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처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건 영화 '비밀'을 보았을 때였다.




 그 영화는 1999년에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 엄마와 딸이 같이 버스 사고를 당해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가 버린 이야기였다. 딸의 영혼은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해 그 영혼이 들어간 엄마는 깨어나지 못하고 엄마의 영혼이 들어간 딸만 깨어나는데 이를 두고 남편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즉 흔히 말하는 '영혼 교환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결국 그의 소설까지 읽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작품의 결말이었다. 그게 너무도 의외였던 것이다. 대체로 '영혼 교환물'이란 결국엔 자기 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영혼 교환을 통해 촉발된 세상 질서의 혼란은 끝에 가서는 다시 안정되는 게 원칙이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그것이 영혼 교환물의 정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은 달랐다. 엄마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혼돈은 그대로 혼돈으로 남는다. 교환으로 일어난 소동을 한 때의 해프닝이라 생각하고 다시 안심하고 섞여 살 수 있는 코스모스적 세계는 도래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남편은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내 모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영혼 교환물은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이 쓰여졌다. 영혼 교환물에서 자주 남자와 여자가 바뀌고, 엄마와 딸이 바뀐 것은 그 때문이다. 평소엔 가장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교환을 통해서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보다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세계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게 늘 있어왔던 익숙한 세계의 질서에 말이다. 우연히 초래된 혼돈은 사실 세계의 질서를 보다 항구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었다. 변화가 열어젖힌 '틈'은 새로운 바람이 들어올 창구라기 보다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계가 두터운 시멘트를 바르기 위한 '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뀐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카오스는 그에게 두려워해야 할 흠이 아니었다. 보다 새로운 나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에 있어선 세상이 똑같이 찍어내는 '익명화'된 개체가 아니라 고유의 피와 살 그리고 생각으로써 존재하는 온전한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길이었다. 생각해보라! 혼돈 앞에서 세계는 무력하다. 이전의 질서로 그것을 다스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아내의 영혼이 들어간 딸의 몸을 규정할 방법이 없다. 이 몸은 딸인가? 아내인가? 몸을 따라야 하는가? 영혼을 따라야 하는가? 그 물음 앞에서 세계는 답을 하지 못한다. 당황하며 갈팡질팡할 뿐이다. 거기서 단단하고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세계의 질서라는 게 의외로 허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 세계란 그 자신이 규정한 질서가 조금이라도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내 위태롭게 될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것을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것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이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진짜 그 규정의 힘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게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란 그 실재의 대면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석한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 세계를 해석할 선택의 순간을 빼앗겼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내가 아니라 이미 남이 선택한 대로 그 세계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위축되고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거대한 세계와 대결해야 하는 개인을 다루는 영화들은 자주 결단을 통한 선택의 순간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처럼 말이다. 그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건 네오에게 어떤 세계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의 촉구였다. 그리고 네오의 선택대로 세상은 형성되었다. 즉 네오의 손 끝에서 세계는 다시 태어났다. 그 네오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구세주다. 구세주란 세계를 근본부터 뒤엎는 존재다. 달리 말하면 매트릭스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는 '단독자(모나드)'다. 결단은 그런 주체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며, 이는 남의 눈이 아닌 오로지 자기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과도 같다. 이와 똑같은 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도 한다. 스스로 자기 몸을 규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엔 두 번의 중요한 결단의 순간들이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아내고 다른 하나는 남편이다. 특히 남편의 경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의미심장한 연출을 했다. 아내를 남의 아내로 보내기 직전, 아내의 고백을 통해 남편이 모든 비밀을 다 알도록 한 것이다. 그건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한 것과 똑같았다. 어떤 세계를 택할 것인지? 이전의 세계냐, 변화냐? 그 결단의 촉구였다. 그리고 남편의 결단에 의해 세계의 질서는 새롭게 수립되었다.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하는 세계에 있어 주체로 서는 방식이었다. 규정한 대로가 아닌 나만의 결단으로 새롭게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



 뻐꾸기는 자신의 알을 다른 새둥지에 놓는다고 한다. 다른 새가 자기 알로 알고 키우도록. 그것을 '탁란'이라고 한다. 히가시고 게이고의 2010년 작,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는 제목 그대로 바로 그것을 소재로 써진 것이다. 시작부터 어쩌면 이 작품과 전혀 상관없을 지도 모를 '비밀' 이야기를 한 것은 이유가 있다. 벌써 짐작하셨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바로 이 작품이 '비밀'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 교환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아버지가 있다. 예전에는 올림픽에 나갈 정도로 유명한 스키 선수였으나 딸의 출산과 동시에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이제는 스포츠 센터에서 일하며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딸을 낳은 아내는 그 뒤 사람이 좀 변한 것 같이 말수도 적어지고 이상해지더니 어느 순간 훌쩍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낙은 딸이다. 딸이 아버지처럼 스키에 재능이 있어 두각을 나타내었고 언젠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줄만큼 기대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딸의 스폰서를 맡고 있는 회사로부터 부탁이 하나 들어온다. 자신들이 스포츠에 자질을 나타내는 유전자형을 새롭게 발견했는데 이것이 과연 유전적인 것인지 자신과 딸의 유전자를 통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극구 거부한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내의 죽음 뒤 우연히 발견한, 아내가 숨겨놓은 것이 분명한 신생아 유괴에 대한 신문 기사로 인해 가지게 된 의혹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딸 카자미가 실은 아내가 어디에선가 유괴해 온 남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이 의혹을 강하게 만든 사실이 있었다. 아내에게 출산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걸 평생 가슴 속에 지녀왔다. 카자미가 뻐꾸기 새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그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중견 기업가라는 그 사람은 어떤 여자의 부탁으로 그녀의 친족을 찾으려고 왔는데 하나의 혈흔을 보여주고는 그녀의 피라고 하면서 친족인지 아닌지 딸의 유전자와 검사해보고 싶다고 한다. '드디어 진짜 부모가 나타난 것인가?'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차에, 그를 만나러왔던 그 남자는 딸의 숙소에까지 찾아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다. 문제는 이게 보통의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 경찰은 원래 딸이 함께 타려던 버스였고 그 전에 딸에게로 날아온 협박장도 있고 해서 그 쪽으로 수사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갈등과 미스터리를 주축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이 정도의 소개만으로도 '비밀'의 설정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혼 교환이 둥지의 교환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대부분의 서술이 '바꾼 주체'가 아니라 '바뀌어진 것을 확인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 소설의 핵심이 되는 아버지의 갈등은 사실 '비밀'에서의 남편의 갈등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그 '비밀'의 단순한 재탕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조금의 변화, 어쩌면 중요할지도 모를 차이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자리바꿈이다. 즉 '아내의 남편'이 아닌 '딸의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했다는 그것이다.


