 있어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은 구로도 그렇다. 하얀색 역시도 배경이 되어 다른 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렇게 구로는 쓰쿠루와 가장 유사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눈부시게 빛나던 소녀 시로 곁에서 늘 부속물 같은 존재로 취급 받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그대로 납득한 가운데 시로를 더욱 잘 보살피던 소녀였다. 이런 관계였기에 어쩌면 쓰쿠루와 구로 둘이 그런 관계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쓰쿠루와 비슷했던 구로였으나 결국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그건 그녀 표현에 따르자면 '나쁜 난쟁이'를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Q84'에 나왔던 '리틀 피플'의 변형으로 보이는 그 나쁜 난쟁이'는 뭐라고 명확하게 정체가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 존재의 있고 없고는 어디까지나 시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래에 던지는 막연한 불안감의 시선이 바로 그 나쁜 난쟁이들을 불러온다. 구로는 결코 쓰쿠루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시로의 곁을 떠나게 된 것도 언제까지 시로를 돌봐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로 역시 그러하다. 소설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이 바로 시로의 삶이다. 그 때 가장 빛났고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시로가 가장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로는 이렇게 말한다.

 

"유즈(시로)는 더 이상 백설공주가 아니었어. 아니면 백설공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지쳐 버렸는지도 몰라. 너 또한 일곱 난쟁이라는 역할에 지쳐 버렸고."(P. 354)

 

 그녀들을 지치게 만든 결정적인 장본인이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시로는 당장이라도 파국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고 구로는 이대로 시로만 돌보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불안했다. 미래에 던지는 그 불안의 투사, 자꾸만 부정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나쁜 난쟁이들의 정체였던 것이다. 이제 더이상 그런 나쁜 난쟁이들에게 흔들리는 '구로'가 아닌  쓰쿠루처럼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드는 의연한 '에리'가 된 그녀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나쁜 난쟁이들을 조심하라고.

 

 여기에 하루키의 진심이 있는 것 같다. 왜 그가 이토록 세세하게 시선을 문제삼는지도 바로 여기서 그 이유가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미래에 던지는 불안의 시선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것과 연결되어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게 함이다. 세상엔 정답 같은 게 없다. 완벽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자명한 진리다. 하지만 우리들은 마치 그런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 완벽한 삶이 있다고 여긴다.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나와의 간극. 바로 그것이 우리 아픔과 절망의 원인이다. 완벽함이 있는 곳에 고통과 절망이 있다. 가장 눈부신 빛의 가장자리가 가장 어두운 법이듯이 말이다. 시로가 그랬듯이 눈부신 색채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둡고 힘들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 완벽이라는 것, 정답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가상이기 때문이다. 아오가 팔고 있는 '렉서스'의 의미처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어. 렉서스란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아오는 웃었다.

"자주 듣는 말인데, 의미는 애당초 없어. 그냥 만든 말이야. 뉴욕의 광고 회사가 도요타의 의뢰를 받아 만든 말이야. 아주 고급스럽고 의미가 깊은 듯한 울림이 좋은 말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야."(P. 210)

 

 그렇게 완벽함이란 만들어진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실제로 부터 보증받지 못하는 것이기에 시로가 그랬듯 그 중심에 설수록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라가 '잘 가 카롤라, 반가워 렉서스.'라고 했듯이, 에리가 '잘 가 소설, 반가워 도자기'라고 또 반복했던 것처럼 정답과 같은 완벽함이란 이다지도 쉽게 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시선이다. '언제 또 변할지 모른다'라는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그저 불안할 뿐이지만 '언제 변하든 상관없다. 난 그대로 받아들일테니'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그런 말이 하필이면 가장 변화를 긍정하는 사라와 에리가 똑같이 반복한다는 것은 바로 이 시선이야말로 하루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렉서스'에 깃든 의미는 손가락이 여섯 개인 '다지증' 에피소드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쓰쿠루는 일하고 있던 한 역사의 역장으로 부터 역에 버려져 있던 잘려나간 '여섯번째 손가락'을 발견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다지 특이한 경우도 아니고 통계적으로 거의 500명 가운데 한 사람은 거기에 해당될 정도로 확률적으로 흔한데도 우리가 그토록 여섯번째 손가락을 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렇게 성년이 되어 스스로 잘라서 버리거나 어릴 때 부모들이 잘라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왜 잘라버리는 것일까요?' 묻는 쓰쿠루에게 역장은 다섯 손가락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전에 아오를 만날 때 쓰쿠루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고등학교의 완벽한 공동체를 다섯 손가락에 비유했던 것이다. 또한 쓰쿠루는 언젠가 꾸었던 시로와 구로가 모두 나와 정사를 벌이는 꿈에서 그녀들의 손가락들을 특히 강조해 말하기도 한다. 그만틈 여기에서의 다섯 손가락은 완벽함과의 상관물이었다. 거꾸로 잘려나가는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 완벽함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아서 제거되는 것들의 상징인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제거되었던 쓰쿠루도 스스로를 그런 '여섯번째 손가락'으로 여겼다. 그렇게 잘려나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그는 꿈을 꾼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데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이 옆에서 악보를 기막히게 넘겨주는 꿈을. 하지만 그 꿈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를 지겨워한다. 이 꿈은 그대로 완벽함의 가상에 희생당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의 능수능란한 악보 넘김은 피아노 연주가 비유하는 완벽함에 있어서 손가락이 다섯개나 여섯개인지는 하등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함의 가상에 집착하고 있는 대중들은 그 연주에 아무런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대놓고 기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완벽함의 가상과 여섯번째 손가락들의 대립이 전면화되는 가운데 청중들로부터 '그로테스크할만큼 증폭되고 과장된 소음과 기침 소리와 불만의 신음 소리만이 그의 귀에 들리지만' 쓰쿠루는 연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그 음악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꿋꿋하게 자기 식대로 연주를 계속한다.

