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 김민정 산문
김민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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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도 몰랐고, 어떤 책인지도 몰랐다. 난 제목에 끌렸다. '각설하고,'
이건 어떤 무모함이다.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든지 간에 자기 할말은 하겠다는 선언. 하지만 그 무모함이 오만해 보이지 않는 건, 오리무중 속에서 자꾸만 불어나는 말의 지방들을 깔끔하게 빼버리고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하자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각설하고'는 내 속내를 이야기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이전의 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우승자를 발표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우리는 더욱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말이 자꾸만 인플레이션 되는 시대에 '각설하고'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너무 과잉의 말들이 넘쳐나 우리를 홀리려들고 헛갈리게 만들며 길을 잃도록 하니까. 진짜 할 말을 하고 진짜 들어야 할 말만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진짜 진심보다 몇 배의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고 또 들어야 한다. 사는 건 단 하나의 진심을 말하거나 듣기 위해 긴 거짓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니까.

그런 말들의 환영 속에 둘러싸이다 보면 어느 순간 '각설하고'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나오는 속내를, 진심을.

 지은이는 시인이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자. 돈이 안되는 시집들을 기획해서 마케팅 담당자로부터 지청구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인들의 삶이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들은 내게 천연기념물처럼 보였다. 곧 도래할 종말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존재들. 어쩌면 누구보다 지금 세월의 무게가 무거울 그들이 두 어깨로 어떻게 현실을 떠받치고 살아가는가 궁금했다. 하여 읽었다.

 그런 시인의 산문 모음이라 했다. 어디 어디 지면에 발표한 짧은 글들. 많아봐야 3페이지 안에 다 들어가는 말들. 짧은 대화를 나누듯 읽으면 되니 부담은 병아리 눈꼽만큼. 받자마자 간을 보듯 읽었는데 이런! 그만둘 수 없었다. 역시 시인의 문장이구나 감탄사가 무심코 나왔다. 말들이 빗물에 새로이 목욕을 한 조약들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손 안에 넣고 쥐면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말들. 거기에 취해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이 책은 내 시간을 예기치도 않게 홀라당 먹어버렸다.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면 이 책은 시간도둑이라 할 만해, 아무렴. 때로는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깨달음도 뭔가 삶에 써먹을만한 지식 같은 것도 주지 않지만(아니, 있었을지도?) 나와 비슷한 것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이렇게나 맑은 언어로 길어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좋게 읽고 가볍게 권할 수도 있는 책이다.
 각설하고, 지인의 곁에 살짝 놔둬 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책임은 못짐, AS도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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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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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리처드 도킨스와 더불어 대표적 무신론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스완송', 그러니까 그가 세상에 가장 마지막으로 내놓은 유작이다. 2011년 12월 15일, 그는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렇게 떠나기까지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슨을 수식하는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것들이 특히 대표적이다. 논쟁가, 독설가, 무신론자. 그는 40년간 수많은 칼럼, 에세이, 기사 그리고 책을 썼지만 그래도 이러한 수식어를 갖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단연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일 것이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한 이 책에서 그는 제목 그대로 신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동안 종교가 신의 사랑과 인격성을 설파해온 것에 반발해 사실 신은 지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따라서 이런 신에게 사랑을 바라는 건 자기모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종교가 겁주는 대로 '신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물론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이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정말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고 그를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종교계의 주적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그이니만큼 그의 최후는 아무래도 세인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동안 그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었던 사람들은 이런 최후의 순간에도 과연 그가 신을 안 믿는지 어디 한 번 두고보자 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그걸 신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로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신이 하필이면 바로 그 목에다 암을 생기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에게 용서를 빌고 그에게 구원받을 것을 설득하는 메일들이 잇달아 날아오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까지 생겨난다. 유투브에까지 그런 동영상이 걸린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대답이다. 바로 그런 그들의 냉소와 바람 그리고 기도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신랄한 대답인 것이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라는 그들의 물음에 그는 이런 식으로 기꺼이 대답한 것이다. 몸으로, 삶으로 직접.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를. 이 책은 그 기록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죽음의 재현과도 같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는 죽음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보겠다며 끝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음이 찾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이와 같다. 끝까지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한다. 인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동정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신랄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리얼리티 쇼처럼. 신 없이 죽어가는 과정을.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ORTALITY'다. 죽음을 뜻하는 허다한 말들 중에서 이 말은 특히나 '필멸', '반드시 죽음', 이렇게  '피할 수 없음'을 강조 하고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이 궤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히친스도 그랬다. 그는 2010년 6월 8일, 자신의 새책을 위한 홍보 여행을 시작한 첫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으로 가는 여정의 티켓을 받았다. 


