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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 시간이 흐른다는 게 무정하게 느껴진 적은 또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참사 앞에서 책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래도 인류는 책을 햇불삼아 어두운 시대를 관통해 온 것 같다.

그런 책의 힘을 믿으며 6월에 읽고 싶은 인문 신간을 꼽아본다.


 

 정약용 일대기에 대해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이 책을 지금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다음과 같은 책소개 때문이었다.

  "다산은 자신이 살아가던 세상을 온통 부패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으며 세상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거듭 개탄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엄중한 경고까지 내렸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정약용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정약용이 개탄한 시대를 지금 우리 역시 살고 있다. 그러한 'synchronicity' 때문에 정약용의 평전이 읽고싶어진다. 그러한 개탄과 한없는 분노 속에서 정약용은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의 권익과 자유 확보를 위해 생애를 바쳐야겠다는 굳은 신념을 다졌다.'고 한다. 이왕이면 그 마음까지 닮았으면 좋겠다.



 작년인가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 인간성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 책은 재난 상황 속에 인간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를 추적한 책이었는데 보통의 우리 생각대로라면 그 때 인간들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여지없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지만 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남을 위해 자신의 것과 목숨을 희생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번 '세월호'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 많았던 것처럼. 솔닛에 따르면 모든 재난 상황에서 인간들은 그렇게 행동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릇된 편견이 남게 된 것은 재난 영화에서 흔히 그렇게 묘사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사회 엘리트들이 대중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바랐기 때문이라고.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은 인간 사고와 행동의 근원에 '도덕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독일에선가 심리 실험을 했는데 자신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일수록 인간은 규범을 더욱 잘 따른다고 한다. 위기일 수록 인간은 윤리적이 되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를 이 책은 설명하고 있어 읽어보고 싶어진다.


 내가 알기로 산책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건 어쩌면 중세의 순례라는 집단적 행위가 근대로 들어와 개인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세에는 종교적 구원이 걸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근대에선 철학과 걸음이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칸트는 언제나 같은 시간이면 산보를 하는 유명한 산책자였고 니체도, 루소도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같은 것.) 산책은 근대에 들어와 교양의 필수적인 한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취급을 받았다. 프레데리코 그로의 이 책은 그렇게 근대 철학의 주요한 사유 통로가 되었던 '걷기'를 조망한다.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보들레르'를 통해 지식인의 이상적인 태도로 삼았던 '산책자'와 어떤 접점을 가지는 책 같다. 지은이가 푸코 전문가이기에 더욱 흥미를 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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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5-1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시대든 병들어 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것을 고치려고 해야 좋아질 텐데, 그대로 놔두고 흘러오는 듯합니다 조금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사람은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서로 돕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산책이 발명이군요 그냥 어딘가에 걸어다니는 것과는 다르기는 하겠습니다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생각하기... 지금은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죠 걸으려고 해도 걸을 만한 곳이 없기도 합니다 그때는 짧은 동안 걸은 게 아니고 아주 오래 걷기도 했다는군요


희선
 
역린 1 - 사도세자 이선, 교룡으로 지다
최성현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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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영화 '역린'이 개봉한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복귀한 현빈이 처음으로 택한 작품에다가 '다모'로 유명한 연출가 이재규의 첫 영화 감독작이기도 해서 현재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출연진도 쟁쟁하다.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내관 상책 역은 정재영, 정조를 노리는 살수의 역은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납득이로 유명세를 탄 조정석이(아무래도 '더킹 투하츠'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정조의 숙적인 야심가 정순왕후에는 한지민, 정조의 엄마인 헤경궁 홍씨는 김성령이 맡아 열연한다. 영화는 정조가 즉위한 지 1년이 되는 날인 1777년 7월 28일, 그 '하루'를 담는다. 그 날 밤에 정조는 홀로 책을 읽고 있다가 자객의 침입을 받는다.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로 이를 '정유역변'이라 한다. 들려오는 시사회 평은 그리 좋지 않다.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너무 지나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복잡한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들의 과거를 설명하는 데 너무 치중해 정작 영화의 집중도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원래 원 소스 멀티 유즈로 기획되었던지 원작 소설과 영화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제목은 동일하다. 작가는 최성현. 원작자가 영화 시나리오까지 맡았다.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다했더니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만화 '교무의 원' 스토리 작가였다.



 그래서 약간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 작품도 처음엔 꽤나 독특하면서도 근사한 스토리를 보여주다가 나중에 가서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특색이라면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그러면서도 그 하나 하나를 모두 실감나는 캐릭터로 빚어낸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저마다 다른 과거, 다른 사연 그리고 다른 신념들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기에 그들의 갈등 역시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동시에 약점도 된다. 모든 인물에 다 스포트라이트의 몫을 떼어주려다 보니 말해야 할 사연은 많아지고 관계는 복잡해지며 결국 스토리마저 뒤엉키게 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교무의 원'이 그 비슷한 과정을 밟았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시사회의 평들도 수긍하게 되는 면이 있다.


