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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 모르고 있는 사이 훌쩍 2013년이 가버리더니 어느새 신간 평가단도 마지막 신간 추천 시간이 도래했군요. 늘 느끼는 것이지만 6개월이란 시간,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하루 보내는 건 길어도 1년 보내는 건 순식간이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네요.  특히나 이번 신간평가단은 너무 부진했던 것 같아서 바로 코 앞에 마지막을 앞 둔 지금 그저 아쉬움만 그득합니다. 그러한 미련의 긴 그림자를 달고서 신간평가단 마지막 신간 추천을 해 봅니다.




 12월의 추천이라면 단연 이 책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 책의 출간으로 이 땅에 볼라뇨의 팬이 제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걸 분명히 느꼈습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볼라뇨의 팬을 자처하시는 분들을 뜻하지 않게 많이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아무튼 볼라뇨의 유작이자 결정판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근사한 외관으로!


 볼라뇨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렇게 쓸 수 없다는 이 소설을 이 겨울이 다가기 전에 꼭 읽어두고 싶네요.







  소네 케이스케는 '코'로 처음 만났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섬뜩하면서도 호러 작품으로의 완결성도 똑 부러지게 보여주어 깔끔한 맛을 더했던 단편이었는데 그 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그와는 또 전혀 다른 하드보일드 풍이어서 '어, 이 작가 은근 변신의 귀재로군.'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이번에 나온 '침저어'는 이전과 또 다르게 첩보물이로군요. 호오, 또 어떤 새로운 변신된 모습을 보여줄 지 기대되는데 에도가와 란포상까지 수상했다고 하니 그 기대감이 더욱 부채질하게 됩니다.







 데이비드 미첼의 소설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 문학동네에서 그의 소설을 또 한 편 발간했네요. 늘 정체성의 문제에 천착해왔던 그가 이번엔 아예 자전적인 소설로 돌아왔습니다. 별다른 기교도 없이 자전적 경험이 한껏 우러난 한 소년의 내면을 숨김없이 드러낸다고 하는데 어쩌면 데이비드 미첼이 가진 정체성의 심장부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 도대체 이 작가의 머리 속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었기에 저로서는 금방 탑승해버릴 것 같네요.  








 디어 라이프를 읽고 팬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앨리스 먼로의 책이 또 한 권 나왔군요.엘리스 먼로가 지었다면 다 읽어보고 싶은 저에게는 역시나 놓쳐서는 안되는 단편집입니다.











   나서서 대놓고 깃발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으로는 꾸준히 응원하고 있는 '피니스 아프리카에'서 '87분서 시리즈'가 또 한 권 나왔네요. 87분서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라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살인의 쐐기, 킹의 몸값 등. 저를 87분서 시리즈에 환호작약하게 만들었던 작품들이 모두 시리즈 초기 작품들이었으므로 당연히 노상강도도 엄청 기대됩니다. 개인적으로 순서대로 읽으면 그 맛이 더 좋을 것 같다고 느끼기에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경관혐오자'부터 시작해서 '노상강도' '살인의 쐐기' '킹의 몸값' 이렇게 나가는 것도 좋겠네요. 이런 순서로 '87분서 시리즈'를 처음 만나시는 분들이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 서문에서 말했듯 너무 부럽습니다. 



 이것으로 마지막 신간 추천도 끝이로군요. 후반기에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욱 잘 활동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만 크게 드네요. 아무튼 이제 또 하나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해야겠죠. 신간평가단 소설 파트 여러분들도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파트장으로 너무 미진한 활동 보여드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끝까지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부디 2014년엔 참아야 하는 일보단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또 바라는만큼 이루시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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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6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가지로 감사드려요. 올해는 더 좋은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ICE-9 2014-01-19 03:33   좋아요 0 | URL
단팥빵님, 이런 제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 단팥빵님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리뷰 읽으면서 새로 깨닫는 것도 많았어요^ ^ 저 역시 여러가지로 감사드리고 단팥빵님의 2014년도 달콤한 앙꼬가 가득 든 한 해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희선 2014-01-12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는 길지만 한달 한해는 짧죠 한해의 반도 그렇게 길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달마다(지난달이라 해도) 새로 나온 책을 보셔서 좋았겠습니다 읽고 싶지 않은 게 됐을 때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네 케이스케 '침저어'가 벌써 나온 줄 알았습니다 왜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어떤 책이 되든 즐겁게 보시기 바랍니다^^


희선

ICE-9 2014-01-19 03:36   좋아요 0 | URL
신간평가단을 하면 그 중심으로 시간이 재편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체감되는 세월의 속도가 더욱 빠르게 느껴지네요^ ^ 진짜 매력은 읽게 되는 신간 보다 새로나온 신간들을 검색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사실 신간평가단이 아니면 신간 검색하는 일이 없었던 저인지라 자주 놓치는 책들이 많았는데 신간평가단 하면서는 그런 책이 없어서 좋았어요. 희선님도 한 번 경험해보시길 진심으로 추천드립니다^ ^ 그리고 댓글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ㅠ ㅠ
 
죽음의 한가운데 밀리언셀러 클럽 134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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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매튜 스커더가 자신의 창조주 로렌스 블록을 70년대에 실제로 만났더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미스터리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하드보일드 탐정 중 하나로 만들어주었으니 고맙다면서 악수나 포옹을 할 것 같다고? 아니, 그건 오산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읽어보았다면 분명 이런 내 짐작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렌스 블록의 얼굴에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볼 거라는 걸.

 

 

 그래도 로렌스 블록은 기꺼이 이해하리라.

 자기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테니. 로렌스 블록은 그의 상처와 속죄를 가지고 주머니를 채웠고 94년엔 미국의 작가협회가 일찌감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할만큼 유명세 또한 누리지 않았던가. 너무 로렌스 블록을 나무라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의 한가운데'를 읽고나니 그의 고독과 슬픔이 더욱 진하게 다가와서 나라도 나서서 정말 작가에게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하고 삿대질 해주고픈 심정이니까.

 

 

 

 이 소설에서 그는 두 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는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그의 삶이란 속죄의 삶이었다. 원래 그는 잘나가던 형사였다. 어느 날 그는 현장에서 강도를 추격하다 강도를 향해 두 발의 총을 쏜다. 한 발은 원했던 대로 강도에게 맞았지만 다른 한 발은 그렇지 않았다. 길가에 있던 어린 소녀의 눈에 맞아 소녀는 죽는다. 경찰 조직은 그에게 책임이 없는 것으로 판정했지만 스커더는 그럴 수 없었다. 설령 고의는 없었다고 해도 자신으로 인해 끝장나버린 소녀의 죽음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죽음이든 그대로 무시될 수는 없다.'

 시리즈 내내 이어질 이러한 그의 정의를 그는 몸소 실천한다. 자신을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이제까지 누리고 있었던 모든 안락한 삶과도 결별하는 것이다. 경찰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아내와 아이들에게서마저 떠나간다. 고독한 사립탐정으로 사는 것. 그것은 그의 속죄였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10월이 온다. '죽음의 한가운데'는 10월의 정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시의 10월은 1년 중 가장 쾌적한 때'라면서...

