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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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승우의 소설은 참 오랜만입니다. 나름 감명깊게 읽었던 그의 초기작들 '생의 이면'이나 '에리직톤의 초상'. 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조차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니 정말 오래되긴 오래되었나 봅니다. 사실 그 두 작품을 끝으로 내내 이승우의 소설과 인연이 없기도 했지요. 그런데 마침 좋은 인연이 닿아서 최근에 나온 신작 '지상의 노래'를 벗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도 나름 리뷰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살면서 늘 평행선처럼 지내오던 작가의 작품과 뜻하지 않는 조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해설을 쓴 평론가 정영훈에 따르면 이승우의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지상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힌트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토대를 둔 어쩌면 강박에도 가까운 반복. 이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도 비슷한데요 저는 거기에 대한 어떤 죄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나타난 결과는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약력을 살펴봤습니다. 전라남도 장흥 출신.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물론 너무 무리한 억측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한 때는 왕성했었으나 미스터리하게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천산 수도원'은 어쩌면 5. 18 광주의 은유는 아닐까 하고 말이죠. 

 사실 작품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천산 수도원'을 5. 18의 광주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일단 그 천산 수도원의 존재가 '천산 벽서'를 통해 알려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여기서 '천산 벽서'란 천산 수도원의 폐허 지하에서 발견된 벽마다 빼곡히 누군가가 써 놓은 성경 글귀들을 말합니다. 

 어둡고 습한 그 지하 방에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글자들로 가득한 벽을 보았다. 글자들은 가로세로 줄을 따라 반듯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군데군데 빨강과 초록, 노랑이 섞여 있었다.  색을 입히거나 장식을 해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글자들도 있었다. 처음에 강상호는 그것이 독특한 디자인의 벽지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벽지가 아니라 흙벽 위에 직접 글씨를 쓴 것이었다.(p. 19) 

 이것이 바로 '천산 벽서'라는 것입니다. 이 존재로 인해 천산 수도원이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그 수도원에 얽힌 비극적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5. 18의 광주를 알게 되는 과정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5. 18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들의 허약한 정당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본보기로 희생양을 하나 고르는데 그것이 바로 광주였죠. 거의 학살이나 다를바 없는 그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당시 광주는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깥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과 신문들은 광주가 빨갱이에게 점령당했다고만 떠들어대었구요. 오죽 하면 광주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질렀을까요. 아무튼 아무도 정말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진실이 나중에 기록이나 문학등의 형태로 글로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우리가 5. 18 그 날의 광주를 알 수 있었던 것도 '천산 벽서'와 같은 '글'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유사합니다. '천산 수도원'에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던 때(작품에서 정확한 연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만 정황상)와 5. 18 광주가 일어났던 때가 말이죠. 더구나 그 비극이 일어나게 된 이유조차 비슷합니다. 오로지 도래할 주님의 나라만 믿고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자로 살아가던 그들이 새로 정권을 잡은 무리들에게 그런 일을 당해야 했던 것은 정권이 그들에 대해 가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천산 수도원 소개를 명령한 장군의 입을 통해 직접 증명됩니다. 

 시국이 그렇잖아요. 시국이. 상상력을 발휘해 봐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요.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어요. 변수가 너무 많은 세상이에요. 99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하면 1퍼센트의 가능성이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잖아요? 1퍼센트나 99퍼센트나 뭐가 달라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사람 속을 누가 알아요? 사람은 아무리 거룩해져도 어쩔 수 없이 속물이지. (...) 내 말의 요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섣부른 단정을 하지 말자. 그거예요.(P. 208) 

