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집에 갔는데 낯선 이들이 잔뜩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는데 친척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모르는, 오로지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친척들. 알고보니 일제 시대 때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가 영영 헤어져 있다가 당시 가족 방문이 허용되자 할아버지의 요청으로 오게 되신 분들이었다. 수십년이나 못 보았으니 쌓인 할 말과 나눠야 할 감정은 당연히 많았고 그 날 우리 집엔 밤 늦도록 술자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마지막엔 울음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 조그만 머리로 그 수 십년간 쌓인 고생과 설움 그리고 울분을 따라잡기엔 너무도 벅찼으니까. 그냥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안주만 주워먹다가 느닷없이 할아버지와 방문한 이들의 울음을 보게 된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바람에 강제로 이리저리 뿔뿔히 흩어진 피붙이들이 수 십년간 받아온 남의 땅에서의 설움과 쌓여온 고향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설령 서로 어렵게 만나더라도 끝내 내어놓을 수 있는 건 말이 아니라 그저 울음 밖에는 없었던 그런 밤이. 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에 나오는 해금도 그랬으리라. 어릴 때 떠나와 평생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금이 만일 '우도 동쪽에 자리잡은 조일리란 마을의 검은 모래 해변'에 어떻게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다면 분명 나오는 것은 그저 눈물 뿐이었으리라. 감정은 때로 언어를 넘어서는 법이다. 게다가 그만한 세월 속에 묵혀온 감정이 아니던가. 어떻게 언어라는 작은 그릇에 다 담겨지겠는가?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진짜 읽게 된 것은 4. 3 평화수상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 밤 보게 된 그 눈물들을 이해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문득 가지게 된 그런 궁금증이 잔모래를 만지는 것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이 푸른 표지의 책을 넘겨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여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도 강제징용자였다. 오사카의 부두 하역장이 할아버지가 징용되어 주로 일한 곳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할아버지로부터 그 때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주를 하시면 늘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 술버릇까지 있으셨는데 취하시면 늘 그 이야기만 하셔서 더욱 반복해서 들어야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겨운 고생담이었다. 겨우 한 줌의 밥만 먹으면서 하루종일 엄청난 짐들을 날랐고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안한다고 일본인 감독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가혹한 매질을 견뎌야 했다. 당신이 살이 오르지 않는 것도 그 때 하도 고생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라를 빼앗기면 가장 힘든 것은 우리같은 약한 사람들 뿐이라고 당시를 회상할 때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겐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머나먼 척박한 땅으로 끌려갔고 또 누군가는 한 세월을 오로지 가축처럼 취급받으며 일만 해야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일까? 아닐 것이다. 당시에 조선에 살았던 일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왔을 보편적인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편적 아픔은 자꾸만 누군가만이 당했던 특별한 아픔이 되어가고 있다. 아픔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보상은 커녕 그들의 경험조차 제대로 후세에 새기지 못한 채 빠르게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강제 수탈을 수출로, 강제징용을 자원한 인력 수출로 왜곡하는 말도 안되는 움직임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거대한 아픔을 그렇게 개간하고 다시 포장 도로를 깔아 그 아래 깃들어 있을 고통과 신음의 뼈들을 얼른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려 하는데 어찌 그 아픔을 똑똑히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걸 그치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지우려들면 들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적 아픔의 편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아두고 되새기는 것. 그것이 수난의 역사에 자신의 삶과 가족들을 빼앗긴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더욱 이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소중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역사의 어둠 속 구석진 자리에 있던 것에다 이 소설이 최초로 밝은 빛을 비춘 것과 같다. 문학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다시는 되풀이 되지말아야 할 그 역사적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그것의 반복을 막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소은의 '검은모래'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형상화되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복원하면서도 재현은 생생하고 성찰의 시야까지 폭넓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표를 잃고 그저 속절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확실한 과거에 대한 성찰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도 있듯이.



 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를 잃은 신세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녀(p. 14)'였던 구월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딸 해금을 거쳐 해금의 아들 켄과 켄의 딸 미유까지 세대를 달리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이르는 한 가족의 역사를 담아낸다. 그 역사는 늘 힘겨운 물질을 해야 하는 구월의 삶 그대로 고난이요 홀로 존재하는 섬처럼 뿔뿔이 헤어짐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사는 것도 사랑도 다 그렇다. 하루종일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거친 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빈손이요 뜻하지 않은 이별이다. 그 숱한 시간 동안 그들이 건져내는 건 오로지 고통과 눈물 밖에는 없어보인다. 언젠가 구월은 남편을 찾기 위해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남편이 아니라 폐허로 변해버린 땅뿐이었다. 구월과 해금의 삶도 그 나가사키의 폐허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설령 아픔과 이별 뿐이라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섬에 있다고 한들 해금이 텃밭에 박씨를 심듯, 그녀들은 어제도 오늘도 물질을 하고 내일도 물질에 나설 것이었다. 그 지속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다지도 개인의 삶을 쉽게 짓밟아 버리는 역사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테왁(박의 씨 통을 파내고 구멍을 막아서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다에 가지고 가서 타는 물건)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해금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텃밭에다 박씨를 심는 것이었다. 구월의 시어머니도 박씨를 심다가 운명했다. 잠녀들이 박씨를 심는 건 다름아닌 희망을 심는 것이다. 해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화산섬에서조차 열심히 내일을 기약하는 박씨를 심는다. 그것은 아직은 끝이 아니며 내일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하나의 신념처럼 심는 것과 같았다. 한 마디로 그건 쇠뜨기였다. 구월이 나가사키 페허에서 본, 가장 먼저 대지의 절망을 뚫고 올라왔던 희망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한 쇠뜨기.


 죽음의 땅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었다. 검게 녹은 불모의 대지를 헤집고 비 온 뒤 죽순이 솟듯 새싹들이 움튼다. 뱀 대가리처럼 생긴 연한 갈색 포자낭이 서로 키를 재며 쭉쭉 뻗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이며, 그 어떤 모진 환경도 견뎌내는 생명의 숭고함이다.
 우악스럽도록 질긴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식물은 홀씨를 퍼뜨리며 제 깜냥대로 생존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제일 먼저 돋아난 생명이 바로 이 쇠뜨기였다.(p. 126)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녀들을 비롯한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지지 않고 삶을 지속해나가는 이들 모두가 사실은 쇠뜨기라 할 수 있다. 쇠뜨기가 나가사키에 다시금 생명을 가져왔듯 그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었다. 역사는 거대한 나라들이 아니라 오늘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믿고 해야 할 일을 지속해나가는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을 식물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유가 켄의 정원에서 본 그대로 소설에서 식물은 아무리 무겁고 짙은 어둠이 몰려와도 다시금 시작할 '회생의 기회가 있음(p.129)'을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켄의 정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쇠뜨기에서 바로 이어지는 켄의 정원은 그 장의 제목 그대로 '식물의 유혹'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더이상 해금의 박씨와 같지 않았다. 해금은 박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박이야 내가 없으면 저 혼자 잘 크겠지 뭐.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들은 손을 타야 살지만, 그건 인간의 오지랖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게지. 그냥 두면 알아서 다 살아가게 되어 있더구나.(p. 67)