 이로써 이 소설에는 앞서 말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주체화' 측면과 관련하여 결단과 더불어 하나가 더 들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책임'이다. 단순히 세상의 변화를 결단으로서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에 중심을 두고 이 소설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곁가지로 병행되는 카자미와 똑같이 연구 대상으로 발탁되어 본인의 꿈과는 상관없이 크로스컨트리 훈련을 받고 있는 고등학생 신고와 그 아버지의 이야기는 바로 이 때문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아들 신고가 자신이 그토록 바라는 꿈을 접는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또 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주인공 아버지는 어떠한가? 그가 그토록 감춰왔던 비밀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렇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결단들은 모두 책임과 결부되어 제시된다. 이것이 이 작품이 '비밀'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면 나아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타인에 대한 책임의 통감이 진정한 주체가 되는 길이라고 했던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말도 생각난다. '비밀'은 남의 결정이 아닌 자신의 결단으로 새로이 만들어지는 세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것 자체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나가이 고의 유명한 만화 '마징가Z'는 다음과 같은 첫구절로 시작된다. '너에게 세상을 멸망시킬만한 강대한 힘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을 지옥으로 바꿀 것인가 아니면 평화롭게 지킬 것인가?'


 이 또한 결단의 촉구다. 아시다시피 히틀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태인 말살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그 때 세상은 지옥이 되어버렸다. 이런 건 곤란하지 않을까? 결단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는 누빔점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처럼 즉자적 욕망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집중하기 위한 누빔점. 바로 그 누빔점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책임'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버지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미 그는 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해 책임을 이야기한 적이 있기도 하다. 바로 이보다 2년 전에 나온 '방황하는 칼날'이 그것이다.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였던 그 소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버지로서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바 있다. 바로 그 연장선 상에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는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의탁한 아버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듯, 소설은 자녀가 정말 바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멋대로 장래를 결정해도 좋으냐?' 하는 것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그 자녀에게 재능이 있다고 해도 과연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꿈을 강요해도 되는 것인지까지 이 소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재능의 유전자라는 게 말이야. 그 뻐꾸기 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몸에 쓰윽 들어와 있으니 말이야. 신고가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건 내가 녀석의 피에 뻐꾸기 알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야. 그걸 본인이 고마워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P.395)


 요즘 한 방송에서 하고 있는 '부모와 학부모'란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로 자녀를 위한다면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 소설 역시도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 가지는 진정한 책임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4-02-1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비밀)에서는 아내가 말을 하는가요 책에서는 남편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딸이 아닌 아내일지도 모른다고... 그전에 딸로 돌아왔다는 말을 하거든요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비밀>은 드라마로도 만들었죠

자신이 가진 재능과는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지는 것도 괴로울 것 같습니다 하고 싶어하는 일에 재능도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글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


희선
 
레오파드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본 욕망에 비추어 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을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겠다.

 

 나는 내가 증오에 대해서도

 그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 불과 얼음 -

 

 

  

 

  '레오파드'는 '스노우맨'에 뒤이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여덟번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문득 떠올렸던 것이 바로 로버트 프루스트의 '불과 얼음'이라는 시였습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차디찬 눈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스노우맨' 표지와 화산의 이글거리는 용암의 열기를 재현한 듯 보이는 '레오파드'의 표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그 시가 생각났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까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는 정말 시 그대로였거든요. 그러니까 차디찬 증오가 연쇄살인을 낳았던 '스노우맨'이 뼛속까지 얼어버릴 정도의 냉기를 지닌 얼음이었다면 뜨거운 욕망에서 비롯된 연쇄살인을 보여주는 '레오파드'는 소설의 마지막 배경처럼 그야말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불길이었으니까요. 물론 요 네스뵈가 이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얼음처럼 차가운 증오의 '스노우맨'과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욕망의 '레오파드'는 그대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견해와 같아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레오파드'가 어떤 작품인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레오파드는 한 마디로, 제 몸까지 불살라버릴 정도로 뜨거운 욕망들을 지닌 수컷들이 맹렬하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작품입니다. 그 내뿜는 열기가 너무도 강해서 어느 순간 읽고 있는 마음마저 데어버리게 할 정도죠. 

 

 

 전작인 '스노우맨'처럼 한 단어로 된 간단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단어만큼 요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제대로 담아낸 말은 또 없을 것 같네요. 왜나하면 무엇보다 '레오파드', 즉 표범이란 동물의 습성 때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붓다가 했다는 말이지요. 이 말처럼 사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레오파드'입니다. 혹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레오파드를 보게 되시면 한 번 눈여겨 봐 보십시요. 그러면 알게되실 겁니다. 레오파드는 철저하게 혼자 있다는 것을. 그는 고립의 동물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영역 내에 다른 이가 있는 걸 못견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 자신과 같은 종족이 함께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설마 새끼라 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새끼가 아니면 그대로 죽여버립니다. 발정기가 되어 자신이 암컷과 교접을 해야 할 땐, 혹시 암컷이 다른 표범의 새끼를 기르고 있다면 일단 그 새끼부터 죽여놓고 암컷과 교접합니다. 그 정도로 철두철미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인 것이죠.

 

 한 마디로 레오파드는 공존을 모르는 동물입니다. 요 네스뵈는 분명 그 때문에 레오파드를 제목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해리 홀레가 싸워야 하는 적들은 모두 레오파드와 똑같이 타자와의 공존을 모르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존재들이 홀로 존재할 영역 확보를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홍콩에서도 노르웨이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이 수컷들의 인정사정없는 맹렬한 아귀다툼은 '월드와이드'하게 펼쳐집니다. 해리 홀레는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해리 홀레가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 갇혔던 테세우스를 건져낸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생각했습니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이 요 네스뵈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단적인 비유라면 테세우스는 언제 미노타우르스에게 먹힐지 모르는 미궁에 갇힌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며 해리 홀레는 바로 그 미궁으로 부터 우리의 존재를 구원해줄 길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대안의 빛과도 같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번에 해리 홀레가 우리보다 앞서서 싸워나가는 미노타우르스는 어떤 존재일까요? 저는 이번 '레오파드'가 바로 앞에 나왔던 '스노우맨' 보다 그 공간적 무대가 좀 더 '월드와이드' 즉 세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공간적 무대는 앞서도 말했듯, 자신 이외엔 그 어떤 존재의 공존도 허락하지 않는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래서 이건 하나의 은유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똑같이 전세계에 뻗쳐있으며 타자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은유 말이죠. 네, 바로 신자유주의 입니다. '레오파드'란 다름아닌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죠.

