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루 리드가 죽었다.

 봄에도 한 번 위기가 찾아왔었지만 다행히 간이식이 성공해서 더 생생해졌다고

 말하던 그였는데...

 갑자기 하늘나라로 부터 급한 공연 호출이라도 받은 것일까?

 어느 날 아침, 난 리드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날엔 진짜 담배 하나 물어줘야 하는데...

 인연 끊은 지가 너무도 오래인지라...

 그냥 시늉만 해야겠네...

 SORRY, LOU...

 

 공교롭게도

 그가 죽었던 날은

 나역시 심한 목감기로 계속 쿨럭거리는 기침에다 고열까지

 콤보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대니얼 카너먼이 그랬듯이,

 사람의 머리란, 별 거 아닌 우연의 겹침도 의미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왠지 이렇게 생각되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그 때의 내 고통은 당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징후였다고...

 그 때의 내 고통이 나름 당신의 영면을 위한 내 애도였다고...

 

 신열처럼 타올랐던 사랑이 허망함만을 게워내고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더라도

 봄이 와도 어딘가 남아있는 잔설(殘雪)처럼, 밭은 기침으로 남아

 마르셀에게 마들렌이 그랬듯이, 열병처럼 앓았던 시간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그 시간 한가운데에 LOU,

 당신이 있었고,

 그래서 난 오래도록 당신을 잊어야 했다.

 정말 PERFECT 하게,

 그 VICIOUS 같은 나날을 무사히 견디고

 WALK ON THE WILD SIDE 할 수 있도록...

 

 한동안 내 삶엔 당신의 노래가 없었는데...

 이제는 당신조차 없구나...

 

 결국 우리의 삶이란

 다음 상실엔 좀 덜 상처받기 위해

 조금씩 더 자신을 마모시켜 가는 게 고작인 것 같아...

 

 LOU,

 평온하길...

 당신의 노래대로 'I'M SO FREE'할 수 있게 되길...

 

 GOODNIGHT LOU,

 GOODNIGHT...

 

 

- 루 리드가 죽었던 바로 다음 날에 쓴 글 -

 

 

  아무래도 루 리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앨범은, 1970년 그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떠나 솔로가 되고나서 1972년에 두 번째로 발표한 2집, 'TRANSFORMER'일 것이다. 

 

 물론 변신 로봇이 나오는 마이클 베이의 영화 '트랜스포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실은 이 제목은 유태인 가정에서 자라오면서 스스로 억압했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트랜스포머'는 기존의 관습이 나눈 성 경계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나드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억압해왔던 루 리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제목대로 이 앨범은 그런 존재들을 위한, 거기에 바쳐진 음반이다.

'Walk on the Wild Side' 는 그런 것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다.

 

                 

          

 

Holly came from Miami, F.L.A.

Hitch-hiked her way across the U.S.A.

Plucked her eyebrows on the way

Shaved her legs and then he was a she

She says,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He said, 'Hey honey,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Candy came from out on the island

In the backroom she was everybody's darlin'

But she never lost her head

Even when she was giving head

She says,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He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nd the colored girls go

Doo do doo, doo do doo, doo do doo

Little Joe never once gave it away

Everybody had to pay and pay

A hustle here and a hustle there

New York City's the place where they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Jo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Sugar plum fairy came and hit the streets

Lookin' for soul food and a place to eat

Went to the Apollo, you should've seen 'em go go go

They said, 'Hey sugar,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lright, huh

Jackie is just speeding away

Thought she was James Dean for a day

Then I guess she had to crash

Valium would have helped that bash

She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honey,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nd the colored girls say

Doo do doo, doo do doo, doo do doo


 동시에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루 리드의 노래이기도 할 것이다. 가사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흔히 말하는 여장남자들이다. 물론 실존인물들이다. 듣기에 이름도 실명 그대로라고 한다. 노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열거하는 동시에 끝을 다른 방식도 받아들여보라는 것을 뜻하는 '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로 마무리 함으로써, 이들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맨 앞에 나오는 홀리의 이야기는 홀리에게 진짜 있었던 그대로라고 한다.


 그녀는 정말로 히치하이킹을 통해서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왔으며 도중에 친구의 잘못으로 눈썹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게 오히려 자신을 나타내는 신분증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한다. 홀리는 노래 뒷 부분에 나오는 캔디, 슈거, 재키와도 알게 되었는데 당시엔 모두들 앤디 워홀의 '팩토리 걸'이었다고 한다. 홀리도 그들처럼 앤디 워홀의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으나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거부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만들어질 때까지만 해도 루 리드는 홀리를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홀리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방송을 타서야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가 이 노래에 나온 것을 알았다.

그래서 루 리드를 찾아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해 루 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홀리 너는 브루클린에서 가장 입이 싼 계집애야."

그리고 둘은 바로 친구가 되었다.