 그건 어쩌면 두 권에 걸쳐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다 다 담으려다 보니 하게 된 고육지책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이 많아 관계는 복잡하고 또 등장인물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그 사연 또한 설명해야 하기에 스토리에 이것 저것 올려놓은 짐들이 많아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원작을 읽어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교무의원'에서 보여주었던 후반의 혼란스러움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잘 정리되어 있고 나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바이지만 개연성도 잘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튼 지금 나온 것은 1권으로 영화 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정확히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이 소설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 가를 보여준다. 정조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과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를 갖게 되었는 지를 '사도세자'를 통해서 보여주며 조정혁이 맡은 살수는 또 어떻게 해서 살수로 자라난 것인지를 말해주며 또한 정재영이 맡은 내관 상책은 어떻게 내관이 되었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영화에 나오는 과거의 장면들이 바로 이 1권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원작 자체는 재밌다. 사도세자가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뜻과는 달리 소론을 등용하여 진정한 탕평책을 펼치려 하자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의 주된 가지로 삼고 한 편에서는 정유역변의 단초가 되는 살막(암살단)이 형성되어가는 이야기를 접붙이고 있다. 정조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 중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지금까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나 드라마 '이산'이나 '무사 백동수'등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사도세자와 노론의 갈등조차 딱히 새로울 것이 없지만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첨가한 살막의 이야기가 자못 흥미를 돋운다. 원래 무협 스토리 작가라서 그런지 살막 부분의 이야기는 흡사 무협지를 읽는듯한 맛이 있다. 특히 초반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호위 무사 황율과 나중에 살막의 우두머리가 되는 죽장검의 광백이 맞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 연출의 호흡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에 차라리 이 쪽의 분위기와 이야기를 주된 가지로 삼는 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사도세자든, 정조든 그 쪽 중심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이미 많이 들어봤으니까 말이다. 위에서 그렇게 뜨거운 궁중 암투가 벌어질 무렵 정작 밑바닥 민초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것도 좀 색다른 맛이 날 것 같고 의미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내 작은 욕심일 뿐이고 벗하기엔 괜찮다고 보여진다. 그러고 보니 사도세자의 이야기 역시 전혀 새롭지 않은 건 아니다. 일단 늘 영조와 사도세자로 표현되던 것을 그 이름인 이선(사도세자)이나 이금(영조)으로만 계속 부른 것은 참신했고(나름 독자에게 새롭게 들리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아마 2권에서 정조도 내내 '이산'으로 나올 것이다.) 혜경궁 홍씨에 대한 해석도 이채로웠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납득되지 않는 동기라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궁금하다.(잘 납득되지 않는 것은 사도세자 역시 마찬가지다. 운명이 정해졌기에 그런지 인물이 다소 평면적이다. 그가 굳이 아버지와 적대하려는 이유가 개인적으로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좀 세부적인 에피소드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영화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소설이 그것을 명쾌하게 정리해줄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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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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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도토리가 떨어진다.

 아빠는 처음으로 본 태아의 사진이 도토리를 꼭 닮았었지 생각하며

 하나를 줍는다.

 진통을 시작한 아내가 딸을 분만하고 있는 사이에...

 아빠는 그 아이에게 '도토리'란 이름을 주었다.


 아내는 환영했다. 하지만 꼭 하나를 더 낳을 것이니 도토리를 나눠서

 돈코와 구리코로 하자고 했다.

 2년 뒤, 아빠는 다시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서 도토리를 줍는다.


 그렇게 도토리 자매가 되었다.

 아빠 손 안에 가만히 놓여진 두 개의 도토리처럼.



 2010년에 나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도토리 자매'는 이처럼 분리와 결부가 테마인 듯 하다.

태어날 때 땅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분리되는 상황이 있고 그 아빠가 주은 도토리를 주인공이 평생 지니고 있듯이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에게 '결부'되려는 욕망이 있다.


 소설이 진행될 수록 주인공은 러시아 인형처럼 자꾸만 거듭되는 분리의 상황에 놓인다. 처음엔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거둬 준 삼촌 부부와 이모 부부와도 헤어지며 처음엔 계약 비슷하게 돌보게 되었던 친할아버지와도 결국 사별하게 된다. 거기다 같은 도토리 이름을 나눠받았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언니 역시 방안 세계에만 칩거하는 주인공과는 달리 바깥 세상으로만 떠돈다. 그렇게 마치 시소놀이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거듭 분리와 결부 사이를 오고간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느 정도 결부가 되었다 싶으면 분리가 오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오똑이처럼 분리와 결부 사이에서 서서히 균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도토리 자매'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도토리 자매'의 첫 인상은 얼른 2003년에 나왔던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의 첫 단편, '유령의 집'을 많이 연상시킨다. 이런 저런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일단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닮은 꼴은 주인공이 가장 결부되고 싶어하는 대상과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요리'라는 것. '유령의 집'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전골을 애인과 함께 먹었는데, '도토리 자매'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삼계탕'을 언니와 함께 먹는다. 둘 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이다. 양을 덜어줄 여분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결부되려는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 점은 '도토리 자매'의 삼계탕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주인공은 삼계탕 재료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른다. 거기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아이를 본다. 아주 평범한 대화였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인상에 남는다. 오래 지속된 관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평범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인공은 침대 속에서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대화도 이에 못지 않게 평범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제 그녀의 생각은 이런 쪽으로 연상되어 나간다.


 모두들 부모가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도 그리운 마음을 끌어들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로맨스를 추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부모가 그리운 마음도 더 절실해지기 때문이다.(p. 16 ~ 17)


 남녀의 애정을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인공이 치환하는 것은 그 모두가 '함께 있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그 '함께 있음'의 가장 원형이 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녀는 무언가에 이어지고 싶어한다. 누군가 혹은 세계와. 삼계탕은 그 바람의 표현이다. 그건 자신의 삶에 어떤 구심점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위성이 되어 그저 그 궤도를 안정적으로 돌게 되기를 원하는.