 살면서 자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뜬 적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내 '시체'에 족쇄로 묶여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의식을 되찾은 6월의 어느 이른 아침은 그런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슴과 흉곽 전체를 텅 비워버린 다음 서서히 굳는 시멘트를 채워넣은 것 같았다.(p. 19)


 당연히 그 역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미래가 말살되어 버리는 순간 앞에서 아무리 히친스라 하더라도 냉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결국 어차피 도래할 죽음. 그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울분들이 무엇인지 잘 안다.


 다음 10년 동안 할 일들을 진지하게 계획해두고,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계획한 일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로 살아서 아이들의 결혼식을 볼 수 없을까? 세계무역센터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도 볼 수 없을까? 헨리 키신저나 요세프 라칭거 같은 늙은 악당들의 사망 기사를 쓸 수는 없더라도 읽는 것은 할 수 없을까?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생각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이라는 것을.(p. 24)

 

그리고 이런 냉정함이 찾아온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멍청한 질문에 우주는 아주 귀찮다는 듯 간신히 대답해준다. "안 될 것도 없잖아?"(P. 25)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히친스. 그는 자신이 몸소 겪어야 말을 하는 사람이다. 경험이 바탕되지 않는 말은 섣불리 하지 않는다. 물고문이 가져오는 고통을 말해야할 때 그는 정말 물고문이 얼마나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지 알기 위해 자신에게 실제 그것을 자행하도록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자기가 겪은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을 쓰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 히친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말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기가 신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말했다면 그 삶의 모습마저도 그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기록은 조금의 꾸밈도 없이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써야 한다고.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그렇게 써내려나간 기록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흔히 기대하곤 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암과의 모진 싸움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나가는 영웅적인 면모도, 삶의 끝자락에서 타인과의 유대를 통하여 다시금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식의 읽는 이도 감동으로 치유되는 이야기도,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지?" 식의 토로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히친스는 '왜 심장병이나 신장병도 암처럼 오래도록 사람을 고생하게 만드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투쟁이나 싸움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유독 암에게만 그런 말을 붙여 그 과정을 영웅적인 투쟁으로 보이게 하는지 의문을 표시하며 '잘 지냈어요? '어떻게 괜찮아요?' 같은 환자들에게 의례히 묻곤 하는, 설령 뭔가 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건네는 말이라 할지라도 고문과도 같은 과잉 배려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런 친절은 바로 코 앞에 닥친 막막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잊게 하려는 마음일 것이나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죽음이라면 차라리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고 솔직하게 지금 현존하는 고통이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죽음이 언젠가는 도래하고말 생리적 현상이라면 거기에 대해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더 보태거나 빼지말고 그냥 직시하고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저 충실히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하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엔 종양으로, 그리고 화학치료로 육체가 망가지는 고통은 있어도 거기에 대한 슬픔과 곧 삶을 떠나게 된다는 자각에서 오는 한 같은 것은 없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내세를 위한 기도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저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남은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싶을 뿐이다. 진정 그것 뿐이다. 이 기록 역시도 바로 그 충실을 위한 것이다. 사실은 그럼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 말이다.


 예전에 한 드라마가 암 세포도 생명이라고 제거 수술을 거부한다고 해서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받은 적이 있다. 재밌게도 히친스가 마치 거기에 대해 답변한 것과도 내용이 있었다. 그는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P. 31)'라고 답한다. 


 내가 식도에 생긴 종양을 '감정도 없고 맹목적인 외계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조차도 그것에게 모종의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실수였음은 알고 있다.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의 한 사례인 것이다. 암 덩어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필요하지만 암덩어리는 결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의 악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의 '최선'이 곧 숙주와 함께 죽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숙주는 암 때문에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암을 박멸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P.32)


 암만 특별하게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이렇게 종양에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도래한 상황이나 고통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이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무의미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의미가 있을 것을 원한다. 그래야 그것을 당하고 있는 그 존재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대로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투쟁으로 영웅적으로 만들고 생명체로 만들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맞다. 이 모든, 사실은 무익한 노력의 본질엔 바로 '자기 연민'이 있다. 이대로 허무하게 없어질 자신이 불쌍해죽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이다. 히친스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것이 신에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신에 의지하는 것. 그것 역시도 정말로 신을 믿거나 의지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연민 때문임을 말이다.