 식물이 쇠뜨기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회생의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손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적 자생력에 있었다. 그건 원폭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해금의 말은 이러한 식물의 힘을 존중하고 있다. 해금이 식물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그건 그대로 거대한 역사나 국가가 백성과 가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중은 역사나 국가 또한 한 개인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태도였다. 박씨와 쇠뜨기를 비롯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와 국가는 그렇지 못했다. 존중은 커녕 개인을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기에 바빴다. 전쟁은 그것의 극명한 증거가 아니었던가. 켄의 정원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켄은 식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지속적인 공존의 방법임을 인간보다 식물이 먼저 깨달았다. (p. 144)


 하지만 말뿐이다. 그 때의 역사나 국가가 그랬듯이. 켄은 식물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타인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안정된 삶은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엄마인 해금을 비롯하여 가족을 버렸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인'을 버렸다. 그렇게 된 것엔 불신의 힘이 컸다.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불안이 중첩된 불신. 그건 바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역사와 국가는 모든 개인이 소중하고 그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된 보편화에 불과했다. 당시의 개인은 그저 국가가 필요하면 동원할 수 있는 존재 이상의 보편적 의미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구월이 조선 해녀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을 호소했을 때 일본이 국적을 이유로 무시해버렸던 것처럼. 입으로는 보편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인위적인 이유로 온갖 것으로 나누었다. 켄의 정원은 그러한 거짓 보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다. 그 어떤 자연적인 자람을 거부한 채 오로지 인위적인 손길만 가해지는데다가 그저 안으로 채집되기만 할 뿐 아무런 바깥으로의 넘나듦이 말끔히 제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 한껏 고양된 인위성과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폐쇄성은 현실 국가의 은유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식물은 본래의 자생력을 잃고 어디까지나 켄에 의해 길러지는 껍데기뿐인 식물로 남는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게 개인이 그렇듯이. 미유와 지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미유는 켄과 해금의 언쟁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대로 4분의 1만 피가 섞인 쿼터가 아니라 반이 섞인 '하프'임을 알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본이 한국에게 지자 한국을 마구 비하하는 지로에게 미유는 화가나 자신이 하프임을 밝히며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해 줄 것을 고백한다. 미유는 지로의 사랑을 믿었으나 지로는 그러지 못했다. 텅빈 케이크 전문점에서 지로는 미유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이또한 서로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거짓 보편화가 얼마나 허위인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구소은 작가가 주로 일본의 모습에서 이러한 거짓 보편화를 가져오는 건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외쳤던 '대동아공영'처럼 거짓 보편화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범 아시아적인 번영을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한 일이었다. 켄이 식물에 대한 말과는 달리 타인을 불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미유를 버리는 지로처럼 말이다. 거짓 보편화란 이렇게 그저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현재 일본의 진실된 모습은 어떠한가? 오로지 가상만 남아버린 일본은 실상 텅 비어있다. 구소은 작가는 지로가 미유에게 이별을 말할 때 텅 비어있는 케이크 전문점과 해금이 사는 미이케우라 섬이 밤에는 텅 비어 있음을 통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일본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가상에만 만족하고 속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진실된 속죄와 깊은 뉘우침으로만 가능했는데 번영이라는 가상에만 취한 나머지 그걸 방기하고만 것이다. 그건 미유와 지로가 연애할 때 함께 했던 스쿠버 다이빙에서도 드러난다. 미유와 지로에게 바다란 구월과 해금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그저 한가롭게 구경할 수 있는 관광 장소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만 취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피를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금의 삶과 함께 바다가 더이상 가상이길 포기하자 그들은 헤어진다. 이로써 구소은 작가는 해녀의 삶과 현재 일본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선명히 한다. 그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본처럼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기 위한 대안을 바로 해녀의 삶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인가? 그건 단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의 테왁이 가지는 차이점을 말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부표로 만든 테왁의 소재와 모양인데, 여기서는 박속을 파내고 잘 말려서 만든 테왁을 쓰지 않고 나무로 만든 북 모양의 일본식 테왁인 탐포를 사용했다. (...) 해녀들은 자신의 몸집과 힘에 맞춰 테왁을 만들었는데, 일률적인 일본식 탐포는 익숙해지기까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p. 96)


 과연 거짓 보편화의 일본답게 일본의 테왁은 개인의 개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이지만 조선의 테왁은 각 개인의 개성을 고려하고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구월과 해금의 삶을 하나의 대안으로 가져오는 이유이다. 거짓 보편화가 하듯이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존재 가치와 시간을 함부로 없애지 않으며 제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켄의 정원과 구월과 해금이 하는 대표적인 행위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켄은 식물을 기르지만 구월과 해금은 바다에서 캐낸다. 기르는 것은 개체를 보편이란 토양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반면 캐내는 것은 개체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엔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 없다. 이러한 캐내는 것이 가진 개체 보존의 투명성. 구소은 작가는 해녀들이 하는 행위의 대표적인 모습을 통해 거짓 보편화에 맞서는 대안이 바로 개체들의 투명한 보존과 복원에 있음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검은 모래'에서 구소은 작가가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대안으로써의 해녀 모습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망각이라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일제 강점기 해녀들의 삶을 마치 해녀가 바다에서 캐내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 모습에 담긴 뜻이 또한 오늘의 시대가 텅 빈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되는 지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여 더욱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늘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 청산을 이야기 할 때마다 위정자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과거 보다는 미래가 소중하다. 이제 더이상 서로 안 좋은 과거에는 집착하지 말고 협력해서 앞만 보고 나아가자'는 말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과거의 일본이 외쳤던 구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거짓된 보편화다. 역사에 실존했던 개인의 고통과 눈물을 현실적 이익이라는 이유로 쉽사리 제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그러한 제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게 만들어 그 반성이 가져올 보다 나은 오늘에 대한 성찰을 조금도 매개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잘못된 과거의 반복을 결국엔 거듭하도록 만든다. 꾸며낸 영업적인 미소가 거래의 신뢰를 조금도 보장하지 못하듯, 진실된 반성과 사죄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억지 화합은 관계의 공허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아마도 종국엔 관계에 내실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가치는 모조리 사라지고 그저 겉모습만 존재하는 텅 빈 관계가 되고말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지금 던져주는 주제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희생한 개체의 존재와 삶에 대한 온전한 보존과 최대한의 존중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화해 역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작품 전체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할린에서 온 친척들과 할아버지가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금 역시 다시 고향의 검은 모래 해변에 서게 되더라도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존중과 사죄도 하지 않고 그저 지우려고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그들이 고향의 검은 모래 위에 섰을 때 그나마 밝은 얼굴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아픔을 내 것처럼 소중히 할 때 뿐이리라. 그것을 위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삶을 발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소은 작가의 '검은 모래'는 실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단단한 첫 걸음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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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케빈에 대하여'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결코 적지않게 묵직한 여운을 남겼던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다시 한 번 그 가족에 대한 것을 들고 우리들에게 찾아왔다. 소설 '내 아내에 대하여'가 바로 그 작품이다.