 아마 당시의 광주가 학살을 당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겁니다. 어쩌면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저질렀던 진짜 이유가 이런 형태로 변형되어 작품 속으로 녹아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천산 수도원이 그 때의 광주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참 많은데요. 이렇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왜 한결같이 죄의식이 존재하게 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동생 강영호는 형이 그렇게 타국에서 비명횡사할 때까지 제대로 형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 뒤에 나오는 소년 '후'는 사촌 누나 연희를 박 중위의 손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천산 수도원의 비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열쇠인 '장' 노인은 천산 수도원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구요. 이렇게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들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사실 우리가 5. 18 광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강영호, 후 그리고 장 노인은 5. 18 광주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현실의 바로 우리들 모습이라는 것이죠. 아마도 작가 이승우가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우려내고 있는 그의 죄의식 역시 분명 거기와 맞닿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좀 무리를 해서 단순하게 이 '지상의 노래'를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다시금 불러내는 광주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이 소설은 일종의 광주를 위한 '초혼(草魂)'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는 거의 희미할 정도로 지워져버린 그 아픈 역사를 다시금 망각의 늪에서 길어 올려 새로이 뇌리에 되새기려는 '소환'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희생자들이 얼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그야말로 죄로 부터 순결한 영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피를 밟고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두려움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그 힘이 어느 하나로 집중하게 되면 어떤 비극이 우리들에게 닥쳐올런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잊어서는 안될, 잊혀서는 안될 기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천산 수도원이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폐허가 되어버렸듯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 때 희생된 자들의 한이 채 풀리지 못했는데도 말이죠. 이것은 소설 속에서 사라진 연희를 통해 표출됩니다. 아직 우리가 광주를 떠나보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박 중위로 부터 유린을 당하고 믿었던 삼촌(후의 아버지이기도 한)에게서 배신을 당한 연희가 겪는 고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후가 다시 찾은 연희는 여전히 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배신에 대한 상처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녀가 겪었던 그 폭력과 배신은 그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겪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진압군의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이렇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도와주러 오지 않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그 때의 광주 시민들 역시 연희와 똑같은 것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희는 천산 수도원이 이렇게 폐허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광주의 기억은 과거 한 때의 일이 되고 말았을지 모르지만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형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잊혀서는 안되는 일인 것이죠. 늘 그 때 광주에 누구에 의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 속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이죠. 아직도 여전히 그 고통 속에 떨고 있는 무구한 희생자들이 있으니까요. 천산 수도원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그 시신들처럼 말이죠. 

 그럼, 그들의 넋은 언제 제대로 위로를 받게 되는 걸까요? 그건 아주 작은 자 하나라도 그의 처지를 고려하고 배려하게 될 때입니다. 우리 앞의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입니다. 천산 수도원에서 내려와 후가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더우기 이것은 천산 수도원의 비극을 초래한 까닭으로 더욱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 때 천산 수도원이 고립되고 결국 학살되었던 것은 모두 타인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천산 수도원 사람들은 누가 오든지 그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줍니다. 박 중위를 찌르고 달아났던 후를 아무 이유없이 받아주었고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정권 안정을 위해 온갖 못할 짓을 도맡아하던 한정효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런 더러운 일에 환멸을 느끼고 물러나려 하자 정권이 그 입이 두려워 천산 수도원에 유폐시켰을 때에도 천산 수도원은 두말없이 받아주었습니다. 그 누가 어떤 일로 오든지 천산 수도원에선 모두 동등한 '형제'였습니다. 

 '지상의 노래'는 바로 이것이 그들의 원한을 제대로 씻겨줄 수 있는 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모두 우리의 형제로 대하는 것 말이죠. 두려움은 언제나 '나만' 생각하고 위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진 아픈 광주의 역사 또한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를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할 '형제'로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내 두려움을 씻기 위해 유린해야 할 타인들이 아닌 배려와 존중이 마땅히 의무가 되어야 할 형제 말이죠. '천산 벽서'는 바로 그런 지상의 노래였습니다. 모두가 형제가 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염원이 담긴 노래였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후는 세상에서의 모든 여정을 끝내고 돌아와 한정효가 미처 끝내지 못한 벽서를 완성합니다.  그는 그 벽서를 쓰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 순간에 형제가 '형제'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후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형제들을 불렀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었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어야 했다. 형제들이 그 때문에 그를 그곳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P. 342)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 역시도 그러합니다. 다시는 5. 18의 광주와 같은 그런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동등한 그리고 하나된 형제가 되기 위한 그 '참여' 속으로 당신을 부르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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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라디오 키드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유쾌한 빈혈토크
김훈종 외 지음, 이크종 그림 / 더난출판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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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으면서 배가 아팠다. 왜 이렇게 다들 재미지게 살고 있는거야!
 그래, 나 속좁다. 남들이 나보다 재미있게 삶을 즐기고 있는 거 붕어빵을 먹었는데 앙꼬 대신 소금이 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얼굴 찌푸린다. 특히 이재익 작가. 대학 시절부터 미녀들을 골라 차에 태우고 다니며 클럽을 전전하기만 했는데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거 읽다가 그만 덮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책에 이렇게 행복한 이야기만 있으면 어쩌라는거야? 다른 이들의 삶은 이토록 시궁창 같은데... 영락없이 우리는 땡볕에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데 이들은 오아시스 속에서 둥가둥가 우쿠렐레나 튕기고 있는 꼴이잖아!