 

 

 과연 그에게 두 가지 좋은 일이 찾아온다.

 그에게 있어 좋은 일이란 많은 보수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외로움의 코트를 잠시 벗어둘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두 명의 여인이 앞에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의뢰로 미행했던 여자, 포샤 카. 그녀는 특이한 성적 경향을 지닌 손님만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다. 원래 경찰이었던 이번 일의 의뢰인은 특별검사와 함께 굉장한 규모의 경찰 비리를 들춰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의뢰인을 협박범으로 고소한 것이다. 스커더는 그녀를 직접 만나 '왜'라고 묻는다. 그녀는 거짓 고소임을 시인하면서 배후에 뭔가 큰 것이 도사리고 있는 듯한 암시를 남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암시도. 그러면서 스커더를 은밀하게 유혹해 온다. 그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자꾸 끌리는 자신을 스커더는 이상하게 여긴다. 결국 유혹을 물리치고 떠나려는 스커더에게 포샤 카는 '자신에게 10월은 가장 슬픈 때'라고 말한다. 왜냐고 스커더가 묻자. 포샤 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겨울이 오고 있으니까."(p.24)

 

 

 그 말은 예언이었을까? 스커더는 뒤에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용의자로 자신의 의뢰인이 체포되었다는 말도. 스커더는 아연 실색한다. 꿈까지 꾸면서 강하게 끌렸던 그녀를 그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아니, 지켜줄 수 없다. 스커더 자신이 발사한 첫 번째 총알의 트라우마.

 

 

 구치소에서 만난 의뢰인은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고 한다.

 이번엔 진범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의뢰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스커더였지만 의뢰인에 대해 분노한 경찰이 하나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게을리하는 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의뢰를 수락한다. 어쨌든 그 어떤 죽음도 이대로 그냥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의뢰인은 자기 아내가 집에서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 말한다. 아내의 이름은 다이애나. 달의 여신이자 사냥꾼 여신의 이름을 가졌다. 고독한 자에게 달은 단 하나의 벗이자 위안의 벗이다. 스커더는 다이애나에게 끌린다. 비로소 자신의 이 고독을 가시게 할 존재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제 인생에서 마치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처음부터 그런 기회는 계속 있었겠지만, 그게 있다는 걸 알아야만 잡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그 기회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걸 깨닫게 해 준 계기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p. 188)

 

 

 다이내나가 스커더에게 한 말은 스커더가 다이애나에 대해 해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다이애나라는 이름이 가진 또 다른 의미 그대로 '헌팅'당한 것이다. 그렇게 포샤 카의 유혹은 거부했던 스커더는 다이애나의 유혹은 받아들인다. 그건 자기만큼이나 절박한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공감되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둘은 키스하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속죄의 여로는 거기서 멈출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고독과 상처는 조금 마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스 블록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스커더가 사랑에 빠져 있는 사이, 잇달아 죽음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블록은 그 순서를 마치 스커더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타인의 죽음들이 초래된 것처럼 만들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마땅히 그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그 타인들이란 의뢰인을 무죄로 방면시킬 수 있는 유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죽었다는 건 그만큼 의뢰인이 감옥에서 풀려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이건 그대로 스커더가 양심의 가책없이 다이애나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정확히 1 대 1 대응하는 살인과 사랑의 함수 관계. 스커더의 보통 삶에 대한 욕망이 증가할수록 살인 또한 늘어나는...

 

 

 결국 파국이 온다. 스포일러 상 밝힐 수 없지만 결코 다이애나와 함께 할 수 없게 만드는 파국이. 결국 그건 자신에게 영원히 트라우마가 될 두 번째 총알이었던 것이다. 현재 속죄의 삶을 가져온 경찰 시절에 발사한 두 번째 총알처럼.

 

 

 그에게 벗어날 길은 허락되지 않는다.

 짧은 10월의 쾌적함은 긴 겨울의 고통만 남겼을 뿐이다. 가장 눈물이 많고 상처가 많은 탐정. '죽음의 한가운데'는 이제 겨우 시리즈 두 번째의 작품이다. 아직도 그가 흘릴 눈물과 가지게 될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 그는 영원히 속죄의 여정을 걸어 갈 운명이다.

 

  "사람은 운명을 바꾸지 못해. 운명이 사람을 가끔씩 바뀌게는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지."(p. 234)

 

 

  세번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탓에 단정내리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더가 자신이 걸어 온 속죄의 여정을 확고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바로 이 두 번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모습이 지금까지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지극히 매튜 스커더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게 된 결정적 한 방이었으니까.

 

 

 하드보일드는 어디까지나 초연함에 있었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대쉴 해미트의 무표정한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어떤 경우든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것. 그것만이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립탐정들이 유일하게 자신의 '모럴'을 지킬 수 있었던 길이었다. 챈들러의 말로우도, 맥도널드의 루 아처도 그랬다.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만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되는 역할이었다. 그건 작품에서 철저하게 상대방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근사한 여인이 유혹해오더라도 절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의 스커더처럼 문득 느낀 유혹에 대한 상념으로 괴로워하고 아예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대의 하드보일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1976년에 나왔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때는 아직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현역으로 활동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보일드의 근본 규칙을 허물어뜨리면서까지 로렌스 블록은 혁신을 단행했던 것이다. 지극히 타자의 감정에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사립탐정으로.

 

 

 한 마디로 하드보일드의 뉴 웨이브!

 이 같은 뉴 웨이브는 아마도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부적 자극 때문이었을 지 모른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몽키스 레인코트'처럼 외부 사회의 변화는 하드보일드적 태도의 변화를 요청하는 법이니까. 사실 당시 사회에 그토록 만연된 아픔을 앞에 두고서 언제까지나 냉정한 관찰자인 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처를 받은 사람 앞에서 네 아픔의 원인은 이런 것이야 말해주는 사람은 그저 재수없는 녀석일 뿐이다. 그들이 아픔을 호소하는 건 그 원인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한 마디 따스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니던가. 로렌스 블록이 현명했다면 자신의 사립탐정도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 준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같은 상처를 가진 자만이 더욱 타인이 받은 상처에 공감할 수 있고 보듬어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하드보일드 역사상 유래없는 공감의 탐정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의 한 가운데'는 유일무이한 매튜 스커더의 하드보일드적 정체성이 완성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우리는 만연된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다. '긴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많은 죽음들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는 이유로 작은 불똥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죽음마저 차별받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긴 겨울의 고통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 그 자체가 아닌 오로지 외부의 것으로만 평가되는 세상이기에. 그러므로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죽음에게조차 자신의 일처럼 관심을 갖고 공감하며 그 의미를 세상에 남기기 위하여 분투하는 매튜 스커더를 난 지지할 수 밖에 없고 이왕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외로워하며 울고, 상처받고 실연당하는, 그렇게 아주 인간적인 온기마저 느껴지는 탐정이기에 더더욱. 겨울이면 누구나 무언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법이 아니던가.