 '그리움'은 주인공의 결부되려는 욕망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현재 가장 그리워 하는 대상은  최근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왜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었나 하면 그 때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언니와 더불어 흔히 가장 안정적인 도형이라는 삼각형을 완벽하게 이루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움의 강도는 누렸던 안정감의 강도에 비례한다. 커다란 그리움은 커다란 안정감을 향한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정말 사라졌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멍하게 지냈다.

 아침에 불단에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고 나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바지런한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p. 37~38)


 '우리'라는 표현을 쓴 만큼 주인공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주인공 못지 않게 결부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방식은 다른데 주인공이 그걸 '그리움'으로 나타낸다면 언니는 연애를 통해 나타낸다. 언니는 참 많은 남자를 만난다. 조금은 극단적인 성격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상대가 아니면 결혼하기 싫다고 한다. 그래서 연애는 대부분 초기에 끝난다. 언니 역시 완전한 결부에 대한 허기가 있고 잠깐 동안의 연애를 통해 굶주림을 비워낸다.


 이런 식으로 바나나는 소설에서 우리 역시 가지고 있는 타인 혹은 세계에 결부되려는 욕망의 그 표현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도 모두 다뤄간다. 우리는 결부되려는 욕망을 꼭 진짜 있는 존재로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진짜로 있지 않은, 환영적인 것으로도 드러낸다. 그렇게 주인공의 그리움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한 것이므로 환영적 반면, 언니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진짜로 존재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실재적이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굳이 자매를 가져온 것은 이 같은 방식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매는'도토리 자매'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그 홈페이지로 사연을 보내면 도토리 자매가 답해주는 사이트다. 이 역시 그녀들의 결부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뭔가 도움이 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 수면 아래엔 할아버지의 상실이 남긴 분리의 여백을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외롭고 몸도 둔해져서, 뭐든 상관 없으니까 그 때 일을 떠올리고 싶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발의 주름과 얇아진 피부를 보고 싶고, 오줌 냄새라도 좋으니까 늙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어서, 언니도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다.(p. 44)


 하지만 결부되려는 욕망은 주인공의 과거가 잘 보여주듯이 계속 충족될 수 없다. 상실과 헤어짐은 필연이며 언젠가는 '홀로서기'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갇힌 세계'로 부터 그녀들을 끌어낼 필요가 생긴다. 언니는 한국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를 통해 삶의 균형점을 서서히 찾아간다. 실재의 궤적은 벗어나지 않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에 있을 존재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환영의 궤적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녀의 입자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의 방법으로 균형점을 찾아간다. 그 방법이란 '역전(逆轉)'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그리움은 실재에서 출발하여 환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만나 첫사랑이라는 걸 느꼈지만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했던 아이인 '무기'에 대해서만은 '환영'에서 실재로 나아간다. 어떤 슬픈 꿈을 통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을 희미하게 예감하게 되고 결국 그가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무기와의 재회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는데 이렇게 보자면 요시모토 바나나가 둘 모두에게 그녀들의 가장 바깥의 것으로써, 그렇게 가장 타자적인 것을 삶의 중심추로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의 소설에 있어서 이게 처음은 아니다. '유령의 집'에서도 그랬다. 거기에선 연인이 주인공이었다. 주인공 여자는 고인 물처럼 살아간 반면 남자 친구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여자는 삶을 고수하는 쪽으로, 남자는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다른 색채를 보였다.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방식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도토리 자매들 처럼 균형점을 찾아 가는데 그 가장 계기가 된 것은 남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에 불현듯 출현하는 생전에 그 집에 살았던 노부부의 유령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이 '유령의 집'이다. 그 집에서 어느날 주인공은 그 유령들이 살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일상을 영유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무심함, 초연함이 거기에 있었다. 주인공은 그 관계의 밀도에 감명받는다. 문득 삶에서 조금 힘을 빼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남자 친구를, 자신에게 있어선 변화를 받아들인다. 유령이라는 가장 타자화된 존재를 통해서.

 '도토리 자매'의 주인공도 다르지 않다. 무기를 다시 찾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무기의 장례식 꿈이 그렇다. 더구나 무기 역시 '유령의 집'의 남자 친구 이와쿠라랑 많이 비슷하다. 이는 또한 이 사이에 존재하는 '사우스포인트의 연인'과도 유사하다. '화와이'라는 가장 먼 남쪽에서 부재하는 '유키히코'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아간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 부터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그리고 '도토리 자매'. 이 일련의 소설들은 바나나의 관심이 '자신'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타자'에 있으며 바로 거기에 삶에 복원력을 가져다 주는 '치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삶의 구원은 가장 먼 바다로 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밀려오는 타자의 파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흐물어뜨리며 자신의 영토를 내어주는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말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쾌감과 불쾌감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진다. 집에 틀어박히는 시기가 있고 그다음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시기가 반드시 온다. 그 반복은 파도와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만 보거나 그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도, 절대 싫증 나지 않는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유일한 기쁨이다.(p. 130)


 결국 이렇게 타자를 통하여 삶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이 순간에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삶이란 미래의 결산을 위해 현재는 그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는 적금이 아니라 어느 때의 현재든 그 자체로 다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예금이라 여긴다. 결국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임을 안다면 이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여름을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불안하기 보다는 지금 내게 존재하는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한다. 파도 타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파도 타기에 능숙한 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조언한다. '다가올 파도는 신경쓰지 말고 오직 지금 타고 있는 파도에만 집중하라.'고.