 

 해리 홀레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라는 미노타우르스와 이 소설에서 전면전을 치르는 것입니다. 피날레의 장면을 보자면 전면전이라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세하게 설명하면 스포일러과 될지도 모르니 그러기 보단 앞서 해왔던 대로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을 들어 그걸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요 네스뵈가 정말 치밀한 작가라는 것은 바로 이 공간을 소설에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바로 아프리카의 '콩고' 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고 있는 니라공고 활화산이 있는 나라, 콩고. 그 니라공고에서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이 펼쳐지지요. 그런데 네스뵈는 왜 하필이면 이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것일까요? 물론 그건 니라공고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콩고가 가진 역사 때문입니다. 콩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면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콩고도 한 때 그야말로 레오파드의 영토였음을 말이죠.

 

 아시고 계시는지요? 콩고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오직 한 사람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었던 과거를 말이죠. 그랬습니다. 콩고는 한 때 나라 전체가 한 사람의 소유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입니다.

 

  

  1855년, 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선언했습니다. 그 선언으로 콩고의 전 국토는 그의 사유지가 되고 콩고에 있는 자원은 물론 살고 있던 주민들까지 모두 그의 개인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레오파드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소설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나 레오파드를 가져온 이유가 그와 같은 습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던 것은 요 네스뵈가 이런 과거를 가진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레오폴드 2세는 그야말로 의인화된 레오파드가 아닌가요? 어쩐지 레오폴드, 레오파드 그 이름 역시도 비슷하네요. '스노우맨'을 읽어보셨으면 느끼셨겠지만 요 네스뵈는 소설의 표면 보다는 얼른 드러나지 않는 비유와 상징의 영역인 이면에서 소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인물의 관계든, 공간의 설정이든 주제의 보다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치밀한 계산 하에 배치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오파드'는 그러한 배치가 보다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해리 홀레가 싸워서 대안을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거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바로 그 대상이니까요. 여기서 요 네스뵈가 콩고를 가져온 보다 진정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이대로 계속 방치될경우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극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식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종언'의 모습인 것이죠. 소설 속에서 콩고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세상의 끝'만 봐도 요 네스뵈가 바로 그것을 두고 콩고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죠.

 

 

 니라 공고 화산의 모습 - 그야말로 세상의 끝 모습이 아닌가요?

 

 해리 홀레는 지금 그러한 콩고의 도래를 막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지금 '월드와이드'한 상태입니다.  이 말은 노르웨이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죠. 전작 스노우맨이 그랬습니다.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으로 상징되는 노르웨이를 침공한 신자유주의와 싸웠습니다. 단적으로 요 네스뵈는 지금의 노르웨이를 아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노르웨이 역시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되어버릴지 모른다.'하고 말이죠. 그런 근심은 소설 속 해리 홀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오슬로도 용암 위에 세워진 도시잖아.'

 

 아니나 다를까 해리 홀레는 다시 돌아온 노르웨이에서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몰아내려는 레오파드적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설 내내 해리 홀레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크리포스'입니다. '크리포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인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더구나 그 크리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노르웨이에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음에 대한 반향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요 네스뵈의 두 눈엔 더욱 노르웨이의 불안한 미래가 그려질 수 밖에 없지요. 레오폴드 2세만이 홀로 웃는 콩고가 되어버린 노르웨이...

 

 이건 그저 제 망상만은 아닙니다. 요 네스뵈가 소설 속에 분명히 그 사유의 흔적을 새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콩고엔 니라공고 화산말고 다른 하나가 더 등장합니다. 바로 주로 시체들을 던져넣는 키부 호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르웨이에서도 이 키부 호수와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범인이 시체를 던져넣은 뤼세렌호 입니다. 이렇게 콩고의 키부호수와 노르웨이의 뤼세렌호는 이어집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니라공고화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피날레가 이루어지는 니라공고화산 같은 공간이 노르웨이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스타오셋산 입니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원인은 바로 이 우스타오셋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시작의 우스타오셋산과 끝의 니라공고화산. 어떻게 이걸 연속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요 네스뵈는 이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노르웨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 그 콩고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연쇄 살인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스키를 타러 자주 간다는 우스타오셋의 고립된 한 산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해리 홀레는 나중에 미카엘 벨만과 함께 스노모빌을 타고 우스타오셋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범을 추적합니다. 그 때 해리 홀레 눈에 비친 풍경을 상상해서 그려 봤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한 해리 홀레의 싸움입니다. 노르웨이의 미래를 건 사투인 것이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설에서 해리 홀레는 진짜 사투를 벌입니다. 그만큼 요 네스뵈가 지금의 노르웨이를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앞서 해리 홀레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비유했는데 그 행보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 연약하기에 더욱 혼신을 다해 싸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그러한 '레오파드적 콩고'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리 홀레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면 속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그이니만큼 말로 분명히 설명하기 보다는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바로 해리 홀레의 삶 자체로 말이죠.

 

 '스노우맨'에서도 해리 홀레의 삶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만 '레오파드'에서 그의 삶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스노우맨'이 가져온 비극 때문에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영영 떠나버렸고 이제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려 하고 있으니까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에 집약된, 그러니까 배타성으로 충만하여 결국은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말 '노르웨이적 광기'로 부터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라켈과 올레그에 대한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떠나버렸고 결국 해리 홀레는 사랑의 아픈 상처와 절망만을 간직한 채 아예 노르웨이마저 떠나 폐인이 되어버렸죠. 그 해리를 다시 노르웨이로 오게 만든 이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위독했기 때문이었죠. 그렇다고 요 네스뵈가 아버지를 해리 홀레에게 남아있는 구원의 가능성 같은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에서 아버지란 이를테면 하나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해리 홀레가 겪고 있는 상처와 영혼의 방황 같은 것을 보다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주기 위한 반영 같은 것이죠.