  원제는 'So Much For That'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거기에 대해 할만큼 했다' 정도의 뜻일텐데 소설 제목으로는 참 어울리지 않는 지라 굳이 '내 아내에 대하여'로 바꾼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닌 것 같다. 원제에서 'That'은 주로 주인공 셰퍼드와 관계된 것으로, 그건 희귀한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아버린 아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원래 재산이 좀 있는 중산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의료 보험 제도 때문에 아내의 병을 치료하느라 일시에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어버린 미국이란 국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내에 대해서라면 남편으로서 해 줄만큼 해줬다는 뜻이 될테고 국가에 대해서는 오로지 흡혈귀처럼 국민을 착취하기만 하는, 그런 불합리한 국가에 대해 참을만큼 참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위싱턴 포스트지의 평론가 론 찰스는 '나는 감상주의가 없는 슈라이버의 작품을 존경한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감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케빈에 대하여'보다 더 좋았다. 근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경험에 있다. 집안에 연쇄살인마는 없어서 '케빈에 대하여'에서의 어머니 마음은 과연 어떨지, 소설의 말이 맞을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가까이서 좀 오래 병 수발을 해 본 나로서는 '내 아내에 대하여'에 드리운 셰퍼드의 경험과 고뇌들이 그저 진실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그것도 누군가 꼭 곁에서 돌봐야 하는 정도의 중병이라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경험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건 생각했던 것만큼 결코 만만치 않다. 매일 일어나 산 위로 무거운 돌을 등짐지고 날랐던. 저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나라의 백성들만큼이나 힘들고 마음 아픈 일상들이 계속된다. 마음과 몸만이라면 괜찮을 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지도 모른다. 나날이 쌓여져가는 치료에 드는 비용 같은 것들 말이다. 때로는 집까지 파는 것도 모자라 계속 빚을 내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이 급기야 온 가족마저 어두운 미래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모든 희생을 감내한다. 도대체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So Much For That'을 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셰퍼드도 그렇다. 그는 원래 제법 괜찮게 사는 축이었다. 우연찮게 시작했던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고 그 사업을 또한 백만달러라는 가격에 팔아 현재와 미래가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그에겐 꿈이 있었다. 좀 더 저축하여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는 꿈. 그는 그걸 '세컨드 라이프'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연히 맞이한 아내의 암으로 그 꿈을 이루기는 커녕 당면한 현실마저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착실했다. 사업을 할 때도 조그만 자신의 이윤 보다는 고객의 신뢰를 선택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 잭슨은 언젠가 그런 그를 이렇게 타박했다. "왜 세상의 모든 짐을 너혼자 다 떠안으려 하느냐!"라고. 그만큼 그는 책임감이 강하다. 사랑하는 아내도, 요양이 필요한 목사였던 늙은 아버지도, 제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예술한답시고 오빠에게 빌붙기 바쁜 여동생도 자기 밖에 모르는 딸도 그리고 이제는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 아들까지 다 맡으려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타인들에게 'So Much For That'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론 찰스의 '감상주의가 없다'라는 말은 그 때문이었다. 다른 작가였다면 어쩌면 영웅적으로도 묘사했을 셰퍼드의 모습을 슈라이버는 결코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슈라이버는 신중하게도 마치 작가 자신의 냉소를 대변하듯 누누히 옆에서 그의 짧은 식견과 바보 같음을 탓하는 존재를 소설에다 만들어놓았다. 그게 바로 그의 친구 잭슨이다. 잭슨은 끊임없이 셰퍼드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냉소를 날린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바보같은 믿음이라고. 과연 그 말 그대로 그토록 헌신한 셰퍼드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친구 관계도 좋고 직원들에게 존경까지 받았던 셰퍼드지만 아내의 암과 더불어 있게 되자 모두들 떠나간다. 물론 처음엔 가족이고 친구고 이웃이고 할 것없이 달려와 위로의 말과 당연히 아낌없이 도와주겠다는 말들을 해댔다.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결국 셰퍼드와 그의 아내가 맞닥뜨린 건 그들과의 결별 뿐이었다. 찾아오기는 커녕 연락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사정을 뻔히 아는데도 여동생은 어떻게든 자신이 힘든 것을 피하려하고 회사 사장은 셰퍼드 때문에 늘어난 보험부담만 탓하더니 직장에서 잘리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그건 곧 아내가 죽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매정하게 해고해 버린다. 잭슨도 그렇고 셰퍼드도 그렇고 결국 아무도 자신만큼 아파해 주지도, 대신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할만큼 했다고 느낀 잭슨은 권총 자살을 하고 셰퍼드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버리게 된다.

 슈라이버의 냉정한 시선이 포착한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친구들은 어디까지나 좋을 때만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힘들 때 곁에 있겠다고 도와주겠다고 말들 하지만 진짜 어려움에 닥쳐보면 똑똑히 깨닫게 된다. 그건 정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게도 이런 대사가 있더라. 인간이 철들기엔 인생이 너무도 짧다고. 인간은 약하다. 인간은 다른 이를 자기 몸처럼 챙길만한 존재가 못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꽤나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환자를 보살피고 있는 이들에게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면. 주로 실제 해보지도 않은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 또한 그런 이들은 꼭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자기는 고생을 이만큼이나 해봤다는 식으로. 또한 그런 자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치료에 대해 어떤 제도적인 잘못된 점이나 개선해야 할 것을 말하면 꼭 온정주의적으로 응수한다. '좀 더 바지런히 수발하면 될 것을 뭘 그런 것까지 요구하나?' 혹은 '부모인데 그정도도 못 해줘? 나라면 기꺼이 가진 것 다 내놓겠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소설 속 셰퍼드의 여동생 베럴의 반응이 그냥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제도적 구멍, 불합리등을 보지 못한다. 당연하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겠지. 나서서 도와달라고 하면 '시간이 없는데', '이것 참 사정이 안 따라주네' 하면서 얼마든지 달아나서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안다. 경험도 없고 생각이 가벼운 자들이 남 비판 또한 가벼이 한다는 것을. 또한 그런 그들에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도.


 한 사람의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온정주의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슈라이버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이 아직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던가? 개인에게 벅찬 짐이 될 것을 알기에 제도를 통하여 그 짐을 덜어주도록 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임금을 주는 것이다. 그게 이런 국가의 기틀을 세운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론의 모토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의 국가는 소설에 나오는 잭슨의 말대로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세금은 대선에 개입할 목적으로 불법 댓글이나 달고 철도 민영화 저지를 위한 파업 진압을 위해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수천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세금으로 만들어진 각종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비용은 우리같은 국민이 부담하게 만들고 이익은 소수의 힘있는 자들이 챙기게 하는 데 쓰이고 있다. 매일을 안녕하게 보내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는데 보라! 이제 그 국가는 도리어 우리가 서로에게 '안녕하십니까?'하고 묻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가 나에게 뭘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모두는 어제도 오늘도 국가에 대해 'So Much For That'했다. 그런데 응당 받아야 할 몫은? 과연 우리는 준만큼 돌려받고 있는 것일까?