 그러니 히친스에게 신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엔 아무런 문제도, 어려움도 없다.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에 걸친 현재 자신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신랄한 묘사도 그리고 어떤 위안과 유대감을 가지려는 병원이나 지인들의 친절에 까칠하게 구는 것도 알고보면 그 때문이다. 언제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도 이 책이 하나의 대답이라고 했지만 히친스가 자신의 삶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무신론자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에 뚜렷한 정답이 없다는 것과 같다. 종교가 특히 그렇지만 정답이란 많은 부분 도그마가 되어 그 진실 여부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없이 사람의 삶을 구속한다. 무신론자는 그렇게 구속 받는 것을, 나아가 그런 구속을 줄 수 있는 것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전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그 삶의 여정을 보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오로지 그들의 몫인 것이다.


  히친스는 이 책의 제목을 'MORTALITY'라고 했다. 이것은 '지금은 내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바로 너의 이야기이다.'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인 것 같다. 필연코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히친스가 '나는 이렇게 살다 가는데 너는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묻는 것 같은 뉘앙스를 이 제목은 풍기고 있다. 그렇게 이 책 자체는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이며 이제 독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역사적 변화를 밝혀 유명해진 필립 아리에스라는 역사가는 근대 이후로 죽음이 점점 개인화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변모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공동묘지가 점점 공동체 사회로 부터 멀어지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도 한다. 그렇게 현재는 체계적으로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삶에서 배제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삶에서의 죽음 추방이 지금처럼 삶을 욕망 추구의 극단적 현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도 한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메멘토 모리'는 중세인들 모두가 뇌리에 새겨둔 격언이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과의 대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현명하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바로 그런 대면이 필요한 것 같다. 모의 장례식 체험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당신을 고해성사를 받듯 죽음과의 대면으로 데려간다. 무엇을 얻게 될 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끄는 대로 한 번 걸음을 내맡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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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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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어떻게 이 리뷰를 읽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어릴 때 보았던 로봇 애니메이션을 얼른 연상시키는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라는 제목이 호기심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 어떤 책일까 궁금했겠지만 리뷰까지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뷰를 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책에 대한 정보를 더 원해서이고 그건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부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바로 '아르뱅주의'라고 하고 있으니. 이 부제에 눈길이 머물렀다면 최소한 당신 스스로도 지금의 한국 교회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쪽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구태여 그 증거를 여기서 밝힐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비리와 범죄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모습은 허다하게 나올테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세 명의 노예다. 권력의 노예고 자본의 노예이며 욕망의 노예이다. 지도자나 성도들 할 것없이 하는 행태를 볼라치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지옥은 오로지 그들의 입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어둠이 짙어지면 작은 반딧불도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듯, 이렇듯 문제가 심각해지면 고조된 위기감으로 스스로 자정해보려는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구약시대 황무지를 떠돌며 당대의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종말을 선포했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도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일단 '아르뱅주의'라는 뜻모를 말부터 살펴보자. 분명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저자가 만든 말이니까 말이다. 아르뱅주의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합친 말이다. 저자 신광은은 이 두가지를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으로 보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칼뱅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인 그의 제자 존 녹스에 의해 장로교가 되었고 그 장로교는 지금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세력이 큰 교파이니까 말이다. 그럼 아르미니우스는? 나도 아르미니우스는 잘 몰랐는데 뿌리는 칼뱅 신학에 있으나 몇 가지 점에 반발해 나온 사상이라고 한다.  저자가 특별히 이 두 가지를 들고 나온 것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구원론에 있으며 그 문제가 되는 구원론의 중심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예민한 구원론을 건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통속적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들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떠나버렸다. 현대 기독교 대중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희한한 구원론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거짓 위안을 누리고 있다. 둘째, 500년전 종교 개혁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이 있다. 그들은 시대의 아들로서 당시의 역사적 과제와 맞서 위대한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들의 한계를 발견하고, 21세기라는 현 상황과 그들의 신학 사이의 부조화되는 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우리가 종교 개혁가들의 후예라면 미진한 개혁을 온전히 하는 데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p. 104~ 105)


 이러한 동기와 문제의식으로 그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천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뱅 교리를 다루고 있는 2부와 아르미니우스 교리를 다루고 있는 3부가 이 책의 등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대략적으로 소개해 본다면 이렇다.