 이 노래엔 이런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모두 정말로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리얼한 그녀들(그녀들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모두 자신을 여자라 여기고 있으니까.)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전하면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지, 때로는그런 인생에 한번쯤 다른 것을 받아들여보는 것은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느끼게 하는 노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외부의 감각'을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란 그저 빗방울이 우연히 부딪히듯, 그러한 우연의 소산인지 모르며, 그런 우연이 조합해 낸 존재인 우리들에게 있어 삶에 무언가 정해져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넌센스인지도 모른다. 실은 무언가가 정해져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여 있는 물은 기필코 섞는 법이듯, 늘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삶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생에 하루쯤 없어도 되는 날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하루키처럼 한 번은 슬쩍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황야로 과감히 발길을 이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삶의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그 변화가 의미를 만들어낼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위에 삽입한 이 앨범 커버의 사진에 대해서도 잠깐 말해볼까 한다. 원래 저 커버는 계획한 대로가 아니었다. 커버 촬영을 맡았던 포토그래퍼 Mick Rock는 의도한 대로 여러 사진을 찍었는데 그 중의 한 장이 그만 인화 도중 실수로 이상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사진이 오히려 정식으로 찍었던 사진 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걸 제출했고 급기야는 이렇게 덜컥 제작진에 의해서 커버로 결정되고 말았다. 한낱 우연의 소산에 불과했는데 역사적으로 길이 기억될 앨범의 아주 인상적인 커버가 된 것이다. 과연 '트랜스포머'다운 커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귀기울여 할 인생의 비밀이 들어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 앨범에서는 'walk on the wild side'외에 'Perfect Day'나 'Satellite of Love', 'Vicious' 등이 알려졌는데, '퍼펙트 데이'는 워낙에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니까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Satellite of Love', 'Vicious' 에서는 거기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어 이참에 같이 소개해 보기로 한다. 원래 Satellite of Love 는 밸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였다고 한다.


  사실은 그러니까 1970년, 원래 Loaded 앨범 홍보를 위한 연주 여행을 하는 도중 녹음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다음 앨범에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걸 루 리드가(원래 그의 노래였으니) 새롭게 녹음하여 이 앨범에 실은 것인데 재밌는 것은 이 앨범이 발표되고도 밸벳 언더그라운드의 맴버 그 누구도 그게 자신의 노래인 줄 몰랐으며 아니 아예 녹음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미공개 트랙들을 실은 박셋 앨범이 1995년에 나오고나서였다. 삶에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얼 그리 자신 혹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트랜스포머는 데이빗 보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만큼 그는 당연히 음반 제작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노래 후반에 들려오는 화음은 바로 데이빗 보위의 것으로 그는 즉석에서 이 화음을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루 리드는 그의 음악적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하고 있다.


Vicious 는 이 앨범의 가장 첫 곡이다. 이 노래의 탄생엔 바로 앤디 워홀이 관여하고 있다. 루 리드 스스로 고백하기를, 하루는 앤디 워홀이 와서 'Vicious'란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루 리드가 어떤 종류의 'Vicious'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앤디 워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Vicious, you hit me with a flower 이런 것 말이지."

이 노래의 첫 소절은 앤디 워홀의 그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Perfect Day'를 빼놓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어쨌거나, 한 때 나의 날들을 퍼펙트 데이로 만들어주던 루 리드는 이제 세상에 없다.

 '트랜스포머'처럼 살아가라는 그의 진심만이 이렇게 선율로 남아 오늘 밤을 적시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의 결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 지 모르겠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애도의 일환으로 시작된 글이라 원래는 목적도 결론도 없었던 글이었던지라. 그래도 이 한 마디만은 남겨두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글을 끝내려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한다.

 당신의 노래가 있어 행복했고, 그 노래와 그 기억을 난 또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저 위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트랜스포머 앨범의 뒷 커버. 옆의 남자는 루 리드의 절친으로 바지 때문에 한동안 많은 남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바지 안에 바나나를 넣은 것이라고. 하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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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신간 추천을 하려는데 '뚜르르~'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집주인이다. 내년 2월이 전세 기간 만료일이니 그렇지 않아도 전화 올 때가 되었지 싶었다. 그래도 좀 빨리 연락을 해 줄 것이지, 너무 늦게 한 감이 없지는 않다. 불만을 목소리로 내지는 못하고 어떻게 할 거냐고만 물었다. 월세로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요즘 월세 광풍이라더니 드디어 내게도 불어 닥쳐오는구나 싶었다. 다주택 소유자만 어여삐 여기는 정부 덕택에 힘없는 세입자는 오늘도 새우등처럼 휜다. 얼마를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듣고 생각했다. '어이 없군.'

 

 일단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띠리리~' 아는 부동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이 말하는 월세를 들려주고 과연 이 가격이 적당하냐고 물었다. '과하다'고 한다. 그보다 더 아래 금액으로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그럼 그렇지. 늦게 전화한 것도 나를 좀 급박하게 만들어 결국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려고 한 것은 아닐까 슬쩍 그런 음모론마저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주겠다고 해도 전세는 안된다고 하니 일단 보험 차원에서 전세를 좀 알아봐달라고 했다. '아, 또 이사를 해야 하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집안 곳곳에 담쟁이 덩쿨처럼 뻗어간 책들이 문제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다시는 책을 안 사야지 굳게 마음먹지만 '휴~ 그게 마음 대로 되나?' 그러니 중독이 무서운거지...

 

 하여튼 지금 이 순간만은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는 것이 책이지만 이렇게 신간 추천 페이퍼를 쓴다. 그런데 참 나도 알 수 없는 것이 또 새로 나온 책들을 보고 있으면 '호~ 이런 것도 나왔단 말야?'하면서 눈이 반짝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무서운거다. 중독이란 건...

