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지도 -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
제리 브로턴 지음, 이창신 옮김, 김기봉 해제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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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맵헤드'를 쓴, 그 역시도 이름난 지도광인 켄 제닝스는 어린 시절 지도가 나오지 않는 판타지 소설은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웃겼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도가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지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가장 많이 들여다 본 교과서가 사회과 부도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였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실은 지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을 읽게되면 반드시 그 곳의 위치 그리고 형세를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내가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라는 부제가 붙은 제리 브로턴의 '욕망하는 지도'를 읽게 된 것은 내일 아침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읽어 본 소감?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구글 어스를 처음 보았을 때 잡지 'PC월드'의 편집장 해리 매크래컨은 "황홀하다"고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이 책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듯 하다. 만일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의 매력을 알려주고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이상의 시야를 열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이 그렇다. 번역되지 전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고 이미 바깥의 상찬을 익히 봐왔던 터였는데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나처럼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순식간에 홀라당 읽어버릴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지금 엄청난 후유증을 치르는 중이다. 위장이 뒤틀려 며칠 동안 고생한 것도 모자라 지금은 잇몸이 부어올라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니 읽을 때 여유를 두고 읽으시길. 급히 먹다 체한다라는 말이 책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말임을 이제서야 몸으로 알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는 가상이 실제를 대체했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지도를 든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실제 그 장소에 있을 때조차 그 곳이 내가 찾아가는 곳인지 알기 위하여 지도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는 가상의 보완이 없으면 그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처럼 지도는 가상으로 엮어진 기호의 체계인데 바로 그 때문에 기호가 그러하듯이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많은 인간적인 것에 좌우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욕망 혹은 가치관 같은 것들. 제리 브로턴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지도를 만들려는 욕구는 인간의 기초적이고 지속적인 본능이다."라고 말했다. 본래 생물에겐 '인지적 관계대응'이라고 해서 거대하고 두렵고 인식할 수 없는 '저쪽'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를 구별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공간적 환경과 관련한 정보를 획득하고 처리하며 상기하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 제작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나처럼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나의 나됨을 붙잡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지도가 아니라 '세계지도'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지도는 좀 특별한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고 한다. 다른 지도 제작과는 다른 도전과 기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P.30) 지금과 같이 인공위성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혁신적 기술이 태동하기 전에는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데 있어 특별히 두 가지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하나는 머리 위의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다. 이 후자가 특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와는 달리 지극히 협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외부를 어떻게든 지도에 나타내려면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뭐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지도는 실제의 공간을 복사기로 밀어내는 듯 만들어지지 못하고 인간적 욕망의 간섭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결코 미개한 기술 때문이 아니다. 가장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주는 구글 어스에서조차 이러한 욕망의 간섭과 위험은 여전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도란 결국 만드는 '나'의 표현이다. 나의 욕망, 가치관의 상관물이다. 따라서 지도를 들여다 보는 일은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이들의 욕망,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지도란 책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책을 읽어보면 허클베리 핀이 자신이 도와주는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얼굴은 책 같아요. 그들은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얼굴에서 다 읽게 될 거에요."
지도가 바로 그렇다. 제리 브로턴은 자신의 책을 통해 이것을 입증한다. 그렇게 우리는 제리 브로턴의 인도로 12개의 세게 지도를 만나면서 허클베리 핀이 말했던 그대로 당시 그 지도를 제작했던 이들이나 국가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는지 혹은 바랐는지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읽는가? 먼저 이 책은 지도로 읽는 세계사이다. 우리나라 책에는 부제로 쓰였지만 원래 제목은 이것이었다. 제목 그대로다. 정말로 우리는 지도를 매개로 역사적으로 세계가 변천해 온 과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나 3장,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헤리퍼드 마타문디'와 5장,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마르틴 발트제묄러의 세계지도'를 비교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정확히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굴곡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300년경에 제작된 헤리퍼드 마파문디

(중세 시대의 대표적 지도로 영국의 해리퍼드 성당의 별관에 보관되어 있어 그렇게 불리고 있다. 마파문디라는 말은 넵킨을 뜻하는 라틴어 '마파'와 세계를 뜻하는 라틴어를 합친 말이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중세의 가치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 맨 위에 예수님이 보이고 예루살렘이 지도의 중심에 놓여져 있고 그 곳이 속한 아시아가 지도의 2/3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의 위쪽이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라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도의 위쪽은 북쪽으로 하는 게 좋다고 하여 그 때부터 북쪽으로 해왔는데 여기서는 무시된 것이다.(이는 중세 지도의 특징이기도 하다.) 더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격자선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구안에 갇힌 세계는 이 지도가 보여주려는 게 세계가 아니라 예수가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기독교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미국의 출생성명서'로 유명한 마르틴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1507년에 제작되었고 목판 인쇄되었다. 1998년 미국 의회도서관이 무려 천만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해 더욱 유명해졌다. 지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미국 의회도서관은 특히 유명한 곳이다. 세계에서 희귀하다는 지도가 거의 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출생증명서'라는 말은 이 지도의 진위를 처음 검증하고 이 구입의 필요성을 미국 의회도서관에 알린 영국의 유명한 지도 거래상이자 아메리카지도 전문가인 필립 버든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 이 지도를 보았을 때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 다음으로 중요한 미국 문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지도는 독일의 한 백작이 소유했었는데 그 매각 의뢰서를 '발견자들'로 유명한 대니얼 부어스틴(여기서 이 이름을 만나게 될 줄이야.)이 썼다고 한다. 이 지도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독립된 대륙으로 묘사하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지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도에는 당시 한창 꽃피우던 르네상스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와는 다르게 더이상 예수 같은 성경 상의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다시금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으로 돌아가 지도의 위쪽도 그의 권고대로 북쪽으로 잡고 있다. 거기다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 발견된 지역들을 프톨레마이오스의 고전적 세계모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노력도 현저하다. 이처럼 지도에는 당시 지배하던 가치관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사를 읽는 일이 허언이 아닌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영국의 락그룸 'EAST OF EDEN'의 데뷔 앨범 커버

 (여인의 나신에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멋진 커버로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여 이 자리에서 소개해 본다. 앨범 이름 역시 메르카토르 프로젝트이다. 한 마디로 메르카토르가 지도를 통해 하려고 했던 일을 음악을 통해 하겠다는 뜻을 표방한 것. 이들은 주로 인도 음악 스타일을 많이 연주했는데 그런 면에서 관용을 지도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메르카토르의 이념을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LP로 보면 더욱 근사한 커버다.)