  뭐? 내 배를 식중독처럼 아프게 만든 책에 대한 소개가 정작 없다고? 구태여 궁금해할 것 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물으니 말해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네. 좋아. 그 책, '20세기 라디오 키드'라는 책이다. 실물이 궁금해? 실물은 이렇게 생겼다.


 속이 왠지 더부룩 답답할 때,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된다면 한 번 들춰보면 되겠네. 그러면 설사약을 먹은 듯이 화악 내려갈테니까. 무협에서 흔히 말하듯, 독은 독으로 치유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말이지. 복통을 복통으로 다스려보는 것도 새로울 것 같기는 하다. 그건 그렇고, 제목이 라디오 키드인데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세 명이 공저했는데 그 저자들이 모두 SBS 라디오 피디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 오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그걸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이 책이다.

 놀만큼 놀았고 재미를 느낄만큼 느꼈고, 또 즐거움을 추구할대로 추구하면서 살아갈 이들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 있는 셈. 그러니 나처럼 어렸을 때 별 추억도 없고, 젊었을 때 화끈하게 놀지도 못한 사람은 읽으면서 어째 배가 살살 뒤틀리듯 다소간의 경련을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마치 '메롱' 하듯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 낼름거리는 혀와도 같은 책은 일종의 추억담 모음집이다. 재미지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만 뚝 떼놓고 보면 우리가 살아온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을 이들의 추억이 여름방학 숙제로 흔히 했던 곤충채집처럼 핀으로 꽂혀있다고 보면 과녘 적중이다. 에잇! 단적으로 말해버리자! 그래, 이 책은 '키덜트'들을 위한 책이다. 키덜트인 그들이 키덜트들에게 배철수의 노래와도 같이 '모여라!' 하는 책. 그것이 바로 '20세기 라디오 키드'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껏 나와서 역시나 일본에서 키덜트 붐을 일으켰던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제목 '20세기 소년'을 패러디한 그대로 말이다. 그렇게 키덜트의, 키덜트에 의한, 키덜트들을 위한 책이다.

 사실 이 키덜트들은 요즘 마케팅의 주요 타겟이다. 일본이 그랬듯이 자신의 추억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소비를 하는 이들은 상품을 팔고자 하는 이들에게 군침이 도는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응답하라 1994' 가 대세다. 얼마전 신문 보도를 보니 요즘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3위가 바로 '응답하라'라고 한다. 이 '응답하라'가 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추억'이다. 어렸을 적, 혹은 젊었을 적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들.

 '응답하라'는 사라져 버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과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시대의 물건, 그 시대의 스타, 그 시대의 감성 속으로.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나로 언제까지나 있고 싶은 키덜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인 것이다. 이 책도 그와 비슷하다. 그 시대의 추억과 감성 속으로 우리를 깊숙이 데려가려고 (애를) 쓴다. '솔직히 말해. 당신도 나와 비슷한 걸 겪었잖아?'하고 책이 말해오면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끄덕이게 된다. 비슷한 경험이 공감의 바탕을 형성하고, 그 공감의 파동 속에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과거 속의 나를 삽입하면서... 