 사실 막스 베버도 인정했듯이 칼뱅은 현대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낳게 한 장본인으로 그 영향력은 비단 신학에만 그치지 않지만 지금의 주제와 관련해서 말해본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정론'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미리 결정해 놓은 것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칼뱅의 예정론은 선행 결정된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칼뱅이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건 단 하나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만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 칼뱅의 신학은 바로 이것을 반석으로 세워진 사상이었다. 신광은은 칼뱅 교리의 핵심 5가지를 들어 TULIP, 즉 튤립 교리라 말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르미니우스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라면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 스스로 아르미니우스의 주요 문제를 '자유의지 없으면 책임 없다'에서 찾고 있으니.


 그러니까 핵심은 간결하다. 때로는 이렇게 포커스를 좁히는 것이 이해가 보다 더 선명해질 것이다. 지금 '자유의지'가 나왔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쟁을 통해 갈라져 나온 사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가 칼뱅에 대해 공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게 자유의지였다. 왜냐하면 칼뱅은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인정하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선이나 악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 칼뱅에 따르면 다른 자유는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신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으니 어떻게 그 행위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건 모순이다. 이건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해본다면 때문에 칼뱅은 좀 무리를 했다.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은 오직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뿐, 의지까지 하나님이 가로막은 것은 아니라는 둥, 하나님이 인간 의지에 반하여 악을 선택하도록 외압을 가하지는 않는다라는 둥 하고 말이다. 예외가 늘어나고 변명이 붙는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설득력을 잃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로 그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순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스켈레톤 키'가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의 핵심이다. 그들의 모든 주장은 바로 이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책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을 칼뱅과 똑같이 다섯 개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칼뱅주의 


 자연적 무능력                                                                   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무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조건적 견인                                                                      성도의 견인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얼른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안된다면 괜히 말만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은 저 말의 뜻에 대하여 저자가 설명한 것을 읽어봐도 얼른 이해 안 가기도 한다.(내가 신학적 용어에 과문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연적 무능력의 경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능력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자연적 무능력'을 따로 항목으로 하여 설명하는 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은 인간 자신의 행위'라고 말하여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나온 용어인지 알송달송하다.


 그 외에는 이해하기에 별로 어려울 게 없는 듯 하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보면 모두 그로부터 나오는 뻔한 결론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으니.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이상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축소될 것이기에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 선택이 될 수 밖에 없고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이상 속죄의 가능성 역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반항의 자유가 인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적인 끌어당김만 가능한 칼뱅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인간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니 '성화'가 강조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자, 이렇게 2부와 3부에 걸쳐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설명한 다음 본격적인 저자의 할말은 비로소 4부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 교회를 망친 주범인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해부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뱅주의' 역시 그 핵심을 다섯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

 

 1) 타락에 대해 : 전적인 - 전적이지 않은 전적 타락

 2) 선택에 대해 : 조건적 - 무조건적 선택

 3) 속죄에 대해 : 보편 속죄

 4) 은혜에 대해 : 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견인에 대해 : 성도의 견인(완전한 견인)


 이상인데 1)과 2)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혼합했고, 3)과 4)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이며 5)는 칼뱅의 것이다. 한국 교회의 구원론은 이렇게 혼합되어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여기엔 어떤 원칙도 없다고 한다. 그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와 썼을 뿐. 그래서 그는 싸구려 구원론이라 부른다. 저자가 아르뱅주의를 '싸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그 무원칙성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더 커다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아르뱅주의가 교인 스스로 윤리적으로 살려는(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노력을 방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교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경우, 즉 '교인의 위선적인 삶에 실망할 때나, 목회자들이 전혀 본이 되지 않음을 발견할 때 혹은 교회가 윤리적으로 파탄 났을 때 아르뱅주의자들은 신자의 전적인 타락설로 이를 변명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죄인이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악한 걸 어쩌겠어!"(P. 227) 등으로. 그렇게 스스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다. 또한 무조건적 선택은 죄를 저지른 이들을 쉽게 용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아르뱅주의의 특성이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목사로 되게 만든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교회의 지도자가 계속 버젓이 그 교회의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고 말이다. 회개하는 척만 해도 모든 게 다 손쉽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용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마저도 쉽게 만든다. 이게 바로 보편 속죄가 가진 달콤한 독약이다. 그저 '믿음'의 고백만으로 구원 받게 하여 교인 스스로 구원을 위한 노력에 힘쓰지 못하게 만들고 더구나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단순화마저 낳아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이쯤되면 저자가 왜 아르뱅주의를 이토록 문제삼는지 그 진짜 이유가 조금쯤은 내다보일 것 같다. 바로 교회와 성도 모두를 어항 속의 물고기로 만들기 때문임이 말이다.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고 자신들이 아무리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해도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어항과도 같은 그 갇힌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평안히 유영하기만 하는 영혼이 죽어버린 좀비로.