 

 

 끝으로 인상 깊게 읽었던 장면 한 토막.

 

 

 "가끔은 달의 인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바보 같죠?"

 "글쎄, 바다는 그걸 느낍니다. 그래서 밀물과 썰물이 있는 거고. 달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확실해요. 경찰들은 다 알아요. 범죄율은 달에 따라 변해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특히 기이한 범죄들이 그렇죠. 보름달이 뜨면 사람들은 기괴한 짓을 해요."

 "예를 들면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키스하는 거."(p. 190)

 

 

 보름달이 뜨는 밤에 한 번 응용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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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0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잠깐 차이로 해가 바뀌었습니다 첫날 빨리 인사하고 싶어서요^^ 제가 책을 읽고 쓸 때 조금 괴로워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아야겠습니다 잘 못 쓰더라도 즐겁게 해야겠습니다 쓰고 나서가 아니고...^^

헤르메스 님은 어떠신가요 책읽고 쓰기 즐거우세요 책 읽기를 먼저 즐겨서 잘 쓰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도 책 즐겁게 보시고 쓰기도 즐겁게 하세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가보다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쉴 때는 잘 쉬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ICE-9 2014-01-06 01:29   좋아요 0 | URL
희선님 감사합니다. 저야 뭐, 책 읽는 건 대부분 즐겁죠. 하지만 쓰는 건 아직 그리 다 즐거운 건 아닌 것 같아요ㅠ ㅠ 엉덩이 근력을 보다 기르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중이랍니다. 희선님도 2014년엔 더욱 즐거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 행복한 추억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
 
피라미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4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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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대왕'에 이어 두번째로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피라미드'는 '파리대왕'과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자못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던 윌리엄 골딩은 전쟁동안 겪었던 뼈아픈 경험을 한 권의 소설로 승화시켰다. '파리대왕'은 인간의 영혼은 마치 백지와도 같이 선과 악, 질서와 야만 환경에 따라 어디로든 쓰여질 수 있으며 그런 인간들을 적절히 통제해 줄 문명이 그 힘을 잃어버렸을 경우 인간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스스로 혼돈을 초래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파리대왕'은 문명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보여주었는데 하지만 이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달랐다. 그 문명이 자기만의 궤도에만 과도하게 집착하여 원래 문명이 존중해야 할 인간을 더이상 존중하지 않을 경우 도리어 인간들에게 얼마나 감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 그렇게 된 사회를 단적으로 윌리엄 골딩은 '피라미드'라 부른다. 이 소설은 '스틸본'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사실은 현대 사회 어디라도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적 질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고개 뒤로 강을 쳐다보았지만 대신 챈들러스 클로스의 그림이 즉각 떠올랐다. 배비컴 중사의 집은 윌멋 대위 집 입구 건너편에 있었다. 두 집이 나머지 집들보다 뚜렷하게 우월했다. 그 너머로는 집들이 점점 더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더러워지고 퇴락해서 폐허가 된 공장까지 이르렀다. 남자 아이들은 '가난한 소년'의 운동복을 입었다 아버지의 바지를 잘라 입었는데, 버려진 셔츠가 밑으로 튀어나왔다. 대부분 맨발이었다. 나는 거기가 신문에서 빈민가라는 부르는 곳임을 갑자기 깨달았다.( P. 67). 


스틸본의 모습을 표지로 사용한 한 '피라미드' 표지 중에서...

 이런 공간 속에서 주인공 올리버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을 깨달아 나간다. 그 '스틸본'은 '파리대왕'에 나오는 문명화되지 못한 무인도와는 정반대로 한껏 문명화된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 만나고 느끼게 되는 위험과 숨막힘은 결코 거기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처럼 층층이 이루어진 계급 사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피라미드'의 단면인 '트라이앵글'처럼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전개되어 나가는 이야기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피라미드'란 소설은 사실 세 개의 이야기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통합된 이야기이며 그 각각은 주인공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표지...

 단순하게 말하면 올리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를 진실로 인도하는 세 꼭지점의 인물들은 각각 이비, 애벌린, 바운스로 그들은 모두 올리버에게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비는 아직 '피라미드'적 사회의 허상을 깨닫지 못한 올리버가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상위 계급에 대한 선망의 대리 충족 역할을 한다. 즉 올리버의 이비에 대한 욕망은 정말 이비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비뚤어진 투영인 것이다. 올리버가 이비를 원한 것이 원래 동경했던 상위 계급의 화신과도 같았던 이모젠의 약혼 소식을 듣고 이루어졌다는 점과 무엇보다 이비를 원하게 되었던 계기가 자기보다 상위 계급인 보비와 함께 있는 것은 본 뒤였다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즉 올리버에게 이비의 육체란 단순히 여자의 육체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상위 계급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주는 일종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이비가 자신과의 정사로 임신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 임신 가능성을 통해 올리버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계급에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비는 결국 올리버보다 더 상위 계급의 누군가와 관계된 문제로 인해 마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비의 사라짐은 올리버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비의 사라짐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는 새삼 깨닫게 된다.


 

 그 두려움이 있어서인지 다음의 이야기는 보다 더 상위 계급에 서고자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간 올리버를 보여준다. 이비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는 사회가 바라는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휴가를 맞아 다시 '스틸본'으로 돌아오고 엄마의 강권으로(그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를 했는데 그 연주를 맡은 사람이 갑자기 연극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올리버의 엄마가 그에게 거의 억지로 떠맡긴 것이다.) 연극을 하게 된다. 애벌린은 바로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연극 연출자다. 이 부분에서 연극이 나오는 이유는 이비를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해왔고, 그 때문에 좀 더 사다리의 윗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올리버에게 사실은 그 사회가 보는 것만큼 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극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의미라고는 모조리 텅 비어버린 환영에 불과함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부분의 연출이 참으로 절묘한데, 골딩은 이 연극이 사실은 얼마나 계급적인 것인가를 먼저 보여준다. 시장의 아내가 주인공이었을 때와 거의 내쫓겼다시피 했을 때의 시 당국으로부터 배우들이 받는 대접의 차이를 통해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바로 계급 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노래 실력을 지닌 시장 아내가 늘 프리마돈나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골딩이 이런 에피소드를 깔아 놓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 올리버가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결국 사회는 그의 예상 대로 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아무리 노력한들 이비의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는 한편, 그토록 올리버가 매달리려고 하는 이 사회가 과연 실제로 가치있는 것인가를 연극 연습과 공연을 통해 보여준다. 거기서 올리버는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선망해왔던 이모젠의 모습이 사실은 다 연기였음을, 그리고 그 이모젠이 대표하고 있었던 상위 계급 역시도 상연되는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연극만큼이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이는 애벌린이다. 그런데 그 애벌린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질이 낮은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는 남자지만 내면은 여성인 인물인 것이다. 애벌린은 그러한 자신의 진실을 용기있게 올리버에게 간접적으로 전하지만 올리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비웃어 애벌린을 수치심에 젖게 한다. 비록 이 '피라미드'적 사회가 허상이라는 것에는 눈을 떴으나 아직 완전히 헤어나오지는 못한 올리버는 인간이 얼마든지 다양한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것과 그걸 배려하거나 포용해야 한다는 것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올리버를 거기까지 이르도록 해 주는 인물이 바로 세번째로 나오는 인물인 바운스다. 올리버가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동안 사회가 만든 가치관에 깊숙이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히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다시금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바운스는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오는 인물이며, 그렇게 올리버 과거의 인물이다. 바로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올리버는 상위 계급으로 가기 위해 포기해 버렸던 원래 되고 싶었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과 다시 만난다. 그 시간을 헤아리면서 올리버는 무분별하게 도취되어 있었던 상위 계급을 향한 선망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운스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상징이다. '스틸본'에서 죽은 지 오래된 오필리어처럼 살고 있었던 바운스는 사회에 길들어지느라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모조리 흘려보내야 했던 주인공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바운스도 이비나 애벌린처럼 '스틸본'에 의해 사라진다. 올리버는 그 사라짐을 마치 몸을 불로 지진 것처럼 기억에 새긴다.