 

 비유하자면, 여기서 해리 홀레와 아버지와 관계란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유령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지옥을 여행합니다. 그런데 신곡이 쓰였을 당시 널리 퍼졌던 유령에 대한 생각 그대로 유령인 베르길리우스는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단테가 말을 건네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모습만 보자면 그는 마치 에코, 즉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렇게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생각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생각이란 무엇보다 우리 뇌리 속에 어떤 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마치 그림자가 존재의 뒤를 따르듯이 자연히 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건 좀 전 생각에 대한 응답일수도 있고 의문일수도 있습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대화란 이러한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그렇게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란 단테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이죠. 한 마디로 사유의 메아리라고 할까요. 저는 해리 홀레의 아버지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해리가 겪고 있는 상처와 절망의 반향이자 동시에 그러는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사유의 메아리라는 것이죠.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자신을 온달스네스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온달스네스... 어머니와 함께 묻히려고요?"

 해리는 침묵했다.

 "그것도 있고. 동네 주민들과도 묻히고 싶구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니? 최소한 그들과 나는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결국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지도 몰라.

 같은 종족이라는 거. 우린 같은 종족과 있고 싶어하지."

 

 여기서 아버지는 '같은 종족'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요 네스뵈가 그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하게 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같이 묻히고 싶은 동네 사람들이 정작 아버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전혀 모르지만 같이 묻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을 그야말로 타자들에게 온전히 자신을 열어보이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타자와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레오파드들과는 전혀 다르게 알지도 못하는 낯설기 그지 없는 타인들이지만 그래도 공존하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이로써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주제 혹은 그가 비춰주는 대안의 빛이 나타나는 듯 합니다. 아버지가 해리 홀레 사유의 메아리라고 본다면 더욱 명확해질 수 밖에 없는 빛인 것이죠. 그건 물론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 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타자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유언에서 요 네스뵈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레오파드들로 부터 노르웨이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시된 길은 물론 소설 속에서 해리 홀레의 추적과 여정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 '레오파드'는 이런 소설입니다.

 

 784페이지의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한 페이지, 한 문장도 버릴 게 없는 속이 꽉 찬 깊이와 재미를 두루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깊이도 깊이지만 묘사되는 장면들이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만큼 선명해서 더욱 빠져서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가 만일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라면 바로 요 네스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사겠습니다. 그만큼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는 말로 들어주시면 좋겠네요.

 

 요 네스뵈가 '레오파드'의 이면에 심어놓은 의미를 추적하느라 정작 작품에 나오는 범인을 이야기하지 못했네요. 스노우맨의 범인도 정말 잔인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범인도 역시 잔인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그의 잔인성은 그가 살인에 사용하는 도구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도구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은 '레오폴드의 사과'라고 하는데 레오폴드 황제가 사람들을 고문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원래는 가시 없이 그냥 둥근 모습으로 사람 입 속에 넣는데 저게 딱 숨구멍을 막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걸 입에 넣은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점점 숨이 막혀와 결국엔 도구 밖으로 삐어져 나온 철사를 손으로 잡아당기게 되는데 그러면 그림처럼 24개의 가시가 사방에서 뻗어나와 죽여버린다고 합니다. 애용한 사람이 레오폴드 2세이었듯이, 정말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레오파드들에게 어울리는 살인 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진짜 잔인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작가 요 네스뵈 자신이죠. 거듭되는 반전에 반전. 거기다 최후의 일각까지 급박하게 휘몰아쳐가는 위기 상황으로 마치 신경 세포 한 가닥, 한 가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노라면 정말 눈 앞에 네스뵈가 눈 앞에 있다면 '제발 이제 그만 애태우란 말이야!'하고 멱살이라도 잡고싶을만큼 잔인하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직접 소설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후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자정리'라고 했던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사립탐정 캐릭터가 바로 앤지 제나로인데 그녀가 나오는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설마 했더랬죠. '진짜 종결이긴 하겠어? 아이돌들이 흔히 그러듯이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잠정 은퇴겠지, 뭐!'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죠. 어쩌면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억지로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르죠. 이대로 영영 앤지 제나로와 이별이라니... 이런 생각만으로도 왠지 울적해지는군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읽어보니 이럴수가! 데니스 루헤인은 정말로 이 시리즈를 종결지어 버렸습니다. 다시 시작될 여지는 조금도(!) 주지 않고 말이죠. 어떤 단호함마저 엿보입니다. 자기 인생에는 사립탐정 말고 다른 길은 없다며 내내 그 한 길로만 걸어왔던 켄지가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인 45구경 콜트를 강물에 던져버리니까요. '공무도하가'에서도 나오듯이 물은 죽음을,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거기서 죽음으로 헤어진 님을 그리며 여인이 '공무도하'를 부르듯이 켄지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다시는 이 짓 안 해. 마이크 콜레트가 화물회사 일자리를 제안했어. 그 일을 맡을 생각이야."(p. 372)

 

  말하자면, 이건 독자에게는 확인사살 혹은 셜록 홈즈처럼 독자들이 아무리 요청해도 부활시키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 같은 것이죠. 아아, 그렇게 님은 떠나갔습니다. 


  물론 앤지도 말이죠. 연인과의 이별과 마찬가지로 헤어짐 뒤에 남는 건 미련 그리고 의문입니다. 의문 역시 미련이 위장된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묻게 됩니다. 아니,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가?'하고 말이죠. 켄지와 앤지도 예외는 아닙니다. 궁금증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왜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러게요, 데니스 루헤인은 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이렇게 종결시켜 버린 것일까요?


 사실 저에게 있어 모든 리뷰란 스스로가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바둑 기사가 대국을 둔 후에 자신이 둔 수를 차례로 복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탐정에게 던져진 밀실의 시체와도 같이 책은 마주한 수수께끼이며 리뷰란 그 풀이인 것이죠. 솔직히 말해 탐정의 풀이가 진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자신의 추리에 끼워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듯, 탐정이 찾아낸 진리 역시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합니다. 탐정은 답안지의 정답을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을 납득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죠. 리뷰 역시 그와 같다고 봅니다. 원 뜻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이 리뷰 또한 그렇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이 던져준 사립탐정을 홀로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카우보이와도 같이 저 편의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 수수께끼에 대해 왜 그래야 했던 것인지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는 몸짓인 것이죠.