 키덜트는 일종의 퇴행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퇴행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 몸부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해, 현재의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 과거가 정말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늘의 고통을 잊고 싶은 마음이 그것을 아름답게 채색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키덜트의 만개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금은 깡그리 잊혀졌지만 '아이러브스쿨' 말이다. 어린시절 동창생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던 그 '아이러브스쿨'이 성행했을 때 한국은 IM로 휘청이고 있었다. 갑자기 닥쳐온 엄청난 한파. 그 현실의 강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덥혀줄 온기를 과거에서 찾았다. 아무 걱정없이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그 때에게서. 그렇게 그들은 과거로의 퇴행을 통해서 현실의 고통을 무마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 현실은 현실!
 과거는 그저 유희의 대상일 뿐, 거기서 현실의 치유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건 오늘의 모습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뭐, 다들 유희로만 즐기고 있는데 나만 괜히 진지해져서는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다행히, 이 책엔 그리 깊은 이야기는 없다. 그저 '그땐 그랬지' 하는 정도의 낄낄거림만 있을 뿐. 문방구 앞에서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하듯, 그렇게 잠깐 과거에 젖어볼 수 있는 책이다. 우연히 학창시절 동창생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취하기 위한 술이라기 보다는 질겅질겅 씹으며 수다를 돕는 안주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아픈 배를 쥐어가며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 나름 진지해져 버리는 바람에 머리도 아프다. 어쨌든 난 리뷰를 이렇게 남겼고 읽느냐 마느냐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분명히 경고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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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드 인 전략 - 와튼 스쿨 최고의 마케팅 명강의
조지 데이 & 크리스틴 무어먼 지음, 김현정 옮김, 이명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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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부터였나 심심치 않게 '아웃사이드 인(Outside In) 전략' 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하면서 한결같이 따라 붙었던 건, 이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소리?'라고 묻는 내게,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영업 방식이 지나치게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되어 있는데 이제 그걸 바꿔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웃사이드 인'이든 '인사이드 아웃'이든, 괜히 영어로 말해서 그렇지 별로 어려울 건 없는 말이다. 영어 그대로 '아웃사이드 인'이란 화살표가 바깥에서 안쪽으로 가야한다는 말이고 '인사이드 아웃'이란 화살표가 반대로 안쪽에서 바깥으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인사이드, 즉 안쪽이란 기업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웃사이드, 즉 바깥 쪽은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바깥에다 상품을 팔고 이윤을 얻기 위해서 존재하므로 그 바깥엔 오로지 하나의 존재 밖에는 없다. 자신의 상품을 구매해 줄 고객.

 

 즉 '아웃사이드 인'이든, '인사이드 아웃'이든 쉽게 말해 무엇을 중심에 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인 것이다. 그렇게 '아웃사이드 인'은 고객을 중심에 놓는 것이며 반대로 '인사이드 아웃'은 기업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알고보니 이 용어는 처음엔 마케팅 용어로 나온 모양이다. 그 사실을 이번에 나온 조지 데이와 크리스틴 무어먼이 공저한 '아웃사이드 인 전략'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와튼 스쿨이 선정한 마케팅 분야의 최고 명강의라고 해서 나온 모양인데, 원래부터 익히 들어왔던 용어였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기에 이참에 손에 들게 되었다.

 

  이 책 역시 패러다임의 전환을 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그 변화의 필요성을 주장한 최초의 책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진정으로 기업이 오래도록 살아남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아웃사이드 인'에 초점을 맞추고 영업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고객중심경영'이다. '뭐야?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말인데. 지금 다들 이렇게 하지 않나?' 하실 것 같다. 맞다. 기업이 '고객중심경영'을 표방한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현실화되었는지는 미지수다. 우리나라 기업들 대부분이 저마다 고객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문제가 터졌을 때는 모르쇠하는 걸 허다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고객을 응대하고 불만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지금까지 기업들이 외치고 있는 '고객중심경영'이라는 게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나 똑똑히 알 수 있다. 그들은 그저 그런 이미지만을 원할 뿐, 사실은 어디까지 기업의 이익과 목적 그리고 주주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하는 '인사이드 아웃'인 것이다.

 