 그런데 이렇게 읽다보면 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지도를 만들고 보고 읽는 '인간'이다.

 지도에 투사하고 있는 가치관, 지도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들을 읽다보면 저 마파문디와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차이에서 보듯 인간들의 생각들이 어떻게 바뀌고 그 욕망 또한 어떻게 달라졌던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에선 없었던 국가와 개체의 발견이 발터제묄러에서는 나타나는가 싶더니 종교개혁과 더불어 나타난 메르카토르의 투영법이 사실은 오로지 하나만 군림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과 변방만을 만들어내던 세계를 떠나 어디까지나 모든 지역을 똑같은 존재로서 공평하게 다루려 한 이념이 투영된이었음을 알게되면서 개체라는 독립성의 발견과 함께 이 장의 제목대로 '관용'에 인류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목도하는가 하면 바로 그 관용이 개체의 독립이 더욱 굳어짐에 따라 서로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매킨더에 의해 만들어져 이후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이 된 '지정학'의 탄생으로 굴절되는 걸 보면서 자연히 인간의 마음이 흘러온 길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가지를 준다.
 하나는 지도와 그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다른 하나는 지도의 변천을 둘러싼 세계 역사의 변화를. 마지막으로 그 경로를 따라 이행해 온 인간 마음의 발자취를 말이다. 단적으로 지도라는 것이 이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풍부한 텍스트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이 비상벨을 아무리 울려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요모양 요꼴로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왠지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아무튼 좋은 책이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여덟 번째로 권하는 것 같다. 만나는 이들마다 권하고 다녔는데 제대로 헤아려 보질 못했네. 몸이 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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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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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은 알튀세르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를 절망케 했던 것. 바로 체자레 보르지아의 운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기도 한 그는 오래도록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바로 목전에 두고 병마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 우연히 걸린 병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그대로 좌절되고 만다. "어떻게 이럴수가! 이토록이나 위대한 역사가 한낱 병마 따위에!" 마키아벨리는 진심으로 아파했다. 알튀세르에게도 이건 충격이었다. 그가 믿고 있던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었으니까. 마르크스는 말한다. 역사란 필연적으로 법칙을 따른다고.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지금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원시공산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전해왔으며 그와 똑같이 공산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체자레의 사건은 전혀 다른 걸 보여주었다. 병마와 같은 작은 우연이 거대한 역사적 필연마저도 거꾸러뜨릴 수 있음을.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저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를 따라 우발성의 유물론을 정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질문이다. 역사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떤 이들은 이게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는 채권자를 생각해보자. 그 채권자는 채무자가 몇 시에 어디를 통해 집으로 오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골목 한 모퉁이에서 가만히 그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채무자는 채권자가 그정도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 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꺾어진 골목에서 채권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채무자에게 이 채권자의 출현은 느닷없이 당한, 우연의 횡액이겠지만 채권자에겐 아니다. 채무자의 출현은 필연인 것이다. 뭐, 우연과 필연은 보기 나름이라고 편하게 정리내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만은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神)적 인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우리로서는 무엇이 우연이고 또 무엇이 필연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알튀세르도 바로 그 수준에서 우발성의 유물론을 이야기한다. 이 알튀세르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나의 사회 이론으로 정립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상탈 무페다. 그 둘은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받아들여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었다. 이는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었다. 하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상부에 의한 구성이 더욱 강력하며 그렇게 헤게모니 또한 얼마든지 우연히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들에 의해 알튀세르로 부터 제기되었던 '우연성'이 보다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우연성이 넘쳐난다면 보편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과연 정립 가능한 것인가?

 

 아시다시피, 포스트모던은 보편성을 부셨다. 거대 서사의 종말. 그렇게 그것은 지역적인 것, 특수적인 것에 특권을 부여했다. 포스트 모던이 나왔을 때 부터 그것이 소비지상주의를 떠받치고 보수를 강화하는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들은 있었다. 그 예언은 맞아 떨어졌고 포스트 모던은 2008년의 서브프라임이 일으킨 금융 공황과 더불어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샴페인을 성급하게 터뜨렸다. 아직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말은 도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다시금 '보편성'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 서사의 종말이 가져온 지금의 모습을 보라. 사무엘 헌팅턴의 예언대로 갈수록 인종주의, 부자와 빈자간의 대립은 격해지고 있다. 이제까지 그들을 제어해주던 최소한의 이념적 틀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자신이 패권국가가 되려하며 일본은 일본대로 또다시 제2의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서로가 합의하에 공생의 길을 도모하는 '보편성'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최근의 철학적 흐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정초시키는데 있으며 주디스 버틀러는 그 흐름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주저 '젠더 트러블'에서 보여주듯이 그녀는 성적 정체성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적인 것을 포용한다. '과정 중의 형성'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거기에 맞처 그녀는 '보편성'을 정립하는 것도 탐색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윤리적 폭력 비판'은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적인 것을 '나'라는 주체성 확립에 연결지어 탐색한 것이다. '윤리적 폭력 비판'의 원래 제목은 'GIVING AN ACCOUNT OF ONESELF'다직역하자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제목 자체가 이 책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하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건 '보편성의 정립'을 염두에 두면 쉽게 답이 나온다. 보편성의 정립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일종의 대화와 같다. 그렇다면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물론 그건 자기 소개다. 그렇게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의례적 만남이든, 사교적 만남이든 모든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야 서로 이해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로 이해의 차원을 '보편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상호 보편성을 정초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초 작업인 셈이다. 보다 원활한 상호 이해가 가능한 가급적 투명한 보편성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시작이 되는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그녀는 천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뒤따르기 쉬운 하나의 오해.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했을때 우리가 과연 설명하는 '나'란 고정적인 것일까, 우연적인 것일까?

아마도 고정적인 나일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모두 3부에 걸쳐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가 말하고 있는데 그 중 1부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말하는 '나'라는 게 내가 익히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나는 아닌 것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만들어지고 바로 그 과정중에 형성된 우리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가지고 있었던 자아를 그 설명의 순간 '쨘!'하고 드러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설명을 통해 정의를 얻지 못했던 우리의 자아가 그제서야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정체성이란 바로 그 설명의 순간 형성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1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이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발화하는 순간 다양하게 가변화되는 우연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꽤나 고정 불변적인 것으로 여긴다. 누구나 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듯이.

 

 혹시 궁금하게 여기진 않았는지?

 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존재의 가능성을 이토록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디스 버틀러는 그 까닭을 밝혀준다.