 그렇게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현실 참여의 노력을 뱀파이어처럼 현재의 아르뱅주의가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아르뱅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구원론이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5부와 6부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정지(整地)작업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사실 좀 멀리까지 나아가는데, 무려 지금 신학의 주춧돌이 되었을 그리스 철학까지 공격한다. 특히 실체를 상정하는 존재론과 모든 문장을 명제화시키는 논리론을 공격한다. 그리스 철학은 지금의 신학을 있게 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그리스 철학을 공격한다 함은 지금까지 이어온 신학 전통을 깡그리 비판하는 것이어서 얼른 보기에도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렇게 공격을 감행하는 까닭은 그가 세우려는 새로운 구원관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을 생각하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 철학이 주로 했던 존재와 명제에 대한 집착 탓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유의 전통이 성경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함으로써 그 존재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사유하게 만들고 또 그 모든 문장들을 명제화시켜 그 참과 거짓을 따져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인간의 개입을 염려하고 있다. 되도록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을 것을 바라고 있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아서 여기서 저자가 은근히 다시 칼뱅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비록 그의 문제 의식에는 상당히 동의하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선뜻 동의하지는 못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철학자들의 신'이 절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무한성을 생각하는 건 피할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된다. '헤아림'은 우리에게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와도 같다. '말씀'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한 그 말의 주체에 대해 사유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이 옳고 그름을 검증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무턱대고 믿어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기독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진정 인격신이고 그가 우리들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면 그 존재에 대한 사유와 말이 가진 진리치에 대한 사유는 오히려 필수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이해의 차원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다. 아무런 사유없는 전적인 나의 내맡김을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숭배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숭배했던 게 그 무사유 때문이지 않았던가. 지은이도 이 책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반박할 때 '집단악'을 이야기하면서 아이히만이 자행한 유태인 학살을 예로 들었는데 한나 아렌트 말대로 그 역시도 무사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대로 교회와 신도 모두가 스스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노력을 하는데 있어 어떻게 존재와 말에 대한 사유 없이 그게 가능할까? 인간은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순순히 따르는 기계가 아니다. 특히 윤리적 삶과 관계된 종교라면 인간 스스로 자발적 이해를 통해 그것을 내면화시켰을 때 더욱 지키려 애를 쓸 것이다. 타인이 지켜보든 말든 상관없이. 