 슈라이버가 냉정한 시선으로 셰퍼드의 삶을 그리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온정주의, 아니 더 쉽게 말하자면 '휴머니티'적인 것을 지우고자 함이다. 언젠가 강신주가 경희대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짜 사랑한다는말을 할 수 있는 건 남편이 다리가 잘려 실직해 집에서 놀게 되었을 때 '아, 이제 비로소 내가 마음껏 돌봐줄 수 있게 되었다'면서 기뻐서 업고 다닐 때'라고. 휴머니티라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되어야 휴머니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의 삶을 나의 삶만큼 책임져 줄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일 뿐이다. 아시다시피 그 정도를 해 줄 수 있는 인간은 정말로 얼마 없다. 아프기는 커녕 돈만 못 벌어도 내쳐지는 세상이다. IMF 때 급증한 이혼률이나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 이유로 이혼하는 부부가 많음을 보라. 그러므로 제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제도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듯이 말이다. 환자에 대한 수발과 치료는 그 중에서도 한 인간의 힘으로는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제도가 반드시 도와줘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기꺼이 세금이라는 걸 내는 것이다.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는 그걸 똑똑히 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 무엇을 시급히 고쳐야 하는지 깨닫게 하기 위해 그녀는 소설이 불러 일으킬 모든 감상주의를 휘발시켜 버린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신이 보게 되는 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실이다. 당신이 누가되었던 셰퍼드가 당했던 곤경을 당하면 당신도 혼자서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고난의 파도를 보다 쉽게 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제도라는 둑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 둑을 좀 더 높고 두텁게 만들기 위해 세금을 낸다. 하지만 국가는 자꾸만 그 둑을 얇고 낮게 만들어 가고만 있다. 결국 셰퍼드는 미국을 포기한다. 마지막의 문장은 셰퍼드의 이같은 고백으로 끝난다.

  "다 허튼 소리였다. 그의 탈출은 끝내주게 좋았다."

  셰퍼드처럼 이제 우리도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시작은 '내 아내에 대하여'였지만 그 끝은 '내 국가에 대하여'가 되는 소설. 오늘의 현실이 뭔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왠지 주정뱅이에게 운전을 맡긴 것처럼 불안하다면 부디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이 이 책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든 슈라이버는 국가와는 달리 충분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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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에 대하여 영화를 절반 보고 못 보고 있습니다. 책은 구매하고 접근도 못 하고 있는 중이죠. 그런데 "내 아내에 대하여"는, 할만큼 했다 라는 원제가 더 와닿는 이 책은 정말 엄두가 안 나는군요. 저는 매일 제 한계에 대해서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을 하는 중입니다. 그건 참으로 중요하더군요.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시스템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뼈가 시리도록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청소년에 대해서 말이죠. ㅠ

ICE-9 2013-12-29 04:45   좋아요 0 | URL
리뷰에도 썼지만 저는 '케빈에 대하여'보다 이 소설이 더 좋더군요. 감상주의까지 완전 덜어내고 보다 불합리한 제도와 거기에 분투(?)하는 개인들에 초점을 맞춰서인지 읽기도 전작보다 더 수월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때문에 슈라이버를 완전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전 용감한 작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마녀고양이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신데다 제도가 할퀴어버린 생채기를 안고 사는 청소년들을 직접 많이 만나보셔서 저보다는 이 현실이 더욱 시리실 것 같아요. 어떻게 잘 견디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까닭없이 눈물이 왈칵 솟을 때가 많아요. 영화 변호인 볼 때도 엄청 울겠구나 싶었는데 평소에 눈물을 좀 빼두었음인지 다행히 잘 나오지는 않더군요. CCR의 노래처럼 제발 언젠가는 누가 꼭 좀 이 비를 멈추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비란 정말로 약한 이들의 눈물이 아닐까 싶어요. 무자비한 국가가 뺨을 후려지는 바람에 터져나와버린...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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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캐나다는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춘기 시절엔 모험심이 강해져서 그런가 낯선 외국에서의 삶이 지금의 지루한 현실을 끝장낼 수 있는 커다란 기회라 여기게 된다. 내가 그랬다. 캐나다는 그런 곳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직장 관계로 몇 년간 거기에 계셔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허락되었다. 동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졸랐다. 하지만 거부되었다. 교육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대화가 거의 없는 나와 단 둘이 지내는 것을 거북해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자기 관리가 되지 않는 내가 더욱 나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본디 못하게 하면 거기로 향한 열망은 더욱 거세어지는 법이다. 그것도 던지기만 하면 바로 넣을 수 있는 농구 골대와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엄청 싸웠다. 하지만 사춘기의 저항이란 게 다 그렇듯이 대야의 가득한 물에 스포이트로 우유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이 효과는 미미했다.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악을 쓰든 모르쇠와 침묵으로 응대했고 결국 내가 먼저 제 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진 혼자 떠나셨다. 난 배웅하러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그게 내 저항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입 안의 톱밥을 씹는 듯한 나날인데도 가정은 평온을 되찾아갔다. 상실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당한 자의 몫일 뿐이라는 걸 그 때 새록새록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로드킬'당한 사슴의 사진이었다. 편지엔 아버지가 운전 중에 도로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들이받고 말았다고 적혀있었다. 평생 벌점 하나 받지않을 정도로 모범운전자였던 아버지로서는 비록 동물이긴하나 자신의 운전으로 하나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사진은 얼마나 놀랐는지 알림과 동시에 가족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내겐 다르게 보였다. 그건 나 같았다. 차가운 눈 바닥에 쓰러진 좌절된 내 소망의 시체. 이루지못한 꿈이 파열된 주검이 되어 거기 버려져 있었다. 위로의 말을 기대하셨던 아버지에겐 죄송하지만 그것으로 밖에는 안보였다. 앞서도 말했듯 아픔은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사람은 가시에 찔린 조그만 아픔조차 대신해 줄 수 없다. 누구도 사슴 대신 죽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그 사슴은 과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 예측했을까? 어느 겨울 밤, 먹이 혹은 쉴 곳을 찾아 늘 건너가곤 했던 그 곳에서 뜻밗에 나타난 한 동양인의 차에 치어 죽게되리라고 과연 알 수 있었을까? 몰랐으리라. 내가 그냥 손만 뻗으면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캐나다로의 이주가 물거품이 될 줄 몰랐듯이, 아버지가 늘 다니던 퇴근 길에서 한 생명을, 그것도 머나 먼 이국의 땅에서 빼앗게 되리라는 걸 몰랐듯이. 삶이 무서운 것은 늘 이렇게 뜻밗의 곤경을 어딘가에 준비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가운데 치즈가 놓인 쥐덫과도 같이. 사슴의 죽음은 그것 때문에 내겐 더욱 모골이 송연한 장면이었다. 삶의 무자비한 손 끝에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한 '리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디어 라이프(Dear Life)'는 캐나다 작가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먼저 사슴의 삶을 뜻하는 'Deer Life'로 들렸다. 왕의 목덜미를 겨냥한 다모클레스의 칼과도 같이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의 곤경 앞에서 무방비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하디 연약한 그 사슴과도 같은 우리네 삶을 연상시켰다. 비록 제목은 달랐지만 예측은 들어맞았다. 소설이 정말 그런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실린 14개의 단편들은 모두 어느 순간 닥쳐올지 모르는 '로드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첫 시작을 여는 단편 '일본에 가 닿기를'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안정된 삶을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모험을 요구하는 뜻밗의 유혹이거나 '자갈'의 주인공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일어난 사고로 가족을 잃는 뜻밗의 비극이기도 했다. 아니면 '코리'에서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고이거나. 혹은 '돌리'에서처럼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옛 애인이거나 '기차'에서처럼 문득 듣게 된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 고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디어 라이프'는 살면서 갑자기 당하게 될 지도 모를 '로드킬'들을 하나의 슬프고 아련한 꿈이거나 잠시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신음을 내게 만드는 나쁜 꿈처럼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처럼 갑작스런 이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늘 그 장소과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거나 혹은 '기차'의 잭슨처럼 어디서도 머무를 수 없게 만드는 그리고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리아처럼 쌓인 세월이 반창고가 되어준 듯 어느덧 그 아픔에 익숙해질 순 있지만 그래도 갑자기 어느 저녁무렵 문득 까닭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그렇게 우리를 '상실 전문가'로 만드는 것들을...