 

 내 중독 증상을 일깨운 신간들을 여기에 좌악 열거해 본다.

 이 못되고 사랑스러운 유주얼 서스펙트들...

 

 

 

 

 

 

 

 

 

 

 

 

 

 

 

 

 

 

 일종의 머그샷을 찍는 것처럼 죽 늘어 놓아본다.

 왼쪽으로 부터 용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3인류'

 

    '카산드라의 거울' 이후로 현재 베르베르는 꽤나 미래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듯 하다. 이번엔 좀 더 스케일을 키워 미래의 인류 진화 모습을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개미'의 주인공 증손자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마침, 이 소설이 추구하고 있는 인류 진화의 모습도 '소형화'인지라 언뜻 혹시 이 소설 '개미'와 일종의 순환 고리를 이루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을 읽지도 않고 하는 말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성급하긴 하지만 어쩌면 베르베르는 인류 진화의 최종 버전이 '개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진실은 책을 읽어봐야 알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 SF 중에 Paul.F. Ernst의 'The Microscopic Giant'가 생각난다.

 

 

 1차 대전이 한창인 미국의 한 거대한 구리 광산에서 지하에 살고 있는 소형 인간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긴데 1938년에 나온 이 단편은 웰즈의 '우주전쟁'이 그랬듯이 인류 보다 더 뛰어난 제3의 지성인 존재를 통해 인류 사이의 전쟁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인류보다 훨씬 더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이 '소형 인간'들이 어쩌면 베르베르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제3 인류'에서 주인공들이 창조하고자 하는 제3인류의 이름이 '에마슈'인데 그 이름의 M이 바로 'Micro-Humains'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뭐, 작다는 것이라면 어디든 다 쓰이는 Micro이긴 하지만 왠지 오마쥬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괜한 생각인 걸까?

 

 2.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데뷔 후 지금까지 8년간 단 한 편의 장편소설과 단 두권의 단편집 밖에는 내지 않았다는 황정은이 드디어 두 번째 장편소설을 냈다. 이제 두번째의 장편 소설인데도 그동안 팬들이 많았는지 신간 추천 집계를 해보니 단연 1위를 달리고 있다. 나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던 작가라 과연 어떤 작가이기에 이토록 많은 분들이 기대하는 것인지 궁금하여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소재가 특이하다. 아무래도 제목의 앨리스씨는 여장 노숙인인 모양이다. 그는 어린 동생과 함께 어머니로 부터 구타를 당하며 살아간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앨리스씨의 여장은 그 폭력의 여파인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여장이란 앨리스씨에게 이중의 기호인 셈이다. 하나는 가해지는 폭력으로 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열망으로써의 기호, 또 하나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해오는 어머니만큼 강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써의 기호. 하나는 자신을 버리고 싶어하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데 과연 이 모순된 두 기호가 어떻게 하나의 신체 안에서 통합되어 갈지 궁금하다.

 

 3.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팬이니까 세이초의 소설이라면 무조건 추천이다. 그런데 내용 소개글을 읽다가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소설에서 6종 추돌 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야마가는 왜 사진 찍느라 불타는 차량 안의 사람은 구하지 않느냐는 비난에 시달린다. 이런 일이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다. 바로 한 굶주린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의 사진이다. 결국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이 사진으로 풀리처 상까지 탔지만 비인간적이라는 거센 비난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진은 예술은 현실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혹은 어느만큼의 자리에 위치해야 하느냐? 하는 중대한 의문을 낳았다. 세이초의 소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실제로 일어난 일인만큼 세이초는 이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4.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위화

 

  '제7일'을 읽어 본 나로서는 이제 위화의 신작이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방앗간이다.

 '재앙은 피할 수 없다'는 중국 민중과 지식인들로서는 문화대혁명 이후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아시다시피 천안문 사태는 1989년에 일어났다.)  80년대 후반에 위화가 쓴 소설 중에서 한국 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직접 그가 선정한 작품들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더욱 읽어보고 싶다.

 지금까지의 위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나름대로는 문학이 오로지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만 의미있었던 문화대혁명 이후 그로부터 오염된 문학을 구원하고자 발버둥 끝에 나온 소설들이기도 해서 더욱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제목이 지금 이 순간 참 와 닿는다.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정말이다. '이사'라는 재앙도 피할 수 없다.

 그래도 부디 피해 갔으면 좋겠다. 너무 피곤하다ㅠ ㅠ

 

 5. 향, 백가흠

 

 황정은 8년간 장편소설을 단 한 권 내었지만 2001년에 데뷔한 백가흠은 13년간 단 한 권이다. 참, 장편소설은 출산하기가 힘든 것인가 보다. '향'은 백가흠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역시 난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작가다. 신간평가단 하면서 정말로 새록새록 느끼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내게 한국문학 경험이 너무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느정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신간 추천할 때마다 이렇게 여전히 새로 알게되는 작가가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아직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모양이다. 이 쪽으로도 부지런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쌓여있는 책들을 보면 또 이사가 걸리고 그렇게 또 내 바람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게 된다. 중독된 자에게는 어차피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는 시지프스적 형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백가흠은 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원의 맨 처음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어디에도 끝은 없다.