 

 또한 나는 그 장면이 불로 지진 것처럼 내 몸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었다는 걸 당시에도 알았다. (...) 아무도 바운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틸본이 공동으로 등을 돌린 몇몇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내가 대놓고 일부러 묻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세월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P. 277)

 

 그 사라짐이 그토록 올리버에게 깊이 새겨진 것은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사라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틸본에 의해 추방되었던 바운스는 스틸본에 의해 자기 꿈을 억지로 수정해야 했던 올리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바운스의 사라짐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사라짐과도 똑같았다. 그 바운스를 회상하면서 올리버는 자기가 잃어버린 것, 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지금 다다른 곳이 어디인가를 똑똑히 깨닫는다. 그건 다시 만나게 된 바운스의 작별인사와 곧이어 이어지는 무덤의 장면으로 완성된다.

 

 "잘 가라.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는 것 같다."(P. 284)

 

이렇게 '피라미드'는 올리버처럼 사회에서 주입된 관념으로 보다 계급의 상위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 속에서 정작 우리가 얼마나 큰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올리버는 너무나 뒤늦게 그것을 깨닫게 되는 바람에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사회는 한 번 깊숙이 편입되면 놓여나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는 암시임과 동시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빠져나오는 것도 역시나 커다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의 암시이기도 하다. 골딩이 마지막에 올리버에게 가족을 허락하고 유독 그의 두 아이를 강조하는 것과 바운스가 집에 불이 나면 아이 보다는 차라리 앵무새를 구하겠다는 말이 그것을 드러내는 듯 하다. '파리대왕'이 인간이 문명의 통제로 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의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피라미드'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이루어지는 문명화에 대한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골딩의 근심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 하고 묻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리버의 비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삶을 이처럼 세 가지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타산지석처럼 너무 뒤늦기 전에 지금 찬찬히 자신의 삶을 잘 들여보라는 뜻으로.

 

 그렇게 '피라미드'는 나 역시 이 피라미드의 보다 위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지금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나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말로 너무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소설을 통해 그런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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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목을 보니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속에 나온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아니, 바뀌는 사람도 있지만 한번 정해지면 그 삶만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저는 예전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군요^^

한 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달라진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우리 삶도 한번뿐이군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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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러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과거 1호 지구에서 읽었던 '파피용'이라는 공상 과학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아의 방주'라는 주제에 착안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태양계로 실어 나를 우주선을 제작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 때 이 '파피용 프로젝트'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인류가 동일한 과오를 영원히 반복하지 않게끔 최선의 후보자들을 선발하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6권 p. 373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와 그 후에 나왔던 '타나토노스', '천사들의 제국', 그리고 '신'은 하나로 모아지는 연속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미'는 주인공이 조나탕 웰즈와 니콜라 웰즈 그리고 쥘리 팽송 등으로 이후와 다르긴 하나 특히나 쥘리와 미카엘의 경우 베르베르가 주인공들에게 계속 같은 '팽송'이라는 성을 준 것은 아무래도 독자들이 이 이야기들을 일련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도록 배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볼 경우, 다소 주제가 뚜렷해 보이는 '개미'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작가 베르베르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썼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베르베르가 전혀 별개의 소재로 보여지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보여지기를 원했다는 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뜻한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다소 무리라는 걸 무릎쓰고 추정해 보자면 결국 '타나토노스'부터 '신'까지 이어지는 미카엘 팽송의 여정은 처음에 그가 개미들을 통해 구축했었던 세계를 다시금 인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거는 물론 '개미'에서 만들어진 세계의 디테일들이 '천사들의 제국'이나 '신'에서 설정된 세계의 디테일과 유사하다는 것에 찾아진다.

 

 일례로 '개미'에서 에드몽 웰즈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 개미들과 통신할 수 있는 로제타 석을 찾고 결국  지하실에 유폐된 이들과 합류하여 개미와 공존해 살아가는 니콜라 웰즈는 그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들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이는 '신'에서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자신이 다스리는 1호 지구의 신으로 군림하는 것과 방식이 유사하다. 이런 식으로 은연중 드러나는 유사성이 베르베르 작품 세계의 원점엔 역시나 '개미'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개미의 세계를 그저 소설 속 상상의 세계로 놓아두지 않고 인간의 체제로 현실화 시켰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난관과 그 난관의 해결에 필요한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미카엘 팽송의 여정에서 베르베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제3인류'도 그 연속성 위에 있는 작품이다.

 그건 분명하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이전의 여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었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여기서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아예 이번은 그 '개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천재 곤충학자이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쓴 장본인이기도 한 에드몽 웰즈의 손자 다비드 웰즈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다. 이건 어쩌면 하나의 단서일까? '제3인류'가 사실은 인간판 '개미'라는 것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앞서 '개미'에는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 니콜라 이야기를 했지만 '제3인류'에도 그런 존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이아다. 아, 이런 식으로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신이 나오긴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여기서의 신은 지구 그 자체다. 지구가 사람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그는 신만큼이나 전지전능하다. 필요하면 기상도 마음대로 조정하고 쓰나미도 일으켜 원하는 곳을 타격할 수 있다. 그는 병원균까지 창조하고 조종할 수 있다. 가히 신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이아란 이름을 붙여 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지의 여신 이름을.

 

 고대 그리스 신들은 신탁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르 전할 수 있었다. 이 신도 그렇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할 수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이아란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그 이름을 언급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구 자체를 인격신으로 여길 경우 얼른 떠오르는 것은 전작 '신'에서의 미카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똑같은 1호 지구를 담당하여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구 위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던 미카엘.