 바로 거기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윤리적 폭력 비판'이 들어온다. 칸트의 '비판' 시리즈를 오마쥬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것은 2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 좀 이상하다. 윤리와 폭력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윤리란 원래 서로 간의 폭력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는 그러한 윤리가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2장의 제목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윤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폭력적이 되는 것일까?

 

 이걸 알려면 다시 나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그 때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과연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정말 투명하게 드러내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일례로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자기 소개의 규칙이 존재한다.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는 언제나 그 규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내 자의대로 나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다. 설령 자의대로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규칙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할 수 없이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규칙이나 혹은 방식에 따라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예의라고도 불리고 혹은 배려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외부의 규칙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규칙 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 자체도 언제나 외부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언어로 설명하는 그 순간, 나의 말들은 바로 탈취되어 내 삶에서 우러나온 담론이 아닌 타인에게 받아들여진 언어의 담론으로 즉각 변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속했던 시간이 아니고 타인이 속했던 시간 틀 위에서 새롭게 번역된다. 내 삶의 직접 경험이라는 터전 위에서가 아니라 그 타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적 틀 위에서 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서로에게 투명하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언어라는 또 문법이라는 혹은 예절이라는 외부적 형식을 빌려오는 한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끼리 번역해서 듣는 것처럼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다. 나는 일부러 언어 이외에 '문법'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냐하면 이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문법에서 연상되어지는 '규범'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예절이라는 것도 그 규범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우리에겐 서로가 소개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개항으로써 '규범'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 규범이 도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틀이 되어 나 자신을 거기에 맞추게 한다. 나는 다양하지만 정해진 규범의 틀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틀에 맞지 않는 걸 잘라낸다. 폭력적이다. 다양한 나는 규범이 허용하는 틀 내에서 협소해지고 앞서도 말했듯이 나 자신의 정체성은 그 발화의 순간 형성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그것은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 자신 역시도 나라는 존재를 협소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외부의 규볌이라는 윤리는 우리에게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걸 니체를 들어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사법적 체계로 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즉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자신에겐 전혀 그런 고의가 없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던 것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니체의 이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그리고 그걸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왜냐하면 법정 앞에서 자신의 변호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남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로 만드는데 더욱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시당초 나를 설명한다는 것이 변호로 부터 출발했고 이제는 본질이 되었기에 우리는 앞에서 가해지는 윤리적 폭력 앞에서 일종의 자기 방어로써 나 자신을 협소한 것으로 그리고 고정 불변의 존재로 스스로 규정해왔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왜곡된 우리의 자화상을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왜곡된 상으로는 주디스 버틀러가 바라는 투명한 보편성을 정초할 수가 없다. 깨어진 거울로는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보다 온전히 나 자신을 드러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탈주, 미끄러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제3부의 '책임'이다. 3부에 책임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할 분들이 계실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이 사법적 체계 아래에서 나왔다는 니체의 말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법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형벌 또한 중세처럼 연좌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 개인에게 돌릴 수 있는 것만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개인에게 그 처벌을 감당해야 할 이유로써 '책임'이라는 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책임이란 '나의 나-됨'의 완성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책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자기-이해의 모든 한계를 시인하고, 이 한계를 주체의 조건으로서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곤궁으로서도 확립한다는 것이다(p.146)

 

 '책임'은 나를 설명하고 그 와중에 나를 만들어가는 것의 종착역이다. 거기서 나라는 상은 만들어지는데 왜 주디스 버틀러는 이것을 마지막 장으로 불러온 것일까? 그건 바로 나라는 상(像)의 확립과 관계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의 진실된 정체를 밝히는 것. 책임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자아의 확정된 모습인데 과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인걸까? 주디스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자 라플랑슈와 푸코의 고백 이론을 들어 이 확정된 자아의 상을 남김없이 때려 부순다. 실로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놀라운 건 라플랑슈의 이론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아의 모습을 형성하는 유아기 때부터 아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타자에 호응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고 단언한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자아는 나 자신의 뜻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그 상호 조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가 우리 내부에 원초적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 자아의 형성까지 주관했다는 것이 라플랑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법이 네가 누구냐 물었을 때 비로서 나 자신이 태어났다는 니체의 말과도 같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동안 수많은 타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때 그때따라 맞춰가며 형성된 '나'가 있을 뿐. 푸코의 고백에 대한 이론은 이를 더욱 증명한다. 푸코는 고백이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고백을 통해서 내면의 진실이 형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고백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해가는 하나의 육체적 실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푸코는 고백을 통한 우리의 자아 표현이 '자신의 내면성을 용해시키고 자아의 외면성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그대로 애초부터 타자에 의해 우리의 자아란 게 형성되어왔다는 라플랑슈의 이론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라플랑슈도, 푸코도 우리의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그 때 그 때에 따라 변형되고 수정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알고 있는 모습 또한 내 삶의 어느 순간 타인과의 어떤 계기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꽝!'하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확정된 자아란 게 있을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플랑슈와 푸코 그리고 레비나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주디스 버틀러가 '책임'의 장에서 주장하는 건, 나 자신이란 건 부단히 형성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나는 어떤 시점에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고 마치 파인만의 경로처럼 무한히 가변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나 자신을 확실히 설명한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노력'이라고 푸코가 말했듯이.

 

 주디스 버틀러는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늘 수정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존재의 모든 부분이 수정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모든 변화와 수정에 열려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보다 투명한 보편성을 위한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나를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되도록 윤리적 폭력으로 부터 비껴나서 보다 허심탄회하게 상대방에게 귀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나-됨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상호 타협을 위한 첫 계단이니까 말이다. 결국 여기에서 드러나는 건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게 진짜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얼른 이 말에서 생각했듯이 나의 '나-됨'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그만큼 나를 더 허물고 타인에게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설명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혹은 더 많은 귀를 가지는 일이다. 나를 비우고 다시금 타인을 포용하면서 새로이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설명한다는 것의 진정한 모습이다.

 

 들으려는 귀는 없고, 말하려는 입만 많은 요즘. 주디스 버틀러의 이와 같은 주장이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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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라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비라 캐스퍼리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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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이란 말은 이 책을 위해 아껴두어야 했었나 보다.