  죽음을 향한, 죽음의 의식만이 있을 뿐...'

 

  이 상식을 넘어, 이성을 넘어 광기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현재 부동산 시장에서는

  어디에도 이사의 끝은 없다.

  또 언젠가의 이사를 향한, 이사의 준비만이 있을 뿐...

 

 크헉!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니 꿀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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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3-11-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 이와중에 '알렉스'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의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가 공쿠르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과연 장르 소설이었지만 범상치 않은 깊이를 보여주더니 받을만한 상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수상작은 Au revoir la-haut(번역하면 천국이여 안녕 쯤 되려나). 1차대전이 끝난뒤 전쟁에서 돌아온 두 프랑스 청년들이 새로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로 장르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어쨌든 좋아하는 작가가 상을 받아서 기쁘고 수상작도 빨리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녀고양이 2013-11-0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신간들이군요... 저는
어느 순간부터 신간 읽기는 포기해버렸답니다. ^^

책 때문에 이사가 너무 두려워요, 헤르메스님도 그러시지요?
월세라... ㅠㅠㅠㅠ, 발표된 부동산 정책을 보니, 다시 한숨을.
잘 해결되셨으면 좋겠어요.

베르베르는, '신'의 결말에 지나치게 실망한 나머지 손도 안 대고 있답니다.
매번 망설이게 되네요, '개미' '타나토노트'에 얼마나 열광했던지! 그 추억이 안타깝습니다. ㅠ

희선 2013-11-07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재미있네요
2월인데 빨리 전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군요 이사를 가게 된다면 집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요 책이 많아서 이사 다니기 조금 어렵겠습니다 집 문제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는 하지요 지금보다 작아진다면 지구에 사람이 더 많이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답답할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은 어떻게 될지...
10만분의 1 보고 저도 그 사진에 대한 거 생각났어요 잘 아는 것은 아니었는데, 저는 그것을 어디에서 본 것일까요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책이 새로 나왔나를 보게 되어서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 볼 수 없어서 아쉽기도 하겠습니다 좋은 것만 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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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의 '제7일'은 절망의 소설이다.

 달리 뭐라 말할 수 없다. 만일 위화에게 데스노트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다 '희망'을 적었을 것이 분명하다. 위화의 판도라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다시는 열지 않았다. 세상은 광막한 어둠 속에 한 점의 불빛도 없이 사위어만가고 그 무게에 짓눌린 우리들은 압력으로 말려들어가는 몸처럼 침묵한다. 차마 신음마저 낼 수 없을만큼 말을 빼앗긴 우리들은...

 

 더욱 아파한다. 이건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거기서 유령이 된 자들은, 아니 되어야 했던 자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서. 초등학생 소녀는 아침에 학교 갈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학교 갔다온 사이 철거 용역들에게 완전히 헐려 폐허가 된 그 곳에서 숙제를 하며 엄마와 아빠를 기다린다. 바로 자신의 발 밑 콘크리트 아래 그녀가 기다리는 부모님들이 깔려 죽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향의 가산을 정리해서 낯선 도시로 일가족이 옮겨와 식당을 열었던 탄가네는 공무원들이 밥값을 내지않고 가는터라 늘 적자에 허덕인다. 장밋빛 꿈은 철면피 같은 정부의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가 더 가혹한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 끙끙 앓기만 하다가 화재가 일어난 날, 그 억울함과 분노가 사무친 나머지 정작 화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밥값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들만 보여 그들을 막다가 그만 몰살당한다.

 

 희망은 없다.

 모든 희망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어주려고 없는 살림에 과외까지 하려고 했지만 정작 주인공이 과외 선생을 하러 온 첫날 죽음을 당한다. 탄가네와 똑같이. 뭐가 있으랴. 태어날 때 우연한 사고로 기차 바깥으로 버려진 주인공은 또한 어떠한가? 하지만 그는 근처 선로에서 작업하던 지금의 아버지에게 주워져서 보살핌을 받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그였지만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한다. 물론 단 한 번, 그도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생겨서 어린 주인공을 버리긴 했지만. 하지만 버린 당일 밤, 그는 그걸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고 바로 달려가 주인공을 데려왔을뿐 만 아니라 다시는 주인공을 버리지 않기 위해 아예 여자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아들인 주인공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었고 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만한 헌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답은 하나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그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그러던 아버지도 죽는다. 불치병에 걸려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홀로 사라진다. 대학을 나와 원했던 회사에 취직하여 어려움없이 살던 주인공은 한 여인을 알게되면서 급변한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듯이. 그녀의 연인 리칭은 남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큼 미인에다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로는 아예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임을 짐작하고 거리를 두었지만 어느새 그녀와 가까워진 자신을 깨닫는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3년의 결혼 생활 동안 주인공의 리칭에 대한 헌신은 변함없었지만 애초에 그녀는 그가 독차지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상대였다. 미모가, 능력이 그녀를 한 평범한 사내의 아내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사랑은 변함없으나 그 사랑이 높은 곳에 대한 욕망을 잠재워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욕망을 이해하는 주인공은 순순히 거기에 응한다. 어차피 언젠가 닥쳐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은 자본이라는 현실 앞에서 깨어진다. 그러던 아내도 죽는다. 한창 잘나가던 아내는 사업이 실패하고 그동안 저지른 비리 때문에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자살한다. 주인공이 탄가네의 식당에서 우연히 그 기사를 본 날, 식당의 폭발로 인해 그 역시 생을 마감한다.