  지금 그에게 있는 것.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결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p. 118)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거기에 '상실'도 그렇다고 하고 싶다. 그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 사진들을 죽 대하면서 똑똑히 깨달았다. 한 번 도려낸 상실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저 우리는 '자갈'에 나오는 닐의 조언대로 그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아픔을 조금씩 마모시켜 갈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 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p. 142)

 내게 캐나다가 그랬듯이, 우리에겐 누구나 '아문센'이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에서 주인공이 찾고자 했던 병원 같은 곳이 있다. 아무리 원하지만 어떻게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 늘 나와는 저만치의 간극으로만 남게 되는 어떤 사람이거나 것들이.

 닐은 그 간극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닿고자 하는 마음을 오컴의 면도날처럼 잘라버리면 편해진다고. 행복은 의도된 착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어쩌면 위안이기도 한 이 말에 그러나 난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상실된 것을 어떻게든 메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뭔가 관점이 협소하다고 느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한다. '로드킬'을 막기위해 표지판을 세우듯, 덤불 속에 웅크린 보이지 않는 늑대를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뒤 미지의 보복이 두려워 도시를 만들었던 것처럼 프로이트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한 걸 가만히 들여다볼라치면 우리의 안정이란 게 오로지 불안이 잠재된 외부를 잘라내는 것으로만 얻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한 것은 닐의 조언 그대로였던 것이다. 간극이 놓여진 이유를 이해하기 보다는 무시해버림으로써 얻어진 테우리 속의 일시적 행복. 2001년의 9.11이나 2011년 일본 쓰나미에서 보듯 단지 세계가 거대한 힘으로 건드리지 않을 때에만 겨우 존재할 수 있는. 배가 아플 때 발라주는 '빨간 약'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랬다. 비슷한 방법으로 '로드킬'을 피하려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엘리스터와의 사랑을 위해 메리를 배반했고 '기차'의 잭슨은 다시 부머랭처럼 돌아온 옛사랑을 져버렸다. '코리'의 주인공이 뒤늦게 깨닫게 된 사건의 진실도 결국은 애인의 배신이었다. '디어 라이프'의 단편들은 자주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안식처'의 재스퍼 이모부가 속한 공동체가 잘보여 주듯이 종교란 것도 알고보면 외부를 잘라버림으로써 구가하는 내적 만족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엔 '자기 중심적'이란 게 자리잡고 있다. 내가 아버지가 보내온 사진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 감정만 투사했듯이, 삶의 모든 경험을 혼자 짊어져야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유용한 쪽으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앨리스 먼로의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의 사진들을 대하다보면 그녀가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떠가는 배의 속도로 서서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간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우리가 너무 우리만의 아픔에 골몰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도록 만든다. '로드킬'은 당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도 어쩌면 그 '로드킬'의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로 갈수록 점점 쌓여져 가는 '로드킬'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걸 느끼게 된다. 사건의 중심은 천천히 '당한 나'에게서 '가한 나'로 옮겨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했을 때는 보였던 아픔이 가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당한 사람은 사라지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너의 행복을 보존하기 위해 간극을 잘라버려라'라고 했던 닐의 조언에 충실했던 우리들은 피해자인 그들에게도 똑같이 대했던 것이다. 보지 않고 잊어버리면 그 뿐이었다. 없는 셈치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p. 389)

  언젠가 우연히 버스 안에서 중학교 동창생 하나를 만났다. 한동안 나를 정말 못살게 굴던 녀석이었다.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었던 나는 녀석에게 그 때 왜 그랬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때는 그런 장난 으례 다 치는 것 아니냐, 뭘 그런 것까지 다 담아두고 있냐'며 날 타박했다. 황당했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지? 난 그 시간에 교실로 들어온 햇살의 밝기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 일을 쉽게 잊었다. 늘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순진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편한 것만 기억했다. '뇌과학' 책을 보니 아예 우리의 두뇌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고 불확실한 자연에 스스로를 길들여가다 보니 그렇게 진화했다고.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언젠가 가해자의 모습이 되어 누군가를 '로드킬'시켰을 지 모른다. 일부러 서둘러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자전적이라는 마지막 단편 '디어 라이프'에서 앨리스 먼로가 자신의 어머니가 한 일을 떠올릴 때 나 역시 이런 생각으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 뒤에 놓인 그 긴 망각의 그림자 속에 어떤 내가 가한 '로드킬'의 희생자들이 있을지 몰라서.

 결국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와 만나게 하는 책이었다. 난 여지껏 삶에서 잃어버린 것과 치뤄야만 했던 대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내가 빼앗은 것과 타인에게 입혀버린 손해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캐나다에 보내달라고 악다구니 할 때의 부모님이 과연 어떠한 마음이셨을지 하는 것들을. '호수가 보이는 풍경'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문제는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것 처럼 그렇게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더이상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자리로 옮겨 갔다. '시선'의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세이디라는 여인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세이디는 '로드킬'을 당했다.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충격과 처음으로 시신을 마주한다는 공포 앞에서 주인공은 세이디의 눈꺼풀이 조금 들썩이는 걸 본다. 엘리스 먼로는 그 눈의 크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이 그녀라면, 당신이 그녀의 몸 속에 들어갔다면 속눈썹 사이로 밖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만. 어디가 밝고 어디가 어두운 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만. (p.350)

 이 단편집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우리가 타인에게 배려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만 더 내 내부를 허물어 타인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닐의 조언보다는 더 '로드킬'에 대한 불안과 아픔을 줄이는 길이 아닐까 싶어진다. '시선'의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그 '들썩임'을 기억한다. 언제나 그 타자의 입장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들썩임'을. 앨리스 먼로의 이 소설도 내게 그러할 것 같다. 언제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사슴의 사진처럼.
 
 언젠가 정말로 캐나다에 가게 된다면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싶다. 거기서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하고 살면서 내 아픔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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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21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써야지 하고 읽어보면서 다른 일을...^^
캐나다 하면 빨강머리 앤이 생각나는군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정말 있을까요 이 말 보니까 에드워드 왕자군요 앤이 살던 초록지붕집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찾아온다고...

캐나다에 가 보고 싶으셨군요

자신이 슬픈 일을 겪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 있지만 자신한테 안 좋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죠 그래야 나중에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않죠


희선

ICE-9 2013-12-22 22:44   좋아요 0 | URL
와! 저도 빨강머리 앤 정말 좋아해요. 그 뒷 이야기까지 다 읽었을 정도록^ ^ 그린 게이블즈가 유명한 관광 명소라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그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긍정하면서 조금씩 바깥으로 넓혀가야겠죠. 책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좀 더 타인과 공감하면서 배려의 폭을 넓혀 가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
 
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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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가의 작품들을 거듭 읽어가다보면 작가도 세월따라 변해간다는 걸 알게됩니다.