 드디어 읽었다. 비라 캐스퍼리의 '나의 로라'. 범죄 소설이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던 1940년대. 거기에 대항하듯 힘겹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세 명의 여성 작가가 있었으니 그녀들이 바로 '고독한 곳에'의 도로시 휴즈, 안타깝게도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로 더 유명한 마거릿 밀러 그리고 바로 이 비라 캐스퍼리다. 그래도 마거릿 밀러는 단편으로, 도로시 휴즈는 재작년에 나온 대표작 '고독한 곳에'로 만나봤지만 비라 캐스퍼리는 내내 미싱링크였다. 트로이카중 하나의 바퀴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으니 그 독서의 여정이 어쩐지 비틀거릴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오토 프레밍거가 영화로도 만들어 유명한 대표작 '나의 로라'가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읽은 나는 감히 첫 문장을 저렇게 썼다. 하지만 진실이다. 이 책은 나를 매혹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아구타카와 류노스케의 '나생문'을 닮은 구성 때문도, 히치콕 감독의 걸작 '현기증'을 연상시키는 설정 때문도 아니다. 온전히 문장 때문이다. 남자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문장들. 하지만 한없이 보드라운 실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그보다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아니라면 길어내지 못했을 언어들 말이다. 그것이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마를 쳤다간 졸도할지도 몰라서 무릎을 쳤다. 남자의 하드보일드. 거기엔 과한 생략이 있다. 아, 대상이 편중되어 있다는 말을 빠뜨렸다. 거기의 생략은 편식을 한다. 풍경은 골고루 먹는 대신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만 먹는다. 탐정인 자신의 것만.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남성의 하드보일드는 그걸 그대로 독자들에게 들려줄 마음 따위 없다. 독자들은 어디까지나 탐정(혹은 형사든)이 먼저 씹어준 것만 삼키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기새처럼 그가 주는 것만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자고로 하드보일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드보일드가 우리를 매혹시켰던 것은 말 그대로 하드 보일드, 삶은 달걀의 단단한 껍질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조석으로 변해도 그만은 그 껍질처럼 변하지 않아야 했다. 그 한결같음이 우리가 느낀 매력이었다. 작가들은 잘 알았다. 독자인 우리들이 정말은 어디를 보는지. 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탐정 자신이란 걸. 그러니 생략해야했고 생략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여성 작가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드는 우려가 있었다. 여성 작가들이 과연 그런 껍질을 줄 수 있는가였다. 거기엔 어떤 단호함이 필요했기에, 그걸 남자들만의 특성이라 지레짐작한 우리들은 때로는 이러다가 곰살갑게 구는 탐정을 만나는 게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시 휴즈와 마거릿 밀러는 그런 우리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남성들 이상으로 단단한 하드보일드를 쓸 수 있음을 그녀들은 증명했다. 그럼, 비라 캐스퍼리는?


 그녀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남자들이 만든 규칙 따위 깡그리 날려버렸다. 우리들이 익히 알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는 산산이 흩어져 재가 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짖궂은 미소 밖에는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지!"


 그게 문장이었다. 남자의 탐정들은 언제나 닫아두었던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내면 심리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거기 생겨나는 풍경을 확 낚아채는 표현이 정말 뛰어났다. 청새치처럼 펄쩍 뛰어올라 그대로 가슴에 와 콕 박혔다. 둔탁한 기분 좋은 통증을 느끼게 했다. 압권은 로라의 내면을 말할 때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나는 일기다운 일기를 쓰지 못한다. 내 삶을 하루에 한 줄로 요약해 그달 16일에 아침상을 차린 것과 17일에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동급으로 만드는 것은 체질상 맞지 않는다." 혹은 "셸비가 너무 잘생겨서 다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셸비의 외모가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호해주어야 할 기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어쩌면 비라 캐스퍼리 자신의 고백이 아닐까 싶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 하며.


 잘못한 쪽은 셀비가 아니라 나였다. 완벽한 생활을 완성하는 도구로 그를 이용했고,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 놀음을 벌였고 물주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려고 은색 여우 털 재킷을 입고 다니는 잘 나가는 창녀처럼 보란 듯 그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미혼으로 삼십 대를 맞이하려니 불안해서 그를 사랑하는 척,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끼는 척, 14K 금담뱃값을 선물하는 만용을 부렸다. 바람을 피웠을 때 속죄의 뜻을 담아 아내에게 난초나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남자처럼.

 그런데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럴듯했던 포장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는 수익률 좋은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택된 두 종류 채소처럼 열정이라고는 없는 관계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연인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끝났지만(P. 253) 


 도무지 70년의 시차를 느낄 수 없는 현대적 감수성에다 세련된 표현들. 그래서 더욱 이런 범죄소설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것들인데 하지만 내 예상을 깨고 너무나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같은 치정극을 아침 드라마 형식으로 보다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미니시리즈로 본 것과 같았다. 보쌈에 처음 김치를 넣었을 때와 같이 완벽하게 어울리면서 또 색다른 맛을 주는 새로움은 늘 환영받기 마련이다. 아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라면 매혹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문장만 가지고 얘기하는 건 비라 캐스퍼리에게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문장만으로 승부하는 작가구나 여기실 분들도 계실테니. 그러니 그런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서 비라 캐스퍼리가 새겨 놓은 것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이고 어디까지나 범인 찾기가 주종이니 스포일러를 피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시작해 본다.   


 괴테는 오직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구원이란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다. 실은 저 헐벗은 황무지로 내모는 것이다. 익숙함과 안정감을 주는 모든 세계가 해체되고 헐벗은 몸으로 텀블위즈가 굴러다니는 황량한 대지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괴테가 말하는 구원이다. 이 때 그는 구약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 이브를 떠올리고 있다. 아담을 유혹하여 낙원인 에덴에서 매일의 힘겨운 노동이 없으면 생존마저 불가능한 척박한 땅으로 추방당하게 만든 이브. 그 때부터 여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성경만이 아니다. 그리스나 인도 신화를 비롯하여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신화에서도 우리는 자주 여성을 위협적이거나 불길한 존재로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성들은 괴물의 외피를 둘러써야 했다. 한 때는 노래에 홀릴 경우 죽음만이 기다릴 뿐인 세이렌으로 또 어떤 때는 남자들로 하여금 인간을 포기하고 돼지가 되게끔 만드는 키르케로. 그렇게 그녀들은 늘 남성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며 유혹과 위협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사실은 그게 바로 여성들을 불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들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배 저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의 질서로는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 그래서 괴테는 구원으로 여겼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기 때문에.