 앞서 말했다시피 아르뱅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새로운 구원관에 관해서라면 이 책에서는 정지 작업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구원관의 정확한 모습보다는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할 낡은 구원관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그 구원관들은 영지주의가 정착시킨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천상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구원관이며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고픈 이원론적 구원관이다. 이 모두는 죽음 이후의 구원관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의 노력을 포기하게 만듦으로 그는 바로 이 삶에서 그런 노력을 할 수 있게끔 삶적인 차원에서의 구원관을 새로이 가져온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하지만 여기서의 '나라'는 영토,즉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건 낡은 구원관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었다. 낡은 구원관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을 상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이 삶에서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됨'을 강조한다. 즉 '나라'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편입되는 것이며 그 진정한 뜻은 이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구원이란 내가 어디를 거거나 내 존재의 바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이 삶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내세의 지복을 위해 현실의 삶을 내버려둔다면 그건 구원이 아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가 세우려는 구원관은 바로 이런 것이며 여기서 방점은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서 노력하게 만드는' 곳에다 찍혀야 한다. 이런 구원관에는 나도 동의한다. 진실로 나역시 현실적인 삶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이런 책이다. 감사의 글과 각주를 빼면 모두 490페이지로 다소 두터운 분량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말하는 것에 비해 분량이 좀 많다고 생각된다. 이유를 짐작하자면 저자가 너무 친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설명들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방면에 전혀 경험이 없는 초심자를 위한 배려일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용어들을 좀 알기 쉽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신학에서는 굳어진 용어들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일반인의 눈에 얼른 납득가지 않는 용어들이 다소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복음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사실 한국 교회를 가장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복음주의'일 것이다. '복음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산물이다. '복음주의'는 주로 전도 집회를 통해 퍼졌는데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보편 속죄'와 믿기로 결단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칼뱅이 앞에 나오는 '칼배아르주의'가 되지 않고 '아르뱅주의'가 된 것도(뭐, 확실히 '칼배아르주의'가 어감상으로 영 아니긴 하지만) 이와 관계가 있을 듯 하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복음주의에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왔던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과 개인이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고 그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던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하나님에게 감명받아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교회들에게 복음주의가 바로 성장의 열쇠라는 걸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부터 '제자 훈련'이나 '경배와 찬양'등 전도에 주력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자리잡으면서 교인 모두가 전도에 열을 올리는 '총동원체제'를 낳아 결국 교회가 대형화되는 추세로 이어졌다. 그렇게 밖으로만 밖으로만 열을 올릴 뿐 정작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현실 속 자신의 삶을 신경쓰지 않아 오늘의 한국 교회는 타인들에게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본다면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이렇게 우연히 자리잡게 된 '복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지 책을 덮으며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이다. 여기엔 이 책보다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논의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저 스케치만 이루어진 새로운 구원관이 언젠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그 역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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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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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프루스트는 너무 길다."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한 말이다. 세상에 알려진 소설 가운데 가장 난해한 소설이기도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대로 인생은 읽기에도 짧지만 이해하기에는 더욱 턱없이 짧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쉽게 이해의 물가로 인도하는 책을 찾을 수 밖에 없는데 유예진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 그 중 아주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다른 프루스트 안내서들과 달리 이 책은 독특하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인용했던 작가나 작품을 가지고 작가 프루스트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길잡이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맹렬한 독서가이기도 했던 프루스트의 독서 편력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기도 한데 유예진 작가는 바로 그것을 단서로 프루스트에게 가장 영향력을 미쳤던 1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그들과 프루스트가 주고받았던 영향 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프루스트 안내서보다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프루스트에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책을 좋아하는 이가 틀림없고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책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만큼 관심을 끄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예진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의 어린 시절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그를 독서라는 세계로 인도했던 할머니의 세계를 당대의 여류작가 세비네 부인의 서간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마르셀이 서서히 유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을 라신의 희곡들을 통해 들려준다. 이런 식으로 유예진 작가가 특별히 언급하는 10명의 작가들은 모두 작품 속 주인공 마르셀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미쳤던 자들이었으며 마르셀은 또한 프루스트 자신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실제 프루스트에게도 굉장한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그 10명의 작가들을 차례로 열거해 본다면 앞에서 소개한 2명 외에도, 프랑스 문인이라면 누구가 흠모할 수 밖에 없는 발자크가 있고 어쩌면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가일지도 모를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가 있으며 문체에 있어서 프루스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보바리 부인의 플로베르가 있으며 프루스트에게 작가가 될 소명을 일깨워주고 실제로 잦은 작가들의 모임을 마련해 진정 오늘의 프랑스 문학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공쿠르 형제가 있다.(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인 공쿠르 상의 그 주인공들이다.) 또한 계속 길어지기만 하는 이야기로 프루스트 자신에게 내 작품도 그의 것처럼 미완으로 남는 게 아닐까 불안감을 항상 가지도록 만들었던 말라르메가 있고 소설에만 등장하는 상상의 작가 베르고트의 모델이 된 아나톨 프랑스도 있으며(정작 이 책에는 아나톨 프랑스는 베르고트의 모델 정도로만 소개되어 있고 유예진 작가는 프루스트가 확립했던 작가론의 모델로서 베르고트를 설명하고 있다.)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프루스트를 낳았듯이 그 역시 운명처럼 한 명의 작가를 태어나게 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인 앙드레 지드와 프루스트를 현대적으로 되살렸으며 프루스트에 관해서라면 가장 깊이 있는 해석을 들려주는 롤랑 바르트 역시도 우리는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책은 정말 읽을만한 책이다. 굳이 프루스트에 대해 관심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냥 문학이란 것에만 관심이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책은 꽤나 들을만한 것들을 많이 이야기해 줄 것이다. 프루스트 개인에 대해서든, 소설에 대해서든 아니면 그를 둘러싼 당대의 사회상이나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든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깊이가 있으며 작가와 작품 그리고 프루스트와의 연결지점들을 텍스트와 텍스트로 엮어가는 지점들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문체를 비교하면서 프루스트가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어 갔던 과정에 대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플로베르가 문체를 중시하는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 맥락은 알지 못하였는데 유예진 작가 덕분에 비로소 말끔히 정리된 셈이다.