 개인적으로 여기에 약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은 2011년의 3.11이 일어나기 전에 나왔다. 현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충실히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쓸데없이 끼어드는 무분별한 욕망을 자제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있다. 대부분 우리의 불안과 힘겨움은 실제로는 내게 별 필요도 없는, 그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기 위한 양산된 욕망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3. 11 같은, 또 지금의 '세월호' 같은 파국적인 사태 앞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삶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저 이 순간을 소중히하고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 충분함의 범주에 그저 사는 것말고 다른 무언가를 더 집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이 소설의 바나나는 그걸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경험 후의 바나나를 보고 싶다. 그 때까지 여기에 대한 진짜 대화는 미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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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연대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유쾌한 삶의 방식
데루오카 이츠코 지음, 조한소 옮김 / 궁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사회인'이란 말에 나도 얼른 직장인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 나가 제 밥벌이를 스스로 한다는 식으로. 데루오카 이츠코에 따르면 '사회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온 모양이다. 일본인들도 '사회인'을 흔히 '취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랬을 경우 여기엔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이들이 생긴다. 오늘날 취업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청년 실업률이 날마다 오르고 있는 추세다. 그렇다면 비사회인들이 많아진다고 여겨야 할까?


 도대체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그건 아무래도 70년대와 80년대 무렵인 것 같다. 그 때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고도 성장기로 노동력의 수요가 한창 많았던 때다. 최인호의 소설 '바보들의 행진'에서 보듯 그렇게 낭만과 자유를 구가하고도 대학만 졸업하면 얼마든지 취업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누구나 쉽게 직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사회인이란 곧 직장인이란 등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취업은 빙하기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회인이 곧 직장인인 이 두 나라에서 취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엿한 성인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을 당사자 내적으로도 가지고 타인들로부터도 받게 된다. 영화에서 백수들이 불쌍하게 흔히 묘사되는 것도 그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성 평가까지 당하게 되므로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아진 취업문은 청년 세대들에게 더욱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하여 자기 연민과 비하를 가져오고 자신 이외의 일에 무심하게 만들며 정치적으로도 소극적으로 만든다. 날이 갈수록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떨어지고 보수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불안이 만연해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점이 잘못 맞춰져 있다. 젊은 세대들이 취업되지 못한 것 하나로 불안감에 빠져들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은 그 취업되지 못함을 오로지 자기 책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생각의 오류이다. 취업난은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그것은 개인의 능력 여부와 관계가 없다. 앞서 70년대와 80년대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 때는 지금 요구되는 스펙의 10분의 1만으로도(아니 졸업장만 있어도) 취직이 가능했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이 그다지 변수가 되지 않았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취업이 호황일 때 그랬다면 취업난일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분명하다. 사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정부가 구조적으로 이런 취업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아니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 취업하지 못하더라도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사회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말이다.


 도대체 '사회인'이라는 게 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오로지 자본이 만든 규정일 뿐이다. 노동력은 언제나 자본이 요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자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스스로를 '비사회인'으로 비하 한다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엔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란 책으로 첫 선을 보여 모두가 부자와 성장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신자유주의가 흑사병처럼 만연하고 있을 때 진정한 사회의 풍요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일본 경제학자 데루오카 이츠코는 이제 그동안의 편협한 사회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제 우리가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책이다.



 사회인이 된다는 건 취업하는 것과 다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자를 '회사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따로 규정하는 이유는 사회인과 회사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20년 전에 인상 깊에 읽었다는 다나카 미쓰히코의 '원자력 발전 왜 위험한가? 전직 설계기사의 증언'이란 책을 통해 설명한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원전 사태를 일으킨 후쿠시마 원전의 설계 부문에서 일했다. 거기서 그는 우리나라의 원전 비리처럼  원전의 심장부라는 압력 용기에 법규를 초과한 결함을 발견했는데 그건 안전 검사에도 통과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그 문제가 어떻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처리될 수 있었는지 당시 기업의 사고 방식, 국가의 대응, 그 배경에 있는 일본 사회의 습성을 모두 망라하여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의 처사에 대해 말하는 건 함구령이 엄격하게 내려져 있었다. 그는 갈등을 겪었다. 그 결함을 발견하기 전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원전 설계가 지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말한다. '조직의 역학은 사람의 마음을 어떤 특유한 상태로 만든다'고. 그렇게 그는 조직의 원리로 움직였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회라는 더 큰 맥락에 놓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결함을 발견한 후엔 더이상 조직의 일원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 압력용기가 이대로 도쿄 전력의 원전에서 사용되면 장차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대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일원으로써 발언할 것인가? 그것을 두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하여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회사인'은 다나카 미쓰히코의 고백에서 보듯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회사인'은 조직이 규정한 범위 밖에는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이기 때문이다. '회사인'은 지금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오직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느라 사회 전체에 해를 입히기도 한다. 최근 이상호 기자가 연합 뉴스 기자에게 한 욕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연합 뉴스 기자가 구조하기 좋은 정조의 시기에 고작 소수만 수색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며 왜곡, 과장 보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검색 순위 상위에 오르고 네티즌에게 비난을 받자 그 기자도 억울했던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블로그에 방문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라고 뭐 용빼는 재주 있겠습니까? 위에서 시키니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죠.
그 위에 프런트도 결국 사장딱가리, 사장은 대통령 딱가리... 다 그런거잖아요.
그리고 그 정부 뽑아준건 여러분들이구요. 왜 저한테만 그러시는지.
솔직히 여러분을 연합뉴스 기자 시켜줘도 저랑 똑같이 행동할꺼잖아요