 '그래가지고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그들에게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그들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있는 지 보여주기 위하여 아예 구체적 사례들까지 죽 보여준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대기업들마저 '인사이드 아웃'을 고수하다가 어떻게 좌초되고 난파되었는지 우리는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느끼게 된다. 이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을. 예전 모습 그대로는 도저히 생존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그런 부름, 동기 부여가 이 책을 보면 확확 일어난다. 과연 와튼 스쿨이 인정한 최고의 강의답다. 그런 동기부여가 일어났다면 실제로 '아웃사이드 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 익혀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거기에 대한 실제적 도움까지도 주고 있다. 책 한권으로 모든 걸 마스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 '아웃사이드 인' 마케팅 전략이 과연 어떤 것인지 워밍업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영업에 있어 고래(古來)로 부터의 황금률은 '손님은 왕이다'라는 것이다.  손님의 필요,기호 그리고 욕구를 무시해서야 당연히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기업은 "기업 이익 우선주의', '주주제일주의'에 빠져 오만을 부려왔다. 자신들이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고객들이 따라올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기업이 자만할 수 있었던 근거인 시장은 더이상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제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가격과 상품을 찾아 직접적인 해외 구매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더구나 그 비율 역시 계속 증가 추세다. 더이상 애국심에도 호소할 수 없다. 이전까지 기업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보호망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자신의 힘을 너무 믿고 고객들을 봉으로 생각해왔지만 이제 그들의 종이 되지 않으면 앞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아웃사이드 인'은 소통을 중시하는 전략이다. 지속적으로 고객의 욕구와 불만 사항을 체크하여 적극적으로 영업에 반영하는, 그야말로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고 귀를 기울이는 전략인 것이다. '아웃사이드 인'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한 마디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우리들에게 암시한다. 오만하게 나의 것을 주장하고 강요하기 보다는 타인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성이다. '아웃사이드 인'이 대세가 된다는 말은 곧 소통하지 않는 조직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모르쇠하는 불통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며 아무리 강한 조직이라 해도 불통으로 버티는 덴 한계가 있다. 그것도 반드시!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기 전에 이 책을 읽어서라도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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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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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읽은 느낌부터 말할까?
 분명 '셜록 홈즈의 마지막 인사'에서 그 제목을 따왔을 이 소설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는 미싱 링크(missing link)다. 물론 여기엔 전제가 있다. 그동안 죽 국내에 출간된 미타이 기요시 시리즈를 '마신유희'까지 다 본 사람에 한해서다. 특히나 '마신유희'가 가장 심한데, 거기서는 명탐정 미타이 기요시가 무슨 '절대 천재'처럼 묘사되어 있다. 시리즈의 두번째인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까지만 해도 점성술사 말고는 변변한 직업조차 없었던 그가 이제는 공학 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서 뇌과학 전문 교수인 것이다. 그것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그는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다. '마신유희'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 간극은 어떻게 된 거야?'하는 생각을 곧잘 했다. 해설의 글에서도 별다른 설명은 없이 미타라이 기요시를 이미 천재 중의 천재로 일컫고 있었기에 도대체 어찌된 연유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나처럼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는 안심하시라!
 드디어 우리는 해답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맨 위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뜻하는 '미싱 링크'를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 바로 이 책이 거기에 대한 해답이다. '초(超)천재' 미타라이 기요시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바로 여기서 마음껏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미타이 기요시의 인사'엔 모두 네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는 미타이 기요시 시리즈의 첫 단편집으로 1987년에 나왔다. 맞다. 82년에 나온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로 부터 무려 5년이 지나서다. 81년에 나온 '점성술 살인사건'과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사이의 시간적 간극을 생각한다면 꽤나 오래 걸려서 첫단편집이 나온 셈이다. 이 같은 간극은 미타이 시리즈로선 아주 이례적으로 길다. 바로 뒤이어 나온 '이방의 기사'도 88년에 나왔고 그 뒤로 죽 훑어봐도 2년 이상의 간극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 사이에 85년에 나온 '여름, 19세의 초상'말고는 별다른 작품 또한 없으므로(그의 또다른 시리즈, 요시키 다케시도 89년이 되어서야 두번째 장편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가 나왔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작품 정말 물건이다. 꼭 한 번 벗해보시길.) 여기 실려 있는 네 단편들을 1년에 한 편씩 썼다고 해도 왠지 믿겨질 정도다. 아무튼 시마다 소지로서는 이례적으로 긴 세월이 여기에 녹아있는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고 느낀 것인데 나는 이게 시마다 소지가 '미타이 기요시'란 캐릭터를 개인적으로 아꼈기 때문은 아닌가 싶어진다. 그렇게 여기게 된 이유는 여기에 실린 '숫자 자물쇠', '질주하는 사자', '시덴카이' 그리고 '그리스 개' 모두가 하나같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미타라이'라는 인간의 매력을 흠뻑 맛보게 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소설엔 그냥 명탐정만은 아닌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가 전면에 나서고 있다. 한없이 오만하고 경찰이 두 손든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니면 잘 나서지도 않는, 정의감 보다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추리 오타쿠로서의 그의 모습 보다는 그도 불쌍한 이들에 대해서는 연민('그리스 개'에서 원래 의대에서 천재로 통했던 그가 의대를 그만두게 된 이유에서 나타나듯)과 공감을 가질 줄 아는(크리스마스에 불쌍한 한 아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미라타이의 모습은 뜻밗이었고 그래서 더욱 뭉클하기까지 했다.) '인간' 미타이 기요시의 모습이 더 많이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실린 네 단편들은 다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심이기도 하다. 한데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미스터리들마저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세공된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달리 말해, 이번엔 어떤 미타라이의 인간적 매력을 보여줄 것인지가 먼저 선택되고 그에 따라 미스터리의 설계가 이루어진 것 같다. 혹,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더딘 걸음이 되었던 것도 시마다 소지 자신이 이 미타라이란 캐릭터를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할 것인지 공들여 설정하느라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말미엔 '신(新) 미타라이 기요시의 의지'란 제목의 시마다 소지가 직접 쓴 '미타라이 캐릭터'에 대한 후기치고는 다소 긴 글이 있는데 어째 범상하지가 않다. 그는 타인을 대하는 미타라이 기요시의 태도가 자신이 생각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문제점에 대해 하나의 대안으로써 형성했다고까지 하고 있으니. 미타라이는 시마다 소지에게 그냥 훌쩍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부여한 의미가 너무도 커서 시마다 소지는 미타라이 기요시는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그 어떤 것이든지간에 각색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끼는 캐릭터이니, 그 매력의 세공을 위해 1년쯤 걸렸다해도 어째 무턱대로 '그럴리가' 할 수 만은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만큼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를 열대의 스콜 한 가운에 있는 것과도 같이 흠뻑 느끼게 하는 것은 달리 또 없으니 미타라이 기요시에게 개인적 매력이나 흥미를 느꼈다면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책으로 보인다.