삶의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것들이 말이죠. 나쓰메 소세키도 그러합니다. 분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과 같은 초기의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은 '문'이나 '한눈팔기'와 같은 후기의 나쓰메 소세키와는 많이 다릅니다. 초기의 소세키는 '도련님'의 주인공과도 같이 세계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와 당당하게 대결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임에 반해 후기의 소세키는 '문'의 주인공에서 보듯 세상 앞에서 한없이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죠. 아마도 '도련님'을 읽고 바로 '문'을 읽게되면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련님'이 1906년에 나왔고 '문'은 1910년에 쓰여졌는데 불과 4년만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마도 그렇게 된 것은 그의 네번째 소설'태풍'에 나왔던 '도야 선생'과 같은 경험을 그 역시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도야 선생처럼 자신이 옳은 신념을 가지고 올곧게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 역시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그러다 점점 변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만을 절감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절감을 가져온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태풍' 이후로 내어놓은 소설들이 계속 실패한 것에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세키는 1907년, 당시 재직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교수 자리를 내던지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합니다. 1년에 1번 100회 정도의 연재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매달 200엔을 받는 아사히 신문의 파격적인 조건 때문이었는데 당시 연봉 800엔으로써 많은 아이들을 부양하면서 생활해야했던 소세키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죠. 또 그가 아사히 신문 입사에 대한 일종의 소감으로써 쓴 글을 보면 당시 소세키는 대학 강의라는 것에 상당히 지쳐있었던 듯 합니다. 그 글에서 그는 자신이 대학 강의를 그만둔 것을 '개'의 탓으로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꽤나 집중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바로 뒤이은 대학을 떠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 든 도서관에서의 일화를 보면 '함부로 큰 소리로 말하거나,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곤 해서 (책 읽는) 고상한 취미를 방해하는 정도가 막대했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어쩐지 소설 '도련님'에서 수학 선생이 되어 시골중학교로 부임한 주인공이 자신이 성심껏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을 놀려먹기까지 해서 잔뜩 반감을 갖게 되는 부분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도련님'은 흔히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인 소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건 이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나쓰메 소세키는 정신병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신경쇠약이었습니다. 굉장이 예민한 성격이었고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주위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죠. '도련님'의 주인공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물론 '도련님'의 주인공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동경제국대학 영문학 강사 시절엔 제자 한 명이 폭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는데 그 충격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자주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소세키의 아내도 신혼 때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집 부근의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모로 젊은 날의 소세키는 참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정이었으니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강의 환경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 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대학 강사 생활에 많이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소세키를 보다 못한 친구가 그렇게 정 괴로우면 글이라도 써봐라고 해서 썼던 게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소세키는 100% 재택근무를 보장받아 일상의 번거로운 잡사는 잊고 마음껏 자신이 꿈꾸던 문학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카프카가 가장 바랐던 생활을 그는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의욕적으로 시작된 연재 소설 '우미인초'는 그러나 너무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통속적이라 소세키 특유의 매력을 다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우미인초'는 우리나라의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무정'이라는 소설도 쓰게할만큼 당대에 영향력이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 뒤의 '갱부'는 그만한 반응조차 받지 못했죠.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이후 내내 성공의 가도를 걸어온 그에게는 꽤 통증이 심한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존심마저 강했던 그였으니 그 아픔은 더욱 깊었겠죠. 아마도 그래서일까요? 이후 '산시로'는 변모된 모습을 보기에 됩니다. '갱부'는 언뜻 보면 첫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비슷합니다. 그 소설에서 인간 사회의 관찰자 역할을 했던 고양이를 19살의 소년으로 바꾸어 놓으면 '갱부'가 되지요. 그렇게 '갱부' 역시고 관찰자의 소설입니다. 자기가 속한 세계가 싫어서 가출한 소년이 우연히 한 갱부를 만나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긴 탄광촌으로 따라가지만 건강 문제로 정작 갱부는 되지 못하고 사무원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한 편으로 거기엔 소년이 본 탄광촌의 실상이 잔뜩 그려져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갱부'는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은 작품입니다. 자연주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데 주력합니다. '갱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산시로'는 다릅니다. 세계 보다는 '나'에 더욱 주안점을 둡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내가 어떻게 그 세계를 해석하는가, 세계가 내 마음에 드리운 잔영을 독해하는데 더욱 주안점을 두는 것이죠. '산시로' 이후로 내면의 심리묘사가 더욱 많아진다는 것도 바로 그것을 반영하죠. '도련님'과 '문'이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세계에 대한 태도의 극심한 차이는 아마도 이것에서 연유할 것입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은 세계를 앞에 두고도 전혀 해석을 하려하지 않는 반면 '문'의 주인공은 끊임없이 세계가 자신에게 남겨놓는 것에 대해 해석하려하니까요. 즉 후기의 소극성이란 정말 사람이 소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널 정도로 생각이 많은 사람 특유의 성향이라는 것이죠. 아무튼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산시로'는 다시금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소세키의 전성기를 되찾게 해 줍니다. 그 뒤로는 '한눈팔기'도 성공하여 주욱 안정적인 문학 세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죠.





 재밌는 것은 '도련님'과 '산시로'가 좀 비슷한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원래 있던 곳에서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죠. 물론 '도련님'에게는 '산시로'와 같은 가슴 아리는 짝사랑은 없습니다만. 정말 주목할만한 이 두 작품의 차이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당히 틀리다는 것이죠. 당대에 '모던 걸'이라 불렀던 신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산시로'에는 주인공이 동경했던 '미네코'라는 아주 매력적인 신여성이 등장합니다. 소설이 연재될 당시 그 성공이 바로 미네코 덕분이라고 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꽤나 소세키가 긍정적으로 묘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에선 전혀 그렇지 않죠. 여기서 신여성이란 존재는 세속적인 계산으로 신의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속물일 뿐입니다. 원래 고가 선생이랑 혼인을 약속했다가 그의 집안이 기울자 이내 교감 '빨간셔츠'로 갈아타는 '마돈나'라는 신여성에게 도련님의 주인공은 속물인 '빨간셔츠', '알랑쇠'에게 하듯이 경멸을 보냅니다. 이렇게나 여성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소세키 개인의 경험이 반영된 탓입니다. 소세키는 '삼각관계'를 많이 쓰기로도 유명하죠. 그랬던 것은 그 역시 '삼각관계'를 아주 뼈져리게 겪었기 때문입니다. 1895년은 나쓰메 소세키에게 그야말로 '어두운 시절'이었죠. 요코야마 영자 신문에 기자로 응시했으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낙방했고 거기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을 거절하고 친한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네, 소세키는 그 여자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삼각관계를 이루었고 결국은 패했습니다. '산시로' 이후로 '상실감'이 그토록 빼어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경험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소세키는 꽤나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거든요. 그러다 돌연 미쓰야마라는 시골 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바로 그 곳이 소설 '도련님'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그 학교에서 느꼈던 것을 '도련님'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의 자전적 소설인데 그렇다면 당시 소세키가 여성, 그것도 신여성에게 얼마나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지는 능히 짐작이 되시죠? 바로 그 경험의 반영으로 '도련님'에서 신여성은 그렇게 묘사된 것입니다.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 역시 고가 선생처럼 자신의 무능으로 여성을 빼앗겼을 지도 모르겠어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식으로 원래 의도였던 것은 아닙니다만 소세키의 실제 삶과 관련하여 조금은 중구난방으로 '도련님'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그만 이렇게 이야기 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앞서 작가의 변화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건 바로 첫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 사이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태도라는 견지에서 볼 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관찰자적인 위치를 고수하지만 '도련님'은 관찰을 떠나 세계와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Watch It'에서 'Do It'으로 변화한 것이죠. 이 관점의 변화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이건 단순히 '도련님'이 두번째 작품이기 때문이라거나 자전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여기엔 분명 당시 일본 사회가 처한 상황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봅니다. 그건 바로 1904년 일어난 러일전쟁입니다.