 여기서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한 '회사인'의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들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사회 전체의 이익 보다 조직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아니, 조직의 이익을 지켰을 경우에 따라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그래놓고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거, 다들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이런 핑계를 댄다.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차마 입밖에 내기도 힘들 만큼의 어마어마한 학생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조금이라도 그들을 생각했다면 구할 수 있었던 목숨들이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제 목숨만 생각하지 않고 빨리 빠져나가라고 안내 방송만 했더라도, 최소 신고에서 침몰까지 걸린 세시간동안 해경이든 어디든 빨리 구조 헬기와 배만 보내줬더라도, 국민 안전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선언했던 정부가 그 말 그대로 유속이 어떻다는 둥, 책임 소재가 어디라는 둥 핑계를 대지 말고 그냥 총대를 매고 적극적으로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더라면 정말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과 기업의 이익을, 해경은 해경의 이익을, 해수부는 해수부의 이익을, 언딘은 언딘의 이익을, 선거 후보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정부는 정권의 이익만을 앞세웠다. 그들에게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항의는 미개한 짓거리였고 그들의 절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었다. 총리라는 작자 역시 그 부모들이 제발 대화좀 하자고 차창 밖에서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도 잠을 잤으니 말 다했다. 정말 오늘의 비극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협소한 회사인의 시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회사인으로 있으려고 하는 것. 그것 역시도 사회인으로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저 연합 기자의 글에서도 보듯, 잘못된 사회인에 대한 시각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빨리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그건 이런 비극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인'은 어떤 존재인가? 핵심은 연대와 공존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왜 이것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지를 은퇴한 자들의 고백들을 통해 훌륭하게 증명한다.  다음은 그 고백들 중 하나이다.


 너는 아직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곳이 있고 자기 의견에 응답해줄 상대가 있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없어. 그런 게 없다는 허기를 과연 너는 알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응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는 것, 모르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얻는 놀라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 이런 게 아닐까? 그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야. 현역 시절과 달리 혼자가 되고 보니 새삼 그런 욕구르 느껴. 타인고 대화하면서 그 욕구를 채우고 싶어도 요즘 사회는 그걸 민폐로 여기고 차갑게 떠나가버려. 응답해줄 상대가 없으니 나는 고독해질 뿐이야. 이래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p. 51)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이처럼 협소한 조직의 이익을 넘어 전체 사회와의 연대와 공존으로 그 책임마저 적극적으로 떠맡는 진정한 '사회인'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강화된 역량으로 성숙한 시민 사회를 만들어 결국 '좋은 사회'를 이루고 싶어 한다. 그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p. 91)


 좋은 사회란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에서 말했던 진정한 풍요의 나라와 다르지 않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영유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좋은 사회다. 나쁜 사회란 그 반대다. 지금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나쁜 사회라 할 수 있다. 구조에 너무나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결국 모든 걸 부모에게 떠넘기지 않았던가?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부모들에게.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걸 잃게 만들지 않았던가?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한 부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CBS 노컷뉴스 김민재 기자 페이스북에서)


 내가 이번 일 겪으면서 첫번째 느낀게 내가 참 못난 부모였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내가 참 부족한 부모구나. 이 나라에서 사려면 나 정도 부모여서는 안된다, 내 새끼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자식을 지키려면 최소한 해수부 장관은 되야 돼. 무슨 말인지 알죠?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회야 이 사회는.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어 내 자식들한테. 내가 20대 때만해도 이 사회가 이렇다는 걸 알았어. 전두환 정권 잡고 살 때 나도 내놓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회가 썩었다는 거 알았어. 그래서 내가 잘 되어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나름 발버둥쳐서 이렇게 왔는데 근데 지금 이렇게 내 자식 잃고 보니까 나는 못난 부모더라고. 난 능력없는 부모고 자식을 죽인 부모에요. 살리지 못한 부모에요. 이렇게 능력 없는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방송에 떠들어요.

한국정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내가 던진 계란이 그 바위를 더럽히는 그 정도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전 세계에 떠든 거야.


 나쁜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표현대로 하자면 '격차사회'다. 사람들을 의식 면에서도 생활 면에서도 '격차와 차별의 벽'으로 사회적으로 분리해버리는 사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 것 혹은 종북 프레임을 씌우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지금 사회는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격차를 더욱 벌여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격차는 분열을 낳고 적대를 낳는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위치에 있던 구성원이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를 한없이 좁힌다. 타자에 대해 공감과 배려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과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거기에 방해되는 타인들은 모두 방해꾼이나 적으로 간주한다. 결국 격차 사회는 회사인들을 가득 생산한다. 그리하여 종국엔 이렇게 된다.


분열된 사회를 내버려두면 폐해가 생긴다. 분열을 역이용해서 자기 세력의 확대를 꾀하는 권력자가 있고, 합의 보다도 힘으로 억누르는 결정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정치가도 나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하게 체념해 버리거나, 스스로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있을 수 없는 영웅이나 리더십이 나오기를 기다려 전부 맡겨 버린다.(p. 174)


 이런! 이건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해도 별 소용없을거야!'라는 무기력,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는 체념. 나 대신 이 사회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입과 손가락으로만 욕하는 사이, 결국 우리는 오늘의 저 커다란 비극을 부르고 말지 않았던가.


 앞에서 인용한 어머니는 같은 인터뷰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할 수 있으면서도 안하는 것과 못해서 안하는 건 다르잖아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데 물살이 세든, 장비가 부족하든 간에 한명이라도 구조하겠다고 애쓰면 부모 입장에서는 정부가 우리를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피눈물 나도 저 사람들도 귀중한 목숨인데 감사해요. 설사 못 건졌다하더라도 감사하죠.