 

 명색이 그래도 리뷰인데, 실려있는 네 개의 단편들에 대해서 그나마 대략적이더라도 설명은 해야할 것 같다.

 

 '숫자 자물쇠'는 알리바이 트릭에 관한 것이고, '질주하는 사자'는 태풍이 부는 날 밤, 그것도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주 짧은 시간에 11층의 꼭대기 방에서 한참 떨어진 열차 선로 위에 시체가 있을 수 있게 되었나 하는 범행 방법의 트릭을 다룬다.(엘러리 퀸 같은 본격 미스터리라, 과연 엘러리 퀸이 했었던 '독자에 대한 도전'까지 들어가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만든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기인 '시덴카이'를 말하는 제목의 단편은 분명 셜록 홈즈의 '붉은 머리 연맹'을 오마쥬한 것으로 그와 똑같이 등장인물이 당한 기묘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힌다. '그리스 개'는 스미다가와 강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유괴에 관한 미스터리다. 여기엔 또 본격 미스터리라면 빠질 수 없는 암호 미스터리까지 나와서 감칠맛을 더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시덴카이'다. 캐릭터의 묘사가 좋았고 마지막에 당한 이의 독백도, 그것을 묘사한 시마다 소지의 연출도 좋았다.(진짜 매력적으로 연출되었는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밝히지 못한다는 게 유감이다.) '숫자 자물쇠'는 시마다 소지에게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와 같은 면모가 엿보여서 더욱 소중한 단편이다. 그러고보면 '시덴카이'도 비슷한 것을 보여준다. 이 단편집이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에 치중하고 있는 걸 보면 시마다 소지 자신도 초기에는 매그레와 비슷하게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를 이끌어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 단편들은 인간 미타라이 기요시의 베일들을 하나씩 벗기고 있다. '숫자 자물쇠'에서는 그 이름이 '화장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밝히고(이 때문에 '시덴카이'의 화자는 미타라이의 명함을 보고 분명 자신을 놀리기 위해 지은 가명 같은 것이라 여기기까지 한다.) '질주하는 사자'에서는 그동안 시리즈를 봐 온 나 역시 전혀 몰랐던 전세계에서마저 손꼽히는 기타 연주자로서의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태풍이 몰아치는 고층의 아파트에서 그는 불어닥치는 태풍 소리를 압도하고 현역 재즈 연주가들조차 덜덜 떨릴 정도의 빠른 속주와 현란한 테크닉을 보여준다. 그것도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 집에서 치면서 그만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미타라이 기요시의 넘사벽 천재 만들기는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던 것 같다. '시덴카이'에서는 해리 케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처럼 남은 7년동안이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기이한 경험을 멀리서 엿듣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해결해 준다. 마지막 '그리스의 개'에서는 그가 일본 제일의 의대에 다녔으며 거기서조차 넘사벽의 천재로 인정받았다는 걸 알려준다. 미타라이란 이름은 아무래도 '톱-랭크'와 같은 의미인가 보다. 그러던 미타라이가 왜 점성술이나 하면서 할 일없는 백수로 있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그 단편은 말해준다. 어딜가나 여성들이 꽃으로 날아드는 벌들처럼 달라붙는 미타라이이지만 왜 그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개랑 하겠어!"라고 대답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바로 거기서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을 읽고 미타라이란 인물에 크게는 매력, 아무리 적어도 호기심을 느끼지 않기란 힘들다. 읽었을 때 가장 의문이 들었던 것은 왜 그토록 미타라이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는데(같은 의문을 미타라이의 단짝 이시오카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만 삐딱한 것은 아니지 싶다.) 이유가 있긴 있었다. 난 그걸 최근에 나온 미타라이의 만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다른 곳으로는 절대 미타라이 시리즈를 각색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런 시마다 소지의 지조도 세월에 부대끼다 보니 물러진 것인지 미타라이 시리즈의 단편들이 만화가 되어 나오고 있다. 지금도 모닝이란 잡지에 연재되고 있는데 벌써 단행본으로 두 권이나 나왔다.