 그럼, 한 번 '문라이트 마일'와 함께 헤아림의 론도를 시작해 보실까요?

그만큼 경쾌하지 않고 그저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서도...


 시작은 역시 '왜 켄지는 사립탐정을 그만두는 것인가?"가 될 것 같네요.

 일단 거기에 대한 켄지의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 알아? 이 일을 시작할 땐 정말 끔찍한 짓거리만 아니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 아냐, 그게 아니었어. 그 보다 사소한 일들이 더 힘들었던 거야. 정말로 괴로운 건 백만 달러에 사람들이 서로 못할 짓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불과 10달러에도 그런다는 사실이지. 이제 더 이상 누구누구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든 말든 관심 없어. 남편도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더라고. 그리고 보험회사들? 난 놈들을 도와 한 놈팡이의 목 부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어. 그런데 불경기가 오니까 마을 절반의 보상금을 깍잖아."(p. 372 ~ 373)

 

 아시겠지요? 여기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켄지의 절망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낸들 그게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더 이상 죄악으로 부터 깨끗한 자도 없고 개인의 사소한 비행은 밝혀낼 수 있을지언정 거대 기업의 구조적인 악 앞에선 무력하기만 하니까요. 이제 더이상 사립탐정이 추적하는 범죄자들은 '트릭스터'들이 아닙니다. 슈퍼 히어로에게 있어 슈퍼 빌란과도 같이 그것 하나만 제압하면 사회는 순식간에 잃어버렸던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금 안정을 구가하는 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순진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트릭스터야말로 일종의 눈가림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그러한 진실이 드러나면 대중들이 사회 자체의 전복을 염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구조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신 슬쩍 들이미는 희생양 말이죠. 확실히 트릭스터는 그러한 존재였죠. 중국의 산해경에 나오는 온갖 기이한 괴물들과 중세시대의 마녀들이 그러했듯이.


 켄지는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립탐정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PRIVATE EYE'처럼 언제나 'PRIVATE'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켄지는 이제야 그 진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켄지가 깨닫게 된 상황이란 이미 전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습니다. 그 때도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에게 똑같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사립탐정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도록 말이죠. 하지만 젊어서일까요? 켄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계는 이미 달라져 있는데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음이 흔히 가지는 약간의 오만에 기대어 세상이야 어쨌든 자신의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었죠. 그렇지만 착각이었습니다. 휘지 않는 대나무는 결국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와 똑같이 켄지도 그 착각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 지를 아주 뼈아프게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착각을 나무랄수는 없습니다. 그 착각을 가져온 켄지의 신념이란 사립탐정물에서 고고하게 이어져온 사립탐정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건 여반장으로 바뀌는 세상의 선악과 가치 속에서 그래도 자기만큼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요, 모두가 이해득실을 쫓아 이합집산을 이루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쫓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립탐정이 백열전구라면 그 신념은 필라멘트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 그것이 사명이었고 또한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는 가버렸습니다. 트릭스터들을 잡는 것만으로 질서를 복구할 수 있는 시대는 가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2010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책이 쓰여지고 있었던 지난 2년간의 미국은 아시다시피 대공황 이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도래한 경제 위기는 결코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일이었죠. 노엄 촘스키가 단적으로 그건 '지난 30년간 집요하게 추진된 금융 자유화가 적지않은 원인이다.'라고 말했듯이 소수 금융 지배 계급의 입김으로 좌우되는 기형적인 미국 자본주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한 명의 악덕 금융업자가 아닌 그런 금융업자가 활개치도록 방기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 미국이라는 사회 자체가 이미 거대한 하나의 사회악으로써 사립탐정 켄지 앞에 군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그들이 숨겨왔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의 트릭스터만 잡으면 된다라는 순진한 믿음을 고수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순진한 믿음을 독자에게 가지도록 한다면 데니스 루헤인 역시 트릭스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오디이푸스가 정해진 운명대로 걸어갔듯이 켄지의 은퇴 역시도 필연적인 귀결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끝을 내버린 것이죠. 켄지에게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가라 아이야 가라'를 다시금 소환하면서. '문라이트 마일'은 98년에 나온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입니다. 작품상으로도, 실제 시간으로도 똑같이 12년이 흐른 것이죠. 그런데 왜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의 은퇴를 위해 하필이면 '가라 아이야 가라'를 가져왔을까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이 실제 미국이 처한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은 '가라 아이야 가라' 역시 그 반영이었습니다. 사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가라 아이야 가라'부터 그 이야기의 지평이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결정적 계기를 낳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라 아이야 가라'가 결국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을 본다면 그 답은 바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한창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던 미국의 중동 정책이라는 것이 말이죠. 90년대에 들어와 냉전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되자 세계에서 가장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은 그 다음 타겟으로 중동 지역을 삼았었죠. 이라크가 대표적인 목표였습니다. 지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듯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온갖 빌미로 UN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난 회수의 사찰도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된 미국은 막강한 힘을 아낌없이 휘둘렀습니다. 개입은 설령 그 나라에 내정간섭이 되더라도 자유 세계의 리더인 미국에게 당연한 사명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신념을 고집했고 단 한 번도 그러한 행보에 대해선 성찰해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무반성적이고 과도한 개입은 9.11의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의 미국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립탐정과 참 많이 닮아보입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데니스 루헤인도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가 지금까지의 노선에서 벗어나게 된 건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개입하여 자신의 신념만 고집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묻는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켄지에게 트라우마를 가지도록 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켄지와 똑같았던 당대의 미국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켄지는 그 선택으로 선령한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결국 사랑하는 연인 앤지와도 헤어졌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고립과 자책 뿐이었습니다. 이건 미국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9.11으로 실현된.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뒤이어 나온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가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가라 아이야 가라'와 연속성이 있습니다. 똑같이 독선적 개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여기서의 주된 범죄자가 그러합니다. 그는 남의 인생에 멋대로 개입해 자기 뜻대로 조정하고 결국엔 완전히 파멸시키는 걸 쾌락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쾌락만 제외한다면 켄지와 닮았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의 범죄자는 켄지의 또 다른 분신이다!'라고. '문라이트 마일'에서  다시금 소환되는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유괴된 아이였던 아만다의 지금 삶을 보면 이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보입니다. 그 때 켄지가 조금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남의 말에 귀기울였던들 아만다의 삶은 지금과 분명 180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켄지가 추적하고 싸웠던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의 자신. 그건 트라우마가 된 과거와의 대면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복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리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데니스 루헤인이 켄지에게 선사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아만다라는 트라우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켄지에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이란 그야말로 '비를 바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은 그 구원의 도래를 위한 기우제를 켄지를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범죄자를 보면서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가 보아야 할 곳과 버려야 할 것들을.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는 갈증을 적셔줄 찬 비를 맞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그렇게 배웠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자신만 옳다는 신념을 버려야 함을. 그래서 앤지와 만나 가족도 이루었습니다. 가족을 가진다는 건 켄지가 이제 그렇게 변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나마 켄지는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한껏 드러낸 금융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이죠. 그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에서 한 명의 트릭스터를 상대할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켄지에게 남은 건 냉정한 인식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엔 더이상 사립탐정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제목의 '문라이트 마일'은 롤링스톤즈가 71년에 발표한 'STICKY FINGERS' 앨범 B면 마지막 곡으로 실린 'MOONLIGHT MILE'에서 따온 것입니다. 'MOONLIGHT MILE'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오죠.