 

 모두 죽는다. 제7일은 유령들의 이야기다.

 선한 일을 했듯, 악한 일을 했듯 차이는 없다. 흔히들 죽음 후엔 평등하다고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죽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위화의 저승은 그렇지 않다. 죽음 후도 여전히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불평등하다. 죽은 주인공은 빈의관이라는 곳에 간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화장하여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 서로 있게 되는 곳들이 다 다르다. 주인공처럼 뭐하나 없는 이들은 소파에 앉지 못하고 서서 기다린다. 소파에 앉아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아 생전에 한 재산을 가졌던 무리들 뿐이다. 그들은 없어서 서 있는 자들을 조소하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또 한 곳이 있다. VIP 룸이다. 거기는 오로지 권세 있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날, 그러니까 주인공이 도착한 날, VIP룸에 들어가는 유령이 하나 온다. 시장이다. 부동산 비리 때문에 시끄러웠던 시장. 소녀의 부모를 돌아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시장.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VIP 룸에서 홀로 차례를 기다린다.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죽어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떤 선행도 보상받지 못한다. 설령 사랑하는 연인의 내세를 위해 무덤 자리를 마련해 주느라 자신의 신장을 파는 바람에 죽었어도 여전히 헐벗은 채 배회하는 것엔 차이가 없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그래도 그런 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 주인공은 어떤 울음에 이끌려 그 곳을 찾게 된다. 신록은 푸르고 과실들은 풍성하며 살아있는 해골들로 가득한 땅. 거기서 그는 엄마가 없었던 그를 위해 자신의 아이들 보다 더 자주 젖을 물려 주었던 정말 자신의 엄마와도 같았던 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병원에서 불법적으로 강물에 유기한 모두 27명의 태아들 시체를 발견하고 병원의 잔혹한 처사를 당국에 고발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 했지만 그만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27명의 태아들과 함께 영안실에 안치되었던 그녀의 사체는 미스터리한 힘에 의해 태아 27명의 사체와 함께 사라진다. 시민단체는 그 사라진 시체들을 두고 이는 모두 병원과 정부가 짜고 은폐시키려는 음모라 비난하고 늘어나는 시민단체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사체를 화장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준다. 그래서 태아 27명과 주인공의 아줌마는 무덤 없는 자가 되어 그 땅에 온 것이다. 그 곳은 그러한 자들로 넘쳐나는 땅이다. 거기는 모두 평등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그런데 과연 평등과 자유가 다른 말일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평등은 자유를 해친다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아니다. 위화의 무덤없는 자들의 장소는 평등과 자유가 일치하는 곳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의 해골이 되었듯이 평등한만큼 자유롭다. 무덤있는 자들을 위한 빈의관과 달리 거기엔 살아 생전 어디에 있었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마저 관대해지고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원한은 사라지고 우정과 연대만이 남는다.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고 자신의 몸처럼 아껴준다. 파라다이스.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평등했던 마르크스 용어에 따르자면 원시공산사회는 유목민들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곳에도 정주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떤 땅에도 얽매이지 않은 존재였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탈영토화된 그들이었고 그만큼 자유로웠던 그들이었다. 어디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건 영원한 자유로움의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유로웠던 그들은 평등했다. 같이 생산하고 아낌없이 나누었다. 계급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로, 권세의 격차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계급과 사람에 대한 차별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 즉 정주하면서 부터 생겨났다. 그만큼 우리가 얽매이자 불평등이 들어온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자유와 평등은 일치한다고. 진실이다. 완전한 평등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진정한 삶 역시. 사람을 나눔은, 가름은 우리의 평등을 제한하는 것만큼이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완전히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자유도 완전히 없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과 자유는 서로 다르지 않다. 평등을 추구하는 길은 기필코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다. 이외에 모든 자유와 평등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관념은 거짓이다. 그건 저항해야 하는 악의적 환영에 불과하다. 위화가 그려내는 헐벗은 유령들의 땅은 그것을 보여준다. 결코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그러므로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라면 우리는 더이상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함을.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 중국은 사회주의 중국보다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는가? 유령이 되어서야 이 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위화 스스로 거기에 대해 부정의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할 수 있다. 과연 경제적 번영이 우리 자유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보다 지금의 시절이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에 있었던 어떤 소중한 자유를 지금 우리는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때보다 우리에게 얽매인 사슬들은 더욱 많아졌을 지 모른다. 초등학생들은 놀 자유를 잃었고 중,고등학생들은 청소년기의 낭만을 누릴 자유를 잃었다. 대학생은 좁은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해, 높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과 삶의 자유를 잃는다. 나와서도 만연된 비정규직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리라. 삶은 결코 더 쉬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불평등의 척도는 곧 자유의 척도다. 만연한 불평등은 사회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음을,아니 오히려 퇴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나는 위화의 '제7일'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라 여긴다. 허상에 속지말 것을! 본질을 직시할 것을 말하는 소설이라고. 헐벗은 유령들의 땅에서 모든 이들이 생전의 얼굴이 아니라 해골로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이 절망의 소설이 되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희망이란 아름다운 모습의 거짓말이고 가상이니까 말이다. 절망하고 절망해서 그 늪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비로소 밟은 단단한 바닥에서 본질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 위화의 '제7일'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주인공과 리칭은 가장 행복했던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었던 셋집으로 그토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둠은 어둠으로... 섣부른 희망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그러니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만큼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평등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위화의 '제7일'은 그를 위한 'PAINT IT BLACK'이다. 그 극심한 불평등 속에서 위화의 유령들이 양산되었듯이 결국은 그것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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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최연소 나오키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작가, '아사이 료.'