 

 

 

 

 위에서 아래로 각각 1권과 2권의 표지이다.

 그리고 2권의 커버에 그려진 저 남자가 바로 '미타라이'이다. 헐~

 

 

 

 보다 자세히는 이런 모습...

 시마다 소지가 만들어 놓은 것만 해도 넘사벽의 천재인데,

 만화가는 한 술 더 떠서 넘사벽의 꽃미남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과연, 이런 용모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인가...

 

 아무튼, 1권에 2편의 이야기가 들어가는 이 만화 '미타라이 탐정의 사건 기록' 2권에 바로 '숫자 자물쇠'가 실려있다. 미타라이의 진한 인간적 매력이 우러나온 이 단편이 만화로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지 궁금한데 언젠가 부디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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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긴 하지만 이 뒤로 올해 어떤 영화를 보던지 이 영화보다 더 뇌리에 오래 남을 작품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정말로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만큼 더 오랜 여운에 젖게 되는 영화다. 예상은 했어야 했다. 절망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 어떤 작가보다 더 어둡게 그릴 수 있는 코맥 매카시가 원작자고 이 영화의 감독이 얼마 전에 친동생인 토니 스콧을 그의 자살로 잃어버린 리들리 스콧이었음을 알았다면 말이다. 이렇게 너무도 절망적이고 어두운 영화라는 걸 짐작은 해야했다. 나는 어쩌면 예고편에 속았나 보다. 시치미 뚝 떼고 너무나도 스릴러다운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꽤나 빼어난 재미의 스릴러일 것이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나는 마지막 장면의 절망과 참혹함 앞에서 마치 소태를 곱씹듯 짜디 짠 소금의 심장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감히 말한다. 카운슬러는 절망의 기록이다. 아주 길고도 깊은... 



 

  요즘 대세 배우의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를 비롯하여 역시나 코멕 매카시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후덜덜한 연쇄 살인마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하며 뭐, 브래드 피트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다 페넬로페 크루즈와 카멜론 디아즈까지. 이런 호화 배역으로 무장한 영화이니만큼 군침을 흘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배역 앞에서의 나는 치즈를 바로 코 앞에 둔 생쥐와 같았던 것이다. 그것을 한 입 배어 물었을 경우, 혀 끝에 와 닿는 치즈의 달콤한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무정한 덫에 갇혀버리게 될 생쥐. 