 I am just living to be lying by your side

But I'm just about a moonlight mile on down the road...


 가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라이트 마일이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떠밀려 왔음을 의미합니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길입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켄지가 이 소설에서 걷고 있는 길 그대로죠.



[가지고 있는 'STICKY FINGERS' 초판 LP를 배경으로 한 번 찍어봤습니다. 사실 'STICKY FINGERS' 커버는 LP 커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커버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커버는 앤디 워홀이 디자인했는데 원래 커버 자체도 진짜 남자 바지로 착각할만 하지만 아예 커버 바깥에, 혹시나 몰라서 책으로 살짝 가려놨는데, 실제 내리고 올릴 수 있는 지퍼까지 달려 있어서 더욱 진짜 바지처럼 보이는 커버입니다. 거기다 지퍼를 내리면 그 사이로 남자 팬티까지 비쳐보여 더 외설스럽죠. 워홀다운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커버입니다.] 


 사실 이 제목은 '비를 바라는 기도'의 프롤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 프롤로그는 주로 켄지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기서 켄지는 '문라이트 마일'을 자동차로 달리고 있죠. 처음에 켄지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식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프롤로그에서 켄지는 다섯 살 나이의 아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딸이었습니다. 그 변화가 왠지 예사롭지 않더군요. 설마 데니스 루헤인이 건망증이 심해 자신이 뭐라고 썼는지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테니까요.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일까? 그러자 그 꿈속의 질주 마지막에 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운전해야 한다. 차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기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배도 고프지 않으리라. 차 안은 따뜻하고 내겐 아들도 있다. 이제 아들은 안전하다. 나도 안전하다. 나는 계속 운전을 할 것이며 지치지 않을 것이다. 멈추지도 않으리라. ('비를 바라는 기도' P. 11)


 굉장히 비장한 어조입니다. 지치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죽을때까지 자신의 길을 간다는 말은 어쩌면 타협하지 않을 사립탐정의 신념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는 차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자동차 실내라는 그 협소한 공간이 아예 폐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집니다. 켄지의 꿈은 전통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은유한 것임을. 켄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사립탐정은 그렇게 달려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아들은 그저 지켜야 할 존재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들은 아만다를 뜻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계속 운전하는 동안 아들이 안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해버린 아만다의 삶이 자신이 바랐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충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었죠. 이것이 켄지 개인적으로는 '비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러니 어조가 비장해지 것도 무리는 아닐테죠. 그랬습니다. 그래야 했습니다. 어딘가 있는 진실을 찾아 거짓과 환영이 얼른 잘 구분되지 않는 달빛 어스름한 길 위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자신을 혼돈으로 이끄는 온갓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아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유폐시켜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더쉴 해미트와 로스 맥도널드까지 대대로 고수해온 그리고 지켜가야할 사립탐정의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신앙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기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길이 달라졌으니까요. 누군가를 지키길 원한다면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길을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계속 고집한다면 원래 바랐던 대로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기는 커녕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문라이트 마일'을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하듯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도 놓아야 합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켄지는 변해야했고, 하여 꿈속의 아들은 현실에선 딸이 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소설 '문라이트 마일'에서 이제는 장기 한 알이 아니라 판을 모조리 뒤엎고 재배치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동안 당연시 여겨온 사립탐정의 존재마저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립탐정의 종언은 이렇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좀 더 무리하게 말하는 걸 허락하신다면, 이건 미국에 대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포기하라!'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정말 안전하게 지키기를 바란다면 곪아 터진 환부를 헛된 희망의 링겔만을 꽂은 채 방치하지 말고 과감히 도려내라고 주문하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2010년에 찾아온 미국의 금융위기는 2008년 때 그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더욱 거대해진 구조적 모순 앞에서 사립탐정은 이제 그 적실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라이트 마일'에서 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기력을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확인합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버리고 자기 보다 훨씬 머리 좋고 비정한 존재들의 시대가 와버렸다는 것을. 그것도 거기 대량으로 쌓여있는 블루레이나 아이패드가 종이책들을 대체해버린 것 만큼이나 빠르게 말이죠. 하여 데니스 루헤인은 과감히 사립탐정을 떠나 보냅니다. 지키기 위해서 놓아야 한다는 걸 몸소 실천한 것이죠. 아마도 그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싸우고 그 대안을 가져올 새로운 세력을 구상하여 다시금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 단초가 바로 2012년에 나온 '리브 바이 나이트'이지 않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아무튼 저 역시 똑같은 마음으로 앤지를 떠나 보내렵니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리렵니다. 혹시 아셨나요? 사실 이렇게 쓴 것은 이제 앤지와 결별해야 하는 제 마음을 스스로 납득시키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렇게 나름 이별 의식이었다는 걸. 

 

 그러보니 롤링스톤즈의 앤지(Angie)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사실 이 리뷰를 쓰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만 혹시 데니스 루헤인이 앤지라는 이름을 정말 이 노래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각설하고, 이제 떠나는 앤지에게 이 노래 가사 하나를 인용해 그대로 들려주고 싶네요. 가사 때문에 질투 많은 켄지가 제 멱살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몸사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With no loving in our souls

And no money in our coats

You can't say we're satisfied

But Angie, I still love you, baby

 

Everywhere I look I see your eyes

There ain't a woman that comes close to you

Come on baby dry your eyes

But Angie, Angie

Ain't it good to be alive?