 그만큼 타자로서의 여성성 앞에서 남성들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고 괴물이 된 여성들의 강한 힘이란 그 무력함을 거꾸로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용맹한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 하더라도 솜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수동적으로 유혹에 저항하는 것만이 고작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무력감을 남성들에게 가져온 것이 바로 정체불명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여성들은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맞다. 그것이 여성들 힘의 원천이었고 불길함의 근원이었다. 피라미드 앞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도 암컷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를 잡아먹었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디이푸스가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자살을 한다. 힘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것의 과격한 표현이다. 물리친 오디이푸스는 왕이 된다. 정체불명의 절대적 타자인 여성성이 제거되었으니 남성들만의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을 썼다. 거기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흔히들 말하는 '젠더'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의 존재는 분할된다. 거기엔 식민지가 된 영토와 독립적인 영토가 공존한다. 그 정확한 경계는 알 수 없지만. 젠더는 자살한 스핑크스의 무덤이요, 그렇지 않은 곳은 여전히 수수게끼로 남아있는 세이렌의 영역이다. 여성의 신체란 전쟁터다. 그 둘 사이의 전선이 나날이 새로 새워지고 있는. 그건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매일 공세를 취한다. '여성답다'는 말의 폭력으로, 혹은 이미지로서. 태고적의 이야기와 똑같이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내면화시켜 길들이려는 상징화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지금 여성은 거꾸로 된 세이렌이다. 온갖 가짜 세이렌 노래 소리에 포박되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세이렌.

 왕자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 공주.


 인어 공주는 그러한 젠더로의 여성, 과연 그 끝에는 뭐가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투명하고 가벼운 공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인어 공주의 언니들은 왕자의 심장을 찌를 칼을 쥐어주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온전한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자 한다면 그 단호한 결별의 몸짓만이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로라는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 로라가 아닌 그 로라를 통해 만난 남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지금의 로라로 만든 레이데커와 주검으로써 로라를 처음 만나게 된 형사 맥퍼슨. 레이데커는 자신이 아는 로라를 말하고 맥퍼슨은 수사를 통해 알게 된 로라를 말한다. 그 남자들이 화자가 된 세상에서 로라는 죽어있다. 레이데커라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맥퍼슨이라는 남자에 의해 파악된 로라는 공기로 변해버린 인어공주였다. 그런데 돌연 로라가 부활한다. 죽었던 로라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알고보니 살해당한 건 전혀 다른 로라였다. 그렇게 두 명의 로라가 존재했다. 죽은 로라와 산 로라. 죽은 로라는 남자 없이는 못 살던 존재였다. 정확히 길들여진 세이렌, 수수께끼를 잃어버린 스핑크스였다. 하지만 산 로라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던 모든 이들의 생각에서 비껴나간 존재였다. 아무도 그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모든 남자들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녀는 자유라는 의미를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달라요.(...) 저에게 자유란 한심하고 쓰잘머리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습관을 내 스스로 조절하며 주체적으로 사는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P. 151)


 이렇게 비라 캐스퍼리는 로라라는 '죽은 로라'와 '산 로라'로 신체를 양분한다. 지금의 여성이 정확히 젠더와 그렇지 않은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남성 사회에 포섭되지 않는 산 로라에게 비라 캐스퍼리는 의미 심장하게도 자신의 목소리마저 허용한다. 남자들만이 떠들던 그 세계에 그 대등한 참여자로서 산 로라는 자기 목소리로 당당히 말하며 그 순간 남자들의 세계는 붕괴된다. 말들은 거짓이 되고 권위는 억압으로 지혜로운 권고라 여겼던 것들은 모두 질투와 옹졸함의 소산이었음이 밝혀진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얻고 자신의 두 발로 서려고 하자 남자의 세계가 초라한 민낯을 드러내며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인어 공주가 왕자의 가슴에 단도를 꽂은 것과도 같이.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남자의 항복 선언으로 끝난다.


 그 어떤 남자가 그녀를 향해 독기를 발산하더라도 그녀를 멸하지 못하리라(P.333)


 '나의 로라'는 이런 이야기다. 남성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여성 스스로 그 존재 가치를 보유하려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것도 40년대에. 그녀는 세이렌에게 진짜 자신의 힘을, 스핑크스에게는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인어 공주에게는 단검을 쥐어주려 한다. 이것은 그녀가 있었던 문학판이든, 영화판이든 글쓰는 여자들은 흔히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처럼 소외시키던 모든 남성 중심 세계의 경험이 낳은 결기다.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결기의 예리함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도 없다. 아직도 세이렌들을 기화시키려 드는 남성적 질서는 여전하므로.


 모든 여성이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가 아니라 '나의 로라'에 나오는 로라가 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다. '나의 로라'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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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2-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여자한테 넘어갈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한테 넘어가지 않기도 합니다 이성의 유혹이라고 해야겠군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여성을 위협스럽고 불길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을 보니 생각난 겁니다^^

이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부부 가운데서 아내가 죽고 남편 혼자 남았을 때는 힘들어하고 오래 못 살지만,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남았을 때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오래 산다는 게

1940년에 앞으로 여성이 어떻게 될까 내다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것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희선

ICE-9 2014-02-24 03:22   좋아요 0 | URL
희선님 죄송해요. 제가 그만 너무 늦게 확인했네요.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저만 정신이 없는 것인지 ㅠ ㅠ...
'팜므파탈'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죠. '메데이아' 같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근대에 들어와 특별히 생기게 된 것도 아니고 이미 그리스 신화부터 그러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은 있어왔죠. 그러다 기독교가 강력한 부권을 형성하고 있을 무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말기에 종교개혁 같은 것이 서서히 떠오를 때쯤, 그렇게 그 부권이 흔들릴 무렵 마녀로 부활했고 근대에 들어와서도 역시나 남성 질서가 흔들리던 대공황 시기와 더불어 팜므파탈 장르가 또다시 유행하게 되었죠. 질서가 흔들릴 때 잇달아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이 이렇게 부활한다는 것 자체가 제겐 흥미롭고 아마도 그 시각에서 '나의 로라'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4-03-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뜸하시네요, 헤르메스님! 표지가 핑크라 저도.. 엘릭시르에서 출간되는 시리즈가 구색맞추기 좋아서 저도.. 리뷰 먼저 읽는것도 좋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ICE-9 2014-03-09 15:46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이렇게 찾아오시고 일부러 안부까지 물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최근에 이사를 하느라 준비에 뒷정리까지 마치느라 들어올 여유가 없었답니다. 거기다 이사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아파서요. 이사, 하면 할수록 점점 힘드네요ㅠ ㅠ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정리를 다시 했는데 엘릭시르는 역시 함께 꽂아놓으니 보기가 좋더군요. 번역도 깔끔하고. 오래도록 계속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시리즈입니다^ ^