 '누구'는 그에게 그런 타이틀을 가져다 준 장본인 격이 되는 작품이다.

 아사이 료는 이미 저번에 나온 그의 데뷔작,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로 만나 본 적이 있다. 약관의 나이에 발표한 그 소설은 마치 그의 고교 생활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각자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을 통하여 어떤 삶이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보다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뭔가 시도라도 하는 것의 중요성, 삶은 그렇게 어떤 것이든 열심히 도전하고 노력하면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임을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나 본 그의 두 번째 소설 '누구'도 읽어보니 말하려는 주제가 크게 첫 작품의 노선과 틀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특별히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이들을 소설의 주요 인물들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전작에서 동아리 활동에 열심인 아이들을 천착했던 이유와 이어지는 것 같다. 동아리 활동은 일단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에서 일률적으로 정해진 정규 교육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동아리 활동, 거기에는 비로소 '나'라는 자신이 잔뜩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부모나 학교가 규정해주지 않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첫 작품의 아이들은 비로소 발견한 자신만의 트랙을 힘껏 달려가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취업 전쟁에 뛰어든 '누구'의 존재들도 다르지 않다.  이제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첫 관문인 '취업'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시험당하거나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청춘들이 비로소 그것을 검증받거나 인정받게 되는 계기이다. 그러니까 전작에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참된 자아의 발견이라는 트랙의 출발선 앞에 섰던 이들은 이 소설에서 지금까지 달려온 나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게 되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사실 첫 작품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시험, 혹은 관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소설 중 한 에피소드에서 어떤 친구는 기리시마가 배구 동아리를 그만두는 바람에 그가 뛰었던 센터 자리에서 드디어 뛸 수 있게 되는데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자리였던만큼 기쁨도 잠시 느꼈지만 사실 그 보다는 과연 자신이 거기서 기리시마만큼 할 수 있을지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해서 그 아이는 갈등한다. 과연 이 자리를 맡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실린 모든 에피소드들의 주인공들이 지금 막 자신에게 닥쳐온 어떤 계기들 앞에서 피하느냐 맞부딪히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로는 그냥 기로로만 그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또는 만족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거기서의 선택은 하나의 존재 증명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어쩌면 그렇게 관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어저 진짜 자신의 가치보다 좀 더 과대포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진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혹은 평가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사이 료가 이 소설 '누구'의 등장인물들에게 '취업 전선'이라는 일종의 시험을 가져온 것은 그런 의미다. 그동안 자기가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한 번도 적나라한 테스트를 받아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과연 자신이 진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동화 백설공주에서 나왔던 늘 진실만 말한다는 거울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대학 생활 내내 학업 보다는 락밴드 활동에 열심이었던 고타로나 그와 한 방을 쓰면서 연극 활동에 열심이었던, 이 책의 화자이기도 한 다쿠토나 고타로와 같은 동아리면서 고타로와 사귀는 미즈키나 그녀와 우연히 같이 취업 활동을 하게 되는 고타로와 다쿠토가 사는 방 바로 윗 층에서 다카요시와 동거하고 있는 리카 모두. 

 

  그래서 이 소설이 옮긴이의 말대로 정말 호러 소설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호러 소설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범람한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든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비밀을 들킬 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라 완전히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평가받게 되리라는 바로 거기서 공포가 온다는 말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이란 공포이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존재로 포장되고 싶은 바람이 누구에게나 있듯이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이 발가벗기듯 드러나게 되는 상황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는 자신의 참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러고보면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이 번지점프를 진정한 성년이 될 수 있는 통과의례로 정했다는 것은 꽤나 적절한 것 같다.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에서 달랑 줄 하나만을 발목에 매고 뛰어내리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공포는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발가벗겨져 적나라하게 보여질 때이 공포와 비슷할 테니까.