 

 

 순전히 자신의 생존만 신경쓰고 지구 위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은 신경쓰지 않는 '제3인류'의 지구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미카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지구라는 신의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냉혹성과 맹목성도 어느정도 이해는 되었다. 아마 당신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이 지구라는 신을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구는 자신의 기억을 유지하는, 인간으로 치면 뉴런과 같은 석유를 자꾸만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인간을 응징하는데, 그게 신종플루같은 독감균을 만들어 거의 수십억 단위로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인간들은 쓰나미다 뭐다 해서 마치 발로 일군의 개미들을 짓밟듯 지구에의해 가볍게 제노사이드를 당한다. 그동안 인간들에게 당한 지구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나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인간인 이상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걸 코를 풀듯 가볍게 해버리는 지구를 무턱대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구에겐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그에게도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아주 먼 옛날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운석을 기억하시는지? 지구의 잔혹함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지구는 정말로 갑자기 다가온 소행성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것이다.

 

 테이아.

 충돌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 때문에 내 중심축은 0도에서 15도로 기울어졌다. 그에 따라 사계절이 생겨났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p. 105) 

 

 다행히 화성의 위성 하나가 대신 희생해 지금은 지구의 달이 되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 공포가 너무 컸기에 지구는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지 몰라 매일을 두려움 속에 보내게 되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신'의 미카엘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미카엘이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것과 똑같이 생존을 위해 인류에게 개입한다. 그러니까 우리 인류의 진화는 다름아닌 지구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인류는 바로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선별되었던 것이다.

 

 '개입'과 '선별'은 베르베르의 전 작품을 통해 이어지는 핵심 주제다.

  이같은 지구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피조물을 이용하는 것은 첫 작품 '개미'에서도 두드러졌던 일이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개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이 새로 추대된 클리푸니 개미 여왕의 음식 공급 중단으로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이자 개미들에게 지하실에 갇힌 자신들을 구조해달라는 메세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하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이건 '제3인류'의 지구가 자신에게 생존의 위협이 되는 행성을 인간들을 시켜 폭파하도록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제3인류'가 인간판 '개미'라는 것도 이같은 유서성 때문인데 아무튼 지구는 그 때문에 원래 거인족이었던 인류를 멸망당하게 만들어 지금과 같은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도록 초래하고 말았다. 플라톤이 대서양에 있었다고 말했던 '아틀란티스'도 그 희생양이었다. 지구는 아틀란티스의 거인 인류를 자신의 목숨줄을 보호할 수단으로 선별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들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복종했다. 영화 '아마겟돈'처럼 로켓에 핵폭탄을 실어 행성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커다란 그들이 탑승할 수 없어 정밀 타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에서 직접 조종할 수 있도록 소형화된 인간을 만든다. 평균 키가 170cm 정도의. 바로 우리 같은 현생 인류를 말이다.

 

 지금의 인류는 그들에 의해, 그와 같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베르베르는 그런 우리를 '제2인류'라 부른다. 물론 '제1인류'는 거인들이다. 그렇다면 '제3인류'는? 그렇게 이 소설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류의 진화지만 지구 입장에서는 보다 자신을 더 잘 생존시켜줄 수단적 존재들의 선별이다. 프롤로그가 지난 뒤 책은 처음부터 이 선별을 들고 나온다. <인류 진화의 미래>라는 연구 주제를 두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연구인가를 선별하는 콘테스트가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 다비드 웰즈는 '인류의 소형화'를 들고 나온다. 인류 중 가장 작다는 피그미족이 각종의 병원균으로 부터 면역되어 있음에 착안하여 소형화만이  미래에 보다 더 생존에 적합할 것이라 내다 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샤를 웰즈는 다비드 웰즈의 의견과는 반대로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보았다. 그는 애초 인류는 거인이었고 결국 진화는 오똑이처럼 다시 균형을 찾아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본 것이다. 지금 인류의 신장도 나날이 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비드 웰즈의 소형화는 에드몽 웰즈의 '개미'에 관한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건 사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샤를 웰즈 역시 거인화를 주장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인 에드몽 웰즈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기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연쇄되어 있는데 이는 여주인공인 오르르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도 아버지란 존재는 공백이다. 아버지가 있긴 있지만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오르르의 엄마는 오르르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키웠다. 그녀 역시 다비드가 참가했던 인류 진화의 미래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인류의 진화는 여성화였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방사능에 잘 견딘다는 등의 근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아마조네스를 연구하려 한다. 그 연구를 하러 떠나기 전 그녀는 스스로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찾아온다. 여기서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대하기 보단 거의 친구처럼 대하는데(어른으로 성장한 후 처음 아버지를 만난다는 감상주의가 여기엔 모조리 탈색되어 있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베르베르의 의도가 짐작된다.

 

 베르베르, 그는 왜 이렇게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가 작품에다 내내 새기고 있는 개입과 선별이라는 주제와 관계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건 일종의 거부이다. 그러니까 존재에 대한 거부이다. 왜 그 존재를 거부하는가? 그건 바로 그가 개입과 선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개입과 선별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니었던가?

 

 소설에서 개입과 선별은 누가 하고 있는가? 바로 지구다. 자신이 살기 위해 그는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선별한다. 인류의 진화는 그 결과였다. 다비드와 오르르의 이론들조차 지구에겐 더 좋은 선택지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그런 그에게 가이아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음을. 가이아는 모성의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의 모습은 부성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베르베르가 직접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낱 소행성이 아니다. 나는 한낱 암석 덩어리가 아니다. 나는 한낱 수동적인 광물성의 구체가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독특한 존재이다.(p. 106)

 

 이같은 지구의 자기 과시 발언이 있은 뒤 베르베르는 뒤이어 국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통령을 등장시킨다. 장면배치를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면이 바뀌고 프랑스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내뱉는 대사는 이것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나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오!"(p. 106)

 

  하하하! 갑자기 김문수 도지사가 떠오른다. 통치자란 하나같이 다 그런 것일까? 여지없이 자기현시의 욕구로 똘똘 뭉쳐져 있다. 지구나 프랑스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장면의 연쇄나 대사의 받아치는 타이밍을 통하여 베르베르는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지구 역시도 프랑스 대통령만큼이나 권위주의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런 아버지들이 하는 일도 똑같다. 개입과 선별이다.