2014-03-13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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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작가가 바로 요 네스뵈이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알린 대표작 제목이 바로 겨울하면 곧잘 떠오르는 '스노우맨', 즉 눈사람인 까닭이다. 그러고보니 눈사람 말인데, 그것은 같은 사물이긴 하지만 그냥 길바닥에 구르는 돌멩이와는 달라 보인다. 돌멩이는 그저 무심히 돌멩이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쩐지 눈사람은 그것을 만들었을 아이들의 풋풋한 동심이나 그런 동심을 다치지 않고 잘 자라나도록 한 단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 같은 것들이 얼른 연상되고는 한다. 눈사람이라는 단어가 왠지 푸근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사물이 그냥 사물로 있지 않고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와 바로 연결되어 떠오를 때가 있다. 마치 정해진 규칙처럼 다른 이미지로는 얼른 바뀌지 않는 것들이 말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게 마련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사회적 약호(code)'라 부른다. 롤랑 바르트가 이 말을 단순히 사물에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정도를 말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바로 이런 약호들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나 사람 혹은 사건을 보고 해석하는 데도 영향을 미쳐 그 약호대로 보고 판단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생각할 때는 한없이 투명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눈조차 우리는 어느틈에 이식당한 사회라는 타인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사회적 담합의 순전한 모방일 지 모른다. 혹은 나와 사회가 교섭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릇 개성이란 것마저도 그러한 조합과 배열의 우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회라는 경계 안에 머무르려 하는 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진정한 나가 되려면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나만의 눈, 나만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하고 싶다면 '월담'은 필연적인 것이다.


 '월담'을 쓰고 읽는 것에다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아마도 드러난 의미가 아니라 그 아래 그림자처럼 감추어진 이면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선 이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이면의 발굴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약호가 사실은 진리가 아니며 거짓과 기만 위에 성립된 작위적 담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면의 복권이란 사회적 약호의 전복이다. 아울러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나의 전복이자 동시에 진정한 나의 재건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실은 요 네스뵈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요 네스뵈, 그는 이면의 의미를 발굴하는 작가다. 그의 대표작 '헤드헌터'에는 부자들이 남몰래 감춰두고 있는 그림들을 훔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사실은 요 네스뵈가 바로 그 주인공과 같다. 사회가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표상의 진짜 의미들을 몰래 가져와 온 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작가라는 건, 이제는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인터뷰에서 한 말에서도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를 '조용한 국가'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조용함'의 의미는 아니다. 사실 노르웨이는 네오 나치와 같은 신우익의 부활, 날로 높아지는 빈부의 격차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로 인한 갈등들로 들끓고 있다. 그런데도 노르웨이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안정적인 복지국가의 모습만 보여지기를 고집한다. 송곳처럼 여기저기 솟아난 차별과 갈등들을 하얀 천으로 그저 살짝 덮어놓는 것과 같은 꼴을.


 요 네스뵈가 말하는 '조용함'이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상처와 고통을 가져오는 것들을 모르쇠하는 그 기만, 혹은 그 비명 소리들을 모조리 억누르는 억압을 일컬음이다. 바로 그 덮은 하얀 천을 모조리 걷어내는 것. 그것이 요 네스뵈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스노우맨'도, '레오파드'도 마찬가지다. 내밀한 곳엔 언제나 '노르웨이'라는 사회에 대하여 발언이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 '레드브레스트'는 그 경향의 출발점과도 같은 작품이다.

 

 'MY MOST PERSONAL NOVEL!'


 해리 홀레는 레드브레스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전 두 편과는 다르게 정말 많은 변화를 꾀하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다중화자'의 도입이다. 이전 작품들은 모두 해리 홀레를 중심에 놓고이야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레드브레스트'에 와서는 해리 홀레 이외에도 화자의 입장에 서는 인물들이 많다. 지금은 보편적이 된 이 스타일은 '레드브레스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2차대전 당시 독일에게 동조했다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역사를 소설의 중추로 삼은 것이었다. 이전의 그는 보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지만 점증하는 노르웨이 국내 문제에 대하여 더이상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노르웨이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무엇보다도 과거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문제는 모두 그 과거의 역사적 과오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의 진정한 치유를 원한다면 기필코 제대로 끼워야 할 첫 단추. 그래서 그는 노르웨이의 부끄러운 과거를 가져오려했고 진정한 성찰을 위해 조금의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재현이 필요했다. 하여 그는 정말 많은 역사적 문헌들을 읽었고 참전 경험자들로부터 많은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바로 그 과정이, 있는 그대로의 과거로부터 픽션을 구축하고자 하는 길고도 지난한 과정이 그를 힘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거울에 비쳐보는 것과도 같이 투명한 대면만이 진정한 반성과 그를 통한 치유로 인도해 줄 터이니까. 덕분에 우리는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전장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회상으로 제시되는 이 전쟁 장면에서 우리는 요 네스뵈가 과연 이 소설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그토록 열심히 전쟁의 기억들을 찾고 발굴한 것은 비록 그 역사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있어 부끄럽기 그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대로 외면해서는 안되는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는 그 역사적 과거를 서둘러 망각속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빨리 잊고 새출발에나 힘쓰자는 것이 노르웨이의 모토였던 것이다.


 '레드브레스트' 소설 초반, 해리 홀레는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차출된다. 그리고 경호 도중, 원래 사람이 없어야 하는 곳에 정체불명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고 그만 총을 쏘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이었다. 해리 홀레는 자신의 총격으로 다친 그 사람에게 죄책감을 갖지만 고위 관료들은 그러지 않는다. 더우기 그 사건이 양국 외교에 좋지 않다고 판단, 서둘러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테러 위협에 제대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징계는 커녕 영웅이라면서 승진시킨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이다. 그들 중 아무도 다친 미국의 경호원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해리 홀레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그 일을 아파하고 있는 지도 마찬가지다.