 여기에 또 하나, 작가를 꿈꾸고 있는 이들이 읽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전에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은 영화의 마니아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첫째는 그냥 영화를 많이 보는 단계

 둘째는 영화에 대해 쓰는 단계

 그리고 마지막이자 영화 마니아의 궁극적 단계는 영화를 직접 만드는 단계라고...


 이 단계는 그러나 오직 영화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냥 많이 읽는 단계고 둘째는 책에 대해서 쓰는 단계며 마지막으로 궁극적 마니아의 단계는 직접 자기 책을 쓰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프루스트가 직접 그 단계를 모두 거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사실을 바로 알게된다. 처음에는 그냥 책이 좋아서 무작정 많이 읽는 열정적인 독서가였는데 좋아하는 작가와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문체를 모방하여 글을 써 보거나 평론을 하는 등 점점 책에 대해 쓰게 되고 결국엔 나름의 문학관, 작가관 그리고 문체관을 정립해 결말은 커녕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무작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자신만의 작품을 써 나갔던 그였으니까. 이제와 하는 말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그 첫 권이 나왔을 때 누구도 이 이야기가 이처럼 아주 길어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인 프루스트조차도 말이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긴 했다. 바로 아나톨 프랑스. 그는 첫 권만 읽고도 '이것은 오래 계속될 이야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단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과연 대가들은 부분만 보고도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가 본인도 정작 보지 못했던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독서에 대한 이야기이자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냥 프루스트에 대한 안내서만이 아니라 꼼꼼하게 읽어보면 문학과 삶의 관계마저 엿보이는 썩 괜찮은 길잡이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해 줄 말은 그저 한 번 읽어보시라는 것 밖에는 없다. 다 읽고나면 뭔가 분명 든든한 느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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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BOOn 2호 - 2014년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편집부 엮음 /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월간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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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혹시나 알고 있는지?
 2014년 1월부터 격월로 'BOON'이란 잡지가 나오고 있다. 폭발음의 'BOOM'이 아니다. 'BOON'이다. 유쾌함을 뜻하는 말로 '문화'의 일본어 음독인 분카에서 '분'이란 발음을 차용한 말이다. 발간한 곳은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즉 이 잡지는 '일본문화전문잡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분'이라는 말처럼 가볍게, 그렇지만 가쉽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일본 문화를 뜯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BOON'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잡지의 창간 소식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예전부터 일본 소설 리뷰 하면서 일본 소설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채널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 나오리라고 기대하기엔 우리나라 출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날이 책을 읽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래도 예전만큼은 관심이 높지 않을 일본 문화에 대해 이렇게 전문적으로 다룬 잡지를 낸다는 건 무리한 도전일 것 같아서였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인데 이번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렇게 마치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 것처럼 떡하니 나와 주었으니까. 더구나 이번 호는 내 눈이 더욱 휘둥그레질만한 아이템이 특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바로 '흔들리는 대지'라는 제목의 특집이다. 분명 루치오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따왔을 제목이지만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3. 11의 여파(AFTERMATH)에 관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은 '흔들리는 대지'였다. 쓰나미가 몰려왔고 원전이 붕괴되었다. 전후 최고의 재난 중 하나였고 게다가 그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무시무시한 방사능이 어디까지 퍼졌고 얼마나 일본을 오염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도 사회라는 국물 안에 있는 건더기와 같다고. 그렇게 그것들이 속해 있는 국물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면 건더기는 아무래도 영향 받기 마련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것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쓰는 일이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것이 남긴 상흔, 아픔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그건 작가의 태도가 아니다. 예전 풀리처 수상작이었던 사진이 논쟁을 일으켰다. 그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던 소녀를 찍은 것이었는데 독수리가 그 소녀가 굶어죽기를 머리 맡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비극성을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처참한 현실을 제대로 포착했다고 풀리처 상까지 수상했지만 결국 작가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기를 치우고 소녀부터 구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난이었다. 그렇게 죽어가는 소녀를 그저 피사체로만 본 작가에게 사람들은 '보도 기자의 사명을 버렸다.' '비인간적이다'라고 비난을 해댔고 결국 그 작가는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작가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라면 3. 11에 대해 어떻게든 자신의 작품에다 반영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3. 11 이후에 나온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을 리뷰할 때면 그런 입장에서 쓰기도 했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난 전공도 아니고 지극히 아는 바도 적었기에 자주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3.11과 그 여파에 대해서 좀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었으면 했었다. 바로 그걸 이 'BOON' 2호에서 본 것이다. 어찌 不亦樂乎, 不亦樂乎 하지 않겠는가! 