 근데 걔네들은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역으로 얘기하면 죽을 시간 기다린거죠. 가장 골든타임이라 첫째날 둘째날 다 시간 놓쳐놓고 셋째날부터 뭔가 해보겠다고. 근데 한 거 없다. 액션만 한 것 뿐이지 배 갖고 돌기만 하고. 해경이 첫날도 둘째날도 뭐하겠다고 브리핑했는데..아무 것도 한 게 없어서 학부형들이 찾아가서 보면, 이 사람들 여기서 브리핑한 거 아무것도 안한 거에요. 헬리콥터 15대 뜬다고 했는데 1대 돌고 있고요. 잠수부도 내려간댔는데 물살이 세서 못한대. 4시간 지나서 해야한대. 또 근데 4시간 지나서 한다는 말이 또 못한다는 거에요. 그런 게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날이 지나서 애들 다 죽었어요.


 대한민국 머리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부가 인원이 한 명도 안나오고 있는 거면, 문제가 있다는 걸 다 알죠. 저거 문제가 있다, 290명이 들어가 있는데 구출해내는 사람이 없고 똑같은 방송만 할 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멍청한 국민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물살이 세서, 장비가 어째서. 구조할 수 있는 배 만들어놨다면서요. 실험을 해도 여기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죽일 바에는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다니까 민간구조대들이 이정도면 내려갈 수 있다고 할 때 해경이 못 내려가게했잖아요. 막지라도 않았다면, 살리려고 액션을 취한 거잖아. 그것도 안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미치는 거에요.


 우리 학부형이 미쳐 돌아가는 건 자식이 죽은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것보다도 자식이 죽어가는데 구조하겟다는 의지 아무 것도 없이 방송에서만 열심히 구조하고 있다고 거짓보도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모들은 피가 말라가는데 잠수부들 들어갔다 몇 번 하고 다시 오고 들어갔다 몇 번 하고 3일 4일, 그렇게 해놓고 방송에는 헬기 열다섯대 띄우고 물살이 세서 못 들어가고 계속 그렇게 방송했어요.


 우리 친척 중에 같이 있던 사람이 집에 가더니 전화 와서 하는 얘기가 "진정해라. 잘하고 있으니 믿고 가라"는 거에요. 잠깐 보고 간 사람이 텔레비전 보고 마음이 바뀌어서 그러는데. 결론은 같더라도 액션을 취해졌으면 안 돈다 이거에요. 미국 군함이 도와준다는데 안해도돼, 그런데 네이버에는 와서 있다고 뜨고. 뭐하자는 거냐고. 니 자식이 이렇게 들어가도 이럴 거냐고. 내가 못난 부모니까 내 자식 죽인 거라니까. 자식 낳지 말라니까.


 인터넷으로 유명한 나라고, 3, 40대 똑똑한 인재가 많은데 그 사람들 앉아서 뭐하냐니까? 그 사람 앉아서 쓸데없이 수다 떨고 있어요? 이 상황 알면 분연히 일어나야지. 그 사람들 50대 되면 나하고 똑같은 상황 겪을 텐데.


 내가 30대 때 삼풍백화점 무너졌어요. 그 때 사연을 보고 제가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나 울었어요.


 그런데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더라고. 같이 슬퍼해준 것 밖에. 10년 간격으로 대형 사고 나는 나라에서 구조적인 일에 내가 봉사를 했다든지, 데모를 했다든지 뭔가 해놨으면 이런 비극이 안 일어났을텐데 내가 그저 슬퍼만 하고 울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일 겪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결혼해야하는 그 분들, 자식들 낳을 거 아니에요? 지금 나처럼 슬퍼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 내 나이 됐을 때 똑같은 일 겪을 거라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놓고, 개선 안할 거면 결혼하지 말고 자식 낳을 생각이면 해수부 장관이 되든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 액션을 취하려고 해야지 같이 슬퍼하는 거 이제 바라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거 바라지 않아요. 동정 바라지 않아. 내가 왜 동정받을 사람입니까? 나 동정 필요없어요. 당신들 할 일은 분연히 일어나서 지금 이 상황 같이 분노해주고 바뀔 수 있도록 행동을 해주는 거에요. 그거 아니면 울어주지 말라고.


 리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꼭 기억해두기 위해 여기 인용해둔다.

 결국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건, 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안이하게 의존해버리는 '위임사회'가 비참한 사고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회적 참사를 부를 것임을 가르쳐주었다.(P. 92)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사회에 위임해버리지 않았던가? 당장 내 일에 관계없다고, 내 이익이랑 무관하다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내버려두지 않았던가? 귀찮다는 이유로 또는 불이익이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방관은 씨랜드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듯이 내내 커다란 비극의 반복만 부를 뿐이다. 내 일, 내 비극으로 여기고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만이 우리를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안전하고 좋은 사회에 살고 싶은가? 진실로 그건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개척하고 개간해야만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적극적인 참여만이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는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 실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P.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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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활용 분리수거 날에...


 "아, 싫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왜 재활용 분리수거 일이 평일인건지?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직장인은 어쩌라는 거야?"

 2주일 동안 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양 팔로 힘겹게 받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타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따라 사람 정말 없네.'

 몇 년 동안 여기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정이라지만 늘 몇 사람은 타곤 했는데. 우연히 서로 마주보게 되면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있다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어색한 미소도 짓곤 했는데.

 상황이 낯설어서 그런 걸까? 왜 이리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방이 기분 나쁘게 조용했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타면서 마치 커다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얼핏 들었던 것도 생각났다.

 '나-원, 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보 같기는.'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만 스멀스멀 몰려드는 불쾌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괜한 생각이다. 괜한 생각.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 뿐이야.'


 그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워낙 그런 기분에 절어있었기 때문인지 어쩐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 타면 이런 불쾌한 기분도 더 이상 생기지 않겠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지금이 몇 층인가 올려다보았다.