 요 네스뵈는 왜 소설 시작부터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게 바로 노르웨이가 그 전쟁의 기억들을 다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과거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데 방해물로 여기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둘러 덮어버리기에 급급했던 노르웨이. 그러느라 전쟁에 참여한 자들의 영혼에 과연 어떤 상처의 나이테가 깊이 새겨져 있는 지는 보려고 하지도 않는 노르웨이의 모습인 것이다. 더우기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라에 의해 끌려가 입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인 '레드브레스트'는 진홍가슴새를 뜻한다. 왜 하필이면 이 새일까? 그건 이 새야말로 노르웨이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표지를 넘기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리고 우리들에겐 '닐스의 모험'으로 유명한) 셀마 라게르뢰프의 '진홍가슴새의 비밀' 한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것이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라는 표상을 가져온 원천일 것이다. 이것은 동화다. 세상 모든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진홍가슴새를 만든 하나님은 '진홍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조될 당시 진홍가슴새에겐 원래 가슴의 붉은 반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자기 이름을 하필이면 진홍가슴새라 지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은 장본인인 하나님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네가 진정한 사랑을 베풀면 네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가지게 될거야."라고. 그리고 세월은 흘러 진홍가슴새는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었던 예수였다. 진홍가슴새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그 때문에 가슴이 아팠는데 뭔가 고통을 덜어줄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찾다가 머리에 쓴 가시관의 가시라도 뽑아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리로 가시를 뽑았는데 촘촘히 돋아난 가시들이 그런 진홍가슴새를 가만 내버려둘리 없었다. 몸 여기저기가 찔리고 가슴엔 빨간 핏물이 들었다. 그 때 예수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그토록 너희가 갈구했으나 얻지못했던 것을 이제야 얻어냈구나!"라고.

 

  이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뭔가 하려는 것이야말로 바로 참사랑임을 말해주는 동화이지만 물론 요 네스뵈가 그런 의미로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조용한 나라'처럼 그에게 의미란 늘 보여지는 그대로는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요 네스뵈가 이 새를 가져온 것은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노르웨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진홍가슴새와 똑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라는 그야말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는 가시와도 같은 그것을 뽑아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뽑아내고 지우려하더라도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가슴의 붉은 자국만 더욱 선명하게 만들 뿐이다. 요 네스뵈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진홍가슴새를 가져온 것이다. 아무리 망각을 위해 삼켜도 소화되지 않으며 오히려 내부의 상처가 되어 결국은 바깥에 자신을 드러내고야마는 기억임을 말하기 위하여. 때문에 노르웨이는 망각하려고 하기 보다 오히려 지워진 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과거와의 진정한 대면. 


 이것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레드브레스트'를 통하여 하고자 하는 말이다. 이 책은 부득불 오명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참전이 정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거울에 제 모습을 온전히 비추듯 투명한 대면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의 청산이란 언제나 '오컴의 면도날'처럼 부끄럽다고, 실수라고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잘라내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아무리 치욕스런 과거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투명하게 대면할 때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즉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에 대한 통렬한 자기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레드브레스트'는 바로 그것을 하려는 소설이다 그 통렬한 자기 성찰을 위하여 지워진 자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소설, 그것이 바로 '레드브레스트'다. 것이다. 껴안고 뒹굴어야 하는 것이 설사 진창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소설은 계몽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 그러면 선동일 뿐이다. 문학은 독자의 귀가 아니라 머리에 그리고 마음에 더욱 의지해야 한다. 독자 스스로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헤아리고 거기에 대해 또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꺼이 지은이와의 대화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러므로 요 네스뵈도 그렇게 한다. 대놓고 말하기 보단 하나의 반면 교사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만일 그 과거를 진정으로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통해 원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거꾸로 부각시킨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의문은 여기에 이른다. '진정 껴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 네스뵈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하다. '다중인격자'가 되어버린다.  

 

 소설은 처음부터 '다중인격'이라는 말이 나온다. 경호해야하는 미국 대통령을 두고 말할 때부터 말이다. 사실 이 소설은 그아먈로 '다중인격적 상황'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리 홀레의 용의선 상에 오른 노르웨이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나치주의자들도 그렇고 지금은 스포일러상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해리 홀레의 호적수가 되는 인물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외무부의 고위 관료인 브란헤우그가 대표적이다.그는 말하는 입과 하는 행동이 정말 다른 인물이다. 입으로는 나라의 국익이 어쩌고 하고 있지만 사실 그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욕망뿐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써야 할 권한을 오로지 자기 욕망의 관철을 위하여 쓴다. 그리하여 나랏일을 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은 그대로 사적 정사를 위한 공간이 되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한 것처럼 해리 홀레가 자신의 연적이 될 가능성이 높자 임무를 핑계로 나라 변두리로 쫓아버리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표리부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요 네스뵈는 소설의 소제목으로 우리아와 밧세바까지 달아서 이를 강조한다. 다윗의 표리부동함을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의 인물들이 바로 우리아와 밧세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해리 홀레가 활동하는 노르웨이는 도처에 겉 모습과 속 마음이 다른 '다중인격'적 존재가 넘쳐난다.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두고 '조용한 사회' 운운하며 사실은 비아냥거렸던 것도 바로 이런 사실의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노르웨이가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 무작정 지우거나 억압한 결과인 것이다. '레브브레스트'가 그리고 있는 현재 노르웨이의 모습은 바로 그 본질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해리 홀레가 분투 끝에 헤쳐나가는 길이야 말로 요 네스뵈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르웨이로 가기 위한 경로임을. '레드브레스트'는 숨겨진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골몰하지 않고 언제든 타자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다.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늘 바깥의 동정을 살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내려놓는 것, 칸트가 말했던 대로 늘 자신의 자아를 공백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요 네스뵈가 쥐어주고 싶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다. 그래서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한 곳에 있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방을, 경계 위를 헤매이게 만든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에게서 지도를 빼앗아 버린다. 정해진 통념과 규칙대로 바라보게 할 뿐인 지도없이 방랑하게 만들어 있는 그대로의 풍경과 시간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랑에서 오는 그 많은 해리 홀레의 상처와 고통은 이른바 성장통이다. 데미안에서 말했던 그대로 아브락서스가 세계로 나오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는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듯이. 하지만 해리 홀레의 길은 그 혼자만의 길이 아니다. 미국의 영문학자 노스럽 프라이는 소설의 인물이 인간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지은이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관념을 육화한 인물과도 같을 때, 단적으로 '아나토미'로 일컬었다. 그런 면에서 '레드브레스트'도 '아나토미'라 할 수 있다. 요 네스뵈가 현재 노르웨이에게 바라는 길을 해리 홀레의 여정에 짐지우고 있으니. 그렇게 해리 홀레는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노르웨이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 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 자국을 길게 남기며...