 

 이렇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쓰쿠루가 달인이다. 아오와 아카 그리고 에리가 쓰쿠루를 만날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여전히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구나!'가 바로 그 말이다. 이것이 하루키의 정답이다. 그건 이미 쓰쿠루란 이름 자체에 나와 있기도 하다. '쓰쿠루'란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인데 쓰쿠르 스스로는 그 '만들다'를 스스로 '무형에서 형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라 정의한다. 완벽함이란 설계도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형성해가는 그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이름인 것이다. 쓰쿠루의 삶도 그랬다. 어디와 닮으려 애쓰는게 아니라 무형의 공간 위에다 '역'이라는 유형의 공간을 만들어왔던 것처럼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저 한 발, 한 발 착실히 내딛여 왔던 것이다. 물론 그라고 해서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라'와 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혹시 시로를 죽인 게 자신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는 결국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삶이란 거대 여정에 있어 저마다 소중한 한 걸음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늘 규칙적으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된 손목 시계 처럼 오히려 그 모자람을, 불편함을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제 깨닫는다. 핀란드에서 에리가 말했던 대로 '참을성 있게 어린 새에게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어미 새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이러한 쓰쿠루의 모습은 마지막 사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P. 436)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뒤이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눈부신 색채로 만개한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 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 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P.437)

   

 하루키가 감동적으로 보여주듯이 삶의 모든 걸음이 다 소중하다. 삶이 가진 모든 모습이 다 가치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시선은, 그렇게 나쁜 난쟁이들에게 유혹당해 불안한 마음을 나와 미래에다 투사하는 시선은 삶의 색채를 나누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져야 할 것과 기피해야할 것을 나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루키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게 나누는 것만큼 우리의 삶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타인이 가진 색깔을 볼 수 있었던 미도리카와가 줄 수 있었던게 오로지 죽음뿐이었듯이 말이다. 그런 미도리카와조차 이렇게 충고한다. "논리의 실을 이용하여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P. 116)라고. 그러므로 삶의 모든 순간을 결핍'과 상실이라는 어두운 색깔로 채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감정들을 낳게 하는 '완벽함'이란 정답 또한 '렉서스'만큼이나 의미없는 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키의 조언대로 시선을 완벽함을 찾거나 먼 미래에 두는 게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는 우리의 발 바로 앞으로. 내게 없다고 해서 안달하지도 않고 잃어버릴까 불안해하지도 않으면서 확실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지 않도록' 해주는 구원의 걸음이다. 정말로 신의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실은 없다. 오로지 계속되는 삶을 누리는 '춤'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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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것도 어느 정도 살아봐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쓰쿠루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은 본래 헤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자라는 것이죠^^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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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새벽 2시를 넘었다.

 오늘은 지인들과 만나 왕가위의 '일대종사'를 보고 왔다.

 같이 본 이들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도 좋았기에 지금까지 남은 일도 처리하고 영화의 여운에 빠져 있다가 (뒤풀이 자리에서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대해 개탄하느라 정작 영화 이야기는 못했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려하자 문득 오늘이 신간 추천 마지막 날이라는 게 생각났다.

 

 해서 부랴부랴 일단 집계부터 하고 추천 페이퍼를 쓴다.

 아직 모든 분이 다 올려주신 건 아닌데 아무튼 현재까지로는 위화가 단연 앞서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받은 추천수가 무려 10표다. 압도적인 표 차이라 아무래도 1위는 위화의 '제7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화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니 새삼 놀랐다. 2위도 외국 작품이다. 얼마전 부천 영화제에서도 이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라는 작품으로 원작도 읽어봤는데 감수성이 뭐랄까 상당히 독특했다. 일단 사물을 독특한 감각으로 인지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읽으면 '청춘'이랄까, 그런게 좀 물씬 느껴지는데 그래서 인상 깊었다. 이번에 소개된 '누구'는 그에게 최연소 나오키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을 준 작품이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내놓은 작품마다 잇달아 상을 받았으니 꽤나 상복이 있는 작가이다.