전광판의 숫자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왜 하필이면 4층인 건데? 기분 나쁘게'

기분 탓일까? '4'의 빨간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새빨갛게 보였다. 마치 피처럼. 잔뜩 불길하게...

 '하하, 잘 한다. 네가 무슨 공포 영화 주인공이냐? 이 따위 생각이나 하고?'

 사는 게 심심했었나? 그래서 내가 오늘은 바보짓을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자꾸만 그런 생각에 빠지는 내가 한심했다.

 어쨌든, 누가 타면 다 끝날 일이다.

나는 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 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그 고마운 사람은 섬뜩한 느낌만 더욱 안겨줄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를 보자마자 나는 절로 뒷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검은 색 모자에 검은 색 군용 외투. 검은 색 바지에 검은 색 군화. 더구나 모자챙마저 깊숙이 내려와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바깥의 어둠이 뭉청 떨어져 나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온 듯했다.

 들어온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양 쪽으로 웬만한 성인 남자 하나는 홀랑 들어갈 커다란 비닐 부대도 질질 끌고 왔다. 모두 가득 들어 있는 듯 터질 듯이 팽팽했다.

 '뭐야, 이거? 꼭 시체가 들어있을 것 같은 분위긴데?'

 벽에 달라붙듯 뒷걸음질 친 나를 그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들어와서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기껏 들어온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등에서 어쩐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난 그저 엘리베이터가 빨리 1층에 도착하기만 바랐다.


 '띵!'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런데 전광판엔 지하 1층으로 나와 있었다.

수년 간 살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까지 내려간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 생긴 건가?'

 탈 때, 나는 무심히 맨 아래의 층 버튼을 눌렀을 뿐, 그것이 1층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이 생긴 것이라면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앞에 서 있는 불길한 남자는 자연스럽게 커다란 비닐 부대를 양 쪽으로 질질 끌며 내리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 1층이 생기고 재활용 수거 장소도 그 쪽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장소야 어찌되었든 그저 얼른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에 들리는 소리라곤 그의 군홧발 소리와 질질 끌리는 비닐 부대의 소리뿐이었다. 괴이하고 불길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자 바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는가? 오늘도 가득하군."

 남자가 모퉁이를 돈 위치보다 좀 더 멀리서 들려왔기에 아무래도 딴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인사를 거두절미하고 냅다 말하는 것을 보면 둘은 잘 아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늘 그렇지 뭐. 일정 조정 좀 안 돼? 늘 이렇게 가득 나오는데 하루에 한 번이라니. 적어도 네 다섯 번은 되어야지. 이쪽은 정말 곤란하단 말이야."

 앞서 간 남자의 목소리였다. 풍기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일상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괜히 쫄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걸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 같은 말단에게 말하면 뭐해? 윗대가리들에게 말해야지."

 "내가 몰라서 이러겠어? 그냥 푸념하는 거지 뭐.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문제야. 현장의 어려움을 조금도 모르거든. 그러고는 맨 날 예산 타령, 효율 타령이지. 젠장!"

 그러고는 뭔가 가득 쏟아내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분명 앞서 걸었던 남자가 비닐 부대에 든 것을 버리는 것이리라.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와서 난 더욱 안심하고 모퉁이를 돌았다. 멀리서 둘의 모습이 보였다. 다 버린 비닐 부대를 툭툭 털고 있는 남자 뒤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예의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복장은 달랐다. 뒤늦게 나타난 남자는 꼭 아파트 경비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닐 부대를 든 남자 앞에 재활용 수거를 위한 자루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은 될 것 같은 아주 크고 넓은 자루들이었다. 요즘 재활용 쓰레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나? 어쨌든 분위기가 좀 음산한 것을 빼면 늘 가던 재활용 수거장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에이, 괜히. 그냥 바뀐 거였네.'

 그동안의 내 모습을 잔뜩 한심스러워 하면서 난 태연하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인기척이 났는지 두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비닐 부대를 든 남자와는 달리 경비원 복장의 남자는 얼굴이 보였는데 분명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어떻게 여길 왔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소리쳤다.

상황의 갑작스런 돌변에 난 좀 당황했다. 그러다 내가 이 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거구나 짐작했다. 하긴 나 역시 그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일을 맡은 경비원인 듯했다. 이참에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몇 호에 사는 누구라고 대답했다.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 그랬군."

 하고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만 얼굴 뿐.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는 목소리였다.

 "그런 건가? 드디어 받아들여진 건가?"

 뒤이어 들려온 경비원의 목소리도 그랬다. 뭔가 납득하고, 또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축하해. 이제 못 보게 되겠군."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경비원 복장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내가 없더라도 잘 지내라고."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지? 너무나 뜻밖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지라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실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우리끼리 축하해서 미안하군.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겠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날 돌아다보며 말했다.

 "재활용 수거하는 곳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재활용 쓰레기는 아닐 거야. 직접 보겠어?"

 "이 봐, 그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사전 예고 없이 보여주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말투엔 날 걱정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건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성큼 옆으로 물러난 태도에 있어서도 한껏 드러나고 있었다.

 난 재활용 수거 봉투에 눈길을 돌려 안에 수북이 쌓여진 것을 들여다보았다.


 "우욱!"

 손으로 입을 막고 구토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가득 쌓인 사람 머리였다. 머리만이 레고 조각처럼 자루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욕지기가 한없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본능적으로 다른 자루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오른쪽 자루엔 사람 팔이 가득 들어 있었다. 왼쪽 자루에는 다리가 들어 있었다.