물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러일전쟁 이후에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과는 그것을 쓸 때의 임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렇게 꽤나 개인적인 이유로 쓰였습니다. 애초에 작품으로 발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소설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우선 1장 정도만 쓴 것을 한 모임에서 낭독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그것도 좋아서 쓴 작품이기에 '러일전쟁'이 일본 사회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제대로 숙고하지는 못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도련님'은 본격적인 문학에 대한 열의로 쓰여졌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소세키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웅지'였습니다. 원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소세키는 문학론을 먼저 쓰려고 했다죠. 영국에서 실제 서양 문학을 사사받았지만 그걸 일본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저 답습이 아닌 일본에게 알맞은 문학론을 정립하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포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좌절한 문학론이 '도련님'의 모습으로 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불화'는 사실 '빨간 셔츠'나 '알랑쇠' 그리고 '신여성'이 뜻하는 바로 '모던'이라는 근대와의 불화이기 때문이죠. '빨간 셔츠'와 대립각을 이루는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의협심이 강하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분노하면 행동부터 앞서는 데다 옳은 것은 어떤 상황이든 관철되어야 하는, 융통성마저 없는 마치 사무라이와도 같은 전근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근대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데 그래서인지 바로 그 신념의 고수가 비슷하게 근대적인 가치관을 부정했던 허먼 멜빌의 '바틀비'를 많이 연상시킵니다. 근대화된 조직 내에서 그 어떤 명령에든 '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바틀비는 그 자체로 우리가 근대라는 것을 너무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를 스스로 물어보게 만들었죠. 그렇게 무조건적인 추종만은 아닌 스스로 돌이켜보고 헤아리는 것. 소세키도 '도련님'을 통하여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소세키가 '도련님'의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많이 듣게끔 연출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이런 저런 것을 끊임없이 듣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신념이 강해서 자기에게 말하는 타자의 입장에서 헤아리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해답과 맞춰보는 게 고작이죠. 성숙의 정도를 타자의 입장에 얼마나 잘 서 있을 수 있느냐로 가늠한다면 도련님의 주인공은 확실히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소세키도 그것을 잘 알았던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제목을 일부러 '도련님'이라고 지었겠죠. 소설에서 '도련님'은 어릴 때부터 주인공을 보살펴왔던 유모 기요가 주인공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기요는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가족도 포기한 주인공을 유일하게 따스하게 품어주는 주인공에게는 그야말로 어미새가 있는 둥지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주인공은 그런 기요와 헤어져 멀리 시골까지 내려와 교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기요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애틋한 사랑 한 번 느끼지 않은 채 오직 다시 기요와 같이 살 날만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인공은 독립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영원히 보호 받기를 꿈꾸는 미성숙한 존재. 당연히 소세키는 '도련님'을 붙여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그대로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전 소설에서는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빗대어 고양이로 여겼었죠. 그래도 이제는 뭔가 할 수라도 있는 사람이라는 '도련님'이 되었으니 조금이나마 발전했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스스로를 고양이나 도련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직 지금의 일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식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변해버렸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서양 열강이었던 러시아. 일본은 막상 전쟁을 벌이게는 되었지만 설마 자신들이 러시아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그랬는데 이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건 일본에게 그들 역시도 이제 서양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한 마디로 '러일전쟁'은 일본에게 있어 단절이었습니다. 바로 '메이지 유신'와의 단절이었죠.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이란 본디 서양의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반 서양적이었다고 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최고지휘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알려진 대로 '정한론'을 주장했는데 그건 서양 열강에의해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조선을 먼저 개국시키고 근대화하도록 강하게 압학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물론 100% 신뢰할 수 없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라는 한 나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범 아시아주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을 오로지 아시아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그 아시아를 침략해오는 서양 열강과 싸우려 한 것이죠. 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는 이러한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깡그리 기화시켜 버렸습니다. 강자가 되었던 그들은 이전까지의 아시아 연대는 부숴버리고 오로지 일본 한 나라만의 이익 극대화에 나선 것이죠. 사이고는 실각되어 메이지 10년에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가 죽고 사이고의 정한론을 배척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만의 국력 강화를 주장하며 실권을 장악해버렸습니다. '도련님'이 쓰여진 건 그런 시기였습니다. 주인공과 산미치광이가 보여주는 모습이 '메이지'스럽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반감은 당시 일본에 대한 소세키의 반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아예 소설에서 직접 보여주기도 하지요.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 자리에서 학생들끼리의 난투극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주인공과 산미치광이는 학생들과 미친듯이 싸웁니다. 어쩌면 그 정도로 소세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당대 사회에 대한 거부가 있었기에 '도련님'이 이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후기의 헤아림이 부족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로 점점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의 나라가 되어갑니다. 아무리 돌팔매질을 해도 변하는 것 하나 없는 일본. 점점 거대해져만 가는 세계 앞에서 자신의 돌팔매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면 남는 것은 하나 뿐일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자신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후기의 작품들은 그런 이유로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분노하는 것만큼이나 그 분노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소세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문학을 통해 삭여왔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정확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련님'은 정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글이 길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러일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도련님'이 어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납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말이죠.



  글이 참 길어졌습니다. 당신도 지치셨겠죠? 어리석게도 이제와서야 왜 이렇게 썼나 자문하게 되네요. 아마도 오늘날 제가 바라보는 세상이 제 마음의 뭔가를 건드린 탓이겠죠. 나쓰메 소세키로 하여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도련님'을 쓰게 한 것처럼 말이죠. 결국 책을 읽는 것이나 글을 쓴다는 것도 나름대로 견뎌가기 위한 자기 치유의 일환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지식을 얻는다거나 남에게 읽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도련님'을 읽고 글로 우려내면서 이렇게 오늘을 견딥니다. 당신도 오늘 이 까만 밤 아래 어디에서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겨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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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해져가는 세상 앞에서 나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저는 나스메 소세키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읽어야지 하고 책만 사놓고...
실은 아무 지식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헤르메스님의 글이 참으로 반가왔습니다.

그렇군여, 오늘을 견디기 위해서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마침 새로 시작한 일이 다소 심심한 곳이 있어서 여유가 있을것 같기도 하네요.
저랑 같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쓰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무게. ㅠ

아래 페이퍼의 천사학을 제가 요즘 읽는데, 저는 천사학이라는 제목만으로 홀랑 구입해서 소설인줄 몰랐답니다... 그런데, 트와일라잇 종류의 판타지더라구요... 평이요, 음....... 음....... 음......

ICE-9 2013-12-19 00:3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글을 반가이 맞아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요즘 이사 준비도 있고 해서 정말 정신이 없네요. 그래서 알라딘 서재에 이렇게 마녀고양이님의 좋은 댓글이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ㅠ ㅠ
요즘은 정말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날 치유하기 위해서 글을 읽고 쓰고 있는 듯 합니다. 도련님 리뷰도 너무 그 마음에 의탁해서 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냥 그러고 싶네요. 어떻게든 견뎌가려는 몸부림으로... 천사학 찜해놨는데 마녀고양이님 말씀을 들으니 걱정되네요. 나중에 돌덩이같은 충격도 부드러움으로 감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면 읽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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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달랑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시간은 참 무정하게도 빨리 흐른다.