 지구는 자기가 살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하고 프랑스 대통령은 역사에 오래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한다. 인류 진화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그 주제를 선별하는 것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베르베르가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개입과 선별을 거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자, 인류의 진화도 나왔고 아버지의 거부도 나왔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베르베르의 소설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아버지들의 아버지'다. '제3인류'가 인류 진화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제3인류'는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얼른 보면 구성이 비슷하다. '제3인류'가 샤를 웰즈의 죽음에서 시작하듯이 그 소설도 한 고생물학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거기다 '제3인류'에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맞부딪혔듯,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도 인류 기원의 모습을 두고 이론들이 서로 다툰다 아무튼 그 고생물학자는 인류가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그 연속성에 있어서 존재했던 미싱 링크, 즉 빠져 있는 고리를 드디어 찾아내었는데 그건 바로 지금의 인류는 인간이 돼지와의 교미를 통해서 나왔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야기는 현재 일어난 고생물학자 죽음의 미스터리 추적과 과거 최초 인류의 이야기, 이렇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결국 주인공은 고생물학자는 자살했으면 돼지와의 교미 끝에 현생 인류가 나왔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표면적으로는 근원의 아버지를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지금까지 진실로 알았던 아버지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내내 아버지의 말 안에서 그것에 매달려왔던 이가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건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와 마찬가지다. 베르베르에겐 이같은 통렬한 거부가 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아버지가 개입과 선별의 존재라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똑같이 지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에마슈'라는 소형화된 인류를 만들었던 다비드와 오르르 일행에게도 베르베르는 해피엔딩을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역 안에서 자유로이 삶을 살았던 그들이 에마슈에 관해서라면 여지없이 자신의 아버지들을 닮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장차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제3인류' 곳곳에 많은 죽음과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세계가 오로지 아버지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입과 선별의 제국이었던 신자유주의가 그랬듯이 그런 가득한 아버지들이 가져오는 것도 해고와 같은 죽음과 차별에 따른 아픔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베르베르는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존재라 할 수 있는 여성화와 소형화가 합쳐진 '에마슈'를 '제3인류'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베르베르는 거대한 3부의 첫 이야기인 이 '제3인류'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에마슈가 바로 남성이 아닌 '나탈리아 여신'이라는 여성의 말을 들으며 혁명의 선봉에 서는 에마슈 역시 여성이라는 점을 통해서.

 

  결국 베르베르는 이 모든 개입과 선별이 비극의 원흉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모두가 인간을 인간 자체로 바라보며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잣대만 강요하여 고유한 존재의 빛을 획일화된 감옥에다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또다른 작품 '인간'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지금 장난칠 기분이 나요? 잠시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어요.(p. 175)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우리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입과 고유한 존재 가치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 선별의 시선으로 인한 감옥에. 그 감옥 안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똑같은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로 지구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며 화가 나서 텔레비젼을 부셔버린 이지도르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한다. "온통 나를 때리고 찌르고 괴롭히는 것뿐이군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들의 이야기가 결코 저들의 이야기일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래서 베르베르는 아버지를 거부한다. 개입과 선별 따위 돼지에게나 갖다주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공백이다. 그대로 자유의 영토이며 그 자체가 긍정의 근거가 되는...

 '신'의 결말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최종 관문을 통과한 미카엘이 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건 빈 종이었다. 완벽한 공백. 거기서 베르베르는 에드몽 웰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읽기! 그리고 이 신성한 행위를 통하여 한 세계를 창조하기! 자네는 언제든지 상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한 권 집어 들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어."(p. 659) 

 

 이렇게 개입과 선별의 바리케이트를 넘어 담벼락 없는 상상의 활주를 확보하는 것. 베르베르가 소설들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과거에 우리가 어땠나나 미래에 우리가 어떠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이며, 그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긍정할만한 무엇이며 온전히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이지도르의 마지막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지 아니한가?

 

 "당신은 내게 무엇이 빠진 고리냐고 묻곤 했어요. 이제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과도기저 존재에 불과해요. 진정한 인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바로 빠진 고리에요." (p. 531 ~ 532)

 

 이는 다른 작품, '인간'에서 절망하는 라울에게 여인 사만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남녀 한 쌍이 우주에 살아 있는 한, 인류의 불씨는 살아있는 거에요. 어떤 감옥 벽도 그 불씨가 불꽃으로 활활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거에요."

 "글쎄요..."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믿어야 해요. 그들은 우리보다 이 곤경을 더 잘 헤쳐 나갈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사만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의심을 의심하라. 그러면 믿게 되리라..." (p. 175 ~ 176)

 

 사만타의 마지막 말은 베르베르 작품에 있어서 핵심과 같다. 사실 그가 그토록 천착하는 상상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의심을 의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제3인류'의 지구를 비롯하여 종국엔 비극만을 불러왔던 모든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은 '의심을 의심하지 않은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그랬듯이 의심은 두려움이 낳은 것이었으니 의심을 재차 의심하지 않은 건 그대로 두려움에 굴복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베르베르에게 상상력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만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베르베르도 두려움이란 오로지 부정적 가능성만 생각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의 감옥임을 믿는다. 그것도 진실된 정보가 바탕되지 않은 오로지 부정으로만 보려는 눈이 개입과 선별로 획득한 오해와 편견의 과실로만 이루어진 감옥.

 

  그 감옥의 창살들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르베르는 미래의 결과는 두려워하지 말고 과정 중에 되어가는 자신을 믿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 어떤 개입에도 굴하지 말고 선별의 시선에 주눅들지도 말라고.

 그리고 당부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통해 마음껏 자유를 활공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것이 베르베르가 보여주려는 인류 진화의 미래인 '제3인류'의 진정한 정체이리라!

 에마슈가 아니라...

 