 난 정말 그렇게 느꼈다. 물론 이 말이 이 영화가 엉망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천만에! 이 영화는 올해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들 보다도 좋았다. 감히 걸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걸작의 정의를 무엇으로 내리든 간에 어쨌든 이 영화는 참으로 오래도록 내내 곱씹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걸작이 그런 것 아니던가? 내내 그 영화가 만든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카운슬러'는 그런 영화다. 이건 늪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배들의 무덤이라는 사르갓소다.

 우리는 그 늪에서, 삶이라는 걸 본다. 삶이 가진 무정한 진실. 늘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며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항상 등에다 비정한 비수를 꽂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게 바로 삶이라는 잔인한 진실.



 페넬로페 크루즈는 그런 순진한 우리들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영화에서 한없이 착하고 그야말로 순결한 천사 같았던 그녀는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정말 문자 그대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다. 이토록 삶이 마련한 반전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누가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고 그랬나? 삶이란 정글이며 가장 잔인한 형태의 약육강식만이 있을 뿐인 것을.


  그리고 그 약육강식에 포식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모든 인간적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더욱 잔인한 형태의 진실만이 있을뿐.

코멕 매카시와 리들리 스콧은 한 목소리가 되어 말한다. "네가 서 있는 곳을 똑똑히 보란 말이야!"라고.


  여긴 영화 초반에 표범들이 질주하는 숨을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황야며, 우리들은 오로지 그들의 입에 먹히기만을 기다리고있는 멍청한 토끼들이라는 것을.

  그 사냥을 보며 하비에르 바르뎀은 '난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은 다시는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의 여친인 카멜론 디아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너무 차갑군."

  그러자, 카멜론 디아즈는 이렇게 응수한다.

 "확실한 사실에는 온도라는 게 없어."




 현실은 비정하기 이를 데 없고, 거기서 어떤 인간미를 찾는다는 건 오만이다. 아니, 그 비정함을 잊고 싶은 무익한 노력이 빚어낸 싸구려 환상일 뿐이다.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런 인간미가 아니라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만이 전부인 것이다. 브래드 피트처럼 아무리 대비를 잘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엔 먹히게 된다. 이런 세상은 진실로 단 한 명의 포식자만 허락하니까. 그런 세상에 발을 들였음을 주인공 마이클 패스벤더는 절규 속에서 깨닫게 된다.


 환영은 걷어치워!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이란 산타클로스가 아직도 있다고 믿는 유치한 아이들의 몽상에 불과하다고.


 하비에르 바르뎀의 목을 조이는 흉기에 대한 이야기, 브래드 피트의 스너프 필름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 그걸 모두 듣게 되는 마이클 패스벤더는 그게 그저 지어낸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현실로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이 영화의 유일한 포식자가 나중에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몽상은 산산히 깨어지고 우리가 확인하는 건 내 발이 디디고 있는 이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 뿐이다.


 '카운슬러'는 그런 영화다. 현실이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영화. 요한 계시록이 예언했던 지옥의 문이 이미 열렸음을 말하는 영화. 여기에서 달아날 길은 없다. 영화 마지막에 마이클 패스벤더에게 도달한 DVD 한 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당신의 길고도 검은 그림자 속에서 갈퀴처럼 무수하게 뻗어나와 당신의 뒷덜미를 부여잡게 될 말이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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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런 영화였군요... 저도 스릴러인줄 알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야겠네요. '현실이 지옥임을 알려주는'... 은 너무 슬퍼요.
그 지옥을 바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요즘 정치판을 보면
저는 저런 문구가 꼭 거짓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ICE-9 2013-11-20 00:50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후반으로 갈수록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역시 코맥 매카시더군요. 처음부터 기억해둘만한 대사들이 연속적으로 나와서,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나 배우들 연기 감상에 집중하는 것마저 다소 어려웠어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름으로 안 불리고 계속 카운슬러로만 불러요.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그는 카운셀러해 주는 것은 없고 계속 다른 이들로 부터 카운셀러를 받는다는 것이죠. 거기서 바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빈약함, 순진함이죠. 이는 초반 다이아몬드 세공사의 말에서도 등장하는데 아무튼 이 영화는 우리에게 냉혹한 직시, 냉철한 사유. 이러한 태도를 자꾸 권유하는 듯 해요. 참혹하기가 이를데 없는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더욱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도 싶네요.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