 어느새 11월이 다 가고 다시 신간 추천 시간이 돌아왔다니 믿기지 않는다.

 어딘가 나도 모르는 곳에 구멍이 나있어 거기로 시간이 술술 새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이번 신간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아 조금 위안이 된다.

 어떻게 보면 알라딘 서재에서 이만큼 있을 수 있게 한 헤닝 만켈, 이제 영영 안 나올 줄 알았던 역시나 나의 로망, 요코미조 세이지, 거기다 꼭 한 번 우리나라 말로 볼 수 있기를 바랐던 제임스 블리시의 '양심의 문제'까지...

 마치 , 최후의 만찬을 미리 치루는 듯한 기분이다.


 아무튼, 11월의 신간 추천, 시작해본다.



 첫 타석은 물론 해닝 만켈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작가의 이름은 핸닝 만켈이고

 발란더는 발란데르라고 되어있어 좀 혼란스럽다.

 작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스웨덴에서 만든 발란더 Rolf Lassgård가 발란더로 분한 영화 보니(스웨덴에선 발란더 시리즈가 Rolf Lassgård를 계속 주연으로 하여 모두 9편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쿠르트 발란더'라고 부르던데 어째서 발란데르가 된 것일까? 


             

                                                                     Rolf Lassgård


 아무튼 '불안한 남자'는 2009년에 발간된 '발란더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만켈이 2005년부터 스웨덴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발란더'에서 그의 딸 린다로 분했던 배우, Johanna Sällström(1974 ~ 2007)가 2007년 2월 13일의 금요일 집에서 자살한 뒤 더이상 발란더 시리즈를 집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발란더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로서는 좀 당황스런 이유이긴 하지만, 만켈 나름의 이유는 또 그대로 존중되어야 하니 아쉽지만 이렇게 보내줄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아무튼 2013년 현재도 발란더는 방영되고 있는데 '불안한 남자'는 올해 초에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린다 역은 전혀 다른 사람이 맡았다.



 여기서 '불안한 남자'(영어판 제목은 'THE TROUBLED MAN'으로 되어 있다.) 혹은 곤경에 빠진 남자는 중의적이다. 이는 1982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임무 중에 사망한 다이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의 상관이자 같은 작전을 수행했던 잠수함 함장이자 현재는 발란더의 사돈이기도 한 엔케일 수도 있으며 이제 노년이 되어 술에 취해 권총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한심해진데다 점점 더 뼛속 깊이 무기력과 고독을 느껴만가는 발라더 자신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제목은 도처에 존재하는 곤경에 빠지거나 안주할 수 없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재밌게도 작품은 아내와 잘난 자식 그리고 권위등 모든 것을 다 가진 엔케와 남은 것이라고는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딸자식과 옛 명성이 무색해질만큼 다소의 천대와 몸뚱아리 밖에는 없는 발란더를 비교해서 보여주는데, 그래서 우리는 발란더가 자신과 정반대인 엠케 때문에 더욱 무기력과 고독을 느낄 뿐만 아니라 아예 엔케를 은근히 질투까지 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마지막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아마도 시리즈 사상 가장 약하고 인간적인 약점이 도드라지는 발란더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냉전 시대에 얽힌 미스터리와 노년의 불안과 피로가 중첩된 이 작품에서 과연 만켈이 마지막으로 찍어 놓고 가는 인장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물론 드라마로는 봤지만 그래도 글로 읽는 것과 똑같을 수는 없으니...) 




 '백일홍 나무 아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초기 단편집이다.

 물론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한다. 혼진살인사건과 옥문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이다. 여기엔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은 물론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백일홍 나무 아래'다. 초기 긴다이치 코스케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독살 미스터리도 미스터리지만 마지막 장면이 굉장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품은 백일홍에 얽힌 전설을 가져와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백일홍 전설이 어떤 모습의 미스터리로 성형되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양심의 문제'는 웬만한 SF 팬이라면 그 이름을 다 아는 SF의 걸작이다. 지은이 제임스 블리시는 1921년 생으로 미국의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무병으로 세계 제2차 대전에도 참전했는데 '양심의 문제'처럼 그의 작품이 유독 종교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건 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59년 휴고상을 수상했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적 색채가 강했던 역시나 휴고 수상작인 월터 M 밀스의 리보워츠를 위한 찬송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아무튼 진중한 맛이 가득한 SF의 필독서다. 나왔으면 그저 감사하고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간은 왠지 안 읽고 그냥 지나가면 좀 허전해서,

 '그녀가 죽은 밤'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인데, 이것을 포함하여 올해 두 작품이나 소개된 작가이기에 뇌리에 새겨둔 작가이다. 이 책을 발간한 한즈미디어는 이 작가의 작품들 예전의 우타노 쇼고때처럼 많이 소개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그러나 싶어 읽어보고 싶다.

 '혀 끝의 남자'는 요즘 하도 여기저기서 작가의 이름을 많이 보게 되는 터라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그런 전설 같은 말들이 따라다니나 싶어 역시나 궁금증에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대니얼 트루소니라는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다. 그것이 당연하게도 이게 처녀작이다. 실물을 보니 표지가 꽤나 근사했다. 천사와 인간의 혼혈종이라는 네피림을 파헤치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나왔던 '섀도우 헌터스'도 네피림이 나왔었다. 원래 이 작가가 논픽션에 강했다고 하는데 그런 작가가 네피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쓸지 궁금하다. 어쩌면 흥미로운 세미-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작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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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0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코미조 세이시가 쓴 긴다이치 코스케 이야기가 다 나온 게 아니었군요 그렇다 해도 저는 하나만 제대로 봤군요 다른 것도 봐야지 하면서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 책이 이제야 나오는군요 언젠가 이 책 본 적 있어요 제목만... 그러고 보니 그때는 앞에는 잘 모르고 '~알은 누구의 것인가' 로만 읽었습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집에 알을 놓고 가는데 그런 게 나올까요 갈리레오 시리즈도 나왔던데 아직 그것은 안 나오는군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그녀가 죽은 밤은 닷쿠 & 다카치 시리즈라고 하더군요 그냥 그것만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온 일곱 번 죽은 남자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사실은 벌써 보고 잘은 아니지만 쓰기도 했습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아주 나중이 되겠지만요 재미있습니다)

천사학은 소설이죠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나타내는 사람들 대단합니다 꼭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죠 그것을 잘 잡아내야 하겠군요


희선

ICE-9 2013-12-11 00:24   좋아요 0 | URL
요코미조 세이시는 제가 워낙에 좋아하니까 모든 신간이 다 관심작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쩐지 좀 계륵 같은 느낌이 있어요^ ^ 굳이 다 찾아서 읽을 것까진 없는 것 같은데 빼놓으면 뭔가 또 허전해지는^ ^; 일곱 번 죽은 남자가 의외로 유명하더군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 작가이기에 한스미디어에서 그렇게 내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작가들 중에는 남다른 관찰력을 가진 이들이 많더군요. 저도 그런 매의 눈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