 

 위화의 '제7일'도, 아사이 료의 '누구'도 가지고 있다. 둘 다 되면, 으으음...

 

 그렇다고 해서 이번의 추천 페이퍼가 거기에 영향 받은 건 아니다. 원래 추석 연휴도 있고 하니 이번 추천은 좀 가볍게 나가려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장르물로만 채우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검색 도중 편혜영 작가의 소설이 눈에 띄었다. '옷!' 이건 또 빼먹으면 안되지. 이번 추천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실제 보니 표지가 아주 멋졌다.

 그래서 더욱 읽고 싶은,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 그 세번째로 소개되는 작품,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이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모두 두 편이 나왔는데 요시키 시리즈를 열었던 해문에서 나온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세작품 모두 공통점이 있다. 사건이 언제나 열차를 중심으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북의 유즈르'는 '유즈로 호'라는 열차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시간도 마침 설 연휴이다. 그래서 추석 연휴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읽으면 더 안성마춤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순수하게 본격의 재미를 추구한, 그래서 가볍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니 더더욱.

 

 

  이번 신간평가단에 만일 장르물을 선호하는 분들이 많다면 꼭 올라오지 않을까 했었던 두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래리 니븐의 '링월드'였고

 또 하나는 이 '시간의 습속'이었다. '링월드'는 뭐, SF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다 알만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헌책방을 떠돌게 만들었던 책이고 '시간의 습속'은 그 유명한 '점과 선'의 후속편이기 때문이다. 도리카이 주타로와 미하라 가이치가 다시 한 번 재회한다고 한다니. '점과 선'을 읽었다면 안 읽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말씀. 그런데 으음, '링월드'는 겨우 한 표. '시간의 습속'은 '두 표'다.

 예상이 이렇게 거침없이 빗나가니까 세상이 더욱 재밌어지는지도...

 

 

 

 

 '자비를 구하지 않는 여자'로 소개되었던 유시 아들레르 올센이 같은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코펜하겐(올센은 덴마크 작가다.) 경찰서에서 미결 사건만을 담당하는 특별 수사반 Q가 이번에는 20년전에 한 여름 별장에서 일어난 오누이 살해 사건을 맡는다. 이미 재판까지 끝나 범인이 곧 출소마저 앞두고 있는 종결된 사건인데 한 익명의 제보자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단독범이 아닌 여럿이 한 공동정범이 있다는 것을...

 그런데 거기에 연루되었다고 알려온 사람들 모두 재판받은 범인을 제외하고는 현재 덴마크의 사회 지배 계층이 되어 있다. 당연히 수사를 재개하자 온갖 외압들이 들어온다. 이제 수사관이 싸워야 하는 것은 사회다. 비슷한 도살자들을 사회 지배 계층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수사관들의 싸움을 그래서 더욱 와 닿을지 모르겠다. 부디 통쾌한 이야기가 되어주길 빈다. 마음껏 대리만족이라도 해 보게.

 

 

  잭 리처의 인기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인 것일까?

  아직 한 표도 얻지 못했다. 혹 다들 가지고 계셔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도 가지고 있는 책은 추천 페이퍼에 올리지 않으니까. 하하...

  그래서 사실 최고의 추천작이라 할만한 윌리엄 렌데이의 '제이컵을 위하여'도 뺐다. 링월드도 마찬가지고. 딴 이야기만 계속 했는데 아무튼 일단 출간되면 보지 않을 수 없는 잭 리처 시리즈. 원티드 맨도 좋다고 하니 역시나 읽어보고 싶다.

 

 

 

 

 

 

 

 

 

 편혜영의 네번째 소설집이다.

 2010년부터 2013년 최근까지 발표된 작품을 묶었다고 한다.

 저마다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그렇게 속에 '밤'을 품고 사는 여덟 명의 이야기다. 그 밤이 지나가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지나가고 있을 것일까? 아니, 어떻게 지나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 대답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여 읽고 싶게 만든다. 그러면 조금쯤 내 마음에 자리한 이 밤도 내어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소설 중 일부는 3.11에 빚졌다고 하고 있는데 그 편혜영에 보여진 3.11은 또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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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1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 책이 되면... 아쉽겠습니다^^
표가 많은 책이 되는 것인가요 표와는 상관없기도 한가요
요시키 형사의 세번째 이야기, 요시키가 나오는 것은 거의 열차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이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것도 나온다면...^^ '점과 선'도 열차와 관계 있는 거였죠, 읽지는 않았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형사가 같은 사람이군요

'도살자들' 제목은 좀 무섭기도 합니다 앞에 나온 Q는 특별수사반을 나타내는 거였군요 통쾌할지, 어떨지...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말이 멋있습니다 찻잔 속에서 나올 수 있을지... 우리나라 작가인데 3.11에 빚을 졌다니, 어떤 밤이 지나고 있을지... 이름은 아는 작가인데 책은 한권도 못 본 것 같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