 과연 맞을지, 안맞을지? 나는 이제 내기를 해보려 하는데 그 때문이라도 다음 이야기들이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개미를 제외한 지금까지 인용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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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소 복잡합니다.
어릴 때 베르베르를 접했던 그 충격과 놀라움, 경이 때문에 그에게 큰 것을 기대하는게 아닐까 싶어져요. 개미와 타나토스는 저를 정말 설레게 했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가 답을 줄거라고 기대했나 봅니다. '신'이라는 거창하고, 절대적인 제목의 소설에서 그런 기대가 컸었죠. 그리고 마지막 백지에서 그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져내리고, 저는 열린 결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동시에 분개하기도 했죠.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한줄 한줄 읽으면서, 그랬지, 아버지에 대해서 그랬어, 라고 동감하면서도 도저히 손을 내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베르베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ICE-9 2013-12-31 22:5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신'의 결말을 보았을 때는 좀 당황스럽더군요. 작가로서 뭔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고^ ^;...
이번 '제3인류'도 개미나 뇌의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좀 있어보이더군요. 요즘 제가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서 설정이나 전개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설정이나 구성상에 구멍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나 전염병으로 수십억이 죽었는데 윌드컵이 계속된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 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더군요. 어쩌면 이 리뷰는 오래도록 그의 작품을 보아온 사람으로써 어떤 정 때문에 좋은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아버지에 대한 관점, 그리고 개입과 선별이라는 아버지 질서에 대한 거부가 내내 눈에 띄길래 그런 쪽으로 한번 정리해봐야겠다 싶어서 쓴 리뷰입니다. 마녀고양이님이 베르베르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언젠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2013년 마지막 날이네요. 어둡고 긴 겨울의 한 굽이가 이렇게 지나가네요. 철도 파업도 그렇게 끝나고 더 춥고 긴 겨울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마녀고양이님만은 원하시는 일 잘 하시면서 건강히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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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가 1981년에 발표한 '10만분의 1의 우연'은 한 아마추어 작가가 찍은 보도사진에 얽힌 미스터리이다. A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독자 뉴스사진 연간상'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뽑혀 유명해진 '격돌'이란 제목의 그 작품은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6중 추돌 사고를 찍은 것으로 그 사고는 사망자만 무려 6명이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이 사진이 그 해의 최고 작품에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충돌하여 화염에 휩싸이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하여 현장의 생동감과 처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왜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카메라 셔터부터 눌렀냐는 그것이다. 찍은 이가 프로 사진 기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더욱 불궈진 논쟁이었다. 보도의 사명도 없는 이가 그토록 현장 포착에만 집중한 것은 공명심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찍은 이를 잘아는 동호회의 한 고참 사진 작가는 실제로 그가 그런 공명심이 아주 많았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10만 분의 1의 우연'으로 포착한 행운'이라고 말했던 그 사진에 의혹을 품는 이가 나타난다. 그는 너무나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었던 지라 과연 그것이 정말로 우연히 얻어 걸린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계산된 흑막이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한다. 더구나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운전자가 증언한 충돌하기 직전에 언뜻 보았다는 빨간 불빛의 존재도 수상하다. 그는 모두가 우연으로 치부해버린 사건을 추적하고 아래에 드리워 있었던 어두운 흑막은 서서히 드러난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이런 이야기인데 읽어보면 얼른 두 작품이 떠오른다. 설정이 비슷해서 어쩌면 세이초가 영향을 받지도 않았을까 생각되는 작품들이다. 윌리엄 데안드리아의 호그 연속 살인(THE HOG MURDERS)와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RENDEZVOUS IN BLACK)가 바로 그 장본인들인데, 바로 호그 연속 살인은 1979년에 나왔고 상복의 랑데뷰는 1948년에 나왔으니 10만 분의 1의 우연이 나온 1981년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는 지라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 두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라도 먼저 두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말하는 게 낫겠다. '호그 연속 살인'의 시작은 도로로 구조물이 떨어져 지나가는 차가 사고를 당하여 사람들이 죽는 장면이다. 사고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뜻밗에 나타난 문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막는다. 누군가 그 현장에 'HOG'라는 서명을 남긴 것이다. 마치 이 사건이 자신이 저지른 범행임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그 때문에 이 사건을 살인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수사하게 된다. 하지만 도저히 범행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조사해도 이 사건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것으로만 보인다. 누군가 친 장난이겠거니 여길 무렵 제2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역시도 아무리 보아도 사고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떡하니 또 HOG라는 서명이 있다. 뒤이어 또다시 HOG의 서명이 된 천재지변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이제 수사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속적으로 살인 사건이 벌어져도 범행 수법을 도저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정말 HOG의 짓이라면 그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재인지도 모른다고 여긴다. 이것이 호그 연속 살인의 주된 줄거리다.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뷰'는 소형 경비행기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집요한 복수의 드라마다. 일부러 '집요한'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은 이 남자가 그 때 비행기에 탄 여섯 명중 누가 병을 떨어뜨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모두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여 아무리 경찰이 지키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복수하기 때문에 '집요한'이라는 말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읽다보면 복수의 대상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이나 그 대상을 살해하기 위하여 오래도록 철저하게 공을 들이는 것 때문에 제목 그대로 사신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정말로 코넬 울리치는 느와르판 '제7의 봉인'을 만들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상복의 랑데뷰'는 처절한 복수의 드라마인데 '10만 분의 1의 우연'은 '호그 연속 살인'과 이 '상복의 랑데뷰'가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호그 연속 살인'처럼 우연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미스터리에다 '상복의 랑데뷰'처럼 뜻밗의 사고로 잃어버린 연인의 처절한 복수가 결합되어 있다. 세이초가 실제로 이 두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설정과 이야기의 얼개가 비슷하기 때문에(물론 호그 연속 살인은 '10만 분의 1의 우연'과 정반대의 진실로 치닫지만) 과연 순전히 세이초만의 독립적인 창조의 산물인지에 대한 의심은 좀 거두기가 어렵다.


  후기의 미야베 미유키에 따르면 이 작품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이처럼 이야기의 독창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실은 이 작품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약점이 있다. 바로 세이초 작품이 가지는 특유의 '페이소스'가 여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점과 선'이든 '제로의 초점'이든 세이초의 전기 작품들은 비록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지만 애오라지 그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 보다는 해결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 그 인간적 노력이나 밝혀지는 관련 인물들의 과거를 통해 삶의 어떤 어둠을 조명하는 것도 같이 녹여내려 주력했다. 하지만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상복의 랑데뷰'처럼 복수의 드라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복수자의 아픔은 몇 줄의 문장 정도로 간략하게 제시될 뿐이고 그가 어떤 심정으로 복수에 임하는 지 같은 건 잘 보여주지 않는다. 드러내는 것은 트릭의 풀이나 복수의 과정이 전부이다. 그래서 독자는 복수자에게 잘 공감하기가 어렵고 전혀 등장인물의 입체감을 살리지 못하는 이야기는 평면적이 되어 버린다. 소설과 신문 기사와 같은 저널이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눈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생생함은 성격이나 갈등, 분위기가 현실감 넘치는 묘사로 이루어질 때 느껴진다. 하지만 '10만 분의 1의 우연'에선 모든 게 밋밋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미리 깔아놓은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로 밖에는 안 보인다. 그러니 트릭이 아무리 절묘하다한들 이야기가 심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은 처음에 상당한 분량의 신문 기사 인용으로 시작한다. 후기의 세이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많이 경도되었는데(그건 후기에 주력했던 역사 소설 집필과도 관련 있는 것 같다.) '10만 분의 1의 우연'은 그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자신, 너무 저널리즘적 글쓰기에 물든 나머지 문학조차 저널리즘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앞서도 소설과 저널을 비교했지만 사실 이 소설의 인물 묘사나 사건 진행이 소설 보다는 저널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일례로 사고에서 죽은 한 여인의 언니가 경찰서로 직접 찾아와 동생이 죽은 곳에 가서 참배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언니는 자신이 뒤늦게 비보를 들은 이유를 경찰에게 말해주는데 개인적으론 좀 많이 의아했다. 언니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작년 9월 하순부터 업무차 스위스 로잔에 있었습니다. 동생의 소식은 아버지가 국제전화로 알려주셨습니다. 업무라고 한 일은 영어 통역이에요. 평소에는 통역 일을 하지 않지만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 기업 임원 가운데 한 분이 국제 경제 회의에 참석하시면서, 꼭 부탁한다고 해서 동행했죠. 때문에 동생 소식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P.34)


 하하, 원 이렇게나 시시콜콜하게 말하다니. 과연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스위스에 있어서 늦게 알았다고만 말하면 그 뿐 아닌가? 아마도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이유를 읊듯이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오고가는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차례로 제시할 것이다. 이렇게 죽 나열하듯이 이유를 단번에 말하는 건 주로 저널에서다. 그래서 세이초가 너무 저널적으로 소설을(어쩌면 저널 스타일에 너무 물들어버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쓴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계가 좀 보이는 작품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띄는 걸 두고 어찌할 수는 없다. 어쩌면 미야베 미유키도 그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소설이 가진 가치에 집중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왜 현대에도 이 소설이 계속 읽혀져야 하는지 그 의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실은 그것도 소설에서 주된 이야기는 아니다. 미유키가 천착하는 의의는 어디까지나 소설 속 가해자의 동기에만 관계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복수자는 어떠한가? 그는 훨씬 더 많은 비중으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곁다리의 캐릭터일 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평면적인 캐릭터라고 하지만 세이초가 오로지 미스터리의 해결을 위해서만 가져다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 여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바로 이 복수자의 것까지 고려해야 우리는 이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선으로 나타내면 수평과 수직이다.