 

 앤지,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살만했어요.

 이건 정말이에요.

 

... see you Angie sometime, somewher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 What? - 삶의 의미를 건저 올리는 궁극의 질문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의 이름은 마크 쿨란스키이다. 

그는 미국인이고 버클리대 연극과가 학위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의 전작 '대구'와 '소금'을 읽어본 이라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뭐야, 역사학자 아니었어?"하고...

'대구'면 '대구'(물론 여기의 대구는 절대 지명이 아니다. 미국인 마크 쿨란스키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의 도시에 대하여 쓸 리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생선 이름이다.)
'소금'이면 '소금'
천착하는 하나의 사물에 관해서라면 상세한 미시사를 복원해 준 작가라 역사과가 아니라 연극과를 나왔다는 사실이 뜻밗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론 수긍이 가기도 한다. '대구'면 '대구', '소금'이면 '소금'이 그런 미시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어도 푹 빠져서 읽을만큼 아주 재밌기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뭔가 독특한 재미가 있는데 과연 연극과를 나왔기에 그런 맛을 우려낼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알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러면서도 일단 만나게 되면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이가 마크 쿨란스키다.

 자, 환영한다!
 드디어 그의 새로운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제목은 한 단어! '무엇'을 뜻하는 'WHAT?'이다.


역시나 독특하다.
이 책은 오로지 물음표로 끝나는, 그렇게 질문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누가 봐도 질문인데, 어떤 질문을 보는 순간에 그게 질문이란 걸 알 수 있다고 하면, 이미 그 글 안에 질문이 들어 있는데도, 즉 질문이 이미 거기 있는데도 왜 굳이 거기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일까? 내가 느낌표에 대해 항상 느껴왔던 감정도 이런 것이 아닌가?! (P. 19)

마크 쿨란스키가 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20가지 질문에 대하여 한 챕터씩 할애하여 말하고 있는 책은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정말로 모조리 질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예외는 없다!

 차례마저 이렇다.


  이런 식으로 이 책에는 모두 770개의 물음표가 있다.
  그 중 두 개는 이렇게 책의 앞 표지와 뒷 표지에 있다.
 더스트 커버를 벗기면 양장본 표지에 이렇게 어릴 때 많이 본 번호따라 선 긋기가 나오는데,


 그걸 선으로 이은 그림은 뒷 표지에 나와 있다.



 이렇게 말이다.
역시나 마크 쿨란스키! 책을 재밌게 만들 줄 안다.
이 그림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점이 모두 20개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건 이 책에 실려있는 중요한 질문의 숫자와도 같다. 그렇게 이 그림은 그 같은 질문들이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이를테면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 같은 것으로...

 아무튼 신기하게도, 문장이 모두 물음표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워서 더욱 문장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마크 쿨란스키의 이번 책은 수 많은 질문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물음표는 언제나 원심력의 기호이다.
하나의 의미, 하나의 정답에 안주하기 보단 밖으로, 저 아무 것도 없는 벌판으로 밀어낸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헐벗은 상태에서 다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물음표는 유목의 기호이고 방랑의 기호이다.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늘 새롭다. 물음표는 흐름의 기호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마침표가 주는 중력에서 기꺼이 벗어나 물음표가 주는 무중력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해답을 거부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것. 그렇게 정답이 정해주는 너의 이야기가 아닌 물음표로 새롭게 만들어가는 나의 이야기로 채우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커다란 물음표인 'WHAT?'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었다.
 "생각해야 해! 생각만이 날 살릴 수 있어!"

한나 아렌트에게 사유는 구원이었다. 그것은 악마가 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십자가였다.
생각한다는 건,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질문을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묻고 또 되묻는 것.

 훌륭한 질문자의 상당수가 고대 문명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훌륭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이 질문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거의 모든 것을 최초로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중국인들이 훌륭한 질문을 던졌었다는 사실이 과연 놀랄만한 일인가? (P.80)

 마크 쿨란스키의 말대로 현대는 질문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답을 말해 줄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을 싫어한다. 실제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하는 질문을 싫어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질문을 귀찮게 여기고 상급자는 하급자의 당연한 의문마저 반항으로 생각한다. 권력자는 국민의 질문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다.

 질문을 못하게 하는 것이 권력 크기의 척도가 되고, 질문을 안하는 것을 안정이라고 여기는 사회는 이미 죽었다.
생명은 언제나 질문에서 온다. 물음표는 늘 새로운 호흡으로 숨을 쉬는 시간을 창조한다.

 마크 쿨란스키의 '무엇 WHAT?'은 그러한 시간의 결정같은 것이며, 이 책에 담겨 있는 770개의 물음표는 언제는 그런 시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카이로스의 비둘기들...

 ONE MORE!