 두... 두려웠다.

 이놈들 혹시 전대미문의 연쇄 살인마들 아냐?


 "거 봐, 엄청 충격 먹었잖아?"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꽤나 담이 세군. 실신하지 않은 걸 보니."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감탄하듯 거들었다.

 "그래, 자네는 그대로 졸도 했지. 정말 간만에 좋은 구경이었어."

 "보통의 심장이라면 당연한 거야. 이 사람이 특이한 거지."

 "하긴, 이런 데서 편히 살려면 심장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킥킥."

 "아무튼, 당신. 첫 관문은 잘 통과했군."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내게 말했다.

 "도... 도대체 다... 당신들 뭐야? 나... 날 어... 어쩌려는 거야?"

 "안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짓말! 여... 여기 이렇게 시체가..."

 "조용히 하고 내 말 잘 들어. 이제 설명해 줄 테니까. 당신은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어디긴 어디야? 재활용..."


 "아냐! 여긴 지옥이야."

 "뭐?"

 "정확히는 지옥 제7구역 블록 B지. 잘 외워두라고. 네가 일할 곳이니까. 킥킥."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대... 대체 이... 이게 무슨?"

 "그래, 믿기지 않겠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지금 지옥에 있는 거야. 정확히는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지...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

 "절단된 시체들 봤지? 우리는 여기서 저걸 분리수거 하지. 흐흐."

 대답한 건 부대를 든 남자였다.

 "맞아.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거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당신도 들어봤겠지? 지옥엔 여러 가지 처형 장소들이 있다는 거. 열 지옥, 물 지옥. 기타 등등. 그거 다 사실이야. 생전에 저지른 죗값 있지? 여기서 다 치르게 되어 있어. 산사람들이야 없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 그래서?"

 "그런데 그 처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단 말이지. 반복적으로 받아야 해. 그러면 타 버린 몸뚱아리, 잘려나간 몸뚱아리는 어떡하겠어? 다시 처형하려면 다시 붙여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렇게 재활용이 필요한 거야. 이해하겠어?

 뭐, 어쨌든 그 중에서 우리가 맡은 구역은 말이야. 건물이나 배,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 것들을 부실하게 만들거나 고의 혹은 중과실로 사고를 일으켜 대량 살상한 놈들을 다루고 있지. 걔네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 알아? 사지절단 형이야. 머리와 팔다리 몸통들이 톱날로 아주 천천히 해체되는 거지. 조선 시대의 가장 끔찍한 형벌이라던 거열형도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야. 이제 알겠지? 저 자루에 든 것들이 바로 그거야. 우린 그걸 분리수거하는 거고. 다시 잘 붙이기 위해서 말이야."


 이해고 뭐고 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지옥이 존재하고, 처형도 들었던 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충격적이고 어마어마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가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다고 그러지 않았나? 뭐! 내가 여기서 일한단 말이야. 이런 끔찍한 것들과!


 "자... 잠깐! 아까 당신이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고 그랬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여기서 일하는데?"

 난 비닐 부대를 든 남자에게 물었다.

"그야, 저 녀석이 전근을 요청했으니까. 우리끼리 말이지만 여기 사실 가장 힘든 곳이거든. 사지를 절단하니 분리수거해야 할 것들이 오죽 많아? 거기다 일일이 바코드까지 찍어야 한다고. DNA 식별 코드를 찍어놓지 않으면 공장에서 조립할 때 문제가 생기니까. 완전 3D 중의 3D지. 그래서 저 녀석이 좀 더 쉬운 곳으로 보내 달라 요청한 거야.

 이를테면 블록 C-138 같은 곳. 거기는 세치 혀로 거짓과 망언을 일삼아 재물을 탐하거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처벌하고 있는데 주로 목사나 장관 같은 고위 공무원들이 많지. 혀를 집게로 잡아 뽑거나 자르는 게 그들의 처형 방식인데 고통은 여기와 다를 바 없지만 분리수거 일은 쉽지. 혀 하나만 수거하고 찍으면 되니까. 너, 거기 신청 한 거지?"

 "1순위로 지망하긴 했는데. 모르지 뭐."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옆으로 양 손을 위로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사정은 대강 알겠지? 그럼 열심히 잘해 봐."

 "이참에 나도 인사하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이니까 잘 부탁해."


 시... 싫다. 이런 곳에서 왜 내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났다.

 "왜... 왜 나야? 어째서 내가 여기에 온 거냐고? 난 단지 재활용 분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도대체 왜 내가?"

 "나도 그랬어."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당신처럼 이렇게 왔다고. 있잖아, 당신과 나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야. 이곳의 규칙이지."

 "그... 그게 대체 무슨...."

 "나는 말이야. 재개발을 이유로 멀쩡히 잘 살던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지어진 아파트에 살았었어. 용역들이 동원되고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단란한 가정들이 마구 풍비박산 난 곳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지. 그냥 내 능력, 내 권리라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용 분리를 하려다 여기에 온 거야. 그게 이유였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지. 당신도 그렇지 안 그래? 여기에 사는 당신이니까 바로 납득할 거야. 그렇지 않나?"

 "그... 그럴 수가..."

 난 다만 그렇게 말하며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유라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던 곳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곳에 세워진 아파트였으니까.

 그들의 비극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고 무심하게 나만 위하며 살아왔으니까.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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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5-17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을 잘못한 사람들이 받는 벌 무섭군요
그리고 그런 잘못한 사람뿐 아니라 그 일을 잊은 사람도 같은 죄군요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가깝게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잊지 않아야 할 텐데요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바뀌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희선