 특집은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져 있다. 파트1에는 주로 일본 드라마와 음악 그리고 '레이디코믹'에 나타난 3. 11의 여파를 추적했고 파트2에서는 후쿠오카 도미오카마치를 직접 답사하여 3. 11 이후의 일본 현실이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르포를 비롯 보다 문화 바깥으로 초점의 영역을 확대하여 일본 사회와 과학 그리고 사회 운동 차원에서 3. 11이 남긴 영향들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안과 밖, 모두를 폭넓게 조명해주는 특집이라 하겠다. 특집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읽을만하다. 드라마 '가정부 미타'와 '아마짱'을 가지고 현재 일본이 3. 11에 대처하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주는 이솔아의 글도 좋았고 3. 11 이후 음악에서 나타난 저항 운동을 보여준 임경화의 글도 좋았으며 특이하게도 레이디스 코믹에 집중해서 3. 11의 영향을 밝힌 김효진의 글도 인상깊었다. 특히 김효진의 글을 3. 11이 꽤 세부적인 장르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괴수 고질라를 중심으로 역시나 원자력에 대한 일본이 양가적 입장을 살펴보는 다카하시 도시오의 글은 괴수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그와 연계되어 일본 과학의 입장을 서술한 서동주의 글도 흥미로웠다. 특집은 과연 특집답게 나역시 천착하고 있던 3. 11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다시금 깨닫고 알려주었다. 특집 아이템만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에 들었던 나로서는 지극히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 발견이라면 역시 소설신초와 공동으로 연재하고 있다는 히구치 유스케의 소설 '어항, 그 여름날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이건 가공의 미래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지금 일본의 거센 우익화 경향을 반영하듯 좀 파시즘화된 일본을 그리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 여론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는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일본 우익이 지배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그들은 재일교포가 많이 있다는 생활보호대상자제도를 폐지하고 복지의 사각시대로 갑자기 몰려나게 된 극빈자들을 저임금의 잉여노동력으로 흡수한다. 값싼 저임금 제도가 아무런 저항없이 자리잡게 되고 그리하여 저임금을 찾아 중국으로 몰려갔던 기업들이 일본으로 들어온다. 정말 터무니 없는 임금으로 과중한 노동을 해야하는 이들의 인권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은 제2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소설은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 제목의 어항은 그렇게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적당히 만족하고 살고 있는 일본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묘사인만큼 어쩌면 히구치 유스케는 지금의 일본이야말로 '어항'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있는데 희생이 되고 있는 청년 세대와 그것을 대가로 누리고 있는 노년 세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아직 2회밖에 연재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이야기만으로도 뒷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이외에도 나역시 번역되길 바라지만 결코 불가능할 나카자토 가이잔의 '대보살고개'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좋았고 최근 '침묵의 거리에서'를 발간한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글도 재밌게 읽었다. 알라딘 전자책 MD로 있다는 김재욱은 글에서 정말 만만치 않는 내공을 은근히 드러냈는데 다음엔 또 어떤 절기를 시전할 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무튼 너무나 반가웠던 잡지였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갈증을 좀 해갈한 듯한 기분이었다. 좀 더 여력이 있다면 한 회분의 특집으로만 그치지 말고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가 별도의 책으로도 만들어져 나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도록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3호도 무조건 기대하며 늘 응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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