 이 책의 각 챕터는 하나의 의문문과 함께 마크 쿨란스키가 직접 그린 판화들로 시작된다.
아래는 그 중 몇 개를 발췌한 것이다. 이런 그림까지 어우러져 있어 더욱 읽을 맛이 났던 책이었다.
작고 가벼워 휴대하기 좋다는 장점까지 있어 어디서든 이 질문을 시작으로 사유의 시간들을 가져볼 수 있을 듯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후후, 왠지 표지의 물음표가 무언가를 연상시켜
(차마 입밖에 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
한 번 유머 삼아 연출해 본 것...
마크 쿨란스키의 책이라면 이런 장난도 어쩐지 어울릴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대학 초년생들에게 있어 필독서였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인도로 점점 혁명에 눈 뜨고 결국 혁명의 화신이 되는 펠라게야 밀로브나의 삶이 마치 화인처럼 그 가슴에 새겨지곤 했죠. 아직도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줄 압니다. 뭔가 의지의 힘줄을 돋구게 만들었던 그녀의 말들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마부'는 그 고리키의 소설입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입니다.
 그의 나이 39살에 쓴 '어머니'는 25살에 작가로 데뷔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이었죠. 그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격 동안 고리키는 단편과 중편 그리고 희곡을 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단편집 '마부'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고리키의초기 모습을 흠뻑 맛볼 수 있다는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발표한 것들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막심 고리키가 첫 작가적 여정을 시작할 때 과연 어떠했는지, 달리 말하면 '어머니'라는 걸작은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지 그 실상이자 흔적을 바로 이 단편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모두 10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단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의식화'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혁명으로 나아갔듯이 바로 악마란 그러한 공감이 결여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조금은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마부'부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크리스마스 날 문득,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남길 수 있는 지를 한 환영의 존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한 부유한 가장이 등장하는 '환영'에다 자신이 헌납한 종이 깨어짐으로 인해 드디어 그동안 저질렀던 죄악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을 깨닫는 자본가를 그린 '종'과도 같이 하나같이 뚜렷이 부각되는 주제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인지라 무려 130년 이상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4번째 이야기인 '로맨스'와 그 뒤로 죽 이어지는 '아름다움','푸른 눈의 여인' 그리고 '아쿨리나 할머니' 입니다. 불우한 소년시절 우연히 만난 한 여인 때문에 평생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내를 그린 '로맨스'와 역시나 산책길에서 우연히 보게된 아름다운 이국적 여인에 대한 매혹을 그린 '아름다움'은 '혁명'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혁명도 그렇게 첫사랑처럼 매혹으로 시작되니까요. 그러다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되고 말죠. '아름다움'은 그 시작의 순간을, '로맨스'는 그런 과정을 그린 듯 합니다. 사내는 결국 그 첫 만남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그 미련 때문에 자기 인생마저 망치고 마는데 그렇다고 고리키가 삶에 다가온 그 전면적 변화의 순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내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니까요.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네... 얼마 안 되지, 그래... 이렇게 술로 세월을 보낸다네. 그런데 그녀에 대해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져. 난 이렇게 회상하는 걸 좋아한다네. 그녀가 없었더라도... 살았겠지만....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겠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살다 죽었겠지. 어찌 되건 상관없어. 그런데 그녀가 있어서 회상할 거리가 있다네..."(P. 102)

 이걸 읽고 문득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혹 기억나실까요? 왜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같이 조난당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 추위 속에서 잠들면 죽기 때문에 동료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끝까지 노래를 불렀던 후지이 이츠키를 회상하는 장면. 전 그게 묘하게 감동적이더군요.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가지거나 남긴다는 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심 고리키도 그런 면에서 혁명이라는 걸, 혹은 변화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더군요. 설사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번 전부를 걸어보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있다고 말이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진짜 이야기로 남아 내내 기억속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덕이며 삶에 의미를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

 이 마음을 저는 다음의 이야기인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이 단편집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타인의 외형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한 경찰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너무나 세파에 찌들었기에 타인의 진심은 보지못하는 청맹과니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전혀 잘못 보고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삶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보고 싶은 쪽으로만 보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산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 경찰관처럼 우리도 서푼어치의 지식과 경험으로 삶 전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요. 바로 그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박해 오는 것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아쿨리나 할머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 단편과 '푸른 눈의 여인'이 어머니의 원형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성의 강함과 위대함'을 잘 보여주는 단편들이기도 하니까요.

 아쿨리나 할머니는 참 감동적이면서도 아픈 단편입니다.
 그녀는 '늙은 악마'로 통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손자, 손녀로 통하는 장성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작고 축축한 지하 방에 모여 삽니다. 그 여덟 명은 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쿨리나 할머니의 동냥질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들 역시 아쿨리나 할머니만큼이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왔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자들만이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쿨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먹이려고 매일 동냥질을 합니다. 

 헌신.
 하지만 그런 헌신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늙은 악마'라 부르듯이 경멸할 뿐이죠. 당연합니다. 구제될 길이 전혀 없는 사회 패배자인데다가 인간성도 나빠서 분명 밑뚫린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할 헌신임을 잘 아는 까닭이죠. 사람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할머니는 계속 먹이려고 동냥질을 합니다. 대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해 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신이 아파 누워도 병원에 데려가는 걸 귀찮아하고 묘자리를 위해 모아 둔 돈 역시 자기들 배채우는 데 써버리는 인간들이지만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그 돈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죠.

 생각해보면 이만큼 바보 같은 삶도 없습니다.
 타산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뭔가 희생을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대가가 부머랭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쿨리나 할머니에겐 오직 그 '헌신' 자체, 그렇게 그 '과정'만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할머니입니다. 이 단편엔 할머니의 시신을 묘지로 운반하는 후일담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밝혀집니다. 할머니의 삶이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 말이죠. 후지이 이츠키랑 비슷합니다. 마지막 단편에 나오는 이르제길 노파의 단코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그 단코 역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불태우지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채 죽습니다. 남은 건 그 기억, 이야기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들은 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겨진 이야기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횃불이 되어줍니다. 모두가 욕망에 눈멀어 이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온갖 어지러운 타산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져 그저 삶이 어두운 정글 같기만 하고 나홀로 거기에 외따로 버려져 있다고 느껴질 때, 단단히 중심을 잡고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횃불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은 사람을 남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짜 의미라고 고리키는 이 단편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한 이것은 그대로 앞서 나왔던 '환영'과 '종'의 최종 해답이기도 하며 삶이 결국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는 건 마지막 단편인 '이르제길 노파'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독 고리키가 이토록 삶의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어린 나무와도 같았던 시절, 잇다른 비극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나이 네살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리키를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재혼해버렸습니다. 엄마가, 가족의 따스한 보호가 가장 필요할 시기에 그는 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1살 때는 외할아버지가 파산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엔 재혼한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이제 그는 고아에다 가난뱅이였습니다. 사회 밑바닥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만나고 마르크시즘에도 눈을 떴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는 권총 자살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남은 건 만성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 뿐입니다. 고리키의 문학은 그런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없이 겪어온 비극과 고통 그리고 불안. 거기서 끊임없이 되물었던 삶의 의미가 결국 문학이란 형태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물도 가장 밑바닥의 것이 가장 달듯이, 바로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가 길어낸 해답인지라 더욱 공감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과 그 속에서의 성찰이 빚어낸 단편들이 모여있기에 저는 감히 어느 단편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저처럼, '어머니'의 여운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분명 이 단편집도 흡족하게 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이 단편집을 통해 고리키를 처음 만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하여, '마부'나 '환영' 그리고 '종'의 주인공들처럼 도대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계셨다면, 그와 똑같이 많은 고민을 한 이 고리키의 단편집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르제길 노파가 말하듯, 삶에 마구 천둥 번개가 몰아칠 때, 미리 나타나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스텝의 푸른 불꽃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