'레드브레스트'는 이런 소설이다. 당신을 순례자로 만드는 소설. 아니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 하지만 겨울은 순례에 어울리는 계절이 아니다. 겨울의 체온은 육체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오히려 생각이란 육체가 고립되면 고립 될 수록 더욱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치기 마련이다. 한나 아렌트가 평생토록 하고자 했던 것. 그것은 육체의 몸짓만큼 사유의 몸짓 역시 의미 있고 우리에게 가치 있는 행위라는 걸 일깨우는 것이었다. 난 그걸 믿는다. 몸의 걸음만큼 마음의 걸음 역시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계절에 보다 의미 있는 순례로 이끌어줄 이 책을 권한다. 정녕 뿌리치지 말아야 할 손길이라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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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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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냥 지겨운 것 같다. 쓰면서도 지금 이걸 내가 왜 쓰고 있나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것 같다. 얼른 최후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소설 왠지 그렇다.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린다. 건드려야 할 때 미처 예기치 못한 통증이 있을지도 몰라 두려운 것처럼 머뭇거린다. 어두운 골목에서 사나운 불량배를 맞닥뜨린 아이와도 같이 도망칠 재간은 없고 그냥 눈 딱 감고 얼른 그들이 딴 데로 가버리기를 바라는 형국이다. 무덤덤한 관찰자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학이다. 그는 그를 쓸모없다고 여기고 싶어서, 무력한 존재라고 여기고 싶어서, 아무 것도 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한다고 여기고 싶어서 관찰자인 척한다. 이 소설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산책은 그러한 자학의 여정이다.('혀 끝의 남자' 단편은 인도 여행을 다루지만 다른 단편의 산책 묘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결국 여행도 그에게 장거리 산책에 불과하다.) 백민석. 나는 그를 모른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듣자니 원래는 작품이 꽤나 폭력적이었던 모양이다. 뒤에 실린 해설에서 인용한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폭력은 생활의 분노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산 그는 분노했었고 폭력은 그 표현이었다. 주먹은 세계라는 바깥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는 맞기 위해 걷는다. 무너지기 위해 본다. 소진하기 위해 말한다.


 이런 느낌? (그림은 독일 출신으로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는 MODERAT의 데뷔 앨범 커버)


 나는 혀 끝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머리에 불을 이고 혀 끝을 걷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혀에서 불꽃이 일었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단내가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혀 끝의 남자' 시작 부분)


 이게 그다. 난 그렇게 느낀다. 자살할 장소를 찾는 여행자의 소설이라고... 죽기 위해 걷는다. 머리 위의 불꽃이 자신을 모조리 삼켜버릴 때까지 걷는다. 머리 위로 활활 불꽃이 타오르는 자에게 바라보는 풍경이, 만나는 사람이 무게를 갖기란, 자신의 관심을 끄는 인력을 갖기란 힘들다. 사람은 그저 남자와 여자로만 나뉠 뿐, 익명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행동 역시도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사건도 공간도 다 그렇다. 그저 열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보는 속도를 더한다. 말의 속도를 올린다. 서 있는 곳의 삶이라는 중력이 자신을 사로잡기 전에 서둘러 벗어난다. 그 곳의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불타오르면서 현존하는 고통은 무의미의 자각이며 그 어디서도 기꺼이 책임으로써 삶을 짊어지기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다. 한 발 더 내디디면 한 뼘 더 아플 뿐이다. 내내 그것의 확인만 이어진다.


 무의미, 무의미, 무의미...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내 표정은 아직도 기본형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 삶과 세계의 많은 것들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P. 229) 


 한 때는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다. '폭력의 기원'에 나왔던 작은 절곳과 같은 곳이. 순수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때가.

 하지만 이제 그런 곳은 사라졌고 더이상 갈 수도 없다. 그는 미로에 빠져 버렸다. 방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곳곳에 우회로를 강요하는 바리케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폭력의 기원' 단편에서처럼 누군가에게 속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혹은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처럼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엔 뚜쟁이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 자체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있는 이 곳이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연옥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그런 세계에서 쓰는 글이란 일기와 다를 바 없다고...


 우리는 더 이상 행동이 가능하지 않을 때 일기장을 펼친다. 그래서 나도, 심각한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하고 우선 일기를 쓰기로 했다.('연옥 일기' P.84)


 다른 이들이 그러듯이 여기의 소설들이 자전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면 애초부터 그가 일기로 작정하고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이런 시대의 문학이란 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지금 돌이켜보니,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묘사도 충분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도 충분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충분치 않다. 세계가, 대상이 충분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 재현이 충분할 수가 있을까? ('연옥일기' P. 85)


 이러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하든 자기가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이상을 하기란 어렵고 일기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에 대해 끝까지 파고 들어가 아는 척 하는 것 혹은 있을 성 싶지도 않을 여인과의 깊은 교제 같은 것 따위를. 독자들이 혹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지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지도,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이루거나 인과관계를 정확히 설정하거나 하는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에서 있을 법 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고 결국 누군가가 쓴 여행 가이드 대로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셋 다 동일한 저자의 여행 가이드 북을 챙겨왔고 그동안 여행 경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한국인에게 알려진 숙소며 관광지도 한정돼 있으니('혀 끝의 남자' P. 19)


 이건 그동안 주로 독서를 통해서 세계를 해석해 온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한 여자는 여행지의 실제 사정이 가이드 북과 전혀 다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역시 세상이 텍스트 대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로 그것이 '연옥 일기'에서 재현의 불충분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그 같은 한계로 인해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의 마지막 문장처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시작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다 안다는 듯이 주제 넘게는 하지 말고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이 소박한 정도로만...


 아마도 그렇게 이건 스스로 의미라는 걸 만들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혀 끝의 남자'에서 신들의 나라 인도에서도 찾지 못했던 신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에서 찾는 것도 그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재현이 불충분할 수 밖에 없는 연옥과도 같은 이 곳에서 산책과도 같은 '쓰기'란 쓰면 쓸수록 모자람만 각인시키는 고통의 여정이지만, 그래서 쓰기 싫고, 들어가기 보단 빠져 나오려고 하고, 머무르기 보단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발끈을 다시 매고 있다.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좀 더 지켜보고 싶다.




 소설을 읽을 때 많이 생각났던 뮤직 비디오다. 존 홉킨스의 'OPEN EYE SIGNAL'이란 곡인데 폭력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내내 보드를 타고 자신의 여정을 계속하는 뮤비의 느낌이 이 소설과 많이 비슷해 보였다. 처음 리뷰 쓸 때는 생각 안나더니 주말 아침에 갑자기 생각났다. 사람의 기억력은 때로 참 이상하게 작동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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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세상이 다른데 글은 써서 뭐 하나 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어진 것인지, 이제부터는 큰 뜻보다는 작은 뜻을 위해서 쓰자인지...
자신이 깨닫기 위해서일지도...

현실과 달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