 사고는 고속도로에서 일어난다. 수평의 흐름이다. 소설에서 가해자와 복수자를 움직이는 건 어디까지나 욕망이다. 가해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복수자는 연인을 죽게 만든 이들을 응징하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그들의 눈에 오로지 한 곳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욕망 역시 수평의 흐름인 것이다. 소설의 주된 소재가 되는 카메라 역시 그렇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포착하는 것 역시도 수평의 흐름이다. 그렇게 이 소설엔 수평의 흐름이 지배한다.


 왜 이 소설은 이토록 수평의 제국일까?

 그건 이 소설이 나온 시대와 연관이 있다. 70년대 말부터 80년대의 일본은 1950년대의 미국과 같이 경제적 풍요의 시대였다. 고민도 없이, 혼돈도 없이 일본은 그저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풍요의 열매를 섭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해외여행이 활발해졌고 일본인들은 세계 각지로 뻗어가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고속도로를 맹렬하게 달려나가는 스포츠카처럼 거센 수평적 확장의 시대였다. 풍유로움에 도취된 그들에게는 오로지 더한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보일 뿐 과연 이대로 옳은 것일까 하고 되돌아보는 눈은 없었다. 그들의 시야는, 움직임은 오로지 한 곳으로만 뻗어갔다. 이 소설의 가해자와 복수자처럼.


 그런 그들에게 세이초는 수직을 가져다 준다. 그건 추락의 선이다.

 오로지 하나의 욕망만 보고 달리던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추락을 경험한다. 가해자도 복수자도. 세이초는 오로지 단일한 수직적 추락의 운명만 허용한다. 사실은 이 수직이야말로 세이초의 주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두가 풍요에 취해 그들의 현상황을 모를 때 홀로 광야에서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는 선지자와 같다. 그는 경고한다. 일본이 오로지 욕망 충족에만 혈안이 되어 뻗어나가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분명 파멸적 추락이 도래할 것이라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추락은 바로 그것을 위한 예언의 문장들이다.


 그는 왜 이런 경고를 하는가?

 그 이유는 앞부분의 인용된 기사들에서 나타난다. 보도사진 수상작들이 발표되고 대상을 받은 작품과 관련된 사고 기사가 나오며 대상 작품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모두 소개되는 그 곳에는 딱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사고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이다. 인명을 구할 생각은 안하고 셔터 누르는 것에만 신경썼다고 비판하는 이들조차 그런 사진에게 대상 준것만을 나무랄 뿐 사고에서 죽은 이들에겐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무관심은 뒤늦게 언니가 경찰서로 찾아와 직접 그 현장으로 갈 때 담당 경찰관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사고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떠올리기는 커녕 언니와 같이 온 남자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만 신경쓴다. 그녀의 남편인지 아니면 연인인지. 머리에 떠올리는 건 그 뿐이다.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당한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실제 현장에서 통곡하는 남자를 볼 때조차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생각할 뿐이다. 희생당한 이들은 깨끗이 잊혀졌다. 분명 여섯 명의 무고한 죽음이 있었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마치 그 죽음이 아예 없었던 것인양 치부해 버린다. 세이초가 현재의 일본에게 파멸적 추락이라는 수직적 운명이 도래할 것이라 예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욕망의 한없는 충족이라는 수평적 정복에 골몰하느라 그 바람에 속절없이 희생된 이들을, 혹은 희생 가능한 이들을 돌아다 보거나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죽음을 돌이켜 봄의 소중함, 무한히 뻗는 욕망의 선 때문에 밀려나거나 버려질지도 모를 희생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의 소중함을 말하기 위해 세이초는 '10만 분의 1의 우연'을 쓴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이 소설이 '소름이 돋을만큼 현대적'이라면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의 현대란 늘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하여 보다 약한 자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고 아예 없는 듯 무시해 버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약한 자들은 오로지 약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표적이 되고 밖으로, 저 어둠 속으로 밀려난다. 하나가 밀려나면 또 다음이 표적이 된다. 우리의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가 오로지 욕망의 충족이라는 한 곳만 경마장의 말처럼 바라보는 한, 소설 속 사고의 희생자들처럼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고한 이들의 희생은 늘어만 갈 것이다. 세이초는 그 하나, 하나의 죽음과 삶을 소중히 하라고 말한다. 복수자의 서러운 울음과 한 죽음의 책임을 묻기 위한 집요한 응징은 바로 그 때문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또한 그 어떤 삶과 죽음이든 소홀히 할 경우 반드시 심판이 떨어진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것은 직접 실행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방관한 이들까지 다 포함된다. 누구였더라? 시대가 행동을 요구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한 자들을 위하여 지옥은 가장 뜨거운 형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던 이는. 세이초도 그와 같다. 영화 '올드보이'에 나오는 대사대로 '모래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비록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품은 뜻만큼은 어느 소설보다도 더 뜨거운 소설. 그것이 바로 '10만 분의 1의 우연'이 아닐까 한다. 약하다는 이유로 쉽게 버려지고 무시되고 핍박이 가해지는 요즘같은 때엔 더욱 미야베 미유키의 말대로 소름 돋게 다가올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부디 파멸적 추락의 수직적 운명이 피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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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6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고, 삶의 선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는 소재인데
무엇인가 약한가 보네요. 아쉽네요...

헤르메스님, 즐거운 연말과 새해 되셔요.

ICE-9 2013-12-29 04:50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세이초가 그런 주제를 잘 살리려 했다면 범인이나 복수자의 내면을 좀 많이 묘사해주었어야 할 것 같아요. 지나치게 복수의 과정만 핵심 트릭을 숨긴 채 집중하다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갈등 부분이 다 휘발된 게 이 작품의 가장 커다란 패착이 아닐까 싶어져요. 작품 자체는 마음에 들지만 제가 좋아하는 세이초 특유의 인간 묘사가 나오지 않으니 다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마녀고양이님도 이제 정말로 얼마남지 않은 연말 깔끔하게 마무리 잘 하시고
올해 보다 더 복된 새해 맞으시길 바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