 

  소설 '누구'의 취업 활동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 번지 점프대 위에 올라 선 사람들이 그렇듯이 당연하게도 두려움 속에서 회피하려는 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뛰어드는 자로 나뉘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들 그 사이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곳에 위치한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면 그 중 하나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일본 대학생의 취업 활동은 우리나라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취업 활동을 겪어본 이들에게는 더욱 생생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때의 자신은 어떻게 치뤄냈는지,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이 있는 듯 하다. 아사이 료는 이 소설에서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구직 활동을 가감없이 그대로 재현하는데, 정말 소소한 것까지 재현해서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상세한 리얼리티가 그대로 비슷한 리얼리티 속에서 구직활동을 했었던 우리의 경험을 환기시켜 더욱 나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위해서 아사이 료는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감수성 넘치던 문장들까지 포기해가며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갔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읽는 독자의 공감과 동일화를 원할수록 기교를 자제하기 마련이다. 기교는 문장 자체에 몰입하게 만들어 정작 읽는 자기 자신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독자들을 캐릭터에게 더욱 동일화시키기 위해서 그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품을 아사이 료의 일보 전진이라고 여긴다. 분명 그는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왔고 주제는 비록 전작과 비슷하지만 그 선명성에 있어서는 독자 자신의 경험을 환기시킴으로써 더욱 높였기 때문이다. 과연 이 작품은 전작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마음을 울린다. 특히 후반에 가서 밝혀지는 비밀들은 정말 나도 모르게 어떻게 살고 있나 진지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표면은 비할데 없이 건조하지만 그 아래에는 어떤 뜨거운 용암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소설이다. 이렇게 느껴지는 건 마지막에 쏟아내는 말들이 참으로 호되게 신랄해서인데 때문에 그것을 읽노라면 아사이 료가 동시대의 젊은이들에 대해 얼마나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뜨겁다. 안타까움 속에 벼리된 절절한 호소를 담은 가슴이야말로 마라톤을 완주한 심장처럼 뜨거운 법이니까.

 

 열기만큼 쉽게 전염되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역시 어느 순간 당신을 감응시킬지도 모르겠다. 회피하기만 하는 당신, 도전 보다는 늘 순응만을 택했던 당신이라면 더더욱. 이 소설엔 현대 젊은이들의 소통 필수품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얼른 현 세태의 충실한 반영으로 보이지만 짐작 되기에는 그 속내는 다른 곳에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아사이 료는 일종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기 위해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실시간 업데이트할 정도로 요즘 세대는 자기 표현에 충실하지만 정작 자신을 현실 속에서 정말로 드러내야 할 때는 꼬리를 말고 움츠러드는 것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 소설은 현실에 대해 방관자로만 있는 것을 스스로 쿨하다고 착각하며 현실로 뛰어들어 깨어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얄팍한 껍질 속에서만 고집스럽게 머무르는 모든 입만 살은 관찰자 청춘들과 수동적인 청춘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질책이다. 한 마디로 눈가리고 아웅하지 말라는 거다. 자기를 미화시키는 환영의 안대는 벗고 직시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백마디 말보나 한 번의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런 소설이다. 그래서 뜨겁다. 당신에게도 이 열기가 전염되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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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밥이다 - 매일 힘이 되는 진짜 공부
김경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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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638페이지의 두툼한 부피감으로 날 압도하는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는 선언과도 같은 제목에서 은근히 암시되듯이 그야말로 '인문학 입문의 결정판'과도 같은 책이다. 일단 목차로 들어가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실감할 수 있을텐데, 인문학의 텃밭과 다름없는 철학이나 종교, 역사나 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학 입문서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미술이나 음악, 정치와 경제 그리고 환경과 젠더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해볼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게 된 건, 무엇보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있어서다.


책으로서는 두 번째 만남인 이 저자는 일전에 '눈 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으로 만나본 적이 있는데, 지금 무엇보다 왜곡되고 어긋나버린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검증에 나섰던 그 책은 예전부터 비슷한 의문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그야말로 오랜 갈증이 해갈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랬던 저자이기에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이름으로 나온 이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게되면 속표지에 나오는 지은이 소개글부터 읽게 되길 바란다. 그걸 읽어보면 어떻게 이 책이 나왔으며 이런 책이 가능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인용해보자면 이렇다.


 서른 살 무렵에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며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두 번째 25년을 마친 뒤 미련없이 학교를 떠나 지금은 충청남도 해미에 있는 작업실 '수연재'에서 '나무처럼 사는' 바람을 품고 살고 있다.


 읽었을 때, 참 멋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미련없이 오늘의 모습과 결별하고 원하는 대로 읽고 쓰면서 살고 싶다라는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리 품었어도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삶에서 훌쩍 벗어나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황야와도 같은 불안한 미래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과감히 실천했고 보란듯이 자신이 원했던 삶에 천착하고 있으니 부럽기도 하고 자신의 말엔 확실히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믿음직스럽기도 하도 그렇다. 아무튼 '인문학은 밥이다'는 그러한 그의 결심과 실천 때문에 나올 수 있었고 또 그만한 각오와 내력이 스며있었기에 이 같은 분량과 전 분야를 아우르는 넓은 망라가 가능했던 것 같다.


 대저 두께와 내용의 질은 반비례 한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 책만큼은 그렇지 않다. 전 분야를 인문학이라는 필터로 아우르면서도 내용이 무너지거나 전개가 산만하다거나 하는 일 없이 꼭 있어야 하고 필요한 말만이 담겨져 있는데, 이렇게 핵심이 되는 줄기를 돋우고 그에 따른 교통 정리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에게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내공이 쌓여져 있는 탓이 아닌가 한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글을 보면 25년간 자신이 학교에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쳤는지 나와 있는데, '인간학'이라는 강의의 성격상 학교의 전 전공을 상대해야 했던 그는 무엇보다 먼저 수강하는 학생들의 전공에 맞춰 자신의 강의 방법을 수정해 나갔다. 즉 이공계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할 때는 이공계 지식과 연계했고 음악과 학생들에겐 또 음악적 지식과 연계해 설명하는 식으로 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오랜 세월 인문학이라는 어떤 고정된 경계를 고수하기 보다는 강의 할 때마다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과감히 다른 분야로 경계를 넘나드는. 소위 말하는 '통섭'을 실천해 온 것이었다. 이 책이 널리 아우르면서도 꽉 찬 중량감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난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입문서다. 그러니 초심자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이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건 '접속'의 경험 이다. 자본주의가 확립된 뒤로 자본주의에 특유한 생산 방식인 '분업' 또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면서 점차 지배적 생산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에 그치지 않고 학문 세계에까지 영향을 줘버린 것이었다. 원래 플라톤이 말했듯이 학문이란 나뉨이 없는 것인데 그 분업의 영향 때문에 학문은 지나치게 갈라지고 세분화되어서 덕택에 이전에 없었던 각종 학문들이 생겨났지만 서로간에 소통은 없는 상황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래서 서로가 저마다 쌓아올린 상아탑에 갇혀 나홀로 떠드는 아우성만 있을 뿐, 서로 협력하기 보다는 그저 타인의 몰이해를 탓하며 비난과 공격만을 일삼아 함께 했다면 더욱 발전했었을 학문은 소통 부재와 분쟁에 그만 발목을 잡혀 정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학문을 이 같은 늪에서 구해내고자 일찌기 많은 학자들은 학문 서로간의 소통을 호소했는데 바로 김경집의 이 책 역시 그러한 입장 위에 서있다.


 이 책이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된 진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좁은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다 널리, 다양한 분야와 상호 교류하면서 '2인 3각' 경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도와가며 같이 보조를 맞춰나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삶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하나의 총체적 경험으로 다가오는데 세분화된 학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특유한 학문적 경험만을 내세울 뿐으로 그리하여 살아가는데 현실적 도움은 주지 못한다고 한다. 학문은 결코 상아탑에 머무르는 지식이 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 유익함을 주어야 제대로 된 학문이라 믿는 저자는 때문에 학문이 진정 진짜 삶에 유익함을 줄 수 있게 만드려면 무엇보다 그 총체적 경험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인문학이 무엇보다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인간학은 인문학이며 동시에 인문학은 인간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교양을 함양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문학을 통해 배운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인문학으로 유연해진 사고방식의 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며, 인간에 대한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다. 이를 깨우쳐 인격의 도야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P. 636 ~ 637)


 말하자면 이 책은 지은이의 이 같은 신념을 하나의 책이라는 물리적 경험으로써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실제 삶과 유리되지 않는 학문, 그냥 공허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격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학문, 바로 그 인간과 세계 모두에게 지하에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모든 수목과 동물들에게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는 '지하수'처럼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는 인문학이란 어떤 모습인지 보이는 것이다. 입문서라는 한계 때문에 세밀한 붓터치가 아니라 대략적인 스케치에 그치고 만다는 게 참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체감해 볼 수 있다. 각 분야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인문학의 모습을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얻게 되는 덤이고 우리가 진짜 깨닫는 것은 지식은 결코 삶과 그리고 인격과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를 참으로 실망시키는 지식인들이 많다. 판사나 의사, 변호사들이 여성들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몰카로 찍는가 하면 유명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분들이 지켜야 할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배신하면서까지 정치권과 야합하기도 하고 장관 후보자들은 마치 필수 경력이기라도 하듯 위장전입이나 탈세와 같은 범법의 전력들이 꼭 하나씩은 있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지식이라는 건 그저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다 지식이 삶이나 인격과 유리되어 있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탓이 아닐까. 여성학자 조여정이 쓴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책이 있다. 시리즈인데, 그 2권을 보면 우리가 치뤘던 도덕 시험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지식이 삶 그리고 인격과 분리된 경험을 고착화시켰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예를 들어보자면 흔히들 많이 치뤘던 'O, X' 시험을 통해서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O'표 하시오.', 혹은 '나쁜 사람에게 'X'표 하시오.' 같은 것들. 그렇게 우리는아주 어릴 때 부터 삶에서 꼭 지켜야 하는 윤리마저 자세한 설명과 실제 경험으로서 알기 보다는 그저 암기라는 주입된 형태로 학습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윤리를 태연히 위반하는데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머리 따로, 몸 따로'의 프랑켄쉬타인이 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의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른바 드라마 속의 현빈이 말하는 대로 '사회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자신이 배운대로, 익힌대로만 행동해주었더라도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8할은 줄어들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정말로 예외가 되어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전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그 태도에 우리의 비극이 있는 것 같다. 비온 뒤 담쟁이 넝쿨처럼 죽죽 자라나는 그 태도를 더 이상 수수방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책을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문학이 밥과도 같이 우리 삶에 실제로 아주 많이 도움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왔지만 우리가 정말 여기서 캐내어야 하는 보석은 결코 지식이 삶과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보니 인류 역사상 모든 현인들은 무엇보다 현인의 덕목을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삼았다. 오래 살아남은 옛말치고 틀린 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말이긴 하지만. 바로 그 비웃음 속에 우리의 비극마저 잉태되어 있음을 한시바삐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당장 읽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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